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과학>  2016년 가을호 (통권 87호)에 번역해 실은 글. 교정전 원고입니다.

 

 

정치와 주체성에 관한 스무 가지 테제[1]

 

브루노 보스틸스

 

 

1.

오늘날 정치 이론은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있다. 우선 가장 급진적인 정치 이론조차 근래의 정치적 실천들이 가지는 다양성·강도·이동성에 비해 형편없이 뒤처진 것처럼 보인다. 소위 시민사회의 주변부에서 이뤄지는 점거와 봉기의 실천에서부터 선거를 통해 의회좌파를 재활성화 해 국가를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통제하려는 분산된 노력에 이르기까지, 현재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심사숙고되어야 할 (예컨대 조직의 역할이나 국가의 기능, 역사의 자리, 정치경제학 비판 등등의 관점에서 분석을 요하는) 사건들은 전혀 부족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은 뿌리깊은 기존의 관성을 극복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운동의 구호들을 통해 이해한 사건들을 (이들 중 일부는 좀 더 개량적이고 다양한 수준에서 국가지향적이지만, 다른 일부는 무정부주의적-자유의지론적libertarian이며 역시나 다양한 수준에서 반국가적이다) 이론가 자신이 독립적으로 고안해 낸 이론의 수많은 예시나 묘사에 끼워 맞추는데 그치고 있다.

 

다른 한편 오늘날 정치이론의 두 번째 곤경은, 이러한 최근의 정치적 실험 중 몇몇이 가진 단점이 실제 현대이론 혹은 철학의 단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님에도, 종종 운동의 단점이 이론 자체의 단점과 등치된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아마도 이는 자기-비판적 겸손함의 가면을 쓰고 행진하는 이론적 오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일 것이다. 현재 벌어지는 사건들을 예견하고 위로부터 그들을 지도하기는커녕 사건들의 속도조차 따라잡지 못하면서, 오늘날 많은 이론가들은 현재의 실천들이 우리가 가진 주요 이론들의 약점이나 맹점을 보여준다는 처량한 감정에 젖어있기를 더 선호한다. 이런 저런 철학자가 이런 저런 봉기들의 전망을 이해할만한 개념적 도구도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고 비판 받을 때조차, 지적 권위 자체가 진정으로 위협받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비판은 —부정 혹은 파산의 형태이긴 해도— 모든 급진적 실천은 여전히 정확한 이론에 의해 지도될 필요가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론가들은 진행중인 실천과 대면해 패배하고 있을 때조차 여전히 승리할 수 있다.

 

 

2.

지금의 상황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가 어떤 준비된 답을 제공하기는커녕, 현재 모든 정론적 입장들이 맞닥뜨린 어려움의 상당 부분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좀 더 복합적이다. 오늘날 이전과는 달리 (이전에도 실제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선행하는 이론이나 프로그램의 적용 혹은 그 파생물로 정치적 실천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한다. 이론과 실천의 융합—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온 프락시스praxis라는 엄밀한 용어로 표현되었던 그 융합—을 그토록 바래왔던 혁명정치의 관점조차, 낡은 서구 형이상학에 기반한 사유로, 즉 하나의 급진적 비판이라기보다는 지배적 위치를 차지해온 변증법적 종합의 사유에서 유래한 것으로 비판 받고 있다. 헤겔 변증법에 빚지고 있는 맑스주의는 (이 빚은 소위 청년 맑스와 성숙기 맑스 간의 “인식론적 단절”의 순간을 넘어서는 것인데) 이 공격에서 특히 자유롭지 못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이론과 실천의 관계는, 짧고 간헐적이며 대부분 아주 일시적인 구원의 메시아적 순간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눈멀고 교조적인 자율성 속에서 영원히 분리되어, 비활성화된 프락시스 혹은 텅 빈 프락시스, 즉 작동하지 않게 된 프락시스 혹은 비실천적 프락시스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방기되었다.

 

결국 이론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 내재적인 것이라는, 오늘날 스스로를 무정부-공산주의자나 자율주의자 혹은 가속주의자[2]라고 칭하는 운동가들 사이에 꽤 널리 퍼져있는 통념만이, 사건의 실제 전개 과정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이론과 실천의 합일에 관한 새천년의 희망을 상징하는 입장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 역시 서구 형이상학에 대한 탈구축deconstruction 혹은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유산은 두 가지 측면 혹은 경향을 가진다. 그 중 하나가 제1철학이나 존재론 같은 이론을 정치나 윤리 같은 실천에 우선시되거나 초월적인 것으로 보는 경향이라면, 다른 하나는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혹은 범신론적 종합, 합일 혹은 합치를 프락시스의 내재성 속에서 찾으려는 경향이다.    

 

 

3.

오늘날 정치적 사건과 주체들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러한 좀 더 광범위한 곤경을 배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명명의 어려움은, 첫째 이론과 실천 간, 둘째 정치와 역사 간, 셋째 역사와 존재론 간의 자명한 변증법적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엄밀히 말해, 형이상학 비판 혹은 탈구축의 일부로서 변증법 비판과 함께, 정치와 역사의 관계 역시 이론과 실천의 관계만큼이나 분리되었다. 정치는 더 이상 이전처럼 넓은 의미에서 역사적 요인들—경제적인 것 그리고 사회적인 것을 포함하는 요인들—에 기반하거나 그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한 때 “인민”, “민족”, “시민사회”, “프롤레타리아”, “평민” 혹은 심지어 “다중”같은 이름들이 제공했던 딱 맞는 장갑이 오늘날 행위자들에게는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대체로 진정한 정치적 사건의 기원이, 어떤 행위자와 그가 사회에서 자연적·객관적으로 배정받은 역할 간의 불가피한 틈, 즉 주체와 그가 경제 구조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 간의 간극 혹은 정치적 주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 내부적 단절 등과 관련해서 사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틈·간극·단절에서 진정한 정치적 사건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는 (이 주장은 오늘날에만 타당한가 아니면 항상 그러했는가? 이는 이 논의에서 잊혀진 질문 중 하나일 것이다), 그 가장 급진적인 판본에서조차 재-존재론화 된다. 즉, 여기서 정치와 역사 간의 분리와 격리는, 이론과 실천 간의 간극과 마찬가지로 (정치·역사·사회 등등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존재자적인 것the ontic과 (존재 그 자체를 사유하는 철학인) 존재론적인 것the ontological간의 차이라는, 좀 더 근본적 간극에 기대어 설명된다. 소위 존재론적 차이를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 간의 차이로 번역하려는 간명한 시도는, 이러한 존재론화의 한 예시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왜 어떤 이름 혹은 어떤 정치적 주체화 양식이 특정한 시기에는 작동했었는지, 예컨대 오늘날에는 기능부전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계급 정치가 왜 한 때는 작동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원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사실 이러한 입장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정치 형태들은 —맑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혁명정치에 한정된 것은 아니지만 이를 포함하여— 정치적 주체를 이미-항상 그의 역사 및 사회에서의 객관적 기능으로부터 떼어내는 불가피한 간극·불일치·열림에 눈감아 왔다는 암묵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 이후에 이루어진 역사주의나 역사성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에 기대고 있는 이러한 반-역사주의적 그리고 반-본질주의적 통찰은, 가장 극단적인 경우 정치적이든 어떤 다른 형태든 간에 주체라는 범주 자체를 방기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4.

