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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수 없다. 다른 누군가가 구상한 작업장과 작업량, 작업방식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피동적 인간을 벗어 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자신의 안방을 누군가가 맘대로 가구를 이리저리 배치한다면 그대로 참고 견딜 인간이 얼마나 될까? 작업장은 안방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노동자의 공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장을 자신의 구상대로 재편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묘한 모순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작업장 혁신은 자신의 안방에 가구를 놓고 수조를 배치하고 침대의 위치를 바꾸는 매우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작업장에서 수동적인 노동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작업장에서의 단순한 임금따먹기가 아니라 작업장 자체를 노동자의 통제권 아래에 두고자 하는 투쟁 또한 그 어떤 정치투쟁에 못지 않은 중요한 정치적 투쟁이다.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을 교육하는 것은 ‘노동교육센타’를 만들고 ‘노동교실’을 열고, 그럴듯한 기관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작업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교육을 위한 학원의 설립과 같은 의미를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이제 교육은 공교육의 확립, 즉 노동조합의 현장활동의 혁신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설학원의 설립수준이 아니라 대규모적인 노동조합의 현장활동에 대한 재정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 없이 노동의 미래는 없다.
셋째, 작업장혁신은 협소한 ‘작업현장투쟁’이 아닌 자본전략에 대한 전면적 투쟁이다.
작업장의 혁신은 단순히 작업장 그 자체의 내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작업장의 변화는 작업장 내적 원인이 아니라 자본의 경쟁체제, 그에 따른 자본의 생산효율성의 확대를 위한 노력, 기술적 발전에 따른 생산기술의 혁신 등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장 혁신을 위한 투쟁은 단순히 작업장 내부로 만의 관심을 집중하는 문제가 아니라 기업경영전략과 산업정책 등과 연관 속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소위 신자유주의는 대량생산체제를 넘어서 유연생산방식을 확대시키고 있다. 유연생산체제는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노동자를 분할, 축소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규모로 분할된 인력공급업체에 소속된 비정규직과 써비스 유통망의 노동자들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유연생산체제는 치명적인 결함도 만들어 낸다. 시장변동에 맞게 적기공급을 위하여 빈번한 물량변동과 작업장 재편이 필요하고 이때마다 노동자들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에서는 노동자들의 작업장에서의 교섭력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작업장 투쟁을 협소한 시각에서 전개하면 패한다. 경쟁력논리를 뛰어넘지 못한 채 수당 투쟁으로 전락하거나 혹은 자본은 이미 오래 전에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여 최종적으로 눈에 보이는 작업장 재편과정에서 노조와 협상을 한다. 모 기업의 경우 회사의 외주화에 대한 대 노조전략이 ‘노동조합에 들킬 때 교섭한다’는 것이다. 이미 설비투자를 해서 신설공장을 지어 놓고 물량을 빼내가려는데 노동조합은 나중에 알고 싸운다. 사측은 막대한 투자비용을 이미 쏟아 부어놓고 ‘배째라’고 한다. 이런 식의 투쟁은 결국 수세적은 투쟁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 몇 년간 근골계투쟁은 매우 중요한 투쟁으로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근골격계투쟁은 산안투쟁이라는 협소한 영역의 투쟁을 벗어나지 못해왔다. 그 핵심적인 원인은 ‘전쟁전략 없는 부분 전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산안투쟁이 작업장혁신이라는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재해석되고 이런 차원에서 투쟁을 전개해야 했으나 부분적 현안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아쉽지만 간략한 지적으로 그친다.)
다. 대대적인 작업장 진단
작업장 혁신은 분명한 진단을 통해 구체적인 과제를 도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몇 몇 대공장들에서 작업장 진단들이 진행된다. 불행하게도 노동조합의 주도적인 사업이 아니라 자본의 주도적인 작업들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S사의 진단과정에서 지적된 사항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첫째로 노동도구주의적 경향이다.
조합원들의 다수가 ‘일하다가 돈 좀 벌면 나가서 장사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노동에 대해 돈벌이 수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노동에 대한 집중이 떨어지고 사측은 노동력 동원을 위하여 기초질서운동을 강조한다. 그럴수록 노동자들은 자발적 노동이 아닌 도구적 노동의 생각이 강화된다. 사측은 물질적 보상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한다. 실리적인 경향이 강화되고 자발적인 잔업특근의 요구가 증대한다. 품질의 향상이나 임금의 질적 상승이 아니라 공장가동시간이 늘고 변동임금을 통한 임금량이 증가하는 구조가 여기로부터 탄생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구조조정 이후의 경험적으로 확립된 이데올로기와 노동자정체성의 약화이다.
구조조정이후 조합원들은 ‘회사가 잘되어야 고용도 보장된다’는 생각을 한다. 노자간의 근본적 이해의 대립이 있는가가 의심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노사간의 분쟁사항은 노동자 내부의 불평등이 노조 내부의 통합력이 떨어짐에 따라 사측에 대한 불만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조직도구주의적 경향이다.
노동자들의 계급정체성이 약화됨에 따라서 조합원의 상당수가 노동조합과 일체성을 상실한다. 따라서 노조라는 조직을 철저히 도구적으로 활용한다. 강성집행부와 온건집행부의 탄생은 노선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합원의 실리를 챙기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선택된다.
따라서 노사관계는 노동조합과 자본의 양자구도가 아니라 노동조합집행부와 사측이 있고 그 중간에 조합원들이 있는 구조가 되어 있다.
그럴수록 노동조합은 조합원동원에서 외곡된 모습을 보인다. 동원식, 이벤트식 사업을 통해 조합원을 더 모으고자하고 간부마져 노조활동에 자발적 참여가 떨어져 노동조합이 대의원들의 집회참가여부를 노보에 공개하는 식의 강제적인 방식을 동원한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 왜곡된다.
넷째로 왜곡된 작업장 내부의 관계다.
조합원들은 노조가 일반조합원을 대변하기보다 목소리 큰 사람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현장조직에 몸담고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입김이 세다. 사측도 노무관리차원에서 현장조직관리를 하기 때문에 원칙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현장조직들의 불만을 우선 처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현장은 노조나 회사나 일정한 원칙에 근거하여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노조-현장조직-회사의 연결관계에 의해 운영된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은 어떤 사람이 승진하거나 선호되는 업무를 담당할 경우 그 사람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빽’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단내용은 결코 한 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해당사업장의 사례를 타 사업장 간부와 논의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제 모든 노동조합들에서 작업장에 대한 진단이 전면화 되어야 하고 내부를 스스로 드러낼 필요가 있다.
라. 작업장 ‘협상의 혁신’
작업장에 대한 전반적인 진단이 필요하지만 아직 체계적으로 진행도지 못한 상황에서 몇 가지 영역만을 검토 하고자 한다.
첫째, 개념의 재정립과 통일이다.
