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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보수화와 진보의 좌절, 그리고 미래 (pyg)

 

1. 2007년 말, 그리고 2008년 초

시간의 흐름은 일정하지 않다. 너무나 더딘 보수적인 시간, 심지어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되돌리는 반동적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때론 메시아의 재림처럼 너무나 일찍 우리 곁에 오는 미래의 시간도 있다. 현재라는 찰나는 이 시간의 역동적 뒤엉킴, 과거와 현재가 갈라지는 분기점 속에 존재한다. 2007년 말, 2008년 초 우리는 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 존재한다. 2007년 말 대선은 분명 반동의 시간이었다. 2008년 초 현재는 반동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2007년 말 대선 이후 2008년 4.9총선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은 더디고 반동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명박 특검과 삼성 특검이 이 반동적 시간을 채웠다. 항간에서 떠도는 말처럼 한국 사회는 ‘미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또한 미래를 품고 있었다. 메시아처럼 재림하는 미래의 시간은,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선진당을 포함한 보수 세력이 개헌선인 2/3에 육박하는 압승과 민주노동당의 열세, 그리고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좌절해야 했던 진보신당의 실험이라는 ‘반동적 승리’와 함께 도래했다. 과거와 미래의 동시성은 ‘대중’의 잠재적 역동성과 함께 우리 곁으로 도적처럼 왔다.
대선에서의 실패 이후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진단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한국 진보 정치운동의 실패를 ‘좌파의 무능력’과 ‘정책 실패’, ‘현실적이지 못한 이상주의’, ‘몽상적이고 이상적인 좌파 운동’, ‘원칙을 고수하는 비대중적인 정치’ 등등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다름 아닌 그들이 오늘날 왜 보수우파들이 이야기하는 ‘잃어버린 10년’의 바로 그 세력들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들의 평가 자체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 운동에서 잃어버린 정신과 태도, 관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진보운동이 잃어버린 것은 그들이 실패한 원인으로 진단한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역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이미 ‘보수(保守)’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은 진보적이지만 그들의 관점과 현실 인식, 행위는 ‘보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보수화는 바로 이들처럼 보수화한, 퇴행적인 진보로부터 온다. 그들에게 ‘진보’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 그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보수(補修)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엄연한 세계화의 논리, 신자유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대중의 욕망과 세계화의 현실, 거부할 수 없는 경쟁의 논리와 물질적 풍요 등등을 말하면서 마치 그것이 ‘현실’이며 과학적 인식인 것처럼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이미 들뢰즈나 네그리가 말하는 ‘현행적인 것(the actual)’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에게 현실은 현재라는 시간을 구성하고 있는 과거 시간의 축적,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연속적 흐름 속에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미래라는 시간은 언제나 그 과거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들은 그것을 ‘유물론’이며 ‘현실주의’라고 말한다.
지난 대선에서 소위 386세대의 보수화는 이명박의 ‘실용주의’로 표현되었다. 한때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연합이 이야기되기도 했다. 그들에게 실용은 역사도, 정치적 당파도, 이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오직 현재 주어진 것들 안에서 현실을 긍정하고 현실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 보이는 것, 현재 존재하는 것, 현재 경험하는 것들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역사는 이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는 항상 미래와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포착하는 ‘현재의 행위’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미래는 현재 주어진 것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주어진 것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행위’ 속에 있다.
그람시가 말했듯이 “……승리할 수 있게끔 노력할 때에도 그는 여전히 유효한 현실이라는 지평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 유효한 현실을 지배하고 초월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때의 ‘있어야 할’ 것은 구체적인 것이며 사실상 유일한 현실적이고도 역사적인 현실해석이며, 또 그것만이 만들어지는 역사요 만들어지는 철학이며 또 그것만이 정치”이다. 진보의 진정한 원칙, 좌파의 정신적 우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자본’이라는 현재의 시간, 현실의 공간을 부정함으로써 미래를 선취하는 것이며 미래를 여는 운동이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노동운동이 실리주의를 쫓아 우경화하고 사회운동이 ‘노동운동의 중심성’을 비판하면서 노동운동과 대립하고 시민운동이 노동운동 내부로 들어와 사회적 합의주의와 사회적 조합주의를 만들어내면서 ‘위로부터 진행된 민주화’와 더불어 10년 동안의 신자유주의 지배블록의 체제 내적 파트너가 되어가고 있는 동안, 한국의 진보운동은 ‘있어야 할 것’으로서의 미래를 향한 진보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한국 사회의 보수화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한국 사회의 보수화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진보운동 그 자체이다. 그것은 좌파 운동의 진보적 좌표, 이념의 상실이며 자본의 신자유주의적 지평이 창출하는 생활과 욕망으로의 투항이다. 2007년 대선의 캐츠프레이즈였던 ‘부자’, ‘경제 대통령’의 꿈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자본의 지배적 헤게모니 하에서 생존 경쟁의 장으로 내몰리면서 ‘부자’를 꿈꾸는 대중의 욕망과 ‘현실’을 준거점으로 삼아 지배블록 내부로, 신자유주의적 생산성과 경쟁 논리에 투항하는 좌파 운동 전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2. 대중소비사회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

