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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짐

 

 

 

 

남편이 소개팅을 주선해서(아유 판타스틱해라~!!)
남편 사무실로 찾아갔다.
사무실은 예전 민예총처럼 허름하고
예전 민예총보다는 좁았다.

나는 사무실 안에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입구에서만 인사하고 나왔다.
그곳에는 두 명의 여직원과
남편 말고 다른 남직원이 한 명 더 있었고
그리고 사장이 있다 하는데 보진 못했다.
소개팅 시간이 남아서
어딘가에 짐을 두러 갔다.

나는 개산책할 때 입는 네로옷을 입고 있었고
(플란더즈의 개 의 네로처럼 무릎을 꿰맨 옷)
노숙인처럼 옷보따리를 주렁주렁 들고 있는 상태였다.

봉천동 어느 주민의 집같은 곳에다가
주렁주렁 옷보따리를 다 맡겨놓고
네로옷을 벗고 미니스커트와 하이힐로 갈아입음.
차려입고 거리를 걷는데
기분이 좋았다.

소개팅남은 매력적이라서
즐거웠고 유쾌했다.
마지막에 볼뽀뽀를 했는데
볼에 챕스틱자국이 남아서
닦아주었다.

남편 사무실로 돌아가는데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내 보따리에 있는 내 옷이었는데
사무실 여직원들이

‘저 여자는 소개팅하러 간다더니
옷까지 얻어입었네’

할 것같았고
그런 오해를 받을 것같아서
참 싫었다.


남편 사무실에 들어서니
여직원들은 역시나 그런 눈으로 나를 봤고
남직원은 3시에 나간다하고
남편은 5시에 나간다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남아있어서
나는 다시 보따리를 찾으러갔다.

보따리를 찾으러 간 동네는
옛날 봉천동이었는데
너무나 많이 변해있었다.
구불구불했던 길은 세련된 블럭으로 덮여있었고
공원이 조성되어있었다.
공원에는 벚꽃, 살구꽃이 예뻤다.
꽃잎이 날리는 공원길을 걸으며
옆에 있는 소녀에게
여기 정말 너무 좋아졌어요
하니
참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

1.꿈 전문가의 말

주렁주렁 보따리는,
내가 처해있는 상황,
쓸모도 없는데 버리지도 못하는
그러면서도 나를 구속하고 있는
내 상황에 대한 상징이라고 했다.

잠시라도 그것을 어딘가에 맡기고
즐거울 수 있었다는 것은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적응했거나
한시름 놓을 만큼의 여유가 생겼다는 것.

갈아입은 옷은 나의 짐 속에 있었음에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닐 거라고
남자 덕을 본 걸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또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내가 생각하는 건

지나온 시간이
그랬을 거다, 라는 것.
빙고~!


나는 남편보다 더 먼저 장애관련 일을 시작했고
남편의 성과가 알려진 데에는 내 영화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큐를 만들어서 신문과 라디오, TV에 나왔고(잘만들어서가 아니라 최초의 영화라서)
내 주인공들과 함께 만든 영화가 TV와 신문, 라디오에 보도되었고
그래서 남편 일터의 지명도가 높아졌고
그래서 남편의 활동영역이 확장되었고.... 뭐 그렇다.
함께사는세상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데에는
영화 때문에 그곳을 알게된 고위직 공무원의 도움이 컸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나를 남편의 일부로 본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쓰지 않는다.
어차피 그와 나는 필드가 다르고
그래서 내 인생은 최근까지 칸막이 인생이었다.
교회에서 나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누군가 말을 시키면 그냥 웃었다.
그의 칸에 갈 일이 있으면 나는 투명인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조용히 있었다.


하돌 어렸을 때 지방에 강의를 갔었다.
그 당시 남편은 혼자 아기보는 일을 못해서
꼭 애들을 데리고 나를 따라다녔다.
나의 지방출장을 따라가면 이동할 때에는 내가 아기를 돌보고
강의하는 딱 그 시간만 자기가 애를 보면 되니까.
그 날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는 동안에
남편이 강의실 바깥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었는데
나를 섭외한 교수님이 남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아니, 신부님이 여기 웬 일이세요?"


