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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5/05/07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간장 오타맨...
  2. 2005/05/07
    메모만 해둔다.
    간장 오타맨...
  3. 2005/05/05
    [시/이육사] 황 혼
    간장 오타맨...
  4. 2005/05/05
    오늘 바쁜 날이다.
    간장 오타맨...
  5. 2005/05/05
    고향집(2)
    간장 오타맨...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등록일
    2005/05/07 15:21
  • 수정일
    2005/05/07 15:21
폭력과 사망사건으로 얼룩진 ‘전국철거민연합’ 10년… 왜 그들은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에서 내려 3215번 지선버스를 타면 10분이 채 못 돼 서울 전농 SK아파트에 닿는다. 아파트 단지 정문에서 20m쯤 걷다 왼쪽으로 마주치는 가파른 계단을 기준으로 위쪽 201~203동은 임대아파트, 아래쪽 101~116동은 분양아파트다. 젊은 사람들이 돈 벌러 떠나 텅 빈 대낮의 임대아파트는 코흘리개 손자·손녀의 손을 잡고 오가는 노인들의 헛기침 소리만 들릴 뿐 평온했다. ‘주거권’ 아닌 ‘계급적’시각에서 접근 8년 전 이곳에서 전국을 발칵 뒤집었던 철거민 투쟁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었다. 1997년 7월25일, 서울 동대문구 ‘전농3동 전농4재개발구역’ 철거민들은 악명 높았던 철거용역업체 ‘적준’과 마지막 대결을 벌였다. 이날 오후 6시께 주민들이 “적준의 침탈을 막기 위해 만든” 고공 망루 ‘골리앗’에 불이 붙었다. 박씨 등 전국철거민연합 소속 주민 10명이 열기를 이기지 못해 10m 아래 바닥으로 뛰어내렸을 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바닥에 부딪쳐 ‘뇌사’ 상태에 빠진 박씨는 이튿날 숨을 거뒀다. 201동을 빙 돌아 후문으로 향하니 “여기 자본의 수탈, 관료들의 억압에 온몸으로 맞선 당당한 여인이 있었습니다”라고 쓰인 추모비가 남아 당시의 급박했던 사정을 전한다. 지난 4월16일 새벽, 경기 오산시 수청동 세교택지개발지구 안에 있는 4층짜리 우성그린빌라 옥상에 또 하나의 ‘골리앗’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어, 저게 뭐지?” 철거민들에게 허를 찔린 철거용역들은 안전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옥상 진입을 시도했다. 화염병과 골프공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철거작업을 벌이던 이아무개(26)씨가 화염병을 맞고 불에 타 숨졌다. 전국철거민연합 간부 성아무개(39)씨가 “내가 화염병을 던졌다”며 자수해 살인 혐의로 4월26일 구속됐지만, 모두 집주인으로 알려진 철거민 8가구 10여명은 농성을 풀지 않고 벼랑 끝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1987년 이후 도시 철거민의 가열찬 투쟁 속에는 늘 전국철거민연합(이하 전철연·옛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이 있었다. 이들은 “철거민은 곧 노동자”라는 명제 아래 철거민 문제를 단순한 도시빈민의 ‘주거권’ 문제로 보지 않고, ‘계급적’인 시각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의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철거 뒤 주민들이 자유롭게 들어가 살 수 있는 영구임대아파트 수준의 싼 집과, 그 집을 지을 때까지 주민들이 임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가이주단지 제공’ 등이다. 남경남 전철연 의장은 “철거민 운동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주거권을 얻기 위한 투쟁”이라며 “희생 속에서 운동이 발전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전철연쪽은 그동안 “우리와 함께 투쟁해 50곳이 넘는 지역에서 공증된 문서로 요구사항을 관철해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지만 민중진영 내부나 다른 철거민 단체들은 “전철연의 과격한 구호가 단지 구호로만 남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22일 전국철거민협의회 중앙회(전철협)는 서울 종로구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전철연과 같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은 더 이상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이호승 전철협 지도위원은 “폭력적인 투쟁방식으로 철거용역 회사에 돌아가는 용역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며 “둘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마저 든다”고 말했다. 80년대 논리와 관성 바꾸지 않았다 폭력 대결도 불사하는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단체를 구성하고 있는 지도부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현재 전철연은 남경남(51) 의장, 고천만(47·구속) 부의장, 양해동(59) 집행위원장 등 3명의 집단지도체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전철연에 몸담았던 철거민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들은 모두 80년대 말과 90년대 초 철거운동에 뛰어든 지역 철대위원장 출신으로,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의 전성기를 이끈 철거운동 1세대와 김수현 청와대 빈부격차·차별시정위원회 기획운영실장 등 이른바 ‘학출’(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에게 교육을 받고 10년 넘게 전철연을 이끌어왔다. 