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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26호>더 이상 진혼곡을 부를 수 없는 세상 누가 그들을 죽이고 있는가?

살면서 누군가의 부음을 듣게 될 때마다 차라리 눈과 귀를 막고 청맹과니가 되고 싶어지는 까닭은 삶과 죽음마저 카스트의 눈금으로 분할되던 인도의 브라만(승려계급)과 달리 우리가 목도하는 수많은 죽음들은 억울한 비명횡사의 피눈물을 흘리며 물구나무 선 세상을 고발하고 살아남은 자들을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절규하며 온몸으로 저항했던 쌍용차 노동자와 가족들의 이어지는 자살 소식은 해고와 실업이 노동자의 삶을 얼마나 치명적으로 파괴하는가를 피로써 증언하고 있다.
 

죽음의 연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10수년전 꿈의 직장(?)으로 불리던 한국통신이 민영화되어 KT로 바뀌고 나서 집단적 저항의 진지중의 하나였던 노동조합마저 자본에 순치되자 온갖 구조조정의 칼날에 목이 잘리고 추방당한 노동자들이 3만 명에 가깝다. 이들 가운데 생존의 위기와 사회적 고립에 따른 고통으로 몸서리치며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사연이나 단협쟁취 투쟁으로 해고되었던 철도기관사의 절명 소식 등은 이 사회에서 노동자가 한사람의 인간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처절한 싸움인가를 서릿발처럼 일깨워 주고 있다.
 

만연한 폭력의 그늘에서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짓밟혀 죽은 어린 새처럼 “살려 주세요”라는 절박한 메시지 하나 미처 타전하지 못하고 죽어간 아이들의 유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이 사회의 심장을 파헤치고 있다. 
 

뒤르켐은 각각의 자살에서 관계를 파악하고, 다시 관계에서 ‘특정한 경향’을 해석해내고, 그 특정한 경향을 개인 외부에 있는 사회적 힘과 연결시키고 있다.
 

도대체 삶의 주체인 개인에게 죽음을 부르는 낯선 사회적 힘은 무엇인가? 사회적 배제와 폭력을 재생산하는 구조적 힘은 어떻게 자신을 관철하는가? 위의 두 질문에 귀를 열어두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대답을 시작했으면 한다.
우리는 이미 철거민들을 학살한 자본의 사냥개들이 휘두른 집단폭력을 두 눈 부릅뜨고 보았으며, “밤에는 잠 좀 자자”며 야간노동 폐지를 요구하던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두들겨 패던 용역깡패들과 깡패들의 배후에서 백색 폭력을 부추기며 스스로 자본의 용병임을 숨길 수 없었던 국가의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을 살고 있다.
 

입시경쟁의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학교는 꿈이 자라는 삶의 공동체가 아니다. 무너진 교실과 관계의 단절은 ‘학교 보안관’으로 회복할 수 없다.
 

맑스는 인간의 자기소외의 경제적 표현을 ‘상품’이라 했고, 인간소외의 정치적 표현을 부르주아 국가와 사회의 내적 모순에서 찾고 있다. 노동력이 상품으로 교환(매매)되는 질서를 넘어서지 않는 한 학교는 끊임없이 잘 팔려나갈 상품으로 아이들을 경쟁시키려 할 것이고 아이들 사이의 우정과 배려는 이후 적자생존을 방해하는 덫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기적 욕망은 강화될 것이다.
 

인간의 자리를 이윤에게 내어주는 체제 자체의 음습한 성격을 바꿔내기 위한 노력을 서두르지 않는다면 이 사회 전체가 거대한 죽음의 공장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자본의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실제 1997년 이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신자유주의 축적전략 하에서 두드러지게 급증했던 자살률은 체제의 문제와 개인의 실존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적 고립과 인간소외를 숙주 삼아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죽음의 연쇄를 멈추게 하는 힘을 체제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스스로 만들어갈 때이다.
 

그 구체적인 실천은 일제고사 반대투쟁에서 시작할 수도 있고, 정리해고 철폐나 비정규직 철폐 투쟁으로 점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싸움들이 죽음에 맞서 해방된 삶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되기 위해서는 공장(직장)과 마을은 물론 학교와 교실도 작은 민들레의 투혼처럼 연대와 민주적 공생이 숨결로 흐르는 살아 숨쉬는 코뮌이 되도록 바꿔내는 일이다.

 

신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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