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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인가, 의도적인 회피인가?- 노동자의힘은 사노련의 제안을 왜곡하지 말고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발제문에서 노힘은 사노련과 해방연대한테 노힘이 09년 초로 일정을 박아 놓은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추진위(이하 사노당 추진위)’ 건설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사노당 추진위 건설로 “총결집”하면,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이 당 건설의 주체로 결합하는 동력이 대폭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그렇게 “결집”하는 것이 대중적 결집이 될 수 없다고 이미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식의 경로와 일정은 설사 “결집”한다 하더라도 앙상하게 정치조직 간의 통합으로 끝날 뿐,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이 당 건설에 주체로 대거 결합하는 경로와 일정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발제문에는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이 당 건설의 주체로 결합하는 동력이 대폭 강화될 것”이라는 추측과 기대만 있지, 어떤 근거나 조직화 계획도 제시되고 있지 않다.
한편 현장의 선진활동가들을 당 건설로 결집시키기 위해 사노련이 제안한 조직화 계획에 대해서는 답변을 회피한 채 왜곡된 대립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노련은 발제문에서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공론화하고 대중적 검증을 거치기 위한 방안으로,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회주의운동으로 현장을 재조직하기 위한 방안으로 ① 당 건설운동 전면화를 위한 일련의 전국토론회 개최, ② 무소속 활동가들을 두루 포괄하는 사회주의자 공투전선 형성”을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국토론회 준비 및 조직화 사업과 공동투쟁 결의를 집행하기 위해 기존 3개 정치조직 회원 이외에 200명 이상 무소속 활동가들의 참가 기명을 조직하고, 이를 바탕으로 <(가칭)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 전면화를 위한 전국토론회 조직위원회>[무소속 활동가들 포함]를 구성할 것도 함께 제안했다.
노힘은 사노련의 이러한 당 건설 주체역량 결집 방안에 대해서 가타부타 언급이 없다. 그러면서도 사노련의 제안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는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답변을 대신하고 있다.
“우리는 사회주의운동 및 당건설의 필요성에 대해 선진활동가들 사이의 공론화를 위해, 현시기 계급투쟁의 진전을 위해서, 사회주의 정치세력들 간의 다양한 공동활동, 공동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함. 그러나 이러한 사안별/부분별로 진행되는 공동활동/공동투쟁을 통해서는 짧은 시기 안에 주체역량상의 토대가 획기적으로 강화되거나, 각 조직의 입장의 공론화를 통한 검증이 선진활동가들이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나서는 일대전환의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하지 않음.”
사노련이 공론화/검증 방안이자 동시에 주체역량 강화 방안으로 제안한 내용이 기껏 “사안별/부분별로 진행되는 공동활동/공동투쟁”이란 말인가? 단순한 오해인가 의도적인 회피인가?
나아가 노힘은 당 건설운동 전면화 방안을 둘러싼 사노련 대 노힘의 차이라면서, “선 강령토론 및 합의 이후 당 건설운동의 본격화”냐, 아니면 “당 건설운동의 구체적 일정 속에서 이를 이뤄내는가”냐 라는 대립구도를 설정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사노련은 전국토론회 발제문에서 직접적인 제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두 조직이 사전에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발제문을 미리부터 공개 제출했다. 발제문을 본 동지들이라면 누구라도 모를 수가 없는 것이, 각 조직의 당 건설 계획을 비롯하여 당 강령 ․ 전술 ․ 조직노선과 함께 남한 운동의 핵심쟁점들을 놓고 일련의 전국토론회를 무소속 활동가들과 함께 공동으로 조직하여 선진노동자들과 대중들 사이에서 공론화하고 검증을 거쳐 대중적 결집을 이뤄내자고 제안하고 있다.
이것이 “당 건설운동의 본격화”를 강령 합의 후로 미루는 것인가? 두루 알다시피, 사노련은 정치조직들 간에만으로 강령 토론 및 합의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정치조직들 만의 토론 및 합의로는 무소속 활동가들을 대거 규합하지 못하며, 당 건설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아 무소속 선진노동자들이 대거 주체로 결합하는 일련의 전국토론회 조직을 제안하고 있다. 전투적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당 건설을 공론화하고 대중적 검증을 거치며 이와 동시에 사회주의운동으로 현장을 재조직하자는 제안이다. 이것이 “당 건설운동의 본격화”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것이 먼저 조직들 간에 강령 합의하고 난 다음에 당 건설운동 본격화하자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가? 이것도 단순히 오독인가, 의도적인 회피인가?
또한 당 건설운동의 본격화를 강령 토론 및 합의 과정과 기계적으로 대치시키는 발상법은 대단히 위험하다. 무소속 전투파 선진노동자들이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한 가장 직선적인 수단은 사회주의 강령 ․ 전술 ․ 조직노선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토론을 본격화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강령 ․ 전술 논의’를 매개하지 않고서 어떻게 선진노동자들이 조합주의를 딛고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나아가도록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어떻게 그들이 당 건설운동의 정치적 주인공으로 우뚝 서도록 할 수 있단 말인가?
현장의 광범위한 선진활동가들을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으로 조직하는 않는 한, 써클들 사이의 통합 논의는 진짜 당 건설운동을 결코 만들어낼 수 없다. 선진활동가들을 대상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 방법은 각 조직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당의 강령 ․ 전술 ․ 조직노선을 제출하고, 이것을 선진노동자들 속에서 공론화시키는 것이다. 이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선진노동자들이 각 조직들의 입장을 ‘검열’/검증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낼 것이고, 이것은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의 정치적 방향타를 세워내는 데 일익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데 노힘은 이러한 강령 논의를 부차화 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강령 논의를 당 건설운동에 대립시키는, 왜곡된 구도로 몰아가고 있다. 이는 선진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정치의 주체로 나서도록 하는 과정을 회피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각 조직의 정치적 입장을 검열 받는 과정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검열과 주체화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이 어떻게 소수 사회주의 정파들의 좁은 틀을 뛰어넘어 선진노동자들의 운동으로까지 확장 전화할 수 있겠는가.
자. 그렇다면 노힘이 이 방안 말고 어떤 다른 내용의 “당 건설운동 본격화” 방안을 제시하고는 있는 것인가? 노힘 말대로 “당 건설운동의 구체적 일정 속에서” 과연 당 건설운동 본격화를 이뤄내기 위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노힘이 말하는 “구체적 일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107명이 모여 10월 11일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 출범대회를 치루었”고, 거기서 사노당 추진위를 09년 초에 건설할 것을 결의하였다는 것! 그래서 이 결의에 사노련과 해방연대도 함께 하자는 것, 그것 말고 “당 건설운동 본격화”를 이뤄내기 위한 다른 내용은 없다. 여기에 “구체적”인 게 무엇인가? 09년 초라는 달력상의 날짜와 추진위라는 앙상한 조직형식에 대한 제안이 “구체적”인 것인가? 날짜 박기와 조직형식 가지고서는 이 엄중한 운동정세 속에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으로는 아무도 당 건설을 설득할 수 없다.
노힘이 결의한 “사노당 추진위” 건설에 사노련과 해방연대도 “결집”하라는 그 ‘제안’에는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당 건설 계획을 공론화하고 대중적 검증을 거치고 무소속 활동가들을 대거 사회주의운동으로 조직하기 위한, 그래서 실제로 당 건설운동을 본격화할 수 있는 어떤 계획도 없다. “결집”하면 다 된다는 공허한 언사 말고는 말이다. 이런 식의 “당 건설운동 본격화”는 선진노동자들, 무소속 현장활동가들을 사회주의 당운동으로 결집시키는 당 건설 계획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무조건 실패하는 당 건설이 될 수밖에 없다. 노힘이 “사노당 추진위”라는 조직형식을 선점했다는 것 말고는 실제 당 건설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노힘은 진정 선진노동자들/전투적 현장활동가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면화할 계획이 있는가? 아니, 과연 의지라도 있는가? 전투적 조합운동을 넘어 현장을 당 운동으로 재조직할 의지가 있는가? 현 시기 엄중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한 당 건설의 절박함과 그에 반해 가라앉아 있는 주체 상태 ․ 주체 역량 간의 현격한 괴리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직접적인 조직화 계획 없이는 어떤 당 건설 계획도 자족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사노련의 제안에 대해 왜곡된 대립구도를 설정하고 있는 노힘의 추진위 건설 동참 제안이 정확히 그렇다. 그것은 명백히 실패하는 길이다. 그리고 당 건설에 대한 환멸만을 남기는 길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당 건설 세력 모두에게 타격을 입힐 것이다. 우리는 그 길을 막을 권리가 있다.
우리는 노힘이 사노련의 제안을 회피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하기를 기대한다.
1. 노동운동의 발전, ‘위기-노선 논쟁’을 동반
1) 계급투쟁 - 경제투쟁, 정치투쟁, 이데올로기투쟁의 총체.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고 영향.
- 노선 논쟁은 이전의 투쟁과 활동의 성과를 총괄하고 이후의 노동자투쟁의 방향과 전망을 구체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투쟁의 한 형태임.
사회주의운동 전면화를 위한 계기를 놓치지 말아야
사회주의자와 선진 노동자의 열망을 보여준 공동토론회
10월 18일 전교조 서울본부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자연합과 노동해방실천연대, 노동자의힘 등 3개 사회주의 정치조직의 공동 주최로, 사회주의 대중화, 사회주의운동 전면화, 새로운 노동자 당 건설을 내걸고 ‘사회주의 운동과 당 건설을 위한 전국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전국의 사회주의자들과 선진노동자들의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토론장에는 3개 정치조직 회원들을 비롯해서2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서 열심히 토론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공동토론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 동안 3개 조직 상호간의 몇 가지 의견 차이와 신뢰의 부족으로 공동 토론회가 열리지 않았으므로, 처음으로 3조직 합의로 토론회가 열린 사실 자체가 토론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물론 참여하지 않았을지라도 전국 사회주의자와 선진노동자들의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토론회가 3개 사회주의 정치조직이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건설을 위해서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할 계기로 될 것을 전국의 수많은 사회주의자들과 선진 노동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토론회가 토론회를 주최한 3개 조직이 공동의 틀거리를 구성해서 공동사업, 공동투쟁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전국 사회주의자들과 선진 노동자들의 열망과 기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로 토론회의 한 부분의 대립과 격돌의 장면에 사로잡히거나 특정 지점에 집착하지 말고 이 토론회의 전체 내용을 차분히 분석하고 정리해서 함께 공통으로 출발할 지점을 찾아보고, 가능하다면 대범하고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없는가도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토론내용 분석과 공통적 지반의 검토
이 토론회에서는 유기혁열사투쟁방기에 대한 문제를 둘러싸고 격론이 있었지만, 그 이외에 문제를 제출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였으나 광범위한 영역에서 공통적인 내용을 갖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우선 현 시기 사회주의운동을 전면화하고,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로 나서야 한다는 것,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조직의 역량으로서는 불가능하고 3조직을 포함해서 전국의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 모두 모이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선진 노동자들을 광범위하게 결집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공동사업을 위한 각 조직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동해방실천연대(해방연대)는 공동투쟁과 당 건설작업에 필요한 강령논의를 위해서 공동이론지 발간을 제안하고 있다. 노동자의 힘은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준비모임)’에 모두 함께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 서로 협의해서 함께 동의하는 다른 조직형태로 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 진영의 공동투쟁조직 역시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회주의노동자 연대(사노련)은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건설을 위한 전국 토론회 조직위원회(조직위원회)’구성을 제안하고 이 조직위원회는 공동투쟁 역시 담당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3조직이 공통된 것은 1)사회주의 세력의 공동투쟁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조직적 틀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공동투쟁의 핵심축은 공공부문 사유화저지-공공화 또는 사회화투쟁과 비정규직철폐투쟁이다. 2)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을 위한 준비작업을 추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①강령과 전략 전술을 수립키 위한 공동연구와 토론이 필요하고, ②전국적 대중토론을 전개해야 한다. 지역, 산업 업종 노조와 현장조직 부문을 막론하고 전면적이고 공개적인 대중토론으로 한다. 3)공동투쟁과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을 위한 사업을 추진키 위해서 공동의 틀거리(조직)를 구성해야 한다. 공동투쟁과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건설 작업을 위한 조직은 통일성이 담보되어야 한다.(하나의 조직 또는 하나의 조직과 이 산하 조직 또는 긴밀히 결합된 형태의 조직)
이 논의에서 중심축인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을 위한 조직의 위상과 형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검토해보자. 해방연대는 공동이론지 발간을 제외하고 구체적 조직형태를 제출하고 있지 않으므로, 사노련과 노동자의 힘이 제안하는 조직위상과 형태를 비교 검토해 보자.
사노련은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을 위한 전국토론회 조직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하는 데 이 조직위원회에는 3조직 구성원과 그 외 사회주의자, 선진노동자가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다. 3조직 구성원 외에 200명정도의 인원을 구성원으로 제안하고 있으므로, 대규모(상당규모) 회원조직을 말하고 있다. 준비모임이나 추진위원회 등 당 조직 건설단계를 구체화하고 있지 않으나 전국적 대중토론과 강령 논의 등 전 단계 작업을 거쳐서 당 건설 단계로 들어서는 것으로 설정되고 있는 것 같다.
노동자의힘은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을 구성하거나 이와 유사한 위상과 형태의 당 건설 준비조직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이 준비모임의 역할을 보면 강령과 전략 연구 토론,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 토대 마련 등 사실상 사노련이 조직위원회가 수행할 역할로 설정하는 사업내용과 차이가 없다. 준비모임 자체가 강령과 전략을 연구토론해서 마련해가고, 전국적 토론을 통해서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를 지향하거나, 사회주의에 동의하는) 선진노동자들을 결집해서 당 건설추진위원회를 구성할 사람들을 결집하는 과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다만 준비모임은 사노련이 제안하는 조직위원회보다 당을 준비하는 조직적 위상을 분명히 하고 있는 데서 서로 차이가 있으나, 준비모임 역시 그대로(연속성을 가지고) 당 건설 다음 단계인 추진위원회로 바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추진위원회는 한 단계 더 발전된 조직체요, 그 구성원 역시 새롭게 조직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노동자의힘의 준비모임과 사노련의 조직위원회와의 차이는 크게 좁혀진다.
어떻게 출발할 것인가?
1)가장 초보적인 것으로는 공동투쟁과 전국토론회, 강령연구를 위한 3조직 (한시적인) 대표자모임을 구성해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다. 필요한 공동사업 추진을 위해서 실무 또는 집행을 위한 대책팀 또는 대책위원회를 산하에 둔다.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사회주의 당 건설, 사회주의 진영(세력)의 공동투쟁이라는 사업의 중대성에 비추어서, 이런 형태의 모임은 우스꽝스런 것이고 굳이 만들 필요가 없다.
2)각 조직에서 일정한 수(이를테면 5-10명)의 대표를 선정해서 공동의 위원회를 구성하고 이 위원회가 사업의 결정과 집행을 맡는 방안이다. 3조직 이외에 +@를 참여시킬 수 있다. 일정수의 대표를 파견해서 사업의 결정과 집행을 맡기면 나름의 의결, 집행구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의 한계는 각 조직에서 파견하는 숫자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파견자는 원래 조직의 결정을 가지고 와서 이를 대변하게 되는 점에 있다. 각 조직의 독자성은 당연히 유지되고 그 각 사업과 각 사업추진 각 단계에서 각 조직의 의견을 가지고 와서 합의 또는 타협으로 결정함으로써 그 추진력과 통합성 및 사업추진의 효율성은 대단히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다.
3)다수의 개인 자격으로 구성된 조직을 별도로 만들어서 이 조직이 사업을 추진토록 하는 것이다. 물론 3조직 구성원과 3조직에 속하지 않은 개인들(사회주의자, 선진노동자)로 구성된다. 현재 준비모임이 100여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나머지 두 조직에서 100명씩과 기타 100여명이면 400여명이 된다. 조직위원회는 3조직 이외에 기타 200명을 추가하는 것으로 제안하고 있으므로 역시 400-500명은 될 것이다. 여기서 회원 숫자는 크게 중요치 않을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냐, 사회주의 지향이 분명하고 노동자의식과 책임감이 명확한 선진 노동자이냐, 그리하여조직활동의 실천력이 명확히 담보되느냐가 선정 기준이 될 것이다.
