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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성역사 이야기-마지막

원래 계획은 여성 역사 이야기 말고도 전체적인 미국 역사를 정리하려 했는데, 하다보니 만만찮은 작업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냥 이쯤에서 그만 하고자 한다.

당시에는 별로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며 결정하고, 행동했던것이 이후에는 굉장한 반향을 불러일으킬수 있으며, 그것이 역사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작은 행동, 활동들이 한편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것이라 생각하면, 어깨가 무거워진다.

지금은 힘들고 지치더라도, 조금만 더 버텨보자. 이것이 미래의 역사를 바꿀수도 있는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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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3


미국의 역사는 남과 북의 대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원과 하원의 구분이 생긴 것도 각 주 별 인구 차에 의해 생겼는데, (하원은 인구당 투표 수가 결정되고, 상원은 인구에 상관없이 주 당 1표) 이는 결과적으로 노예를 인구로 볼것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으로 이끌게 된다. 남부는 당연히 노예를 인구수로 포함에서 그네들의 표 수를 늘리려 했고, 북부는 이에 반대했다. 결과적으로 노예를 인구수에 포함시켰지만, 산업화로 인해 노예수가 적었고, 나중에는 법으로 금지시켰던 북부와는 다르게, 농업이 발달하여 노예가 필요했던 남부간의 대립은 지속되었다. 북부는 노예를 폐지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이익이기에 (남부의 힘이 약화되니까), 인간 평등 때문에 노예폐지를 주창했기 보다는 (물론 그런 이들도 있었지만), 남부와의 이권다툼 때문에 노예제 폐지론을 주장했다. 미국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United States로 독립한 순간부터 시행된 거의 모든 법안은 이러한 남과 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남과 북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노예제 반대였던 Whigs(재퍼슨 시절의 공화당이라고 하면 대충 맞을껄?)가 남(노예찬성)과 북(노예반대)으로 갈리면서 1852년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되고 켄사스-네브라스카 법안(인디안들의 거주지로, 미국이 절대로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곳을, 멕시코와의 무역을 위해 철로를 놓기 위해, 그 약속을 무시하고 개발에 들어가기로 하는데, 이것 역시 노예제가 문제가 된다. 이유는, 만약 네브라스카가 하나의 주가 될 경우 노예를 금지하는 주가 되게 할것이냐, 아니면 노예제를 허락하는 주가 되게 할것이냐를 놓고 논쟁이 되다가 거주자들의 자율에 맡기기로 한 법안으로, 이로 인해 노예제에 대한 논란이 다시 시작된다.)이 통과되면서 그 균형은 깨지기 시작, 정치권도 변화시키게 된다. Whigs 당은 약화되고, 노예제 찬성론인 민주당이 명실상부한 정당이 되는데, 이때 이민자들로 인해 미국의 순수혈통이 더럽혀진다며 이민자들 을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인들로 구성된 American Party가 만들어지고, 노예는 백인의 존엄한 노동력을 훼손한다며 노예제 폐지를 외쳤던 공화당(Republican Party)가 만들어진다. 특히 이 새로운 공화당은 예상치 못한 활약을 펼쳤으며, 노예제 폐지라는 당론은 여성들도 끌어들였다. 그녀들은 참정권이 없었음에도 선거운동 신문에 글을 쓰고, 퍼레이드에 참여했으며, 연설을 했다. 그녀들은 반노예제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이는 여성권리 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1860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남부 주들은 Union에서 탈퇴를 하고, 결국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으로 인해 백 만명 이상의 남성 농부들이 전쟁터로 나갔고, 농사일은 여성의 일이 된다. 게다가 섬유공장 (남부의 목화에 의존했던) 같은 몇 개의 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산업은 전쟁 동안에도 성장했다. 그러므로, 많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취직했고, 실업률은 감소한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공장으로 유입됨에 따라 그녀들의 월급은 더 감소했다. 당시 그녀들은 주급 1.54 달러였다. 이에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을 벌였지만, 승리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19세기에 젠더는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영역”이라는 컨셉은 남성만이 정치에 참여 할수 있다는 인식에 영향을 미쳤지만, 19세기, 정치 참여라는 공적 영역이 집에만 있어야 하는 사적 영역의 여성들에게 동등하게 다뤄졌다.


