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격주간 정치신문-사노위 : 10호>[생활의 파문] 자본주의, 재앙조차 평등하지 않다

 

[생활의 파문] 자본주의, 재앙조차 평등하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본 대지진과 원전 폭발 이후 전 인류는 공포에 휩싸였다. 자연재해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고,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대자연 앞에 무기력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재앙의 실제 피해를 모든 계급이 똑같이 나눠 갖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재해조차 평등하지 않은 것이다.
 

재앙에 취약한 지역, 계층

재앙에 취약한 지역, 계층이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매년 가뭄이나 홍수, 산사태에 피해 받는 지역,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농촌, 어촌, 산간지대가 자연재해에 훨씬 취약한데, 이런 지역에는 대부분 민중들이 산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홍수 피해는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혹은 지대가 낮은 노동자 밀집지구에 집중된다.
 
지진도 마찬가지다. 도쿄에서는 지역별 건물붕괴위험도 순위를 발표하고 있는데, 상위를 차지하는 지역은 대부분 노동자민중 밀집지구다. 노동자민중의 집은 지진에 취약하여 피해를 입기 쉬운 반면, 자본가의 집은 튼튼하여 지진 피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정부의 구호, 재건 정책의 불평등

불평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부의 재해 구호 정책, 재건 정책 또한 계급을 차별하기는 마찬가지다.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는 허리케인의 피해를 입었지만, 구호는 재앙이 있은 지 며칠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조차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 인해 피해는 수십 배 확대되었다. 백인 밀집지구인 다른 지역에서는 신속하고 전면적인 구호가 이루어졌던 반면, 피해자가 대부분 흑인이었던 뉴올리언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인종의 차이는 계급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구호의 차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분명하다.
 
재건 사업의 혜택 또한, 실제 피해자들이 아니라 기업과 자본으로 가고 있다. 생뚱맞은 일이다. 미국의 경우 별다른 피해를 입지도 않은 마라톤 오일이 정유소 확장 명목으로 10억 달러의 비과세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해안 원유저장시설을 확보하는 데서도 혜택을 받았다. 엑손모빌도 세금혜택을 바탕으로 7천500만 달러의 채권을 발행했으며, 별도로 세금 없이 3억 달러를 차입했다.
 
이렇듯 재앙은 자본가들에겐 또 하나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피해로 물바다가 되었을 때 정치인들과 개발업자들은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쓰나미가 마을을 집어삼켰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의 상황은 다를까? 한국에서도 재앙은, 있는 자들에게는 구호 혜택을 떼어먹을 기회, 개발사업을 진행할 기회일 뿐이다. 피해는커녕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으니 그들이 재앙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재앙조차 평등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앙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거대한 재앙 이후에도, 국가적, 지역적 차원에서 민중들에게 재앙을 견딜 수 있는 주택이 보급되지는 않는다. 재건 사업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마치 재개발 사업에서처럼 피난민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 파탄 난 재해민들의 삶은 수년이 지나도 복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앙의 피해를 입지도 않은 기업은 재건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막대한 이윤을 취한다. 이는 고스란히 자본가들의 차지다.
 
재앙조차 평등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 이 사회에서 과연 노동자의 삶은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사회를 박살내지 않고서 노동자의 삶은 보장될 수 있을까?
 
조영태
조영태일본 대지진과 원전 폭발 이후 전 인류는 공포에 휩싸였다. 자연재해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고,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대자연 앞에 무기력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재앙의 실제 피해를 모든 계급이 똑같이 나눠 갖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연재해조차 평등하지 않은 것이다.
재앙에 취약한 지역, 계층
재앙에 취약한 지역, 계층이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매년 가뭄이나 홍수, 산사태에 피해 받는 지역, 사람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농촌, 어촌, 산간지대가 자연재해에 훨씬 취약한데, 이런 지역에는 대부분 민중들이 산다.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홍수 피해는 상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안 되어 있는, 혹은 지대가 낮은 노동자 밀집지구에 집중된다.
지진도 마찬가지다. 도쿄에서는 지역별 건물붕괴위험도 순위를 발표하고 있는데, 상위를 차지하는 지역은 대부분 노동자민중 밀집지구다. 노동자민중의 집은 지진에 취약하여 피해를 입기 쉬운 반면, 자본가의 집은 튼튼하여 지진 피해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정부의 구호, 재건 정책의 불평등
불평등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정부의 재해 구호 정책, 재건 정책 또한 계급을 차별하기는 마찬가지다. 2005년 미국의 뉴올리언스는 허리케인의 피해를 입었지만, 구호는 재앙이 있은 지 며칠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조차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이로 인해 피해는 수십 배 확대되었다. 백인 밀집지구인 다른 지역에서는 신속하고 전면적인 구호가 이루어졌던 반면, 피해자가 대부분 흑인이었던 뉴올리언스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인종의 차이는 계급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구호의 차별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분명하다.
재건 사업의 혜택 또한, 실제 피해자들이 아니라 기업과 자본으로 가고 있다. 생뚱맞은 일이다. 미국의 경우 별다른 피해를 입지도 않은 마라톤 오일이 정유소 확장 명목으로 10억 달러의 비과세 채권을 발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해안 원유저장시설을 확보하는 데서도 혜택을 받았다. 엑손모빌도 세금혜택을 바탕으로 7천500만 달러의 채권을 발행했으며, 별도로 세금 없이 3억 달러를 차입했다.
이렇듯 재앙은 자본가들에겐 또 하나의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뉴올리언스가 허리케인 피해로 물바다가 되었을 때 정치인들과 개발업자들은 축배를 들었다고 한다. 쓰나미가 마을을 집어삼켰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의 상황은 다를까? 한국에서도 재앙은, 있는 자들에게는 구호 혜택을 떼어먹을 기회, 개발사업을 진행할 기회일 뿐이다. 피해는커녕 더 많은 기회를 누릴 수 있으니 그들이 재앙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재앙조차 평등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재앙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거대한 재앙 이후에도, 국가적, 지역적 차원에서 민중들에게 재앙을 견딜 수 있는 주택이 보급되지는 않는다. 재건 사업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마치 재개발 사업에서처럼 피난민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 파탄 난 재해민들의 삶은 수년이 지나도 복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재앙의 피해를 입지도 않은 기업은 재건 사업이라는 이름 아래 막대한 이윤을 취한다. 이는 고스란히 자본가들의 차지다.
재앙조차 평등하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 이 사회에서 과연 노동자의 삶은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사회를 박살내지 않고서 노동자의 삶은 보장될 수 있을까?
조영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