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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비망록

[아침햇발] 아프리카 비망록 / 박용현

한겨레

 

4월28일: 아프리카 취재여행 사흘째. 첫 방문국인 가나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아이들뿐이다. 첫날 보았던, 단돈 10달러에 팔려가 볼타 호수에서 노예처럼 물일을 하다 구출된 아이들의 잔상 탓일까. 거리에는 조잡한 물건을 팔러 자동차로 달려드는 아이들 천지다. 이렇게 물건팔이로, 카카오 농장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의 규모조차 알 수 없단다. 가난 탓이라고 한다. 가난은 누구 탓인가. 국제기구에서 어린이 구출 사업을 하고 있는 에릭은 식탁의 콜라 잔을 집으며 말했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친 아프리카 사람들은 누군가 와서 뭘 해주기를 바라는 습성이 생겼죠. 그러나 콜라 한 잔을 주면 결국엔 다섯 잔을 빼앗아가는 게 외부인들이지요.” 식민과 독재의 잔해 속에서 동포의 고통에 아파하는 한 아프리카인과 마주앉은 저녁, 가슴이 막혀온 건 열대야 탓인가.

4월29일: 노예 무역의 본거지였던 케이프 코스트를 둘러보고 수도 아크라로 달리는 차에서 어둠을 맞았다. 지평선 위로 초승달이 낮게 떴다. 아프리카의 달빛은 어찌 이리 교교한지.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 야자수는 그제 난민캠프에서 본 레게풍 머리의 아프리카 여성을 닮았다. 이웃나라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휩쓴 내전은 수백만명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아 나라 안팎으로 유랑하게 했다. 이제 국제사회의 화두는 이들 난민의 귀환을 돕는 일이다. 바야흐로 평화는 왔다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새로 일궈야 할 일손이 없고, 일손이 있다 한들 그들에겐 맨손뿐이니 ….

5월2일: 시에라리온에서 이튿날. 수도 프리타운의 푹푹 찌는 사무실에서 만난 젊은 변호사 멜런은 내전 때 외국으로 피신했다가 귀환했다.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대학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다니, 많은 난민들이 원하듯 잘사는 나라에 눌러앉을 법도 하건만, 외국에서 기금을 모아 고국 땅에 ‘공익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동포들을 돕고 싶어 왔다”는 그의 미소는 유달리 하?R다.

5월3일: 내전의 잔혹성을 증언하는 ‘팔다리 잘린 사람들의 마을’을 방문한 아침, 현기증과 메스꺼움이 기습을 했다. 사흘째 이곳 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마음이 지쳐갈 즈음, 몸에도 일사병이 찾아든 것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에디와 카트린은 급히 그늘을 찾아 쉬게 하고, 의료진에 연락하고, 유엔 차량을 찾았다. 응급차는 길이 막히자 비좁은 빈민가 골목을 내달렸는데,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고 물건을 나르는 맨발의 아이들이 차에 치일 듯 위태위태해 현기증이 더했다. 저녁에 호텔로 찾아온 에디는 “하루종일 네 걱정만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 머리를 짚어보던 그들의 검은 손에서 기분 좋은 체온이 느껴졌다.

후기: 달은 천 개의 강에 비친다더니, 서울의 아파트촌에도 달빛이 교교하다. 어느덧 한껏 부푼 저 달은, 팔려간 아이들이 그물을 걷는 볼타 호수에도, 가나의 카카오 농장에도,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에도, 프리타운의 악취나는 빈민가에도, 라이베리아 난민들의 캠프에도 비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가나산 초콜릿을 먹고 있고, 누군가가 손에 낀 시에라리온산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아이의 눈물처럼 달빛에 반짝 빛날 것이다.

달이 비추는 어느 곳엔들 모순이 없으랴. 이 땅에서도 대추리 노인들은 평생 일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어린이날을 맞은 결식아동들은 여전히 쓸쓸한 것을. 모순에 고통받고 그에 맞서 싸움으로써, 우리는 연대해야 할 이웃인 것을. 아프리카도 우리가 연대의 손길을 내밀기에 결코 먼 땅이 아니었다.

