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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네 번째 영화. 10년동안 쓴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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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6
    다시 서울(6)
    하루

다시 서울

시사회를 잘 끝내고 강화에서 지내다 어제부터 다시 사무실.

오랜만에 만난 애들한테 "엄마 안 보고 싶었어?" 했더니

아이들과 함께 계셨던 우리 엄마가 "엄마? 입도 뻥긋 안하더라" 라며 웃으셨다.

앵두는 그새 많이 커서 말하는 게 어른같다.

어제 아침엔 일어나더니 "아이구~ 잘 잤네" 하며 혼잣말을 하질 않나

어제 저녁에는 하돌이랑 싸우는 앵두를 하늘이 점잖게 타이르자

"헐~ 언니는 뭐냐?" 라고 말해서 하늘이 기막혀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다 보고 배웠냐고 묻자 강화에서 배웠다고 한다.

내가 없는 동안 강화에서 셋이 그렇게 싸우고 놀고 했나보다.

피부가 약해서 땀띠에 상처에 좀 심각하다. 그래도 잘 놀고 잘 먹으니 다행이다.

 

강화는 낮에 아무리 덥더라도 밤엔 서늘한테 서울은 좀 다르다.

서울집은 3층건물에 3층이라 많이 덥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문을 열면 열기가 훅 밀려온다.

사우나같다. 동생이 준 에어컨 덕분에 이 여름을 잘 보내고 있다. 빨리 여름이 갔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니, 작업이 더디 가는데 빨리 가면 안되지, 하고 정정.

나랑 닮은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금요일 시사회에 특별초대했다가 직전에 취소했다.

주말엔 강화에 언니들이 놀러왔었는데 언니들한테 보여주고 인터뷰를 딸려다 그것도 취소했다.

가편집 시사는 신중해야 하니까.

 

첫번째 가편집 시사를 통해 나름의 방향을 잡았다. 원하는 걸 얻어서 기쁘다.

일단 정리된 건 내가 중심이 되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이다.

보육노조와 어린이집에 대해서 많은 부담을 갖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가벼워지기로 했다.

사무실 선배님이 "의무감 같은 게 느껴지는데 이런 식으로 다루는 건 더 안좋다"라 말해주어서

그 말에 기대어 역할과 위치를 대폭 수정하기로 했다.

의욕이 많다고 해서 제대로 전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지뢰처럼 피해야할 것들이 참 많다.

 

오랫동안 다큐멘터리의 끔찍함을 생각해왔을 때 내가 넘지 못한 채 주춤거리던 부분이

'내가 내 이야기를 위해 저 사람을 착취하는건 아닌가'라는 거였다.

내가 이번 영화에서 보육노동의 힘듦과 고단함이 아니라

보육의 밝고 사랑스러운 면을 잘 그리고 싶었던 것도

나의 등장인물들이 구차해보이지 않고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였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밑바닥에는 착취자로서의 나, 이야기를 하는 나, 그 자리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

하지만 미안함과 책임감과 욕망이 뒤섞인 상태에서 따로 노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은 다 알아봤다.

 

짐짓 그래보이지 않지만 결국은 내 이야기를 하는 것과

드러내놓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실 차이가 있다.

나는 이제 드러내놓고 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다음 주 토요일이 부산영화제 제출 마감이다.

이젠 예전처럼 3~4시간만 먹고 자며 편집을 할 수가 없다.

저녁이면 다시 아이들을 챙겨서 씻기고 먹이고 재워야하고

새벽이면 걱정스러움 때문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지는 이 생활로 돌아왔다.

 

아주 오랜만에 오래 전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행복하다>부터 <엄마...>에 이르기까지 나는 항상 기대와 절망을 반복해가며 작업을 해왔다.

누구도 나의 고갱이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항상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물었다.

<나는 행복하다>를 몇 번 편집했지?

-여덟번이요.

그럼 이번엔 세 번에 끝내라. 경력이 쌓인다는 건 가편집 횟수가 줄어드는 거란다.

 

매번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추락을 반복했던 그 여덟번째의 마지막 시사회 때 선배들이 그랬다.

"아직도 부족한 건 많지만 할만큼 한 것같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번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최선 안에서 나는 또한 매번 나의 한계를 일센치 정도씩 늘려왔다.

작업을 하는 건 아이를 키우는 것과 정말 비슷하다.

처음 하늘을 낳고 키울 때,  나는 아이를 더 낳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명을 키우면서 일을 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 것같았다.

그래서 새로운 아기를 임신했을 때 나는 절망스러웠다.

이젠 정말 일을 그만둬야 하는 구나....

하지만 아이가 둘이 되자 또 거기에 적응하게 되었다.

육아와 작업을 병행해왔던 그 과정  또한 나의 한계가 일센치 정도 늘어가는 과정이었다.

 

지나온 길이 나를 밀어간다.

다시 구성안을 짜려니 답답하고 길이 안보인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지내왔잖아. 그렇지 않아?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격려다.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진정 좋은 건 추락에서 다시 시작하는 이 시기의 미약한 한줄기 빛이다.

 

사람들마다 작업방식이 다 다른 것같다.

사무실 Moon대표나 ㅎㅊ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그 견고함이 부럽다.

그들은 기획의도와 가편집, 그리고 본편집의 틀이 그다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디테일 뿐.  

나는 틀 자체가 변한다. 매번의 가편집이 서로 다른 영화인 것처럼 변해간다.

나는 그래서 가편집 시사를 소수의 사람들과만 진행한다.

다행인 것은 사무실의 몇몇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다는 거다.

그들은 내가 채웠으나 채우지 못한 부분, 채우지 못했으나 채우고 싶어했던 게 뭔지를 알아본다.

 말하자면 나를 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바로 지금 내가 가진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제로는 아닌 거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내가 좋아진 점 한 가지를 든다면 넋두리가 없어졌다는 거다.

예전의 나는 힘든 일이 생기면 사람들을 붙들고 한탄을 했다.

때론 위로와 때론 공감 속에서 힘을 얻는다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항상 문제는 그대로였다.

나는 이제 문제가 생겨도 더이상 사람들 사이를 서성거리지 않는다.

약간의  시간을 둔 후에 함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사람과 상의를 할 뿐이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을 옆에 두었다 하더라도

오롯이 해결해야할 나만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몸으로 느껴왔다.

 

며칠간의 휴식이 끝났다.

이제는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그 영역에 다시 발을 들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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