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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대해 투쟁한다는 것

자본주의에 대해 투쟁한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든다. 전문가주의를 경계하면서도... 투쟁을 위해 사람의 삶을 수단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단한번도 파업 때문에 일어난, 혹은 일어날 생계문제가 어떤 것인지 겪어본 적이 없는, 혹은 단한번도 비굴하게 남에게 고용되어본 적이 없는 학생출신 전업활동가들(그러나 본인들은 틀림없이 가난한)이 파업을 접은 조합원들의 결정을 개량적이라고 그때 비난하는 것을 보고 고민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들은 그 노동자들이 혁명을 망친것처럼 비통해 했다. 그들은 정말로 파업이 좀더 오래 가면 그들이 바라마지 않는 혁명의 불꽃이 1900년대 어느날 그랬듯이 똑같이 솟아오르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착각이야말로 요즘 우리 좌파에 대중적 힘이 붙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나는 민주노총 지도부처럼 개량주의자들이나 신자유주의적 노무관리 때문에 분열된 노동자들의 모습을 방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좌파에 마음이 끌린 이유는 선명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알게될수록 여러 중첩된 모순에 혼란을 느꼈고 그때 누군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고 단호하게 설명해주자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머리속에서만 일어난 선명함이 실제 민중에게 잔혹한 결과를 가져온 적은 없는가. 식당아줌마들만을 정리해고할 것을 회사와 합의해주었던, 최초의 대규모 정리해고 사태의 주역 김광식 위원장은 자신의 결정이 비난받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비교적 좌파적이었고 회사와의 협상에서 노동자(정규직 남성노동자)의 이익을 최대한 충실히 대변한다고 스스로 믿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시 의사결정은 울산지역 좌파 모두의 암묵적인 합의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그때 이후 남한사회 좌파가 앙상한 선명함만을 부여잡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졌는데도 이때까지 솔직한 자기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좌파 안에서도 다기한 모순과 그에 대한 민중적 폭발만이 그나마 좌파를 지탱하고 나아가게 하고 있음을, 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분노와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과 처단(?!)에서 볼 수 있다. 다만 오늘날 좌파의 목숨은 비난으로 연명되고 있는 듯 하여 안타깝다. 스스로의 확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부재한 상황을, 손쉬운 비난으로 채우려 하고 있다. 이 모순덩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기'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 활동가로 살면서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하면서 생계를 포기하고 방한칸도 포기하고 불매해야 할 상품도 많고 분리수거도 철저히 지문날인도 하지 말아야 하고 혼인신고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하면서 이 모든 정치적 올바름을 지켜내지 못했다고 다른 이를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는가? 누가 그런 자격을 주었는가? 비난하고 비판할 인간들과 사건들이 넘쳐나는 사회인 것은 맞지만, 때로 우리는 우리의 동지들을 함부로 비난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가되, 그리고 건설적으로 비판하되,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과 신뢰는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나의 입장| 공장의사 일기 2005년 03월 24일 01:08 * 이 글은 뻐꾸기님의 [흉통] 에 관련된 글입니다. 그 날 우리 과 세미나가 끝나고 한 전공의 선생이 예정에 없던 사례발표를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산업의학적인 토론을 목적으로 하는 사례발표는 아니었다. 내가 이해한 내용은 이랬다. '한 남자가 최근에 지속적인 두통을 이유로 직장에서 당분간 집에서 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 는 입사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두통이 지속되었고 의학적인 진단명은 'organic brain syndrome'이 의심되었다. 우리 병원 신경외과에서 정신과 진료를 권유받았고 정신과에서는 MMPI라는 검사를 하라고 했는데 그 비용이 이십만원쯤 한다. 회사에서는 이 사람이 건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고용상의 불이익을 주려고 한다. 사실은 이 사람이 얼마전에 있었던 사내 하청 파업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사내하청 노조나 이 노동자에겐 이렇게 비싼 검사를 할 능력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과연 MMPI를 꼭 해야만 하는가? 이 사람은 개인 정신과의원에서 그동안 투약을 해 왔는데 그 의사의 소견서는 회사에 통하지 않는다. MMPI를 하지 않고 산업의학과에서 그냥 도움을 줄 수 없는가? " 그 날 나는 심하게 화를 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산업의학과 의사가 환자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그가 건강하다고 소견서를 쓰고 이를 복직투쟁에서 활용하는 것이다. 내가 화를 낸 이유는 그가 목적만 옳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 였기 때문이다. 