제조업에서 가장 대표적인 공장생산체제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자동차산업의 경우를 보며 대부분의 작업장 협상은 UPH에 맞춰져 있다. UPH는 말 그대로 시간당 생산대수이다. 이 개념은 생산성을 중심으로 한 자본가적 개념이다. 그나마 작업장 협상을 전개하는 각 사업장마다 개념의 차이들이 매우 많다. 기아차의 경우는 UPH개념이 더 일반적이고 현대차의 경우는 M/H개념이 더 일상적이며 대우차의 경우는 짭수 개념이 더 일상적이다.
자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작업을 통해 얼마나 단위시간당 생산대수를 늘릴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더 쉽고, 더 적게 일하며, 다 안전하게 일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업장 협상의 중요한 개념은 생산량 중심의 협상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을 가지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 확립된 기준이 없으면 결국 수세적인 태도로 시작하고 방어적인 협상의 결과를 갖기 마련이다.
자본의 경우 생산량을 중심으로 UPH개념을 들이대면 공장의 여기저기에 생산목표와 UPH수치들이 표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노동을 중심으로 한 개념은 과연 무엇일까?
현재의 작업현장을 보면 작업자가 단위작업을 준비하고 실제로 행하며 종료하는 시간인 ‘싸이클타임’(텍타임?)은 그나마 비교적 작업자 중심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마져도 싸이클타임의 산정이 누구나 편하게 작업할 수 있는 작업속도가 아니라 숙련작업자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이 또한 교정되지 않으면 노동자적 개념으로 사용하기 매우 어렵다.
자본이 시장의 변동 → 생산량의 조절 → UPH조정이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작업장 협상에 접근해 온다면 노동자는 노동의 인간화 → 노동강도의 전략적인 완화의 단계적 목표설정 → 적정 싸이클 타임의 산정 → 노동강도의 재편 및 인원협상의 전개와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된다.
적어도 각 공장에서의 개념의 편차를 해결하고 각 사업장을 넘어서 일정한 통계로 노동강도를 비교분석한다는 것은 매우 기술적인 작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작업이다. 이것이야 말로 기존의 공동요구를 중심으로 한 일시적인 공동투쟁이 아니라 전략적 차원에서 공장을 뛰어 넘는 산업적인 단결의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고 산별노조를 향한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불균등 극복을 위한 표준의 확립
정규직 내의 작업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균등의 현상은 매우 왜곡된 현실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S공장의 작업자들의 조사결과 메인라인과 간접부서의 임금격차가 최소한 20만원 이상이 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어려운 일과 쉬운 일에 대한 차별적 보상이 곧 평등한 보상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려운 일과 쉬운 일의 기준은 뭘까?
2004년 D사의 임단협 요구결정과정에서는 수당요구를 둘러싸고 격론이 발생하였다. 즉 기피작업(메인라인)에 대하여 특별수당을 6만원 가량 요구하는 안이 상정되었다. 이 안이 상정되자 기피작업은 무엇이고 메인작업은 과연 무엇인가? 정비소의 노동자들은 고객을 직접대하면서 불평사항들에 접하게 되는데 이런 작업은 그럼 왜 수당이 지불되지 않는 것인가? 조립라인만 어렵고 기피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우후죽순처럼 생산공장의 타 부서와 정비소 등에서 수당요구들이 터진다.
이 문제는 한편에서 보면 메인라인에서 수당을 요구하고 이를 근거로 하여 타 부서가 다시 수당을 요구하면서 ‘수당경쟁’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임금인상을 관철시키는 모습을 띤다. 물론 노동자들에게는 일정하게 임금인상의 효과를 가져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자들 내부적으로도 노동에 대한 적절한 보상의 기준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K사의 경우 2002년 임단협 결과 사측에서는 구체적인 내역이 없이 조합원 1인당 1만원에 해당하는 수당을 던져주고 노조가 알아서 배분하도록 하였다. 이 문제로 노조내부에서는 며칠 간 대의원 대회를 통해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다. ‘콘베이어 작업자에게 배분되어야 한다. 아니다 골고루 배분되어야 한다.’ 등 내부적인 분열로 인해서 임단협의 결과는 오점으로 얼룩지는 현상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 고깃덩이 하나 던져주니까 서로 물어뜯는 이리떼하고 뭐가 다른가?”
아주 극단적이고 냉소적인 평가이지만 그 현상을 그 사업장의 한 활동가가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통일성을 확보할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사회적 평등을 주장할 실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넷째, 고용불안의 보이지 않는 칼 - 노동의 단순화와 파편화에 맞선 직무순환
모듈화와 외주화가 자동차 산업에서 일자리를 급격하게 이동시키고 있다. 무노조 비정규직 공장이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자동차산업의 미래는 모비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모비스는 급속하게 매출을 늘리면서 ‘껍데기만 빼고 모든 것을 생산’하는 모듈업체로 성장하고 있다.
그 핵심적인 공장의 하나인 E모듈공장은 롤링샤시 모듈을 생산한다. 롤링샤시모듈이란 엔진과 변속기와 동력을 바퀴에 전달하는 구동장치, 자동차의 주행방향을 제어하는 조향장치를 한 덩어리로 조립한 것이다. 그야말로 타이어만 끼우면 달릴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모듈부품업체가 커질수록 자동차 완성차 공장은 껍데기만 씌우는 껍데기 공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 공장을 방문했을 때, 사측의 관계자는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 보세요, 저기 농사짓던 할머니도 작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업이 편해 졌습니다”
그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분명 자랑이었지만 노동자에게는 지옥의 입구가 여기에 있다는 점을 섬뜩하게 경고하는 것이었다.
생산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노동은 점점 더 단순화되고 있다. 그럴수록 숙련은 필요 없다. 단지 더 적은 수의 단순작업을 반복하는 노동자가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자동차 공장은 더 이상 과거처럼 한 지역에 집단적으로 대규모로 지어지지 않는다. 동시에 출근하고 동시에 일하고 동시에 퇴근하는 규율 잡힌 군대로서 ‘근대공업 프롤레타리아’는 더 이상 확대 재생산되지 않는다.
곳곳에 산개된 공장에 농사를 짓다가 인력공급업체에 채용되어 일하게 되는 무노조 비정규직으로 가득찬 모듈공장, 완성차의 조립라인과 발전한 컴퓨터 통신망(CCR룸)의 적기생산체제로 연결된 유연생산공장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산노동(노동자)는 죽은 노동(자동화설비)에 의해 대체되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의해 대체 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장시간 저임금노동 → 가격경쟁력의 체제를, 고숙련 적정임금노동 →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한들 씨가 먹힐 리 없다. 노동의 파편화와 단순화에 저항하여 유기적 노동의 보존을 위한 투쟁이 없이는 탈숙련과 저임금노동의 증대를 막을 방법이 없다.