1세대 운동가들은 운동을 접었거나 ‘주거권 실현을 위한 전국연합’(주거연합) 등 다른 운동단체나 학계로 진출했다. 남경남 의장은 경기 수지 풍덕지구 세입자대책위원회 위원장 출신으로 1991년 철거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경기도철거민협의회 의장으로 발돋움한 뒤, 1994년 만들어진 전철연 의장이 됐다. 부의장 고천만씨는 경기 용인구갈 세입자대책위원장 출신으로 남경남씨와 함께 경철협 부의장을 지냈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양해동(그는 몸이 아파 활동을 잠시 중단한 상태다)씨는 서울 청량리1동 철거민 출신으로 1989년 길거리에서 서울시철거민협의회 유인물 한장을 우연히 집어들면서 빈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고 한다. 그는 청계천 노점상 출신으로 민주노동당 후보로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2번이나 출마한 양연수씨와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서 전국빈민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란히 1999년 경기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 사건과 구리 최촌마을 화염병 투척 사건 등으로 한두 차례씩 옥고를 치렀다. 이들을 잘 아는 옛 동지들은 “전철연의 전신인 서울시철거민협의회(서철협)를 이끌던 1세대 활동가들이 빠져나간 뒤 아직도 80년대 운동 논리와 관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운동의 주체세력이 바뀌면서 서철협을 이끌었던 활동가들에게 교육받았던 논리와 투쟁 방법을 발전적으로 해체해 재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2002년 8~9월 <말>의 보도로 전철연 중앙이 지역 철거민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를 장악하기 위해 저지른 ‘악행’이 폭로되고, 돈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또는 ‘확인하기 힘든’) 추문들이 겹치면서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전철연은 그야말로 수많은 사건·사고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들만 꼽아도 △1996년 신연숙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7년 민병일씨 폭행 사망·박순덕씨 골리앗 추락 사망 △1999년 수원 권선4지구 사제총 사용 △2000년 민주당 화염방사기 난입 △2003년 서울 상도동 컨테이너 추락 △2004년 고양파출소 화염병 투척 등 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투쟁중 숨진 35명, 전철연과 직·간접적 연관 한국도시연구소가 1998년 펴낸 <철거민이 본 철거>를 보면 1998년 현재까지 철거투쟁 과정에서 숨진 철거민은 모두 29명이고, 전철연은 이후 7년 동안 숨진 ‘열사’가 모두 6명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동안 철거투쟁으로 숨진 35명 대부분이 전철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철거운동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감옥에 갔는데도, 전철연은 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을까. 경기 수원 권선3지구 철거대책위원장 홍경희(40)씨는 “전철연 같은 철거민 조직 말고는 철거민들이 기댈 데가 없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집회 때마다 앞장서 시위를 주도하는 전철연의 대표 ‘투사’다. 그는 1988년 울릉도에서 푸른 꿈을 안고 서울에 올라온 ‘섬처녀’다. 울릉도 처녀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도시는 ‘이촌향도’ 마지막 세대인 홍씨를 반겨주지 않았다. 16년 전에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생활은 달라지지 않았다. 딸 셋을 낳아 기르는 10년 동안 “이삿짐을 채 풀지도 못한 채” 수십번도 넘게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1996년 수원 권선동에서 보증금 100만원, 월세 15만원짜리 방에 살고 있을 무렵 “주변이 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말 갈 데가 없었다”는 홍씨는 자연스럽게 전철연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실천은 성과를 낳았다. 3개월 투쟁 끝에 8년째 살고 있는 지금의 가이주단지에 입주할 때는 감격에 겨워 엉엉 울었다. 