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려는 순간 전화가 울렸다..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울린다..
"저.. 어디 누구인데요.. 엠알(MR 즉 반주) 좀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이 말이었다..
이렇게 거두절미하고 나 이거 필요하니 메일로 보내달라는
글은 공연철이 되면 꽃다지 홈페이지를 장식하곤 한다..
내 상식으로는 타인에게 뭔가를 부탁할 때는
일단 자기 신분을 밝히고
이러저러한 사정에 의해서 부득이하게 부탁하려 한다.
가능하겠느냐?
.. 이 정도의 말은 기본이 아닌가?
그 청년의 전화 받으며 들었던 것은
내가 그 청년에게 뭔가를 빌리고는 돌려주지 않아서 채근받는 느낌이랄까..
반주 제공.. 할 수도 있다..
한 때 우리도 아주 많이 사용하거나 연주하기에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는
반주들을 제공한 적이 있다..
그 때의 바램은
연주자들이 아주 없고
미디작업을 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열악한 노래패의 어려움을 해소해주고
연주자들이 있어도 역량?이 안되는 노래패에게 반주를 제공함으로써
위축되고 있는 노래패들이 더욱 분발하고 정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제공한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고 공연을 올리는 과정 속에
새로운 세상에 눈뜨고.. 그 노래만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생겨서..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물결을 같이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년간 반주를 공개한 결과는 당혹스럽고 참담했다..
연주자들이 있는 노래패조차 음반에서 듣던 그것처럼 멋있게 못하니까
반주를 요구하는 경우가 더욱 증가했고..
이전에 정중하게 부탁하던 태도들이 전당포에 맡긴 물건 찾아가듯 하더라는 것이다..
격론을 벌인 끝에..
우리의 반주 제공이 노래패들의 수동성과 의존성만을 부추기고 있는 등의 역기능이
의도했던 순기능보다 훨씬 많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반주제공을 중단하고 있는 실정이다..
민중가요가 대중가요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
내용에서의 차별성과 더불어.. 수용자들의 자발성, 재창조성 등등을 꼽곤 한다..
80, 90년대 학번들이라고 재능이 뛰어나서
악보 따고 스스로 연주하고 창작하고 한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 바라는 세상을 노래하려다 보니
자연히 창작을 하게 되고..
그러자니 악보 따기나 창작.. 연주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컴퓨터가 보급되면서는 스스로 익혀서 미디로 반주를 만들기도 했었다..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피시통신 시절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면 '전화카드 한 장'을 제각각 미디작업해서 올린 것이
열 개가 넘을 정도로 자기 나름의 소리를 만들곤 했다..
그렇게 스스로 미디를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가진 자들도
처음엔 두 소절 짜리 노래를 악보로 옮기기 위해
며칠 밤을 낑낑대며 씨름하던 자들이었을게다..
그러나 21세기에 민중가요를 향유하는 자들은 더이상 공부하려 하지 않는다..
이유야 여러가지일 것이다..
취업걱정에 음악에 투자할 시간이 없는 이도 있을 것이고
아무리 노력해도 너무너무 재능이 없어서 일 수도 있고..
좀 더 솔직해지자면..
굳이 내가 땀방울 흘려가며 익히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요구하면 주곤하니까..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고.. 바보같은 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게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다른 이의 노동력을 간단히 빌려쓰면 되니까..
내 땀방울이 들어가지 않고 부르는 민중가요..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청년이 요구한 반주는 '반미출정가'와 '이 길의 전부'..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담고 있는 의미는 알면서 노래하는걸까?
그 의미를 아는 이라면 절대 그런 식으로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업적으로 문화운동을 하고 노래하는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결국 이 문제 역시 음악적인 방식으로 풀린 문제이다..
그 노력들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를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