물론 그대로 놔두는 것도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비정규직 공장들이 생겨나 그곳에서 비정규직들의 불만이 축적되어 언젠가는 혁명적 투쟁을 또 벌이게 될 것이고 ‘제2의 87년 대투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예수재림의 날을 기다리면서 기도나 하는 사이비 종교의 종말론에 불과하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제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직무순환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직무순환’의 네 글자를 꺼내자 '전환배치'라는 악몽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다. 직무순환이 과거의 고용불안의 원인으로 지목된 전환배치의 다른 이름처럼 인식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악몽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도 자본은 강력히 외친다. “내부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도저히 못해먹겠다”는 것이다. 시장의 수요에 대응하는 적기공급의 유연생산체제는 필연적으로 잘 나가는 차종과 잘 안 나가는 차종에 대한 유연하고 순발력 있는 생산조절을 요청하며 따라서 상시적으로 라인이동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라인이동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못해 먹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식의 자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기능적 유연성을 확대하자는 것인가?
아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본다면 단순반복노동의 증가에 따른 근골격계 질환의 구조적 발생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도 이제 직무순환은 공세적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노동의 파편화와 단순화에 따른 비정규 노동의 급증에 대응하는 고용전략의 일환으로서도 직무순환은 적극 검토되어야 한다. 단순 저임금 노동의 증가에 따른 임금하락에 저항하기 위해서도 직무순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직무 고정적인 사고방식은 또 다른 측면에서 서열화를 촉진한다. 즉 편한 일로 가기 위하여 경쟁이 일고 편한 작업은 일정한 기득권(고령자, 노조간부에 대한 사측의 야릇한 전관예우 등)으로 시작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기득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직무순환은 정규직 노동자 내부에서도 통합성을 높여 내기 위하여 필요하다. 이는 어려운 일은 비정규직에게 쉬운 일은 정규직에게 할당하는 관행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직무순환이 노동자적 관점에서 실행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들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직무순환이 가능하려면 각 직무간의 불균등성이 최소화되어야 한다. 현저하게 어려운 노동으로 직무이동을 하는 것은 우선 작업자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노동에 대해서는 직무의 분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해결해야 한다. 또한 직무순환은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된 직무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을 위해 OJT가 필요하고 인원의 보충도 필요하다.
과거의 전환배치는 고용불안의 신호등이었다면 현재의 직무경직성이 고용불안의 신호등이다. 과거의 전환배치 수용이 반노동자적인 행위였다면 새로운 직무순환의 공세적인 제기는 노동자의 무기가 될 것임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다섯째, 협상의제의 확대을 통한 노동자 통제권의 확대
이제 작업장에서 모든 것은 협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작업장의 주인은 노동자다. 주인이 안방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개입하고 결정하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강도나 인원협상을 넘어서 생산량 또한 협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연간 회사의 생산량의 결정에 대한 본조 차원의 협상은 물론이고 공장별 부서별 생산량의 협상까지를 포괄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작업의 배분에 개입하고 적정 노동강도를 통해서 해소할 수 없는 생산량은 새로운 인원의 충원이나 공장의 확대를 통해서 해결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라인의 재편이나 공장의 신설과정에서 생산라인의 설계까지 개입하여야 한다. 이미 현대차의 경우 2003년 협상을 통해 신모델의 고정시점에서부터 노동조합이 개입하는 것을 못박았다. 교섭의 의제의 확대를 통해 노동자의 개입과 통제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빠뜨려서는 안될 것이 있다. 개입의 실질적인 능력의 문제다. 현재의 활동가나 간부의 수준은 구체적인 개입을 할 실력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따라서 활동가와 간부는 이제 단순히 전투성을 내세우고 조직관리를 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각 영역에서 전문가로서 스스로를 훈련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
여섯째, 일시적 대응에서 전략적인 개입으로
지금까지의 라인협상은 사측의 계획에 따라서 모델의 변동과 라인재편의 경우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여
하여 왔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작업장에 대한 노동의 전략적인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의 기준에 근거하여 작업장 혁신의 단계적인 목표들이 수립되어야 한다.
이에 기초하여 비록 사측의 생산변동 계획이 없다고 할지라도 노동강화의 완화, 노동시간의 단축의 단계적 목표를 위하여 먼저 매년 사업계획 수립이전에 생산량의 협상을 요구하고 나서야 한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노동강도, 노동시간 등을 세부적으로 교섭해 나가는 새로운 패턴을 정립해야 한다.
매년의 임단협 협상기간보다 더 중요하게 매년 하반기에 이런 협상의 패턴을 강화함으로서 매년 상반기의 임단협 투쟁보다 더 비중 있게 매년 하반기의 생산계획협상을 정착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
4. 임단협의 혁신을 위하여
가. 임단협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임단협에 대한 위험한 관점은 구시대적 관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고방식과 임단협을 넘어서야 한다는 미래적 지향 모두에서부터 발견된다.
첫째, 낡고 고루한 임단협에 대한 관점을 버리자.
임단협은 여전히 노조의 주요한 행사이다. 집행부의 한해 농사가 여전히 임단협에 달려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이제 갓 노조를 만든 경우에 임단협 그 자체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17년째 민주노조운동을 해온 노동조합들이 아직도 낡은 임단협을 중심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정체와 퇴보다.
생각해 보라. 이미 정규직 대공장의 조합원들은 일련의 패턴에 익숙하다. 조합원들은 노조의 임단협 요구안을 보고 사측의 안을 보면서 대충 몇%로 타결되며 어떤 과정을 밟아서 정리될 것인지를 안다. 반복되는 임단협은 어떤 결단을 요구하거나 혹은 비장한 파업을 요청하지 않는다. 통상적인 임단협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지점으로서 유효성이 상실되고 있다.
둘째, 임단협에 대한 청산주의적 사고방식을 경계해야한다.
임단협 중심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을 넘어서야 한다는 주장은 일견 미래지향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분명히 임단협 중심의 노조활동은 이제 극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임단협이 아닌 사회적인 의제나 전국적 계급의제, 혹은 사회 정치적 요구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으로 잘 못 대체되는 경우 왜곡된 길로 나갈 수 있다. 즉 임단협이 아닌 무엇을 추구하는 단절적인 사고방식으로 관념화 또는 대중과 떨어지게 될 것이다.
한 대공장의 노조집행부는 엉뚱하게 작업장내부의 문제는 소홀히 하면서 ‘버스요금인하투쟁’ 같은 ‘이역 주민과 함께 하는 투쟁’을 하겠다고 하면서 캠페인으로 나간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집행부는 작업장 통제에 대한 대응에서 무능함을 집중적으로 공격받았으며 더 나가서는 ‘국민과 함께 하는 것 = 노동계급을 버린 것’으로 비판받았다.
그렇다면 임단투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임단투 자체를 혁신해야 한다. 혁신의 방향은 노동조합이 산업적 사회적의제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기여하는 임단협이 되어야 한다.
