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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발전의 법칙성, 그리고 혁명

[36호]사적유물론3 : 사회발전의 법칙성, 그리고 혁명  

2008-01-24 12:52:48

 

사적유물론3 : 사회발전의 법칙성, 그리고 혁명

 

 1. 대립물의 통일과 비약, 낡은 통일에서 새로운 통일로!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것은 생산관계이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에 의해서 그 모습이 규정된다. 따라서 사회발전의 역사를 볼 때,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은 사회의 생산력 발전이다. 생산기술은 끊임없이 사회적으로 축적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의 생산력도 끊임없이 현 수준을 넘어서 성장하여 가고, 사회의 발전을 촉진한다.

생산관계는 사회적 생산력의 불가결한 운동 형태이다. 생산력 없는 생산관계는 있을 수 없고, 생산관계 없는 생산력 또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생산은 항상 사회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이 둘은 빛과 그림자처럼 항상 통일되어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은 내부에 모순을 동시에 갖고 있는 통일이다. 사회의 생산력은 끊임없이 현재를 극복하여 성장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생산력에 의해서 규정되는 생산관계는 일단 형성되면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회의 처분에 맡겨져 있는 생산력들은 더 이상 부르주아적 소유 관계들의 촉진에 봉사하지 않는다. 생산력들은 이 관계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강력해져 있으며, 반대로 이 관계들에 의해 방해 받는다. 생산력들은 이 방해를 극복하자마자 부르주아 사회 전체를 무질서로 끌고 가며 부르주아적 소유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부르주아적 관계들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부를 포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것이 되어버렸다.”(맑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

 따라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이란 생산력이 끊임없이 발전하여 가는 데 따라 생산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하여 가는 것처럼 항상 균형이 유지되는 통일이 아니다. 더욱이 고정된 통일은 더욱 아니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으면 풍선이 버틸 수 있는 데까지는 커지지만, 그 이상의 바람이 들어가게 되면, 풍선의 고무 자체의 ‘탄성력’을 넘어서는 시점에서는 풍선이 터지고 만다. 생산관계는 그 체제에서 인정할 수 있는 수준까지의 생산력발전에 발 맞춰 ‘변화’할 수 있지만, 그 체제를 넘어서는 수준의 생산력 발전이 진행되면, 기존의 생산관계가 더 이상 발전한 생산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두 대립물의 통일 속에서 이 둘 간의 모순이 점차로 발전하고 그것이 격화되어 일정한 단계에 달했을 때 낡은 통일로부터 새로운 통일로의 비약, 즉 낡은 통일이 폐기되고 새로운 통일로 대체되는 격변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물질의 일반적인 속성이 인간 사회라는 ‘물질’에 적용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사회의 발전은 바로 낡은 통일에서 새로운 통일로의 비약에 의해 이뤄져 왔다.

“대립의 내부에서 사적 소유자는 … 보수적 당파이고 프롤레타리아는 파괴적 당파이다.”(맑스, 신성가족)

양자의 통일 속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은 처음에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생산력은 그에 조응한 생산관계 아래에서 자유롭게 운동하고 튼튼하게 성장한다. 그러나 그 성장이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면, 이제까지 그 성장을 뒷받침하고 있던 기존의 생산관계가 반대로 성장의 장해물이 된다. 이제까지와 같은 생산, 소유관계 아래에서는 성장된 사회적 생산력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게 되고 억제 당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숨겨져 있던 모순(예를 들면 공황, 실업, 전쟁, 환경문제 등)이 표면화된다. 낡은 통일이 폐기되고 새로운 통일로 대체되는 것, 다시 말해 생산력이 기존의 운동 형태로부터 새로운 운동 형태로 비약하는 것이 불가피해지는 것이다.


