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소한 정치, 상상력의 빈곤[김종철의 수하한화]

/경향신문

 

대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포부와 이상, 그리고 그 실현 방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발언을 아직 들을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하다. 물론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들먹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원론 수준의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든 듣기 좋아할 만한 언설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이다.

하기는 찰나적인 대중적 인기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극장정치’의 시대에 시대상황을 정확히 읽고 그것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주의를 끌기 위한 갖가지 수준 낮은 쇼와 이벤트, 저열한 정치적 책략일 뿐이다. 엄청난 비용과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라 안팎은 전대미문의 심각한 복합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기는 결국 정치의 열화(劣化) 현상에 연결돼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폐부를 찌르는 뛰어난 정치연설을 들어본 지도 까마득하다. 물론 정치가 늘 진지하고 엄숙한 것일 필요는 없다. 엄숙주의는 권위주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대중에게 보다 친근한 것이 된다는 것과 정치의 천박화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중과의 친밀한 ‘소통’을 위한답시고 실제로 행해지는 정치적 행태는 대부분 대중을 즉자적인 욕망 충족에만 매달린 근시안적인 존재, 즉 유아나 백치처럼 취급하기 일쑤이다. 이런 식으로는 나라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대중의 정치적 교양이 질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나는 지금과 같은 정치의 열화 현상이 초래된 원인은 일차적으로 이 나라 ‘엘리트들’--좌우를 불문하고--의 상상력의 빈곤, 혹은 정신적 왜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한창 얘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경제민주화란 시대상황으로 볼 때 결코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지금 그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경제민주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명쾌한 설명과 실현 방안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단히 말하면, 경제민주화란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생긴 개념이다. 지금과 같은 극심한 부의 편중이 더 계속된다면 사회적 안정성이 파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은 특권 계층 자신의 존립기반도 허물어질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란 무엇보다 경제적 평등화를 뜻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평등화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땜질이나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해방 공간에서 행해진 토지개혁과 유사한 수준의 과감한 개혁이 아니면 안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토지개혁보다도 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해온 온갖 시스템의 근본적 전제였던 ‘경제성장’이 더 이상--항구적으로--계속될 수 없는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성장시대의 종언’이 뜻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중앙집중적 거대 금융 및 산업시스템의 끊임없는 확대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생활방식, 그리고 그 방식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추기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육 등 온갖 제도와 관행이 근본적으로 탈바꿈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극히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사회가 문명의 존립방식 자체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중대한 과제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전환이라는 과제도 정치적 합의와 결정을 거쳐야 할 것인데, 지금처럼 질 낮은 정치로써 어떻게 이 사활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사회에 지금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적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들 가운데 ‘성장 없는 시대’를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진보적이라는 이들도 결국은 성장 논리에 고착되어, 새로운 성장정책으로 가령 우주항공, 신소재, 첨단 제약의료 분야 등 혁신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혁신기술 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라도 재벌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오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장 논리로부터의 탈각을 위해서도 지금 절실한 것은 과감한 상상력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이나 정신력의 빈약함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제헌헌법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돌아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제헌헌법이 외국의 헌법을 졸속으로 베낀 것일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자본과 노동간의 공평한 관계를 규정한 ‘이익균점권’이라는 조항은 국회에서 장시간에 걸친 격론을 통해서 성립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의 이 조항은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錢鎭漢) 등에 의해 발의되었다. 전진한에 의하면, 노동자는 ‘노력’을 출자한 자본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돈’을 출자한 자본가와 이윤을 균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다. 전진한은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고루한 사상”임을 역설했다. 그러니까 이익균점권의 논리는 오늘날 재벌과의 협력을 운위하면서 결국은 재벌의 눈치를 보는 왜소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적 강인함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익균점권’ 조항이 현실에서 실천되었는지 여부는 일단 별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60년 전 선인들의 당당한 정신과 자세에 비해서 우리들이 지금 한없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었음에도, ‘이익균점권’ 조항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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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1 09:55 2012/11/0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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