또한 젠더는 여성에게뿐만 아니라 정치참여가 제한된 흑인 남성에게도 공적 영역의 진출이라는 개념으로 영향을 미친다. 민주당은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허용하면, 그들이 백인 여성들과 결혼해서 민족이 혼합되고, 또한 백인 여성들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그들의 참정권을 거부한다. 이러한 논리는 백인 우월주의와 함께 “white womanhood”를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로 널리 퍼진다. 이로 인해 백인들이 길거리에서 흑인 남성을 마음대로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행태들이 벌어진다. Ida B. Well이라는 흑인 여성은 1882년과 1892년 사이에 남부에서 그렇게 죽은 흑인이 무려 241명 이상이나 된다는 조사를 발표한다. 또한 그녀는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위협한다는 논리는 거짓이며, 오히려 백인 남성이 흑인 여성을 위협하는 것이 가려져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많은 흑인 여성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특히 Victoria Earle Matthews와 Maritcha Lyons는 1892년 Well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여성 모임인 여성연맹(Women’s Loyal Union)을 결성하고, 이 모임은 1896년, 전국 유색 여성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Colored Women, NACW)으로 바뀐다. 그들은 헬스케어, 주택, 교육, 그리고 인종문제까지 다양한 이슈들을 다뤘다. Well의 흑인 살해 정당화 반대(?)운동은 여성의 정치적 액티비즘의 일 예로 다뤄진다. 또한 여성의 참정권 운동과 금주 운동은 그녀들을 정치에서 분리하는 “분리된 영역”을 거부하는 행위였다.


여성 모임 연맹 (General Federation of Women’s Club)
Jane Cunningham Croly라는 신문기자는,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를 위한 연회에 참석하는 것이 거부되자 뉴욕에 여성 모임, Sorosis Club을 만든다. 이 모임은 여성 모임 연맹 (General Federation of Women’s Club, GFWC)의 지역 조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조직은 많은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흑인 여성조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조직은 아동 노동의 폐지, 하루 8시간 노동 등의 법안들을 위해 활동했다.


금주 운동 (Temperance movement)
19세기 후반, 많은 여성들이 금주 운동을 펼친다. 사실 이 운동은 1820년대 프로테스탄트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1870년대에 들어 여성들에 의해 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여성 기독교 금주 연합(Woma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WCTU)가 1874년 결성되고, 그들은 여성이 제 2의 계급으로 있는 사회에서 술취한, 폭력적 남편, 아빠는 사회의 악이라고 주장한다. 금주 운동은 여성의 하위 계급에 대한 분노를 표현해내는 수단이 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금주운동을 지지했는데, 이유는 남성의 임금에 의존하지만, 여자들과 아이들은 술 때문에 돈이 소비되므로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WCTU는 계급, 인종을 넘어 여성들은 같은 처지에 놓여있다고 보고 젠더 연대를 강조하기 위해 ‘여성들 (women)’이 아닌 ‘여성 (woman)’이라는 단수를 사용했다. 


첫 5년 간 WCTU는 교육과 도덕적 설득에 의존했지만, 프랜시스 윌러드(Frances Willard)가 대표가 된 뒤, 그녀는 이 종교적 조직을 정치화 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을 죄가 아닌 병으로 보았으며 술을 마시는 것의 결과 보다는 원인으로서 가난을 지적했다. 그녀는 금주 운동에서, 참정권, 사형제 폐지운동 등 정치적 이슈로 확대했다. 또한 여성 감화원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며, 여성 경찰을 고용하라고 요구하고, 탁아방, 여성 직업학교, 노숙인을 위한 활동, 병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집을 지원했다. 나아가, WCTU는 여성 노동자들의 작업환경 개선하기 위해 노동기사단(the Knight of Labor)와 함께 연대해서 노동문제와 관련해서도 많은 활동을 했다.


