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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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까지도 한 해를 돌아보면서 새해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요 몇 년 기억이 없다. 어차피 계획일 뿐인 계획, 심드렁했는데 그나마라도 있어서 내게도 역사랄 게 쌓였던 것 같다. 작년은 뭐지? 뭐 그건 너무나 분명한데. 올해는 뭐지? 계획일 뿐인 계획이라도 세우는 게 나을까. 올해 나의 과제는 **이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열두시부터 한시까지, 여섯시부터 일곱시까지는 일하지 않으려고 한다. 시간에 쫓겨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기 어렵다. 그러니 쫓아오지 못하도록, 저 혼자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야지. 작은 여울목이 생기겠지. 그런데 첫날인 오늘, 오전 회의가 길어져 밥을 먹고 나니 벌써 한 시가 넘었더라는. 힝.

# 발표자의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도 참가자들의 적극적인 토론 또는 의견들이 오가는 게, 근래에 참여했던 어떤 토론회나 발표회 세미나보다 활기롭고 윤택했다. 앉아있는 동안 많은 걸 배우는 느낌-그만큼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만들고 귀기울이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몰락'보다, '낙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쨌든,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급훈 "정색하지 말기"는 기억해두려고 메모를 했다. 정색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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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화에 내가 취해 말을 잃고 나면 길 잃은 말들이 쏟아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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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맛난 저녁도 먹고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나눴다. 앤트러사이트의 널찍한 소파는 독특한 분위기로 이야기들을 더욱 즐겁게 만들어줬다. 싸운다고 하니 축하도 받았다. 그게 그런 일이려나, 물어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자리. 헤어지고 나서, 멍게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해삼을 먹으러 간 건데, 조조영화 보자고 시작한 얘기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그때 내가 왜 그런 목소리와 표정을 만들어내는 마음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느 순간 그것에 대한 자의식이 사라졌다. 나도 걷잡을 수 없는 순간. 어쨌든 분명해진 건, 나를 이해시키지도 못하고 있을 뿐더러 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것은 의심했지만 기대를 놓지 않았던 건데 실이 툭 끊어졌고 노량진시장 바닥으로 떨어진 맥주병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바다 속으로 지금도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안식주의 마지막이 거대한 이해불능이라는 게 절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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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지국가 논쟁 관련한 책을 하나 읽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주거 불안이 매우 큰 화제인데도 복지국가의 비전 안에 대부분 주거-복지를 담지 못하는/않는 이유는 뭘까. / 한 보수주의자는 복지에 대해서, 타인의 생산에 기대어 사는 것이 떳떳하다고 가르치는 게 잘하는 거냐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어제 강의를 떠올리며, 우리가 모두 타인의 생산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게 복지국가라면 얼마나 훌륭한 것이냐고 대답하고 싶었다.

# <인권의 정치사상>을 읽으며 지나쳐온 세 가지 생각. 아무래도 제대로 이해하려면 내 언어로 정리해두고 실제로 부딪칠 때 다시 펼쳐봐야 할 텐데 막상 정리하려니 괜히 시간이 아깝네. 사상이든 철학이든 좀더 현실과 가깝게 이야기하는 건 어쩔 수 없이 활동가의 몫인 건지, 하지만 아무래도 책을 쓴 이유까지 궁금해지는 이 글들을 계속 읽어야 하나. 끝까지 책을 붙들고 있는 게 바보같다는 생각을 덜게 됐군. <권리의 문법>에서 보이는 침착한 열정과는 다른 결로 인권에 대한 고민을 북돋았던 책. 어쨌든 '음미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누군가 말한 철학할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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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 한 파마를 보고 대뜸 이런다. "그게 뭐니? 원래가 더 낫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거나 웃거나 멋지다고 잘 어울린다고 말해줘서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말이 반가웠다. 문득 대학 졸업 사진 찍을 때 생각이 났다. 졸업사진이라고 친구들이 내 얼굴을 화장시켰다. 화장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화장을 했더니 다들 한 두 마디 던진다. 사진을 다 찍고 동아리방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만난 한 후배가, "화장 안 한 게 더 나아요."라고 말해줬다. 그게 반가웠던 기억.

# <책 읽어주는 남자>. 재판 밖의 재판, 재판 속의 재판. 한나가 법정에서 받은 재판은 문자로 된 남성의 재판이라면, 소설에서 정말 중요한 재판은, 미하엘이 재판정 밖에서 받는 스스로에 대한 재판. 그것은 감정과 육체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여성의 재판, 그래서 '이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재판.

