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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지 말아야 한다

 하루님의 [울음] 에 관련된 글.

 

 

1. 어제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더라도 절대 미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의 문제일지를 써볼까?

6월 20일 컨테이너 전원이 나감

7월 12일 수리:온수리 전기기술자는 늘 자리에 없었고

            전화를 하면 좀있다 연락주겠다 하고 연락이 없었다.

            3주만에 겨우 고침

7월 11일 새 작업실로 출근, 일주일동안 이사

7월 18일 맥북프로 소리가 안남. 

7월 25일 아이맥으로 교체

7월 28일 운영체제 El Capitan과 파이널컷 프로 충돌, 컨버팅 불가

8월 1일   운영체제를 El Capitan에서 Mavericks로 다시 깔고 컨버팅 시작

8월 24일 컨버팅 파일이 너무 거대해서 의문을 갖던 중

         설정이 가장 저화질인 proxy가 아니라 가장 고화질인 hq로 되어있다는 걸 발견.
         나의 데이터매니저인 m감독이 출산휴가로 휴직중인 관계로

         촬영감독이 컴퓨터 및 기술 전반을 관리해주고 있는데

         proxy설정을 당연히 해놓은 걸로 알았다.

         결국 나의 불철저함이 문제. 

        데이터 매니저가 없어진 상황에서 내가 그 역할을 꼼꼼하게 했어야 하는데

         잠깐 도와준 촬영감독을 그냥 믿어버린 거다.

 

어제 파컷으로 작업한 다섯 명의 감독들에게 나의 상황을 말하고 조언을 구함.

 

1번감독: 파컷 10으로 작업을 해라 

나:사양이 딸려서 안된다.

1번감독:그렇더라도 이미 변환한 hq로 작업을 해라.

 

2번 감독:한달동안 컨버팅한 시간이 아까우니 그냥 hq로 두고 그 후 파일만 proxy로 재설정해라

 

3번 감독:오래 되서 기억이 안난다. 그냥 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했다가 나의 총 촬영본이 6테라 가까이 된다는 말을 듣고서 proxy로 다시 컨버팅하라고 번복

 

4번, 5번 감독:컴퓨터 사양이 낮으니 그냥 지우고 proxy로 다시 해라. 그런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렇게 의견이 분분할 때에는 듣고 싶은 말을 선택하려는 경향이 있고

나는 이왕 한 건 두고 새로 컨버팅하는 것만 proxy로 재설정하면 어떨까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그러자면 다시 하드를 사야.

4테라 짜리 하드가 가득 차서 지금 800기가 밖에 안남은 거다.

hq 컨버팅은 엄청난 고화질 컨버팅이라

16기가 짜리 촬영원본이 119기가로 뻥튀기 된다.

그래도 한 달 동안의 노력을 수포로 돌릴 수는 없잖아....라며 나중 파일만 하자,라고 생각하는 중

이었는데

 

아침에 휴직중인 나의 기술매니저 ms감독이 전화해서

단호하게 말함.

아까워하지 말고 다 지우고 다시 해라.

덩치가 너무 커서 컴퓨터가 버벅거려 힘들다.

 

네!

 

그리고 나는 지금  작업실에 와서 그동안 한 걸 차마 지우지는 못하고

그 후 꺼만 프록시로 컨버팅하고 있음.

아마  며칠 안에 고화질 컨버팅 파일을 지우긴 해야 할텐데

마음 참 쓰라릴 것같음.

 

보통은 6시에 작업실을 나서는데

어제는 너무 심란해서 5시쯤 작업실을 나감.

차에 짐을 싣는 데 시간이 좀 걸렸고 그렇게 오가는동안 

이 문장이 머리에 퍼뜩 떠오른 거다.

"스트레스가 심해도 미치지는 말아라"

 

미치기야 하겠냐마는 여러가지 사건 사고들이 일어나고 있다.

1997년부터 윈도우/ 프리미어로 작업하다가

네번째 영화 <아이들>부터는 맥/파이널컷프로로 해야 했다.

맥이 낯설긴 했지만 사실 나는 윈도우보다는 맥으로 먼저 컴을 시작했다.

대학시절 이공대에 맥을 공짜로 쓰게 하는 방이 있어서

틈나는대로 거기 갔었거든.

쉽진 않았지만 윈도우/프리미어 -----> 맥/파컷 으로의 전환은

그런대로 할만했다.

전제는 나는 컷편집만 하는 것.

이제 사운드믹싱, 색보정, CG 등은 외부인력에게 맡기게 된다.

그래서 후반작업을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한다.

<아이들>만 해도 부산영화제와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기금을 받았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따뜻한 손길>도 인천영상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의 기금을 받았다.

테크니션이 되고 싶었으나 나의 일은 디렉팅으로만 점점 좁아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있음.

현재의 위기는

테입방식에서 파일방식으로 매체가 바뀐 것에 기인한다.

처음 시작하는 기분으로 작업을 다시 배우고 있다.

그리고.....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작년에는 하드 오류가 많았다. 

하드들이 이유없이 먹통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유는 모른다. 

MS감독이 전압이 불안정해서일지도 모른다고 해서

한전 직원을 부르기까지 했다. 어떤 기계로 진단한 후 그들은 "아주 안정적이다"라고 함.