그는 “다른 지역 철거민들의 고통을 보면, 꼭 내 일 같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모두가 홍씨처럼 일이 잘 풀리는 것은 아니다. 최국자(45·여)씨는 “이제는 전철연이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경기 의왕시 내손택지개발지구 철거민인 최씨는 2000년 6월9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에 소형 화염방사기를 들고 난입 농성을 벌여 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아무리 투쟁을 해도 세상에서 관심을 안 가져주니까 항의집회를 하자는 것인 줄 알았죠. 그런데 현장에서 화염방사기가 나오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최씨는 “1999년 12월 한겨울에 강제철거가 됐는데도 관심 있게 지켜보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전철연에 많이 의지를 했었다”며 “생업을 포기하고 투쟁에 나서는 과정에서 수천만원씩 빚만 졌다”고 말했다. 최씨의 남편(42)은 최씨의 구속에 항의하다 잡혀 부부는 영등포 구치소 감방 동기가 됐다. 많은 지역에서 철거민들은 전철연식의 극단적 투쟁 전술에 혀를 내두른다. 안암동 재개발지구 철대위원장을 지낸 이영철씨는 “전철연의 의사결정 방식이 지나치게 폐쇄적이어서 불만을 품는 철거민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골리앗 만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 넘어 “전철연 지도부가 지역 철거대책위원회(이하 철대위)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하는 말이 뭐냐면, 평생 살 집을 만들어줄 테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라고 한다고. 그럼 사람들이 생계가 막막해지니까 절반 정도 떨어져나가. 남은 사람들에게는 여기저기 다른 지역 집회에 쫓아다니라고 하거든. 그럼 사람들이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또 절반 정도 떨어져나간다고. 그 과정을 거치면 철대위에 남는 사람들은 5~10가구밖에 안 돼. 거기서 이제 골리앗을 만들어야 하니까 돈을 걷자고 한다고.” 골리앗은 만드는 데 드는 비용만도 1천만원을 훌쩍 넘긴다. 철거민들이 카드빚을 내 그 비용을 댄다. 그가 속한 안암동에서도 2002년 2월 철대위가 꾸려질 때 50명이었던 주민들이 3개월 만에 20명대로 줄어들었다. 전철연의 투쟁 방침을 성실하게 따르다 보면, 생계를 포기한 주민들은 수천만원씩 빚이 쌓이고 곳곳에서 휘두른 폭력으로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투쟁에 더 매몰될 수밖에 없고, 점점 전철연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지금 경기 오산에서 ‘골리앗’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벼랑으로 몰린 철거민들에게 전철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가장 강력한 무기는 ‘제명’이다. 취재 중에 만난 철거민들은 “철거민에게 ‘제명’은 곧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특히 아직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지역의 경우, ‘제명’을 당하면 철거민은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협상이 잘 끝나면 살 집과 약간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민사상의 고소·고발 사건이 모두 유야무야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얻어낸 게 없는 상황에서 철대위에서 쫓겨나면, 철거민들은 수천만원의 빚을 떠안은 채 범죄자로 전국을 떠돌아야 한다. 그 와중에 사람이 죽기도 한다. 2001년께 최덕자(45·사망 당시)씨 등 경기 의왕 오전동 재개발 지역에 남은 철거민 3가구가 싸움이 붙었다. 주민들이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모아둔 운영자금 700여만원을 전철연 중앙에서 “간부 도피자금으로 사용한다”며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친 주민들은 전철연이 요구하는 연대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3가구 가운데 최씨네 가족을 뺀 나머지 2가구는 지역을 떠났다. 전철연은 이 지역 철대위원장이던 최씨를 ‘제명’했다. 최씨는 아파트 숲으로 뒤덮인 마을에서 움막을 지어놓고 3년 넘게 생활했다. 남편과 말다툼이 잦아졌고, 2003년 11월 최씨는 약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씨가 죽을 때 그의 집은 300만원, 보증금 20만원짜리였다. 전철연은 이미 비민주적인 전위 조직으로 퇴화해 서철협 시절의 활력을 잃은 모습이었다. 현재 전국 35개 철대위와 공동 투쟁을 하고 있다지만, 적극적으로 단체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100명 안팎에 불과하다. 