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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31 저녁 8:45

저번날 체했던 은별을 위해 한의원에서 배운 방법들을 유용하게 썼다.

선생님한테 배운 걸 하은에게 알려주고 내 등을 두드리게 했다.

따뜻한 물을 데워 마시고  따뜻한 물병을 안고 잤다.

두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더니 아픈 게 없어졌다.

내가 자는 동안 하은은 빨래를 했다.

나는 안 먹더라도 하은은 저녁을 먹어야할 것같아서 나가자고 했는데

하은은 발바닥이 아파서 못 나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혼자 나가서 밥을 사왔다.

숙소 앞 '화이트하우스'라는 곳에서 볶음밥 포장을 주문했는데

음식이 늦게 나와 오래 앉아있어야 했다.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찬  식당

밤바람에 섞인 꽃냄새

접시들로 가득한 탁자

음료, 대화, 담배연기......

투명하고 얇은 막으로 둘러싸인 채

고요한 진공상태 속에 나 혼자 있는 듯했다.

앞으로도 그 세계에 섞일 일은 없을 것같다는 생각.

먹는 일이 고역이다.

방에 혼자 있는 하은이가 걱정할 것같아서 걱정하다가

오래오래 걸려 나온 밥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하은이는 방콕에 와서 먹은 밥 중 가장 맛있다며 잘 먹었다.

나는 물을 좀더 마시고 이 글을 쓰고 다시 자야겠다.

구내염 때문에 가글액을 사고 싶었는데

밥이 너무 늦게 나와서 하은이가 걱정할까봐 사러 가지 못했다.

오늘도 양치를 깨끗이 하고 물을 여러 번 마시는 것으로 만족해야할 듯.

낮에 약국이라고 써있는 곳을 갔는데

그곳은 미용 관련 약품만 판다고 해서 

다리에 붙일 거즈와  가글액을 사지 못했다.

내일은 살 수 있기를.

 

오늘의 결산:

툭툭 100바트

물 20바트

점심 860바트

와콜 2726

하은 옷 1380바트

아로마 등 200바트

모래시계 150바트

팩 290바트

저녁 125바트

차비 칫롬-시암 15*2 =30바트

      시암-아속  28*2 =56바트

      아속-총논시 37*2 =74바트

총 6011바트 (202,631원)

 

그리고 오늘의 생각:욕망에 대하여

나는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다. 쇼핑을 해본 적도 별로 없다.

하은이가 어릴 때에는 언니 오빠들에게는 오랜만의 조카라

내가 옷을 사지 않아도 선물로 옷은 차고 넘쳤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라면서 직접 옷을 고른다. 

 

1년 전 은별과의 여행을 준비하며 봤던 책에는

태국의 추천상품으로

와콜, 실크, 말린 과일이 나와있었다.

그래서 하은에게 와콜을 사주었다.

마음에 드는 속옷을 산 하은이

쇼핑에 의욕을 보이면서 매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나는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실 이 때부터 배가 많이 아팠다.

그래도 하은이 환한 얼굴로 사고 싶은 옷을 발견했다고 내 손을 잡아 끌 땐

마음에 등불이 켜진 듯했다.

하은에게  욕망하는 뭔가가 있다는 것, 그 욕망을 내가 채워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에 마음이 환해졌다.

 

아침에 소실된 촬영본에는 하은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고등학교는 어디로  가고 싶은지(별 답이 없었다)

그래서 스무살엔 뭘 하고 있을지(알바를 하고 있을 거라 했다. 그것도 시급 4천원이라나)

그러면  스무살엔 뭘 하고 싶을지(알바해서 여행을 다니겠다나)

이런 식의 대화를 주고 받다가 문득 걱정이 생겼다.

 

조카 중에 미국 유학 다녀와서 놀고 있는 애가 있다.

나는 그  애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27살이 되어서도 자기 힘으로 살아갈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방학 때마다 인턴 한다고 한국에 와있는 걔를 보면

영어공부 좀 해보겠다고 호주 워킹홀리데이 가서 죽어라 고생하는 내 학생들이 떠올랐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나서 철철이 한국와서 놀고

누구는 그런 부모가 없어서 트레이 한가득 양파를 캐도 2만원 받는다.