2. 더 발전하고자 하는 생산력, 현 상태를 버티고자 하는 생산관계! 사회혁명의 시기

새로운 생산관계가 생산력에 발맞춰 만들어지는 것은 이미 기존의 사회와는 다른 ‘토대’를 가진 사회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토대가 구성되는데 그 토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상부구조라고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

“지배권을 획득하려는 모든 계급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지배가 낡은 사회 형태 전체의 폐지와 지배 일반의 폐지를 조건으로 할지라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된다.”(맑스, 독일이데올로기)

사회혁명이란 낡은 사회구성체로부터 새롭고 생산력의 발전에 들어맞는 더욱 고도화된 사회구성체로의 질적 전화를 의미한다. 이 전화는 흔히 비약적인 격변의 형태를 띤다. 토대가 변혁되면서 거대한 상부구조도 변혁되어야 하는 것이다.

“폭력이 역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역할, 혁명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 즉 맑스의 말을 빌자면 그것이 새로운 사회를 잉태하고 있는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라는 것, 그것은 사회운동이 자신을 관철시키고, 생명을 다하여 화석처럼 굳어버린 정치적 형태를 타파하는 도구라는 것…승리한 모든 혁명의 결과는 엄청난 도덕적, 정신적 진보였음…”(엥겔스, 반뒤링론, 새길)

결국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야 말로 사회발전의 가장 핵심적인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형성된 그대로의 상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려는 생산관계의 성격은 계급사회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지배권을 획득한 이전의 모든 계급들은 자신들 영리 활동의 조건들 아래에 사회 전체를 복속시킴으로써, 이미 획득한 자신들의 생활상의 지위를 보장하려 애썼다.”(맑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

생산관계 속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착취계급은 동시에 정치적 지배계급으로서 그 생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권력과 그 밖의 모든 상부구조의 힘을 총동원하기 때문이다. 이 노력은 기존의 생산관계의 위험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강화된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이러한 책동을 극복하지 않고는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은 실현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많은 대중이 잇따라 참가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의 격화는 소유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생산관계 내부의 대립과 모순이 격화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낡은 사회구성체로부터 새로운 사회구성체로의 전환이 임박한 시기에는 계급투쟁도 격화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야말로 낡은 사회로부터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실현하는 가장 구체적인 원동력이다.

“한 민족의 혁명과 시민사회의 특정계급의 해방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한 신분이 그 사회 전체의 신분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그 사회의 모든 결점들이 다른 한 신분에 집중되어 있어야만 하고 나아가 이 다른 특정 신분이 보편적인 장애의 신분, 즉 보편적인 제약들의 화신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이 특정 영역이 사회성 전체에 대한 악명 높은 침해로서 여겨져야만 하고 따라서 이 영역들로부터의 해방이 사회의 보편적인 자기해방으로 나타나야만 한다. 한 신분이 특히 해방의 신분이기 위해서는 거꾸로 다른 한 신분이 압제를 공개적으로 대표하는 신분이어야 한다.”(맑스, 헤겔 법철학 비판, 아침, 200p)

“…인간의 완전한 상실태이고,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회복에 의해서만 자기 자신을 획득할 수 있는 한 영역의 형성에 있다. 이 같은 사회의 해체를 체현한 특수한 한 신분이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이다.”(같은 책, 203p)


3. 사회혁명 시기의 계급투쟁  

사회혁명의 시기에 계급투쟁은 그 이전 단계에 비해 눈에 띄게 자각적인 투쟁이라는 특징이 강해진다. 그러나 자각적이라는 의미는 그 투쟁의 역사적, 객관적인 본질을 올바르게 자각했다는 의미까지는 아니다.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은 정치적, 철학적, 종교적 이념 등의 목표를 내걸고 그것을 의식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회 내부에서 작용하고 있는 물질적인 힘과 경향의 모순, 충돌의 관념적인 반영이다.

이러한 관념적인 반영이 어떠한 환상적인 요소도 띠지 않고 순수하게 과학적인 것일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을 자신의 행동지침으로 세운 과학적 사회주의자의 경우뿐이다. 일반적으로는 어느 정도 환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예를 들면 중세 말의 농민투쟁이 종교를 기치로 하여 싸운 것처럼) 것을 유념해야 한다.

