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처럼 가야 한다

평화가 무엇이냐 2006/02/21 11:33
오리님의 [휘날리는 깃발들 1] 에 관련된 글.

자전거를 탈 때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바람이다.
바람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는 것도 자전거를 탈 때다.
바람이 뒤에서 밀어주면 힘든 언덕도 슬슬 다리를 저으며 거뜬히 올라갈 수 있지만, 내리막길을 쌔앵 내려가다가도 역풍이 불어오면 자전거는 곧 멈춰 선다.
 
사람의 내장에 음식물을 넣고, 그것을 소화시킬 때 나오는 힘으로 달리는 자전거로는 바람을 거스를 수 없다.
그래서 맞바람이 불 때는 그저 거기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다.
바람을 이기려 페달을 밟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울진 죽변에서 영주까지 120km에 달하는 산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려왔다.
바람이 몰아치던 그 험난한 계곡과 끝도 없이 이어진 산들을 돌아나오며 나는 깃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깃발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살랑살랑 나부끼지만, 그 깃대만은 중심을 잡고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
꼿꼿하면서도 융통성이 있는 것이다.
어느 곳으로든 움직이지만 실은 자신의 자리에 서있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면서도 그것에 영합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자고 다짐하며 자전거를 탔다.
 
한반도의 등성이를 가로질러 넘어가는 36번 국도 주변엔 해발 1000m가 넘는 험난한 산들이 즐비하다.
온도는 영상 10도에 이르고, 겨우내 내렸던 눈들은 이미 녹아버렸지만 저 산들은 아직도 눈을 뒤집어 쓰고 있다.
저멀리 줄지어 늘어선 흰색의 연봉들, 그런 산 앞에 맨몸으로 맞닥뜨린 채 서있으면 '저 산의 꼭대기를 넘어가야겠다' '저걸 정복하련다'는 오만한 생각따윈 들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산허리를 돌아 나가고 싶을 뿐이다.
 
도로는 산등성이에도 만들어지고 산허리에도 만들어진다.
심지어 어떤 도로는 산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그중 가장 덜 오만한 도로는 계곡을 따라 산의 사타구니에 내는 도로다.
울진과 영주를 잇는 36번 국도가 그렇다.
불영계곡을 따라 이 산과 저 산이 만나는 오목한 부분, 즉 사람으로 치면 사타구니쯤에 해당하는 부분을 따라 도로가 나있다. (물론 삼근리를 지나면 다른 도로들처럼 주로 산허리를 깎아 도로를 만들었다)
산의 사타구니를 사뿐히 건너간다니 에로틱한 기분까지 든다.
산을 잘 어우르고 달래지 않으면 언제 저 샅을 닫아버릴지 모른다.
그래서 산을 갈 때도, 자전거를 탈 때도, 삶을 살 때도 깃발처럼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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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1 11:33 2006/02/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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