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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에 대한 인식, 제 계급의 상황, 계급투쟁

  시민사회에 대한 인식, 제 계급의 상황, 계급투쟁

  현실 사회를 살아가다보면주변에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 유형을 정리해보자.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삶의 여유가 없는 사람(?), 삶의 여유가 중간정도있는 사람(?). 헌대 여유가 있는사람과 여유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어이 친구, 여유가 없드라도 여유를 찾으라구~"
  
  또 흔히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그 중간 정도 사는 사람 이렇게도 나눌 수있을 것이다. 헌대 이러한 구분도 또한 모호하다. 어느 정도를 잘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 어느 정도를 중간정도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것들 -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게 되거나, 또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구분이 아니라 어떤 분명한 선이 있어서 기준으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는그 구분을 어떤 측면으로부터 접근해야 현실을 비교적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건 아마 고용-피고용 관계의 측면이 될 것이다.
 
  한국사회를 살다보면 회사에 고용되어 사는 사람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된다. 어느회사, 어느 공장, 어느 사무실, 어느 점포, 어느 매장, 어느 학교, 어느 관공서 ...이렇게 타인에게 고용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의 무리를 이룬다. 이들은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이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타인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신이 생산한 생산물=잉여가치 중 일부를 임금으로 받아 살아가는부류이다.  
 
  또한 이들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이윤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이들도 또 하나의 무리를 이룬다. 이들은 부르주아=자본가 계급이다. 이들은생산수단을 가졌으므로 타인의 노동력을 제공받아 이윤을 내어 살아가는 부류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중간 형태는 없을까? 아까 고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므로 그에따라 생각을 진척시켜보자. 타인에게 고용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고용하여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를 고용하려면 자신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것이다. 이들이 또 하나의 무리를 이룬다. 이들은 소부르주아=자영업자 계급이다.이들은 소상인, 농민, 전문직의 형태로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볼 수 있다. 
 
  이제 이들 무리들 사이에는 잉여생산물(잉여가치)을 두고 투쟁이 벌어진다. - 그 유래에 있어 이들 계급이 형성되자 마자 시작되었던, 아니 그것은 그 보다 더 오래된시기 먼 과거로부터 있어 온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뭐 그건 역사적인 것이겠지요?'라든가 '뭐 그다지 피부에 와 닿는 일들은 아닌 거군요'라든가 '그렇게 오래 싸워왔으니 이젠 서로간에 긴장이 풀리고 싸움자체가 지리해지지 않았을까요?.' ' 뭐 당장은 투쟁을 잠시 쉬어도 되는 거겠죠'라든가 '뭐 당장 그 싸움에 의해 우리가 으깨어지지는 않겠군요. 보세요. 그다지 타격이 오지는 않는군요.'  '굳이 복잡하게 살게 뭐 있나요? 별 무리없다면 그냥 편하게 사는 쪽으로 생각할래요. 안 그래도 삶은 복잡하쟎아요?' 등의 말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헌대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 기세가 꺽인 것이 아니다. 더우기 이 계급투쟁은 한정된 공간에만 - 골목 어느 귀퉁이에 벌어지는 - 해당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요점은 인간이란게 숨을 잠시 멈출 수는 있다고 해서 아주 숨을 쉬지 않고도 우리가 살 수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또 (계급투쟁은) 접촉면이 넓어서 우리가 물에 첨벙하고 둘어가면 온 몸이 물에 젖는 거와 같다. 우리는 이미 이에 흠뻑 젖어있는 채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도 이 세계 - 생산관계에 들어왔다. 그리고 노동자 무리에 속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깨어나 보니 유명해졌더라"가 아니라 "의식을 되찾고 나니 노동자 편에 속해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우리 노동자는 생활수단을 살 때 판매자에게 자신이 노동하여 받은 화폐의 일부를 지불하게 된다. 이때 노동자가 생활수단에 지불하는 단순한 행위는 행위자가 보기에는 계급투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왜냐면 그는 상품을 파는 자에 주목하지 않으며 어떤 상품이 나에게 필요할까에 대해 골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소비자인 노동자는 상품의 가치에 해당하는 화폐를 지불하고 같은 크기의 가치에 해당하는 상품과 맞바꾸게 되므로 그것(구매 또는 교환)에 대해 이의가 없다. 이것은 등가교환, 즉 같은 크기의 가치끼리의 교환이다. 저울의 양쪽에 같은 무게가 있어 저울추가 평형을 이루는 것과 같은 셈이다. 허나 이제 장소를 옮겨 일터 현장으로 가보자. 실질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은 바로 그곳이다. 
 