박용현 24시팀 기자 piao@hani.co.kr

 

기사등록 : 2006-05-16 오후 06:3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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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해 투쟁한다는 것

자본주의에 대해 투쟁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든다. 전문가주의를 경계하면서도... 투쟁을 위해 사람의 삶을 수단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단한번도 파업 때문에 일어난, 혹은 일어날 생계문제가 어떤 것인지 겪어본 적이 없는, 혹은 단한번도 비굴하게 남에게 고용되어본 적이 없는 학생출신 전업활동가들(그러나 본인들은 틀림없이 가난한)이 파업을 접은 조합원들의 결정을 개량적이라고 그때 비난하는 것을 보고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 노동자들이 혁명을 망친것처럼 비통해 했다. 그들은 정말로 파업이 좀더 오래 가면 그들이 바라마지 않는 혁명의 불꽃이 1900년대 어느날 그랬듯이 똑같이 솟아오르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착각이야말로 요즘 우리 좌파에 대중적 힘이 붙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나는 민주노총 지도부처럼 개량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적 노무관리 때문에 분열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방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좌파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선명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알게될수록 여러 중첩된 모순에 혼란을 느꼈고 그때 누군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단호하게 설명해주자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속에서만 일어난 선명함이 실제 민중에게 잔혹한 결과를 가져온 적은 없는가. 식당아줌마들만을 정리해고할 것을 회사와 합의해주었던, 최초의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의 주역 김광식 위원장은 자신의 결정이 비난받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비교적 좌파적이었고 회사와의 협상에서 노동자(정규직 남성노동자)의 이익을 최대한 충실히 대변한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의사결정은 울산지역 좌파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때 이후 남한사회 좌파가 앙상한 선명함만을 부여잡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는데도 이때까지 솔직한 자기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좌파 안에서도 다기한 모순과 그에 대한 민중적 폭발만이 그나마 좌파를 지탱하고 나아가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와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과 처단(?!)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좌파의 목숨은 비난으로 연명되고 있는 듯 하여 안타깝다. 스스로의 확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상황을, 손쉬운 비난으로 채우려 하고 있다. 이 모순덩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기'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활동가로 살면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면서 생계를 포기하고 방한칸도 포기하고 불매해야 할 상품도 많고 분리수거도 철저히 지문날인도 하지 말아야 하고 혼인신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 모든 정치적 올바름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다른 이를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는가? 누가 그런 자격을 주었는가? 비난하고 비판할 인간들과 사건들이 넘쳐나는 사회인 것은 맞지만, 때로 우리는 우리의 동지들을 함부로 비난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가되, 그리고 건설적으로 비판하되,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과 신뢰는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입장| 공장의사 일기 2005년 03월 24일 01:08 * 이 글은 뻐꾸기님의 [흉통] 에 관련된 글입니다. 그 날 우리 과 세미나가 끝나고 한 전공의 선생이 예정에 없던 사례발표를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산업의학적인 토론을 목적으로 하는 사례발표는 아니었다. 내가 이해한 내용은 이랬다. '한 남자가 최근에 지속적인 두통을 이유로 직장에서 당분간 집에서 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는 입사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두통이 지속되었고 의학적인 진단명은 'organic brain syndrome'이 의심되었다. 우리 병원 신경외과에서 정신과 진료를 권유받았고 정신과에서는 MMPI라는 검사를 하라고 했는데 그 비용이 이십만원쯤 한다. 회사에서는 이 사람이 건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려고 한다. 사실은 이 사람이 얼마전에 있었던 사내 하청 파업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사내하청 노조나 이 노동자에겐 이렇게 비싼 검사를 할 능력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과연 MMPI를 꼭 해야만 하는가? 이 사람은 개인 정신과의원에서 그동안 투약을 해 왔는데 그 의사의 소견서는 회사에 통하지 않는다. MMPI를 하지 않고 산업의학과에서 그냥 도움을 줄 수 없는가? " 그 날 나는 심하게 화를 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산업의학과 의사가 환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그가 건강하다고 소견서를 쓰고 이를 복직투쟁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낸 이유는 그가 목적만 옳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 대해서 산업의학과 의사가 해야 할 일은 이 노동자가 자본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건강하냐 아니냐를 입증하는 것 보다 그가 하는 작업의 유해인자(소음, 단순반복작업, 교대근무, 유기용제?)가 그의 건강(기질성 뇌 증후군)을 악화시킬 것인가 혹은 그가 작업을 수행하는데 결정적인 어려움이 있는 해결불가능한 건강문제가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그의 고용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그는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관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전공의이므로 공부를 좀 더 해야 하는 사람인데 투쟁하느라고 바빠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워서 자꾸 야단을 치게 된다. 나는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건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다른 투쟁의 수단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건강문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투쟁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근골격계 투쟁을 둘러싸고 어떤 연구소는 개량적이라는 둥 보다 왼쪽에 서 있는 다른 연구소가 좌편향적 투쟁을 무리하게 밀어붙힌 결과 현장 조직이 깨졌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을 간간히 듣기는 한다. 늘 생활에 급급한 나로서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판단하기 어렵기도 하고 관심이 가지 않는게 사실이다. 내 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한 노동자가 그냥 '손목 통증'이라는 진단명으로 산재요양을 받게 되면 부정확한 진단에 의해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렵고 현장에 복귀하는데 난관을 겪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드문 일도 아니다. 산업의학계의 일부 의사들은 진단명에 그냥 '손목 통증'이렇게 써서 산재요양신청서를 내보내기도 한다. 이학적 검사상 특이 소견이 없고 다른 임상검사에서 뚜렷하게 이상소견이 없는 경우에 굳이 전문적인 용어로 쓴다면 '손목의 비특이적 작업관련 근골격계 질환'이라고 쓸 수는 있다. 손목의 비특이적 작업관련 질환의 예후는 상당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장기간 요양을 할 만한 상태는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현재까지 알려진 지식이고 이는 내 경험과도 일치한다. 또 하나 생각할 점은 산재신청서에 쓰인 진단명은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치료의 범위를 결정하므로 정확하게 쓰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소위 전문가주의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동자 건강을 결정하는 거시적인 요인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오면 노동자 건강문제가 모두 해결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우리 앞에 '완성된 다른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 래디칼하다는 것은 그 과정에 있어서도 올바른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사실 '가슴이 먼저 움직인 일에 대해서 냉정하게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음이 따뜻한 우리 과 전공의 선생이 '전문가적인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다. 좋은 말로 내 의견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고 그가 전문의를 따고 사회에 나가서 하려는 일에 내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산업의학 전문의가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는 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은 수련기간동안 그 최소한의 기준에 합격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겠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에 함께 가슴아파하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 정으로 내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사내하청 노동자를 탄압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건강을 '수단시'하는 현대자본의 극악함인 것이다. 사실 지난 몇년동안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에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임상검사도 하지 않고 산재요양신청서에 그냥 '손목 통증'이라는 진단명을 쓰는 것은 할 수가 없다. 환자의 말만 듣고 객관적인 자료없이 소견서를 쓰는 일도 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분노한다는 것이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practice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얼마전 사측에서 가짜 환자를 작업관련 근골격계 질환으로 위장하여 진료를 받게 한 뒤 의사들이 직업병 진단을 남용한다고 선전했던 사례에서 보듯 결국 근거가 불충분한 practice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내 입장을 정리해 둔다. 일단 정리를 해 두고 앞으로 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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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의 짧은 생각

