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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열 아홉살이었던 해의 겨울.

그녀는 어지간히도 힘들었던가.

조울증 환자처럼 기분을 자주 바꿨다.

" 아빠가 대학을 가지 않으려거든 취직을 하라고. 아님 시집을 가던가. "

그녀는 음울하게 말했다. 그간 듣기로 그녀의 아버지는 말을 가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깊이 생각하고 하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말 실수 속에 무의식적인 소망이 담긴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자처럼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생각한 듯, 고졸의 자격으로 취업을 하는 건 별문제가 아니나, 저의 친구 중엔 상고를 다니는 이가 있으니.

" 사회에 나가는 게 무서워. 나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못 했는데. "

물론 시집을 간다는 건 더 황당하다. 참...

진은 말을 잊은 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 저건...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같은 걸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은 그 국어선생님의 탓이다. 하는 생각을 진은 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소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긴 했으나, 보다 더 문학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물론 진이 그녀를 먼 눈으로 보고 있었던 중학시절에는 더우기나. 3년 내내 저만을 바라보면서 말 한 마디 못 붙이다 겨우 쵸컬릿 상자 하나를 건네기 위해 겨울 밤거리를 건너오던 그녀가 아니던가. 감성에 젖어 짝궁과 숱한 편지를 쓰며 밤을 지새다가 그 짝궁이 이과를 선택하자 저도 그래야 하나 하고 오래 고민하던 그녀였다. 저에게서 화이트데이의 꽃다발을 받고 당황하며 얼굴 붉히던,  미소 한 번 손길 한 번에 표정 바꾸며 그러면서도 마음 안 열고 오래 애먹이며 새초름하던 그녀였는데. 진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 안아보았던 여름 이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손을 꼽을 만하다. 물론 그 적은 회수의 넓은 간격 만큼이나 안을 때마다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며...아니 생각지 못했던 부면에서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그녀를 안다보니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츱...진은 성질이 날 것 같았다. 그 국어 선생 때문이다.

그녀가 자주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것은. 제가 전화하고 찾아가고 다음 약속 미리 잡고 하면서도 그 사이로는 연락 한 줄 없이 한 주고 두 주고 그냥 흘려보내며 침잠하던 것은.

생각해 보니 시월에는 아예 한 번도 못 만났다. 진이 혼자 열 받아서 연락 안 했더니, 이게 끝까지 전화 없는 것이...이러다간 그냥 인연 끊길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곁을 흘려 보낸 이가 한 둘...이다. 저까지 셋이 될 듯. 정 없어 그렇지는 않은 것이 그녀는 맘에 담았던 친구, 그 소수의 친구를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인데. 진은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만 하는 대상이었던 것을 자각하자 요 몇 개월 얼굴 맞대고 또 몸도 맞대었다 한들, 그녀에게 추억 속의 존재로 전락하기는 정말...몇 날밤을 공들여 써내린 장문의 편지를 보내지도 않고 서랍 속에 묵히는 그녀에게 있어...어느날 쓰레기통으로 내다버리는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하긴...

진은 혼자 침울한 그녀를 앞에 두고 공감을 표한다는 듯, 말없이 혼자 골똘하다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아, 상담을 시작하지 못 하고 있는 내담자를 기다리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진은 달을 넘겨 다시 만난 그녀가 먼저 안겨 오고, 그 안겨 오던 밤이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미소를 수습하기가 난감하다. 슬쩍 고개를 푹 숙여 같이 심각한 척.

" 아무래도 독서실을 끊어야겠어. "

별로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은 듯, 말 없는 진의 앞에서 그녀는 혼자 생각에 빠지고 있다.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 할텐데. 하는 듯.

기계적으로 그런 추측을 하며, 진은 그러나 국어선생에 대한 증오...까지는 아니라도 미움 내지는 불만과 뒤섞인 상념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녀의 육감적이었던 모습, 가녀린 허리를 두 손 안에 부여잡자 스스로 팔을 올리며 옷을 벗던, 그러면서 진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꼬박꼬박 강제하던 그 진지한 표정의 얼굴이 떠올라 불쑥 아랫배가 짜르르 해 온다.  그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던 것이...

" 뭐? 독서실? "

진은 신호가 늦게 가는 기계식 전화를 받았다는 듯, 한참 뜨는 말대답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 응. 하는데. 그래, 뭐 그녀야 기본 자세가 나는 게으른 나무늘보요 하는 식이니. 허나 진은 말대답 늦게 하면서 그녀가 혼자 마음을 다져먹으며 올 겨울엔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고 나름 생활계획을 다 세우는 것에 침묵으로 동조한 셈이 되었다.