# 문학과 인권 강좌가 끝났다. 2탄이 시작되면 낼름 신청하고 싶은데, 다음주 월요일 이후로도 그런 생각이 들까 벌써부터 걱정이다. / 선생님은, 소설에서 주요한 열쇠말인 육체/몸에 대해서 그것의 유한성으로부터 상호의존과 개체화/실존이 동시에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병원을 생각해보면, 육체의 유한성에 대한 무한도전의 결과로 의존도 실존도 불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겠군.

.23.

#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한 아주머니가 월세를 50만 원 올려달라는 집주인과 오늘도 싸워야 한다며 한숨을 쉰다. 집주인이라고는 했지만 가게 임대료 문제로 며칠째 실갱이를 하나보다. 못 올려준다고 싸우는 그녀를 응원하고 싶었다. 바로 옆에서는 집 두 채에 일곱 세대에 세를 주고 있는 아주머니가 둘 다 마침 재개발구역이 됐는데 사업이 진척이 없다며 한숨을 쉰다. 자신이 들어가 살려는 집이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 붙잡혀있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도 집은 재산이 아니라 거주인 건 아닐까.

# 나의 열등감과 우등감은 모두 활동가라는 정체성에서 나온다, 는 얘기를 써보려고 했는데 '우등감'이라는 말은 없었다. 우월감이더군. 우월감은 아닌데, 그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 날씨가 부쩍 따뜻해졌다. 즐거움도 잠시, 나는 다가올 꽃샘추위를 걱정했다. 난 왜이렇게 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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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부담스럽고, 마음이 아주 열리지는 않는 약속이었는데, 오랜만에 얼굴 마주하고 얘기 나누다보니 어느새 마음도 몸도 열려, 슬쩍 팔짱을 끼며 헤어질 때는 아쉬워 꼬옥 안아주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 평범한 감정이 특별한 관계에 놓여있을 뿐이라는 걸 안다.

#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지만, 유난히 반갑게 나를 쳐다보는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걸 두고 마주앉은 친구는 내게 사람에 관심없는 사람이라고 한 마디 했다. 그러게, 나는 내가 도대체 무엇에 관심이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설레는 사람일까,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없다. 하지만 늦은 밤 한 시간 정도 커피를 마시며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말이 없다고 하기에는 무안할 정도의 수다를 떨었고(물론 내 기준이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는 얘기를 듣고 반가웠다. 그러고 보면 나도 5년이 더 지나 겨우 그녀를 만나게 됐으니.

# 12월 말의 혹한을 거치며 안쓰리움이 죽었다. 그리고 그보다 일찍, 아마도 찬 날씨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죽어버린 듯한 스노우화이트박. 다시 싹이 나기를 기다려보다가 결국 가게에 들고 가 다른 식물을 심기로 했다. 꼭 한 번 키워보고 싶었던 벵갈고무나무를 심었다. 화분을 들고 가게에 들어서니, "식물이 어디 아파요?"라고 물었다. "아니요. 제가 죽여서 다른 걸 심으려고요." 순간 섬뜩했다. '죽이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사용할 수 있다니. 식물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걸 아는 만큼 충분히 그걸 살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럼없는 '죽임'을 경계해야겠다. 하지만 참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잎이 시들거리면, 물을 달라는 건지, 아파서 좀 쉬고 싶다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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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결사투쟁'이 싫다"로 시작되는 글을 보내게 될 일은 없겠지. 게다가 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일은 아직까지 내게 '꾸역꾸역' 해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조금 욕심도 생기고.

# 그녀는 늘 나를 내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 같다. 부담스럽기도 한데 고맙기도 하다. 나는 아직 그만큼 영민하거나 세심하지 못한 것 같다.

.20.

난 참 말이 없는 사람이다. 왜 그럴까. 할 말이 없나, 말할 줄 모르나. 그건 그렇다 치고, 말이 많은 사람이 말이 없어질 때는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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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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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철도가 눈 깜짝할 사이에 공항으로 엄마를 데려갔다. 나도 따라서 제주도나 갈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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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추스리는 일이 쉽지는 않아, 자꾸 붙들리기도 하고, 어쨌든 연관된 무언가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마음이 가라앉아버려 걱정이다. 그러면 모든 게 시큰둥해져 자신이 없다.

.16.

# 글을 쓰고 출력해서 읽어보지 않은 채 보내본 건 처음이다. 모니터로는 도저히 글을 돌아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냥 보냈다. 글을 이렇게 내보내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쓸 수도, 출력하러 사무실을 갈 수도, 글을 못 보냈겠다고 얘기할 수도, 없었다. 비겁했다. 그 와중에 원고료가 있는 글이라는 의식이 잠깐 스쳤다는 사실도 부끄러웠다.