“의식이란 의식된 존재 이외의 그 무엇일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존재는 인간의 현실적 생활과정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 현실의 생산 과정을 그것도 생활 자체의 물질적 생산에서부터 설명하고, 이 생산 양식과 관련되어 있으면서 또한 그것에 의해 창출된 교통 형태 - 말하자면 여러 단계의 시민 사회 - 를 전체 역사의 토대로 파악함으로써, 그리고 총체적인 여러 이론적 창조물이요 의식의 형태들인 종교, 철학, 도덕 등을 시민사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하고 반대로 그것들로부터 시민 사회의 성립 과정을 추적하듯이 국가 또한 시민 사회의 활동으로 묘사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렇게 할 경우 당연히 모든 문제는 총체성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 이 역사관은 … 실천을 관념에서 나온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물질적 실천에서 관념이 형성되어 나온 것으로 설명한다. 이에 따라 비판이 아니라 혁명이 역사의 추동력이며 종교, 철학, 그리고 여타의 이론들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의해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듯이, 사회변혁 시기의 본질을 그 시기의 의식으로부터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양한 관념, 이념을 만들고 그것에 고무되어 역사적인 투쟁에 나서지만, 그들의 관념과 이념 자체에 이 투쟁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관념과 이념이 역사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당장 현실에서 발등에 불이 떨어지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피지배계급들의 여타의 모순들은 그 사회체제 내부의 영향아래 있는 평균적인 의식과 관념에 의해서는 그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넘어서지 못한다.

동시에 그들의 관념과 이념이 설령 아무리 공상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러한 의식이 생겼다는 것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에서의 모순이 격화되고 그 변혁이 불가피해 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변혁의 의식이 거기에 생겼다는 것은 거기에 변혁의 객관적인 조건이 이미 성숙했다는 혹은 적어도 성숙해가고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제기하는 과제는 항상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혁명적 낙관주의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기초 위에서 성립될 수 있다.


4. 사적유물론의 객관적 법칙성에 덧붙이자면  

이러한 인간 사회의 법칙적 발전의 과정은 대중들이 두 손 놓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도래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하나의 사회체제를 넘어서야하는 필연성을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근본적인 모순과 궁극적인 사회발전 방향에 대해 먼저 자각한 활동가들의 부단한 설득과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앞서도 얘기해왔지만, 지배계급(현재의 자본가)은 경제적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사상적으로도 기득권을 갖고 있다. 이 기득권을 동원하여, 자신의 이해관계를 침해하는 그 어떤 시도들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대중들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관념을 계속 부활시키고, 사상적 융단폭격과 함께 잔인한 물리력을 동원하여 혁명적 흐름을 압살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반동적 시도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이제 노동계급 내부에서의 일사불란한 지도체계가 필요하게 된다. 피지배계급(노동계급 등)은 숫자로는 무수히 많고, 설사 지도 단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생산력, 생산관계의 모순, 토대와 상부구조의 모순 관계에 의해서 모든 짐을 떠안게 되는 현실 때문에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자생적이고 산발적으로 벌어지는 각종의 투쟁들은 낡은 사회구조에서 새로운 사회구조로 비약해야 하는 객관적 현실의 표현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법칙은 당위적인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새로운 사회구조로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체적인 역량을 통해서이다. 다수의 대중들을 체계적인 혁명의 성공으로 이끌 수 있기 위해서는 가장 선진적 의식과 현실에서의 단련을 통한 혁명적 정당이 건설되어야만 한다.

사회혁명은 사회발전에 있어서 법칙적인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 법칙을 실제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정당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회의 발전과 계급투쟁, 모순 해결을 위한 혁명이 단지 주관적인 주장이 아니라, 사회라는 물질의 객관적인 법칙임을 살펴보았다. 다음 호에서는 이러한 인류사회의 발전 과정이 실제로 어떠하였는지를 보기로 하자.<노/정/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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