역설적으로 서구 형이상학의 최절정(이 절정은, 하이데거가 의지에 대한 지고의sovereign 의지로 해석한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로 구체화된 서구 형이상학의 몰락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으로서 주체라는 범주의 급진적 탈구축은,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정치적 주체성의 이름들에 영향을 미쳤다. “인민”, “민족”, “국가” 혹은 “프롤레타리아” 같은 이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형이상학적 주체성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1956년 탈-스탈린화 과정 동안 그리고 68년의 새로운 에너지 속에서 (혹은 오늘날 자율주의나 무정부-공산주의적 입장의 부활에서 보듯이) 전체주의적 관료제에 자주관리적 대안을 제공해줄 것으로 기대됐던 소위 평의회 공산주의의 “소비에트”라는 이름조차 그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동일한 비판이 “공동체”라는 관념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 같다. 1980년대에 들어 한동안, 공동체가 그 이름에 걸맞기 위해서는 기저에 통일적이고 본질적인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거나 그래야만 하며, 공동체에서는 무nothing만이, 다시 말해 공통의 본질의 부재만이 공유된다는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공동체에 대한 급진적 탈구축의 사유가 진행된 바 있다. 실제 공동체가 “그렇다is”는 것인가, 아니면 “그래야만 한다ought to be”는 것인가? 이 양가성에 많은 것이 걸려있다. 탈구축에 전형적인 존재론화의 경향은 대체로 현재 형태를 지칭하는 확언적 용법인 “그렇다”를 선호하긴 하지만, 무위의 공동체, 유한한 공동체, 특이-복수적인singular-plural 공동체의 속성에 관한 다양한 주장들이 실은 “그래야만 한다”는 명령어의 암묵적인 규범성에 기대고 있다. 이러한 규범성 없이는 현존하는 공동체주의가 낳은 최악의 형태들, 예컨대 국가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출현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공동체(the community; 영어 번역은 종종 이 정관사를 생략하지만, 프랑스어든 이탈리아어든 정관사의 사용은 그것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더라도 이러한 맥락에서 항상 강조의 의미로 읽혀야 한다)가 “무엇인가is”에 대한 장-뤽 낭시나 아감벤의 주장—즉, 공동체엔 실체나 본질, 안정적인 기반의 동일성이 부재하다는 입장—을 접할 때마다, 이러한 주장들이 원칙적인 것이며 실제 사실에 항상 부합하는 것은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명백히 이 철학적 성찰들이 비판 대상으로 삼는 주요 이데올로기 형식인,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가 그러한 형태로 공동체의 이념을 작동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5.

따라서 존재론적 진영은 현재에 대한 역사적 비판을 철학적 언어로 번역해내면서, 역사와 존재론 간의 순수한 쌍방적 관계를 수립할 가능성을 차단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짊어지게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히틀러와 스탈린이라는 고유명으로 표현되는 표준적인 전체주의 쌍둥이 버전의 실제 역사는, 바로 “공동체”의 개념 (그것의 현상태is를 설명하기 위해, 아니 사실은 이상적 상태ought to be를 확증하기 위해 번거로운 요소들을 모두 제외시켜 버린 개념)이 가진 존재론적 위엄에 항상 미치지 못할 것이다.[3] 그러나 이로써 우리는 어떤 현존하는 공동체도 철학자들이 과감하고 확신에 차 사유하는 “공동체”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심지어 전체주의의 위협을 막아줄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법적 보장 하에서도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기껏해야 이런 식으로 “공동체”를 재상상하려는 시도에는, 어쩌면 단순히 현재 상태를 확인시켜주는 것에 불과했을 각종 사태들에서 찾아낸 전망의 섬광들, 즉 이런 예술 작품 혹은 저런 거리 투쟁 같은 각종 뉴스 헤드라인들에서 예상 가능한 기준에 따라 선별된 파편화된 실험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실험들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실체와 본질도 없이 순수하게 “함께-있음being-with” 혹은 순수하게 “공통 속에 있음being-in-common”에 노출된 유한한 존재로서의 우리 자신의 근본적 조건을 잠시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20세기의 재앙적 경험들에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인 입장에서 쓰여진 진단(이러한 실험들이 “공동체”의 핵심인 유한성이라는 중핵을 폭력적으로 부인한 것이 문제라는 진단)이 내려지면서, 정치의 탈구축은 미래의 기획으로 집단적 주체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작업을 완전히 피해야 할 것은 아니더라도 일견 불가능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적어도 일이나 노동 혹은 활동성 같은 개념에 기반한 집단적 주체의 기획은, 이제 대책없이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바로 이 “공동체”의 사상가들이 특정한 형태의 공산주의communism 개념을 주창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낭시는 <무위의 공동체>의 서두에서 (맑스주의는 우리 시대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을 구성한다는) 장-폴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을 모호하게 참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더 이상 우리의 넘어설 수 없는 지평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면서, 어떤 공산주의에 대한 요구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지평보다 더 멀리 나아가게 만드는 몸짓으로 이어진다는 명제를 똑같이 강조해서 제시해야만 한다.”[4]

 

 

6.

맑스주의 변증법의 형이상학적 속성에 대한 이러한 일견 고담준론적 비판은,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좌파의 정치적·이론적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정확히 말하면, 이 논쟁의 결과로 수없이 다양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좌파들이 노골적으로 철학적인 전장으로 끌려들어 왔으며, 곧 정치적 기획으로서 자신들의 주된 특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정치적 사유 영역에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마술적 기법 중 하나는, 맑스와 바쿠닌에서부터 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를 거쳐 스탈린·마오·카스트로·호치민에 이르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좌파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여기서 언급된 중요한 몇몇 인물들은 이름으로 불리고 마치 후설이나 하이데거를 연구하듯이 문헌학적 연구의 열정적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존재being에 대한 형이상학적 망각에 반대하는 천년왕국 투쟁의 일부로 제시되었다는 데 있다. 반대로 형이상학의 역사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의와 세미나, 심지어 최근에 출간된 [하이데거의 수기 모음집] <검은 노트Black Notebooks>까지 열심히 읽은 독자들은, 이제 자신들을 포스트-형이상학 좌파의 선구자로 자임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칭 “좌파 하이데거주의” 흐름을 낳고 “도래하는 민주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급진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 차이의 철학들에 기대어, 새로운 세대의 사상가들은 과거의 정치운동, 국가형성, 대중봉기의 실패와 약점 전부를 형이상학의 탈구축과 비판의 관점에서 재평가하고 있다.

 

전부라고? 글쎄, 사실이 그렇다. 이 비판에 걸려있는 것이 정치적 질문이 최초로 제기되는 지평 자체에 관한 것인 한, 어떤 구체적인 정치적 사실이나 사례도 전방위적인 형이상학, 주권, 헤게모니의 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더군다나 이 마지막 세 용어는 대체로 등가적이며 거의 상호 교환이 가능하다. 즉, 포스트-형이상학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포스트-주권이나 포스트-헤게모니를 동시에 암시한다. [서구 문명 전체를 상징하는] “플라톤에서 나토까지”라는 유명한 문구조차도, 이러한 비판이 드리우는 탈구축적 의심의 전방위적 범위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한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러한 의심이 우파보다는 좌파에 더 열정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형이상학 탈구축의 지지자들은, 개인이든 인민이든 혹은 프롤레타리아든 다중이든, 모든 주체들의 자기-해방 노력에 내재한 형이상학적 유혹을 끝없이 감시하는 파수꾼을 자처하면서, 스스로를 항상 공식적 좌파보다 더 왼쪽에 위치 짓는다. 마지막으로, 이 차이의 철학자들과 오늘날 그 계승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새로운 유물론을 주창하면서, 그들의 입장이 이전의 낡은 유물론들보다 더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이라고 주장한다. 이 기존의 낡은 유물론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맑스에게서 기인하는 어떤 변증법적이고 역사적인 유물론—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념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그 유물론—의 그늘이다.  

 

 

7.

