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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커트 코베인

노무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충격적이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런 느낌은 15년 만이다. 나에게 그의 투신자살은 시애틀 그런지 락의 대표주자였던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의 권총자살 ... 그것과 꼭 같았다. 이러한 노무현의 죽음에 누군가 눈물을 흘리거나 조의를 표한다고 해서 그것을 좌파-우파의 척도에서만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잘못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노무현은 정치인이기에 앞서 '스타'였기 때문이다.

 

공공연한 노무현 지지자가 아닌 이상, 누군가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보다는 '서글픔' 내지는 '무력감'일 게다. 그를 지지하던 열정과 그에 반대하던 열정이 일순간 사그러들면서 찾아온 무력감. 여기서 슬프다-아무렇지도 않다-기쁘다의 척도는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한 감정을 기준으로 정치적 신앙고백을 요구하거나 선언하는 것도 좀 찜찜하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의 존재의 핵심은 그가 우파(혹은 좌파-신자유주의)이기에 앞서 파퓰리스트라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퇴임 후에도 낙향하여 마을을 조성하고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던 그는 정치자금 스캔들을 맞으며 대중들에게 잊혀져버릴 위기에 처했으나, 검찰청 앞에 선 초라한 이미지를 숭고한 영정 이미지로 바꾸어벼렸다. 결국 노무현은 최후까지 대중적이었다. 과감히 말해보건대 그의 죽음은 정치적 살인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그의 존재감은 이처럼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호학적인 미디어 읽기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들은 노무현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새로 쓰기보다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눈물 흘리는 이들'을 계몽적 태도로 꾸짖으려 한다. 노무현 정권의 반민중적 작태를 '모른다'는 것이다. 대중들 사이에서 이런 식의 태도는 다소간 소모적이다.

 

그러나 발언권을 지닌 자들의 경우엔 다르다. 진중권 같은 이가 노무현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은 자신이 지닌 사회적 발언권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기준은 진정성이다. 진정성의 정치는 일정한 시효를 갖는다. 그러나 진정성 자체에는 시효가 없다. 바로 이게 진정성의 정치의 함정이다.
 

 

철저히 미디어를 통해서만 존재했던 락 스타인 커트 코베인의 경우, 진정성의 정치는 그의 존재와 함께 소멸했다. 그러나 노무현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그의 지지자들은 제도정치 안에서 여전히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진정성의 이름으로 적을 부르짖기 시작한다. 러시아 혁명기의 볼셰비키와 중국 대장정의 홍군의 진정성은 나치스나 미시마 유키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적을 쓰러뜨리고자 하는 의지 바로 그 진정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한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대중정당이다. 이들에게 노무현의 빈소를 찾는 것은 쉐보르스키가 지적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의 선거 딜레마와 유사한 상황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그렇지 않다. 지도부 차원의 노무현 조문이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주의를 의식한 것이라면, 그것은 부적절한 판단이다.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필요한 것은 활극이지 번지 없는 주막이 아니다. 설령 한 자리 잡는다 해도 여전히 번지수는 없을 것이며,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은 하나의 통치기구가 될 것이다. 현 시점에서 활극의 주인공은 이미 노무현이 차지하였다. 이 상황에서 종로(평택과 대전)를 등질 경우, 민주노총은 영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조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적 이익집단이 정치적 행보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 반대로,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정치적 상황에 비정치적 내지는 반정치적 대응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노동자 박종태 씨와 배우 장자연 씨의 죽음은 명백한 정치적 살인이다. 반면, 노무현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스타의 죽음이다. 더구나 그는 단순한 스타가 아니라 제도정치의 심장부에 서 있었던 정치인이었다. 따라서 그의 투신자살의 여파는 일상적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겨준 것은 적군과 아군의 명확한 구별이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벌써 그런 열정을 드러내고 있다. 노무현의 적들에게는 조문도 허용하지 않았고 대중들 사이에서 다시금 촛불을 통해 반이명박 전선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이들의 관건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반이명박 세력으로 민주당을 견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지지세력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상황에서 새롭게 열리기 시작한 대중적 정치공간을 내버려 둔다면 어디로 흘러갈 지 모른다. 노무현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진정성의 이름으로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이 발흥할 지도 모른다.

 

노무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또다른 파퓰리스트 정치인으로 박근혜가 있다. 그녀는  "나에겐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고 국민 여러분들밖에 없다"는 강력한 수사를 지닌 영남권 스타이다. 그녀와 그 지지자들은 노무현의 죽음으로 열린 인민주의 정치의 공간을 노무현 지지자들과 민주당이 선점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일부 '진보적 민족주의자'도 박근혜의 재평가를 호소한다. (5월 30일자 <시사IN>에 실린 <민중의 소리> 편집국장의 글을 보라.)
 

 

아직 장례가 끝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드러내 놓고 움직이는 것은 아직 노사모 정도이다. 인간 노무현의 죽음이 열어젖힌 정치적 공간이 노사모-민주당과 친박연대의 각축장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것은 바로 이런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노무현의 죽음이 더욱 가슴아프고 허무하게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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