우리는 각자 활동을 했고
나와 남편의 관계를 구태여 알릴 필요도 없었기에
10년 가까이 우리를 각자 알고 있었던 교수님은
나와 남편이 부부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셨다고.

문제는 남편의 요청으로 남편의 필드에 갔을 때 생긴다.
늘 생겨왔다.
돈이 없어서 나를 부른다.
내가 일하러 간다.
그리고 그들은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한다.
가장 많이 받는 오해는
내가 남편의 조직을 이용해서 이익을 취한다는 거다.


미디어교육을 통해서 당사자의 발언이 강화되고
그 활동의 성과로 자기 조직의 지명도가 높아지고
그로부터 큰 혜택을 받아본 남편은
강화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싶어했다.
강화의 첫번째 일터에서는 내 학생들에게 책임을 넘겼다.
충분한 기금을 따냈기 때문에
내 학생들에게는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제공하는 거였고
남편네 일터에는 국내최고의 예술대학으로 알려진
한예종 전문사 학생들이 와주는 거니까
피차 만족스러울 상황이었다.


한 번 가보면 그 분위기를 안다.
남편의 첫 일터는 젠더감수성 제로였고
강화는 소위 토호들이 모든걸 다 장악하고 있었다.
시골의 장애인시설은, 특히 남편의 첫번째 일터같은 곳은
모두가 선호하는 직장이었다.
칼퇴근이었고 일도 그다지 힘들지 않다.


발령을 받자마자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의 팔이 부러져서 쉬게 되었고
남편은 노동법에 나온대로 조처를 취했는데
알고보니 그 다친 분이 지역유지의 아내였고
그 조처 때문에 마을에서 안좋은 말이 돌고...
뭐 그런 곳이었다, 강화는.


강화가 너무 이상했던 것은
강화 사람들은 남편에 대한 불만을 나와 아이들한테 푼다는 거다.
정글의 법칙만이 노골적으로 지배하는 곳이었다.
서울에 남고 싶어서 남편만 강화로 이주했던 첫 해,
금요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신촌에서 버스를 타고 강화로 왔다.

그 일주일동안 남편의 동료사제는 남편과 관계가 좋으면 우리한테 친절했고

남편과 관계가 좋지 않으면 인사를 해도 무시했다.

그 사제는 온수리에서 가장 부자라는 교회 권력자 부부와 아주 친했다.
내가 전해들었던 소문 중에는
그 교회의 할머니들이 남편의 차별없음을 환영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사제는 전형적인 쓰레기였다. 여성사제여서 더 기가 막혔다.
남편과 그 사제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결국 그 사제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그 사제는 발령이 났지만 그 관계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온수리 부자의 아내(사제가 언니 언니 하면서 친밀함을 과시했다고 하니 이제부터는 사제언니라고 불러야겠다)는 사제와 똑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다.
사람들이 많을 때에는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단 둘이 있게 되면 인사를 안받는 거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인사를 하면 그냥 빤히 쳐다본다.
그러니까 남편의 장에서 투명인간이 되고 싶어했던 소원이
그런 식으로 이뤄졌다.


사제언니의 차별은 참 정교해서
자기의 권력을 어떻게든 발휘했다.
식사를 하고 있으면 남은 반찬이나 식사재료를 봉지에 싸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특별히 우리 테이블에 찾아와서
과도한 친절을 보이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눠준다. 나만 빼고.
내 아이들과 내 아이들의 친구가 나란히 앉아있으면
그 친구한테만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장된 다정함을 과시한다.
사제언니가 없을 때 자기가 받은 봉지를 내게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다.
부엌의 권력, 사적 영역의 따돌림은 참 피곤했다.
이렇게 쓰다보니 참 나도 대단했네.
쓰다 보니 잊고 있었던 마음이 응어리가 남아있는 게 느껴진다.
주기적으로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나는 웃었다.
칸막이 인생을 선택한 마당에
주일이면 내가 수행했어야할 임무였으니까.
강화는 그렇게 전근대적인 곳이었고 차별이 공기처럼 떠도는 곳이었다.