10월 18일 공동토론회에서 제안되었듯이 이를테면 ‘사회주의운동 전면화와 당 건설, 공동투쟁을 위한 노동자연대’를 조직해서 이를 주체로 해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위상과 형태를 갖는 조직체가 구성된다면 사회주의운동과 당 건설, 공동투쟁은 획기적인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3개 정치조직은 각기 그대로 존재하나 서서히 새로 구성된 조직으로 역량을 싣고 집중되어갈 것이다.
노동자의 힘이 중요한 동력이 된 준비모임이 이러한 조직형태로 구성되어서 당건설을 위한 조직화사업, 강령 전략 수립사업, 공동투쟁사업을 추진해 나가고 있고, 사노련 역시 이러한 역할을 담당할 같은 형태의 조직건설을 제안하고 있으므로 서로 진지한 논의를 거쳐서 합의해내지 못할 것이 없다고 본다. 해방연대 역시 기본적으로 추진할 사업 내용에서 동의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출발에 합의하지 못하겠는가? 아직 여러 가지 조건이 조성되지 않고 상호 이해와 신뢰, 공동사업 바탕이 마련되지 않아서 어렵다면 수위를 낮출 수밖에는 없을 것이나, 전국 사회주의자와 선진노동자의 열정은 불러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유기혁열사 투쟁 방기문제
10월 18일 토론과 그동안의 논의과정을 살펴보면 해방연대가 노동자의힘과 함께 사회주의 노동자정당 건설을 추진해나가는 데 있어서 주요한 장애는 유기혁열사투쟁 방기에 대한 책임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여기서 명확한 방안을 제시할만한 입장에 있지 않다. 다만 이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는 ‘미래의 전망을 열기 위해서 과거를 올바르게 정리하고 혁신해 나간다’는 관점에서 해결지점을 찾아 나갈 것을 바라는 마음이다.
유기혁열사투쟁방기문제는 그 자체로서 당시 비정규직투쟁과 노동운동 전반에 중대한 타격을 준 과오임은 분명하지만, 전반적 노동운동 특히 대공장 노동운동의 패배주의 관료주의 실리적 조합주의문제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해결해 나갈 것인가 는 계속 반성과 고민 실천의 과정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노동자의힘 내부논의와 실천속에서 나름대로 문제해결방안을 찾고, 3단체 공동의 토론, 또 서로의 끊임없는 비판과 토론과정에서 공론화해서 해결방안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준비모임은 형식적으로 노동자의힘과 다른 실체이다. 내용적으로 노동자의힘 출신이 절반이고 노동자의힘이 준비모임 조직화와 운영, 사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 왔을 것으로 보이지만 노동자의힘의 유기혁열사처리의 미흡함이나 과오(판단)를 이유로 준비모임을 공동사업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것은 과도하고 적절치 않을 것이다. 준비모임의 구성과 운영 및 사업을 두고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을 위해서 3조직 구성원이나 그 외에 개인들이 함께 새로운 조직을 구성하고 운영방안을 세워나간다면 이 과정에서 함께 올바른 원칙이 실현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의힘과 선 결합역량이 사회주의 실천을 본격화하고 확장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로서 준비모임을 출발시킨 것을 모두 이해하고 환영해야 할 것이다.
글을 맺으며
3조직 공동토론을 통해서 3조직이 논란을 격화시키고 더 멀어졌다는 불만도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차이보다도 공통된 지반이 대단히 넓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내용적으로 보면 포괄적으로 공통된 지반을 갖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토론회에 모인 사람들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운동의 전국적 전 계급적 통일을 위한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계기가 마련된다면 비로소 사회주의운동을 공공연하게 전면화하고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다. 전국 각 지역과 산업, 노조와 현장조직 수준에 이르기까지 선진노동자들의 광범위한 토론과 실천을 조직해내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을 전면적으로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 실천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계기를 살려서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황과 노동자 투쟁
1. 공황
1) 공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 공황은 투자금융 부문에서 시작되지만 금융공황과 산업공황이 동시적/복합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 진정한 경제공황.
- 공황은 미국에서 시작되지만 선진자본주의 나라들과 이른바 신흥시장에서 동시적/상호적 으로 진행될 것이다 : 명실상부한 세계공황.
- 공황은 1930년대의 대공황에 근접하는 강도를 가지고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보 다 파급의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 전례 없는 대공황.
2) 공황의 원인은 무엇인가?
- 직접적으로는(immediately), 부동산(주택) 투기 거품과 금융(파생금융상품) 투기 거품이 융합되어 진행되던 가공자본의 축적과정이 한계점에 이르러 폭발함으로써 일어났다.
- 조금 크게 보면, 중앙은행이 낮은 이자율로 대출을 부추겨 거품 투자를 조장한 것과 부시 행정부가 직접 나서서 ‘소유자 사회’ 운운하며 ‘내집 갖기 운동’을 벌여 거품 소비를 조장한 것이 그 원인이다. (정책실패)
- 조금 길게 보면, 레이건, 대처 이래 자본주의 경제의 축적 패러다임을 신자유주의로 전환하여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을 심화시킨 것이 그 원인이다. 과잉축적과 과잉생산으로 인해 유휴 자본이 생산적인 즉 잉여가치를 낳는 투자기회를 갖지 못하자 투기에서 허구적으로 증식하다가 폭발한 것이다. (축적 패러다임의 실패)
- 1970년대 이래의 장기 추세적인 이윤율 저하 경향 속에서 신자유주의 착취 강화에 의한 소비기반의 파괴와 과잉축적, 그것을 타개하고자 한 거품 투자와 거품 소비 조장, 그것에 의한 부동산 및 금융 투기의 동시 진행, 그 거품의 폭발과 시스템의 붕괴로 요약할 수 있다.
3) 공황 ‘이후’는 어떻게 전망되는가?
- 일본이 14년째 겪고 있는 바와 유사하게 장기복합불황으로 지속될 것이다. 이른바 L자형 이다. 1930년대만큼 공황의 골이 깊지 않더라도 자산 디플레이션과 부채 누적 때문에 성장엔진의 재가동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윤율을 회복하여 성장엔진을 재가동 하기 위해 착취도를 높이려는 압박이 비상한 강도로 추구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줄어드 는 구매력은 군비지출 및 해외판매로써 대체하고자 할 것이다. 즉 군국주의화와 권위주의 화!
-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상호간 국제공조가 이루어지겠지만 경제패권을 둘러싸고 대립의 격 화가 나타날 것이다. 달러를 기축통화로 정한 브레튼우즈 체제에 대한 손질이 불가피하겠 지만 다극화된 국제통화체제보다는 달러/유로 공동 기축통화 체제(대서양동맹)로 갈 가능 성이 많다. 더불어 상품, 자본, 노동, 자원 등을 둘러싼 시장쟁탈전도 갈수록 치열해질 것 이다.
- 이에 따라 제국주의 상호간 대립이 정치·군사적으로도 격화될 것이다. 이는 과거의 경험 이 보여주듯이 블록 간 대결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기득권을 가진 선진자본주의 강대 국 블럭(미국, EU 및 일본)과 후발 자본주의 강대국 블럭(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이념 대 결의 성격은 거의 없고 패권쟁탈전의 성격을 가지는 냉전(그러나 열전의 가능성도 내포하 는)이 벌어질 것이다.
- 이 패권쟁탈전은 자원확보를 둘러싸고 중동에서 전개되는 테러와의 전쟁 차원을 훨씬 능 가하여 ‘상하이협력기구’ 나라들을 식민지로 확보하기 위한 쟁탈전과 중남미 사회주의 지 향 나라들에 대한 탈사회주의/식민지 지배권 유지를 위한 쟁탈전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 요컨대 생산력 발전과 세계시장 형성의 경향은 그 역의 경향에 의해 저지될 것이다. 자본 그 자체가 생산력 발전과 세계시장 형성에 대한 장벽으로 나타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장벽은 자본 그것이다. 즉 자본과 자본의 자기증식이 생산의 출발점이자 종점, 동기이자 목적으로 나타난다는 점, 생산은 오직 자본을 위한 생산에 불과하며, 따라서 생산수단이 생산자들의 사회를 위해 생활과정을 끊임없이 확대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정한 장벽이 있다. 생산자대중의 수탈과 빈곤화에 의거하는 자본가치의 유지와 증식은 이러한 장벽들 안에서만 운동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장벽들은 자본이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생산방법들[생산의 무제한적 증가, 생산을 위한 생산, 노동의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로 향하여 돌진하는 생산방법]과 끊임없이 모순된다. 수단 - 사회적 생산력들의 무조건적인 발달 - 이 제한된 목적 [기존자본의 가치증식]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물질적 생산력을 발달시키고 이 생산력에 적합한 세계시장을 창조하기 위한 역사적 수단이라고 한다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또한 자기의 역사적 과업과 자기의 생산관계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다.”(자본론 3권(상) p.300)
“노동자의 착취수단으로서 어느 일정한 이윤율로 기능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노동수단과 생활수단이 주기적으로 생산된다. 상품의 가치와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잉여가치가 자본주의적 생사네 특유한 분배조건과 소비관계 아래에서 실현되어 새로운 자본으로 재전환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상품들이 생산된다. 즉 이 과정을 반복되는 폭발 없이 완수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상품들이 생산된다. 너무나 많은 부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적대적인 형태의 부가 주기적으로 너무나 많이 생산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장벽들은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1) 노동생산성의 발달은 하나의 법칙으로서 이윤율의 저하를 내포하는데, 이 이윤율의 저하는 어느 일정한 시점에서 생산성의 발달 그 자체에 매우 적대적으로 대항하며 따라서 공황에 의하여 끊임없이 극복되어야만 한다. (2) 생산의 확장 또는 축소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과 사회적 필요[사회적으로 발달한 인간의 욕구] 사이의 비율이 아니라, 불불노동의 취득과, 이 불불노동과 대상화된 노동 일반 사이의 비율 - 이것을 자본주의적으로 표현하면, 이윤[의 취득]과, 이 이윤과 자본투자액 사이의 비율(즉 어떤 일정한 이윤율) - 이다. 따라서 사회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주 부족한 수준의 확장에서 이미 생산에 대한 장벽들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생산은 사회적 필요가 충족되는 수준에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이윤의 생산과 실현이 명령하는 수준에서 중단된다.”(자본론 3권 (상) p.310)
2. 노동자 투쟁의 방향
1) 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의 이념의 혁신이 그 출발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공황은 신자유주의에 의해 매우 강도가 높은 것으로 되었지만, 사실 공황은 자본주의에 항상적인 것이다. 주기적으로 공황이 발생하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이다. 그리고 공황은 생산력의 발전을 멈추게 할 뿐 아니라 존재하는 생산력조차 사용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사회적 필요의 충족을 어렵게 하고 근로대중을 실업과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하게 한다. 그리하여 공황 국면에 이르러 보면 자본주의가 분배를 심히 불평등하게 만드는 체제일 뿐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가 생산에 대한 장벽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노동의 소외의 측면은 차치하더라도 생산력의 면에서도 분배의 면에서도 부정적인 양식임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모든 패배주의를 떨치고, 모든 개량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타파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을 목표로 하는 변혁적 노동운동으로 자신을 혁신해야 한다. 그 목표가 부분적인 사회주의든 전면적인 사회주의든 그 지향하는 바가 자본주의의 구제나 수정에 제한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한 노동운동은 노동자대중을 대표하고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할 수 없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질곡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 이 부정의 부정은 사적 소유를 부활시키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시대의 성과 - 협업 및 토지와 생산수단[노동 그것에 의하여 생산된 것]의 공동점유 -에 입각한 개인적 소유(사적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개인의 소유 : 필자)를 확립한다. 물론, 개인들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분산된 사적 소유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로 전환되는 것은, 사실상 이미 사회적 생산과정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적 사적소유가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다. 전자의 경우는 소수의 횡령자가 국민대중을 수탈하는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국민대중이 소수의 횡령자를 수탈하는 것이다.” (자본론 1권 (하) pp.959~960)
2) 반제국주의와 ‘노동자 국제주의’로 전략을 재정립해야 한다.
이번 공황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global)으로 긴밀하게 통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와 그들에 의해 지배되는 식민지적 자본주의로 비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제국주의 안에서도 패권과 비패권으로 위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조건 하에서 그리고 불황이 지속됨에 따라 제국주의와 식민지, 패권적 제국주의와 비패권적 제국주의 상호간에 모순이 격화되어 갈 것을 전망할 때,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변혁은 제국주의를 타파 또는 후퇴시키는 과정과 긴밀하게 결부시켜 추구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특히 패권적 제국주의 세력의 타파 또는 후퇴는 기존 질서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오며 그런 변동 속에서 사회주의 변혁은 더욱 현실적이 될 것이다.
이처럼 변혁의 주된 대상이 제국주의가 되어야 한다면 주된 동력은 세계 노동자계급의 국제연합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날에도 그러했겠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라는 현실 속에서는 더더욱 일국적 사회주의 건설을 운동의 목표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략은 해당 나라의 노동대중에게 너무나 큰 고난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범위에서의 노동자계급의 국제연합을 이루고자 하는 노동자 국제주의가 노동운동의 전략적 원칙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동맹은 여전히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3) 조직과 투쟁에 관련된 모든 기존의 것들을 수술대에 올릴 각오를 해야 한다.
첫째 노동조합운동에 있어서 독점대사업장 정규직 노동자 중심의 실리추구적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계급적/변혁적 노동조합운동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이것은 기업별 노조의 산업·업종별 결속 강화를 의미하는 산별전환 노선과 단절을 의미한다. 대안은 지역산별노조이다. (이 노조는 교섭 중심에서 조직화와 저항적 투쟁 중심으로 활동의 중심이 바뀌어야 한다.즉 조직화 전략의 추구이다.) 이를 세포로 하는 지역적, 산업적 그리고 전 계급적 총연합으로, 밑에서 위로 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으로써 관료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한편 노동조합 안에서의 단결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부르주아적 원칙과 더불어 공동체주의(물론 사회주의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는!) 원칙을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즉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야 한다. 이런 원칙들의 결합에 입각하여 요구들이 만들어져야 하며, 공황 정세 하에서 비정규직 철폐와 일자리를 나누는 노동시간 단축(예컨대 하루 6시간제)이 노동조합의 중심적 요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노동조합은 노동자 정치운동이 주동적으로 제기하는 사회변혁적 의제들을 적극 받아 안아서 함께 요구하고 투쟁해야 할 것이다.
둘째 노동자 정치운동은 사회변혁적 노동자정치운동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제도/정책적 개량을 경시하지 않지만 사회변혁의 성격을 지니는 의제들을 중심으로 활동해야 한다. 가장 선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주택과 같은 기본생활의 사회주의적 보장에 관한 요구이다. 다음으로 금리생활자 계급을 안락사 시키는 과제이다. 즉 지대/배당/고금리/투기자본이득 추구자를 반사회적인 존재로 규정답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금융과 실물을 망라하여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고 사회화하는 과제이다 이런 변혁적 성격의 요구와 과제를 중심으로 투쟁해야 할 것이다. 이런 요구와 투쟁은 합법 정당의 형태로 추진될 수도 있고 반합법 전선체의 형태로 추구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둘이 결합되어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 두 경우 요구에 있어서는 같을 지라도 투쟁형태에서는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게는 선거가 후자에게는 전민항쟁이 주요 투쟁형태일 터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건 이런 사회변혁적 요구들은 현존 국가권력을 지배계급의 수중에 그대로 둔 상태에서, 즉 야당이나 재야에 머물러서는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집권이 곧 변혁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집권 없이 변혁을 꿈꾸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셋째 노동자 사회·문화운동이 개척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 대중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은 노동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활세계 또는 시민사회 속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다. 그것들은 경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대표적으로 교육과 의료에 관한 것)도 있고 비경제적인 성격을 띠는 것(예컨대 생태문제와 같이 진보적 가치에 관련된 것)도 있으며 그 두 가지 성격이 복합되어 있는 것도 있다.(예컨대 소비자보호운동) 특히 지금의 노동운동에는 사람들의 의식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 미디어, 문화 등에 대한 운동이 매우 부족하다. 민주노총 시대의 개량화된 노동운동은 이런 사회·문화적 운동을 자신의 임무로 사고하지 못한 면이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변혁지향성을 강하게 띠었던 87~91년 기간에 이런 활동들이 노동조합운동 안팎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끝으로 지금이 공황국면이라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자본가계급은 이 위기를 주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노동자계급과 노동운동이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자신들의 지배를 안정화시키는 틀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제국주의는 또 식민지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런 점이 1930년대의 공황에서와 아주 다른 점인 것 같다. 남한에서도 지배계급은 ‘서울 컨센서스’, 여야공동정부 운운하며 종언을 고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여 위기를 관리하려 부심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노동운동은 반 한나라당(또는 반 이명박) 국민전선을 내놓은 것 밖에 없다. 만약 여야공동정부가 구성되어(민주노동당이 참여하든 않든 상관없이) 장하준 식의 케인즈주의를 대안으로 함께 추진한다면 노동운동은 지배계급의 들러리가 되어 그것을 지지하거나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운동은 비록 낮은 단계의 사회주의에 불과한 한계가 있더라도 자본가계급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독립적인 사회주의 강령을 가지고 이 공황 정세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사회민주주의적인 최저강령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과 구별하여 당면 변혁강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의 원리는 사적 개인들의 연대이며 노동(능력과 노력)에 따른 분배라면, 사회주의의 원리는 사회적 개인들이 연합이며 (비록 공산주의 사회에서와 같이 완전하게는 아닐 지라도!) 필요에 따른 분배이다.