호주 제조노조의 경우 3년에 한번 임금교섭을 하는데 그 이유를 비정규직 및 다른 구조적인 의제를 다루기 위해서라고 한다. 물론 이처럼 당장에 임단협의 비중을 낮출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임단협을 관성적인 임단협이 아니라 새롭게 혁신하면서 동시에 산업적, 사회적 의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점차적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나. 임금투쟁의 혁신을 위하여
임금문제와 관련해서는 개략적으로 세 가지 측면의 문제제기들이 있다.
첫째는 정규직 내부의 임금의 불평등 구조이다. 앞서 지적한대로 정규직 내부에서 임금에 대한 불평등 문제는 주로 수당을 둘러싸고 격화된다. 둘째로는 임금격차의 확대문제다. 정규직 대공장과 부품사의 임금격차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의 문제다. 셋째로는 자본으로부터 제기되는 ‘고임금론’의 문제이다.
이 문제들의 해결을 위한 방향은 무엇인가?
첫째, 이제 임금투쟁은 ‘양’의 문제에서 ‘구조’의 문제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제 몇% 임금인상률의 문제가 아니라 임금구조를 전면적으로 제기해야 한다. 임금가이드라인에 저항하여 수당을 통해 변칙적 임금인상을 해왔고 변동급이 급격히 확대되었다. 심지어는 대공장들도 기본급의 비중이 50%이하를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규직 내부에서도 임금불평등을 해소할 기초가 부족하다. 직무평가에 기초한 임금체계의 재고를 통해 정규직 내부의 불합리한 임금 및 수당구조를 재편하여야 한다.
공세적으로 임금구조를 제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왜곡된 임금피크제의 공격앞에서 계속 두드려 맞게 될 것이다.
자동차 노조들의 수당의 통합을 위한 사업들이 추진되고 있으며 S사의 경우는 수당통합의 방안을 만들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단일호봉제를 추진하는 등 임금구조의 문제는 이미 화두가 되고 있다.
둘째, 임금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원하청 임금격차의 원인 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제기들이 이뤄져야 한다. 자동차산업의 경우 CR(Cost Reduction)구조와 같은 원청의 하청에 대한 일종의 이윤착취를 쟁점화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요소만으로는 임금격차를 해소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전략적으로 ‘차등임금인상제’를 적극 검토해야 할 것이다. 즉 지금의 일률적인 임금인상률의 적용방식이 아니라 하후상박에 기초하여 대공장의 임금인상보다 중소사업장, 중소사업장보다 비정규직의 임금인상을 높게 책정하여 제시하는 방식을 당장에 논의하여 적용할 필요가 있다.
셋째, 고임금론에 맞선 임금체계로 전면적인 대응과 임금결정요인의 확립이다.
해마다 대공장의 임금이 높다고 아우성들이다. 이런 공격에 얼마나 우리가 잔업특근을 많이 하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따라서 오히려 역공세를 펼치는 차원에서라도 대공장의 적정임금이 얼마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분명히 만들 것을 역으로 제안할 필요가 있다. 생산성의 향상 + 물가상승 등 노동력 재생산비용 + 기업의 이윤율 + 경제성장률 등 다양한 요소들을 평가하여 임금결정요인을 만들 필요가 있다. 물론 논란이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임금체계에 대한 논의에서 이런 문제들이 심각한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논의하는 것은 과거와 분명 다르다. 과거의 생산성 향상에 기초한 임금연동방식은 철저히 자본의 생산성 논리에 기초한 것이다. 또한 노동이 채택하여온 생계비에 기초한 임금인상 산정방식 또한 실효성이 매우 약화되었다. 실제로 임금은 노사간의 힘에 의하여 결정된 셈이지만 노사간의 힘의 문제는 기업의 지불능력이라는 객관적인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특히 대공장의 경우는 임금인상 산정방식을 공식화하고 그에 기초한 임금을 결정하는 것을 적극 고려하자는 것이다.
이는 한편에서는 중요한 전략적인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임금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대공장의 실리적 경향을 일정한 임금결정 구조를 통해서 단순한 패턴으로 처리함으로서 대공장의 관심영역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넷째, 사회적 임금, 사회적 복지의 전면적인 제기로 접근
아무리 임금격차의 해소를 위하여 차등임금인상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대공장의 노동자든 비정규직의 노동자든 먹고사는 노동력재생산 비용이 다를 수 없는데도 임금격차는 해결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금격차의 해소를 위한 투쟁외에 사회적 복지, 사회적 임금을 위한 투쟁은 별도로 전개되어야 한다.
바로 이점에서 2004년 자동차 완성차들이 제기한 ‘사회기금’은 첫 출발로서 다양한 논란들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의 현실에서 사회적 임금과 사회복지, 연대임금을 전면화 하기 위한 현 단계에서의 전술적 출발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다. 단체협약투쟁의 혁신을 위하여
현 단계에서 특히 대공장의 단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미 자동차 대공장의 경우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수준이다. 각 노동조합의 해당 조항들을 한 번만 훑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각 단위노조의 사정에 따라서 더 개선되어야 할 조항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대공장의 단협은 더 이상 조합원의 복지혜택을 늘리거나 하는 수준에서 다뤄질 문제가 아니다. 이제 대공장의 단협은 노동자들이 경영과 산업의제들에 개입하고 통제권을 확대 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는 ‘장치’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첫째로는 작업장 혁신을 위한 세부적인 장치를 만드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앞에서 밝힌 바, 작업장 혁신을 위해서는 생산계획에 대한 협상에서 시작하여 작업의 배분, 적정노동강도에 대한 규정 등이 필요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경우 부서별 대의원의 협상에 맡겨져 왔다. 이것은 옳다. 작업장의 협상을 대의원들이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작업장 협상의 규범을 단협에서 체계적으로 확정하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단협의제의 확장을 통해 경영권에 대한 개입은 물론이고 산업적 의제에 대한 개입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
2004년 자동차노조들은 산업차원의 노사간 공동기구 마련 등을 요구안으로 내걸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조항 및 경영권 개입조항들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2003년 현대차는 산업정책을 다루기 위하여 자동차공업협회에 논의기구를 만들 것을 제안하는 합의를 한 바 있다. 대공장은 선도적으로 이런 의제를 단협을 통해서 확대해 나가야 한다.
대공장은 단협을 통해서 경영권과 산업의제에 대한 개입과 통제의 근거를 만들고 그에 기초하여 생산과 투자계획에 대한 협상, 산업정책에 대한 협상에 주력함으로서 과거의 단협이 아닌 새로운 교섭패턴을 만들어 가야 한다.
이것이 현재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대공장노조의 단협에서의 역사적 과제다.
* 다만 우리가 이런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점증하는 경영참가 요구에 대한 오해와 빗나간 견해들이다.