2013년 남편의 갑작스런 대기발령으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개인적으로 가장 신났던 일은
더 이상 사제언니에게 인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사제언니와 달라서
사람 많을 때와 사람 없을 때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니
어디서든 일관되게 그냥 안했다.
호빈이 처음으로 명절 때 집에 안갔을 때 느꼈던 그 희열같은 걸
나도 그 때 느꼈다.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공부방 앞에서 스쳐지나갈 때
사제언니는 평소처럼 나를 빤히 쳐다봤고
나도 빤히 쳐다봐주다가
돌을 보듯, 나무를 보듯, 무심하게 눈길을 거두었다.

올해 성탄절, 아이들 공연 때문에 혼자서 온수리교회에 갔다.
나는 아이들을 찍기 위해 맨 앞줄에 앉아있었고
사제언니는 일부러 내 앞에 와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래서 나도 빤히 쳐다봐주었다. 반쯤만 웃음을 머금은 채로.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런 걸 아주 잘하거든요.

의외의 재미있는 순간도 있다.
사소하지만 혼자서 킥킥거리는.
2017년에 강화마을 미디어교육을 했다.
원래는 덕포리교육장에서 했었는데
너무 외지다고 해서
온수리교회 마당에 있는 공부방에서 했다.
나는 몰랐는데 당시 교육생들이
강화에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우리 교육생 중에는
석모도에서 캠핑카를 여러 대 두고 펜션을 하는 분이 있었는데
부부가 같이 왔다.
수업을 잘 못 따라왔고 그래서 더 열심히 가르쳐드렸다.
그런데 어느 밤, 공부방 앞에서 그 부부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사제언니가 지나갔다.
사제언니는 펜션부부와 아주 친한 것같았는데
(뭐 부자들은 부자들끼리 친하겠지)
여기는 어쩐 일이냐 물었고
부부는 미디어교육한다고
우리 감독님이 아주 잘 가르쳐주신다고 나를 가리켰다.
나는 늘 그렇듯이 빤히 사제언니를 쳐다봐주었다.


2010년 강화발령이 났을 때
갑작스런 발령으로 급히 집을 구해야했을 때
강화에 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 곳은 윤성호 만화 ‘이끼’에 나오는 곳같은데
내가 이곳에서 살수 있을까...
들리는 소문으로는 교우들이 스스럼없이 집을 방문한다고 해서
찻잔세트를 사고 커피를 비롯, 각종 차를 마련했다.
다행히 우리의 사택이 장애인 타운 안에 있어서
저수지 옆 외진 곳에 있어서
손님은 아주 드물게 왔다.

손님이 아무 때나 온다는 소문은 틀렸지만
‘이끼’와 같은 곳일 거라는 나의 예감은 맞았다.
남편은 토호들에게 완벽하게 패배했고
결국 쫓겨났다.
쫓겨나던 그 상황을 몇 번이나 복기해보고
사무실 동료들과 당시 상황들을 다시 추리하다보면
재미있는 스릴러다큐가 나올 것같은데
남편은 성공회가 우스워보인다고 영화는 만들지 말라고 한다.
지금은 소송이라도 할 수 있지
그 때 남편은 그 치밀하고 탐욕스러운 권력자들 사이에서
앞에서 신부님 신부님 하며 받들어준다고
의심없이 멍청했다.
내 말들을 신경쇠약직전에 빠진 여자의 헛소리로 생각했던 남편은
이제와서 후회한다. 바보. 

이제는 남편의 자장으로부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비슷한 시도를 만났다.
남편이 어떤 공동체를 꿈꾸고 있고
나도 같이 해야하나 망설이던 그 곳에서
비슷한 반응을 만났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없이 그 곳을 떠났다.
누구와 어떤 모습으로 노년을 맞을까
한가할 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괜찮아. 어디든 여기보다는 나을 거야.