2008년 10월 18일 ksh
대공황과 혹세무민지설들
채만수
[편집자 주: 이 글은 2008년 10월 11일의 연구소 내부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을 약간 보완한 것이다.]
1. 상황 (1)
미국 공산당 계열의, 그러나 다분히 사민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한 평론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기상전문가가 아니라도 바람이 어디로 부는가는 누구나 알 수 있다”는 밥 딜런(Bob Dylan)의 1965년의 노래는 유명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경제적 위기가 닥쳐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1)
실제로 그 동안 수십 년 동안 온 세계를 종횡무애 쥐락펴락하며 호령하던 거대 금융자본들이 연이어 쓰러지고 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지금 말 그대로 패닉(panic) 상태에 빠져 있다. 그리고 연일 국내외의 부르주아 신문․방송․인터넷 등을 장식하고 있는 “폭락”․“붕괴”․“패닉”․“공포”․“대공황” 등등의 비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동안 그토록 완강하게 대공황이나 그 가능성을 과거지사로 치부하던, 소위 경제학자들을 포함한 자본의 이데올로그들 역시 모두 대공황의 공포에 떨고 있다.
공황, 그것도 대공황(의 가능성)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은, 국내의 지적 분위기와 관련해서 말하자면, 1989-90년 당시와는 가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그것이다. 그때는, 당시의 한국경제의 상황을 공황으로 규정했을 때, 예컨대 한사연(한국사회연구회․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진보적 경제학자’ 정건화(지금은 한신대 경제학 교수)나 정태인(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 지금은 진보신당의 주요 정책 이데올로그 및 성공회대 교수) 등등이, “산업구조조정 국면일 뿐”이라거나 “소공황일 뿐”이라며, “현대자본주의의 축적위기는 국가의 개입으로 공황(Crisis)으로 전개되지 않는다”(정건화의 표현 그대로)고 박박 우기고 나서도 누구 하나 그 오류를 지적하지 않던 분위기였다.2)
그런데, 이렇게 대공황(의 가능성)을 사실상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자본주의의 축적위기는 국가의 개입으로 공황(Crisis)으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국가독점자본주의 영구번영론’이 청산된 것은 아니다. 요즈음의 대부분의 논의․보도들, 그 호들갑들 역시 사실은 모양만 바꾸어 그것을 재생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과 관련하여 2008년 10월 10일 현재까지 발표된 국내의 논의 가운데 이러한 헛소리의 범주를 벗어나 있는 것은, 내가 아는 한, <참세상>에 발표된 김성구 교수의 논설들(특히 그의 “미국 정부는 시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나”)과3) 부분적으로는 박하순 노기연 소장․사회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의 논설들, 그리고 노정협의 “경제공황과 자본주의 국가―신자유주의의 몰락인가?”(<<노동자정치신문>> 제45호, 2008년 9월) 정도뿐이다. 기타의 논의․논설들, 특히 <<한겨레>>나 <프레시안> 등에 게재되고 있는 그것들은, 뒤에서 명백히 하는 것처럼, 대부분이 ‘국가의 역할․규제 강화론’, 즉 사실상 형태만 바꾼 ‘국독자 영구번영론’, 혹은 국독자의 영구번영을 꾀하는 망상의 정책론들이다. 그리고 <참세상>의 일부 논의들은 전혀 이론적 근거들을 결(缺)하고 있는 몰개념하고 극좌적인 ‘자본주의 규탄․붕괴론’에 불과하다.
아무튼, 위기의 경제 상황 그 자체로 다시 돌아가면, 지난해 여름부터 폭발하기 시작한 위기는 지난 7월 들어 그 범위에서도 그 깊이에서도 급격히 확대․심화되면서 이제는 매일매일의 사태전개를 추적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부질없는 일이 될 정도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자본가계급의 대표적인 신문의 하나인 <<뉴욕타임즈>>조차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이다.
두 주일 전 백악관이 7천억 달러의 구제 계획을 내놓았을 때에는 그 엄청난 규모가 전세계 금융체제를 진정시키고, 믿음과 신뢰를 회복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 계획이 [의회의: 인용자] 동의를 받은 지 3일이 지난 지금 그것은 마치 출렁이고 있는 바다에 조약돌 하나를 던진 것처럼 보인다.4)
실제로 써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화를 계기로 발생한 ‘금융기관들의 손실’은 애초의 상상을 넘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금년 1월에 나는 당시의 보도들을 인용하면서, 기껏 독한 맘 먹고, “1,500억 달러, 2,500억 달러, 4,000억 달러! ― 사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 금액인지?! 우리네에게는 차라리 무감각하게 다가온다”5)고 썼지만, 지금 다시 보면 그 순진함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 손실이 1조 4천억 달러에 이른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 보도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손실이 “미국에서만도 2조 달러($2 trillion)에 이를 것”6)이라는 예측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언제 본격적으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되어 있는 ‘신용 파생상품’(credit derivative)으로서의 ‘신용파산 스왑’(Crdit Default Swaps: CDS)이 2000년에는 1천억 달러였으나 지난 여름에는 62조 달러로까지 증대해 있다는 보도이니,7) 실로 유구무언!
이렇게 $700,000,000,000.-라는 거액이 “출렁이고 있는 바다에 던져진 조약돌 하나”처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하여 그 거대한 구제계획이 의회를 통과한 그 날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대서양의 양안(兩岸)에서”, 즉 미국과 유럽에서, 아니 실제로는 거의 전세계에서 “주식시장의 현기증 나는 폭락”8)이 사실상 연일 계속되고 있고, 그리하여 주식시장을 아예 폐쇄해버리는 나라들이 속출하고 있는 상황!9) 그리고 또 미국만이 아니라 영국이나 IMF 등이 엄청난 액수의 구제자금 계획들을 속속 발표하고 전세계 주요 국가들이 연이어 공정 이자율을 내려도 시장 금리는 폭등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금이 회전되지 않고 있는 상황! 수백 년 역사를 가진 거대 은행들(증권회사나 보험회사들을 포함한 그것들)이 여러 나라에서 연달아 도산하고 있고, 도산을 면하기 위해서 국유화되고 있는 상황! 세계 최대의 자동차 메인커인 GM을 위시하여 포드, 크라이슬러 등 이른바 ‘빅 쓰리’가 정부로부터 곧 250억 달러에 이르는 보조금을 받기로 되어10)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생존 가능성 여부가 문제로 되면서 그 주식 가격이 정크본드(junk bond) 수준으로까지 폭락하고 있는 상황!11)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현재의 상황이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의 써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일파만파로, 아니 일파만파라는 말로도 현실의 1만 분의 1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확산되고 있고, 물론,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위기 전공 전(前) 수석 경제학자이자 현재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경제학자인 씨몬 존슨(Simon Johnson)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장래의 전망도 극히 불길하다(It looks pretty ugly down the road)”.12) 도미니크 쉬트라우스-칸(Dominique Straus-Khan) IMF 총재님께서는 “세계가 전세계적 경제침체의 간두(竿頭)에 서 있다”면서도, 부르주아적 백치증을 대표하여, “우리가 만일 재빨리, 강력하게, 협력하여 행동한다면” ‘세계시장과 금융시장의 문제들은 해결될 수 있다’13)고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
2. 혹세무민지설들
공황의 시기는 경제학자들에게는 대목이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헛소리로 상황의 성격을 왜곡하고, 그 위기의 원인을 왜곡하여 노동자들의 탓 등으로 돌리는 등 공황의 부담을 전가하고, 자본의 이익을 옹호하며, 체제를 방어하기에 바쁜 씨즌인 것이다.14) 예컨대, 필시 모두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겠지만, 11년 전 일반적으로 ‘IMF 사태’라고 부르는 거대한 외환․금융위기가 폭발했을 때, 자본의 극우 이데올로그들은 물론 <<한겨레>> 경제부장 이봉수15) 같은 물정 모르는 소부르주아 어릿광대들까지 그 위기의 원인을 노동자들의 ‘과소비’, 즉 그 과대소비 탓으로 돌렸던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적 경제위기, 즉 공황의 궁극적 원인은 과잉생산이기 때문에 공황의 원인을 노동자 대중의 과대소비로 돌리는 것은 물론 경제학의 백치나 떠들어댈 수 있는 가히 미친 주장이다. 공황의 발발과 심화의 원인이 과잉생산에 있다는 것은, 번거롭게 경제학 교과서를 들춰볼 필요도 없이, 자본가계급의 실천에 의해서 입증된다. 즉, 지난 ‘IMF 사태’ 당시에 그토록 노동자들의 ‘과소비’를 규탄하던 독점자본이 공황이 심화되고 장기화되자 한 개그우먼을 등장시켜 “허릿띠를 졸라매기만 해서는 안 되다”는 광고공세를 편 사실이나, 위기가 심화돼가자 미국 정부가 금년 봄 1천억 달러의 세금을 환급하면서까지 대중의 소비를 진작시키려고 했던 사실 등에 의해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친 주장은 그것이 미친 것인 만큼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 융단폭격 같은 공세에 잠시 주춤했다가도 대중은 금세 그것이 거짓임을 알아채고 저항에 나설 뿐 아니라,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본가계급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짜 위험은 그럴 듯하게 들리는 혹세무민지설(惑世誣民之說), 그러한 헛소리들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러한 헛소리들이, 극우 이데올로그들이나 극우 대중매체들에 의해서는 물론, 이른바 ‘진보’의 깃발을 내세우고 있는 지식인들이나 대중매체들에 의해서도 널리 횡행하고 있다. 그리고 선진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보면,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극우 지식인들이나 매체들보다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그 매체들의 그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 그들의 발언에 대한 경계가 그만큼 덜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혹세무민의 헛소리들은, ‘진보’와 극우를 막론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있다. 시장과 국가를 대립시키면서, 이번 ‘금융위기’의 “근본원인”은 월스트리트 자본가들의 탐욕과 자본, 특히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완화에 있기 때문에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여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그 대강의 내용이다. 그들은 이를, 논자에 따라서, 혹은 “신자유주의의 종언”, ‘신자유주의의 종말“이라고도 부르고, ”레이건-대처주의의 종언“ 혹은 그 ”종말“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미국형 자본주의“ 혹은 ”앵글로-쌕슨형 자본주의“의 ”종언“ 혹은 ”종말“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예컨대,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해체되자 <<역사의 종언>>이라는 헛소리로 크게 재미를 본, ‘종언’ 장사꾼 극우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이렇게 말한다.
... 범인은 미국적 모델 그 자체이다. 보다 적은 정부라는 슬로건 하에 미국정부(Washington)는 금융부문을 충분히 규제하는 데 실패했고 사회의 기타 부문에 엄청난 손해를 끼치도록 방치했다. ...
많은 해설자들이 월스트리트의 붕락(meltdown)은 레이건 시대의 종언을 보여준다고 지적해 왔다. 이 점에서 그들은, 설령 어찌어찌 해서 매케인(McCain)이 11월에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의심의 여지없이 옳다. ...
레이건주의(혹은 영국적 형태로는, 대처주의)는 당시에는 옳았다. 1930년대 프랭크린 루즈벨트의 뉴딜 이래 전세계의 정부들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1970년대에 이르면, 관료주의에 질식당한 거대한 복지국가와 경제는 극히 역기능적임이 입증되고 있었다....16)
이러한 주장들은 물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수도 없이 많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뉴스위크>>는 이렇게도 말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은행의 지불능력만이 아니라 앵글로-쌕슨 자본주의 체제 전체이다”17)라고. 그리고 “투자가이자 박애주의자인 조지 쏘로스”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나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세계화 및 탈규제화의 모델이 파열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현재의 위기를 야기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맞고 있다.” 미래는 ... “보다 덜 제멋대로이고, 보다 덜 공격적으로 투기할 것이며, 보다 덜 차입에 의존할 것이며, 신용을 보다 더 조일” 것이다.18)
독일의 금융 담당 장관 쉬타인브뤽(Steinbrück)은, “우리가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것과 같은 여과되지 않은 자본주의는 그 탐욕 때문에 결국은 그 자신을 먹어치울 것”이라며, 그리고 심지어 “맑스를 언급하면서” “금융시장을 ‘교화’(civilize)시키자는 공식적 운동까지”, 그러한 도덕운동까지 전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9)
이러한 발언들은 물론 수도 없이 그 예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단지 바다 너머의 일만도,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일만도 결코 아니다. 그러한 발언들은 바로 이 땅에서, 조․중․동 등의 극우언론에 의해서는 물론이려니와, 쟁쟁한 ‘진보적 지식인들’, ‘진보적 언론인들’, ‘진보적 매체들’에 의해서도 대량으로 생산․재생산되고 있다. 진보 매체 <<한겨레>>나 <프레시안> 등에서 전개되고 있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이나 기자들의 논의들이 특히 그러하다.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몇몇만 소개하자면 이렇다.
1) 이승선 <프레시안> 기자
그의 여러 글들 중에서 “부시가 ‘대공황’ 운운하는 진짜 이유”(10월 6일)만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그는 미국의 7,000억 달러 구제법이나 의회가 “방만한 대출로 현재의 사태를 불러온 근본문제는 건드리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미국의 시민들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향후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사태를 불러온 근본문제”나 “사태를 초래한 체제의 근본적 개혁”이란 것은, 글의 내용상 기껏해야 “금융시장에 대한 적절한 감독과 규제”이다.
더구나 그는, 해외의 일부 논객의 주장을 소개하는 형식을 취해서이긴 하지만, “대국민 협박을 통해” 엄청난 규모의 구제금융이란 “특혜 덩어리”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후보가 당선될 경우 차기 행정부에서 각종 사회보장제도의 기업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부시 대통령과 폴슨 재무장관, 버냉키 FRB 의장“ 등이 ”금융위기를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금융위기 조작설“, 그러한 음모설까지 제기하고 있다. ― 참으로 훌륭하고 날카로운 ‘비판’이다!
2) 장정수 <<한겨레>> 편집인
“미국 월가 파산의 교훈”(9월 21일)이라는 칼럼에서 그는 “미국 월가의 몰락으로 1989년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정권 붕괴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도 종말을 맞게 됐다”고 선언하며, 흥미롭게도 “미국의 역대 정권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어온 부시 정권이 사회주의 정권을 방불케 할 만큼 가장 반신자유주의적이고 반시장적인 국가 개입 정책을 선택한 것은 역사적 희극이다”라고 쓰고 있다.
문제의 ‘신자유주의의 종말’에 관한 논의 등은 뒤에서 하기로 하자.
여기에서는 다만, “이런 상황에서 수출 의존형 경제구조와 함께 경제성장에 집착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하의 한국 경제는 큰 시련을 겪게 될 것 같다”거나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미국 금융자본주의를 모델로 삼고 경제구조 개혁을 추진해온 한국은 이런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경우 미국과 유사한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데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자.
미국 월가에서 촉발된 세계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독일과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월가 위기를 가져온 투자은행이 아닌 상업은행 중심의 금융구조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그 타격을 덜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한국이 지향하는 경제모델이 이미 파산한 미국의 금융자본주의가 아니라 독일과 일본의 내실 있는 경제체제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이렇게 그는 노골적으로 “한국이 지향하는 경제모델이”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 상업은행 중심의 금융구조가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 타격을 덜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독일과 일본의 내실 있는 경제체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쩐담?! 그가 그렇게 ‘웅변’하신 후 불과 보름 남짓 사이에 독일은 거대 주택자금대출 은행이 쓰러질 위기에 처해 거액의 구제자금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뿐 아니라 뱅크런(bank run), 그러니까 미친 듯한 예금인출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국가가 은행예금 전액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로 몰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일본은, 아직은 중 규모의 것이기는 하지만, 보험회사(야마토생명)나 부동산투자신탁회사(뉴시티레지던스)가 파산하고, 연일 주가가 폭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일본의 올해 상반기(4-9월) 상장기업의 파산 건수가 사상 최다를 기록”20)하고 있다고 야단들이니 말이다.