노조 내부적으로는 경영참가를 통해 생산계획을 노사간에 다루고, 산업정책을 노사공동기구를 통해 다루자는 주장에 대하여 ‘노사협조주의’를 운운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반론들이다. 노동자가 노예에 머물고자 한다면 시키는 데로 자본의 계획에 따라서 노동만 제공하면 된다. 그러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당연히 경영계획이나 산업정책에 개입해야 한다.
반대로 자본의 경우 경영참가를 극도로 경계한다. 그들의 본질은 자본에 대한 소유와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경영권을 자신의 본질로 한다. 따라서 경영권에 대한 공격은 자신의 본질을 공격하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최근 경영계는 경영참가를 막는 한편에서는 자본의 논리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유인한다. 그 중의 하나가 우리사주제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전혀 노동자적인 태도가 아니다. 주식을 가진 자 만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본의 논리다. 노동자는 이윤을 만드는 원천인 노동을 제공하는 실질적인 회사의 주인이다. 따라서 노동을 제공한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경영권과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민주노동당의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일부에서는 우리사주를 통한 위험스런 경영참가의 논리를 펴고 있다. 물론 특수한 경우 투쟁과정에서 전술적으로 우리사주제를 활용하는 것이 고려 될 수 있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경영권 주장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우리사주를 통한 경참가는 관점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것은 자본의 통제방식이 아니라 자본에 흡수되어 결국은 자본의 노예로 전락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 현 단계 노동운동의 발전전략 -
사회적 노동운동을 위하여
2004년 6월
1. 노동운동은 어디에 와 있는가?
가. 주도권확장 국면에서 부딪친 암초
87년 민주노조운동의 본격적인 출발 이후 노동계급은 험난한 투쟁을 통해 민주노조를 확고하게 정착시켰다. 95년 말 민주노총의 결성은 민주노조운동이 실질적으로 시민권을 얻었음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비록 노동조합이라는 일면적인 조직형태에 의존하였지만 노조를 거점으로 하여 계급적 요구를 표현하고 관철시켜 왔다.
이제 노동자계급은 민주노조를 통해 ‘굴종의 사슬을 끊고’ 인간선언을 하는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를 노동계급의 주도권 하에 바꾸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한편에서 본다면 비합법 혁명운동이 실패하고 노조라는 일면적인 방향으로 발전해온 상태를 넘어서 사회적인 대안을 가지고 사회자체를 바꾸는 과제로 나아갈 것을 요청 받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러나 이제 존재를 인정받자 마자 노동계급은 새로운 암초를 만나게 된다.
96년부터 시작된 정리해고의 도입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의 ‘국제경쟁력’ 논리속에서 한국에도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세계화의 폭력적인 관철과정으로서 경제위기와 비교한다면 그것은 아주 작은 출발에 불과하였다. 아시아의 금융위기속에서 한국 또한 외환위기와 함께 본격적인 구조조정기에 들어섰으며 그것은 곧 자본의 노동계급에 대한 강력한 역공세이기도 했다.
노동운동이 이제 갓 인간선언을 하고 ‘조합주의적 국면’을 활짝 열고 새로운 장으로서 사회적인 주도계급으로 발전하기 위한 ‘헤게모니적 국면’을 열어야 할 시기에 채 꽃을 피우지 못하고 공격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의 역공세는 노동자들의 뿌리를 흔들어 노동계급의 해체를 겨냥하여 노동자를 중층화, 분열시키고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계급의 분열을 막아내고 사회적 주도계급으로서 자신을 확대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아직 노동운동은 좌표를 분명히 세워나가지 못하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 바로 현재의 노동운동의 상황이다.
나. 노동운동의 변화를 위한 두 가지 시도와 실패
노동운동은 자신의 발전과정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가? 그것은 아니었다. 노동운동의 변화는 시도되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민주노총의 ‘노동운동발전전략위원회’의 활동이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였다. 전략위원회의 구상이 제출되었으나 지역별 순회토론 등을 거치면서 그것은 한갓 ‘구상’을 넘지 못하고 좌초 소멸되고 만 것이다.
두 번째의 시도는 ‘산별운동’이다.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라는 양날개를 향한 노력이 구조조정시대의 대안으로 제출되었다. 정치세력화는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졌고 산별노조는 보건의료나 금속노조의 건설로 나타났다.
산별운동은 여전히 중요한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대안으로서 민주노총 또한 산별시대를 꿈꾼다. 그러나 산별운동은 전진보다는 정체상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성패를 논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 2012년 집권을 꿈꿀 만큼 민주노동당은 희망이 부풀어 10명의 국회의원으로 메스컴을 장식하고 있지만 아직 누군가의 표현처럼 이제 민주노동당은 ‘장롱면허’가 아니라 본격적인 ‘실전운전’을 시작하였으며 이 초보운전자가 얼마나 교통사고를 낼 것인지는 아직 시험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다. 노동운동의 발전을 둘러싼 두 가지 경향 - ‘국민주의’와 ‘계급주의’
위 두 가지의 노력은 노동운동내부의 견해차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의 확립으로 나아가기 보다 이견들을 더욱 더 확실히 드러내는 과정이었다. 노동운동에 늘 나타나는 두 가지의 큰 흐름은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첫 번째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주장은 한편에서 본다면 노동운동이 조합주의적 운동을 넘어서 사회적인 주도계급으로 나서기 위하여 국민속으로 헤게모니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주장은 격렬한 구조조정의 시기에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계급적 관점이 불확실함을 증명하면서 좌초된다.
국민파로 분류된 ‘배석범 민주노총 직대체제’는 정리해고를 합의함으로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면서 결정타를 입게된다. 또한 현대자동차의 6대 집행부가 내세운 ‘국민주의’적 편향은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진행된 구조조정기에 격렬한 노자대립의 상황에서는 관념적이고 계급적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국민의 눈치보기’로 비판되었다. 노동자들은 국민의 눈치를 볼 여유가 없이 정리해고라는 격렬한 투쟁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현대자동차에서 98년 정리해고는 바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계급주의’의 한계와 균열이다.
노동운동의 좌파활동가들은 구조조정에 맞선 비타협적인 투쟁을 중심으로 민주노총의 정리해고 합의에 강력한 행동으로 비판하였으며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에 맞서 계급적 원칙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전선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진행되었다. 사퇴한 민주노총 지도부를 대신한 단병호 직무대행의 파업철회, 우여곡절을 통해 등장한 이갑용 집행부의 한계와 노사정위 참여 등으로 무너진 전체 전선 속에서 이제 전투는 각 개별사업장의 투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게 된다. 만도기계, 현대자동차, 발전투쟁 등 수많은 투쟁을 경과하면서 강력한 투쟁을 통한 돌파를 주장한 좌파들의 경우도 스스로의 일관성을 지키지 못하거나 한계를 드러냈다.