정치적 주체라는 관념의 완전한 붕괴가, 최근의 이론적 곤궁이 다다른 유일한 결론은 아니다. 프랑스 이론이라 불리는 영역만 보더라도, 형이상학의 탈구축이라는 하이데거적 전통을 따르는 자크 데리다의 제자들 외에, 주체화subjectivization라는 관념이 정치에 있어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루이 알튀세르의 가르침에 역설적으로 기대는 몇몇 사상가들—알랭 바디우, 자끄 랑시에르, 에티엔 발리바르 같은 사상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과 알튀세르의 관계는 역설적인데, 왜냐하면 알튀세르 본인은 하이데거 못지 않게 주체라는 범주에 본래부터 의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형이상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주체는 과학이든 정치이든 어떤 영역에서도 결코 진리의 편에 속하지 않는다. 알튀세르의 주요 저작들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주체에 대한 거부와는 반대로, 맑스주의의 위기—종종 포스트-맑스주의가 등장한 계기로 언급되는 그 위기—한복판에서 그의 제자들은 형이상학의 탈구축과 양립할 수 있는 주체의 이론을 정식화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마주했다. 이들은 탈구축은 어떤 개입하는 주체intervening subject라는 통념 없이는 끝까지 완수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런 통념 없이는 탈구축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와 알튀세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두 개의 지적 전통과 그들의 추종자들 사이에는, 이렇듯 (일자the One의 탈구축의 필요성에 대한 동의로 요약될 수 있는) 근본적 양립가능성과 함께 (주체의 최소 이론의 유지냐 아니면 방기냐로 요약될 수 있는) 근본적 양립불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8.

그러나 이들 간의 논쟁이 앞서 언급한 정치와 역사간의 관계라는 영역에서는 잦아든다. 바디우나 랑시에르 같은 사상가들에게, 정치는 언제나 주체의 작업이며, 더 이상 역사학, 사회학 혹은 정치경제학의 객관적 데이터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더 이상”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먼저 한 때는 역사적으로 가능했던 작업이 이제는 불가능해졌으며 더 이상 실용적 선택지로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이 있다면,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작업은 과거 한 시대의 사회-경제적 현실로부터 직접적으로 계급투쟁을 도출해냈던 잘못된 이론적 전통일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시 말해, 맑스와 그의 계급투쟁의 관점이 한 때는 역사적으로 옳았으나 이제는 사실상 낡은 것이 되었다고 이야기되거나, 아니면 정통 맑스주의의 결정론적 본질주의 하에서 사장되기는 했어도 계급투쟁의 우연적 속성에 대한 맑스의 통찰력은 원칙적으로는 항상 옳았던 것으로 간주된다.

 

 

9.

이같이 모든 포스트-맑스주의의 공통된 전제는, 이들이 정치와 역사 간의 간극(어떤 의미에서는 정치와 사회 간의 혹은 정치와 경제 간의 관계를 포괄할 정도로 폭넓게 이해되는 이 간극)을 염두에 둔다는 점이다. 지난 2-30년에 걸쳐 맑스주의의 정치적 역할로부터 분석적 역할을 점차 분리시켜 온 바디우의 궤적은, 이런 점에서 전형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진단도구로서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시대 봉기에 참여하는 투사들이 적합한 개입 전술이나 전략을 고민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든 맑스주의의 두 가지 논리/속성 간의 절합에 근본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분석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라고 부르는 이 두 측면을, 피에르 다르도와 크리스티안 라발은 자본의 논리와 계급투쟁의 논리라 부르는데, 이들에 따르면 이 통약불가능한 두 논리는 오직 공산주의라는 상상적 접착제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공산주의는 매우 상이한 역사를 가진 이 두 계통의 사유를 묶어주는 ‘접착제’로 기능한다. 자본주의의 ‘객관적’ 논리와 계급 전쟁의 ‘실천적’ 논리는, 공산주의라는 더 우월한 사회·경제적 조직 형태로 수렴된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상상적 기획만이 이 상이한 속성의 두 관점을 공통의 전투에 복무하도록 만들 수 있다.”[5]

 

바디우를 보자면, 초기 맑스가 <신성가족The Holy Family>에서 종교의 발전을 (고故 다니엘 벤사이드가 종종 인용했던 문구처럼) “역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역사와 함께”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방식대로 정치를 이해할 수 있다는 입장에 점점 확신을 잃어왔다. 이 <존재와 사건Being and Event>의 저자에게 있어, 정치는 전적으로 사건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단순한 사실들과 이에 대한 여론들을 한 쪽에 밀어두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바디우는 점차로 정치적 개입들을—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다른 세 영역들, 즉 예술, 수학, 사랑과 동일하게—그 자신에 의해서만 확증되며 자기-참조적인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바디우의 저작에서 반-역사주의적, 반-변증법적 충동이 최고조에 달했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르는 기간, 즉 대체로 <존재와 사건>(1988)에서 <메타폴릭틱스Metapolitics>(1998)에 이르는 기간에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바디우의 이후 작업들에서도 여전히 반-역사주의적 경향을 읽어내고 있으며, <공산주의적 가설The Communist Hypothesis>이나 <역사의 재탄생The Rebirth of History>에서 제기되는 공산주의 이념으로의 회귀에서도 유사한 입장을 발견하곤 한다. 맞든 틀리든 이러한 입장이 가지는 잠재적 결점은 명백하다. 겉보기에 난해하고 고고한 척 하는 태도, 봉기하는 대중에 비해 철학자-지식인을 특권화하는 경향, 그리고 일반적으로 맑스보다는 플라톤에 철학적 기원을 두는 프락시스와 이념의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역으로,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이 가지는 잠재적 위험 역시 분명하다. 실천의 페다고지를 강조하며 이론을 경멸하는 반-지성적 태도, 자율적인 정치적 전술의 등장을 역사적 주기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로 모두 설명해 버리려는 경향,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이나 <프랑스 내전The Civil War in France>의 정치적이고 정세개입적인 맑스를 좀 더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자본론Capital>의 맑스로 (이를 <정치경제학비판 요강Grundrisse>에 기반한 좀 더 주체적인 맑스로 보충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환원하려는 시도 등등.

 

하지만 맑스주의를 투사의 담론으로 평가하는 바디우의 전환은, 얼핏 보기보다 그리 근본적인 변화는 아니다. “역사”라는 용어의 의미와 관념에 대한 그의 해석은 변화해 왔지만, 사실 바디우 자신은 정치는—비록 필연적으로 역사에 정박하거나 뿌리를 대고 있기는 하지만—역사 자체에서 직접 도출되거나 연역될 수 없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이것이 모든 정치적 사건은 필연적으로 강요된forced 사건인 이유이다. 예컨대, <주체의 이론>(1982)에서 바디우는 생산 대중과 당파적 계급의 변증법에 기반해, 역사와 정치 간의 변증법적 절합articulation을 고안해내고자 한다. “계급의 변증법적 성격을 변증법적으로 분할함으로써 이해한다면, 계급은 대중의 생산적 역사성에 뿌리내린 당파적인 정치적 행위를 의미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함께 작동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급은 바로 이들[역사와 정치]의 공동작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의 실제 운동 속에서 정치의 분리가능한 특이성이 솟아오르게 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6] 바디우는 이후에 이러한 타동성transitivity의 관점 혹은 적어도 당파적 실천을 통해 조직되는 역사와 정치 혹은 대중과 계급의 변증법적 공동 작용에 대한 입장을 포기한다. 이에 따라 <정치는 사유될 수 있는가Can Politics Be Thought?>(1985)에서는, 자동성intransitivity이 정치의 핵심을 결정하는 새로운 중요 요소로 등장하며, 맑스 본인의 담론에서도 실재the real의 지점을 표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오직 맑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만이 계속해서 하나의 허구에 고착된다fixate.

 

그러나 이것이 이 시점부터 바디우가 맑스의 변증법과 역사라는 범주를 완전히 포기하고 방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최근 <역사의 재탄생>에서, 그는 문제가 되는 [정치와 역사의] 절합을 위해 상당 부분 동일한 문법을 다시 제기한다. 하지만 이제 모든 정치가 “정박”하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역사는, 더 이상 객관적인 요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사건을 그 자체로 유지시키는 주체적 과정에 완전히 내적인 것으로 변화한다. 바디우에게 있어 포스트-맑스주의 혹은 포스트-마오주의의 핵심은, 더 이상 역사를 정치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역사화하는 것이다. 역사의 재탄생이나 재각성은 더 이상 계급 투쟁의 객관적 역사에 기반하지 않으며, 어떤 자발적인 봉기나 반란들의 역사-되기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폭동들을 정치화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둔다. 다시 말해 변증법적인 것에 대응하는 것은, (우리가 이를 여전히 사건의 이론이라 부르길 원한다면) 자발적 반란과 역사적 운동, 정치적 조직의 내재적 시대구분periodization이다. 그래서 <주체의 이론>에서 대중, 계급, 당과 같은 용어를 통해 던져졌던 오래된 질문은, <역사의 재탄생>에서는 다음과 같이 변화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념Idea의 기호에, 활동적인 물질성으로서 역사의 재각성을 정치적으로 기입할 수 있을까?” 특히 이러한 기입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사전에 결정된 것이 아니라, 희박하며 우연적인 것이라면 말이다. “단지 모든 정치적 진리가 거대한 대중적 사건에 뿌리 내리고 있다 하더라도, 이 진리가 그 대중적 사건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점만 지적해두도록 하자.”[7] 

 

 

10.