경기 안양 유진상가 세입자대책위원장으로 전철연과 6년 동안 같이 활동해온 정동열(62)씨는 “운동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운동의 순수성이 결여돼 있다”고 말했다. “철대위원장이 중앙의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철저하게 배제를 합니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빨리 투쟁을 끝내고 생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큰데, 주민들이 직접 상대쪽과 협상을 못하게 하거든요. 철거 현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현장 주민이고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는데, 비타협 투쟁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습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은 저마다 확인 불가능한 전철연 간부들의 비리를 제보해왔다. 그렇지만 전철연 때문에 고통을 겪은 이들도 대부분 이들의 결벽성만큼은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왜 전철연을 둘러싼 추문은 끊이지 않을까. 어렵게 수소문해 만난 옛 철거단체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철거민 단체는 다 복마전이라고 보면 됩니다. 운동을 진행하다 보면, 건설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는 건설자본들이 돈을 미끼로 협상을 제안해옵니다. 여기에 굴복하면 운동이 끝나는 거고, 이겨내더라도 주민들 사이에 분란이 생깁니다. 전철연도 중앙에서 나온 2~3명의 핵심간부가 건설회사나 재건축 조합과 밀실협상을 합니다. 돈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 없는데,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밝혀내기는 불가능합니다.” 이런 비판에도 전철연은 아직 변화를 모색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변화를 이끌 내부 역량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4월24일 밤 어렵게 만난 남경남 의장(그는 지금 수배 중이다)은 “사람을 죽이는 정부의 철거민 대책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흡사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반복해 듣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들었다. 200만 철거민 투쟁에 앞장서 피흘려온 전철연. 그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울 전농 SK아파트 201동 뒤. 박순덕씨 추모비에 한가롭게 내리쬐는 4월 봄 햇살이 무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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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만 해둔다.

  • 등록일
    2005/05/07 08:44
  • 수정일
    2005/05/07 08:44
그냥 메모만 해둔다. 가지 못하는 심정이라는 것에 대해 한(恨)의 맺힘과 서러움에 대해 간접 경험하였다. 친언니가 죽었는데도 소식을 접하고 고국에 가지 못하는 현실 이주노동자 삶.... 그래 눈물이라도 서러움과 이국 타향살이의 한 그리고 자매로서의 이승에서 석별의 정을 달래기 위해 크게 소리내어 울었으리라 짐작만 해본다.(어찌 이국땅의 불안한 삶에 햇빛보다는 그늘만이 다가오는지 기분이 편치않다. 뭐라 할말도 없다.) 그래도 이 땅에서 삶을 이어 나가기 위해 오늘 그 서러움 딛고 또 현장으로 출근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마음에 쌓여 있는 겹겹히 친 서러움과 한을 어찌 달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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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육사] 황 혼

  • 등록일
    2005/05/05 23:49
  • 수정일
    2005/05/05 23:49
내 골방의 커-텐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맞추어보련다 그리고 네 품안에 안긴 모든 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네 부드러운 품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의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내일도 또 저- 푸른 커-텐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지는 시냇물소리 같아서 한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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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바쁜 날이다.