2008년 대선과 2009년 4.9총선은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이었다. 거기에는 법도, 도덕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젝이 이야기하는, 라캉이 세운 욕망의 공식,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잉여-향락의 공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도덕성이나 진실성, 정의로움 등등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기서 관철되는 것은 ‘부자 되세요’라는 욕망의 코드뿐이었다. 그것은 지젝이 말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a’였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을 거치는 동안, 한국사회는 ‘대중소비사회’의 풍요로움에 젖어 있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풍요로움은 결코 ‘풍족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생산되는 ‘결핍, 결여’의 텅 빈 공백 속에 존재하는 ‘풍요로움’이었다. 풍요로움은 존재의 생명이 느끼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자본이 생산하는 ‘결핍’으로서의 풍요로움이었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전개되는 자본의 지구화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5-60년대의 대중소비사회를, 기술적으로 보면 70년대 극소전자혁명을 기반으로 탄생한 것이다. 자본의 대량생산은 대량소비를 요구한다. 서구에서 자본의 시장 개척은 국내적으로 대량소비를 위한 시장체제로서 대중소비사회를 만들어냈다. 오늘날 전개되는 다품종소량생산체제는 대량생산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유연생산체제는 표준적이고 획일적인 하나의 상품으로 대중의 소비욕망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이 상품을 다각화하고 다양화함으로써 대중의 욕망을 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생산체제는 대량생산이 아니라 생산의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결합시켜 상품을 다양화하는 유연한 생산체제, 포스트 포디즘으로 전환하였다. 이런 전환의 기술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 70년대 초 극소전자혁명이다.
엘빈 토플러나 다니엘 벨은 정보사회의 특징으로 ‘노동과 문화의 결합, 일상의 미학화, 서비스업과 같은 3차 산업의 성장’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지식산업, 또는 정보산업의 발전은 자본의 무한증식욕구가 낳은 소비사회의 욕망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키는 전략과 맥락을 같이 한다. 기본적으로 물질적 형태를 가진 생산 형태에 근거한 자본의 생산체제는 더 많은 소비 시장의 창출을 위해 다양한 미적, 문화적 양식을 상품 생산 체제 내부로 끌어왔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상품의 필요에 대한 욕망, 즉 사용가치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기호적 측면에서 생산하려는 자본의 전략이다. 자본은 대중에게 그들 자신의 욕망을 미학화하고 차별화함으로써 그 자신의 정체성을 ‘상품 소비’에서 획득하도록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그가 소비하는 상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다. ‘차이-차별화’의 욕망은 그가 소유한 것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본래적인 생명적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이 불러일으킨 ‘의사-개별화’ 또는 ‘의사-개성화’로서, 상품소비의 욕망일 뿐이다. 브루디외의 ‘상징 자본’, 또는 하우크가 말한 ‘상품미학’은 대중의 소비욕망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책략에서 나온다. 여기서 욕망을 생산하는 것은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 차별화, 정체성의 욕망이다. 브랜드와 이미지는 남과 다르다는 자신만의 개성, 남과 다른 자신의 욕망, 자신의 치장을 생산하는 상품적 욕망의 정체성일 뿐이다. 따라서 화려한 쇼윈도의 상품들은 자본의 유혹이자 개인의 욕망을 소비적 정체성으로 전환시키는 코드화의 산물로서, 스펙터클한 자본의 세계일뿐이다.
한국에서 이런 대중소비사회와 정보사회의 성장은 매우 압축적으로 전개되었다. 게다가 이런 전개는 87년 6.10민주항쟁 이후 이루어졌던 개량적이고 반혁명적인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대중소비사회의 성장은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을 기반으로 한 내수시장의 확장과 70년대까지 지속되었던 자본의 형식적 포섭에서 실질적 포섭으로의 전환에 근거하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후 민주화와 더불어 나타났던 소위 ‘X세대’의 출현과 대중문화의 성장, 그리고 10대들의 대중문화에서의 주류화는 이를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대중소비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한 정보사회는 대중을 ‘욕망’의 도가니로, 본격적인 소비사회-레저문화-문화사회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풍요로운 대중소비사회에서 ‘욕망’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욕망을 향한 질주를 낳았다.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은 이와 함께 이루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이나 윤리적 코드를 지키지 않는다. 자본은 그 욕망을 부추기며 욕망을 향한 질주, 충동의 끝없는 질주를 낳았다. ‘즐겨라’라는 지상명령은 자본의 상품 코드 속에서 숨 쉬며 더 많은 상품과 더 많은 잉여-향락을 요구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은 이 욕망의 화신으로 등장했다. ‘경제 살리기’, 그 욕망을 실현시켜 주지 못한 과거 정권에 대한 무능력에 대한 질타는 ‘실용주의’와 함께 ‘국익=국부’의 논리를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외설적인 아버지의 귀환’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70년대의 고도성장이라는 신화 속의 박정희는 결코 이 외설적인 아버지가 실현시킬 수 없는 ‘텅 빈 존재’이기 때문이다. ‘대타자’는 없다.
그러므로 4.9총선이라는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신드롬의 극성(極盛)은 곧바로 그것의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4.9총선과 함께 대중의 욕망은 ‘텅 빈 존재’의 발견, 결국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대타자(大他者)의 현실화 속에서 ‘욕망의 배반’을 경험해야 했으며 그 욕망의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해야 했다. 그것은 지젝이 말했듯이 “만약 개인이 (‘거대한 타자’에게 투사된) 믿음을 박탈당한다면, 그들은 사태 안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직접적으로 믿음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유물론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전체로서의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전체로 본다면 그 안의 “모든 것은 없음(무)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유물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바라듯이 “제도적인 상징적 차원에서 개인의 ‘거대한 타자’에 대한 지지를 없애는 일”, 즉 “진정한 문화혁명”으로 발전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촛불집회와 같은 대중운동이 지닌 한계가 있다.