* 이 문서의 주소:http://blog.jinbo.net/mini/?pid=85 성평등 교육을 받으며| 새로운 세계 2005년 01월 23일 19:18 어제는 지구당에서 성평등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교육에 참여하셨던 분들도 그러셨겠지만 저 자신에게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집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교회에서, 테레비에서, 직장에서 성평등 교육이란 거 받아 보신 일 있나요? 평등. 나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않는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짧은 인생, 죽음의 순간에 돌아본 나의 과거가 성을 미끼로, 돈을 미끼로, 권력을 미끼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억압 했던 것으로 가득 찼다면 눈을 감는 순간 삶이 얼마나 서글프겠습니까? 평등. 꿈이 같다는 말이 아닐까요? 내가 다른 이들을 존중하며, 다른 이들로부터 내가 존중 받고 싶다는... 내가 존중 받으려면 당연히 다른 이들을 존중해야 하겠죠. 내가 굶주리지 않길 원한다면 다른 이들의 굶주림의 문제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고, 내가 폭력이 방치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이들이 폭행 당할 때 나서야 할 것이고, 내가 차별 받지 않고 싶다면 다른 이들이 차별 받지 않도록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자식만 귀하다고 좋은 것 먹이고, 좋은 대학 보내는데만 마음이 팔려 있다면, 행여 그 아이가 거리에서 사고로 피를 흘리고 있다고 해서 누구 하나 거들떠 보겠습니까? ‘내가 알게 뭐야. 내 새끼도 아닌데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내가 노동자로써 자본가들에게 차별 받는 것에 대해서만 투쟁을 하면서 다른 노동자들과 여성들을 차별한다면 시간이 지난 뒤 그들이 아무리 권력과 자본에 대항해 싸운다고 해도 사람들은 비아냥 거릴 것입니다. ‘배부른 것들이 또 저 지랄이야. 저거는 다른 노동자들에 대해서 무관심 하더니…’ 내가 여성으로써 평등명절과 남녀평등을 주장할 줄만 알았지 굶주리는 자식을 멍하니 바라 보고만 있어야 하는 어미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평등은 반쪽짜리 평등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희는 불평등 하지만 명절을 지낼 수나 있잖아. 우리 아이는 이렇게 먹지 못해 눈빛이 희미해져 가는데…’ 두더지 게임 아시죠? 망치를 들고 올라오는 두더지 머리를 때려서 집어 넣는… 지배하는 이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주장하며 머리를 쳐드는 것들을 하나씩 재빠르게 때려 잡아서 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하지만 그 두더지들이 모두 한꺼번에 머리를 쳐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리 힘이 세고 손이 빠른 사람도 그 두더지들을 다시 집어 넣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 아닐까요? 나에게 다가오는 차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는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나설 때 우리 모두는 평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평등’이라는 꿈을 향해 함께 일어선 그 힘을 아무도 막지 못할테니깐요. 그래서 우리가 ‘연대’가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일 거구요. ^^ (자기가 좀 안다고 으시대며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이 제일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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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하여...