어쩌면 컨테이너의 급격한 온도변화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붕을 다시 올리자라는 의견이 나왔고

그러다 지금 예술인 파견이 되어서 이 작업실을 쓰게 되었다.

작업실이 생긴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드들을 다 옮긴 거였다.

지붕이 있고 냉난방이 잘 되어서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는 

이런 건물이 나한테는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나서 생긴 일들이 바로 위에 정리한 저 트러블 일지이다.

어제는 정말 울고 싶었음.

지저분하고 더울지라도 나는 서울의 사무실이 정말 좋다.

지난 주 <아이들> 상영 때문에 봉천동을 찾았다가

강화로 이사오지 않았더라면 영화를 두 편은 더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함.

지나간 일이고 지금이 아니기에 여기가 아닌 그 곳이 부러워보일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렇다.

아침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6정거장을 걸어서 출근을 한다.

작업에 몰두하다가 점심이면 동료들과 밥을 먹는다.

잡담이라도 작업자들 사이의 대화는 작업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변화되는 작업환경에 빨리 적응하지 못했던 나에게

동료들은 정말 큰 힘이 되어주었다.

내년은 다큐멘터리를 시작한 지 20년이다.

지금 만들고 있는 <따뜻한 손길>은 내 다섯번째 영화.

20년동안 다섯편을 만들다니 이건 말이 안된다.

2000년에만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렇게 힘차게 다큐감독으로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좋아했는데

그 후로는 정말 지지부진했다. 

아이를 낳을 때마다 나는 2년씩 쉬었고

휴직 후 돌아오면 카메라기종이, 편집프로그램이 바뀌어있었다.

그런 변화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이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다.

나는 혼자서 이런 저런 일들을 겪고 있다.

어제, 한달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걸 안 후에

멍한 상태에서 짐을 싼 후 병원에 갔다.

병원은, 한의사선생님은 늘 위로가 된다.

그 위로가 현재의 상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게 위로를 받고 아이들을 만나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속상해서 밥을 못 먹는 엄마의 하소연을 들어주고나니

어제의 멍한 상태는 그냥 오늘 차분한 상태가 되었다.

별 감정없이, 그러니까 속상하거나 절망하거나 답답하거나 

그런 류의 감정의 동요없이 

그냥 나는 기계처럼 다시 컨버팅을 걸어놓고  

작업일정을 다시 조정하고 이런 글을 쓰고 있다.

 

2013년의 그 때처럼 지금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건가.

고개를 들어 현재의 내 상황을 보면 답이 안나온다.

촬영본은 많고 컨버팅은 지지부진하고(급기야 한 달을 날린 거다)

편집에 들어가기 전에 할 일은 끝이  안보인다. 

올해가 가기 전에 집을 지어야하니

가능한한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 버는 일은 작업에 쓰이는 에너지를 뺏어간다.

 

무엇보다 작년에 비해 일들이 너무 많이 들어온다.

만약 작년처럼 일이 많지 않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여기저기서 상영회와 강연, 글쓰기에 대한 제안이 들어오면

나는 어쩐지 거절하지 못한 채 다 받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엔 절대 시간이 필요하니 그 시간동안은 작업을 하지 못하는 거다.

정말 이러다 망하겠다 생각은 하면서도

들어오는 일들은 거절을 못하겠다.

저번주에 SB감독을 만났는데 그애도 그런 말을 했다.

나름 잘나가는 번역가로 TV와 신문에 간간히 언급됨에도

SB는 내게 그랬다.

"노라고 할 수가 없어요. 언제 일이 끊길지 모르니까"

남편은 유학을 가있고 SB는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엄마 아빠의 집에서 살고 있으니 집 걱정이 없지만 

그건 임시거처일 뿐이므로 일이 끊어지면 안되는 거다.

우리 둘은 다큐멘터리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다큐멘터리는 만들지 못한 채 

아이키우는 일, 돈버는 일에 더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런 위기감을 토로하니 SH는 내게 "멀리 보고 큰 결심을 해라"라고 조언을 한다.

그래 고마운 조언이긴 한데.......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내 안에서는 이런 말이 솟았다. 

부산에서 제일 큰 치과병원 원장을 남편으로 둔 네가

내 절박감을 아니.....라는 말.  

그래도 네 말은 고맙게 받을께.

 

2.

아침에는 건축박람회를 갔다.

남편이랑 아이들이 나보고 집짓는 데 너무 관심이 없다고 뭐라고 그랬다.

좀 억울한 게  그날 나는 막내의 방학 숙제 때문에 사진을 메일로 보내고 있었던 건데

왜 설계도에 관심이 없냐고,

큰애가 뭐라고 그랬다.

남편은 화를 참는 것처럼 보였고.

그냥 집이 다 지어진 채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암튼 여러 번 건축박람회를 다녀온 남편은 내게 같이 가자고 했다.

 

건축 자재를 보거나 모델하우스를 보는데

남편이 갑자기 말했다.

"사람들 표정을 봐봐. 다들 행복해보이지?"

그랬다. 다들 행복해보였다.

새로 지을 집 생각을 하면서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이 

다들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도 행복해져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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