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임금노동과 자본 - 칼 맑스

 맑스를 읽는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회피나 방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 능동적인 참여를 위한 사전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마치  친구들과 함께 산에 놀러간다고 했을 때 몇인분의 음식이 필요하고 장비는 무엇이 필요하고 간단한 응급처치에 필요한 물품은 무엇 무엇이 있는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생활해가는 데에는 생활수단이 필요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만 합니다. 정확히는 노동력을 판매하여야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사람들을 구매하는 역할을 하게 되고 '상품 구매자'의 논리로서 그들을 대합니다. 될 수록 비용을 깍으려하고 될 수록 적은 비용대비 좋은 상품을 구매하려는 전략을 구사합니다. 구매하려는 자들에게는 단지 그것이 이윤을 얻어내기 위해 쓰이는 비용일 것이고 판매하려는 자들에게는 노동자 가족이 생존하고 생활하는 생활수단을 확보하는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많은 구매자가 생산을 하기 위해 적절한 비용, 즉 최소비용 최대이윤의 원리를 자본주의가 나타난 이후로 고집스럽게 추구하는가에 대한 답은 이윤이 그 구매자의 행복을 증진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이윤이야말로 (노동력) 구매자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최고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노동력 판매자는 적절한 금액, 적절한 보상조차도 요구하지 못합니다. 구매자가 막강한 힘의 우위를 통해 판매자를 침묵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판매자가 사회적으로 지당하다고 여기는 법과 임금이라는 제도, 원칙과 사회질서, '정의로운 이윤'같은 바로 그 철칙에 의해서 말입니다.

 "법을 지키고 질서를 회복하는 사회"가 구매자 진영에는 낭만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입니다.
구매자 진영에는 판매자 진영의 불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환호하게 됩니다.

 오늘도 판매자는 구매자의 언어로 말합니다.
"열심히 기술을 연마하라, 몸값을 높이기 위해 경쟁하라"
"구매자의 이윤은 가장 먼저 보장되어야하는 것이다."
"(고용주의 이윤이 확보되도록 하기 위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하라."
"구매자가 적절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판매자는 구매자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최대한 협력하고 노력을 경주해야한다."

 허나 노동력 판매자가 피해를 감수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자행되고 또 지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고용주도 손해볼 수 있어야 공정한 것이다라는 데에는 좀처럼 생각이 가 닿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맑스의 임금노동과 자본을 한번 읽어보는 것은 상황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양이 다소 긴 관계로 총 5~6회 분량으로 나누어 옮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임금노동과 자본
 - 칼 맑스

 Ⅰ
 
 사람들은 우리가 요즘의 계급 투쟁과 민족 투쟁의 물질적 토대를 이루는 경제 관계들을 설명하지 않았다고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판해 왔다.
 우리는 경제 관계가 정치적 충돌 속에서 직접 떠오를 때에만 의도적으로 언급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벌어지는 계급 투쟁을 추적하는 일, 또 날마다 새로 만들어지는 역사적 자료를 경험적으로 입증하는 일이 중요했다.
 2월 혁명과 3월 혁명을 일으킨 노동자 계급이 진압됨과 동시에, 그들의 적들, 즉 프랑스의 부르주아 공화파, 유럽 대륙 어디서나 봉건적 절대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부르주아와 농민 계급도 패배했다는 사실, 프랑스에서 ≪점잖은 공화제≫가 승리한 것은 동시에 영웅적인 독립 전쟁으로 2월 혁명에 응답한 여러 민족이 몰락한 것이기도 했다는 사실, 끝으로 혁명적 노동자들의 패배와 함께 유럽은 다시 그 옛날의 이중 노예제, 즉 영국 - 러시아의 노예제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는 사실 등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파리에서의 6월 투쟁, 빈 함락, 1848년 11월에 벌어진 베를린의 희비극, 폴란드와 이탈리아와 헝가리에서의 필사적인 노력, 아일랜드의 대기근, 이 모두가 유럽에서 벌어진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계급 사이의 투쟁을 집약해 놓은 주요 계기들이었으며, 우리는 이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입증했다.
 모든 혁명적 봉기는 비록 그 목표가 계급 투쟁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혁명적 노동자 계급이 승리하지 않는 한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또 모든 사회 개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봉건적 반(反)혁명이 무기를 들고 세계 대전을 치르지 않는 한에는 하나의 공상에 그친다는 것을 입증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우리들의 서술에서는 벨기에와 스위스가 역사의 거대한 화폭에 담긴 희비극적이고 희화적인 풍속화였는데, 전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군주국이고 후자는 전형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이 두 국가는 자신들이 계급 투쟁과도 관계없고 유럽의 혁명과도 관계없다고 생각한다.
 