  어떤 사람이 하루의 길고도 지루한 노동 끝에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크기 정도의 생산물을 생산하는 경우를 가정해 보기로 하자. 실제 이것은 인류가 야만과 원시의 시기 언저리에서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시대를 넘어 요근래에는 통상적으로 어떤 사람이 그 생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정도의 크기를 갖는 (생산물의) 경우이다. 생산물의 크기가 그보다 적을 경우 원시 & 야만의 시대, 인류의 초기에서라면 인간은 그 자신의 생존뿐 아니라 종족의 유지-존속이란 것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서라면 그 '어떤 사람'은 생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노동자가 하루를 노동한다고 해보자. 그는 생산물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 크기는 자신의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크기보다는 클 것이다. 하루 8시간을노동한다고 할 경우 하루 중 4시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생산물을 생산해 내는 시간의 크기라고 하자. 이 부분은 필요노동시간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4시간은 그잉여의 생산물을 생산해내는데 쓰이므로 이 부분은 잉여노동시간이다. 그렇게 생산된그 잉여의 생산물은 노동력을 구매한 (노동력의) 사용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부분은 생산물을 생산한 자인 노동자에게 지불되지 않는 부분으로 이 부분을 부(지)불노동이라고 하게 된다. 고용주(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하지 않는 잉여분을 무상으로 취득하고 있는 것이다.
 
 사장(자본가)이 사업을 할 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살펴보자. 자본가는 생산시설(기계, 건물 등)과 원료와 함께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한다. 생산시설과 원료는 등가에 따라 구매하는 것이고 그와 마친가지로 노동력 상품도 등가에 따라 구매하는 것이다. 생산시설과 원료의 가격은 그 생산시설 상품과 원료 상품의 각 생산비에 따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격도 노동력 상품의 생산비와 같다. 따라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것은 노동력 상품의 생산비와 같은 크기의 노동력인 것이다. 모든 상품은 그 가치대로 교환된다는 원리에 의거하면 노동자는 필요노동시간동안 노동하면 된다. 그것이 정당한 교환인 것이다.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달에 의해 인류의 필요노동시간은 극도로 줄어들어 있다. 오늘날의 생산력은 인류가 2시간정도의 노동함으로서 전 인류가 불편없이 생활하고 생산력을 발달시켜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노동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노동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도시의 야경, 공장, 사무실, 매장의 휘황찬란한 불빛에서 알 수 있다. 생산력의 발달이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미미하였던 원시 & 야만의 시대에서조차 우리 노동자는 야간에 노동하지 않고도살았다. 또한 얼마나 강도높은 노동을 하고 있는가하는 것은 자본가 계급의 사람들에비해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이 얼마나 빨리 늙고 병드는가하는 것, 그리하여 그 본래수명보다 얼마나 빨리 죽어가는가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노동자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노동하고 있는가?  일반 상품과 달리 노동력 상품은 임금노동를 통한 자본축적을 기반으로 하는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서 잉여생산물을 자본가가 전부소유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한국 사회, 자본주의 체제는 그것을 기본으로 운영되는 생산형태이다.  

참고한 책


   어떻게 하면 노동계급의 사람들이 처한 부당함 - 부르주아 지배계급에 의해 이것이 법이고 이것이 질서다!라고 관철되는 부당함에 대해 자신의 정당한 몫을 주장하여 지키고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노동계급의 사람들은 너무나 제각각이고 또 수도 엄청 많지 않은가! 게다가 표준화되어 있지도 않지 않은가! 많은 만큼 생각이 다 다르고 그에 따라 하는 말조차 다르지 않은가!(한국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동료들과 대화해 보라. 고슴도치의 사랑만큼이나 다가갈 수 있는 한계가 명확한 사안인 것이며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상처받지 않는 방식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각자 다른 취향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영원한 자기 편을 하나 만든 후(결혼하여) 오로지 제 가족만을사랑한다. 다른 연예인을 사랑하며 심지어 다른 정치인을 지지하고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 우리는 끼리끼리 나뉘어 서로를 험담하며 미워하고 동료들과 반목하고 서로서로 경쟁한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우리는 그 이유가 각자 경험이 다르고 각자의 취향이 남다르기 때문에 있으리라고 생각하곤 한다. 허나 그것만으로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이 있다. 물리적, 사회-지정학적 위치와 무관한 인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단위 자본이 다른 자본과 시장을 두고 무한경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반면 노동자계급의 사람들이 서로서로 생존을 두고 경쟁하는 것은 다분히 인위적인 측면이 있다. 노동계급의 사람들사이에 불화는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다. 상대를 뭉치지 못하도록 흩트려놓고 상황을 모호한 채 놓아 두고, 입장과 태도에 대해서는 명확한 것을 피하고 상대를 혼란에 빠지게하는 것이 게임을 계속 이기게 하는데에 유리한 법이다.
 
  허나 인간은 서로 연대하고 화합하는 데서 더욱 안정감을 갖으며 서로의 삶이 풍요로울 수 있음에도 현실 세계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어떤 외적요인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않은지에 대해 검토해 볼 이유로서 충분하다. 바벨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벨의 사람들에게 공동의 적이 있었다면 그들은 서로의 말을 배워 결집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한다. 노동계급의 사람들에게 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재해 있는 상황인 것이다. 신은 우리의 말을 흩으셨지만 동료들을 조직하고 결집하고 단결한다면 그 신도 더이상 자유를 열망하고 해방을 꿈꾸는 노동계급의 사람들을 훼방놓지는 못하게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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