윌러드는 사회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여성들이 권력을 얻고 공적 삶으로의 이동을 위한 정치적 방책으로 ‘가정의 우상 (cult of domesticity)’을 이용한다. 그녀는 “가정의 보호”를 모토로 삼음으로써 가정과 가족의 보호를 위해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WCTU의 멤버들은 금주당 (Prohibition Party, 1869년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들에 의해 만들어짐)에 가입했다. 금주당의 남성 당원들은 여성들과 정치적 권한을 공유하게 됨에 따라, 기존의 정치적 룰을 부수고, 그들의 명예와 남성성에 공격을 받았다.


1890년대까지, WCTU는 많은 지역 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2십 만명의 회비납부 회원을 가진 매우 강력한 그룹이었다.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었음에도, 그들만의 방법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들은 남성들처럼 당에 대한 강렬한 충성심을 보였으며, 공화당과 민주당의 후보자들과 경쟁을 했다. 그러자 제 3당은 여성들의 지지를 얻으려 노력했다. 왜냐하면, 여성들의 자발적 활동이 당을 세우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치권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깨달아갔음에도, 정치, 특히 대통령 정치는 오직 남성의 특권으로만 남았다.


참정권 운동
 WCTU와 달리, 19세기,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조직된 운동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작았다. 여성 권리 운동은 1848년 세니카 폴스에서의 엘리자베스 스탠튼 ( 미국 여성 역사 이야기 첫번째 글의 세니카 폴스 선언문 부분 참고)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1867년 흑인 남성의 참정권 보장 운동과 분리되었다. 스탠턴과 수잔 안토니 (Susan B. Anthony)는 1869년 전국 여성 참정권 협회 (National Woman Suffrage Association, NWSA)를 결성한다. 같은 해에 조직된, 보다 보수적 조직인, 미국 여성 참정권 협회 (American Woman Suffrage Association, AWSA)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함께 했는데, 이들은 전국적 투표권 보다는 지역적 투표권만 여성에게 주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0년 분열된 조직은 다시 재정비하기 시작해서, 전국 미국 여성 참정권 협회(national American Woman Suffrage Association, NAWSA)가 만들어지며,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각 주(state)의 수준에서 캠페인을 진행한다. 엘리자베스 스탠튼은 NAWSA의 초대 대표로 선출되었고, 수잔 안토니는 그 새로운 조직에서 지도력을 발휘했다. 여성의 참정권은 1893년 콜로라도에서 처음 보장되었으며, 이어 1896년 아이다호와 유타에서도 보장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인 1896년, 캘리포니아에서는 여성 참정권에 관해 국민투표를 했지만, 참정권을 얻지는 못했다.


1910년 이후, 참정권 운동은 각 주별로 투쟁하던 방식을 헌법개정운동으로 바꾸며, 의회와 대통령을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 앨리스 폴(Alice Paul)과 급진적 여성 참정권론자들은 백악관 앞에서 서로를 체인으로 묶고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2천만의 여성이 투표할 권리를 빼앗겼다”라며 선전전을 하다가 잡혀가기도 했다. 모든 여성에 대한 참정권은 1920년 19번째 개정안이 통과되고 나서야(1919년 개정안 통과, 1920년 발효) 보장되었다.