이 구조조정기의 투쟁을 거치면서 좌파내부 또한 분명하게 분화된다. 대체로 원칙을 유지하면서 나아가려는 경향과 구조조정투쟁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우회로를 찾게 되는 경향의 등장이 그것이다.
특히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본다면 우회적 경향은 산별노조를 강력한 대안으로 제출, 2000년 이후 힘을 발휘하여 왔으나 금속노조의 정체 등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있다. 원칙적인 태도을 가진 경향은 이렇다할 대중적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고 힘이 약화된다.
2004년 노동운동은 표면만 본다면 이제 민주노총의 4기 집행부체제가 등장하면서 계급주의적인 노선보다는 타협적인 노선들이 강화될 것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집행부의 등장은 과거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의 부활과 승리라는 측면보다는 계급노선의 실패의 측면이 훨씬 크다. 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의 실패와 정규직 대공장 노조들의 실리적인 경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은 정규직의 실리주의를 배경으로 민주노총의 우경화 가속화가 결합되고 여기에 노무현정권의 로드맵이 힘을 발휘한다면 장기적인 체제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는 매우 일면적인 지적이다. 이런 평가에 기초하여 소위 좌-우 대결로만 인식한다면 민주노총의 우경화에 맞선 범좌파단결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계급주의를 표방한 범좌파 연합이 기존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채 지도력을 상실했다는 측면을 잊어선 안된다. 이를 잊고서 다시 낡은 사고법에 기초하여 대안을 세우려 한다면 그 결과는 ‘권력쟁패’만이 남을 것이다.
4기 민주노총 지도부의 경우 분명한 전략적 대안을 제출하기보다는 노동운동의 전반적인 상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적 상태에서 우경화 가능성과 동시에 과거 노조운동의 낡은 틀을 해체하는 새로운 가능성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2. 흔들리는 노동운동의 자화상
현재의 상황에서 노동운동의 방향을 둘러싸고 아직 본격적인 형태로 대안적 방향이 제출되는 상황은 아니다. 아직 체계화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러 가지 흐름들이 감지된다.
가. 이미 생명을 다했으나 아직 청산되지 못한 ‘깃발론’
“ 과거에는 깃발을 들고 ‘따르라’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조합원들의 분노가 있었기에 투쟁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새로운 방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2004년 5월에 만난 현대중공업의 한 활동가의 고백이다. 분명 이런 식의 깃발론으로는 현재의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식의 낡은 깃발론은 청산되고 있는가?
2004년 열사정국에서도 이런 류의 모습이 여전히 드러난 것이 아닐까? 애초에 두산이든 한진이든 혹은 세원이든 사업장들의 투쟁은 조합원들의 다수를 결집시키지 못한 한계가 드러났다. 열사들은 이 한계를 안고 보다 강력한 선도투쟁으로 몸을 던지면서 조합원들을 결집시킨 측면이 있다. 더욱이 열사들의 죽음 앞에 민주노총의 경우 총파업의 선언을 통해 투쟁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선도적인 투쟁의 선언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실질적인 대중투쟁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2003년 11월9일의 강력한 가두시위 또한 노동계급의 분노를 담은 것이라고 하지만 대중적인 투쟁의 확산의 계기 보다는 선도투적인 성격을 넘지 못하였다.
그리고 2004년 민주노총의 선거에서는 ‘문제는 힘이다. 힘있는 민주노총건설’이라는 주장은 낡은 투쟁노선의 반복으로 비춰지고 ‘우리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는 4기 집행부가 탄생하였다.
아직 깃발론은 제대로 극복되지 못한 것이다.
구조조정투쟁의 결과 현장의 정서는 투쟁에 대한 전망을 잃고 실리주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어보았자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이런 류의 투쟁은 아직도 반복되고 있다. 빈번하게 반복되는 관성적인 동원투쟁은 간부들의 자족적인 투쟁으로서 뭔가를 했다는 면죄부를 주는 의미를 가질지는 모르지만 현장의 조합원들의 투쟁을 촉진하거나 대중투쟁의 확산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 투쟁은 전혀 아니다.
나. 현실영합으로서 ‘담합적 노사관계’
‘구조조정의 악몽과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는 조합원의 경향’ 즉 실리주의가 강화되고 있다는 분석은 이제 새삼스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런 식의 분석도 매우 안이한 것이고 또한 일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조합원들의 경향만을 지적하는 수준에서는 포괄적으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이미 조합원들의 이런 경향은 확장되어 새로운 사슬고리를 만들고 있으며 또한 새로운 사슬고리속에서 조합원들의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고 있다.
그 사슬고리는 ‘조합원들의 실리적 경향 + 회사의 지불능력 + 관리되는 활동가조직 + 노조의 적절한 실리충족에 기초한 지위유지’가 결합되어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의 체계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고착화 가능성도 엿보이게 한다. 대기업의 지불능력에 기초하여 조합원들은 현금챙기기에 여념이 없고 노조는 적절히 실리를 안겨다 줌으로서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함으로서 일종의 노사간 담합구조가 형성되어 나가고 있다. 몇 몇 대공장들의 상황은 이런 측면에서 주목해야 한다. (KT, 지하철, 현중, 대우조선 등)
활동가조직들은 이런 경향에 맞서서 일부 저항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장활동가조직의 이런 저항도 사실은 노조권력을 둘러싼 정쟁으로 낙인찍힌다. 문제를 제기하는 활동가 조직 또한 담합적인 노사관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기에 ‘그놈이 그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상당수의 활동가조직들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사측과 관계하고 있으며 단순한 관계를 넘어서 사측으로부터 일정한 편의를 제공받기까지 한다.
‘담합적 노사관계’는 철저히 연대를 배제하고 이권을 단위기업에서 나눈다. 아쉬울 것이 없는 대공장의 성(城)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점에서 대공장의 노조는 상급단체에 대하여 어떤 아쉬움도 갖지 않으며 언제든지 탈퇴를 협박한다.
이런 경향들은 심지어 전국적 차원의 위험스런 구상으로까지 발전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일부 대공장에서 소위 ‘전국차원의 제4 세력의 구축’을 위한 행보들이 있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이런 취약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노정관계 등 사회적 논의구조는 아마도 유럽식의 사민주의에도 훨씬 못 미치는 그야말로 포섭된 노동자들의 정부에 빌붙기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다.
또한 담합적 관계는 이미 중층화된 노동자들의 분할을 고착화 할 것이다.