3)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
“‘민주세력’의 경제철학은 뭔가”(9월 23일) 묻고 있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보수세력의 엉터리 경제철학을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대안을 내놓는 일은 쉽지 않다. ‘질적 성장’, ‘함께 사는 세상’, ‘민주적 시장경제’, ‘제3의 길’ …. 어렴풋한 방향은 보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경제철학이 없다. ... 미국발 금융위기도 보수세력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 알 수 없다. 민주세력, 개혁세력, 진보세력이 제대로 된 경제철학을 찾지 못하면 보수가 계속 집권한다.
결국은 다 같은 얘기지만,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말이 특히 눈에 들어오긴 하는데, 아무튼 우습긴 하지만 어딘가 좀 싱겁다.
4) 강태호 <<한겨레>> 남북관계 전문기자
“부시는 어디 있는가”(9월 25일) 찾고 있는 칼럼에서 “이명박은 어디 있는가”도 함께 물으며 그는,
월가의 위기는 금융자본의 탐욕이 빚어낸 자기파괴적 재앙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이를 방치하고 결과적으로 조장했다. ... 금융시스템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는 정부의 감독과 규제 조처는 안 보인다.
1989년 저축대부조합(S&L)의 파산에 따른 금융위기와 뒤이은 경기침체는 80년 등장한 레이건 공화당 행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인 ‘레이거노믹스’에 책임이 있다. 이번 월가의 위기는 그 연장선에 있으며, ‘부시노믹스’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2000년 ‘닷컴 거품’이 꺼지자 돈은 부동산으로 몰렸다.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규제완화로 이를 조장했고, 저금리와 주택가격 상승을 바탕으로 개인들은 앞 다퉈 소비지출을 늘렸다. 7년여 미국 경제는 흥청망청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주택 담보대출이 이를 뒷받침했다.
운운하며, 흔해빠진 그렇고 그런 얘기를 하는 다른 한편에서, 더구나 “저금리와 주택가격 상승을 바탕으로 개인들은 앞 다퉈 소비지출을 늘렸다”느니, “7년여 미국 경제는 흥청망청했다”느니, “서브프라임 모기지 등 주택 담보대출이 이를 뒷받침했다”느니 하는, 백치적인 ‘과대소비=경제위기의 원인“론을 설파하는 다른 한편에서,
지금 부시 행정부의 시장개입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수정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구원을 위해 나선 건 아닐까? ... 잔치는 끝났으니 국민이 설거지하라는 것인가? ... 수많은 중소 금융기관의 도산 속에서 금융자본은 공룡화하고 독점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운운하며, 제법 놀랍고 날카로운 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다시 “도덕적 해이의 전형”이라는, 부르주아의 ‘위선의 전형’인 상투적인 도덕적 설교나 다음과 같은 넋두리로 금세 빛을 잃고 만다.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은 이라크 전쟁과 북핵 문제는 잠시 덮어두고 경제만 봐도 부시의 8년은 끔찍하다. 특히 클린턴의 8년과 비교하면 극과 극이다. 클린턴 대통령은 단기 경기부양, 장기 재정적자 감축, 시장개입 확대를 통해 아버지 부시 시절의 경기침체를 극복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스스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엄격한 분리를 규정한 독점규제법인 글래스-스티걸법은 이미 형해화” 운운하면서도, ‘경제침체를 극복한 클린턴’이라는 자신의 편견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그 법률이 “이미 형해화되긴 했지만 이번엔 아예 휴짓조각이 됐다” 운운한다. 그것이 폐지된 것, 즉 형해화된 것이 바로 클린턴 정부 하에서라는 것에 침묵하면서 말이다. 폐지된 법률이야 그것을 휴지조각을 만들던, 밑닦개를 만들던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클린턴 대통령은 단기 경기부양, 장기 재정적자 감축, 시장개입 확대를 통해 아버지 부시 시절의 경기침체를 극복했다”? 시운이 좋았을 뿐 아닌가?
5)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전 경제 부총리, ‘자랑스런 서울대인’, 일명 ‘산신령’
“신자유주의의 ‘거품’이 터졌다”(9월 30일)는, <<한겨레>>에의 ‘특별 릴레이 기고’에서,
미국은 원래, 금융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미국 사람들은 원래 흥청망청하는 국민이 아니다. 그런 미국에 왜 이런 거품이 생겼는가. 그 이유는 1980년대 말부터 경제정책의 중점이 ‘메인스트리트’로부터 ‘월스트리트’로 옮아갔기 때문이다. 월가출신 인물이 계속 중앙은행 총재 자리를 지켰다. 재무장관도 월가 출신이 많았다.
묻건대, 그렇다면, 그 동안 미국 경제에 닥친 숱한 위기․공황은? 예컨대 1930년대의 대공황은?
세상은 그가 경제학의 석학이고 ‘산신령’이시라니 아무튼 좀 더 들어보자.
월가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금융에 대한 기본을 망각했다. 원래 금융업이란 남의 돈을 가지고 차질없이 운영해야 하는 기업이다. 때문에 좋은 금융가는 보수적이어야 하고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월가 사람들은 너무 자유롭게 자기 이익만 챙겼다. 그러다가 이번의 덜컥수에 걸렸다. 그린스펀 전 연준의장은 최근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금융에 작동해야 경제가 잘 된다는 말을 했다. 19년이나 중앙은행 총재직을 지킨 사람이 이런 글을 쓰다니,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였다. 아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각론은 아직 논할 단계가 아니다. 총론은 명백하다. 첫째, 신자유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못 쓴다. 미국도 이 과정을 졸업했다. 둘째, 나라가 잘되자면, 정부와 민간의 역할 분담이 잘돼 있어야 한다. 민간이 정부를 대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셋째,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 넷째, 금융가는 용감해서는 안 된다. 지나친 이노베이션을 해서도 안 된다.
과연 석학․‘산신령’다운 그렇고 그런 구역질나는 훈시, “몰라도 한참 모르는 소리”, “아연하지 않을 수 없(는)” 농담이지만,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6)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서브 서브 서브프라임의 비밀”(9월 24일) 등등 <<한겨레>>에 열심히 싣고 있는 이런저런 칼럼들에서,
위기의 씨앗은 눈앞의 고수익에 눈이 어두워진 금융기관들이 신용이 취약한 계층에게 높은 이자에 마구 돈을 빌려준 것이었다. ...
금융의 기본은 신용이다. 신용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기업을 살리고, 경제를 돌아가게 하는 것이 금융의 본질이다. 금융공학은 이를 좀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고수익은 고위험을 수반한다는 진리는 아무리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내도 변하지 않는다. 금융공학의 기법으로 나쁜 일(자산부실화)이 일어날 확률을 줄일 수는 있어도 없앨 수는 없다. 확률이 줄어든 만큼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의 피해는 더 커지기 때문에 결국 위험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이를 기초로 한 관계야말로 사람을 변화시켜서 위험자체를 줄여준다.
금융선진화도 좋지만 ‘돈 놓고 돈 먹기’식 금융이 아닌 사람을 살리고 산업을 살리는 금융을 생각할 때다. ...
긴축과 고통분담이 필요하다. ...
얼마 전 진보적인 학자들이 모여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정책대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다. 발제를 맡은 나는 고심 끝에 금리인상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시장금리는 이미 많이 오르고 있다. 정책금리도 인상해야 한다. ...
서구에서는 진보세력이 긴축과 금리인상을 주장하는 것은 금기시되는 일이다. 긴축으로 경기가 위축되면 노동자와 서민층이 가장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또 금리가 인상되면 채무자로부터 자산가에게로 소득이 이전되는데, 통상 저소득층일수록 자산보다 채무가 많기 때문에 역진적인 재분배 효과를 초래한다. 일례로 구제금융 위기 때 강남 부자들이 고금리를 즐기며 “이대로 영원히!”를 외쳤다는 얘기도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금리인상론을 어렵사리 꺼냈지만 의외로 토론회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학자들이 찬성했다. 긴축과 고통분담이 이 난국을 헤쳐 나갈 기본 방향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사회의 “진보적인 학자들”의 초상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학자들’의 전공은 모두 도덕 내지는 자본 윤리학? 아무튼 좀 지나친 농담이다.
7) 정남기․최우성 <<한겨레>> 기자
“시장신화의 몰락”이라는 3번에 걸친 최근의 글들에서,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금융위기를 파생상품 등에 대한 감독 부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위기의 근본 원인은 오히려 과잉 유동성과 이로 인한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 밑바닥에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비대해진 금융자본이 존재한다. 미시적인 금융감독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자체의 위기라는 얘기다.
“미시적인 금융감독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 자체의 위기”라? ― 어설프고 혼란스럽긴 하지만 약간은 핵심에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연구실장은 “금융자본이 팽창하면서 통제받지 않는 자본의 이동과 증식으로 금융시스템의 불안정 요인이 잠복해 있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 등 많은 전문가들은 이번 금융위기를 1930년대 대공황과 맞먹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다만 중앙은행 독립, 예금보험제도, 금산분리장치 등이 마련돼 있어 당시와 같은 파국을 피할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중앙은행 독립, 예금보험제도, 금산분리장치 등이 마련돼 있어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파국을 피할 수 있었다”? ― 그렇다면, 최근 전개되고 있는 대파국은?
좀 더 들어 보자.
김진방 인하대 교수는 “시스템 안정성을 위해 적절한 정부 개입을 통한 시장설계가 필요하다”며 “그런 장치가 마련돼야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교훈을 이번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진방 교수라는 분이 그러니까 그런 분, 즉 “시장경제가 더욱 활발하게 돌아갈 수” 있는 ‘교훈’이나 찾고 계신 분이었군요?!
아무튼 좀 더 들어보면,
고삐풀린 금융자본주의에 숨겨진 위험(리스크)는 분명하다. 최근 사태의 뇌관 구실을 한 파생금융상품 ‘크레디트디폴트스왑’(CDS)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순화한 시디에스 모형이란 결국 ㄱ이 ㄴ에게 돈을 꿔준 뒤 그 돈을 받을 ‘권리’를 ㄷ에게 팔고, 다시 ㄹ,ㅁ,ㅂ…의 손으로 무한정 떠돌아다니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그 권리를 손에 쥔 투자자의 운명은 정작 누군지도 모르는 ㄴ이 돈을 갚을 능력에 달려 있다. 대형 투자꾼들이 벌이는 머니게임 속에서 위험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떠넘겨질 뿐이다. 그 위험이란 한순간에 경제시스템을 무너뜨리는 ‘폭탄’의 다른 이름이다.
아하, 그러니까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였군요?!
다시 좀 더 들어보자면,
신용상 금융연구원 거시경제연구실장은 “미국 금융위기의 원인은 소득보다 소비를 더 많이 했기 때문”이라며 “그 뒤에는 부동산 가격 상승이란 거품이 있었다”고 말했다. ...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10여년에 걸쳐 이뤄진 과잉소비를 고려할 때 최소한 4년 정도가 지나야 가계부채가 정상 수준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면, 역시 ‘과잉소비’가 문제였군요?!
8)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
“진짜 위기는 9월부터 시작이다”, 혹은 “‘금융 단독 위기’를 ‘실물 위기’로 키우는 MB정부”(9월 2일) 등등 <프레시안>에 게재하고 있는 일련의 ‘기사’에서 그는,
한국 경제에 정말 ‘장기적 위기’라고 할 수 있던 순간은 두 번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의 성장률로 보자면, 이 수치가 0 혹은 마이너스에 달했던 것은 80년과 98년, 두 번이다. 한 번은 박정희의 유신체계가 종료하던 시점이고, 또 한 번은 김영삼 정권의 종료와 함께 한나라당이 처음으로 정권을 넘겨주던 시점이었다. 이 두 번의 한국 경제 공황은 모두 일종의 자본 과잉축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지금 와서 이유가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 두 번의 공황 사이에는 18년의 간극이 있다. 대체적으로 한국 경제에는 장기파동설을 빌린다면 15-18년 사이에 도저히 조정되지 않는 문제점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라고, ‘그럴듯한 공황론’(?)을 들이대며, 문제를 논하고 있다, 학자답게! 다만, 여기에서 나는 그의 공황론 자체를 시시비비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랫동안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라”고 주장해온 한국의 우파들이 경제 운용하던 시절, 두 번의 엄청나게 큰 공황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라니?! 아무리 “한국의 우파들”,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기에 바빠도 그렇지. 그리고 “박정희의 유신체계가 종료하던 시점”이라도 그렇지. 박정희의 ‘유신 시대’나 그 “유신체계가 종료하던 시점”이 과연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하라’고 주장”하던 시대였던가?!
그런데,
일반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적절한 정부 개입을 지지하는 내 입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금리 특히 환율에 대한 정부 개입은 반대한다. 부동산 경기부양에 대한 유혹으로 노무현 정부 초중반에 취했던 저금리 정책이 결국 정권은 날려먹고, 경제의 생산적 전환에 실패했다. 조중동의 '좌파 저주'가 정권을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금리를 억지로 내리려고 했던 노무현의 '2만 불 정책'이 지난 정권을 결국 무너지게 했던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그렇다면 이명박 정권은 ... 그들이 정말 시장주의자였다면, 환시장에 개입하는 바보 같은 일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 그렇게 정부가 환율에 개입하지 않으면 시장과 시장을 둘러싼 주체들이 적응하면서, 역으로 환시장이 결국에는 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환시장에 개입했고, 수십조 원을 날려먹었다. 이 사건이 9월 위기설의 실체다. ... 내가 외국의 환딜러라고 하더라도, 이런 바보 같은 정부가 있는 동안, 단단히 한몫 잡자고 작전을 걸 것 같다. ...
정부에서는 9월 위기설은 근거 없다고 했다. 물론 나도 그 의견에는 동의한다. 실물경제와 연관없는 위기는 진짜 위기는 아니다. 아직 한국의 실물경제는 대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묻건대,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국민경제에 대한 적절한 정부 개입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개입해야 하는 부문과 개입해선 안 되는 부문은? 혹시 매번 우 교수님한테 자문해야? 더 들어보자.
위기 대응이 바로 실력이다. 만기도래 채권의 특징 몇 가지를 보여주면서 "위기는 없다"고 항변하는 게 위기 극복이 아니라, 실제 한국 경제를 둘러싼 몇 가지 위험요소들에 대해 제대로 대응하는 것이 근거 없어 보이는 위기설을 극복하는 진짜 방법인 것 같다.
위기설을 극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현 위기설의 출발점인 강만수부터 해임하라. 위기설의 절반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청와대 경제팀을 위기관리형으로 재편하라. 그리고 현재의 이념 경제 기조를 위기관리 기조로 바꾸기 바란다. 정말로 말로만 외치던 ‘시장 경제’ 혹은 ‘작은 경제’, 그 기조를 외환과 금리에 대해서 하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측근 인사를, “경제를 아는 사람”으로 바꾸기 바란다. 그 정도만 해도 9월 위기설은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러 글에서 “강만수부터 해임”하고 “경제를 아는 사람”으로 바꾸라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면 위기(설)을 극복할 수 있다고. 그런데 그는 말한다. “나는 정치학자가 아니라서, 경제가 망하고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망하는 것보다는 국민경제가 건실하고 튼튼해지는 것을 더욱 소망하기 때문이다”라고! 강만수를 대신할 적임자는 혹시 ㅇㅅㅎ?
그런데, “‘금융 단독 위기’를 ‘실물 위기’로 키우는 MB정부”라니? 그것도 시정잡배나 그와 별 다름 없는 정치모리배도 아닌 명색이 경제학을 논하는 학자님의 말씀이라니 ― 참으로 장관이다!
9) 김호기(연세대)․(다시) 유종일․최태욱(한림국제대학원대학)․전창환(한신대) 교수 등 ‘개혁진보세력’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의 “개혁진보세력 ‘대안이념’ 백가쟁명”(9월 29일)이란 기사에 의하면,
대안은 자유시장경제가 아니라 (한국형) 조정시장 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 : 김호기․유종일․최태욱
금융권력에 대한 민주적 견제 및 통제로 금융민주주의를 제도화해야 한다: 전창환
아하! 아하! 그런 것이었군요! 그것이 바로 ‘대안’이었군요! 그렇다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추구하고, 자본주의의 ‘극복’이 아닌 ‘인간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론’과 닮은 꼴[닮은 꼴? 표절?: 인용자]”이며,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을 보장하지만, 사회적 형평과 시장질서 확립을 위해 정부 개입을 허용하는 경제 시스템”이라는 ‘좌파의 아이콘’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그리고 김대중 정부의 “민주적 시장경제론”21) 이 바로 그 대안?