프랑스 이론 내부에서, 아니 그 밖의 지역에서도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로의 이행은 정치적 주체화라는 질문을 문제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이러한 전환에서 두 가지 지배적인 흐름을 식별해낼 수 있다. 한 흐름은 여전히 맑스주의 및 변증법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들에게 정치는 주체화 과정과 분리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차이의 이름으로 헤겔-맑스주의적 변증법에 반대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하며, 이들은 주체를 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하이데거 사유의 유산과 연결되어 있는 후자의 경향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대치가 “함께-있음being-with”의 존재론을 무위의 “공동체”의 기반으로 제시하는 것이라면, 알튀세르의 작업유산과 연결된 전자의 경향에서 정치적 주체를 지지하는 입장은 종종 “인민people” 범주를 지속적으로 옹호하는 형태로 정식화된다.

 

예컨대, 논문 모음집 <인민이란 무엇인가What is a People?>의 기고문에서,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단수로서의 “인민”은, 이 명사를 꾸며주는 형용사들에서 발견되는 어떤 특수성의 기입들로부터 벗어난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 주체의 이름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민’이라는 말은 국가의 가능한 비실존nonexistence의 견지에서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 국가가 우리가 창조하고자 열망하는 금단의 국가든지 우리가 사라지기를 열망하는 공인된 국가이든지 말이다. ‘인민’은 민족해방전쟁과 같은 임시적인 유형 아래서 또는 공산주의 정치와 같은 결정적인 유형 아래서 그 전적인 가치를 갖는 말이다.”[8] 동일한 진영에서, 우리는 한 때 알튀세르주의자였던 또 한 명의 인물, 고故 에네스토 라클라우의 이론적 지향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역시 유사하게 인민주의populism의 논리가 모든 정치적 과정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들은 주디스 버틀러가 “우리, 인민we, the people”이라는 표현을 미국에 기반한 좁게 정의된 제헌적 전통에서 빼내어 최근 전세계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에 적용할 때처럼, 단수 형태가 아니라 복수의 형태로 “인민들peoples”이 등장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야기한다. 

 

오늘날 정치적 주체를 지칭하는 이름의 복수화를 위해서는, “토착민indigenous peoples” “선주민first nations”, “원주민pueblos originarios”과 같은 인종적·종족적·문명적 다양성에 대한 참조가 이루어져야 한다. 사드리 키아리가 <인민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하듯이, “인민 개념이 전개되고 특수한 의미들을 갖는 의미의 세계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다른 개념들—국민, 시민권/주권, 하위주체들이라 불리는 계급들—간의 결코 동일하지 않은 절합 위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이 묘사를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인민이 국민nation과 동일한 기반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도 스스로를 국민에 ‘못미치는 것’으로 자기-정체화하는 경우, 즉 일반적으로 어떤 (특히 문화적 영역에서의) 자율적 권력에 집착하면서도 자신들만의 국가를 가지려 하지 않거나 이를 포기하는 경우. (여기서 우리는 유럽 국가들 안의 많은 ‘소수 인민들minority peoples’의 예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9] 이 복수적 형태는 오늘날 정치적 주체의 이름에 대한 매우 유럽중심적 논의들에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오의 문화대혁명, 멕시코나 쿠바 혁명이 수행한 농지개혁, 볼리비아의 새로운 다수헌법제도 속에서 드러나는 프롤레타리아와 소작농 간의 고전적 긴장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오늘날 정치적 주체들의 얼룩덜룩한 속성에 계속해서 눈감을 수는 없다.

 

 

11.

어찌되었든, 하나의 새로운 합의가 알튀세르 학파의 대화 속에서 등장했다. 여기에는 랑시에르나 발리바르 뿐 아니라 바디우나 라클라우도 포함될 수 있으며, 꼭 직접적으로 알튀세르와 연결고리를 가진 것은 아닌 일련의 소장 학자들, 슬라보예 지젝, 주디스 버틀러, 산드라 메자드라Sandra Mezzadra같은 이들까지 포함된다. 이 합의에 담긴 공유된 전제는, 구조는 본질적으로 완결 불가능하지만 주체의 개입 없이는 이 불가능성이 가시화될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구조의 완결불가능성 때문에 주체와 구조가 절합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발리바르가 모든 좋은 구조주의는 이미 포스트구조주의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나의 가설은, 실은 포스트구조주의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은 (국제적 ‘수출’과 ‘수용’, ‘번역’의 과정을 통해 그 이름을 획득한) 포스트구조주의는 항상 여전히 구조주의이며, 그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구조주의는 이미 포스트구조주의라고 말해야 한다.”[10]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모든 구조는 그 구조를 자기-완결적인 총체성으로 구성하는 것을 가로막는 필수적인 간극과 불일치로 인해 이미-항상 그 내부에서 탈구되어 있다는, 알튀세르 자신의 저작에서도 드러나며 데리다 같은 하이데거주의자들도 완전히 동의할 수 있는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상황situation의 역사성이 징후적으로 집중화되어 있는 사건의 현장site, 바로 그 곳에서 개입하여 활동하는 주체가 없다면, 이 간극이나 불일치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알튀세르의 맑스주의, 데리다의 탈구축, 라캉의 정신분석, 이탈리아 자율주의의 여파 속에서 작업해 온 수많은 사상가들이 공통적으로 도입한 주요한 이론적 혁신이다. 라클라우가 지젝의 첫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서문에서 행한 탁월한 요약을 빌자면, “주체가 존재한다면, 실체 (대상성)가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구성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11]

 

 

12.

이 새로운 합의의 문제점은, 이렇게 구조의 불완전성 혹은 간극과 절합된 주체의 이론이 다시 한 번 새로운 법칙으로 존재론화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그의 주요 저작인 <맑스를 위하여For Marx>에서 불균등 발전uneven development을 문명의 충돌 같은 역사적 상황이나 러시아 같은 특정 국가의 주변적 속성과 관계없이 모든 구조에 적용될 수 있는 “원초적 법칙”으로 제시한 것처럼, 지젝이나 버틀러, 메즈드라의 작업에서 이루어진 수많은 정식화에서, 우리는 주체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일차적으로 권력 구조들이지만, 주체는 항상 그 권력구조들에 의한 결정을 초과한다는 주장을 발견한다. “행위성agency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권력을 초과한다.” 버틀러는 이것이 그 자체로 주체성의 최종적인 법칙인 것처럼 주장한다. “만약 주체가 (상당부분 혹은 부분적으로 권력에 의해 결정되고 권력을 결정하긴 하더라도) 권력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지도 역으로 권력을 완전히 결정하지도 않는다면, 주체는 비모순의 논리를 초과하며 그 자체로 논리의 이상생성물excrescence이라 할 수 있다.”[12] 더 나아가, 구조를 그 자신의 근본적인 우연성을 향해 열어젖히면서 동시에 주체를 이 열려짐의 공간에 기입하는 이 필연적인 과잉excess의 이름으로, 현대 이론은 “우발적 유물론aleatory materialism”이라는 절충적 형태를 찾아 나섰던 알튀세르의 사후 출판된 연구들의 발자취 역시 종종 따르고 있다 (알튀세르는 초기 주요 저작들에서 유물론적 변증법의 이름으로 자신의 원칙 중 몇 가지를 분명히 했는데, 후기에는 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그의 초기 입장이 가진다고 여겨졌던 결정론적 성격을 우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13.