3. 자본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대중들은 단순한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 욕망이 오히려 그들을 ‘예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여기서 예속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투쟁이 낳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는 “왜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구원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예속을 위하여 싸우는가?”라고 물었다. 우리는 이것을 오늘날의 한국 정치 지형 속에서도 동일하게 물을 수 있다. 80년대 좌파에서 전향하여 포스트적 담론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알뛰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 라캉의 욕망이론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알뛰세르는 ‘상상적 동일화’와 ‘호명이론’을 통해서 이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포스트 모던적 담론들은 지배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층위가 단순히 생존을 위한 필요로부터 오는 ‘결핍’과 ‘결여’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다품종소량생산체제-유연생산체제-대중소비사회는 분명 대중의 욕망을 ‘결핍’에 대한 충족을 통해서 포획하지 않는다. 대중의 욕망을 이데올로기로 포획하는 것은 ‘향유’이며 ‘향락’이다. 그것은 ‘필요(need)’가 아니라 ‘충동(drive)’이다. 자본은 ‘자기 가치를 증식하는 가치’이다. 그것은 멈출 수 없는 욕망의 기관차이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을 생산하며 창조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은 교환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소비’를 창출해야 한다. 생산물의 등가 교환, 화폐체계를 통한 가치의 실현은 자본주의 생산에 내재하고 있는 모순이며 ‘난점’이다. 생산/소비의 분리라는 이 이원적 체계의 고유한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은 대중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으로 생산해야 한다. 대중소비사회는 이런 자본의 욕망이 생산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오늘날 상품미학의 전면화 속에서 성장하는 문화산업과 정보화에 기반하고 있는 지식정보산업의 활성화는 대중의 욕망을 다양화, 다원화하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분배체제, 소득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정보화와 자동화라는 과학기술혁명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적 공세는 지젝이 말하듯이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욕망의 ‘텅 빈 공백’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라캉-지젝식으로 결코 획득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공(空)’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본주의 그 자체가 지닌 내적 모순, 즉 이윤증식의 욕구 자체가 대중의 욕망을 배제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생산-소비의 이원적 체계는 대중들의 소득 분배, 자본주의적 부의 사회적 분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생산력의 발전을 자본의 이윤증식체계로 바꾸어 놓는다. 여기서 배제되고 축출되는 것은 노동이다.
임노동은 자본의 고유한 한계이자 난점이다. “맑스의 기준에서 볼 때 전체로서의 자본은 모든 전제 조건과 모든 가정들이 결과물로 나타나는 완전한 총체가 아니다. 전체로서의 자본은 반드시 어떤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스스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임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자의 생명 없이 존속할 수 없다. 그들은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인간이며 살아있기 위해 생산하고 소비해야 한다. 소비를 위한 재화는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으로부터 얻어진다. 따라서 노동의 배제는 임노동의 가치 저하와 함께 실질적 소득의 하락을 낳는다. 임금의 하락과 노동 강도의 강화, 광범위한 실업과 같은 산업예비군화, 소득의 양극화와 빈곤층의 확산이 이루어진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화는 한편으로 생산의 유연화-노동의 유연화-다양한 시장의 창출과 더불어 대중소비사회의 욕망을 다원화하고 부추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동의 배제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소비욕망을 제한한다.
이것은 포스트 모던적 ‘욕망’ 이론이 보지 못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노동패러다임’을 근대적 패러다임이라고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생산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을 간과한다. 대신에 그들은 이런 자본주의적 생산의 절대적 자기 한계보다 ‘소비’-‘욕망’에 주목한다. 고진은 생산자로서의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의 노동자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교환 체계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다. 