마리신의 블로그에서 퍼왔다. 현상적 세계의 총체성을 드러내주는 계몽은, 우리가 먼저 서로 대화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때만 주어진다. 모든 사회 운동은 전체 고통의 부분적 관점만 제공한다. 홀로그램의 파편처럼, 각각은 특정 관점에서 비롯된 굴절된 전체의 모습만을 담고 있다. 한 개인은 이 고통을 보고 그것이 노동자 착취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두번째 사람은 그것을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로 본다. 그리고 세번째 사람은 그것을 다른 인류를 노예로 삼고 대량 학살하는 것으로 본다. 이 가운데 누구도 잘못 본 것이 아니다. 각각은 전체 억압의 특정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측면을 지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한 방에 모여서 각자의 전망을 공유하게 되면, 각자 총체성에 빛을 비춰줄 자신의 ‘촛불’을 들게 되면, 그들은 실천 행위 속에서 서로 의존적인 전체에 대한 다른 사람의 공통 작업을 보게 된다. 하나로 뭉칠 때만, 그들의 서로 다른 지각 영역들이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다. 함께 그들은 전체의 지도를 그릴 수 있고 그럼으로써 권력의 양식들, 공통의 저항 전통, 자신들의 이념적 통일을 지각할 수 있게 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여성들의 대상화가 노동자의 대상화와 같다는 걸 보게 된다.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노동자들의 굴욕과 불명예가 동성애자 폄하와 같다는 걸 보게 된다. 유대인들과 유색인들은 동물을 노예처럼 다루고 폭행하고 고통을 주는 학대가 바로 자신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의 논리적 지평이자 전형적인 실습 행위임을 보게 된다. 핵심은, 이들 각자 나름의 관점들을 결합하는 것만이 서로 흩어진 저항 세력들이 자신들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와 정신적 도전 과제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John Sanbonmatsu, The Postmodern Prince, (New York: Monthly Review Press, 2004), pp. 201-202.