이치다 요시히코가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날 만약 하나의 지배적인 정치인류학 혹은 하나의 새로운 근본적 존재론이 있다면, 정신이 “실체로뿐만 아니라 주체로 사유되어야 한다”는 헤겔의 주장을 새롭게 뒤튼 이러한 합의일 것이다.[13] 물론 지젝은 이 새로운 합의 뒤에 헤겔적 교리가 있음을 가장 앞장서 자랑스레 주장하는 철학자이다. 그가 보기에 이 헤겔적 교리는, 절대적인 것을 향한 변증법의 총체화하는 충동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탈구축의 표준적 입장들과 결정적으로 결별하는 지점이다. 하지만 지젝처럼 헤겔의 영향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는 현대 이론의 많은 위대한 저자들 사이에서 실체와 주체 간의 절합에 대한 유사한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이론에 있어 현재 우리는 독일 관념론의 지속적인 패러다임에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4.

그러므로 (총체성의 원리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전제들을 탈구축한 이후에) 독일 관념론을 계승한 주체이론의 패러다임과도 결별하려는 모든 시도는, 알튀세르의 또 한 명의 제자 피에르 마슈레Pierre Macherey의 책 제목, <헤겔 혹은 스피노자Hegel or Spinoza>와 같은 양자택일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스피노자 이외에도, 알튀세르의 마지막 작업을 좇아간 많은 저자들은 헤겔 이전 혹은 심지어 칸트 이전의 사상가들, 예컨대 그리 멀리 거슬러가지는 않아도 되는 마키아벨리나 혹은 고대 유물론자 루크레티우스 같은 예상치 못한 동지들을 발견했다. 하이데거적 사유가 다다른 근본적 결론과 동일하게, 이러한 노력들은 결국 종종 주체이론 전반을 희생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이러한 희생은 이제 급진적 내재성, 우연성, 우발적인 것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자유들을 존재론적으로 확정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15.

정치와 주체성 이론이 다다른 이러한 최근의 곤경은, 익숙한 철학적 카드들을 다시 뒤섞는 것을 넘어서 두 겹의 역사화를 요구한다. 먼저 (바디우의 친구이자 동료 투사인 실뱅 라자뤼스Sylvain Lazarus가 처음 제안한) “정치의 역사적 양식들”이라는 통념을 좀 더 정교화해야 한다.[14] 여기에는 자코뱅, 볼셰비키, 스탈린주의, 민주적-의회주의적 양식들이 포함되며, 이러한 작업은 정치를 행하는 특정한 양식, 예컨대 전세계에 걸친 노동조합이나 공산당의 계급-기반 정치와 같은 양식들이 지금은 그 기한을 다했거나 낡은 것이 되었을지라도 과거에는 적합한 것이었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 우리는 다양한 “주체의 이론들” 역시 복수의 형태로 역사화해야 한다. 이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포스트-헤겔적 합의가, 마치 그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주체의 이론인 것처럼 (바디우 본인이 <주체의 이론>에서 정확히 썼듯이: “진실은 오직 단 하나의 주체의 이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15]) 확증되면서 등장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16.

첫 번째 역사화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봉기와 반란의 최근 국면sequence은, 이집트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대나 스페인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을 점거한 인디그나도스indignados,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같은 다양한 사건들 이전에 2006년 멕시코의 일명 옥사카 코뮌[16]에서 시작된 것일지 모른다. 이 코뮌에서 영감을 얻은 캘리포니아 활동가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오클랜드 점거운동”이 아닌 “오클랜드 코뮌”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코뮌의 이름을, 바디우나 다른 이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1871년 파리 코뮌의 영웅적인 예시를 참조한 것으로 손쉽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비록 <프랑스 내전>에서 파리 코뮌을 분석하면서 잠시 잊은 듯 하지만 실은 맑스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시피, 히스패닉의 세계에서 코무네로 반란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 전통은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코무네로 반란에서 시작해, 18세기 안데스와 뉴 그라나다 지역의 다양한 원주민 반란을 거쳐, 트로츠키 역사학자 아돌포 질리가 모렐로스 코뮌이라 부른, 1914-15년에 걸쳐 멕시코 시티 바로 남쪽에서 일년 간 행해진 원조 사파티스타의 급진적 토지개혁과 군사 자치의 실험으로 이어진다.[17] 이같이 코뮌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상 핵심이 되는 소작농과 프롤레타리아의 동원을 통해, 중앙집권화된 국가로부터 준-무정부주의적 자율성을 획득하려는 계기에 적합한 정치적 실천 및 조직의 역사적 양식으로 간헐적으로 등장해왔다. 이러한 역사는 공동체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으로 환원하는 대신, 코뮌의 다양한 정치 형태의 구축에 있어 소위 원시적 혹은 원초적 공동체들의 역사적 운명을 조사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공동체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17.

유사한 질문들이 두 번째 역사화의 과제, 즉 독일 관념론으로부터 내려온 지배적 형태의 주체 이론 이외에 다양한 주체의 이론들을 살펴보는 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예컨대, 오늘날 주체가 구조의 불완전성에 의해 분열된 것으로 나타난다는 판본이 새로운 합의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이 판본이 그 자체로 모든 시기에 타당한 주체의 유일 이론으로 존재론화되었는지 물어야만 한다.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모든 강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적 이론은 완전히 비역사적이고 선험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어떤 주체가 어떻게 충실성 속에서 사건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오직 하나의 이론만이 항상 남게 되며, 그 주체의 다양한 유형이나 형상들을 드러낼 수 있는 사건들—예컨대, 기독교의 등장이나 신대륙의 정복과 함께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같은 사건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반대로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유형이나 형상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구조적이거나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계보학적인 주체의 이론이 필요하다. 알랭 드 리베라가 최근 진행하고 있는 <주체의 고고학> 시리즈 작업이나 얼마 전 작고한 아르헨티나 철학자 레온 로지츠너의 자본주의와 기독교 주체성 간의 역사적 연결고리에 대한 연구가 바로 이러한 시도에 해당할 것이다.[18]

 

 

18.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의 사유는 여전히 유용할 수 있다. 심지어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에서조차 (안토니오 네그리는 알튀세르의 세미나에 초청받아 행한 강연집 <맑스를 넘어선 맑스Marx Beyond Marx>에서 이 텍스트의 주체-지향적 접근을 분석한 바 있지만), 우리는 “1857년 서설Einleitung”이나 혹은 모든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과 포스트-자율주의자들이 영감을 얻어온 소위 “기계에 대한 단상fragment on the machine”에만 초점을 맞춰선 안 된다. 우리는 동시에 에릭 홉스봅이 별도의 책으로 편집해 영어로 출판하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같은 주변부 혹은 포스트식민 국가들에서 수없이 재발간되며 맑스주의 저작의 핵심 텍스트 중 하나로 자리잡은, “자본주의에 선행하는 경제 형태들Economic Forms that Precede Capitalism”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텍스트는 자본주의가 그 자체로 자본주의적이지는 않지만 이후 자본의 산물인양 [내·외부의 구분이 불가능한] 뫼비우스의 띠 같은 자본의 순환에 재기입·재코드화되는 요소들과의 우연적 조우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으로 등장하였는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제기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시초축적 국면에 선행했던 소위 원초적·농경적 소작농 코뮌이나 공동체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본순환의 메커니즘 때문이며, 그 결과 코뮌의 이름에 기댄 다양한 봉기와 반란은 이들의 유토피아적 재건을 목표로 내건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꿈은, 단순히 이미-항상 구성적으로 상실된 존재론적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일소되어야 할 사후적 환상의 결과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원자화된 개인들만이 가능한 시민-부르주아 사회의 시장터에서 집합적 주체를 동원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적 기획이 가지는 불가피한 측면이라 할 수 있다.  

 

 

19.