  • 등록일
    2005/05/05 23:15
  • 수정일
    2005/05/05 23:15
아침 5월 3일 이주노동자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어린이 날 행사라 전교조 오산지회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공부방 아이들이 참석하여 점심을 식사겸 어린이 날 축하 행사를 구경하기 위하여 오산대학에 갔다.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는지... 뛰어놀기에 여념이 없다. 이전 철거지역 아이들과 서울교대 총학생회에서 개최한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하고 언 10년이 넘은 세월 흘러보내고 어린이날 행사에 참석해 본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 그리고 공부방에 있을때와 다르게 해맑은 웃음을 짖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보기 좋게 맑은 웃음이 잔잔히 온 얼굴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날씨도 좋구... 흐른 날에 소나무 가루가 바람에 흩날려 혹시 황사현상이 아닌가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켰지만.... 잔디밭에 아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학부용들을 보면서 세삼 부러움을 느껴보았다. 어린이 날은 나와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렇게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수청동에 상황을 점검하러 수청동 철대위로 오후 4시경에 찾아가 보았다. 그런데 이전과 다르게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곳에 내려 상황들을 지켜보았다. 전경들이 입구에 즐비하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용역반원 비스무리한 사람들(알고보니 화성경찰서 수사계 형사들이었다.) 꼭 진압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촉각을 세우고 그 곳의 상황을 예의주시하였다. 그리고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는 깍두기들도 보았다. 오늘 진입을 시도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다급히 핸드폰으로 이 상황을 센터에 알리고, 비대위 상황실장은 이 상황에 대하여 비대위 참여단체들에게 알리기 위해 분주하다. 전경은 대나무를 치켜세워 만들어놓은 그물망을 들고 폴리스라인을 걷어내고 들어갔다. 그리고 수청동철대위 농성자들이 일제히 진입저지를 위한 응사를 하였다. 그래도 여념없이 전경은 준비하여 가져온 콘테이너와 핸드볼 골대와 같은 감시용 초소를 들이밀고 앞으로 들어간다. 수청동철대위분들은 쉼없이 그들의 대응에 도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응사를 가한다. 경찰은 수청동철대위의 응상에 쫄았는지... 움추리며 일제히 방패와 그물망을 세우며 그들의 응사를 저지한다. 그리고 한 1시간이 흘렀을까? 콘테이너 초소가 설치가 마무리 되고 가져온 핸드폰 골대 모양의 투명 감시초소가 설치되자 밖으로 나간다. 소화기와 방패를 들이밀려 벌어졌던 1시간 가량의 상황은 긴장 그자체이다. 이전 그리고 깍두기인 용역반원과의 실랑이.... 수청동철대위 상황에 아랑곳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동료가 죽었다는 것을 부각하며 비대위에서 나온 우리에게 입에 담지 못한 말을 하며 연실 시비를 걸어온다. 나 또한 똑같이 응수를 하였다. 그리고 10분간의 말싸움이 끝난후 수청동 상황이 벌어졌다. 그리고 중간정도 되었을때 현장에 나온 인천일보 기자로부터 오늘 진입은 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안식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박한 상황이다. 오늘 혹시나 또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쩌나 초조함이 들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일단은 안심하였다. 사태가 끝난후 전철연 조합원들이 나와 어제 화성경찰서와 국가인권위 조사관 대동하여 구두로 합의(국가인권위에서는 사문화를 요구하였지만 화성경찰서장이 이를 거부하여... 화성경찰서장 직권으로 매일 20리터 물통 10개 기초생필품 반입을 하기로 하였다.)한 내용으로 물품을 넣어주기 위해 봉고차에 한가득 기초생필품을 집어 넣기 위하여 왔다. 전철연 연사국장은 상황을 들은 후 물과 기초생필품 반입을 위하여 경찰과 협의를 시작한다. 경찰은 어제 물건이 들어갔으니 옷들은 못들어간다고 하여 들여보내지 못하고, 물 10통 건어물과 짱아치, 고기 쌀 20킬로그램 2포를 전달해 주었다. 그 건물 앞까지 물을 건네주었는데, 참으로 긴장감이 감돌고 있음을 그 건물 안쪽에 가서야 다시금 확인하였다. 그래도 그분들의 투쟁하는 모습은 일정 안정이 되어 안심하고, 고기를 넣게하고는 그래도 기분좋게 돌아섰다. 매일 물건반입이 가능해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국가인권위의 진정서를 제출하여 기초생필품 반입이 일정정도 힘으로 작동되고 있다. 5월 3일 무차별 폭력과 관련하여 여론을 전개한다. 이제 오산시민들에게 현재 상황을 올바로 알려내고 이 문제는 주택공사가 추진하는 주거정책에서 기인한 필연적 상황임을 호소하기 위한 작은 촛불을 또 적은 수가 들고자 한다. 이 사안의 문제를 이제 오산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관건이다. 수청동을 시발로 오산시 주변이 주공에 의한 주택사업이 시행될 것이기에 지금의 대응이 이후 오산시에 벌어질 주택정책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기 때문이다. 센터로 돌아왔다. 