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오산 이주노동자를 만나다.

  • 등록일
    2004/09/09 15:10
  • 수정일
    2004/09/09 15:10

어제 장창원 목사님과 진실게임 비스무리한 것을 해보았습니다.

4년이라는 인연을 이어오면서 장창원 목사님이 살아온 날들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해보지 못한 저로서는 오산에 내려와 장목사님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인생의 여로를 알 수 있었습니다.

 

장목사님의 인생은 참 굵고 멋졌습니다.

첫사랑에 대한 애절함, 대학교때의 질풍노도 시기,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 목사가 되고 난 후 장목사님이 삶. 가족에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꼬박 새벽까지 이어져온 이 이야기는 내가 살아가는데 좌우명으로 생각하고 나 또한 장목사님 처럼 노동자들에 대한 신심어린 마음을 갖고 살아가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장목사님 이야기중 첫사랑에 대한 애절함.... 그 애절함은 장목사님이 철학적 신념을 쌓는 주요한 도구가 되었고, 고려대 1978년 9월 13일 그 당시 1학년이 었던 장목사님의 학내 민주화 투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참 기록해야할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침 6시 30분까지 이런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저도 간헐적으로 저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지만, 장목사님처럼 인생을 정리하지 못한 터라 부분적으로 내가 살아온 과정을 뜨문뜨문 이야기 하였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서울 유학,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학생운동, 현재까지 전 정리한게 별로 없어 이야기 할게 없습니다.

 

아침 어김없이 놀이방 아이들을 데리러 아침 7시 30분부터 장목사님의 하루는 시작 되었습니다. 장목사님은 아무리 늦게 자더라고 아침 7시 30분부터 이주노동자 아이들과 만남을 통하여 하루를 어김없이 시작합니다. 필리핀 이주노동자 자제, 방글라데시 모자 가정인 이주노동자 자제,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 자제를 데리고 한신대 근처인 안녕지역을 돌며 이주노동자들과의 인사를 시작으로 힘찬 하루를 시작합니다. 저 또한 장목사님을 따라 다녔던 터이라 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참 그들과 허물이 없이 지내는 장목사님의 넉넉함 마음이 부러웠다.

 

아이들의 해맑은 일터로 나가는 이주노동자의 자식 사랑에 대한 마음이 짠하게 전달 될 수 있었습니다.

 

간장 오타맨이....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