 1848년의 계급 투쟁이 대규모 정치 투쟁의 형태로 벌어진 것을 우리 독자들도 지켜 보았으므로, 이제 부르주아지의 존립과 그 계급 지배의 토대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 노예 제도의 토대이기도 한 경제 관계 그 자체를 좀더 상세히 파고들 때가 되었다.
 
 우리는 크게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하려고 한다.
 1) 임금 노동과 자본의 관계, 노동자들의 노예 상태, 자본가들의 지배, 2) 현체제 밑에서는 피할 수 없는 중간 부르주아 계급들과 이른바 시민층의 파멸, 3) 세계 시장의 전제 군주인 영국에 의해 유럽 여러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들이 겪는 상업적 예속과 착취.
 
  우리는 독자들이 정치 경제학의 가장 초보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것으로 전제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고 쉽게 서술하고자 한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기존 상태를 옹호하는 특허 변호사들을 비롯하여 자칭 사회주의적 사기꾼들과,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정치적 천재들 - 분열된 독일에는 이런 자들이 나랏님들보다도 더 많은데 - 에 이르기까지, 가장 간단한 경제 관계에 대해서도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극심한 무지와 개념적 혼란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우선 첫번째 문제를 살펴보자.
 
 임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노동자들에게 ≪당신의 임금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는 나의 부르주아로부터 일당 1마르크를 받는다.≫고 대답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2마르크를 받는다.≫등등의 대답을 할 것이다.
 그들이 속해 있는 다양한 노동 부문에서 노동을 한 대가로, 예를 들면 아마포 한 자를 짜거나 전지(全紙) 한 장 분량을 조판하는 데 대한 보수로 그때그때마다 부르주아에게서 받는 다양한 금액을 제시할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금액이 다양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한 점에 귀착한다.
 즉 임금이란 자본가가 정해진 노동 시간 또는 정해진 노동을 제공하는 데 대해 지불하는 금액인 것이다.
 
 따라서 마치 자본가는 돈으로 노동자의 노동을 사고, 또 노동자들은 돈을 받고 그에게 자신의 노동을 파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돈을 받고 자본가에게 파는 것은 사실상 자신의 노동력이다.

 자본가는 이 노동력을 하루, 한 주일, 한 달 등의 단위로 산다.
 그리고 노동력을 산 뒤에 그는 계약 기간에 노동자를 부림으로써 그것을 쓴다.
 자본가는 자신이 노동자의 노동력을 산 바로 그 금액, 예를 들면 2마르크로 2파운드의 설탕이나 정해진 분량의 다른 어떤 상품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가 2파운드의 설탕을 사는 데 쓴 2마르크는 설탕 2파운드의 가격이다.
 그가 12시간 동안 쓸 노동력을 사는 데 쓴 2마르크는 12시간 노동의 가격이다.
 따라서 노동력은 설탕보다 나을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는 하나의 상품이다.
 전자는 시계로, 후자는 저울로 측정된다.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하며, 이 교환은 정해진 비율에 따라 이루어진다.
 즉 정해진 시간 동안 사용될 노동력이 정해진 양의 화폐와 교환되는 것이다.
 12시간 동안 베를 짜는 작업은 2마르크와 교환된다.
 그런데 이 2마르크는 내가 2마르크로 살 수 있는 다른 모든 상품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사실상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을 모든 종류의 상품과, 그것도 정해진 비율로 교환해 왔던 것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2마르크를 줌으로써 그에게 그만큼의 고기, 그만큼의 옷, 그만큼의 땔감, 그만큼의 등잔불 등등을 그의 노동일(勞動日)과 교환해 준 셈이다.
 따라서 이 2마르크는 노동력이 다른 상품들과 교환되는 비율, 즉 그의 노동력의 교환 가치를 나타낸다.
 화폐로 표현된 상품의 교환 가치가 바로 상품의 가격인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란 사람들이 보통 노동의 가격이라고 부르는 노동력의 가격을 가리키는, 즉 인간의 피와 살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이 독특한 상품의 가격을 가리키는 특별한 이름일 뿐이다.
 
