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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정치신문 사노위 44호> 이슬람 독재로 귀결된 이집트 혁명

이슬람 독재로 귀결된 이집트 혁명

 

 

무바라크 체제와 이집트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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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민중의 항쟁은 전 아랍으로 확대되었고, 이집트에서도 무바라크 독재를 끝내는데 성공하였다. 무바라크 체제 하에서 군부는 건설업, 방직업, 숙박업까지 국가경제의 40∽50%를 장악하였고, 이스라엘과의 평화공존 정책이란 미명 하에 이스라엘이 후방을 걱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를 유린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매년 12억 달러의 군사 지원을 받는 친제국주의 세력의 온상이었다. 즉 무바라크 체제는 반민중적인 친미·친제 군부독재였다.

 

 

 

이슬람주의 세력의 총선 승리와
헌법위원회 장악

 

2011년 2월 무바라크를 몰아낸 이집트 혁명은 최고군사위원회(SCAF)의 과도기를 거쳐 2012년 6월의 무르시 선출, 12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새로운 헌법을 채택함으로써,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였다.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 체제라고 비난받았던 SCAF는 민중들의 열망을 짓밟고 낡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보루였다. 그리고 2011년 말 총선에선 혁명과정에서 온갖 기회주의적 행보를 보인 온건 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의 평화정의당(FJP)이 48%, 살라피주의(이슬람 근본주의)의 알 누르 당이 28%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의회의 다수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은 군부와 친무바라크 보수세력이 온존하고 있는 사법부 그리고 야당(친무바라크 세력, 자유주의 세력, 콥틱 기독교 세력 등)과 타협하여 헌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세력이 타협을 깨고 이슬람근본주의를 관철하려 하자 2012년 11월 중순부터 반무르시 투쟁 혹은 이슬람 헌법 반대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헌법위원회 다수를 장악한 이슬람주의 세력은 세속주의를 부정하며 대통령과 이슬람세력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초안을 밀어붙이려 한 것이다.

 

 

무르시 VS 반무르시


2012년 11월 17일 자유주의자와 콥틱 기독교 세력 29명이 헌법위원회를 사임하였다. 다음 날부터 시민들은 ‘헌법 재제정과 학살책임자 처벌’ 등을 외치며 타흐리르 광장에 집결하였고, 11월 21일 수천 명의 시위대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11월 22일 무르시는 학살진압 책임자의 처벌 요구에 대해 군부와 검찰 최고위층을 해임시키면서 그 이하의 군 장성과 검찰간부들을 면책 조치하였다. 또한 사법부의 헌법위원회 해산시도를 예방하고자 새로운 헌법과 법률, 그리고 정부조직에 대한 사법부의 권한을 부정하고 대통령의 초월적 권한을 규정하는 헌법선언(대통령령)을 발표하였다.
극우들이 몰려 있는 사법부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독재라고 비난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이슬람근본주의로의 회귀와 독재에 반대해 나섰다. 현대판 파라오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헌법선언으로 주요 도시에서 반무르시 투쟁이 본격화되고 격화되었다.

 

 

반무르시 민중투쟁의 격화와 무르시의 승리


무르시 퇴진을 외치는 10만 명이 넘는 시위대는 12월 4일 대통령 궁으로 몰려갔고, 다음날 무슬림형제단 수천 명은 대통령궁 주변에서 농성하는 시위대를 습격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민들 수천 명이 달려와 격렬한 충돌이 빚어졌다. 시민들은 다시 타흐리르 광장 옆 내무부 건물이 있고 2011년 무바라크 축출투쟁의 상징이었던 무하마드 마흐무드 도로로 집결하였다. 계속되는 충돌로 2명이 죽고 451명(이 중 경찰 160여명 포함)이 부상당하고 250명이 연행되었다. 시위가 거세어지자 무르시는 12월 8일 헌법선언을 철회하였지만 헌법채택을 위한 국민투표는 강행되었고, 찬성 63.96%로 새 헌법이 채택되었다.
무르시는 반무르시 세력-이집트 민중, 자유주의 세력, 사법부-을 싸잡아 혁명을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몰아 붙였다. 이 과정에서 자유주의 세력은 반독재의 리더로 부상하였고, 극우보수인 사법부 또한 이슬람독재에 반대하는 전선에 얼렁뚱땅 끼어들었다. 낡은 지배계급의 핵심인 군부는 SCAF의 수장이었던 탄타위를 비롯한 한두 명의 최고위 장성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세력을 온존시켰다. 게다가 미국의 군사 지원도 계속되어 무르시의 굳건한 동맹세력이 되었다. 토론할 기회조차 없이 한 달 만에 강요된 헌법채택을 위한 국민투표는 무르시의 승리로 끝났다.

 

 

지배계급의 재편, 반동적인 이슬람주의 세력과 군부의 연합독재
 

2011년 이집트 혁명은 두 개의 적대진영이 싸운 혁명이었다. 무바라크를 앞세운 군부와 사법부, 특권층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제국주의 세력이 한편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모인 제도야당과 기회주의적인 온건이슬람주의 세력인 무슬림형제단, 근본주의적 이슬람주의자들(살라피주의자), 그리고 억압받는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이 다른 한편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노동자민중의 승리로 귀결되지 못하였다. 무라바크 시절 군부의 권력독점이 군부와 온건이슬람주의 세력의 동맹으로 변하였을 뿐, 반민중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성격엔 변함이 없다. 뿐만 아니라 여성과 시민의 자유에 억압적이고 반동적인 이슬람근본주의의 성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무바라크가 억압당하였던 노동자계급의 단결권과 파업권은 그대로이다.

 

 

혁명을 전진시킬
대안정치세력이 성장해야


따라서 서방언론들이 보도하듯이, 지난 해 말 이집트의 헌법반대 투쟁은 무르시를 앞세운 이슬람주의 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이 앞장선 세속주의 세력 간의 대결로 묘사로만 국한시켜 볼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무바라크로 상징되었던 반민중적인 군부독재가 이슬람주의-군부 동맹의 새로운 반민중적인 독재로 재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집트 혁명은 대중의 격렬한 투쟁만이 아니라, 그 혁명을 중단 없이 전진시킬 정치세력, 투쟁 속에서 대중적 권위를 쌓아온 혁명세력의 성장이 동반되어야 함을 일깨워 준다.

 

박석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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