# 일주일에 한 번쯤은, 회의 뒷풀이가 아닌 오붓한 술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면 더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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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시간이 많다고,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유리하다고. 그리 타당하지 않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이 솔깃했다. 언젠가 이뤄질 일이라면, 시간이 많다고, 시간이 갈수록, 되어갈 테니, 유리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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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뉴타운에 미분양 아파트들이 여전히 많다는 뉴스. 중대형 평형 위주의 공급이 문제라는 지적은 맞다. 그런데 중대형의 빈집들에 자리를 내주느라 쫓겨난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더이상 얘기하지 않는다. 중대형이 문제가 아니라 원주민들이 입주할 수 없는 주택을 건설한 것이 문제다. 쫓겨난 사람들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

.13.

수도꼭지를 바꿔단다고 거의 하루가 갔다. 고마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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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까지 여자친구를 불러서, 일곱 명이 모였다. 가족인 듯 아닌 듯 모인 사람들. 밥상이 좁았지만 밥은 맛있게 먹었다. 밥그릇을 사야겠다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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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살던 사람이 부동산에 크게 항의한 듯. 전해듣는 게 불편하다 못해 불쾌하기도. 어쨌든 분명한 건, 살고 있던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집주인의 문제라는 건데. 대충 짐 우겨넣고 나니 하루가 갔고, 별로 몸을 쓰지는 않은 것 같은데 온몸이 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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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일정 때문에 강좌를 못 듣고, 안 들어도 좋을 말과 이야기들을 들은 날. 함께 하는 그녀들이 있어 조심스럽게 힘을 내본다.

.9.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 느낌으로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조건이 비슷한 것도, 성격이 비슷한 것도 있겠지. 어쨌든 서로 너무 맞장구칠 게 많았던 만남. 위로는 아주 특별한 게 아니다. 끄덕이는 몸짓이든 맞장구치며 나오는 탄성이든, 그렇게 작은 데서 시작되는 것. 그래서 다음을 기대하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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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회의를 마치고 이사갈 집에 줄자를 들고 갔는데 살고 있는 분이 집주인한테 해야 할 이야기를 내게 쏟아낸다. 아무리 들어도 하소연이 아니라 화풀이로밖에 들리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럴 때는 그냥 맥주나 한 잔 마시고 일찍 잘 걸, 왜 또 그리 어렵고 힘든 얘기를 시작했을까.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걸 내게 이해를 구하면 안되지. 너는 "아무리 화가 나도"라고 쉽게 말하지만 나도 상상할 수 없었던, 당연히 너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화'가 있다는 걸 알 때도 되지 않았을까. 그 불에 문드러지며 타들어가는 나를 봤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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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영 강사가 특유의 말투로 오래동안 나오지 않은 걸 다그치겠거니 생각하며 갔는데 휴가인지 병가인지 나오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욕쟁이 할머니라는 소리를 들음직도 한 사람인데, 은근 고유의 매력이 있다. 안 보여서 조금 아쉬웠다.

# 너무 느닷없이 전화를 했나. 마침 서울에 온다니 더 반가워지는 마음. 정작 만나서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한 얘기 별로 나누지도 못했지만, 얼굴 본 것만으로도 괜히 즐거워졌다. 학생인권조례 얘기로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지만. 토론회를 앞두고 갑자기 무거워지는 어깨를 추스려올릴 수 없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보다 몇 배는 더 무거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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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버릴 것들을 버리느라 한차례 정리했는데 의외로 별로 쌓여있는 게 없었다. 1년의 무게. 한 집에서 십년을 산다는 건 어떤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누구 말마따나 세입자들은 시간의 무게로 역사를 남길 수 없는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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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공항이 5호선이라는 이유로 바로 사무실로 갔다. 여기저기 쌓여있던 문서들을 나름 정리해 버릴 것은 버리고 파쇄할 것은 파쇄했다. 한 시간은 족히 파쇄기에 종이를 밀어넣느라 보낸 것 같다. 책상이 가벼워진 만큼 마음도 가벼워진다. 어디에서든, 버릴 것은 버리는 것이 좋다. (김포공항으로 인천공항전철이 뚫려있는 걸 새삼 발견. 홍대입구역까지 한 번 멈추고 가는 듯한데 KTX처럼 이것도 앞으로 이용하게 되겠구나 생각하니 씁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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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빈곤. 친구가 재밌게 읽었다길래 낼름 산 책인데, 바우만의 다른 책들보다 감흥이 덜하다. 옮긴이는 한 늙은 철학자가 전하는 지혜라는데, 한 젊은 독자는 그걸 전혀 읽어내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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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는 다 우리처럼 명절을 보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란다. 고모 말처럼 엄마가 참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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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만 먹고 나면 졸리다. 일하기 싫어서 자는 척하다가 잠들었다.

.1.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무겁지만 들고 내려오길 잘했다. 재밌게 읽었다. 주거에 대한 책이라기보다, 가족과 프라이버시에 대한 책으로 읽는 것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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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5 14:41 2011/02/05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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