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님이 마지막 부분에서 “처음엔 다 힘든 거다. 행인도 처음 공부 시작할 땐 허벌 힘들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더 힘든 것 같다만. 그래도 좋은 방향으로 가야지, 잘 못 된 거 알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되잖는가? 아니, 가만... 저 선생님들은 애들 패는 것을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닐까? 어허... 그럼 여지껏 구라친 내용이 다 헛소리가 되어버리는데... 쩝.”라고 한 말이 여운을 남기네요.
[독일에서, 특히 라틴어와 희랍어, 그리고 부분적으로 히브리어 등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가 필수이거나 또는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소위 “인본주의 고등학교”에서] 교육을 이야기하면 의례 등장하는 슬로건과 사람이 있는데 아시다시피 괴테와 그가 자기 인생을 결산하면서 쓴 “나의 일생에서 간추린 것: 시화된 것과 사실”(Aus meinem Leben: Dichtung und Wahrheit)이란 책이죠. 괴테가 자기 생의 상당 부분을 시화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책인데, 내용인즉 어렸을 때 엄청 까져야 교양을 쌓아갈 수 있고, 이렇게 까지는 가운데 뜻을 세우고 뜻을 세운 만큼 늙어서 거둬들이고, 그렇지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하루 강아지 범 행세를 하다가 자기 한계에 부딪혀 자신을 알고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게 된다는 것인데, 다른 것은 제쳐놓고 체벌과 “까지는 것”만 보자면 그 사이에 변증법(?)이 작용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늘천따지와 변화무쌍한 고어의 문법을 습득하는데 대가리에 떨어지는 할아버지의 담뱃대가 혹은 잘했다고 칭찬하는 달콤한 사탕이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체벌보다는 체벌이나 다른 형태로 다가오는 "고전"의 권위에 대항하여 “까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까진 놈”이 인생을 제대로 산다는 생각도 들고 …
폭력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근대성의 발아를 본다면, 천자문을 앞에 두고 훈장할배에게 곰방대로 마빡을 두드려 맞던 그 시기의 달콤함이라는 것이 근대적 제도 덕분에 사라졌다는 상실의 아픔도 있겠군요. ㅎㅎ
저는 님이 정확한 지적을 하셨다고 보는데요, 사실 이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까진 놈'을 도태시켜버리려는 것 같아요. 실제 그 '까짐'이 가지는 성격이 뭔지는 도외시해버리고 '까진' 그 상태만을 보는 거죠. 애들이 개기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만났던 그 '애들'의 경우죠. 물론 이걸 경험론으로 치부하고 일반화를 하지 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까짐'의 원인이 뭐고 그 '까짐'이 가지는 어떤 합리성을 발견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개김'에 대해 체벌이 아닌 다른 방식을 구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덧: '까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학생들의 문제도 분명히 있겠습니다. '까임' 당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당장의 분노로 바르르 떠는 것이 결국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까임' 당하는 친구들이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게 아직 '어린' 학생들에겐 더 당연한 거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어린' 거겠죠. 그러나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까였던' 학생들이 나중에 인생 제대로 사는 경우를 저도 많이 봤습니다...라고 또 경험담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