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라고 했다. 타자는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나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필연은 곧 억압이며 구속이며 강제다. 그런데 우리는 필연적으로 타자와 함께 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타자의 불행과 고통을 외면할 수 있다면 타자는 그저 타자로 남는다. 이때 타자는 나와 무관한 존재이고, 나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살 수가 있다면 우리는 냄새나는 오물과 불쾌한 쓰레기 더미에서 나 홀로 깨끗하고 안락한 집을 지어 고고하게 살겠다는 발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를 경멸해야 한다면 바로 그런 인간일 것이다.
언어는 거울이자 렌즈다. 비춰볼 수도 있고 들여다볼 수도 있다. 생겨나자마자 급격하게 확산되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말(飛沫), 상기도, 슈퍼 전파자, 밀접 접촉, 능동 감시, 국민안심병원 같은 용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의학사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새로운 말이 있다. ‘○○번 환자’와 ‘자가(자택) 격리’. 발음하기가 편치 않은 두 새로운 용어를 한참 들여다본다.
6년 전 신종플루 때 감염된 환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번호를 붙이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를 검색해보았더니 2009년 5월 국내 첫 신종플루 확진 환자는 51세 수녀였다. ‘1번’이 아니고 첫 번째였다. 2003년 사스 첫 추정 환자 역시 ‘1번’이 아니고 40대 남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자를 가리킬 때 주로 번호를 사용한다. 내 눈에는 ‘14번 환자’와 ‘35세 남성’은 달라 보인다.
환자에게 번호를 매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염 시간, 감염 경로를 강조하기 위한 고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반대로 행정 편의주의의 발로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환자 대신 ‘15번째 환자 박모씨’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까. 내게는 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15번 환자에게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15번 환자는 인간이기 이전에 격리시켜야 할 감염자일 뿐이다. 후자에서 번호(서수)는 환자 박모씨를 가리키는 한정사 역할에 그친다. 박이라는 성씨는 그가 우리와 같은 엄연한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번호를 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씨를 붙인다고 해서 환자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번호 붙이기를 통해 환자를 비인간화하는 행태에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 환자라고 명명되는 순간, 그는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그 순간 사회는 환자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몇 번 환자는 이기적이고 몰상식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힌다. 비감염자와 감염자 사이의 경계가 확고해지는 동시에 비감염자들 사이에서도 적대감이 형성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의가 활성화된다.
메르스 예방책 중 첫손으로 꼽히는 손씻기도 마찬가지다. 귀가하자마자 세면대에서 강박적으로 씻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흔적이다. 손을 씻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는 불특정 다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접촉하지 말아야 할 감염 경로일 따름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타인이 거대해지고 또 구체화된다. 타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씻기는 타인을 격리시키는 동시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염병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확인시켜준다.
환자를 번호로 부르는 (무)의식은 자가 격리에 견주면 사소해보일지 모른다. 자발적으로 외출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강제적으로 ‘감금’되었을 것이다. 저 민주화 시절, 가택 연금에 이어 조선시대의 위리안치가 생각난다. 만일 내가 당사자라면, 그것도 정부 당국이 해당 병원을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어떠했을까. 게다가 가족까지 함께 두문불출해야 한다면. 자가 격리 지침에 따르면 생활 용품을 따로 써야 하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가족 또는 동거인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밥도 따로 먹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인구 1000명당 병상 수 9.46개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일본 다음이다. 하지만 1000명당 공공병상 수는 1.19개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시설이 충분하다면, 아니 설령 공공 의료기관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국가가 보다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자가 격리는 아예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가 격리라니. 전쟁이 일어났는데, 국가가 각 가정을 진지로 만들어 각자 전투에 임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환자 이름 대신 일련번호를 매기는 ‘국가의 마음’과 자가 격리를 대책이라고 내놓는 ‘국가의 마음’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메르스 사태를 지난해 세월호 사태와 동일시한다.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선박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최근 메르스 진원지 중 하나인 삼성서울병원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이 나왔다. “우리 병원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다.” 그럴 것이다. 국민의 생명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어딘가가 뚫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