결국 저들이 “(한국형) 조정시장 경제”니, “금융민주주의”니 하는 ‘대안’으로 요구하는 것은 기껏해야 서유럽식의, 혹은 북유럽식의 ‘사민주의’, 혹은 케인즈주의이다.
10) 이정우 경북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우 교수는 경제학 전공의 교수이자 “참여정부[=노무현 정권: 인용자] 초기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데 이어 참여정부의 12개 핵심 국정과제를 총괄 조정하는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해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설계사’로 꼽혔(던)”22) 거물인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근의 대공황이라는 사태를 맞으면서 진보 <<한겨레>>가 “특별 릴레이 기고” 제1호를 그에게 할여했고, 나아가 ‘창간 20돌’을 맞아 “경제섹션 ‘한겨레 경제’”를 별도 발행하면서 그 첫 호에서부터, 그리고 매주 월요일 정기적으로 “이정우의 경제이야기”를 담당하도록 촉탁한 인사이다. 그만큼 거물의 ‘진보적’인 경제학자이시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당연히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특별기고] 사상누각이 주는 교훈”(9월 29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다. 자본시장이 효율적이라는 가설 하에 정부 개입을 반대해온 시장만능주의자들이 오래 동안 각종 규제를 완화해왔고, 미국 금융계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금융공학이라는 현대판 연금술을 통해서 막대한 부를 쌓아왔으나 그 모든 신화가 사상누각이라는 게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시장만능’을 외치던 그 많은 경제학자들은 다 어디에 숨었나. ...
미국의 금융위기는 한국경제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경제가 추종해온 것이 미국식 월가 자본주의 모델이고, 미국에서 경제학을 훈련받은 사람들이 학계, 정부, 재계, 언론계에 포진하여 날마다 ‘시장’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이명박 정부는 모든 전봇대를 뽑을 듯이 규제완화를 부르짖고 있고, 작은 정부, 감세를 내세워 멀쩡한 종합부동산세조차 없애려고 하고 있다. 부시의 경제철학과 쏙 빼닮은 이명박의 경제철학은 참으로 걱정스럽다. 미국 금융위기를 촉발한 것이 지나친 규제완화와 부동산 거품이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 “멀쩡한 종합부동산세”를 빼놓고는, 자신이 참여하여 핵심적 역할을 했던 ‘참여정부’의 제반 경제정책, 예컨대 한미 FTA나, 비정규직 확대 등을 노린 이른바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 등이야말로 ‘월가 자본주의 모델’, 즉 미국식 모델이 아니었으며, 자신 역시 “학계, 정부, 재계, 언론계에 포진”한 “미국에서 경제학을 훈련받은 사람들”의 하나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라는 그의 진단 혹은 분석의 결과도 잊지 말자. 또한 “맹목적 시장주의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지를 미국 금융위기가 잘 보여준다”고도 말씀하시고 계신 바, 이 역시 잊지 말자. “맹목적 시장주의”가 아닌, 말하자면, ‘개명한 시장주의’ 혹은 ‘조정 시장경제주의’ 역시 “무책임하고 위험”하며 ‘금융위기’가 필연적임을 곧 보게 될 것이니까!
한편, “성년 한겨레”의 “경제섹션”의 첫 번째 “강의”, “주요 경제현안들을 경제이론 또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짧은 강의”답게 ‘이정우의 경제이야기’ “‘시장경제’가 문제 아니라 ‘미국형 시장만능주의’가 문제”(10월 6일)라는 글은, 보다시피 그 제목에서부터 핵심을 장악해가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최근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위신이 땅에 떨어져 버렸다. 사람들이 기존 경제체제를 불신하고,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며, 뭔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위기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의 문제점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을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미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대표선수답게 별명도 많다. 월가 자본주의, 영미형 자본주의, 자유시장경제, 시장만능주의, 신자유주의 등으로 불린다. 모든 나라에서 시장과 정부가 힘을 합쳐 경제를 운영하고 있으므로 현대경제를 혼합경제라고 하는데, 그 혼합 비율은 나라에 따라 크게 다르다. 영미형 자본주의에서는 시장이 주연이고, 정부는 조연이다.
그러면서 강의를 계속한다.
시장경제에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장경제에는 시장만능주의만 있는 게 아니고, 크게 봐서 영미형, 북구형, 유럽형의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시장이 큰 역할을 하고 성장을 중시하는 것이 영미형 모델이며, 영국․미국․캐나다․호주․뉴질랜드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 대척점에 정부의 역할이 크고, 분배를 중시하는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 사회민주주의가 있다. 양자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이 독일․벨기에․네덜란드․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의 유럽 복지국가다. 영미형 국가의 조세부담률이 20-25% 정도인 데 비해 북구는 무려 50%나 되고, 유럽은 양자의 중간쯤 된다. 이념적으로 본다면 영미형은 우파, 북구형은 좌파로 부를 수 있다.
지난 수십년 동안 세 모델의 종합성적은 어떤가? 세 모델의 평균소득은 모두 3만 달러라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영미형에 비해서 분배가 평등하면서 성장은 비슷하고, 교육․혁신능력이 탁월하고, 범죄가 적고 인간적인 사회라 할 수 있는 북구가 우등생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국민소득 대비 20%의 세금을 내면서도 감세와 ‘작은 정부’가 인기가 있고, 좌파는 경제를 망친다는 것이 정설처럼 통하는 한국에서는 참으로 믿기 어렵겠지만 50%나 세금을 거두는 북구 좌파 국가의 경제성적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과연 ‘시장경제’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의 “짧은 강의” 전체를 옮기고 말았는데, ‘진보’ <<한겨레>>라서 다행히 “무단 전체를 금지합니다” 따위의 경고는 없는 것 같다.
아무튼 이 교수의 ‘강의’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것은,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 사회민주주의”가 “좌파로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영미형에 비해서 분배가 평등하면서 성장은 비슷하고, 교육․혁신능력이 탁월하고, 범죄가 적고 인간적인 사회라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으로서의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모름지기 이 북구형의 좌파 자본주의,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하며, 이번의 경제위기를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좋다. 다른 문제들은 잠시 제쳐두자. 그리고 과연 경제위기는, “영미형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 규제되지 않은 금융시장”의 문제,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의 문제는 아닌지, 이 교수의 주장이 아니라, 사실로 눈을 돌려보자.
먼저 덴마크
일찍이 지난 7월 11일부터 다음과 같은 보도가 나오고 있다.
북유럽 지역 86개 금융회사 가운데 지난해 주식이 최악이었던 로스킬데은행(Roskilde Bank)은 써브프라임 위기가 개시된 후 중앙은행에 의해서 구제되는 덴마크의 첫 번째 대출자가 되었다.23)
덴마크의 ... 로스킬데 은행은 7월 10일에 중앙은행으로부터 “무제한의 유동성”을 받았고, 덴마크은행연합회는 7억5천만 크로너까지의 손실을 보상해주기로 동의했다.24)
덴마크의 위기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그것과 다르고 더욱 나쁘다. 이는 초거대은행인 UBS의 판단이고, 신용평가회사 무디스(Moody's)의 판단이기도 하다.
그리고 UBS는 금년에 더 많은 은행들이 파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덴마크의 주택가격은 2006년 가을까지 거대하게 상승했다....”25)
그리고 10월 6일이 되면, 뱅크런을 예방하기 위해서 덴마크 정부는 350억 크로너(약 64억 달러)에 이르는 모든 은행예금에 대한 지급보증을 하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다.
다음엔 스웨덴
덴마크에서의 문제야, 이 교수로 하여금 어이없는 얘기를 하게끔 하는 이론적인 바탕을 잠깐 제쳐두고 사실 그 자체만 본다면, 비교적 최근의 사태들이기 때문에 공사다망하신 이 교수님께서 혹시 추적하지 못했다고 해서 크게 책망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웨덴에서의 문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1990년에서 ’94년 사이에 이미 스웨덴은 심각한 경제․금융위기를 겪었고, 이는 경제학 교수,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알 만한 이는 다 아는, 혹은 다 알아야 할 유명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것은 “정말 체제적 위기의 문제”26)였고, “가장 극적인 세계의 10대 금융위기”27)의 하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날 “스웨덴의 주택가격은 미국의 그것보다 더욱 과대평가되어 있다.”28)
이 역시 사실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교수님께서는, “이번 금융위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 일반의 문제점으로 확대해석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강변하고 있다. 영미형의 “대척점에 정부의 역할이 크고, 분배를 중시하는 스웨덴․노르웨이․핀란드․덴마크의 북구형”이 있으며, 이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다.
고백하건대, 이러한 이 교수 등의 정신적 병증과, ‘이번의 경제위기는 좌파 정권 10년 탓’이라는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등의 정치가들의 그것, 그리고 쏘련과 과거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이북이 (국가)자본주의라는 일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정신적 병증 사이의 차이를 나는 가늠하지 못한다.
3. 혹세무민지설들의 이론적․정치적 특징
1) 극우적 대안과 다르지 않은 ‘진보적’ 대안
이상에서 몇몇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위주로, 그들이 이 대공황의 정세에서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개략적으로 소개했다.
비록 표현이 다르고, 또 사람에 따라 방점을 찍는 곳이 다소 다르지만, 그들 간의 그러한 비본질적인 차이를 도외시하면, 그들의 주장의 요점은 사실상 동일하다. 그것은 모두 한결같이 ‘신자유주의’,29) 혹은 영미형․앵글로-쌕슨 형의 시장만능주의, 혹은 ‘규제되지 않은’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그리하여 ‘시장의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는’, 자본의 탐욕과 방종에 대한 정부의 규제․감독․역할이 보다 강화․확대된 자본주의, ‘조정 시장경제’, 구체적으로는 ‘북구형의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겨레>>가 “개혁진보세력 ‘대안이념’ 백가쟁명”이라는 제목 하에 소개하고 있는 여러 ‘진보적 교수님들’의 이른바 “(한국형) 조정 시장경제”나 “금융민주주의”,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의 시장만능주의 경제모델이지 시장경제 자체는 아니다”는 이정우 교수의 주장 등이 이를 특히 명확하고 요약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 ‘진보적 지식인들’ 혹은 ‘개혁진보세력’의 이러한 ‘대안이념’은 사실은 현 공황․위기 국면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극우 이데올로그들의 그것과 그다지, 아니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 극우 이데올로그들 역시 탐욕과 방종을 비판․비난하고, 신자유주의의 종언, 레이건-대처리즘의 종언, 미국형 혹은 영미형 자본주의의 종언, 몰락을 얘기하면서 ‘보다 투명한 자본주의’, 탐욕과 방종이 정부․국가에 의해서 규제․감독되는 자본주의, 국가의 역할 증대 등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국의 한 혁명적 노동자 신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경제위기를 탐욕 탓으로 돌리며 비난하고 있다. 자신의 집이 몇 채나 되는지도 모르는 존 매케인[공화당 대통령 후보: 인용자]조차 그렇다.
요트를 갖고 있고 자가용 비행기와 여러 채의 호화주택을 가지고 있는 기생충들, 즉 억만장자들은 증오를 받아 싸다. 그러나 탐욕은, 인류사회가 부자와 가난뱅이로 분열된 이래 수천 년 동안의 현상이다.30)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서 정치가들과 학자님들은 다같이, 대중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공식적인 태도는 탐욕과 규제 실패라는 상황을 비난하는 것이다.31)
은행들이 쓰러지고, 일자리들이 사라지며, 경제가 빈곤과 불행이라는 엄청난 위기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갈수록 텔레비전 방송과 선거 유세 판은 갑자기, 결코 그럴 것 같지 않은데도 ‘대기업’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꽉 차고 있다.
라우 돕스, 글렌 벡[모두 미국의 극우적 방송인들: 인용자], 그리고 심지어 사라 페일린[극우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 인용자]나 존 매케인까지도 갑자기 ‘월스트리트의 탐욕’과 싸우는, ‘근로인민의 보호자들’이 되고 있다. ...
돕스와 벡은 때때로 대기업을 비판하지만, ― 그러나 그것은 실로 노동자들과 중간계급의 모든 고통의 근원과 관련하여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왜곡된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32)
이렇게 “‘월스트리트’를 비난하는 우익들을 조심하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의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영미형 혹은 미국식의 자본주의를,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심판하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들’을 조심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
저들 주장에 숨겨진 그들 주장의 반노동자적․반동적 성격․특징 때문이다.
2) 시장 대 국가의 문제
저들은 시장과 국가 혹은 정부를 무매개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시장에 대한 국가․정부의 규제․감독․감시 및 국가․정부의 역할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규제완화’․‘작은 정부’를 외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투쟁’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주장은 자못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러나 바로 거기에 함정이 있다!
저들이 몰계급적인 언사로 그 역할 강화를 요구․주장하는 국가 혹은 정부는 과연 누구의 국가, 누구의 정부인가?
분명 독점자본가계급의 국가․정부이다. 그러나 저들은, 국가의 본질, 그 계급 억압적 기능에 대한 선의의 무지 때문이든, 아니면 그것을 짐짓 은폐하고자 하기 때문이든, 바로 이 점에 침묵하면서 반동적으로 그 독점자본가계급의 국가․정부의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 그 전선을 왜곡 혹은 은폐하고 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의 본질, 그 전선의 본질이 마치 시장 대 국가, 혹은 시장 대 정부의 대립․갈등에 있는 것처럼 주장하면서, 국가․정부의 규제․감독․역할을 증대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 대 국가, 혹은 시장 대 정부의 대립․갈등은 결코 신자유주의의 본질도 그 전선의 핵심도 아니다.
시장과 국가․정부의 대립이나 갈등, 그것은 그저 언제나 노동 대 자본 간의 대립,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억압의 강화라는 신자유주의의 본질, 그 핵심적 전선을 은폐하고 호도하기 위한 기만적인 치장, 기만적인 슬로건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껏해야 그것은 때때로 발생하는 개별 독점자본과 정부 사이의 갈등에 불과하다. 예컨대, 그토록 ‘작은 정부’를 외쳐대던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부인 레이건 정권의 재정․예산의 구조․규모33)가 웅변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에서는 결코 ‘작은 정부’는 존재한 적도, 지향된 적도 결코 없다. 만일 ‘작은 정부’와 유사한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에서뿐이었다.
3) 신자유주의 대 케인즈주의
저들은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또한 그것들을 무매개적으로․절대적으로 대립시킨다. 그리고 그들의 대립 속에서는 대체로 신자유주의=악, 케인즈주의=선이다. 바로 현대 서유럽 사민주의34)가 표방하는 도식 바로 그것이다.
전선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선전하는 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대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뿐 아니라 국가독점자본주의로서의 케인즈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며, 곧바로 반동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봉사하는 것이다.
김성구 교수가 명확히 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 위기에 직면해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성립한 이후 더 이상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케인스주의 시대뿐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국가의 개입과 위기관리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주요한 일 요소이다.35)
실제로 케인즈주의나 그것의 실천판(實踐版)인, 파시즘적 경제정책들은 물론,36) 그 자유주의적 판(版)인 뉴딜도 결코 진보적이지 않다. 아니 거꾸로 극히 반동적이다. 그것들은 모두, 특히 1930년대의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이 웅변하는 것처럼, 인류의 안전․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이미 지양되었어야 할 자본주의적 생산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억지 이론과 정책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비난․심판한다며 곧바로 케인즈주의로, 즉 사실은 신자유주의의 기초일 뿐인 케인즈주의로 달려간다. 그리하여 자본의 ‘탐욕’ 및 ‘방종’에 대한 국가의 규제․감독을 요구하고, 국가가 ‘성장’이 아니라 ‘분배’에 그 정책의 중점을 둘 것을 요구한다. 저들은 ‘복지국가’라는 형태 속에 독점자본의 반노동자계급성이 은폐되어 있는 자본주의를 지향한다.
그만큼 그들은 반동적이다.
그러나 그나마 위로부터 그러한 ‘복지국가’를 주조해내려는 저들의 주장은 사실은 역사적 조건을 부당하게 사상한 저들의 망상에 불과하다. 케인즈주의적 소위 ‘복지국가’는 쏘련이라고 하는, 제국주의의 대립물, 억압과 착취에 대한 강력한 대립물․반대물로서의 20세기 사회주의가 발전하고 있었고,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계급투쟁이 존재하는 조건 속에서만 형성․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는 실제로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국가가 해체된 후, 예컨대 “제3의 길”, “새로운 중도” 등의 이름 하에 심각하게 해체과정을 밟아 왔으며, 바로 그것도 이번의 공황이 이토록 심대해질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의 하나이다.