 

2.
소개팅 남은 소년이었다.
그리고 나도 소녀였다.
아마 18, 19시절.
투명하고 스스럼없이
낭만적 사랑에 대한 동경이
가득했던 시간.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다시 그 때로 돌아가서
절대로 고대는 가지 않고
절대로 운동도 하지 않고
마음이 하는 소리에 열심히 귀기울이면서
마음가는대로 사랑하고
마음가는대로 살아갈테다.


3.

M과의 이별은 나를
바삭바삭한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그 질척이면서도 끈끈했던 관계.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이렇게 생각했다.
‘M과도 헤어졌는데
너를 떠나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내가 못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어...’
슬픔도 기쁨도 없이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고
결혼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아인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고아가 아니었어.

부모가 없는 건 맞는데
가진 게 한 푼도 없는 건 맞는데
(0이 아니라 마이너스라서 그의 빚까지 갚아줘야했다...)
섬김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겹겹에 층층이었어.
교회 안에서보다 더 숨막히는 상태로
명절을 보내다가
결국은 이혼이 현실화되자 그때서야 명절 때 내가 안가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밀려서 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같고
그래서 명절 때만 되면 여전히 살얼음판이다.

2018년에 남편은 쫄딱 망했다.
2013년보다 더 망했다.
2013년부터 명절에 안갈 수 있었던 건
그 때 남편이 망했기 때문이다.
집도 없어지고 차도 없어지고 직업까지 없어졌다.
집이 없고 차가 없고 직업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속인 그 행태 때문에
이혼은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근데 아이들이 너무 어렸어.
지금은 2013년보다 더 망한 상태이다.
도덕성까지 의심받고 있으니.
이번 설엔 처음으로 불편한 마음을 숨기더라.
사제언니한테 하는 것처럼
가끔 남편에게 웃으면서 복수하는 순간을 꿈꾸기는 하는데...
불쌍해서 못하겠다.
어쩌면 저렇게 불쌍할까.
가진 것도 없고
살뜰하게 챙겨주는 가족 하나 없고
거기다가 자기에 대한 성찰까지 없는데
이제는 정말 벼랑까지 몰려서
갈 데가 없어서
버림받을까봐 어쩔 수 없이
내 말에 귀기울이는 그를 보면서
생각한다.
이 연민에 나는 망할 거다.
제발 지금보다 좀 나아져라.
내가 편안한 마음으로 너를 떠날 수 있게.
 
4.
영화를 보러왔는데 시간이 많이 남아서
종로를 돌아다녔다.
창밖에는 어떤 풍경들이 보였다.
20대의 민예총 편집실에서 보았던 풍경.
사무실은 옥탑방에 있었고
잠시 밖으로 나오면 맞은편 건물 2층
열린 창으로 마작을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게이바였던 지하1층.
그리고 낙원상가.
장미꽃을 들고왔던 M.
M을 못마땅해했던 편집장.

그때 보았던
그 풍경을
다시 보며
M, 너를 생각했다.

대단했던 너의 엄마를 피해서
너랑 같이 있으면 내가 없어질 것같아서
그렇게 너를 떠나왔는데
피하지 말았어야 했나봐.
그거 알아?
너의 엄마는 내게 여러 번 말했어. 전화로도. 직접 만나서도.
“너만 우리 M마음을 돌릴 수가 있어.
다시 삼성으로 돌아가라고 그래.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니가 잘 설득을 해“

너의 엄마는 너에 대한 애정이 너무 지나쳤고
나는 그 애정의 독에 치이는 게 싫어서
너를 떠났는데

새로 떠나온 이 곳에는

그에 대한 애정 따윈 하나도 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그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살아야했다.

그래서 이제는 도망가지 않으려고 해.
이 곳에 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인생을 위해서.
내 앞에 닥치는 문제를 피한다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거든.
그 문제는 눈덩이처럼 더 커진 채로
다시 나타나.
정면돌파하지 않으면
나는 평생을 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할거야.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선택이었고
삶은 좀더 나은 다음 생을 위한
트레이닝장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의연하고 당당하게 이 순간을 맞으려고 해.

뭐 달리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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