1차 세계대전과 여성
1차 세계대전 시기에 25,000여명의 여성이 전쟁중인 프랑스로 가서, 간호사로, 엠뷸런스 운전자, 전화 교환원, 전쟁 통신원으로 활약했다. 당시 그녀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남성들이 하는 것처럼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에서는 수 만의 여성들이 철도를 놓는 작업에서 용접, 금속 세공, 힘든 기계를 작동하는 일들을 했다. 특히 흑인들이 이 일을 많이 했는데, 이는 전쟁 이전에는 부불노동이면서도 아침 6시부터 저녁 9시, 10시까지 일해야 하는 가정일 보다는 돈을 벌수 있는 이 일을 원했기 때문이다. 다른 여성들은 화이트 칼라 노동자가 되었다. 1910년과 20년 사이에 여성노동자의 수는 두 배로 증가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기 이전에 연합국과 동맹국은 미국의 전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전,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으며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고 선언(먼로선언) 했던 것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다인종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특성상 미국 내에서 조차 연합국, 혹은 동맹국에 협조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며, 무기회사들과 거래를 맺어오던 정치인들 역시 그러한 주장에 동조했다. 어떤 이들은 “승리를 통한 평화”를 주장하며 윌슨의 중립적 입장을 비판했다.


그러한 애국심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사회복지관 지도자인 제인 아담스(Jane Addams)와 경제학 교수인 에밀리 그리니 볼치(Emily Greene Balch)에 의해 주도된 전문직 여성그룹은 ‘전쟁에 관한 재생산적 결론에 대한 감상적 믿음’을 비판한다. 1915년 여성평화당(Women’s Peace Party)이 만들어지고, 그 해외 지부인 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 여성 동맹 (Women’s International League for Peace and Freedom, WILPF)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협상하라며 정부를 설득하기 위한 노력들을 한다. 하지만, 1917년 미국이 전쟁 참여를 선언하게 되면서, 그들은 겁쟁이, 매국노라는 딱지가 붙게 되었다. 


윌슨 대통령은 전쟁을 합리화 하기 위해 애국주의 사상을 심기 위한 정책을 펼친다. 예를 들어, 독일을 비방하는 뮤지컬을 공연한다거나, 대학에서는 전쟁을 정당화하는 교육을 한다거나, 당시 제2외국어로 가장 널리 가르쳤던 독일어가 없애는 등으로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갔다.


게이, 레즈비언 운동
게이, 레즈비언들은 직장에서 짤리고, 아이들을 빼앗겼으며, 미국에 이민 오는 것을 거부당하고 심지어는 감옥에 가기도 했다. 때문에 대부분이 그들의 섹슈얼리티를 숨기고 있었지만, 1950년 그들은 조직화되기 시작한다.


첫 조직화는 행정기관에서 동성애자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부 정책에 반발하면서 시작되었다. 몇몇의 게이 남성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으며, 1965년 백악관 앞에서 “흑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부도덕한 것처럼 동성애에 대한 차별도 옳지 않다”며 피켓시위를 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0년 후에야 행정기관 위원회는 반게이 정책을 폐지한다.


게이, 레즈비언 운동은 뉴욕의 게이바인 스톤월에서 경찰의 습격 때문에 강력하게 퍼져나간다 ( 스톤월 저항과 pridefest 참고). 스톤월 항쟁 이후 급속화된 1960년대의 게이 레즈비언 운동은 “게이는 좋은 것”이라는 슬로건 아래 거리고, 대학교로 그들의 존재를 드러낸다. 1973년에 조직된 ‘전국 게이, 레즈비언 특별 대책 팀(National Gay and Lesbian Task Force)’에 의해 동성애자에 대한 이슈가 전국적 관심을 받게 된다. 게이 운동은 다른 어떤 사회 운동들 보다도 승리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1980년까지 그들의 권리는 정당 정책으로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1974년 메사추세츠 입법부에 Elaine Noble이 처음으로 레즈비언으로서 선출되었으며, 1973년 동성애 활동가들은 미국 정신의학회에 동성애는 정신질환이라고 정의한 것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동성애자들을 위한 초동적 수준의 환경 개선을 얻어내는 데에만 10여 년이 걸렸다.