그럼에도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의 주요 부분들에서 묘사된 자본의 순환적 고리와 혁명적 프락시스의 구조 사이에는 기묘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2항에서 혁명적 프락시스의 구조를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것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의 “일치” 혹은 말 그대로 “동시에 행하는 것”, 즉 구조와 주체의 동시적 변형transformation으로 정의한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프락시스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19] 이 테제가 지배적인 포스트-헤겔주의적 합의의 틀 속에서 번역될 때조차, 아니 오히려 그러한 틀 속에서 해석될 때 더더욱, 하나의 주체는 자신이 만들지 않은 환경에 의해 결정되기는 하지만 그 자신과 환경을 동시에 변형시킬 수 있다는 관념은, 자신의 등장을 위한 실질적 전제들을 마치 그 자신의 행위의 산물인 양 제시하는 자본순환 매커니즘의 기괴한 복제품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으나, 맑스의 주체 이론들과의 지속적인 대화는 한 차원 높은 역사화 작업, 즉 독일 관념론으로부터 이어져온 정치 인류학이 탈역사화 혹은 선험화되는 과정의 역사화에 근본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라는 가장 급진적인 요청조차, 근대사회에서만 보편적·영구적으로 타당하게 여겨지는 매우 특정한 주체 이론에 계속해 기대고 있음을 새롭게 밝힐 수 있을지 모른다. 이는 우리 고통의 원천이 오직 독일 관념론의 철학적 영향 때문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일 관념론의 부상 그 자체가, 자본주의의 자기-변화 혹은 활동 모델에 기반해 주체성을 이해해 온 좀 더 광범위한 역사적 과정의 일부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20.

오늘날 주체에 관한 지배적인 이론, 즉 사건적이지만 동시에 여전히 선험적인 이 이론의 탈역사성을 엄밀하게 유물론적으로 역사화하는 작업은, 자기self에 대한 전-기독교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를 분리시키는 지표들, 혹은 인간의 언어와 사유에 대한 전-자본주의적 이해와 자본주의적 이해를 분리시키는 역사적 지표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시대의 모든 문화는 그 자신의 주체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역사적 상대론의 입장을 택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여전히 주체는 항상 존재해왔다고 주장하길 원한다면, 그것이 항상 동일한 주체적 형태로 존재해온 것은 아니라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주체는, 그것이 데카트르든 헤겔이든 혹은 그 길을 앞서 나간 성 어거스틴이든, 이들 철학자들의 발명품이 아니다. 만약 모든 주체이론이 암묵적으로 근대성에 대한 이론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주체가 근본적으로 근대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근대적 주체가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실질적·역사적 전제조건들로 자신 앞에 놓여진 전-근대적 환경들에 그 자신을 투영할 수 있었는지 물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주체와 주체가 아닌 것(어떻게 부르든 주체가 그 위에서 작동하는 물질들, 즉 자연, 욕망, 의지력, 생명 혹은 단순히 힘과 충동의 특정한 양) 간의 단절이, 근대와 전-근대 간의 단절 혹은 자본주의와 전-자본주의 간 경제체제 및 주체의 (정신적, 리비도적, 인지적, 정동적) 형성들formations에 있어서의 단절과 함께 연구되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연구를 통해서만 오늘날 우리가 처한 곤경, 즉 세계를 변혁하자는 모든 호소가 얼마나 맹렬하고 격렬하게 반자본주의를 외치든지 간에, 결국 자본이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스스로를 늪에서부터 끄집어 낸 [독일 민담의 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Münchhausen처럼) 모든 것을, 심지어 그 자신의 출현을 위한 역사적 전제조건들까지 생산해낸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자본의 뫼비우스 띠 순환구조를 복제하고 있는 현재의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직 이러한 역사화를 통해서만 우리는 자본주의 주체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을 비로소 멈출 수 있을 것이다.

 

 

 

해제

 

여기 번역된 브루노 보스틸스의 글은, 2015년 1월 일본 교토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에서 주관한 국제 심포지엄 “정치, 주체, 그리고 현대철학”에서 영문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이치다 요시히코, 브루노 보스틸스, 에티엔 발리바르 등이 참석한 이 심포지엄의 발표문은 이후 동일 연구소의 연간지 Zinbun 46호에 게재되었고, 향후 이치다 요시히코와 오지 겐타가 공동 편집하고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될  <68년 이후와 우리>에 일본어 번역이 수록될 예정이다. 한글 번역은 영문판을 기준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힌다.

 

얼마 전 <공산주의의 현실성> (염인수 역, 갈무리, 2014)이 번역되면서 한국에 소개된 바 있는 브루노 보스틸스는, <주체의 철학>을 포함한 다수의 알랭 바디우 저서를 영어권에 번역·소개하여 주목을 받았으며, 이후 번역자 및 주석자의 역할을 넘어 본인 만의 정치이론을 전개하면서 최근에는 알베르토 토스카노, 피터 홀워드, 제이슨 리드, 조디 딘 같은 학자들과 함께 영미 좌파 정치이론계의 소장학자 중 한 명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어디선가 보스틸스는 자신의 정치이론의 출발점을 “형이상학의 탈구축이 이룩한 개념적 성취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하이데거나 데리다에 기반한 지배적 탈구축의 흐름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정치철학의 모색”이라 밝힌 바 있는데,[20] 이 글에서도 그의 이러한 이론적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그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과 정치지형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기존 유럽중심의 정치철학 논의에 탈식민주의의 문제의식을 도입하려는 시도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독자들은 이 글에서 그 고민의 흔적 역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여러 면에서 완결된 형태의 논문이라기보다는 이후 연구를 위한 과제제기에 가까운 글을 굳이 번역·소개하는 이유는, 이 글이 현재 다소 교착상태에 빠진 듯한 좌파 정치이론 지형에 대한 흥미로운 개괄과 함께 나름의 일관된 문제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20여 년 간 서구 이론의 영역에서 정치철학의 부흥이라 부를만한 현상이 존재했다. 보스틸스는 데리다, 라쿠-라바르트, 낭시, 아감벤, 라클라우, 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발리바르, 버틀러, 네그리 등 정치철학의 부흥을 이끌었던 대표적 이름들을, 크게 포스트-하이데거 진영과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으로 분류한 후, 이 두 진영이 오늘날 정치적 주체를 사유하는데 있어 공통적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맞닥뜨리게 된 곤경에 대해 논한다.

 