그러나 저들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일부의 ‘사회주의 혁명가들’도, 이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개는 어느 것이 누구의 깃발인지조차 치명적으로 착각하고 있다. 물론 독점자본의 반공선전에 녹아나고, 그 장단에 어릿광대 춤을 추면서 말이다.
4) 위기의 원인․성격에 대하여
앞에서 본 것처럼, 저들은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라는 식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 위기의 ‘근본 원인’이니 ‘근본적인 문제’니 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결국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요, 따라서 그에 대한 규제․감독․조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선, 저들의 주요 관심이 ‘시장에 대한 국가․정부의 규제․감독․조정’ 등에 가 있을 때, 저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에 대해서는 비록 희미하나마 무언가 감각․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의 적대성에 대해서는 전혀 어떤 인식․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저들은 공황의 진정한 원인이나 성격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고, 거기에서 바로 몰계급적인, 사실은 독점자본의 이익을 옹호하고 절대화․영구화하는, 대안 아닌 대안, 사민주의를 주장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절(節)을 바꾸어 고찰해보자
4. 공황의 원인․성격
금융상의 위기만이 아니다
극우적 이데올로그들의 경우도, ‘진보적 지식인들의 경우도, 저들이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이라고 할 때, 저들의 논의의 특징 중의 하나는 위기를 사실상 전적으로, 혹은 기본적 혹은 본질적으로 금융위기, 즉 신용위기로서 규정하고 취급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 저들은 그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의 위기’로 비화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혹은, 앞에서 본 우석훈 교수님처럼, “실물경제와 연관없는 위기는 진짜 위기는 아니(며)” “아직 한국의 실물경제는 대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면서, 장관 하나만 잘 갈아치우면 위기를 모면하고 비껴갈 것 같은 주장을 한다.
그러나 현 위기의 본질을 기본적으로 금융위기로 보면서 그것이 소위 실물경제로 비화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은 사실을 정확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관점은 현재의 위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부실화, 즉 주택의 대량 미분양 사태와 그에 따른 주택가격의 하락, 다시 그에 따른 주택대출 원리금 상환의 연체․불능화에서 유발되었다는 자신들의 인식, 그러한 사실 자체와도 모순된다.
현 상황은 분명 거대한 금융위기, 거대한 신용위기임에 틀림없다. 온 세상을 호령하며 쥐락펴락하던 거대 금융자본이 속속 파산하고, 거대 금융기관들이 서로가 서로의 지불능력을 믿지 못해서 돈을 움켜쥐는 바람에, 미국의 연방준비제도(FRB)를 위시한 각국의 중앙은행과 정부가 역사상 유례없는, 상상도 못했던 거액의 구제자금을 살포하고37) 있는데도 금리가 폭등하고 전세계 금융시장이 마비상태에 빠지다시피 하고 있는 현 상황38)은 분명 거대한 금융공황, 거대한 신용공황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금융공황, 신용공황은 결코 ‘실물경제’의 위기에 의하지 않은 자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실물경제’의 위기의 현상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
맑스는 말한다.
경제학의 천박성은 특히, 산업순환의 시기전환의 단순한 징후인 신용의 팽창과 수축을 그 원인으로 삼는 데에서 보인다. 일단 일정한 운동에 던져진 천체가 끊임없이 동일한 운동을 반복하는 것과 전적으로 마찬가지로, 사회적 생산도 그것이 일반 팽창과 수축이라는 교대하는 운동에 던져지자마자 이 운동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결과가 다시 또 원인이 되고, 그 자신의 조건들을 부단히 재생산하는 모든 과정의 부침은 주기성의 형태를 취한다.39)
화폐시장에서의 공황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은 생산과정 및 재생산과정 자체에서의 비정상을 표현하고 있다.40)
그리하여, 오늘날 여러 경제학자들이 현 위기를 단순히 금융위기로서 규정하면서, 규제․감독 등 금융상의 관행을 바꿈으로써 위기를 해결하고, 나아가 예방․회피할 수 있다고까지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경제학의 천박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은행과 신용은”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을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 강행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되고, 또한 공황과 사기(詐欺)의 가장 유효한 매체의 하나”41)이기 때문에, 공황의 규모, 그 심도나 격렬도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이지만, 그 작용은 어디까지나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현 위기의 심각성, 그 역사적 의의도 사실은 바로 그 점, 즉 그것이 단지 규제완화․감독소홀 등과 같은 금융관행상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단순한 금융위기․신용공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본질적으로 생산과 소비간의 엄청난 충돌, 엄청난 과잉생산에 의한 것이라는 데에 있다.
그 의의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고 지나가듯이 하는 말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번 위기는 금융에 대한 지나친 규제완화와 감독 부실에서 온 것” 운운하는 따위의 천박한 인식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지만,42) 누구나 인정하는 것처럼, 위기는 분명 주택의 과잉생산에 의해서 발발하였고, 이미 여러 분야, 여러 부문에서 그 과잉생산이 명확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최대 산업의 하나인 자동차 산업은 엄청난 과잉생산이 일어난 나머지 GM이나 포드, 크라이슬러 같은 ‘빅 쓰리’의 생존 가능성 여부가 이미 월스트리트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불과 수개월 전만해도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치던 철근, 철강도 이미 세계적 규모에서 엄청난 과잉생산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조선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반도체나 LCD 산업 등은 이미 지난해부터 그 가격이 심각하게 폭락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노동생산성의 급격한 발전에 의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엄청난 과잉생산, 그에 따른 출혈경쟁에 의해서 그렇게 폭락해 왔다. 기타 대부분의 산업부문에서도 물론 유사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산업은 현대 자본주의의 세계적인 주요 산업일 뿐 아니라 하나 같이 한국 자본주의의 명줄을 쥐고 있는 주요 산업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위기를 단지 금융상의 그것으로만 보는 백치증세 때문에, 강만수 장관 같은 주요 관료들뿐만이 아니라, 앞에서 본 것처럼, 그야말로 건필을 휘두르고 계신 우석훈 교수 같은 이도 한가하게도 “아직 한국의 실물경제는 대체적으로 위기에 직면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운운하고 있다.
우리는 앞에서 IMF의 쉬트라우스-칸 총재도, 이명박 대통령도 2009년 하반기, 그러니까 내년 하반기에는 경제가 서서히 회복․성장 국면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두 사람만의 주장이 아니다. 사실상 주요 부르주아 정책 담당자들, 이데올로그들의 주장이고, 사실은 소망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소망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문제를 본질적으로 금융위기로서 파악하면서 금융상의 패닉, 경색만 해소되면 위기 상황이 끝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이 현실로 실현될 가능성은 그다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는 하지만, 이번의 위기를 어찌 어찌 해서 내년까지는 극복하고 ‘호황’, 즉 생산의 확대국면으로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야말로 하루살이의 호황으로 끝나면서 곧바로 다시 대공황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엄청난 과잉생산은 동시에 노동자 대중의 거대한 빈곤화와 함께 진행되어 온 것이기 때문이다.
상황 (2) ― 노동자계급의 빈곤
공황은 수많은 자본을 파산으로, 조업단축으로, 인수합병으로, 구조조정으로 내몰고, 그만큼 수많은 노동자들을 실업으로, 과잉인구로, 산업예비군으로, 빈곤으로, 길거리로 내몬다. 그리고 공황의 규모, 그 심도, 그 격렬도가 크면 클수록 그 빈곤화가 그에 비례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공황에서도 이미 런던의 월스트리트에서, 런던의 씨티에서, 그리고 사실은 도처에서 이미 대규모의 ‘감원’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아직도 초발단계(初發段階)인 만큼 앞으로 더욱더 심각하고 더욱더 대규모의 더욱더 비극적인 소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현 공황의 배경을 이루는 지금까지의 빈곤화의 문제를 돌아보자.
월스트리트의 탐욕을 비난하는 극우 이데올로그들이든, 우리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든, 저들은, 앞에서 본 것처럼, 신자유주의를, 저들 독점자본이 기만적으로 표방하는 바에 따라, 단지 시장 대 국가의 문제로, 특히 주로 금융자본에 대한 규제완화, 감독 소홀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특히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비롯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억압의 강화가 그 핵심이다. 그리고 그것을 불가피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리고 물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면서 그 과정을 증폭시켜가고 있는 것은, 우선 노동생산력의 발전, 특히 자본주의적 생산의 틀 속에서의 과학기술의 혁명이다.
그리고 극소전자(ME)혁명, 정보통신(IT)혁명 등의 규정을 수반하면서 진행되어온 특히 지난 30여 년 동안의 과학기술혁명은, 이전의 어떤 과학기술혁명보다도, 자동화, 그것도 전면적 자동화, 나아가 무인생산(無人生産) 체제를 의식적으로 지향한 것이었고, 또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방향으로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물론 특별잉여가치․초과이윤을 취득하기 위한 자본의 탐욕과 패배는 곧 파산․몰락을 초래하는 경쟁이라는 외적 강제에 의해서 그렇게 추진되었다.
인간의 필요 충족을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합리적인 경제체제, 그러한 사회체제 하에서라면, 과학기술혁명에 따른 노동생산성의 비약적인 증대는 당연히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다. 물질적 생활수단의 생산을 위한 노동시간을 그만큼 단축할 수 있고, 그러한 필요노동시간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잠재되어 있는 인간적 자질을 개발하는 데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제에 기초한, 잉여가치․이윤을 위한 생산체제인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하에서는 그것은 노동자 대중의 재앙(災殃)이다. 소수의 노동자에게는 장시간 노동이 강제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실업과 반실업, 비정규직, 그에 따른 극심한 빈곤․고통이 강제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그 노동(시장)의 유연화, 구조조정 등은 모두 자본주의적 생산체제 하에서의 과학기술혁명의 그러한 작용을 강제․강화하고 제도화하는 억압기제이다. 그리고 바로 그에 의한 광범하고 심대한 대중의 빈곤 위에서 폭발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과잉생산위기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자본가 국가들이 설령 어떤 재정․금융 정책에 의해서, 즉 파산해가는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하고, 금융시장에 엄청난 ‘유동성’, 즉 지불수단을 공급함으로써 금융시장을 진정시킨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곧바로 공황을 끝내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폭발하고 있는 대공황은 바로 자본주이적 생산체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발전한 생산력으로서의 과학기술혁명이 사실상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독점자본이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억압의 강화체제로서의 신자유주의를 그토록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던 데에는 정치사적으로도 주요한 조건이 작용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조건 때문에 노동자 대중은 궁지에 몰리면서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갔다. 다름 아니라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그것이다.
주지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에 자본주의의 전반적인 위기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형태로 재격화되면서 신보수주의, 통화주의의 형태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에서 대처 정권의 성립과 더불어, 그리고 미국에서는 레이건 정권의 집권과 더불어 현실적인 정치권력으로 등장하여, 미국의 항공관제사 파업, 영국의 광산노동자파업이라는 내전을 거치고 그것들을 파괴하면서 자신을 강화해갔다. 말할 것도 없이, 수십 년 간에 걸친 집요한 선전과 공작․탄압으로 반쏘․반공 이데올로기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버티고 있고 발전하고 있는 한, 그것들을 아무리 이데올로기적으로 악마화하더라도 엄연한 사실이 자신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세․공격의 전면화를 위해서는 쏘련을 위시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가 먼저 파괴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레이건 정부 하에서 극도로 강화된 냉전은, 한편에서는 그 자체가 과잉생산의 부담을 완화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바로 20세기 사회주의 체제를 해체시키기 위한 전쟁 그것이었다. 무슨 구실을 내걸었던, 국제 노동운동 내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던 각양각색의 반쏘 선전, 반쏘 정치공작은 물론 그들 제국주의의 우군이었고, 지금도 물론 그렇다.
드디어 19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서 저들은 목적을 달성했다. 노동자계급은 좌절감과 방향상실증에 빠져들었고, 신자유주의는 거침없이 활개쳤다. 광범한 노동자 대중을 빈곤의 나락으로 내몰면서! 그리하여 사실은 자신의 묘혈을 파면서!
1. 2007년 말, 그리고 2008년 초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다. 너무나 더딘 보수적인 시간, 심지어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는 반동적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때론 메시아의 재림처럼 너무나 일찍 우리 곁에 오는 미래의 시간도 있다. 현재라는 찰나는 이 시간의 역동적 뒤엉킴, 과거와 현재가 갈라지는 분기점 속에 존재한다. 2007년 말, 2008년 초 우리는 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한다. 2007년 말 대선은 분명 반동의 시간이었다. 2008년 초 현재는 반동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2007년 말 대선 이후 2008년 4.9총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더디고 반동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명박 특검과 삼성 특검이 이 반동적 시간을 채웠다. 항간에서 떠도는 말처럼 한국 사회는 ‘미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또한 미래를 품고 있었다. 메시아처럼 재림하는 미래의 시간은,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선진당을 포함한 보수 세력이 개헌선인 2/3에 육박하는 압승과 민주노동당의 열세, 그리고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좌절해야 했던 진보신당의 실험이라는 ‘반동적 승리’와 함께 도래했다.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은 ‘대중’의 잠재적 역동성과 함께 우리 곁으로 도적처럼 왔다.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진단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 진보 정치운동의 실패를 ‘좌파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주의’, ‘몽상적이고 이상적인 좌파 운동’, ‘원칙을 고수하는 비대중적인 정치’ 등등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다름 아닌 그들이 오늘날 왜 보수우파들이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10년’의 바로 그 세력들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평가 자체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 운동에서 잃어버린 정신과 태도,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운동이 잃어버린 것은 그들이 실패한 원인으로 진단한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이미 ‘보수(保守)’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진보적이지만 그들의 관점과 현실 인식, 행위는 ‘보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보수화는 바로 이들처럼 보수화한, 퇴행적인 진보로부터 온다. 그들에게 ‘진보’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수(補修)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엄연한 세계화의 논리,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대중의 욕망과 세계화의 현실, 거부할 수 없는 경쟁의 논리와 물질적 풍요 등등을 말하면서 마치 그것이 ‘현실’이며 과학적 인식인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들뢰즈나 네그리가 말하는 ‘현행적인 것(the actual)’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에게 현실은 현재라는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과거 시간의 축적,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연속적 흐름 속에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미래라는 시간은 언제나 그 과거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유물론’이며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 소위 386세대의 보수화는 이명박의 ‘실용주의’로 표현되었다. 한때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합이 이야기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실용은 역사도, 정치적 당파도,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직 현재 주어진 것들 안에서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 보이는 것, 현재 존재하는 것, 현재 경험하는 것들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역사는 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항상 미래와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포착하는 ‘현재의 행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미래는 현재 주어진 것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것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 속에 있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승리할 수 있게끔 노력할 때에도 그는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라는 지평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유효한 현실을 지배하고 초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때의 ‘있어야 할’ 것은 구체적인 것이며 사실상 유일한 현실적이고도 역사적인 현실해석이며, 또 그것만이 만들어지는 역사요 만들어지는 철학이며 또 그것만이 정치”이다. 진보의 진정한 원칙, 좌파의 정신적 우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현재의 시간, 현실의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며 미래를 여는 운동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노동운동이 실리주의를 쫓아 우경화하고 사회운동이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비판하면서 노동운동과 대립하고 시민운동이 노동운동 내부로 들어와 사회적 합의주의와 사회적 조합주의를 만들어내면서 ‘위로부터 진행된 민주화’와 더불어 1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지배블록의 체제 내적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는 동안, 한국의 진보운동은 ‘있어야 할 것’으로서의 미래를 향한 진보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한국 사회의 보수화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보수화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진보운동 그 자체이다. 그것은 좌파 운동의 진보적 좌표, 이념의 상실이며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지평이 창출하는 생활과 욕망으로의 투항이다. 2007년 대선의 캐츠프레이즈였던 ‘부자’, ‘경제 대통령’의 꿈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적 헤게모니 하에서 생존 경쟁의 장으로 내몰리면서 ‘부자’를 꿈꾸는 대중의 욕망과 ‘현실’을 준거점으로 삼아 지배블록 내부로, 신자유주의적 생산성과 경쟁 논리에 투항하는 좌파 운동 전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2. 대중소비사회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
2008년 대선과 2009년 4.9총선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이었다. 거기에는 법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젝이 이야기하는, 라캉이 세운 욕망의 공식,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잉여-향락의 공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성이나 진실성, 정의로움 등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기서 관철되는 것은 ‘부자 되세요’라는 욕망의 코드뿐이었다. 그것은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a’였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는 ‘대중소비사회’의 풍요로움에 젖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풍요로움은 결코 ‘풍족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결핍, 결여’의 텅 빈 공백 속에 존재하는 ‘풍요로움’이었다. 풍요로움은 존재의 생명이 느끼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자본이 생산하는 ‘결핍’으로서의 풍요로움이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지구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5-60년대의 대중소비사회를, 기술적으로 보면 70년대 극소전자혁명을 기반으로 탄생한 것이다. 자본의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요구한다. 서구에서 자본의 시장 개척은 국내적으로 대량소비를 위한 시장체제로서 대중소비사회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전개되는 다품종소량생산체제는 대량생산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유연생산체제는 표준적이고 획일적인 하나의 상품으로 대중의 소비욕망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이 상품을 다각화하고 다양화함으로써 대중의 욕망을 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생산체제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결합시켜 상품을 다양화하는 유연한 생산체제, 포스트 포디즘으로 전환하였다. 이런 전환의 기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 70년대 초 극소전자혁명이다.
