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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용서할 수 없는 자라도 이해할 수는 있다.

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까지 헤드폰과 이어폰을 만드는 전자제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혜정은 거기에도 노조가 생겼다며, 단지 교정이 넓어서 선택했다는 대학에선 인근 성수공단의 체불임금을 남겨둔채 야밤의 제품반출을 시도하는 구사대와 몸싸움을 하던 여공들이 다쳤다며 분개하더니  채 1학년을 다 마치지도 않고 사라졌다. 티비에서는 가자 북으로! 를 외치는 대학생들을 몽둥이로 두들기는 영상이 편집 속에서도 연신 내비쳤고 대통령직선제에도 유유히 권좌를 장악한 우익이 세를 과시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연신 빨아대는 흡혈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 한국의 민주화는 끝났어. " 라고 백기완의 낙선을 두고 더 이상 희망을 볼 수 없다고 인하대의 운동권이라는 친구오빠가 말하더라며 혜정은 6월 항쟁은....우리들의 승리가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다. 그 애는 더 이상 문학소녀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사춘기의 몸살을 앓던 내성적이고 연약하기만 하던 아이도 아니었다. 아빠에게 맞은 뺨의 붉은 손자욱을 가리던 반항하는 십대도 아니었다. 스물 하나, 그 후로 그의 인생을 철저하게 규정했던 이십대의 운동권 인생을 그 애는 모든 인연을 끊고 잠적하는 것으로 본격화했다.

그 애가 다닌 학교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독문학과가 있는 4년제 종합대학교였다. 꿈이 없어.....사회에 나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어서, 고교를 졸업하자 마자 취직을 하는 건 아무래도 아니라며 고 3의 수험생 생활을 그야말로 공부에 매진했던 그 애였다. 왜 독문학과를 가느냐고 묻자, 여자아이들이 선호하는 사범대나 영문과를 가는 건 시집 잘 가려고 가는 것 같아서 싫고 법대는 너무 어렵고 또 웃길 것 같고 경제학과는 수학 때문에 안 된다며, 독일철학을 원서로 공부하고 싶어서? 하지만 사실은 그저 전혜린의 분위기에 딸려가는 거라고 말하면서 혜정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독일어는 불어만큼의 분위기도 없고 발음이 자기가 내기엔 너무 뻘쭘하다며 게다가 짜라투스트라에서 슈바빙의 안개 낀 아침을 느끼긴 어렵겠다면서 그냥 번역된 독일의 원전들을 보기도 바쁘다고 혜정은 한창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는 맑스엥겔스 저작들을 사는데 용돈을 다 털어넣고 있었다.  그 애와 대학의 낭만을 느껴본 건 아직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의 귀여운 후배 노릇을 하고 있던 오월의 축제와 골방에 처박혀 세미나합숙을 마친 후 조금 남은 여름방학끝에 한가로이 교정을 거닐었던 며칠 뿐이었다.

" 아무리 읽어도 주체사상은...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건 유물사관이랑도, 변증법하고도 인식론적으로 연계가 안돼. 휴우.... "  혜정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직속 선배와 대판 싸웠다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고민했다. 혜정과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고 엠티를 핑계삼아 가까운 춘천에라도 다녀오고 싶었던 윤 진은 고민하는 혜정에게 할 말이 없었다. 데모가 뜨던 말던 별로 영향이 없었던 예술가들의 무리 속에 있는 윤 진에게 아무런 비난도 비판도 하지 않는 혜정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 너까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 나두 확신이 없는데 뭐...." 그리고 덧붙였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도 예술가들은 단죄의 대상은 아니었어.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해. 인간의 역사는 사회혁명보다 더 큰 틀거리 속에 있다고... 윤 진은 그 애가 보는 소설책을 잘 몰랐던 것처럼 그 애가 소장하고 있던 사회과학 서적도 한 장 떠들어본 적이 없었던 지라 무슨 소린지 하나두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자신을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았었다.

