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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이 녀석

순간, 속에서 열불이 터졌다.

이 녀석을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호흡이 깊지 않은 아이들이 모두 그렇긴 하지만

이 녀석의 목소리는 도대체 호흡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오로지 입안에서만 나오는 소리...아무런 공명도 없는...

솔정도의 소리일까? 아니다. 도는 되지 싶다.

오늘따라 유난히 녀석의 데시빌이 거슬렸다.

도대체 말이 오고 갈 수 없는 녀석...

시종일관 되풀이되는 말이 안되는 말들...

듣는 기능이 만들어지지 않은 녀석은

그런 목소리로 그렇게 맨날 자기 이야기만 한다.

대답을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 소리...소리들...

익숙하게 바라봐왔고

애정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오늘 따라, 속에서 뭔가 올라온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다시 녀석을 바라본다.

안타깝고 서럽다. 녀석이...

그리고, 나를 본다.

이런, 아직도 듣지 못하는 어른....그게 나다.

다시 경계를 본다.

아직도 듣기를 힘들어 하는 나를...

 

녀석은 천정에 닿을 때까지 나무 블럭을 쌓아놨다.

그리고 날 기다렸다.

문을 열어주며 실실 웃는다.

뭔가 신나는 일이 있다는 거다.

'선생님, 오늘은 많이 해야한다...'

그러면서 블록빌딩을 보여주었다.

대단하다고 함께 기뻐해주었다.

그리고 녀석이 만든 블록의 공법이 제대로라는 걸 치켜세워 주었다.

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한참을 빌딩에 대해 이야기했다.

녀석은 빌딩을 좋아한다. 그림을 그리라고 해도 빌딩만 그린다.

녀석과 함께 기뻐해주고 싶어서 녀석이 대견해서...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맞장구를 치고

자기이야기를 들어주다가,

나는 내 임무를 자각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과외 선생이다.

녀석과 함께 책을 읽어주고 문제집 푸는 걸 도와주는....

조금은 아주 조금은 뭔가 해야 한다.

그게 내가 돈을 받는 근거니까.

그런데 녀석은 문제가 있는 놈이다.

수차례 엄마에게 이야기했고 내 몫은 책을 읽어주는 것 밖에 안되니

전문가를 찾으라고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아이를 위해서...엄마가 함께 치유해야 한다고...

그런데도 나는 계속 그 집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

돈이 필요하니까...

내 충고를 듣지 않는 엄마라면 그냥 내가 그 집을 그만 두는 것인데...

그걸 못했다.

때로는 그래도 애정으로 바라보는 내가 그나마 낳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녀석과 나의 수업시간은 놀이시간이다.

녀석이 야구하는 걸 좋아라 하면 함께 공을 던지고 치는 야구놀이를 하고

블록을 좋아라하면 블록을 쌓는다.

그러다가도, 그렇게 녀석에게 그냥 편한 어른, 제 마음 알아주고 눈치 안볼 수 있는

어른 하나 있어서, 조금씩 녀석의 눈빛이 살아나는 것에 만족하자고 하다가도

나는 오늘 같은 날, 내 임무를 자각하게 되고

해도 해도 너무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녀석에게 화가난다.

어떨 때는 화가난다고 말한다.

넌 왜 내 얘기 안들어 주는데?

나는 니가 좋아하는 거 같이 좋아하고, 니가 하고 싶다는 거 같이 하는데

넌 왜 내 얘기 안들어 주는데?

니가 그러니까, 속상하고 화가나서 나도 너랑 놀기 싫다...고

녀석에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녀석이 그런다.

'알았어요. 들어주께요. 하께요. 그러니까...나중에 야구해요'

 

그렇게 이어간 시간들이었다.

녀석을 만난 지도 벌써...작년 3월부터니까...1년이 다되어간다.

조금씩 눈빛이 살아나는 녀석, 호감을 표하고, 감정을 나누게 되는

녀석을 보면서, 버틴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가끔은

오늘 처럼 속에서 뭔가가 올라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을 때 잠깐 입을 다문다.

그러면 녀석이 나 의식한다.

내가 삐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제깐엔 화해하려고 내가 하자는 걸 하려고 한다.

 

그런데, 잘 안되나보다.

글자를 읽는 것이 도무지 안되나 보다.

책이라고 생긴 것에 집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급히 연필로 줄을 쭉쭉 그으면서 단어의 파편만 보는 녀석이다.

그래도, 그 몇개의 단어로 내용을 파악하긴 한다.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잠시만 좀만 더 잠시만

집중해주면 좋겠다.

 

녀석은 이제 4학년이 된다.

학교라는 곳에서 잘 살아가게 되기를 그저 바라면서

작은 힘이라도 되어주고 싶을 뿐인데,

나는 자꾸 내 임무에 갇히고 있나보다.

아직도 경계가 많다.

녀석에게 미안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빛이 땅바닥으로 내려앉아있던 녀석,

날마다 수업하다가 울고 연필을 집어 던지고

책을 찢기도 하던 녀석

늘 떼를 쓰고 하기 싫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던 녀석,

5자를 9자로 읽고

덧셈 뺄셈 두개만 넘어가면

힘들다고 끙끙 앓던 녀석이었다.

어깨에 손만 올려도 멈칫 놀라서 달아나는 녀석이었다.

 

그랬던 놈이 이제는 이것저것 물어보고 손을 잡아도 가만있고

제 다리에 난 흉터를 보여준다.

울지도 않고, 책 읽어주면 가만히 들어주고

그림도 같이 봐준다.

내가 삐졌으면 화해도 시도하는 녀석이다.

야구하면서 날 칭찬도 하는 녀석이다.

 

축구를 무지 좋아하게 되었고

야구 포지션도 하나도 모르던 녀석이 이제 투수도 포수도

1루타 2루타도 안다.

친구들 하고 노는 것도 잘한다.

집에 혼자 있을 수도 있다.

슈퍼도 혼자서 간다.

내가 들어서면 웃기부터 하고

내가 가면 인사도 얼마나 잘 하는데...

'선생님, 다른 애들도 나처럼 선생님한테 재밌게 해줘요?'

'아니, 니가 잴 재밌다.야구도 같이 해주고..나 야구 많이 늘었지?'

 

그러는 녀석인데, 그렇게 많이 달라지고 자라고 있는데

내가 그 엄마에게 늘 하는 이야기,

 '어른들 욕심으로 아이를 보면 안되요. 있는 그대로 봐줘야 해요'

등등의 이야기들은 내게 더 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 엄마는 나에게 아이를 맡기기로 하고

수업시간에 피해준다.

자기 눈으로는 아마 그런 수업시간을 견디기 힘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가 엄마 눈치를 워낙 보니까...

아이와 씨름을 하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하면

좀 더 봐야 한다. 그냥 그대로를...

 

그런데, 역시 이건 내가 감당할 일이 아니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내가 녀석에게 필요한 사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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