"남의 고통을 볼 수 있는 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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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블로그를 만들다

다미는 블로그를 만들 생각이 별로 없었다. "나는 할말 없어"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 자기 글을 읽고 평가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틀간 인터넷을 흘러 흘러 여러 블로거들을 '읽으면서' 오랫만에 소통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솟았다. 망설이면서도 댓글을 달고 뿌듯해 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기가 찼지만, 다미는 사실 무척 수다스러운 인간이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오는 유형의 인간이었을 뿐더러 때로는 그 유형을 넘어섰다. 숨이 차도 말하고 졸면서도 말하고 자기 말이 중간에 잘릴까봐 조급해하면서 말하고 하고싶은 말을 까먹을까봐 다른 사람 말에 끼여들면서 말하고, 마침내 자신도 "더이상 할말이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대사를 읊어야 홀가분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결국 말이 생각을 압도했다. 말하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말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미는 자신의 설익은 생각이 공중에 뿌려지는 사태를 보고서야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다미는 그녀/그에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몸의 어딘가가 단단히 고장이 나 버렸다. 그 지경까지 오게 된 데에 결정적 사건이 없을 수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미의 몸이 워낙 얇아졌다는 데 있었다. 다미에겐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쿠숀도 두께도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말을 할때마다 다미의 몸이 조금씩 닳아 없어졌다. 처음에는 시원함을 느꼈다. 어깨와 목에 들러붙어 있던 더께가 벗겨나갔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피부의 표피층이 약간씩 닳아 없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자신의 손바닥이나 무르팍의 피부가 무언가에 쓸려 나간 걸 발견했다. "내가 자는 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하면서도 다미는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진피가 닳기 시작했다. 피부에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생각에는 뜸들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미처 뜸이 들기도 전에 피부의 구멍에서 슉슉 김이 새나갔다. 그렇게 새나간 생각들은 하나둘, 서너댓, 나중엔 수없이 머리 주변에서 앵앵대기 시작했다. 처음에 다미는 수습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갈수록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중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도 종종 까먹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제대로 요리할 수 없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심각한 타격에 한동안 머리를 끄덕거릴 수조차 없었다. 몇달이 지나고 요즘에 들어서야 다미는 파리떼처럼 맴도는 말들을 거두어 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인지 아닌지조차 알수 없는 그놈들은 대개 흐물흐물해졌으면서도 악다구니 같은 욕망의 선만은 성성했다. 다미는 놈들을 북북 빨고 말려서 머릿속에 개켜 넣었다. 잘 개켜 넣은 것도 있고 대충 개켜 넣은 것도 있다. 아무래도 나중에 한번씩 더 빨아줄 필요가 있다. 영 해독이 안돼 불가해한 놈은 "정말 재활용이 안 될까?" 아쉬워하며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누군가 자기 글을 읽고 평가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매사를 평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미가 매사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아주 꼬마일 적부터 시달렸던 비이성적인 폭력 속에서 제 정신을 차리려면 이성적인 합리성만이 구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미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가 구원할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몽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계몽이야말로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공장처럼 돌리고 그다지도 많은 말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건 끝없는 일이었다. 하나를 만들어내면 그걸 지지하기 위해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했고 그게 문제라도 생기면 또다른 것을 생산해내야 했다. 인간의 사회성은 생산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지만 무엇을 위한 생산인지를 잊게 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다미의 상황에선 다른 이의 구원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구원마저 멀어져 갔다. 그렇다. 지금 같은 세상에 누가 계몽을 말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계몽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구원받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구원이란 것 자체가 쓸모없는 욕망인가? 다미는 아직 답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다미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대로 살면 자신의 구원은 더욱 멀어져 남극으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 공장은 가끔씩 멈춰줘야 된다. 그래서 다미는 달리고 있는 자신의 다리를 멈추었다. 말도 멈추었다(그러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블로그를 만들다니, 실패한 프로젝트를 보면서도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쏟아낼 생각인가? 이번엔 아예 정수리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버릴지도 모른다. 다미는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좀더 익혀야 한다. 스스로와 다른 이의 말을 듣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 어째서 조용히 혼자 공책에 써내려 가지 않는가? ... 다미는 그저 외로운 것이다. 왜 서로가 이다지도 미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외로움으로부터 구원받고 싶다. 글을 쓸때 계몽의 함정을 피해가려고 계속 고민하면 괜챦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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