그런데 자기에게조차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야말로 뾰로롱 사라졌다. 그 애의 학과 선배들 중 이름을 들을 적이 있는 사람을 과사무실에서 만났다. 안 그래도 혜정의 아빠가 온 학교를 뒤집어놓고 갔다며 아주 학을 떼었다며 진저리를 치면서 말했다. 사실은 자기들이 기껏 키워놓은 후배를 피디그룹에서 빼갔다고. 과에서 자기를 같은 동아리에 있는 3학년 언니의 따라지라고 부른다고 삐져서 말하던게 생각났다. 혜정을 주체성있는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언사에 윤진은 그 애가 보다 낮이나 밤이나 처박혀 살던 동아리실을 찾았다. 2학년 알피라는 화학과의 우직스러워보이는 여자가 여름방학 후 동아리엔 거의 안 나타났다면서 학생회관이 아닌 대운동장 스텐드 밑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학내에서 거의 유일한 피디써클이라는 곳의 동아리실을 알려주었다. 맨날 밥먹자고 쫓아다녔지만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학생식당에서 자리를 함께 했을 뿐이라며 네모난 얼굴의 예비역이 우리 쪽으론 안 왔다고 한다. 대체 이, 부지만 서울시내 제일로 넓다 뿐이지 학생운동은 쓰다만 플랭카드와 신나냄새로 꽉 찬 한 동의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문과대와 사회대 앞의 민주광장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이 손바닥만한 행동반경을 갖고 있는 학생운동권에서 혜정은 어디로, 어느 선을 타고 빠져나갔단 말인가?

나름 주변을 정리하는데 순서를 밟고 상대를 배려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던 혜정이었다. 중학시절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도 천천히, 고등학교의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얽혔던 남학교의 후까시들과 인연을 끊는 것도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만나 설득하느라 1년 여가 걸려서 윤 진으로 하여금 울화통이 터지게 하던 소심가였다. 윤 진은 그 애가 데모를 한다고 시내에 택이 있다고 비택이라 말할 수 없다고 혼자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고 나가는 것을 보고, 그리고 저녁에는 일곱시 뉴스를 통해 자욱한 최류가스 속에서 몽둥이찜질을 당하며 피투성이가 된 대학생들과 아우성치는 시민들을 카메라에 잡은 영상을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었다. 혜정아, 너에겐 어울리지 않아. 그 작은 몸으로 옥쇄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처럼 팔에 팔을 걸고 군중들 속에 있어봤자 몰아치는 전경들보다 더 빨리 튀는 너의 그 동지들의 발에 채여 너의 전력질주는 소용이 없을 거라고. 학생운동도 대학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낭만 중 하나라고 뻔뻔스럽게 읊어대며 인민에 대한 사랑을 떠드는 입술로 취업준비를 착실히 하는 도서관에서 건진 잘 빠진 여학생과의 키스와 함께 대학이라는 또 하나의 기득권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 시대의 대학생들이 하는 운동 속에서 너는 또다시 고립될 꺼야. 입시에 매몰되었던 고등학교에서처럼. 부모의 직업이라는 귀속계급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기독사립학원의 중학교에서처럼. 하지만 그 애의 고집스럽게 꾹 다문 입술은 대학에서의 한 계절, 한 계절이 갈수록 더욱 다시 벌어지지 않았고 간간히 웃음을 날리던 순진한 표정에는 침울과 의혹이 도사린 비장함이 갈수록 짙어져갔다. 맑스주의가 답을 주지 않는다면....삶의 진리는,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여기서 답을 찾아보겠어. 끝까지 가 볼꺼야. 대학생이 아닌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만이 희망이야. 60년대 빈농이었던 아빠가 도시빈민에서 부동산폭등기에 한 몫 잡은 걸 기화로 자수성가에 성공하면서도 구질구질한 가난과 설움 속에서 습성화된 가부장적 폭력으로 가족들을 공포와 불안 속에 살게 한 어린시절을 혜정은 용서할 수 없어했다. 우리 부모가 자기 노동력에 기반한 자영업주가 아니라, 그래서 쁘띠비지의 간사하고 비열한 속성을 내성화하지 않고 하루 품으로 하루도 버티기 힘든 공장노동자로 살았다면 그래서 아마 계속 가난하고 일상의 불편에 온 에너지를 소진하며 어쩌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돈이 없어서 피지배계급의 재생산에 머물렀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과 소박한 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그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만이 가질 수 있는 계급성에서 나오는 연대의식에서 나오는 인간애라고. 혜정은 그 기대와 희망의 끈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분명히 그 애는 다시 공장으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 학생아르바이트가 아닌, 먹고 살기 위해 취업을 갈구하는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울산? 아니면 인천? 학교의 선배들이 아니라면, 그 애가 함께 한 ' 동지' 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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