게이, 레즈비언 운동은 1981년 AIDS의 발견으로 활기를 띄게 된다. 초기에 AIDS는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의 게이 남성 커뮤니티를 통해 전염됨에 따라, 이 병은 남성 동성애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AIDS 교육, 예방, 치료를 위한 공공 기금을 마련하라는 운동을 펼쳤다. 게이 레즈비언 운동은 갇혀있던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을 하도록 했으며, 이는 많은 이들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게 했다.
1987년 뉴욕에서 5십만명이 참가한 게이 권리를 위한 행진이 열렸다. 1982년 위스콘신에서 처음으로 동성애자 고용차별금지법을 통과시켰으며, 11개 주가 시민권 아래 그들을 보호하는 카테고리를 만들었으며, 일부 주는 그들을 위한 건강보험을 보장했다. 그러나 아직도 소도미법이 남아있는 주가 있으며, 그들의 동등한 권리는 보장되고 있지 못하다.


페미니즘의 새 물결
 1940년대, 직업을 가진 여성이 점점 증가함에 따라, 지불 노동의 여성들은 기존의 의존적 여성, 가정적 여성이라는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특히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여성들은 그들의 열등한 고용 상태에 대해 자각을 하게 된다. 교육의 평등화는 더욱 많은 여성이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1960년 초의 정책은 이러한 거대한 변화와 여성 권리 운동의 노력을 반영했다. 노동부 보좌관 에스터 피터슨(Esther Peterson)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여성지위에 관한 위원회(President’s Commission on the Status of Women, PCSW) 창설을 건의했으며, 엘리너 루즈벨트가 위원회 회장이 된다. PCSW는 널리 퍼져있는 여성 차별실태를 조사하고, 개선점을 제시했으며, 여성 조직과 노동조합은 20여 년 동안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해서 활동했다. 이러한 노력들로 인해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은 젠더에 따라 임금 격차를 두는 것은 불법으로 규정하는 동일임금법안을 통과시키지만, 현재까지도 임금격차는 존재한다.


다른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 역시 흑인해방투쟁의 전략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64년 공민권법 제7조항에서 성차별을 금지했으며, 이로 인해 여성운동은 더욱 확장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 정책을 시행하는데 적극적이지 못했고, 그 결과 여성들은 여성들을 위한 시민권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다. 1966년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시민권 활동가인 폴리 머레이(Pauli Murray) 그리고 다른 여성활동가들이 함께 전국여성단체(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만든다.


동시에 급진 페미니즘이 성장하게 되는데, 1965년 두 명의 백인 여성, 메리 킹(Mary King)과 케이시 헤이든 (Casey Hayden)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에서의 활동은 그들에게 “개인의 가치와 인간의 능력, 전에는 문제시 되지 않았던 사회에서의 인간의 역할에 대해 급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 운동에서 많은 여성들이 이러한 배움을 남성들과의 관계에 적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사고는 무관심 혹은 비웃음으로 반응했던 뉴레프트의 백인 남성 급진주의자들을 겨냥했으며, 그들의 메시지는 종속적 역할에 대해 불만을 공유하고 있던 많은 백인 여성들을 고무시켰다. 많은 여성들은 뉴레프트에서 나와 전국에 걸쳐 독립적 여성 해방운동 그룹들을 만들었다.


1968년 “우스운 ‘미’의 기준에 의해 노예가 되고 남성의 승인을 얻기 위한 대회”라며 미스 아메리카 대회에서 피켓팅을 하면서 여성 해방운동을 관심을 받게 된다. 그들은 양에게 왕관을 씌우고 ‘브라, 거들, 속눈썹, 가발’과 여성을 고문하는 다른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여성들은 강간이나 낙태와 같이 비밀로 붙여졌던 그들의 경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며,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하는 것은 여성을 평가절하하고 차별하는 시스템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NOW는 여성 해방은 가족과 다른 관계에서의 여성 종속의 종말이라며, 공적인 영역에서의 여성의 평등에 초점을 맞췄다. NOW는 여성이 현존하는 제도에 융합되기를 원했지만, 다른 급진 그룹들은 결제, 정치, 사회제도의 전체적인 변화를 주장했다.  1970년대에 NOW와 다른 주류 그룹들이 급진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슈들을 받아들이면서 이러한 차이들은 사라졌다.