엘빈 토플러나 다니엘 벨은 정보사회의 특징으로 ‘노동과 문화의 결합, 일상의 미학화, 서비스업과 같은 3차 산업의 성장’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지식산업, 또는 정보산업의 발전은 자본의 무한증식욕구가 낳은 소비사회의 욕망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략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본적으로 물질적 형태를 가진 생산 형태에 근거한 자본의 생산체제는 더 많은 소비 시장의 창출을 위해 다양한 미적, 문화적 양식을 상품 생산 체제 내부로 끌어왔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상품의 필요에 대한 욕망, 즉 사용가치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기호적 측면에서 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이다. 자본은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욕망을 미학화하고 차별화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체성을 ‘상품 소비’에서 획득하도록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가 소비하는 상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다. ‘차이-차별화’의 욕망은 그가 소유한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본래적인 생명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이 불러일으킨 ‘의사-개별화’ 또는 ‘의사-개성화’로서, 상품소비의 욕망일 뿐이다. 브루디외의 ‘상징 자본’, 또는 하우크가 말한 ‘상품미학’은 대중의 소비욕망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책략에서 나온다. 여기서 욕망을 생산하는 것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차별화, 정체성의 욕망이다. 브랜드와 이미지는 남과 다르다는 자신만의 개성, 남과 다른 자신의 욕망, 자신의 치장을 생산하는 상품적 욕망의 정체성일 뿐이다. 따라서 화려한 쇼윈도의 상품들은 자본의 유혹이자 개인의 욕망을 소비적 정체성으로 전환시키는 코드화의 산물로서, 스펙터클한 자본의 세계일뿐이다.
한국에서 이런 대중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성장은 매우 압축적으로 전개되었다. 게다가 이런 전개는 87년 6.10민주항쟁 이후 이루어졌던 개량적이고 반혁명적인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대중소비사회의 성장은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내수시장의 확장과 7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자본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전환에 근거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와 더불어 나타났던 소위 ‘X세대’의 출현과 대중문화의 성장, 그리고 10대들의 대중문화에서의 주류화는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대중소비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정보사회는 대중을 ‘욕망’의 도가니로, 본격적인 소비사회-레저문화-문화사회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풍요로운 대중소비사회에서 ‘욕망’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향한 질주를 낳았다.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은 이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이나 윤리적 코드를 지키지 않는다. 자본은 그 욕망을 부추기며 욕망을 향한 질주, 충동의 끝없는 질주를 낳았다. ‘즐겨라’라는 지상명령은 자본의 상품 코드 속에서 숨 쉬며 더 많은 상품과 더 많은 잉여-향락을 요구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이 욕망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경제 살리기’, 그 욕망을 실현시켜 주지 못한 과거 정권에 대한 무능력에 대한 질타는 ‘실용주의’와 함께 ‘국익=국부’의 논리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70년대의 고도성장이라는 신화 속의 박정희는 결코 이 외설적인 아버지가 실현시킬 수 없는 ‘텅 빈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타자’는 없다.
그러므로 4.9총선이라는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신드롬의 극성(極盛)은 곧바로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4.9총선과 함께 대중의 욕망은 ‘텅 빈 존재’의 발견,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대타자(大他者)의 현실화 속에서 ‘욕망의 배반’을 경험해야 했으며 그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해야 했다. 그것은 지젝이 말했듯이 “만약 개인이 (‘거대한 타자’에게 투사된) 믿음을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사태 안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직접적으로 믿음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유물론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전체로서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전체로 본다면 그 안의 “모든 것은 없음(무)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유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바라듯이 “제도적인 상징적 차원에서 개인의 ‘거대한 타자’에 대한 지지를 없애는 일”, 즉 “진정한 문화혁명”으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와 같은 대중운동이 지닌 한계가 있다.
3. 자본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대중들은 단순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오히려 그들을 ‘예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예속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투쟁이 낳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왜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예속을 위하여 싸우는가?”라고 물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의 한국 정치 지형 속에서도 동일하게 물을 수 있다. 80년대 좌파에서 전향하여 포스트적 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알뛰세르는 ‘상상적 동일화’와 ‘호명이론’을 통해서 이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포스트 모던적 담론들은 지배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층위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요로부터 오는 ‘결핍’과 ‘결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다품종소량생산체제-유연생산체제-대중소비사회는 분명 대중의 욕망을 ‘결핍’에 대한 충족을 통해서 포획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이데올로기로 포획하는 것은 ‘향유’이며 ‘향락’이다. 그것은 ‘필요(need)’가 아니라 ‘충동(drive)’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가치’이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욕망의 기관차이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생산하며 창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교환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소비’를 창출해야 한다. 생산물의 등가 교환, 화폐체계를 통한 가치의 실현은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이며 ‘난점’이다. 생산/소비의 분리라는 이 이원적 체계의 고유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생산해야 한다. 대중소비사회는 이런 자본의 욕망이 생산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품미학의 전면화 속에서 성장하는 문화산업과 정보화에 기반하고 있는 지식정보산업의 활성화는 대중의 욕망을 다양화, 다원화하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배체제, 소득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정보화와 자동화라는 과학기술혁명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지젝이 말하듯이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욕망의 ‘텅 빈 공백’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라캉-지젝식으로 결코 획득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공(空)’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닌 내적 모순, 즉 이윤증식의 욕구 자체가 대중의 욕망을 배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생산-소비의 이원적 체계는 대중들의 소득 분배, 자본주의적 부의 사회적 분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생산력의 발전을 자본의 이윤증식체계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배제되고 축출되는 것은 노동이다.
임노동은 자본의 고유한 한계이자 난점이다. “맑스의 기준에서 볼 때 전체로서의 자본은 모든 전제 조건과 모든 가정들이 결과물로 나타나는 완전한 총체가 아니다. 전체로서의 자본은 반드시 어떤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임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자의 생명 없이 존속할 수 없다. 그들은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인간이며 살아있기 위해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 소비를 위한 재화는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으로부터 얻어진다. 따라서 노동의 배제는 임노동의 가치 저하와 함께 실질적 소득의 하락을 낳는다. 임금의 하락과 노동 강도의 강화, 광범위한 실업과 같은 산업예비군화, 소득의 양극화와 빈곤층의 확산이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화는 한편으로 생산의 유연화-노동의 유연화-다양한 시장의 창출과 더불어 대중소비사회의 욕망을 다원화하고 부추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배제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소비욕망을 제한한다.
이것은 포스트 모던적 ‘욕망’ 이론이 보지 못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노동패러다임’을 근대적 패러다임이라고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생산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간과한다. 대신에 그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대적 자기 한계보다 ‘소비’-‘욕망’에 주목한다. 고진은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환 체계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다. 들뢰즈는 ‘탈주’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의 지배를 생산하는 내적 모순을 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더 이상의 외부가 없는 자본의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본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다. 자본은 모든 존재를 상품의 가치로 표준화한다. 표준화하는 기제는 화폐이며 화폐는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존재 조건이 됨으로써 삶을 조직한다.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적인 삶으로 주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것을 전지구적인 존재 방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여기서 현실적인 것은 언제나 ‘상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욕망 자체가 ‘상품의 욕망’이며 ‘자본의 욕망’이다. 대중 운동의 역동성과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중들이 보는 현실은 자본주의이다. 그들의 육체가 체현하고 있는 것, 그들의 생명이 숨 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대중들은 이 현실만을 본다.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이 지닌 양면성이다. 그들이 욕구하는 것은 ‘자본의 현실’ 속에서 욕구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의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현실이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욕망은 오직 자기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가치, 탐욕스런 증식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중소비사회에서의 대중은 자본이 생산하는 상품과 화폐를 통해서 역으로 자신의 욕망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대중들이 왜 그 스스로 예속되기 위해 싸우는지, 아도르노처럼 왜 대중들이 권력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느끼는지 등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품-화폐-자본 물신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체제 그 자체가 생산하는 현실적인 메커니즘, 권력의 사회 생활적 물질성에 있다. 아울러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역동성은 언제나 ‘자본의 한계’ 안에서 양면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극히 자본적이면서 반자본적이다. 다만, 그들은 그 모순적인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체득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의 과정은 이것을 ‘대중들의 몸’ 속에 각인시킨다.
신자유주의-정보화-자동화는 한편에서 대중들의 눈앞에 화려한 쇼윈도를 펼쳐 놓고 무수한 욕망을 풀어헤치며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그것은 ‘자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자본은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하고자 한다. 가치의 생산은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욕망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전쟁 같은 노동’은 더욱 강화된다. 더 많은 대중들이 자본으로부터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무수한 욕망의 화려한 고리로부터 밀려나 주변인이 되거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는 생존의 위협 속에 놓이게 된다. 자본에 의해 생산된 욕망은 자본에 의해 배제된다.
대중은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대중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자각한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모순이다. 그들을 순진하게 아버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그들은 그 권력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거나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어 할 뿐이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주의-합리적 시장경쟁과 같은 자본주의적 규칙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들이 ‘부친살해’ 이후 등장하는 ‘상징계’, ‘규칙과 법칙을 지닌 상징’ 안에서의 욕망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코드를 버리고 오히려 그 이전의 ‘외설적 아버지’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이 이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대중운동이 지닌 역동성과 반자본적 역능성이 있다.
4. 대중의 양면성과 좌파의 보수화
과거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 끊임없이 현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계급투쟁은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투쟁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의 성격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경제를 전면화하였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성과 위에 선 김대중-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권은 이런 개인의 욕망을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쟁을 국가적 체제로 코드화하는, ‘국가 경쟁력 강화’와 ‘세계화’, ‘합리화와 효율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개인을 ‘무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실패는 ‘무능력하거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현실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이루어진 국익의 논리는 공공성의 논리 또는 사회연대적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특권적 계급인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세계화는 불가피한 현실로 승인되었으며 자본의 경쟁력 강화는 국가경쟁력 강화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국가권력은 이미 자본의 시녀로 존재하며 개인들은 자본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국가권력은 보편이해로 자신을 가장하는 외피조차 벗어던져 버렸다. 국가는 공공성과 대외적인 보호 장치들을 제거해 버렸다. 따라서 국가는 더 이상 ‘보편이해’를 가장한 ‘계급이해’의 장치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96-97년 노동법 총파업 투쟁을 비롯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곧바로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전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대중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공세를 몸으로 학습해 왔다. 대중들은 더 이상 자본의 규칙과 규범, 상징적 체계를 믿지 않는다. BBK나 ‘고소영 내각’, ‘강부자 내각’ 등 도덕적 이슈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4.9총선이 ‘뉴타운 건설’ 공약 속에서 이기적인 아귀다툼이 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제도적 규칙의 영향력이 쇠퇴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런 대중의 자본주의적 상징체계의 와해가 자본 그 자체를 향한 투쟁과 반자본의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 파괴의 욕망이 작동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성의 힘으로 전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중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현행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부정은 그들에게 ‘생존의 포기’와 ‘죽음의 공포’를 유발한다. 따라서 대중의 선택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자신의 삶이 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범과 가치가 아니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대다수의 대중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존’이다. 생존의 벼랑에서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은 차라리 단순하다. 그것은 그 권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강력한, 실제로 그 꿈을 실행시킬 수 있는 타자의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꿈꾼다. 그들은 자기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자신의 욕망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은 ‘도덕적 규범’을 포기할 정도로 강렬한 욕망에 비례하여 그 욕망의 대리적 구현자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위로부터의 민주화’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정권인 이상 애초부터 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하는 권력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대중들의 열망과 욕망을 배반하면서 빈부격차의 확대와 빈곤, 실업을 양산하였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와 집단적 패거리화는 그들의 욕망을 반영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반’이었다. 그것을 통해 대중은 국민국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왔다. 규칙은 파괴되었고 이 사회의 법적-제도적 권위는 훼손되었다. 사상 최악의 46%라는 투표율, ‘찍을 사람이 없다’거나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이콧을 행사한 유권자들은 이미 그것이 헛된 미망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반체제적, 반제도적인 도발성이 잠재되어 있다.
좌파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좌파 정치는 보수 우파의 담론 헤게모니에 스스로를 투항시켜 왔다. 보수 우파들의 논리는 언제나 주어진 현실을 기반으로, 현실주의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주어진 현실이 영원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논리가 바로 그들의 전통-보수(保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또한 이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성을 외치며 비현실적인 길이 아니라 ‘현실적’인 길을 원했다. 대중적인 것=현실적인 것이라는 사고 속에서 작동하는 정치학은 언제나 주어진 것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리하여 결국 자본의 욕망 속으로 포획되어 들어가는 ‘실정성의 정치학’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주어진 현실의 규칙과 규범이 오히려 그들 자신의 족쇄가 되며 그들 자신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그들은 더욱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현실적인 길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실질적인 주도권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제 실시, 부당노동행위가 있어도 현장의 운동은 자꾸만 실리화되었다. 노조 간부는 이미 노조 관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대중적인 욕망은 탁구공과 같다. 그것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노조 간부는 그 욕망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전부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현실’로 전제한 이후에 대중의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통제하는 실리의 정치, 실정성의 정치학을 추구했다. 따라서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미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부정하는 대중적 행위보다 퇴행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중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좌파는 이런 희망을 대중에게 주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실정성의 정치학’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적 시민-개인주의적 인간에 기반하고 있는 시민사회운동이 그러했으며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정치학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한국의 관료화된 노동운동이 그러했다. 게다가 좌파의 정치운동을 지향하는 정파운동은 80년대의 서클 운동과 연고적인 봉건적 운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들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힘=권력’이다. 물론 이 ‘힘에의 의지’는 이중적이다. 대중은 모래알같이 흩어진 나약한 개인들이다. 여기서 권력은 생성될 수 없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 결집되는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권력의 집단적 생성, 권력의지의 집합체가 생성되지 않는다면 대중의 ‘권력 의지’는 정반대의 ‘의지’, ‘권력의 품으로 안기는 길’로 전화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중들의 권력 의지는 철저하게 양면적이다. 그것은 죽음 본능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죽음 본능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낡은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생성되지 않는 이상, 대중의 권력의지는 더욱더 강한 대타자를 요구하는, 파시스트적 권력을 요구하는 욕망으로 전화될 수 있다.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한국에서의 파시스트적 권력에 대한 신드롬은 이런 욕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욕망이 지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의 권력의지를 대중 자신의 권력으로 전화시켜야 하는 좌파 정치운동의 문제이다. 지난 10년 동안 좌파는 그 권력의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난 대선과 4.9총선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보수화된 것은 대중이 아니라 좌파운동 그 자체이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의 좌파는 없다.