이 사례에 대해서 산업의학과 의사가 해야 할 일은 이 노동자가 자본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건강하냐 아니냐를 입증하는 것 보다 그가 하는 작업의 유해인자(소음, 단순반복작업, 교대근무, 유기용제?)가 그의 건강(기질성 뇌 증후군)을 악화시킬 것인가 혹은 그가 작업을 수행하는데 결정적인 어려움이 있는 해결불가능한 건강문제가 있는가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제시하고 그의 고용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게 나의 의견이다. 그는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관점에서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전공의이므로 공부를 좀 더 해야 하는 사람인데 투쟁하느라고 바빠서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 같아서 걱정스러워서 자꾸 야단을 치게 된다. 나는 노동자의 건강문제가 건강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다른 투쟁의 수단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노동자 건강문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폭로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는 투쟁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근골격계 투쟁을 둘러싸고 어떤 연구소는 개량적이라는 둥 보다 왼쪽에 서 있는 다른 연구소가 좌편향적 투쟁을 무리하게 밀어붙힌 결과 현장 조직이 깨졌다는 둥 하는 이야기들을 간간히 듣기는 한다. 늘 생활에 급급한 나로서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은 판단하기 어렵기도 하고 관심이 가지 않는게 사실이다. 내 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한 노동자가 그냥 '손목 통증'이라는 진단명으로 산재요양을 받게 되면 부정확한 진단에 의해 적절한 치료를 받기 어렵고 현장에 복귀하는데 난관을 겪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드문 일도 아니다. 산업의학계의 일부 의사들은 진단명에 그냥 '손목 통증'이렇게 써서 산재요양신청서를 내보내기도 한다. 이학적 검사상 특이 소견이 없고 다른 임상검사에서 뚜렷하게 이상소견이 없는 경우에 굳이 전문적인 용어로 쓴다면 '손목의 비특이적 작업관련 근골격계 질환'이라고 쓸 수는 있다. 손목의 비특이적 작업관련 질환의 예후는 상당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 장기간 요양을 할 만한 상태는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게 현재까지 알려진 지식이고 이는 내 경험과도 일치한다. 또 하나 생각할 점은 산재신청서에 쓰인 진단명은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치료의 범위를 결정하므로 정확하게 쓰도록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소위 전문가주의라고 부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동자 건강을 결정하는 거시적인 요인들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오면 노동자 건강문제가 모두 해결된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가 우리 앞에 '완성된 다른 세계'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세계'를 추구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 래디칼하다는 것은 그 과정에 있어서도 올바른 원칙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사실 '가슴이 먼저 움직인 일에 대해서 냉정하게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음이 따뜻한 우리 과 전공의 선생이 '전문가적인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 내가 화를 내는 것은 옳지 않다. 좋은 말로 내 의견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고 그가 전문의를 따고 사회에 나가서 하려는 일에 내가 가르치려고 했던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산업의학 전문의가 어떤 내용을 가져야 하는 지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남은 수련기간동안 그 최소한의 기준에 합격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겠다. 그가 다른 사람의 어려운 사정에 함께 가슴아파하고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점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다. 진 정으로 내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사내하청 노동자를 탄압하기 위해서 한 사람의 건강을 '수단시'하는 현대자본의 극악함인 것이다. 사실 지난 몇년동안 이런 문제에 부딪힐 때 마다 안타까운 마음에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임상검사도 하지 않고 산재요양신청서에 그냥 '손목 통증'이라는 진단명을 쓰는 것은 할 수가 없다. 환자의 말만 듣고 객관적인 자료없이 소견서를 쓰는 일도 할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에 분노한다는 것이 근거가 충분하지 않은 practice를 한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얼마전 사측에서 가짜 환자를 작업관련 근골격계 질환으로 위장하여 진료를 받게 한 뒤 의사들이 직업병 진단을 남용한다고 선전했던 사례에서 보듯 결국 근거가 불충분한 practice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내 입장을 정리해 둔다. 일단 정리를 해 두고 앞으로 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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