1970년에 NOW의 대표가 흑인이기는 했지만, 그룹의 주류는 백인 중산층이었다. 유색인종의 여성들은 소수자들의 가난과 인종과 민족에 의한 차별에 무관심한 백인여성조직을 비판했다. 그들은 그들만의 조직에서 활동을 했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불평등을 다루지 않는 매스미디어와 대항했다. 언론은 그들의 운동을 보도하지 않거나 페미니즘을 조롱했다. 1970년 8월 여성 행진이 진행되었을 때, 언론 협회는 헤드라인을 “오늘은 여성의 날, 저 유방을 보시라!”라고 해서 신문을 배포했으며, 시카고 디펜더는 “노브라가 집회에서 타고 있어요”라고 제목을 지었으며, 하원에서 미 헌법의 평등 개정안을 통과시켰을때, 뉴욕타임즈는 “아내에게 쥐여 사는 국회”라는 제목으로 개정안의 통과를 비난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ainem)이 1972년 ‘Ms.: The New Magazine for Women’을 창간한 이후,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이 발간하는 그들만의 잡지를 창간했다. ‘Ms.’는 기존의 여성잡지들이 다뤄왔던 패션 팁이나 요리법을 싣는 것을 거부하고 페미니즘 이슈들을 다루고 여성 소설들을 소개했다. 


여성 노동조합은 작업장의 젠더 정의를 위해 투쟁했으며, 블루칼라 여성노동자들은 1974년 여성노조 전국연합(National Coalition of Labor Union Women)을 조직한다. 레즈비언들은 NOW같은 조직에서 그들의 위원회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단체를 만들었다.


이처럼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사적 영역에서의 평등을 위해 싸웠으며, 여성의 역할은 아내와 엄마라는 전통적 기준에 도전했다.


반여성주의자들과의 대항
1970년대와 2000년 사이에, 법조계에 종사하는 여성은 5%에서 50%로 증가했으며, 의료계는 10%에서 35%로 증가했다. 하지만 정치권에서 변화는 매우 느렸다. 2006년 의회는 15%만이 여성이며, 입법부와 모든 행정부에서는 20%만이 여성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남성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으며, 여전히 전통적 여성의 직업을 가지며, 가정과 가족에 대한 책임까지 지고 있어 ‘이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1971년 의회가 이러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육아법을 통과시켰지만, 닉슨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1970년대 중반 ‘평등권 수정 조항’ 비준에 반대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전통적 젠더 역할은 신이 부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아내와 엄마로써의 역할을 평가 절하하는 페미니즘을 우려했다. 이에 대항해 여성들은 비준을 막으려는 남성들을 비판하며 행진을 하기도 했다. 결국 1982년 이 개정안은 겨우 35개 주에서 통과된다.


1950년대 이래로 낙태법을 요구했던 의사와 법조인들과 함께, 페미니스트들은 낙태 금지 법안을 없애기 위해 입법부를 압박했다. 그들은 여성 자신의 재생산에 대한 완전한 선택권 없이 여성의 다른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973년 대법원은 낙태권을 보장하는 Roe v. Wade결정을 내린다. 이는 평등권 수정 조항에 대항했던 것보다 더 강력한 대항을 불러일으켰는데, 카톨릭 교회와 보수 정치인들은 생명권 운동조직들을 구성한다. 생명권 운동은 낙태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훼손했으며, 페미니즘이 전통적 역할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수천의 여성들을 결집시켰다. 1977년 의회는 메디케이드와 다른 정부의 헬스 프로그램이 낙태비용을 지원할 수 없다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대법원은 이를 허용했다. 이는 특히 가난한 여성, 시골 여성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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