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사람

 


[책의 유혹]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사람

『하늘을 듣는다』, 윤가브리엘, 사람생각, 2010

 

어릴 적 내 ‘장래 희망’은 에이즈를 치료하는 약을 개발하는 연구자였다. 장래 희망을 물어보는 어른들에게 아나운서, 선생님, 이런 흔한 직업 이름을 대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장래 희망이라고 마음에 담게 된 건 우연히 본 신문 기사 때문이었다. 아직 세로줄로 신문이 나올 때, 깨알 같은 글씨를 쳐다보지도 않던 내가, AIDS(에이즈)라는 영문 알파벳이 들어간 제목의 기사를 읽은 건 지금 생각해봐도 기이한 일이다. 기억나는 내용은, 정체 모를 질병이 전 세계를 덮치고 있는데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는 내용 정도다. 왜 내가 그 기사에 붙들렸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후로 ‘장래 희망’을 바꿔본 적이 없다.

진로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대학을 선택했지만, 정작 대학에 입학한 후로는, 에이즈를 잊고 지냈다. 우연히 신문 기사를 읽은 기억도 없고 오다가다 얘기를 들은 기억도 없다. 어디에서 주워들었는지, 대학을 졸업할 때쯤에는 치료제가 없어서 사람들이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때는 ‘장래 희망’ 같은 말은 더 이상 설렘을 주지 않는 나이였고, 나는 ‘장래’나 ‘희망’보다는 ‘현재’나 ‘절망’에 더 마음이 붙들려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에이즈 덕분에 나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해본 적이 없는 듯도 하다.

그리고 다시 에이즈를 만난 건 ‘HIV/AIDS 인권연대 나누리+’에서다. 에이즈 인권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이는 날짜에 찾아갔다. 거기에서 윤가브리엘을 만났다. 매우 마른 체격에 피부색도 어두워서 그랬는지, 촉촉하면서도 열정적인 눈빛이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만난 이후로 ‘에이즈’는 내게 다른 단어가 되었다.

에이즈의 원인으로 알려진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를 진단하기 위해 어떤 검사가 필요한지보다는, 감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왜 선뜻 검사를 받지 못하는지, 감염 결과를 확인한 사람들이 어떤 고통을 경험하는지를 궁금해 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HIV감염인을 치료하다가 주사바늘에 찔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보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감염인들이 작은 표식 하나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외로움과 누가 찾아올까 걱정하는 불안함 사이를 오간다는 사실을 더욱 깊숙이 알게 되었다. ‘에이즈’는 이제 질병 이름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가브리엘을 만난 이후로 에이즈인권운동을 함께 하면서 더욱 많은 감염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지금은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얼마 전 『하늘을 듣는다』의 북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반갑게 인사한 사람들도 있다. 그들 모두 내게 ‘사람’을 보여준 고마운 이들이다. 인권운동이 사람의 권리를 말하면서도 사람에서 출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도 그들 덕분에 깨달았고, 인권운동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이미 그들이 열어놓은 삶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도 배웠다.

그러나 이런 배움조차도 머릿속에만 있었던 것 같다. 『하늘을 듣는다』는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려준다. 한 사람을 오롯이 담아낸 책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얼핏얼핏 들었던 이야기들도 있고 처음 듣게 되는 이야기들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람’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한 편의 르포 하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르포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녀들은 저마다의 사연 끝에 어떤 계기를 통해 현실의 억압과 모순을 깨닫고 모진 탄압에 때로는 좌절하지만 다시 힘을 내어 일어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가브리엘의 손끝에서 나온 르포 다른 사람을 보여준다. 시대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똑같이 시대를 겪어내던 사람들.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군사독재 타도’가 뭘 말하는 걸까” 궁금해 하다가도 최루탄 냄새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창문을 닫고 일해야 했고,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노랫말이 라디오에서 나오자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고들” 했던 노동자. 우연히 본 잡지의 “동성연애자 퇴폐업소 취재탐방기”를 읽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찾아 무작정 낙원상가 골목을 들어섰고, “거기가 저처럼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는 그런 곳이 맞나요.”라는 질문을 차마 못 꺼내고 가게를 나와 공중전화를 걸었던 게이.

그가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자리가 바로 『하늘을 듣는다』가 펼쳐진 자리다. 그래서 아마도 돋보기를 두 개나 써야 앞이 보여 타이핑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야 했던 가브리엘이, 뭔가에 홀린 듯 이 책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이 책을 모두에게 권한다. 개인적인 경험과 감상에 기댄 독후감이 책을 읽고 싶게 만들 만한 서평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책은 윤가브리엘이라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람’을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비평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저 권한다. 우리 모두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인권이다.

 

 

[인권오름 232호 기고]
 


 

하늘을 듣는다 - 한 에이즈인권활동가의 삶과 노래
하늘을 듣는다 - 한 에이즈인권활동가의 삶과 노래
윤 가브리엘
사람생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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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5 19:36 2010/12/2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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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초코파이 2011/01/02 16:18 고유주소 고치기 답하기

    그 글에 니 추천글 있는 거 보고 깜짝 놀랐다. ㅋㅋ
    가브리엘 씨의 이야기가 치장없이 솔직 담백하게 담겨 있어서 정말 좋더군.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 좋을텐데...
    (난 이미 한 권 선물했다. ^^)

    • 미류 2011/01/07 00:57 고유주소 고치기

      추천글은 아니고, 예전에 가브리엘 후원의 밤 할 때 썼던 글이야. 선물까지 했다니 훌륭하군. ㅎ 책 선물은 사무실 올 때 챙겨가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