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인터넷이 고장나서 못들어왔는데 새롭게 단장했네요. ㅊㅋㅊㅋ
깁스 얼른 나으시고 논문도 잘 되시길 바래요. (저도 쓰고 있는데 힘들다는 ㅠ)
ps. 아마 체벌논란에서 징징대는 분들은 아이들에 대한 제재수단을 대체할 만한게 현실적으로 없기 때문인 것인거 같아요. 원칙적으로는 타당한데 교사의 입장에서 제재수단이 없으면 생활지도 등에 어려운 점이 있겠죠. 굳이 말하자면 교사에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제재하게끔 만드는 현실이 더 문제일까요... @_@???
"아이들에 대한 제재수단"이라는 것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으로 아이들을 "제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아이들을 학교라는 공간 안에 가둬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때문이라고 봅니다. "교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만드는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는 거죠.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부담감이 이토록 큰 구조에서는 체벌 아니라 어떤 방식을 동원하더라도 아이들에 대한 "제재"는 더 필요하게 될 겁니다. 아이들이 맘껏 뛰어 놀고,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그렇게 큰 아이들에게 직업이나 학벌에 따른 차별을 가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건 이미 늦은 걸까요...
아무튼 그런 고민을 속시원하게 해보기 위해서라도 논문 빨리 끝내야겠습니다. ㅠㅠ 자주 뵙져.
저도 이 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주위에 초등학교 교사에게 물어봤더니 그 분 말씀이 78년부터 교편을 잡았는데 지금처럼 아이들 지도하기가 힘든 적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다들 초등학교 6학년을 안맡으려고 하기때문에 5,6학년은 항상 남교사 담당이고 나이 든 여교사들은 1,2학년만 맡으려고 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학기초에 말썽부리고 다른 애들 수업못하게 하는 애가 한 명 있는데 얘를 제재를 못하면 다음 학기에는 그런 애들이 여러 명이 된다고 하더군요. 정말 어쩔 수 없다고. 그렇다고 우리도 네덜란드나 호주처럼 전학이나 퇴학을 시키는 방법을 도입할 수도 없고. 사실 때려서라도 가르치겠다는건 한국식 온정주의고 말 안들으면 내치는건 서구식 합리주의죠.
얼마전 제가 존경하는 분과 산책을 하면서 얘길 나누다가 제가 우리 사회에서 제일 시급하게 바꿔야 할 곳은 학교라고 하니까 그 분은 아예 학교를 없앴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한 번 상상을 했죠. 학교는 없고 도서관이나 하자센터같은 곳에서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만 모여서 책 읽고 실험하고 토론하면 어떨까 하고. 그런데 그 곳에 공부엔 전혀 취미가 없으면서 그냥 아이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온 아이가 있는데 다른 애들이 하는 걸 방해하고 소란을 피우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야미// 뭐 유사한 이야긴지 모르겠습니다만, 군대 다녀온 애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요새 신병은 우리 때랑 달라요."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쌍팔년 이전부터 군대 갔다온 사람들의 변함없는 레파토리죠. 다시 말하자면, 언제나 윗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랫사람들이 별종으로 보이는 거구요. 말씀하신 그분이 78년부터 교편을 잡으셨다면 연세가 상당하실 텐데, 날이 갈수록 아이들 지도가 힘들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애들 역시 그 변화에 따라 변화하니까요.
앞의 덧글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도서관이나 하자센터 같은 곳에서" 하는 공부는 어떤 공부일까요? 공부에 전혀 취미가 없는 애들이 왜 그런 곳으로 와야 했을까요?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곳이죠. 자기가 보고 싶은 책을 골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 그런데 요즘 도서관은 그냥 독서실이더군요. 하자센터는 제가 직접경험한 바가 없어서 별로 드릴 말씀은 없네요. 공부에 전혀 취미가 없는 아이는 다른 취미도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이의 별난 취미를 감당해줄 만한 곳이 없을까요?
야미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한국식 온정주의와 서구식 합리주의를 구분하신 부분이 있는데요, 사실 한국은 이미 그 "온정주의" + 합리주의 체계로 되어 있죠. 기왕에 주어 패고 퇴학시키는 일 빈번히 봤거든요.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깝다는 거죠.
사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야미님이 느끼시는 답답함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어떤 다른 대안이라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는 씨도 먹히지 않으니까요. ㅠㅠ
그래도 이렇게 서로가 생각을 나누다보면 뭔가 또다른 방식이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되네요. 고맙습니다.
저도 그 분 글을 읽었는데 동의하기 어렵더군요. (물론 저는 센델을 안 읽었지만) 필자가 센델을 비판하는 주된 근거는 센델에게 중요한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동체 개념이고 우리 진보진영에서 공동체라고 하면 진보라고 착각하는 천박한 풍토가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하는데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동체는 arete에서도 나타나듯이 공동체가 개인을 최선의 상태로 끌어올려주는 기능을 합니다. 물론 arete가 남성적 미덕이라는 비판의 소지가 있지만. 그리고 개인의 선이나 행복의 범주가 정의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물론입니다. 도대체 누구의 선이 선이라고 결정할 수 있을까요. 공동체적인 합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칼 폴라니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동체 개념을 이어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폴라니의 경우에는 자유는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의 것이며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에 귀속되어야한다는 주장도 하고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기 위해, 혹은 서로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서로의 자유를 제한하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잠재성을 최대한으로 발현시켜주는 공동체의 개념을 인습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동체 개념과 등치시키는 대담한 주장을 하고있더군요.
...//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사실 법학적 차원에서라면 샌델의 논의가 더 쉽게 수용될 수도 있죠. 국제법적 측면은 차치하고 국경을 물리적 외곽으로 정형화하고 있는 법률의 논의에서라면 샌델의 논의는 말 그대로 가장 상식적 차원의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것이 '공동체'라는 범주까지 갔을 때, 과연 그 공동체가 가지는 정의라는 것을 '공동체'로 한정된 범주 바깥까지 연장할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새로운 한계가 드러난다는 거죠. 만일 이 한계를 무시한다면 가장 보수적 담론으로 점철된 법학의 분야에서 법 자체를 전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오게 되지만, 그렇게 될 경우 바로 지금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법에 대한 논의는 전복이냐 아니냐 이외의 논의가 무용해진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이건 님이 지적하신 아리스토텔레스적 공동체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가 되는데요, 닫힌 계로서의 공동체 개념을 넘는 어떤 정의 혹은 사해동포의 관점에서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공동체에 적용되는 정의가 가능한지 여부가 또다른 관심사가 된다는 거죠. 아무튼 기왕에 '정의'에 대한 관심이 사회적으로 촉발된다면, 그것이 샌델의 공적이든 뭐든 간에 이런 진전된 관심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