HW가 만든 호주워홀다큐에는 그 애의 피나는 시간이 들어있어서 애처로웠고

같은 시기에 방학때마다 놀러오는 조카를 보며 걔가 미웠다.

그리고 걔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그 애의 꿈이 여행작가다. 

하은의 미래를 듣다보니 나는 갑자기 조카 생각이 나서 걱정스러워졌다.

 

나는 "엄마가 라디오 10분 하고 61,000원 받거든.

어떤 노동이냐에 따라서 값이 달리 매겨지는데

시급 4천원보다 더 많이 받는 일을 하면 안될까?

그러려고 사람들이 공부하고 대학가고 그러는 거거든"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갑자기 할 말이 없어져버렸다.

도대체 애한테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공부 말고는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애였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맸고

27살이 되어서야 다큐멘터리를 알게 되어서 그 후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는 내 몸에 꼭 맞는 카메라를 열렬하게 욕망하고

편집 키를 누르기가 바쁘게 휙휙 돌아가는 최신형 맥을 갖고 싶다.

바깥 소리를 차단해주는 고성능 헤드폰을 갖게 되어서 너무 기뻤고

사고 직전에 산, 견고하고 가벼운 트라이포드가 너무 좋다.  

엄마는 내 옷이 다 이상하다고, 늘 내게 헐벗고 다닌다고 한심해하지만

나는 엄마의 반짝이 옷이 참 끔찍하다.

사람들은 다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다. 

중요한 건 자기의 욕망이 뭔지 아는 거다.

 

그런데 하은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모르겠다.

하은에게 바라는 것,

자기를 성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를 기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자기를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침의 대화에서는 하은에 대해 걱정스러움을 가졌다가

오후의 쇼핑에는 하은이 정확히 자기 욕망을 안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리고 아픈 나를 돌봐주는 하은, 그래서  내 옷까지 빨아주는 하은,

그런 사람이면 되는 거 아닌가. 

사랑하고 사랑받고 욕망하고 충족받고 늘 그렇게 행복한 사람으로 살면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은.

물론 또 하은에 대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화르륵 화를 내겠지.

낮에  행인에게 길을 묻다가 하은이 '스퀘어'의 뜻을 몰라 화가 났었다.

그런 순간마다 하은의 미래가 정말 걱정된다. 갈팡질팡한다, 나는.

돌아보면 공부에 목을 매던 나의 10대가 행복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나는 정확하게 내용과 범위가 정해져있는 지식을 습득하고

그 습득여부를 묻는 테스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재미있었다.

광고지 뒷면의 이면지를 영어단어나 수학문제풀이로 꽉꽉 채우는 일이 좋았다.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았던 이유는 공부 말고 더 재미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은에게는 너무나 정답고  좋은 친구들이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찬란한 시간 10대, 하은은 그 시간을 제대로 보내고 있는 것같다.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도 있지않나....왜 그렇게 무식한 걸까....)

 

하은은 나와 많이 다르니 나와는 분명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우리가 언제까지 손을 잡고 걸을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애초에는 브래지어만 사려 했는데

딴 생각을 하다 보니 하은은 점원 아주머니의 권유로 팬티까지 세트로 고른 채

상기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편안한, 고급스런, 그리고 아름다운 속옷이라는 게 이 아이한테 어떤 의미일까.

그 질문의 끝에 20대 때 떠돌던 우스개소리가 떠올랐다.

데이트 때 끝까지 가는 걸 피하는 방법:후진 속옷을 입는다.

후진 속옷으로 20대를 잘도 보냈다.

입고 싶은 옷을 확실히 알고 아름다운 속옷에 상기될 줄  아는 하은이는

나보다는 풍요로운 삶을 살겠지.

어차피 너와 나는 다른 욕망을 가진 다른 인간이니까.

그래서 너와 어떻게 섞여야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다.

사랑해. 단지 내가 아는 사실은 그것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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