“ 조합원들이 생각하는 미래요? 아마도 고령화되어 나이가 들면 젊은 비정규직을 몇 명 관리하는 정도가 되는 것이 아니겠냐는 생각을 하지요”
모 자동차공장의 대의원이 고령화되는 정규직의 미래에 관하여 조합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무엇인가를 묻자 내놓은 답이다. 결국 정규직의 경우 비정규직의 관리자로서 자기전망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런 전망이 성공할 것인가는 별도로 따져야 할 것이지만 대공장의 ‘담합관계’의 끝이 어떤 모습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 무기력한 ‘초심론’
노동운동이 우려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활동가들의 도덕성을 문제시하면서 활동가나 노조의 ‘윤리강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운동의 타락을 경고하는 사람들은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이러한 주장이 담고 있는 애틋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활동가들이나 노동조합의 잘못된 관행이나 이미 몇 개의 노조에서 발생한 비리들은 철저히 규명되고 또한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혹은 당위적인 선언만으로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
노동운동이 현재와 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원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대안이 없다면 무기력한 주장에 그칠 뿐이다.
라. 희망처럼 떠오른 ‘정치시대론’의 함정.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에 크게 고무된 분위기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다. 분명 이는 상당한 진척이고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초보 운전자’ 민주노동당의 미래에 대하여 냉정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미 출발에서부터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함정이 도사린다.
첫째로 이미 실패한 역사가 재발될 가능성이다.
‘노조시대에서 정당시대로’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자칫 낡은 사회주의운동의 이론을 그대로 반복 할 수 있다. 경제의 상위개념으로서 정치를 말하고 경제주의를 지적하면서 정당을 통한 정치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소위 ‘국가를 장악하여 사회전체를 재편한다’는 국가주의적인 관념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작업장투쟁이나 현장조직력문제는 경제주의적인 활동으로 치부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경쟁적으로 민주노동당내에서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만이 전개되고 현장은 더욱 방치, 조합원들은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권력경쟁에 곧바로 염증을 느끼는 상황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경제와 정치에 대한 낡은 이분법은 버려야 한다. 작업장의 문제, 조합원의 정서 문제는 단순히 하위적인 문제가 아니라 핵심적인 문제이다.
둘째로 허약한 계급적 기반의 문제다.
앞서 밝힌 바 실리주의가 확대되고 이것이 ‘담합적 노사관계’로 확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왜곡된 노정간 타협체제로 나아가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설 자리는 너무도 뻔한 것이다. 그것은 서구 사민주의 정당들이 ‘제 3의길’로 자신을 포장하면서 신자유주의 세력으로 옮겨간 것 보다 훨씬 못한 수준에서 제도화와 자본주의로의 자발적인 포섭으로 나갈 가능성을 보여 준다.
셋째, ‘밀어내기’에서 ‘길들이기’로 전환한 보수집단의 전략
‘초보운전자’ 민주노동당에 대한 선생은 누구일까? 애초에 보수집단은 진보집단의 등장을 막고 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지 못하도록 끝없이 밀어내기를 해 왔다. 반공이라는 시퍼런 칼날을 가지고 밀어내기를 해 왔지만 이제는 달라지고 있다. ‘운동권 문화를 버리고 이제 이 사회의 책임 있는 주류중의 한 부분으로서 민주노동당도 문제제기만 하지말고 책임을 져라. 밥 얻어먹던 관성을 버리고 이제는 밥값을 내라’는 요지의 조선일보 사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좌파밀어내기’에서 ‘좌파길들이기’로 전환한 보수집단은 끊임없이 ‘초보운전자’ 민주노동당을 훈련시키려 할 것이다.
이에 맞서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얼마나 일관성을 견지할 수 있는가하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계급적 능력의 문제이다. 과연 약화된 노동계급이 보수집단의 길들이기를 물리치고 민주노동당을 자신의 계급적 부대로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이것이 문제다.
라. 대안부재의 무기력 속에 탄생하는 ‘외적 충격론’
“ 대공장의 현장 상태를 바꾸는 게 가능하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외적 충격속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한 대공장노조의 활동가의 얘기다. 그가 말하는 외적 충격이란 뭘까? 아주 극단적인 것이다.
“ 현재의 노무현 정권 마져도 외국언론이 보기에는 좌파정권이며 김대중 이후 보수집단은 노무현이 다시 정권을 잡은 것에 충격을 먹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를 뒤집고자 할 것이다. 한때 문제가 된 이화여대의 김용서라는 꼴통 보수논객은 지금은 좌파가 국가를 장악한 혁명적 상황이라면서 군부의 쿠테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보수집단은 어떤 방식으로든 권력 재탈환을 하고자 하며 만약 경제가 어려워지고 혼란이 발생한다면 이 틈을 타서 치열한 권력쟁패에 나설 것이며 이 과정에서 희생양은 노동조합이 될 것이다. 과거에는 반공을 중심으로 공안정국을 만들어 왔다면 이제는 노조를 희생양으로 하여 우익파시즘이 등장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조가 완전히 박살이 나야 정신을 차리는 게 아니겠냐”
정말 극단적인 판단이다. 물론 극단적인 이 시나리오의 현실화 가능성도 문제지만 더 문제인 것은 대안을 찾지 못해서 극단적인 ‘외적 충격’을 말하는 이 활동가의 극단적인 비관주의다.
물론 이런 극단주의가 아닐지라도 현재 ‘외적 충격론’은 이미 실행 중에 있다. ‘노동운동 이대로는 안된다’며 공격을 퍼붓고 ‘대공장 고임금론’을 들먹이고 ‘대공장의 임금을 깎아서 비정규직에게 주자’는 식의 공격들이 그것이다.
마. 제로섬게임으로서 노동운동 ‘내부권력경쟁’의 격화
미래가 불투명한 조합원들이 실리를 중심으로 모인다면 활동가들은 무엇을 중심으로 모이는가? 현재의 일반적인 답은 ‘노조권력’을 중심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운동의 미래를 향한 전략적 대안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남은 것은 계파간의 치열한 노조권력 경쟁이다. 2004년 민주노총의 선거도 과거의 어떤 선거보다 파벌을 분명히 하는 선거로 진행되었다. 여기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정치영역에서의 권력경쟁의 장이 새로 열려 권력게임은 더 확장되고 있다.
문제는 권력경쟁을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이 경쟁이 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을 퇴보시키는 제로섬 게임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각 종의 선거에서 대공장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앞다투어 대공장 모시기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담합적 노사관계’의 경향이 강화되는 대공장노조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기보다는 오히려 득표를 위하여 ‘대공장노조 모시기’ 경쟁은 대공장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이를 용인함으로서 나쁜 경향을 확대하고 있다.
매우 예민한 문제이지만 박일수 열사투쟁과정에서 현대중공업노조의 징계문제와 기아차의 해외연수관련 문서위조를 둘러싼 처리과정에서도 이런 위험한 경향들이 증대되고 있다.
조직간의 노조권력을 둘러싼 경쟁은 노동운동에 대한 이렇다할 지도노선과 주체를 세우지 못하는 낡은 계파들의 소멸을 예고하는 최후의 모습으로 평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가가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낡은 정파를 넘어서는 새로운 지도노선과 대안세력이 출현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정파라고 하더라도 현재 노동운동의 상황에서 모두 발가벗고 서 있다는 것이다.