 한 노동자, 예를 들어 직조공을 생각해 보자.
 자본가는 그에게 직조기와 실을 제공한다.
 직조공은 일에 착수하며, 실은 아마포가 된다.
 자본가는 그 아마포를 차지하고 그것을 예컨대 20마르크에 판다.
 그러면 직조공의 임금은 아마포 가운데 한 부분, 20마르크 가운데 한 부분, 그의 노동 생산물 가운데 한 부분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아마포가 팔리기 훨씬 전에, 어쩌면 그것이 완성되기 훨씬 전에 직조공은 자신의 임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가는 아마포를 팔아서 생기는 돈으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된 돈으로 지불한다.
 부르주아가 제공한 직조기와 실이 직조공의 생산물이 아니듯이, 그가 자신의 상품인 노동력과 교환하여 받은 삼품들도 그의 생산물이 아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마포를 살 사람을 전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가 그것을 판다고 하더라도 임금조차 뽑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또 그는 그것을 직조공의 임금에 비해 아주 많은 이윤을 남기고 팔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직조공과 아무 상관도 없다.
 자본가는 자신이 이미 지니고 있던 재산, 즉 자기 자본의 일부분으로 직조공의 노동력을 사며, 이것은 그가 자기 재산의 다른 부분으로 원료 - 실 - 와 노동 도구 - 직조기 - 를 사는 것과 꼭 마찬가지다.
 아마포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을 포함해 이것들을 다 산 뒤에 자본가는 생산을 하게 되며, 이때 원자재와 노동 도구는 단지 그의 것일 뿐이다.
 물론 우리의 착한 직조공도 후자(노동도구 - 역자)에 속하는데, 그는 직조기와 마찬가지로 생산물이나 생산물의 가격 가운데에 자기 몫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
 임금은 자본가가 얼마만큼의 생산적 노동력을 사들이는 데 사용하는 기존 상품의 일부다.
 
 따라서 노동력은 그 소유자인 임금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하나의 상품이다.
 그는 왜 그것을 파는가? 살기 위해서다.
 
  그러나 노동력의 활용, 즉 노동은 노동자 자신의 생명 활동이며 자기 삶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필요한 생활 수단을 확보하려고 이 생명 활동을 제3자에게 파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생명 활동이 그에게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살려고 일하는 것이다.
 그는 노동이 자기 삶의 일부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그의 삶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제3자에게 내맡긴 하나의 상품이다.
 따라서 그가 활동해 낳는 산물도 그가 활동하는 목적이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생산하는 것은 그가 짜는 비단도 아니고, 그가 광산에서 캐내는 금도 아니며, 그가 짓는 궁전도 아니다.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생산하는 것은 임금이며, 비단·금·궁전이 그에게 오면 정해진 양의 생활 수단으로, 아마 면재킷이나 동전이나 지하실 주택으로 변할 것이다.
 그런데 12시간 동안 천을 짜고, 실을 뽑고, 구멍을 뚫고, 선반을 돌리고, 집을 짓고, 땅을 파고, 돌을 깨고, 짐을 나르는 등등의 일을 하는 노동자가 이 12시간 동안의 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선반 작업, 집짓기, 삽질, 돌깨기를 자기 삶을 드러내는 것으로, 즉 삶으로 여기겠는가? 정반대다.
 그의 삶은 이러한 활동이 멈출 때, 이를테면 식탁에서, 선술집 의자에서, 잠자리에서 시작된다.
 반면에 12시간의 노동이 그에게 뜻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옷감짜기, 실뽑기, 구멍뚫기 등등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식탁으로, 선술집 의자로, 잠자리로 데려다 주는 벌이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에가 애벌레로 근근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실을 뽑는다면, 그 누에는 틀림없는 임금 노동자일 것이다.
 
 노동력이 늘 상품이었던 것은 아니다.
 노동은 늘 임금 노동, 다시 말해서 자유로운 노동이었던 것이 아니다.
 황소가 자신의 능력을 농부에게 팔지 않듯이, 노예도 자신의 노동력을 노예 소유주에게 팔지 않았다.
 노예는 자신의 노동력과 함께 통째로 그 소유자에게 영원히 팔리기 때문이다.
 그는 한 소유자의 손에서 다른 소유자의 손으로 넘어갈 수 있는 상품이다.
 그 자신이 상품이며, 노동력이 그의 상품인 것은 아니다.
 농노는 자기 노동력의 일부만을 판다.
 그가 지주에게서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지주가 그에게서 공납을 받아 낸다.
 
 농노는 토지에 딸려 있으며 토지의 주인에게 수확물을 바친다.
 반면에 자유로운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팔며, 그것도 토막으로 나누어서 판다.
 그는 날마다 자기 삶에서 8․10․12․15시간은 그것을 산 사람의 것이다.
 노동자는 그가 바라면 언제라도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에게서 떠나며, 또 자본가도 그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면 언제라도 곧바로 노동자를 해고한다.
 즉 그가 노동자에게서 이득을 보지 못하거나 기대했던 것만큼 이득을 보지 못하면 곧 해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 판매가 유일한 소득원인 노동자는 굶어 죽지 않으려면 구매자 계급 전체, 즉 자본가 계급을 떠날 수가 없다.
 그는 이 자본가 또는 저 자본가의 소유물은 아니지만 자본가 계급의 소유물인 셈이다.
 따라서 그가 할 일은 주인을 찾는 것, 즉 이 자본가 계급 속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살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본과 임금 노동의 관계를 좀더 상세히 다루기 전에, 임금 결정에 영향을 주는 가장 일반적인 사정들을 간단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임금이란 상품, 즉 노동력의 가격이다.
 따라서 임금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을 결정하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상품의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하는 물음이 나온다. <계속>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