5. 적대적 모순의 다원화와 좌파의 실패
좌파의 보수화는 87년 이후, 그리고 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지배체제의 재코드화가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한국의 진보운동은 자유주의적 민주화와 대중소비사회의 다원화 속에서 진로를 잃고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서 대중의 욕망을 좇아가는 ‘실정성의 정치학’으로 빠져들었다. 보비오의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과 하버마스의 생활세계가 시민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제공하면서 시민사회의 주류로 등장하는 동안 이들과 대립했던 좌파는 자본주의적 지배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성의 지평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발본적인 세력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방향 전환의 기저에는 정치에 대한 니힐리즘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87년 민주항쟁에 이은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속에서 포획되고 자유주의적으로 구축되는 지배헤게모니에 대한 좌파의 좌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대중은 자본의 지배 헤게모니 안으로 코드화되어갔다. 자본의 강력한 힘은 대중을 조직했다. 좌파는 좌절했으며 대중의 욕망을 조직하는 ‘권력’에 공포를 느꼈다. 현실적으로 더욱 냉혹해지는 자본의 공세에도 대중은 자본의 지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결핍’은 생산되었지만 그들은 ‘향유’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좌파의 현실 정치학은 생산과 권력의 거시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생활과 장소, 소비의 영역으로 대체되었다. 아울러 현실에 대한 비판은 대중의 욕망을 더욱 급진화할 수 있는 정치적 강령과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행동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급진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사회문화적 소비와 욕망을 심리적이고 미학적으로 탐색하면서 근대성의 내면을 파헤치는 이론적 급진주의와 미학적 비판주의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좌파가 상실한 것은 ‘대중의 역동성’을 정치적 권력체로 조직하는, 유물론적 정치학의 ‘변증법적 예술’이다.
그들은 ‘대중’을 알자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대중’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중은 숭배의 대상도, 비판의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중의 양면성은 곧 자본주의라는 현실, 자본이 내적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분명 대중은 상품 물신성의 지배적 효과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은 모든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완전하게 포획할 수 없다. 자본의 한계는 고진이 말했듯이 임노동과 자연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이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것을 온전히 포획할 수 없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생산과 소비라는 이원적 체계의 정치경제학적 지형을 벗어날 수 없다.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지만 서로 균형을 맞추며 맞물려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불황과 공황으로 빠져든다. 생산량에 맞추어 소비량이 조절되어야 하며 소비를 통해서 생산의 힘이 창출되어야 한다. 여기서 양자를 매개하는 것은 ‘임노동’이다. 자본은 ‘임노동’ 없이 생산을 가동할 수 없다. 임노동의 재생산은 소비로부터 주어진다. 따라서 임노동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모순은 중첩적으로 응축된다. 대중소비사회는 자본의 이 모순을 임노동자에게 전가하면서도 다양한 소비 욕망의 창출을 통해서 지배를 구축했다. 이것은 물론 자본의 의식적인 의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 자본의 생산이 요구하는 내적 논리를 따라 이루어졌다. 대량생산, 거대하게 축적된 자본은 대중의 거대한 소비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대중소비사회의 창출은 자본의 지배에서 이중의 효과를 낳았다. 첫째, 임노동을 더욱더 생산의 지배 메커니즘으로 끌어들였다. 다원화된 소비의 양태를 통해 ‘향유’의 메커니즘을 생산하고 이에 대한 욕망을 코드화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돈을 획득하는 생산의 장에서의 몰입, 자본주의적 생산의 지배를 자신의 필요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소비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한다. ‘돈만 있으면 이 세계는 정말 살만한 곳이다.’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 모래알처럼 개별화된 개인을 소비하는 개인으로 바꿈으로써 정치적 지배의 억압성을 감추었다. 문화산업과 상품미학은 대중의 욕망을 다원화된 상품적 욕망으로 코드화함으로써 냉혹한 자본의 지배를 망각하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실사회의 종언’이, 보드리야르의 ‘시물라시옹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지배의 효과에도 생산과 소비의 이원적 체계, 그리고 자본 증식으로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의 지배는 자본의 적대선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면서 모순을 중첩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욕망은 생산 내부에서 착취의 논리로 전환되며 노동자들을 자본의 지배에 순응시키는 기제가 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유연생산체제는 다품종소량생산과 다양한 욕망의 스펙터클을 펼쳐놓지만 그런 욕망의 다원화는 생산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박탈된다. 생산의 영역에서 모순은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배제로 이어지고 소비자인 임노동의 소득을 박탈한다. 일시적으로 노/자의 단일한 모순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파견 근로와 변형노동, 파트타임노동으로 분산되며 이주노동자와 같은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차별과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중적 착취로 변형되며 노동자 내부의 대립과 갈등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그런 대립과 갈등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 양자로부터 축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의 노동자들의 양면성에는 이런 내부 분할과 반자본의 일탈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특히 자연과 소비의 일상적 생활 영역에서 나타나는 자본의 내적 모순은 모든 생명에 대한 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의 모순은 생산에서가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적대성을 생산한다. 그것은 적대적 모순이 사회운동 차원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미국 쇠고기 수입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량생산을 하는 축산업이 낳은 광우병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유전자변형생물체와 식품들이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며 환경호르몬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먹을거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 자체가 자본 증식의 도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 발생하는 인종적이고 성적인 착취의 구조뿐만 아니라 소비 영역에서 발생하는 교육, 의료, 먹을거리, 환경과 같은 문제들이 ‘반자본’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여기서 생산 영역에서 진행되는 계급적대의 구조는 사회 영역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의 생활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중첩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생산이냐 소비냐, 또는 거시적 구조냐 미시적 생활세계냐, 국가냐 생활이냐의 대립에 있지 않다. 60년대 이후 서구의 소비자자본주의와 소비사회론을 비롯하여 고진까지 ‘소비’에 중심을 두고 ‘생활’의 영역에서, 일반 시민들의 삶의 영역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이런 자본의 정치경제학적 모순, 즉 생산의 내부에 존재하는 적대의 메커니즘과 모순의 중첩성을 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생산 중심의 노동운동, 또는 노동자계급 중심성만을 외치면서 소비의 영역을 쁘띠부르주아적 시민운동으로 치부하는 소위 ‘정통’적 맑스주의 또한 소비의 영역이 생산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의 모순을 전가시키고 분산시키는 또 다른 지배의 양식이라는 점을 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대중적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 노동운동의 정치화와 사회운동의 적색화, 적․녹․흑의 연정이 필요하다. 사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좌파운동은 그전에 그들이 기반하고 있었던 노/자간의 단일한 적대에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지형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에 좌파들의 전략도 바뀌었다. 특히, 시민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좌파 또한 다양한 영역으로 자신의 영역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좌파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상실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을 고수하는 소위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완고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소위 진보운동 진영 내부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계급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맑스주의와 무정부적 코뮌 운동의 대립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역설적이게도 적대적 모순을 다원화하는 자본의 분산 전략과 지배적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확장되는 자본의 모순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결집시키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에 대한 임무의 해체 또는 망각이었다.
6. 대중에 대한 공포와 대중의 권력
대중은 언제나 꿈을 꾼다. 유토피아는 그들이 꾸는 꿈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꿈이 미래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유토피아적 꿈을 꾸지 않는다. 그들은 각박하게 경쟁하면서 생존의 벼랑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상호 호혜적으로 교환하는 코뮌적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일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그것을 ‘공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상’이 ‘공허한 원칙’처럼 느껴지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어딘가에 이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세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과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광기이며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속으로 몰려드는 대중적 폭발력은 그 힘을 느끼는 순간, 점화된다. 따라서 현실화의 문제는 지금 경험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현실화는 지금 존재하는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 힘의 문제이다. 대중들이 더 이상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고 자본으로 투항하는 것은 그것의 힘을 발견할 수 없거나 믿음을 줄 수 있는 비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전은 단순한 관념 또는 이론적인 정책이거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결집된 힘이다. 한국의 좌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은 바로 이것이며 다시 솟구쳐 오르는 대중투쟁 속에서 피어나는 미래를 창조해야 하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것은 ‘권력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중의 권력 의지가 지닌 이 양면성에서 지식인들은 공포를 느낀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소위 진보적이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대중파시즘이라는 유령과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제도적 신화가 유행했다. 지난 10년간 유포되었던 대중독재, 대중파시즘이라는 대중공포증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제도권으로의 투항을 합리화하는 변호론이 되었으며 그들만의 엘리트주의를 생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역으로 정치적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고 적극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되었다. 반면 ‘현실성’을 이야기하면서 ‘제도권으로 투항한 지식인들’은 현재 주어진 지배 권력과 체제만을 현실적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기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대중 위에 서는 정치권력으로의 투항이며 엘리트주의자로서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권력자로의 변신이다.
그러나 좌파들 또한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 운동은 이런 담론에 대한 대립 지점에 서 있었다. 제도적 포획과 코드화를 벗어나 대중 자신의 권력, 코뮌적 권력을 꿈꾸었던 비제도적 좌파들은 그 반대편에서 ‘국가=전체주의’라는 유령을 만들어왔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전치시키는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파괴해 왔다. 그들은 부르주아 대의제가 생산하는 ‘재현=대표(representation)’의 코드화를 벗어난 민중 자신의 권력, 코뮌적 자치 권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양면성을 무시하거나 애써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대중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때론 국가로, 정당으로, 과학자(황우석)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이 대중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그들의 욕망을 대변할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한다. 물론 여기에 전체주의와 포풀리즘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데 있지 않다. 그들의 욕망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주어진 자본주의적 현실로부터 비상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표=대리’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민중이 자기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권력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강력한 국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그들 스스로 노예가 되길 바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 권력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열정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희망을 주어야 한다. 권력의 지평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하여 부르주아적 헤게모니가 아니라 민중적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대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처럼 국가장치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의회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전술적 문제가 아니라 그 권력이 사용되는 방향이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은 비록 위로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성패는 그 권력을 민중들에게 돌려주는 것, 민중들 자신을 권력의 주인이자 자치적 권력체로 조직할 수 있는 민중권력을 창출하는 데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화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열망을 권력화하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이다. 대중이 ‘영웅’을 요구한다고 벌써부터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좌파에게 오직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 스스로 정치가가 되고 ‘정치적 권력체’가 되도록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취하는 길은 주어진 현실의 모순 속에 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사회적 변혁의 과정 또한 하나의 길, 하나의 경로를 가지는 것도 아니며 한 번의 혁명으로 이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의 좌파운동이 가지고 있는 지식인의 관념적 사고이거나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한 번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혁명이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질의 사회적 형태와 권력의 형식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혁명의 순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연속적이고 영구적인 혁명의 출발일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좌파 운동 내부에는 이런 순진함이 존재한다. 순진함은 그것의 열정으로 표현될 때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진함이 현실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할 때, 혁명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반동적 권력이 될 수 있다. 소위 레닌주의자를 자처했던 ‘왕년의 볼셰비키’가 그러했으며 ‘이성의 화신’으로 전화된 스탈린주의적 당 독재가 그러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 사회주의 혁명의 계몽가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다. 우매한 대중들이 혁명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모순적인 현실의 운동, 모순적이기 때문에 역동적인 대중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유물론적인 정치학이 필요하다. 만일 레닌주의적 원칙과 계급투쟁의 단순화로 현실을 재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중의 양면성을 자신의 과학과 이성으로 단죄하고 바꾸고자 하는 엘리트주의, 대리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제도냐 반(反)제도냐에 있지 않다. 의회주의와 반(反)의회주의의 대립쌍은 동일한 오류를 반복할 뿐이다. 시민운동과 정치-정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의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전자는 ‘실정성의 정치학’에, 후자는 생디칼리즘적인 주의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을 뿐이다. 이제는 이 대립을 벗어나 ‘반자본’의 대중적 권력의지, 집합적 권력의지를 창출하기 위한 좌파 공동의 정치 전략과 전술이 모색되어야 한다.
7. 집합적 권력의지를 향한 좌파의 정치
대중은 자본의 모순 속에서 자신의 모순을 반복적으로 생산한다. 대중의 역동성은 이 모순의 반복 속에서 예측불가능하게 튀어나온다. 따라서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희망을 만드는 것은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대중, 즉 민중이다. 4.9총선의 참패를 느낄 사이도 없이 대중의 반란은 시작되었다. ‘이명박 탄핵서명운동’과 ‘촛불집회’를 만든 것은 좌파가 아니라 대중이었다. 좌파가 한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때 대중은 이미 행동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는 한국의 좌파가 그 행동에 대해 행동으로 대답할 때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집회를 쫓아다니면서 촛불 하나를 더 켜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이미 그 행동을 스스로 조직했다. 한국의 좌파들이 해야 할 일은 대중의 파괴적 힘을 ‘민중의 권력’으로, 민중 자신의 권력으로 조직하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목마른 것은 미래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힘이다.
이 힘을 창출하기 위해서 좌파는 첫째,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펼쳐놓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을 거시적으로 탐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지형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미학적이고 해석적인 근대성에 대한 탐색은 미시적 작동을 밝혀주지만 적대의 기본적인 선을 등한시하거나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은 ‘노/자의 단일한 적대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대의 모순은 다양한 적대의 선을 타고 분산되며 적대적 대립의 양축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그런 적대적 모순의 다원화, 다양화는 자본의 내적 모순을 해소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적대의 선을 분산시키며 궁극적으로 자본의 내적 모순을 확장시킬 뿐이다. 따라서 적대의 선을 분산하는 운동은 결국 자본의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둘째, 적대의 선이 다원화되는 생산-소비의 영역에서 중첩되고 응축되는 적대의 선을 다시 포착해야 한다. 적대의 선이 다양화하는 것은 곧 ‘반자본’적 운동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산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실업자와 노동자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적색과 녹색, 적색과 흑색의 대립을 넘어 함께 자본의 힘에 대항하면서 민중적인 권력, 민중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 비전과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그것은 적대적 모순을 분산시키면서 적대의 선을 약화시키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 확산을 새로운 사회의 창조적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영역의 확장은 새로운 사회구성의 힘이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의 다양한 계급운동과 생활 영역에서의 시민운동, 그리고 자본의 반생명적, 반인간적 지배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의 보편성을 반자본이라는 공통의 전략 속에서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중첩되는 모순의 공통성을 통해서 연대의 틀을 짜는 것이자 새로운 사회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며 대중들을 대항적 권력체로, ‘권력의지의 집합체’로 묶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물론 코뮌이다. 자본의 적대적 모순은 다양한 형태의 코뮌을 생산한다. 문제는 이 코뮌을 반자본의 대항적 권력체로,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권력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주의를 반복하거나 제도화, 권력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기존의 국가 장치까지를 포함한 ‘민중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가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이 전략적으로 향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의회전술을 포함하여 민중적 권력을 생산할 수 있는 공동의 전략과 전술, 아젠다를 개발하고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셋째, 좌파의 유물론적 정치학을 복원해야 한다. 유물론적 정치학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주목하며 그 모순에 의해 생성되는 변혁의 파토스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정을 자본과 다른 사회의 질과 형식으로 주체화하는 정치이다. 대중의 양면성은 관념적으로 재단되거나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형식 속에서 에토스적으로 조직되어야 할 대상이다. 대중의 양면성은 대중 그 자신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사회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양면성은 끊임없는 혁명의 파토스를 만들어내는 현실적 기반이며 새로운 사회의 대중적 열망을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기 통치 권력으로 조직할 수 있는 원천이다.
그러나 그런 대중의 열정은 결코 그 자체로 자본을 대체하는 사회적 권력이 될 수 없다. 대중들은 새로운 사회를 생산하는 형식 속에서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이념을 쫓는 좌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좌파가 대중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권력적 형식, 새로운 주체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창안하면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질의 사회적 형식을 지금-여기서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의 내적 모순에 근거하지만 결코 그 내부적 형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을 자본의 외부, 새로운 사회의 형식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형식과 질을 가진 조직적 형식을 지닌다. 이것을 ‘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 위에 서는 권력이 아니라 대중의 권력을 창출하기 위한 권력적 체계와 위상을 가진 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의회정당 또는 스탈린적 정당 개념을 넘어서야 하며 비제도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 비제도적 정당은 그 자체가 자본의 안에서 밖을 모색하고 밖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모순의 끊임없는 재생이며 그 재생의 과정 속에서 미래를 생산한다.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자신을 정화하여 꽃을 피운다. 진흙탕은 현실이다. 문제는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역동적 힘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결단이다. 행위는 무오류로부터 나올 수 없다. 행위는 오류를 검증하려는, 그리하여 스스로 추락하며 다치는 행위를 통해서 생산된다. 좌파의 관념화된 정치학이 전화되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대중에 대한 공포가 계몽을 만들고 지도자를 만들고 대리주의적 권력과 관료주의를 만든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진실로 혁명적 운동이 범한 오류는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좌파는 이 역사적 짐을 스스로 떠맡는 자들이다. 대중은 결코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도 반혁명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대중은 모순적이며 이 모순이 그들로 하여금 진실로 혁명적이게 만든다. 문제는 그 혁명성을 새로운 집합적 권력의지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좌파는 이 모순을 떠안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혁명적일 수 있다.
김성구(편집위원장, 한신대) / 2008년09월23일 14시43분
한국인권뉴스 / 2008년09월24일 9시58분
최덕효(대표 겸 기자)
[한국인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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