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네시간 노동제를 위하여

살아 꿈틀거리는 아나키 2007/03/09 23:49
난 아무리 기쁘고 즐거울 때라도 항상 가슴 속 한 켠에 풀리지 않은 슬픔 같은 감정이 똬리를 틀고 있단다.
그 이유가 뭔지 예전에는 잘 몰랐거든.
아마 외로움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했었어.
그게 무슨 류의 외로움일까, 그저 사람들이라면, 아니 생명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런 존재의 외로움인가보다 하고 무심히 넘어간 적도 있었고 말야.
그러다 어느 때가 되면 그 슬픔이 커져서 날 막 휘감을 때가 온단다.
특히 혼자서 길을 걸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지곤 해.
왜 그럴까.
 
지금 난 서울에 올라와 있어.
마음은 대추리에 있는데, 몸은 이곳에 묶여 있어서 마치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야.
지금의 서울 같은 곳이라면 유배지로 제일 적당하지 않을까 싶어.
자동차와 아스팔트와 넘치는 사람들도 그렇지만 워낙 대응해야 할 일이 많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 3월이라서 그런지 내가 몸담고 있는 피자매연대에서 날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
어쩌면 내가 날 내버려두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3.8 여성의 날 집회에 갔었어.
눈발이 흩날리는데, 장기투쟁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기필코 승리해서 공장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있었어.
나도 평택의 평화항쟁이 승리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제 우린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조차 외칠 수 없는 형편이잖아.
주민들과 정부가 '합의'를 했다고 하지만 실은 그게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에서 맺어진 협박인지는 너도 잘 알거야.
1905년에 맺어진 을사늑약도 겉으로는 조선과 일본이 맺은 합의잖아.
서로 합의문에 서명을 하는 모습만 나오니까, 마치 양자를 위한 최선의 합의인양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만 그 합의라는 것이 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과 피지배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완전히 다른 법이잖아.
고향을 잃는 설움을 난 이제서야 조금씩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눈이 막 날리고 있는데, 달거리대 배달을 하러 자전거를 타고 서울 끝에서 끝으로 다녔었어.
문득 이 모든 것이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거야.
펄펄 느리게 느리게 내리는 눈들 속에서 세상이 마치 멈춰버린 것 같았다고.
그 자리에 나도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었어.
그리고 네가 미치도록 그리웠던 거야.
 
실은 내가 멈춰버리고 싶은 것은 혹독하게 돌아가는 이 사회 전체야. 
모든 인간들의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이 초록색 대지의 구석구석까지 낱낱이 착취해 아예 끝장을 보도록 만드는 이 파멸의 시장주의 체제를 아예 정지시켜버리고 싶은 거야.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체제를 조금이나마 바꿔 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우리 활동가들은 또 어떠니.
정신 없이, 어떤 날은 밥을 먹을 시간도 없이 회의에, 집회준비에 매달리다가 원고 마감을 놓치면서도 언제 제대로 한 번 쉴 틈도 없잖아.
분명히 일을 줄여야 할텐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완전히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
 
하루에 네시간만 노동하자는 것은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이 속도를 다만 약간이라도 늦추자는 것이 아니야.
아예 멈춰보자는 말이야.
당분간 이 자리에 머물러보자는 말이야.
그리고 우리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물어보자는 것이야.
최소한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또는 한국보다 약간 늦게 경제성장의 대열에 돌입한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보호소라는 허명(虛名)의 감옥에 갇혀 불붙어 들어오는 쇠창살 너머만을 절규하다 하늘의 별로 사라져 가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말이야.
총칼을 든 젊은이들을 점령군으로 보내 안타까운 목숨 사라져가지 않도록 하자는 말이야.
지금 너나없이 치닫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경주를 시나브로 포기하자는 것이야.
왜냐하면 그 경주에 결승점은 없기 때문이란다.
 
지구의 끝까지 장악한 신자유주의 이윤경주의 끝은 모든 것의 파멸일 뿐이겠지.
파멸 그 너머는 없을 것이야.
매장된 석유가 모조리 바닥나는 순간이 유구하게 흘러온 도도한 변증법의 순환이 멈추는 순간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해.
만에 하나 지구가 망하기 전에 이 야만의 경주가 끝난다 해도, 결국 우리가 도달하게 될 결승점은 탐욕과 오만의 제국 뒤꽁무니에 달라붙어 비참하게 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지.
 
그렇다면 이 폭주체제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냐고?
계급대중의 단결된 힘은 진정 이럴 때 발휘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루 네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우리는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루 네시간만 노동하고 남은 시간은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영화를 찍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야.
 
그런 날 사람들은 이상주의자라고 부른다지.
그런데 난 누구보다 치열한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해.
왜냐하면 난 혁명을 꿈꾸지 않아.
그것을 그저 살아갈 뿐이야.
대저 혁명이란 모든 존재들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짜는 것 외에 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겠니.
별음자리표가 생명평화를 몸으로 그저 살아가듯, 김월순 할머니가 저녁 7시가 되면 대추리 농협창고로 몸을 옮겨 촛불을 들듯 나도 평화를 그저 살아가는 거야.
차별 없는 세상을 그저 살아가는 거야.
폭력 없는 세상을 그저 지금 이 현실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거야.
착취를 최소화하며 또다른 세상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거야.
샤시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 싱크대 수챗구멍까지 망가져버린, 철저하게 부숴져 있던 대추리 불판집을 고쳐서, 국방부의 경고를 간단히 무시한 채 비어 있던 그 집에 들어가 점거를 하고, 동시에 자전거를 타면서 채식을 하고, 오줌과 똥은 볏짚과 왕겨와 섞어서 두엄을 만들면서 추위를 견디며 촛불을 들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밀고 나가는 거야.
 
