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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열애중 1

가을이 깊어갈수록 혜정은 말 한 마디 더 하는 것이 인고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듯, 쪼그만 입술을 꼭 다물고 우울해했다. 플라타너스의 크고 마른 잎들이 차로변 인도를 끝없이 어지럽히고 뉴스에서 아직도 간간히 나오고 있는 노동자파업과 사상누각같은 기대를 부풀이고 있는 대통령선거에 관한 보도들 속에서도 스산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걷는 행인들은 내리뜬 눈을 들어올릴 줄 몰랐다. 학교는 코앞에 닥쳐온 입시 앞에서 부산한 긴장을 이어나가고 있었고 수험생들에게 주목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그들과 교대하여 고3생활을 시작할 자신의 2학년 담임반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은 공부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하며 끝없이 스트레스를 전염시키고 있었다.

그런 압박감 속에서 혜정은 또 다른 종류의 심리적 외상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애의 뿌리깊은 열등감 혹은 트라우마는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왔다는 이미 오래 전, 그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었고 그리고 이제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과거의 사실에서 연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에 덧대어 성적에 대한 과중한 압박감, 동급생들보다 훨씬, 모든 면에서 뛰어나거나 특출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 한데 대한 자격지심 그리고 87년,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흐름에 함께 하지 못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자괴감 같은 것에 사로잡혀 갈수록 심각한 우울에 빠져들었다.  결국 그 애의 고등학교는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쟁취하게 되었지만 그것을 주도한다고 알려졌던 3학년들에 대해, 혜정은 자신이 정상적으로 여덟살에 학교를 입학했으면 그들과 같이 뭔가를 하고 있었을 텐데 하는 미련 아닌 미련을 못 버렸다. 자기가 연루되지 못 한 그 어떤 곳에서 있었을 회합과 토론과 인쇄물을 만드는 긴장과 자긍심, 그리고 분명히 연관되어있으리라고 추측되는 국어선생님과 잘 만나지 못 하고 있는 상황까지도 혜정은 나이에 맞게 학교를 다니지 못 한데서 비롯된 불운이라고 생각하며 우울해했다.  가을, 바람이 계속 불어대고 산책을 하노라면 갈데없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주체할 수 없어하던 혜정, 그 애를 보는 것은 그리 예민하지 않았던 진의 감수성을 쉴새없이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 애가 좋아했던 노래, 선구자와 보리밭을 흥얼거리는 것을 보고 그 음정, 박자와 상관없이 한정없이 처연해지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따라서 감상에 젖어들었고 그 애가 눈물 어린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빼앗긴 들에도 봄을 오는가를 읊조리는 것을 듣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듯, 어깨가 들썩일 듯하여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거리로 나가야할 것 같았다. 대선의 패배와 운동의 일단계가 제한적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을 예감하는 듯, 그래서 그와 같은 역사적 시기를 행동으로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을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아쉬워할 것을 예언하는 듯 혜정은 그 87년의 가을이 가는 것이 싫어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을이 지나는 것에 심장이 터질 듯한 애틋함으로 불안해 했던 것은 진도 마찬가지였다.

 

" 렛슨시간 더 늘린다고 안 했어? "

혜정은 평일인데 이번 주에 벌써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 온 진에게 근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 응, 그러니까 내일은 안 가는 날이라니까. 학교 끝나고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 공부할 꺼 들고 와도 좋고. "

" 그래? 그럴까....야자 안 한다고 해서 공부할 데도 마땅챦긴 해. 근데 걍 놀다만 올 것 같은데..."

" 뭐 어때, 너 맨날 자기 전에도 공부한다며? 글구 담달부턴 독서실 끊을꺼라고 했쟎아. 좀 쉬엄쉬엄 해도 되지 않아? "

" 응, 알았어. 집에 안 들르고 바로 갈께. 저녁밥 먹여줄꺼지? "

" 그럼, 최근에 배운 카레라이스의 정수를 보여주지 ! 하하하 "

진은 냉장고에 감자와 양파와 당근이 있는 지를 확인했다. 고기보다 햄을 넣는 게 낫겠지. 육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 혜정은 그 졸깃함, 고소함, 육즙에서 나오는 단내같은 것에 취하는 것 같아 싫다고 했다. 그다지 음식의 맛에 민감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커다란 상에 올려진 한 접시의 고기반찬에 경쟁적으로 젓가락을 들이대는 것이 너무 민망스럽다고도 했다. 혜정은 지나치리만큼 경쟁구도에 놓이는 것을 기피하고 그래서 항상 뒷줄이나 열외에 서 있기를 자처하곤 했다. 그래도 햄을 좀 먹어줘야지...하고 생각하며 진은 슈퍼에 가서 햄 하나, 맥주 두 병, 그리고 오징어땅콩 과자를 샀다. 비디오가게에 들러 영화도 하나 빌릴까 하다가 그건 혜정이 오면 함께 가서 고르는 게 나을 듯 싶었다. 그 애의 영화 취향을 진은 잘 따라갈 수가 없다는 것도 은근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 애가 감명깊게 본 영화가 인도로 가는 길이라고 해서 얼마 전에 빌려봤지만, 뭐가 재밌다는 건지...편하게 보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 후의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애가 무얼 고르든 진은 가치있는 시간이 될 것은 분명하리라고 생각하는 진이었다.

엄마가 공부방의 책임자로 있게 된 후, 저녁식사는 진이 혼자 먹는 일이 많아졌다. 동생에게 밥을 안 차려주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이수는 굳이 엄마의 공부방으로 가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고 거기서 공부하다가 엄마와 같이 집에 돌아오곤 했다. 친구들과 붙어 어딘가로 싸돌아다니지 않는 한 늘 그랬다. 왜? 밥 먹고 설겆이하는게싫어서? 그렇든 어떻든 진은 동생에 대해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혜정과는 반대로, 나이보다 일찍 학교에 입한한 이수는 남자애들의 세계에서 또 다른 종류의 곤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이 참견하기엔 너무 먼 세계였다. 그의, 남자애들의 그 조숙한 척하는 몸짓들이 보기 싫은 것도 한가지 이유이긴 했지만.

카레라이스 봉지 뒤에 써 있는 조리법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읽어보고 냉장고 문쪽으로 넣어두었다. 할 때 마다 읽어보지만 정말 단순한 조리법이었다. 이걸 왜 혜정의 국어선생님은 실패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을 팔팔 끓여서 썰은 감자랑 당근이랑 양파랑을 확 들이부었다가 화악 끓어넘쳐 낭패했다는 그 여자의 요리실패담을 혜정에게 전해들으면서 그 여자는 자신이 요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돌봐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넌즈시 알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설마 혜정이 국어선생님 집에까지 찾아가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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