우선 포스트-하이데거 진영이 역사·사회·이론 등이 정치적 실천과 가졌던 변증법적 관계들을 급진적으로 탈구축하고 주체 역시 해체해야 할 형이상학적 범주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결국 주체 및 공통의 본질 없이 함께-있음에 기반한 이상적인 “공동체”의 조건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면,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은 이러한 탈구축 자체가 “개입하는 주체”라는 범주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밝히고 주체의 존재 조건을 구조의 근본적 불완전성과 연결시키면서 일종의 형식적인 주체 개념을 되살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특정한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사유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 글의 서두에서 보스틸스가 지적하듯이, 오늘날 정치이론이 최근 분출하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을 분석하고 이 사건의 주체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이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정치적 주체에 대한 사유가 직면한 이러한 이론적 곤경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 글에서 보스틸스가 제시하는 지형도는 다분히 자의적이고 거친 분류이며, 각 이론가 간의 혹은 각 진영 내부의 중요한 입장차이를 상당부분 간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러한 지형도에 기반해 제안하는 현 교착상태의 돌파구는 한 번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보스틸스는 오늘날 정치적 사유의 이론적 곤궁을 해소하기 위해 두 겹의 역사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가 정치 양식들의 역사화 작업을 통해 정치와 역사의 관계를 다시금 연결시켜 사고하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주체에 대한 복수의 관념들을 역사 속에서 추적하면서 현재 유일하게 가능한 주체 형태로 간주되는 (보스틸스 본인이 ‘포스트-헤겔적’이라 부르는) 주체 관념을 극복하는 것이다. 좀 더 익숙한 용어로 고쳐 쓰자면, 전자는 정치적인 것의 혹은 정치 양식의 계보학, 후자는 주체화 양식의 계보학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의 말처럼 “항상 역사화하라!”는 명령이 물화와 형식주의에 맞서 반복적으로 제기되어온 맑스주의 변증법의 교리였음을 생각해보면,[21] 사실 보스틸스의 이러한 제안이 특별히 새롭게 느껴지지 않을지 모른다. 또한 혹자는 이러한 이중의 역사화 작업이 그가 진단하고 있는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이론적 곤경을 돌파하는데 충분한 해결책인지에 대해 의심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정치적 주체화에 대한 논의들이 그 역사적 조건보다는 (예컨대, 정치와 치안을 논리적 차원에서 구분하려 한 랑시에르의 작업이나, 사건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교화한 바디우, 정신분석적 행위act와 여타의 거짓행위를 구분짓는 지젝의 작업처럼) 주로 정치적 주체를 다른 주체와 구분시켜 주는 “형식”이 무엇인가에 집중해왔으며, 그 결과 이들 논의 속에서 정치적 주체는 안티고네, 바틀비, 바울 같은 일종의 초역사적 알레고리로서만 제시되어 왔음을 염두에 둔다면, 보스틸스의 이러한 요청이 가지는 부분적 설득력을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보스틸스 자신이 이 글의 마지막에 언급하듯이, 이러한 정치 및 주체 개념의 역사화에 대한 강조가 각 시대별로 나름의 정치 및 주체 개념이 존재한다는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한 옹호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보스틸스는 특이하고 희박한 사건으로서의 정치를 역사의 내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형식이 역사의 구체성 속에서 어떻게 돌출적으로 등장하며 상호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이 역사화의 핵심 과제임을 반복해 강조하고 있다.[22] 그리고 그러할 때 우리는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논의가 이룩해 온 개념적 성취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그 이후 및 너머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보스틸스는 나름의 문제진단과 방향성만을 제시할 뿐, 이러한 방향성에 걸맞는 구체적인 작업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그가 이러한 문제틀에 기반해 어느 정도의 연구 프로그램을 진척시킬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이어질 그의 행보를 지켜봐야 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의 논의를 통해 최근 정치이론이 다다른 것처럼 보이는 막다른 골목의 돌파구가 어디서부터 마련될 수 있는지 하나의 유용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그가 제시한 이후 연구 방향과 구체적인 방법론의 적실성을 상세히 논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여기서는 그의 논의와 우리의 고민을 한 발짝 더 진전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점만 간단히 언급하며 짧은 해제를 마치고자 한다.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보스틸스가 개괄하고 있는 오늘날 정치와 주체를 둘러싼 논의구도가 전체 지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이 글의 열 네 번째 테제에서 매우 부분적이고 불분명하게 암시되기는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적 전환 이후 정치적 주체를 둘러싼 포스트-하이데거와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의 대립 구도 너머 다른 한 켠에는, 객체의 절대적인 우연적 조합에 대해 사유하면서 정치와 행위자에 대한 인간 중심적 가정들을 해체해 나가는 다양한 흐름들, 즉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혹은 인류학에서 “존재론적 전환”이라 부르는 상호연결되어 있으나 동시에 분리된 흐름들이 존재한다.[23] 화이트헤드, 퍼스, 타르드, 시몽동, 들뢰즈·가타리와 같은 사상가들로부터 이론적 영감을 얻고 있는 이 흐름은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사유를 통해 기존의 정치와 주체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쓰려는 시도로서, 보스틸스가 추구하는 역사화의 작업은 기존의 정치철학적 논의들과 이 새로운 흐름들 간의 대화와 긴장 및 갈등 관계를 통해 좀 더 풍부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비록 이 글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보스틸스가 자신의 역사화 작업을 위한 구체적 자원으로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분석에 기반한 역사유물론과 후기 푸코의 장치 분석에 기반한 주체의 계보학을 제시한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24] 이 기본적인 두 축에 이 논문에서 그가 강조하고 있는 일종의 탈식민주의적 접근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포스트-맑스주의 논쟁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정치경제학과 주체생산장치 분석의 결합에서 과거 생산양식과 주체화 양식의 절합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을 자연스레 떠올릴 것이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기존의 논의들이 사회구성체와 사회적 주체가 어떻게 (재)생산되는지, 즉 사회적 예속화의 매커니즘에 대한 관심 속에서 생산양식과 주체화양식의 절합을 고민했다면, 보스틸스는 이 자원들을 역사 속에서 정치적 주체화가 어떻게 가능했으며 오늘날 새로운 주체의 돌출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 가능성의 조건들을 사유하기 위해 활용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서구 사회의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으면서, 생산양식의 모순이 어떻게 특정시기의 정치양식과 주체형태를 조건지으며 동시에 정치적 주체생산을 위한 각종 장치들이 어떻게 작동해왔는지에 대한 고민을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장기 지속되고 있는 냉전체제와 급격한 산업자본주의의 발달 및 금융자본주의로의 포섭 속에서 그 어느 사회보다 역동적인 정치 주체의 이름들—인민, 민중, 노동자, 전위, 청년, 열사, 전사, 시민 등—의 부침을 경험한 한국 사회는, 어쩌면 보스틸스가 제안하는 유럽의 경험을 넘어선 정치양식과 주체화양식의 역사화 작업을 고민하기에 알맞은 현장일지 모른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정치적 주체의 형식과 논리의 구체적 “사례”를 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연구를 통해 정치적 주체화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에 개입하고, 그 형식과 논리 자체를 다시 써나가는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보스틸스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 정치적 주체의 부침을 둘러싼 역사화 작업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해 보이는데, 이는 “민중”의 해체와 “시민”의 무기력화, “청년”의 몰락 등을 겪으며 우리사회가 정치적 주체의 이름을 망각하고 상실한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 때는 정치적 주체를 호명했던 이름들이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역사적·사회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추적해나가는 작업. 이는 보스틸스의 말처럼 역사와 정치의 분리를 극복하고 존재론화된 주체 이론의 갱신을 추구하는 이론적 작업인 동시에,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등장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을 마련하고 그 잠재적 유령을 현실 속에 다시금 소환해내기 위한 정세개입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일 것이다.

 

 

 


[1] Bruno Bosteels, “Twenty Theses on Politics and Subjectivity”, Zinbun 46, 2016: 21-39. © 2016 Institute for Research in Humanities Kyoto University [한국어 번역 및 게재를 흔쾌히 허락해준 저자 브루노 보스틸스와 Zinbun 편집자 오지 켄타(王寺 賢太)에게 감사드린다. 또한 역자에게 브루노 보스틸스의 작업을 소개하고 일독을 권한 에티엔 발리바르와 송제숙 선생님께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 역자]

[2] [역주] 가속주의accelerationism는 현 자본주의의 물질적-기술적 조건의 발달을 가속화하고 이를 집단적으로 재전유함으로써 자본주의에 급진적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입장을 의미한다. 기존의 자율주의 및 무정부주의 운동의 일부 전제들을 공유하지만 일시적 자율공간의 구성이나 직접행동의 추구 같은 구체적 실천 형태들에 이론을 제기하며, 이들의 입장을 잘 보여주는 텍스트인 Alex Williams and Nick Srnicek, “#Accelerate Manifesto for an Accelerationst Politics,” Critical Legal Thinking (2013. 5. 14)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가속주의적 정치를 위한 선언,” http://blog.daum.net/nanomat/520) 최근 들어 포스트-자율주의를 포함한 여타의 맑스주의 진영과 가속주의 간의 논쟁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David Cunningham, “Marxist Heresy: Accelerationism and Its Discontents” Radical Philosophy 191, 2015: 29-38를 참고할 수 있다. 

[3] [역주] 여기서 보스틸스는 현실에 존재하는 공동체를 a community나 communities로, 낭시나 아감벤이 이상적 형태로 제시하는 무위의 공동체나 도래할 공동체를 the community로 일관되게 구분해 서술하고 있다. 전자는 공동체로, 후자는 “공동체”로 옮긴다.

