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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지킴이 선언

나는 미군기지 확장 이전 예정 지역인 평택 팽성읍 대추리에서 살고 있다. 2005년 11월 23일에 팽성 지역의 땅에 대한 강제 토지수용 재결 결정 소식을 들었고 이틀 후 대추리에 왔다. 지금은 인간 방패가 되어 강제 토지수용에 몸으로 저항할 날을 준비하고 있다.

 

이라크 전쟁에 파병을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는 전쟁과 군대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민간인 희생자만 3만 여명에 이르는데도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참전국가의 정부는 전쟁에 대한 어떠한 반성의 태도도 보이지 않고 있다. 준 식민 국가로서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함께 한다면 전쟁 범죄와 진실 왜곡에 대한 책임마저도 면제 되는 것일까? 

 

지난 2004년 겨울에 대구에서 열린 '이라크 전쟁 피해자 증언대회'에서 만났던 살람 아저씨를 나는 기억한다. 김선일 씨를 살리려고 미군에 의한 무차별 폭격이 가해지던 팔루자로 곧장 달려갔던 그는 '총이 아니라 꽃을 들고 오는 사람', '우리와 함께 슬퍼해줄 사람'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살람 아저씨의 불안에 잠긴 두 눈을 기억하는 내가,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태우는 백린탄으로 사람을 죽이는 미군을 지지하며 파병을 강행한 전범 국가의 국민임을 잊지 못한다.

 

헌법 5조에 명시된 ‘평화주의 원칙’을 무시하고 이라크전에 참전했던 국가가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기 위해서 또다시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특등과 일등미가 생산 되는 땅. 가을에 수확한 햅쌀을 내다팔아 정부미를 사 먹으면서, 삶은 국수를 도시락에 싸서 다니며 농사를 지었던 분들의 피땀이 밴 땅. 미군기지의 확장으로 뭍에서 바닷가로 내몰린 주민들이 가래와 지게로 흙을 져 나르면서 일궈 낸 땅. 원앙, 솔부엉이와 황조롱이가 날아들고 가을철에는 논으로 메뚜기가 몰려드는 땅. 이 땅을 지키려고 전국을 돌면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외쳤던 팽성 농민 분들을 2005년 6월에 처음으로 만났다. 그분들이 나눠준 유인물에는 주먹 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우는 할아버지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나는 팽성 농민들의 육성과 울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문학을 공부하는 나는 '이야기는 약자의 기억'이라는 고모리 요우이치의 발언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미국의 군사 기지 때문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게 된 사람들, 국가로부터 소외 당한 채 '가난과의 전쟁을 맨몸으로 치렀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단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는 것에서 그칠 수가 없었다. 양심을 결박 당한 채로 무기력감 속에서 구경만하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보다 직접적인 행동으로써 무고하게 죽어간 이라크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살상을 위한 군대를 반대하고,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생명의 땅으로 팽성 들판을 지켜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대추리에 와서 살고 있다. 국방부 소유의 번듯한 집에서 거주하며  빈집에서 주운 옷을 빨아서 입고 주민들이 가져다 준 쌀을 먹는다. 빈집들을 다니며 수집한 그릇과 이불을 옮기고, 청소를 하고, 전기를 연결해서 <평택 지킴이 네>에 입주하던 날. 노인정 할머니들한테서 따뜻한 팥죽을 대접 받았고, '평화바람'은 직접 만든 현판을 대문 옆에 걸었다. 그러고 나서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장의 계고문이 현관문에 나붙었다.

 

국방부는 '국유재산법'을 들먹이면서 강제 토지 수용을 반대하며 빈집을 점유한 이들에게 경고하였다. 국민의 평화적 생존권과 자기결정권, 자치권 보다도 국유 재산의 보호와 미국이 추진하는 GPR에 대한 원활한 협조가 정부한테는 더욱 중요한 사안임을 계고문에서 밝히고 있었다. 평택에 '평화 신도시'를 건설하고, 용산에는 '민족,역사 공원'을 건립하겠다는 정부 발표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이 나라의 '평화', '민족', '역사'란 수백 억 혹은 수십 조의 돈을 퍼부으면 보전이 가능한 무엇이다. 전범 국가의 내면은 천박한 물신주의와 강자 숭배 의식으로 만연해 있다. 정의와 양심에 따른 어떤 판단도 국가로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슬픔을 나누고, 생명을 가꾸고, 기억을 간직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국가의 파렴치함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전범 국가’의 국민이라는 오명 아래서 언제까지나 국가의 만행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곳은 나에게 '양심의 해방구'이다. 다가오는 봄에도, 내년 봄에도 황새울 들판에 연둣빛 모가 자라나길 꿈꾸며 미군기지 확장을 저지하는 그 날까지 이곳에서 싸울 것이다.


2006년 1월 2일

평택 팽성읍 대추리에서,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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