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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블로그를 만들다

다미는 블로그를 만들 생각이 별로 없었다. "나는 할말 없어"라고 고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누군가 자기 글을 읽고 평가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틀간 인터넷을 흘러 흘러 여러 블로거들을 '읽으면서' 오랫만에 소통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솟았다. 망설이면서도 댓글을 달고 뿌듯해 하는 스스로를 보면서 기가 찼지만, 다미는 사실 무척 수다스러운 인간이었다.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오는 유형의 인간이었을 뿐더러 때로는 그 유형을 넘어섰다. 숨이 차도 말하고 졸면서도 말하고 자기 말이 중간에 잘릴까봐 조급해하면서 말하고 하고싶은 말을 까먹을까봐 다른 사람 말에 끼여들면서 말하고, 마침내 자신도 "더이상 할말이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마지막 대사를 읊어야 홀가분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결국 말이 생각을 압도했다. 말하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말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미는 자신의 설익은 생각이 공중에 뿌려지는 사태를 보고서야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다미는 그녀/그에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몸의 어딘가가 단단히 고장이 나 버렸다. 그 지경까지 오게 된 데에 결정적 사건이 없을 수 없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다미의 몸이 워낙 얇아졌다는 데 있었다. 다미에겐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쿠숀도 두께도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말을 할때마다 다미의 몸이 조금씩 닳아 없어졌다. 처음에는 시원함을 느꼈다. 어깨와 목에 들러붙어 있던 더께가 벗겨나갔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피부의 표피층이 약간씩 닳아 없어졌다. 자고 일어나면 자신의 손바닥이나 무르팍의 피부가 무언가에 쓸려 나간 걸 발견했다. "내가 자는 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하면서도 다미는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다 마침내 진피가 닳기 시작했다. 피부에 구멍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 생각에는 뜸들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미처 뜸이 들기도 전에 피부의 구멍에서 슉슉 김이 새나갔다. 그렇게 새나간 생각들은 하나둘, 서너댓, 나중엔 수없이 머리 주변에서 앵앵대기 시작했다. 처음에 다미는 수습을 좀 해보려고 했지만 갈수록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중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도 종종 까먹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제대로 요리할 수 없게 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심각한 타격에 한동안 머리를 끄덕거릴 수조차 없었다. 몇달이 지나고 요즘에 들어서야 다미는 파리떼처럼 맴도는 말들을 거두어 들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각인지 아닌지조차 알수 없는 그놈들은 대개 흐물흐물해졌으면서도 악다구니 같은 욕망의 선만은 성성했다. 다미는 놈들을 북북 빨고 말려서 머릿속에 개켜 넣었다. 잘 개켜 넣은 것도 있고 대충 개켜 넣은 것도 있다. 아무래도 나중에 한번씩 더 빨아줄 필요가 있다. 영 해독이 안돼 불가해한 놈은 "정말 재활용이 안 될까?" 아쉬워하며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누군가 자기 글을 읽고 평가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매사를 평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미가 매사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아주 꼬마일 적부터 시달렸던 비이성적인 폭력 속에서 제 정신을 차리려면 이성적인 합리성만이 구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미는 자기가 구원받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가 구원할 사람을 생각하면서 계몽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계몽이야말로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하면서 머리를 공장처럼 돌리고 그다지도 많은 말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그건 끝없는 일이었다. 하나를 만들어내면 그걸 지지하기 위해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했고 그게 문제라도 생기면 또다른 것을 생산해내야 했다. 인간의 사회성은 생산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지만 무엇을 위한 생산인지를 잊게 되면 탈이 나게 마련이다. 다미의 상황에선 다른 이의 구원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구원마저 멀어져 갔다. 그렇다. 지금 같은 세상에 누가 계몽을 말한단 말인가. 그렇지만 계몽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구원받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구원이란 것 자체가 쓸모없는 욕망인가? 다미는 아직 답을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다미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대로 살면 자신의 구원은 더욱 멀어져 남극으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 공장은 가끔씩 멈춰줘야 된다. 그래서 다미는 달리고 있는 자신의 다리를 멈추었다. 말도 멈추었다(그러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블로그를 만들다니, 실패한 프로젝트를 보면서도 아직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쏟아낼 생각인가? 이번엔 아예 정수리 한가운데에 구멍이 나버릴지도 모른다. 다미는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좀더 익혀야 한다. 스스로와 다른 이의 말을 듣는 연습을 열심히 해야 한다. 어째서 조용히 혼자 공책에 써내려 가지 않는가? ... 다미는 그저 외로운 것이다. 왜 서로가 이다지도 미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외로움으로부터 구원받고 싶다. 글을 쓸때 계몽의 함정을 피해가려고 계속 고민하면 괜챦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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