3. 작업장혁신을 위하여
가. 그림자현상과 작업장 혁신
왜 작업장 혁신을 제기하는 것인가?
단순하게 말한다면 계급해체와 계급내의 계층화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노동운동의 발상의 전환을 위한 출발점으로서 작업장 혁신을 제기한다.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는 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이다. 정규직 노조의 이권화와 주변부 노동자로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의 투쟁이 분리되어 있고 이 현상에 기초하여 자본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분할통치를 한다.
좀더 좁혀보면 정규직 대공장과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의 격차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산업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한 산업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더 좁힌다면 정규직 내부의 불평등 구조 또한 매우 심각하다. 가장 손쉽게 확인되는 것은 수당을 둘러싸고 힘든 작업과 쉬운 작업자 사이에 불평등에 대한 불만들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평등의 원리에 기초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공장간에도 물량을 둘러싼 경쟁들이 발생한다. 정규직 작업장내에서의 불만들의 처리는 일정한 원리에 근거하여 해결되기보다는 ‘목소리 큰 현장조직이나 활동가의 편의 봐주기 차원에서 해결된다’는 지적마저 일고 있다.
우리는 이런 일련의 상황을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 광원(빛) 앞에 물체를 두고 비추면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림자가 커지는 현상에 비교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가족관계에서의 가부장성, 정규직내의 위계적 사고방식, 대공장과 중소사업장의 격차,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불평등이라는 점점 커지는 간극을 발견한 다.
물론 모든 문제를 다 작업장 내의 문제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 작업장 혁신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정치세력화나 계급운동을 말하는 것은 관념적 당위로 그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임금따먹기, 실리주의적 사고방식들을 낳은 작업장의 기반들을 근본적으로 해체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 작업장에 대한 도구주의적 사고들
우선 작업장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특히 작업장에 대하여 기존의 입장들은 도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첫째, 자본의 입장에서 본 작업장은 이윤창출의 수단에 불과하다.
따라서 핵심적인 개념은 ‘생산성’이다. 산업안전 등은 보조적 개념에 불과하다. 자본이 시행하는 모든 작업장운동의 핵심은 생산성향상을 위한 노력이며 이를 위하여 노동자들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관리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둘째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도 도구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뿌리박혀 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장은 ‘돈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는 곳’에 불과하다. 이런 의식 속에서 이중적인 모습이 생겨난다. 즉 한편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인 잔업특근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쉬고싶은 욕망으로부터 나오는 작업장 기피현상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노동시간단축’이라는 요구와 ‘자발적 특근의 증대요구’라는 모순된 현실에서 노동조합과 활동가들에게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현대차의 경우 잔업특근 없는 ‘수요가정의 날’을 실시하고 특근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강제하려 하지만 조합원들의 반발로 인하여 잔업특근을 인정한다. 이 문제를 과연 노동시간의 단축이라는 당위로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이미 그런 접근은 해결의 실마리가 아니라 오히려 딜레마를 더 가중 시켜 왔다는 점이 증명되고 있다.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미래가 불투명한 조건에서는 ‘한푼이라도 더 벌기 위한 잔업특근의 증가요구’가 급증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적인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활동가들이 잔업특근을 하는 것은 문제다” “잔업특근에 합의해 주는 대의원들은 맛이 간 놈들이다” 는 평가는 대책 없는 당위에 불과하며 현실은 이 당위를 완전히 뒤덮어 버리고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에 기초하여 전략적인 계획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대책은 없다. 당위를 주장하면 오히려 조합원들로부터 배척 당할 것이며 조합원들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더 자발적 노동력 동원을 통해 자본에 속박 당하게 된다.
세 번째는 운동적 도구주의다.
노동운동의 관점에서 본다면 작업장은 조직력이 만들어지는 원천이다. 수많은 현장활동가들이 ‘현장조직력 강화’를 외치고 심지어는 ‘현장권력쟁취’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러나 무엇이 현장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현장의 조직력을 약화시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 속에서 대안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현장을 ‘운동이라는 목적’에 근거하여 수단으로 보는 경향들이 많다. 많은 현장활동가들이 기술적으로 혹은 정치적인 측면에서 현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이다. 노조집행부나 대의원에 당선되기 위하여 현장활동을 하는 순간, 작업장 자체에 대한 전략적인 접근은 사라지고 기술적으로 현장조합원을 만나서 조직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열심히 조합원의 경조사에 쫓아다니고 술자리를 통해 인간관계를 관리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현장은 점점 활동가와 간부들에 의하여 도구화되고 그럴수록 조합원들은 간부들과 괴리되고 왜곡된 활동가와 조합원의 관계가 만연해 진 결과 대리주의적인 정치가 정착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모든 도구주의적 관점에 대하여 철저히 비판 극복함으로서 작업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다. 새로운 개념으로서 작업장
그렇다면 작업장에 대하여 새롭게 정리되어야 할 관점은 무엇인가?
첫째로는 작업장을 ‘노동자 생애의 가장 중요한 터전’으로 보아야 한다.
작업장을 협소한 경제활동의 공간, 즉 단순한 노동과정으로서 보는 것을 벗어 던져야 한다. 통상적으로 노동자들의 전 생애를 통틀어 볼 때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 작업장이다. 1년 8,760시간 중 2002년을 기준으로 볼 때에 현대차의 노동자들은 순 노동시간이 2,700시간이 넘는다. 여기에 순 작업시간을 제외한 작업 준비 및 휴게시간을 포함한다면 3,000시간 이상을 공장에서 보내는 것으로 추산된다. 인생의 1/3이상을 공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잠자는 시간을 하루 평균 7시간으로 잡을 경우 년 2,555시간을 자는 셈이다. 실제 활동하는 시간은 6,205시간이고 이중에 3,000시간 이상을 작업장에서 보내는 셈이니 취업 전과 취업 후를 제외한 인생의 절반이상을 작업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단순히 시간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가장 자주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를 맺어 가는 곳 또한 작업장이다. 혈연과 지연 같은 주어진 인간관계와 학연과 같은 과거의 인간관계의 경우 성장기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는 인간관계이지만 실제 그 만남의 빈도 수 등을 고려할 때에 작업장에서 맺는 인간관계와 비교도 안되는 비중이다.
여기서 맺는 인간관계란 단순한 인적 접촉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얻는 정보, 형성되는 정서, 가치관 등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이 작업장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업장에서 불만족스럽다는 것은 곧 인생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업장은 곧 노동자 인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둘째로는 작업장은 노동계급의 자기훈련과 재생산의 핵심적 공간이다.
일단은 인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작업장은 그 어떤 공간보다도 노동계급의 의식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의식을 갖기 위해서는 작업장에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응력을 갖춰야 한다.
‘주면 주는 데로 시키면 시키는 데로’ 하는 작업장에서 인생을 보내는 노동자들은 결코 세계의 주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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