" 독서실 가면 언제 올라구? "

" 아이...뭐 들었어. 수험공부하는 얘들은 그냥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다 한다니깐. 넌 예능계라 안 가 봤겠지만 독서실 총무가 이불 보관도 해 주고, 소등도 신경 써 주고. "

" ...춥지 않을까. 넌 추위 많이 타쟎아. "

진은 할 말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주워붙였다.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라니...총무가 어쩌고...이 얘가 정말...

" 실내인데, 뭐. 그보다 아빠가...허락해 주실지. "

그녀는 정말로, 자기는 집에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야 벼락치기 공부로 때워왔지만 입시를 정말로 통과하여 대학을 가겠다면 이렇게는 안될꺼라구. 쪽팔리게 후기 같은데 갈 수는 없고. 아빠는 재수같은 건 없다고 미리 말하고 있는데. 하면서.

" 아빤, 내가 공부 잘 하고 똑똑한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잘났으니까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면서 바락바락 대든다고. "

그녀는 잠깐 띠웠다가 이어 말했다.

" 후기 같은데 가면 등록금 아깝다고 하실꺼야. "

오빠는 삼수까지 시켰지만...딸자식에게 그렇게 투자할 순 없다고. 시집가면 그만인데, 무얼. 하는 말을 귀에 담고 있는 그녀는 결심이 확고한 듯하다.

" 친구들도 다 끊고 공부만 하려구. 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그녀는 수학 땜에. 하였다. 그렇게 걱정해도 1년 뒤 그녀의 수학점수는 한 자리 수였다. 국영수 비중이 압도적인 학력고사에서 수학점수를 그리 받고 전기 간 애는 그녀 밖에 없을 듯.

그런데, 뭐하러 독서실에 처박혀 겨울 삼동을 다 보내냐구!

한숨을 쉬며 불길해 했던 것처럼 그 겨울, 진은 그녀를 제대로...보긴 했으나 안지는 못 했다. 젠장...

그녀는 불쑥 전화를 해 와서는 집 근처 어디라는 둥, 배고프니까 컵라면 먹자는 둥, 공부하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하면서 음료수 하나만 사 달라면서 왔다가 사 주면 홀짝 먹고는 발길 돌려 총총히 사라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 한 술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독서실 갔다고 그녀의 엄마는 탄식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자정이 되도록 기다려도 그녀에게서 전화했었냐며 전화해 오는 일은 없고.

그래서, 그녀가 독서실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 두 달을 보내면서 공부를 열씸히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독서실에서도 친구끼리 소근대는 것에 귀를 쫑긋거렸고, 이불 덮어주며 징징거리는 애들의 시선을 느끼며 혼자 책상에 엎드려 있었으며, 낮이나 밤이나 참고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면서 지겨워져도, 허리가 아파도,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말 붙여 함께 할 동무가 없어 외로움만 새겼다. 그래선가 어째선가 밤거리, 반쯤 문닫은 가게 앞이나 골목 어귀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새로 표정을 만든 듯 웃는 얼굴임에도 하얗게 떠 보였고,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처럼 어색했으며 고개 돌리며 안녕. 하면서는 이내 침울함이 점령할 듯 짙게 그늘이 드리우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땐가는 독서실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차림새로 하염없이 뚝방을 향해 인적없는 차로변, 좁고 길다랗기만 인도를 따라 걷다가 네거리의 신호등을 기다려 건너더니 도로 턴 하여 언덕 위로 이어지는 인도를 걸어올라가기도 하였다. 한 밤에. 그 모습을 간판의 불을 끈 제과점 안에서 이수와 함께 빵을 먹으며 지켜보면서 진은 그제서야 그녀가...저를 만나고 사귄다 생각하고 나아가 연애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지난 1년 동안에도 혼자 산책하기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외로워하던 것에서도,슬픔을 내성화하던 것에서도 그녀를 덜어내올 수 없었다는 걸 진은 확인하였다. 옆에서 이수가 혀를 차며.

" 저 누나는 왜 저렇게 청승맞어? 저번에 놀러와서 떠드는 거 보니, 웃으면 귀엽고 이쁜데. "

흘낏 진을 쳐다본다.

" 잘 좀 해 주지? 쫌만 친절해도 디게 좋아하던데, 누나랑 친한 것 같더만 그렇지도 않은 가..."

말 없이 표정 굳어진 채 풀릴 줄 모르고 있는 진의 얼굴을 보면서 이수는 얼버무렸다.

" 아니 그런가...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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