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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족과 광복절 퍼레이드

 

[사진은 걍 구글에서 퍼옴. 노들길 조~~오치 ... 깜빡이도 넣지 말고 왼쪽으로 꺾어랏!]

 

 

 

 

 

폭주족을 흠모하는 나이지만 '광복절 퍼레이드'에 동참은커녕 구경도 못할 터인지라 아쉬움에 몇 글자 남겨두어야지 싶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기원을 찾을 수 없지만 이제는 한국의 어엿한(?) 연중행사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광복절 퍼레이드는 그 떠들썩함에 비해 별다른 사건사고를 전해주지 않고 있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약간의 아쉬움으로 바꿔주곤 한다.

 

며칠 전에는 모 일간지에 10대 여성 폭주족 두 명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했는데, 거기서도 확인되는 것은 폭주족들의 대부분이 뚜렷한 직업이 없거나 배달업에 종사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여성 폭주족 수는 손에 꼽힌다고 한다. 보라색 특공복으로 대표되는 일본 여성 폭주족과는 사뭇 대조된다. 뭐 그래도 폭주족이라는 게 남성주의가 강한 싸나이 문화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쨋든 이 서비스 직종 언더클래스들의 위험한 놀이가 한편으로는 기성세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이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전에도 폭주족에 대한 메모를 남겨둔 바 있지만, 이들은 무료함과 피곤에 쩐 도시의 일상 풍경에 변형을 가한다. 요즘같이 열대야가 계속되는 한여름에는 창문 열어젖히고 잠을 청하는 이들에게 마후라 뗀 주행소음으로 약간의 고통을 주어 자신들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게다가 ... 어디까지나 나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 이들이 몰고 다니는 오토바이는 그 자체로 강력한 페티쉬이기도 하다. 제아무리 빨리 달리는 년놈들이라도 그들이 올라탄 바이크보다는 빨리 달리지 못한다. 미끈한 유선형의 차체로 바람을 가르는 오토바이를 떠올리고 있자면 ... 아아 ... 흥분된다. 음흉하게 넙적한 철판으로 엔진을 감추고 네 발로 달리는 자동차들과는 달리 히끗히끗 엔진인지 내장인지 모를 속살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는 바이크는 흡사 근대적 인간 신체를 둘러싼 고상한 아우라를 조롱하며 벗겨내는 듯하기도 하다.

 

폭주족의 하위문화와는 거리가 좀 멀지만, 폭주라는 행위 그 자체를 가장 멋지게 그려낸 재현물로는 역시나 오토모 카츠히로의 1984년작 <아키라>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나 경쟁그룹 폭주족들에게 '짜봉'을 날리며 도심을 휘젓는 그룹의 리더 카네다에게 뒤쳐진 테츠오가 후미를 치고 올라오면서 남긴 백라이트의 잔광은 <마크로스>의 미사일 비행 씬과 더불어 1980년대 초반까지 그 누구도 본 적 없던 장면이었다.

 

다시 광복절 퍼레이드로 돌아오자면, 이것은 폭주족이라는 하위문화 공동체의 '의례를 통한 저항'이자 국가기념일의 '상징적 재전유'라고 할 수도 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라서? 빨간 날(공휴일)이라서? 뭐 아무래도 좋을 듯싶다. 태극기는 또 왜 들고 나오는 건지. 역시나 아무래도 좋을 듯싶다.

 

물론 하위문화와 저항이라는 주제는 매우 논쟁적인 것이기도 하다. 가령 스래쉬 메탈 음악의 경우 밴드 메가데스의  데이브 머스테인이 '미국의 힘'을 강조하며 조지 W. 부시 집권 초반 열렬히 지지하다가, 머지않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격렬히 반대하는 것처럼 <아키라>의 카네다 역시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다가 혁명 정치조직의 선봉(?)에 서기도 한다. 앞서 말한 폭주족 인터뷰에서도 이들이 폭주에 빠져드는 이유는 '크랙션을 울리면 행인들이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이 웃겨서'라든지 '섹스를 즐길 기회가 많이 생겨서'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장물 오토바이를 손쉽게 구할 수 있으니 거리에 나가는 게 아니겠느냐'며 '키박스를 엉성하게 만든 회사가 나쁘다'고 비난하는 뻔뻔함이라니! 그러나 언제나 '의도'가 중요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들의 행위 양식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의미들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국사회에서 폭주족 자체는 존재감도 많이 왜소해지고 성질도 유순해 진 듯하다. 그러나 폭주라는 행위 자체는 여러 면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폭주라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를 향한 실천을 강조하는 미셸 푸코의 강의록 제목 중에 <인구, 안전, 영토>가 있었던 것 같다. 푸코는 인구, 안전, 영토의 세 가지가 억압-저항과는 뭔가 다른 차원, 즉 통치라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지적했던 듯하다. 이 세 가지 요소를 국민국가(민족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해명하는 데 적용했던(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민족) 정체성을 구성해 낸 장치들로 센서스, 박물관, 지도를 꼽는다. 인구-센서스, 안전-박물관(기원을 제시해 줌으로써 정체성에 안전, 즉 안정성을 제공해 줌), 영토-지도가 딱 들어맞는다.

 

폭주족들에게도 하위문화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각 그룹의 구성원을 서로 파악하고 있고(인구), 다양한 폭주전설 및 메카닉 숭배를 공유하며(안전), 집결지와 주요 주행로를 갖는다(영토). 그럼에도 이들의 공동체는 단순한 상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밝힐 수 없는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폭주하기 위해 모인 것인데, 이들이 추구하는 질주라는 행위는 생산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투쟁적 소비, 즉 포틀래치다. 구성원-망명자-부랑자-반역자의 틀로 보자면, 폭주족들은 자기관리라는 미덕을 추구하는 구성원들도 아니고, 젠체하는 지식인 망명자도 아니며, 혁명적 투사인 반역자도 아니다. 질주를 통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부랑자다. 이러한 도망은 체제에 맞서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자체로 '사회적 규율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부랑자는 묵시록의 집필자들이며 예언자들이다.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알 수 없는 예언들을 부르짖던 육교 위의 부랑자처럼 직접적인 언어를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랑자들은 무언가 말하고 있다. 이들의 메시지는 굳이 귀기울이려 하지 않아도 귓가에 계속 맴도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조금은 폭주족들을 흠모하는 이유랄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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