내가 외로운 것은 말야 사람들이 따로 노는 것 같기 때문이야.
자전거를 타는 모임에 갔는데 채식을 하는 사람은 나 혼자더라.
둘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사람들은 꽃만 보려 하는 것 같았어.
채식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반전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은 거야.
둘은 같은 뿌리인데.
문화운동을 하면서 생태화장실을 쓰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거의 없어.
그러니까 여성운동과 평화운동을 하는 단체는 있는데 그 단체는 환경운동은 하지 않는 거야.
이를테면 환경운동과 여성운동을 결합한 단체는 있는데 그 단체는 평화운동엔 거의 모습을 내비치지 않는 것이지.
생명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을 여성의 날 집회에서 보기 힘든 것처럼 말야.
마치 지구의 날 집회에서 노동운동가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야.
왜 그럴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가부장제이고, 군사주의가 만연해 있으며, 개발주의로 오염되어 있는데다가 자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혹독한 사회야.
이 사회에 맞선다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우리는 이렇게 따로 찢어져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저들은 절대로 따로 찢어져서 들어오질 않아.
봐봐.
언제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와 개발주의와 따로 논 적이 있었는가를.
지배자들은 이윤추구기득권 유지라는 두 개의 목적을 중심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이 사회를 억압하고, 환경과 노동자를 착취하고, 민중을 차별해 갈라놓고 있어.
그런데 그것에 저항을 한다는 우리들은 너무나 뿔뿔히 서로 흩어져 있는 거야.
진보운동이 점점 힘들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여성운동, 비폭력평화운동, 생태운동 그리고 반자본주의 운동은 서로 긴밀히 만나야 해.
이윤추구가 아니라 공생과 돌봄의 가치를 위해, 기득권 유지가 아니라 위계질서의 해체를 위해서 우리는 서로 연대해야 해.
그리고 그저 하나가 돼야 해.
 
알겠니?
내가 이상주의자가 되어버린 건 우리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야.
내가 외롭고 그래서 마음 속 깊이 항상 슬픔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건 말야 우리가 흩어져 있기 때문이란다.
내가 대추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서울 같은 지옥으로 쫓겨나야만 하는 것도 우리가 충분히 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이라크의 점령전쟁이 계속되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도, 곳곳에 골프장이 들어서고 아름다운 산에는 터널이 뚫리고 갯벌이 메워지고 농토가 사라져버리는 것도, 우리가 해를 넘기면서도 승리하지 못하고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한미 FTA를 끝장내기 위한 집회를 해야만 하는 것도, 서러운 차별을 받으며 때로는 알몸투쟁까지 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도 우리가 국경으로, 민족으로, 성별로 그리고 자기 분야로 이렇게 갈갈이 나뉘어 있기 때문이야.
경계가 사라지는 날에야 비로소 우리는 승리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단 하루도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는 살아가기가 싫어서, 남들이 보기에 극단처럼 보일 수 있는 지금의 생활을 선택했는지도 몰라.
그렇게 살지라도 않으면 슬픔이 폭발해 분노가 되어 미쳐버릴 것 같거든.
힘겹고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몸을 누일 때 그래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건 내 옆에서 함께 촛불과 깃발과 피켓과 기타와 카메라를 들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
언젠가 내가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난 버리지 않았거든.
그리고 나 혼자 살아가는 고립된 도시가 아니라 모두 함께 즐기며 사는 마을을 만들려고 해.
 
그런 내 마음을 노래 한 줄 한 줄에 담고 있어.
네가 몹시 보고 싶어.
언제 널 만나면 통기타를 치면서 그런 노래들을 불러줄께.
그날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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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09 23:49 2007/03/0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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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racked from 2007/03/10 08:29 DELETE

    Subject: 귀중한 외로움

    돕헤드님의 [하루 네시간 노동제를 위하여] 에 관련된 글. 마치 두바퀴가 다 고장난 잔차같이 아무대도 발걸음하기 싫어져 있는 저로서는 참 유구무언입니다... 눈보라 속에서 온통 정지된
  1. 산오리 2007/03/10 10:53 Modify/Delete Reply

    하루 네시간 노동...무조건 이루어야 해요..
    산오리는 네시간이 넘어가면 몸이 견디지 못해요.ㅠㅠ

  2. 아침 2007/03/10 12:28 Modify/Delete Reply

    많이 외로웠구나... 함께 즐기며 사는 마을. 평화캠프 어때?

  3. 2007/03/11 12:01 Modify/Delete Reply

    그런 우리의 마음을 시 한 줄 한 줄에 담기 위해 노력해야지, 꼭. 생각 한 부분 빌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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