[4] Jean-Luc Nancy, The Inoperative Community, trans. Peter Connor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1), 8-9. [박준상 역, <무위의 공동체>, 인간사랑, 2010, pp.35-36.]

[5] Pierre Dardot and Christian Laval, Marx, prénom Karl (Paris: Gallimard, 2012), 11.

[6] Alain Badiou, Theory of the Subject, trans. and intro. Bruno Bosteels (London: Continuum, 2009), 27. 맑스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입장 변화를 좀 더 자세히 분석한 글로는, 다음의 내 논문을 참고하라. “The Fate of the Generic: Marx with Badiou,” in (Mis)readings of Marx in Contemporary Continental Philosophy, ed. Jessica Whyte and Jernej Habjan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4), 211-226.

[7] Alain Badiou, The Rebirth of History: Times of Riots and Uprisings, trans. Gregory Elliott (London: Verso, 2012), 67 and 89. 역사와 정치에 대한 바디우의 변화된 관점에 대해서는, 내 책 Badiou and Politics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11)의 3장과 7장을 보라.

[8] Alain Badiou, “Vingt-qatre notes sur les usage du mot ‘peuple,’” in Qu’est-ce qu’un people? (Paris: LA Fabrique, 2013), 21. [“‘인민’이라는 말의 쓰임에 대한 스물 네 개의 노트”, 서용순 외 역,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4, p.28.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9] Sadri Khiari, “Le people et le tiers-peuple” in Qu’est-ce qu’un people? (Paris: LA Fabrique, 2013), 117-118. [“인민과 제3의 인민,” 서용순 외 역, <인민이란 무엇인가?>, 현실문화연구, 2014, p.151-152.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컬럼비아 대학 출판사에서 곧 출판될 이 책의 영어 번역본에 실린 나의 서문 “This People Which Is Not One”도 참고하라.

[10] Etienne Balibar, “Structuralism: A Destitution of the Subject?” trans. James Swenson, Differences: A Journal of Feminist Cultural Studies 14:1 (2003): 11.

[11] Ernesto Laclau, “Preface,” in Slavoj Ziz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 Verson, 1989), xv.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p.15]

[12]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in Subjection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7), 15 and 17. 다음도 참조하라. Chapter 2, “Producción de subjectividad,” in Sandro Mezzadra, La cocina de Marx: El sujeto y su producción, trad. Diego Picotto (Buenos Aires: Tinta Limón, 2014), 23-33.

[13] Yoshihiko Ichida (市田 良彦), “Héros (post-)structuraliste, politique de politique,” Zinbun 46, 2016.

[14] [역주] 라자뤼스의 “정치의 역사적 양식들”에 대한 분석은, 실뱅 라자뤼스, 이종영 역, <이름의 인류학>, 새물결, 2002참고. 

[15] Badiou, Theory of the Subject, 115.

[16] [역주] 2006년 6월에서 11월까지 진행된 멕시코 옥사카Oaxaca 지역의 저항운동. 교사 처우개선과 빈곤층 학생 재정지원을 요구한 옥사카시 교사노조의 파업을 저지하기 위해 옥사카 지역정부가 경찰력을 투입하자, 주민들이 봉기하여 지방정부를 몰아내고 11월 중앙정부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될 때까지 5개월 간 자치적 통치를 시행하였다. 옥사카 주는 멕시코 내에서 원주민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400만 인구의 대략 2/3가 원주민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기의 배경과 진행과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는 Richard Roman and Edur Velasco Arregui, “Mexico’s Oaxaca Commune,” Socialist Register 44, 2008: 248-264을 참고할 수 있다.

[17] [역주] 보스틸스의 말대로 공동체 자치 원리에 기반한 코무네로Comunero 봉기는 스페인어권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코무네로 봉기는 1520-21년 카를 5세의 지배와 과도한 징세에 반발해 카스티야Castile 지방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 도시민으로 구성된 지역 위원회 코무네로가 권력을 장악하고 자치적 통치를 시도하였다. 이 같은 코무네로의 자치 전통은 이후 스페인 식민통치에 맞선 남아메리카 지역민들의 저항형태 속에서 반복된다. 1721-25년, 1730-35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파라과이 지역의 코무네로 반란이나, 1780-83년 안데스 산맥 남쪽 지역에서 진행된 반란, 1781년 현재 콜롬비아 및 베네주엘라에 해당하는 뉴 그라나다New Granada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가 그 대표적 예들이다. 이러한 흐름은 20세기에도 이어져 멕시코 혁명 기간 동안 모렐로스Morelos 지방 소작농들은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의 지도 아래 지역 단위의 급진적인 농지개혁과 민중민주주의적 자치, 자기-방어를 위한 군사제도 설립 등의 실험을 전개한다. 아돌포 질리가 파리 코뮌과의 유비 속에서 “모렐로스 코뮌”이라 이름 붙인 이 소작농-원주민 자치 시도는, 현재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지역의 사파티스타 해방군이나 앞서 말한 옥사카 코뮌 실험 등에 영감을 주고 있다. Adolfo Gilly, The Mexican Revolution, 2005 (New York: The New Press) 참고.

[18] [역주] 알랭 드 리베라Alain de Libéra는 <콜레주 드 프랑스> 중세철학사 교수로, 주체가 근대의 산물이라는 통념에 반대하여, 근대 이전 문헌들 속에서 주체, 자기, 자아 등의 관념들이 어떻게 사고되었고 변화되었는지 고고학·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추적한 <주체의 고고학Archéologie du sujet> 시리즈 작업들로 유명하다. 2007년에 1권 <주체의 탄생I. Naissance du sujet> (Paris: Vrin, 2007)을 출간한 이후, 2008년 2권 <정체성의 탐색II. La Quête de l'identité>, 2014년 3권 <이중 혁명. 사유행위III. La double révolution.L'acte de penser>를 집필하였다. 레온 로지츠너León Rozitchner는 아르헨티나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프로이트-맑스주의의 영향 하에 주체와 권력의 관계 그리고 집단적인 주체 변형의 문제를 좌파 포퓰리즘, 우익 권위주의, 군사독재, 민주화 등 남아메리카의 구체적 정치상황에 적용시킨 분석들로 유명하다. 1980년대 이후로는 주로 역사적 분석에 천착하며 1997년 성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통해 기독교적 주체와 자본주의적 주체의 등장 간의 긴밀한 연관성을 분석한 <사물과 십자가: 기독교와 자본주의La Cosa y la Cruz: Chistianismo y Capitalismo>(Buenos Aires: Losada, 1997)를 출판하였다.  2011년 9월 타계하였다.

[19] Karl Marx, “Theses on Feuerbach,” Collected Works (London: International Publishers, 1975), vol. 5, 4.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박종철 출판사, 1991, p. 186]

[20] Bruno Bosteels, Badiou and Politics (Duke University Press, 2011), p.xii.

[21] Fredric Jameson, The Political Unconscious (Routledge, 1983), p. ix. [이경덕·서강목 역, <정치적 무의식>, 민음사, 2015]

[22] “Traversing the Heresies: An Interview with Bruno Bosteels” The Platypus Review 54, 2013; 그의 책 <공산주의의 현재성>도 참고하라. 

[23] 흥미롭게도 보스틸스가 포스트-하이데거, 포스트-알튀세르 진영이라고 부르는 이들과 이 새로운 객체-지향적 사유 모두, “존재론”에 대한 강조를 자신들의 핵심 입장으로 내세우고 있다. 일종의 느슨한 발견론적 가설이지만 이를 마테이 칸디아가 제시하는 3가지 상이한 존재론적 정치의 입장, 즉, 존재론의 탈구축적, 수행적performative, 실재론적realist 측면과 각기 연결시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Matei Candea, “The Ontology of the Political Turn.” Theorizing the Contemporary, Cultural Anthropology website, January 13, 2014. https://culanth.org/fieldsights/469-the-ontology-of-the-political-turn.

[24] Bruno Bosteels, “Translator’s Introduction” in Alain Badiou, Theory of the Subject (Continuum, 2009), p.x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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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1 16:02 2019/01/21 1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