비가 내려 옷가지가 젖고 땀도 흘린터라 간만에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식사를 하고 뉴스를 본다. 수청동의 긴장된 상황은 아무곳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오늘 어린이 날이라는 보도가 모든 언론을 도배하였다. 그래 그렇지 생각하고 맥주한잔 하면서 긴장된 순간을 털어버렸다. 9시 넘어서 이주노동자 회의.... 어떻게 이후 활동을 지역에서 전개할 것인가? 대략적 이후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논의를 전개하였다. 앞으로 일정이 중요할 것 같다. 오후 10시 40분이 되어서야 어린이 날 나의 일은 일단 끝났다. 그리고 지금 그 흔적을 끄적여 본다. 내일도 무슨 상황이 벌어질지....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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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

  • 등록일
    2005/05/05 01:08
  • 수정일
    2005/05/05 01:08
2000년 06월 29일 16시 48분 24초 정말 간만에 고향집을 찾아갔더니 정말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고향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난 고향은 나의 추억이 세긴 그런 아련한 공간을 모두 지워버렸더군요. 그렇게도 무성하던 산은 목장으로 바뀌어 있고, 내가 뛰놀던 초등학교는 폐교가 되어 거의 사람들의 인적이 뛰문 그런 음산한 곳으로 변해있더군요. 정말 오랫동안 찾아가보지 않은 그런 나의 고향이라는 곳은 정말 세월의 흔적을 다 잊어버린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변해있었습니다. 그나마 시골의 5일장이 폐쇄되지 않아 그 시골장터의 풍성함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이더군요. 기대를 하고 내려간 시골.... 그곳엔 벗들도 그리고 시골 어르신도 또 부모님도 없는 그런 그냥 시골의 한마을로 바뀌었다는게 요즘 저를 서글프게 하더군요. 시골에 내려가 그동안 힘들었던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고자 하였는데.... 나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이 모두다 떠나버린 시골은 이제 나이 많이 드신 문중어른 몇분만이 농사를 짖고 있는 그런 아주 인적이 드문 그런 곳이 되어버렸더군요. 그러나 바뀌지 않은 것도 있더군요. 내가 살던 시골집 누가 그렇게 정성스레 관리를 해주어서 내가 그곳에서 살았을때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더군요. 또 무성히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라도 하듯 하늘높이 치솟은 감나무와 땡자나무 나보다 키가 작던 탱자나무도 어느세 키가 훌쩍 커버렸더군요. 정말 그나마 내가 살던 집이라도 그대로 고스란히 남아 있어 시골의 넉넉함이라도 위안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흔하디 흔한 농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서 인지 시골 어르신들의 농사일은 더욱 힘들게 보이더군요. 나이가 많이 들어 밭농사일만 하면 허리와 다리가 쑤신다던 당숙의 말을 듣고나서야 농촌에서 도시로 떠난 친구들이 생각이 나더군요. 열심히 일해도 남는것 하나 없는 그런 농사일 그래도 그게 천직인줄 알고 아직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더군요. 돈이 많아서 도시의 사람들 처럼 공부라도 할 수 있었으면.. 아마도 지금 여름의 때앗볕 아래서 그리 힘들게 일하지 않을텐데... 도시 사무실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펜대를 굴리면서 밀려오는 낮잠도 자고, 어제 먹은 숙취를 해소하기 위해 사우나 땅에서 땡땡이를 치면서 다른 도시의 그나이의 사람들 처럼 넉넉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을 그나이에 아직도 시골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죄스러움들이 들더군요. 난 단지 나의 그런 안위만 생각하고 시골에 내려와 그냥 빈둥빈둥 놀생각만 했다는게 정말 미안하더군요. 미안함을 너머 정말 죄스럽더군요. 난 대학교때 농활은 가봤지만 시골일은 정작 도와주지도 못했다는 그런 죄스런 마음이 들더군요. 나의 주변 사람도 챙기지 못하면서 뭐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그런 발상 자체를 했다는게 못내 저를 괘심한 놈으로 만들지 않을까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도 들더군요. 정말 삶이라는 작지만 큰 의미들을 배울 수 있었던 계기인것 같습니다. 자신을 보기전에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말을 사람들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제자리가 어디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못내 미안해 그냥 일주일 동안 있다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온게 지금도 후회스럽 군요. 올 여름 추구의 기쁨을 고향에서 친지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땀의 진정한 의미를 일이라는 걸 통해 조금히 나마 알 수 있었으나 그 의미도 또 지나는 시간과 함꼐 잊어버리지 않게 늘 정진하여야 겠다는 작은 다짐을 해봅니다. 간장 오타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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