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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2015년 10월 7일 이후의 몸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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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06
    다시 시작하는
    하루

다시 시작하는

수영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에 수영강습을 받다가 포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가 언제인지 돌이켜보니

1995년 6월 25일 무렵이다.

왜 1995년 6월 25일이냐면 그 때가 마포도서관 신축 개관 기념일이기 때문.

그 때 나는 홍대 앞의 학원을 다니면서

뭘할지 몰라서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당시 연세대 대학원  과정에 새로 생긴 비교문학 전공에 들어가고 싶어서

새로 문을 연 마포도서관을 다니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력고사를 끝으로 영어공부를 하지 않아 토플책을 보며 머리아파하던 중,

마포도서관 신축기념 이벤트 공고를 본  것이다.

함께 공부하던 다른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응모했는데 나만 뽑힘.(경쟁율이 무려 11대 1)

그리고 일주일만 다니고 그만 뒀다.

자주 구조되었고(잠자리 채같은 걸 목에 걸어서 당기면 그거 잡고 나옴)

그래서 다른 수영장에서 연습을 하다가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서 그만 뒀다.

수영을 그만 둔 김에 대학원 공부도 그만 뒀다.

갈 길이 안 보여서 더듬거리며 선택한 진로였지만

당시 나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에

거기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의심이 갑자기 들었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바치는데

그 미래가 짐작과 다르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미리 한 거다.

불가능한 가정지만 만약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공부를 해봤어도 좋았을 것같아.

몇 년 전, 대학원에 다닐 때 어느 학회에 갔다가

발표자이력을 보니 전공이 비교문학이었다.

가볼까, 관심가졌던 그 때, 그 전공은 막 생겼을 때였다.

연대는 고대랑 달라서

아니다, 어쩌면 학문은 운동이랑 달라서

훨씬 더 폭넓고 깊이있는 사고의 경험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참 덧없는 가정이다.

일단 시작한 수영강습이니 

수영일지를 써야겠다.

 

1일째: 1월 3일(화)

전날까지 정말 가기 싫었다.

1995년에 그랬던 것처럼

수영복이 없어서 수영복을 새로 샀다.

큰 맘 먹고 산 빅토리아 시크릿 수영복이 너무 많이 파여있어서

(식구들이 다들 '옷을 안 입은 것같아'라는 평을 해줌)

그냥 많이들 입는 수영복을 다시 샀다.

어제 두번째 강습에서 느낀 건데 안 그랬으면 큰일날뻔.

다들 비슷비슷한 수영복을 입고 있는 상황에서

빅시수영복 입고 나타났으면 진짜 눈에 확 띄었을거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다들 잘했다고, 진짜 빅시 수영복 이상했다고....

빅시수영복은 뭐랄까.... 핀업걸들이 사진찍을 때 입는 수영복인 듯.

사진으로 볼 땐 안 그랬다구......ㅠㅠ

 

전날 그렇게 가기 싫어하면서도

어쨌든 신청했으니

그리고 애들이 보고 있으니

씩씩하게 수영장엘 갔는데 초급은 단 두 명 뿐.

상급, 중급, 초급이 다 함께 강습을 받고 있어서 놀랐다.

아침에 막내를 학교에 데려다줬는데 학교에 도착해보니 안가져온 준비물이 있어서

다시 집에 갔다 오고 하느라 5분 정도 늦음.

초급 줄에 7명 정도가 서서 준비운동을 하고 있길래 그 맨 뒤에 섰는데

강습이 시작되자 나와 다른 사람만 유아풀로 불렀다.

초급반의 다른 강습생은 상급반 수강생의 딸이었다.

강습이 끝나고 나오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자꾸 나를 보고 웃어서 의아했는데

나를 그 딸과 착각해서인 듯.

첫날 배운 것은 숨쉬기와 물에 얼굴 집어넣기.

물에 얼굴 집어 넣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꾹 참고 할 수밖에.

다른 수강생은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듯 하다.

입시가 끝난 후 엄마랑 같이 다니는 건 아닐까 혼자 생각.

한 명의 강사가 모든 수강생들을 다 지도하는 방식이라

강사가 지시를 내리고 가면 두 명의 초급수강생은 

유아풀에서 말없이 각자 발차기와 물에 얼굴집어넣기를 연습했다.

수심 0.8m 인데도 허우적 거리다 물을 두 번 정도 먹었다.

공포가 나를 집어삼키면 나는 물을 삼키는 식.

수영강습 때마다 느끼는 건(22년의 시차를 훌쩍 뛰어넘어 95년이 갑자기 기억남)

죽음의 공포를 미리 당겨서 경험하는 듯.

예방주사처럼.

물에 머리를 집어 넣은 채 숨을 참고 떠있는 것까지 배움.

 

2일째: 1월 5일(목)

첫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하고

키판에 의지해서 레인 왔다갔다하기.

선생님은 턱과 어깨가 물에 잠기는 것, 고관절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줬다.

유아풀에서 연습하다가 깊은 풀로 옮겨서 계속 왔다갔다 했다.

자꾸 몸이 왼쪽으로 갔다.

선생님은 중간중간 와서 지켜보고 교정해줬다.

"몸이 자꾸 왼쪽으로만 가요. 오른쪽 다리가 더 힘이 센가봐요" 

했더니 선생님이 키판을 잡고 있는 내 왼쪽 팔을 가리키면서

"너무 힘을 많이 주고 있네요. 힘을 빼세요" 했다. 

얕은 물도 무서운데 깊은 물은 더 무섭다.

30명 가까운 사람들 

얼굴을 알고 이름을 알고 사연을 아는 사람들 중에

아무와도 모르는 단 한 사람이 나다.

키판을 잡고 끝날 것같지 않은 레인을 가다 가끔 물을 먹는다.

물먹는 나를 보던 선생님이 다리를 좀더 열심히 움직이라고 해서 

그렇게 했더니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무섭다고 키판을 꼭 붙들고 있어봤자

어깨만 뻐근해지고 몸은 자꾸 왼쪽으로 가는 거다.

몸에 힘을 빼고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지나온 것들, 움켜쥔 것들, 다 놓고 힘 빼자.

다섯 번째 영화에도 유효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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