들뢰즈는 ‘탈주’에서 가능성을 찾는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의 지배를 생산하는 내적 모순을 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에서 국가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의 의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는 더 이상의 외부가 없는 자본의 세계를 창출하고 있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들에게 망하고 싶지 않거든 부르주아지의 생산양식을 채용하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소위 문명을 도입하라고, 즉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자본의 모습대로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이다. 자본은 모든 존재를 상품의 가치로 표준화한다. 표준화하는 기제는 화폐이며 화폐는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존재 조건이 됨으로써 삶을 조직한다.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실적인 삶으로 주어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것을 전지구적인 존재 방식으로 바꾸어 놓는다. 따라서 여기서 현실적인 것은 언제나 ‘상품’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욕망 자체가 ‘상품의 욕망’이며 ‘자본의 욕망’이다. 대중 운동의 역동성과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대중들이 보는 현실은 자본주의이다. 그들의 육체가 체현하고 있는 것, 그들의 생명이 숨 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대중들은 이 현실만을 본다.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이 지닌 양면성이다. 그들이 욕구하는 것은 ‘자본의 현실’ 속에서 욕구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의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꿈꾼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현실이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자본의 욕망은 오직 자기 가치를 증식하고자 하는 가치, 탐욕스런 증식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중의 욕망과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대중소비사회에서의 대중은 자본이 생산하는 상품과 화폐를 통해서 역으로 자신의 욕망을 생산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대중들이 왜 그 스스로 예속되기 위해 싸우는지, 아도르노처럼 왜 대중들이 권력자의 품 안으로 들어가 안식을 느끼는지 등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상품-화폐-자본 물신성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체제 그 자체가 생산하는 현실적인 메커니즘, 권력의 사회 생활적 물질성에 있다. 아울러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중의 역동성은 언제나 ‘자본의 한계’ 안에서 양면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극히 자본적이면서 반자본적이다. 다만, 그들은 그 모순적인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부조리’와 ‘불합리’를 체득할 뿐이다. 계급투쟁과 대중투쟁의 과정은 이것을 ‘대중들의 몸’ 속에 각인시킨다.
신자유주의-정보화-자동화는 한편에서 대중들의 눈앞에 화려한 쇼윈도를 펼쳐 놓고 무수한 욕망을 풀어헤치며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그것은 ‘자본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돈’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취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자본은 더 많은 사람들의 더 많은 노동을 착취하고자 한다. 가치의 생산은 기계에 더 많이 의존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과 사람들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욕망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것을 획득할 수 있는 ‘전쟁 같은 노동’은 더욱 강화된다. 더 많은 대중들이 자본으로부터 배제되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무수한 욕망의 화려한 고리로부터 밀려나 주변인이 되거나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 없는 생존의 위협 속에 놓이게 된다. 자본에 의해 생산된 욕망은 자본에 의해 배제된다.
대중은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대중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을 자각한다.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모순이다. 그들을 순진하게 아버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이다. 그들은 그 권력이 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거나 아니면 새로운 희망을 준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차라리 그렇게 믿고 싶어 할 뿐이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일상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이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주의-합리적 시장경쟁과 같은 자본주의적 규칙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들이 ‘부친살해’ 이후 등장하는 ‘상징계’, ‘규칙과 법칙을 지닌 상징’ 안에서의 욕망의 실현이라는 도덕적 코드를 버리고 오히려 그 이전의 ‘외설적 아버지’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 자신이 이 현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대중운동이 지닌 역동성과 반자본적 역능성이 있다.


4. 대중의 양면성과 좌파의 보수화

과거 80년대 민주화 운동 이후 끊임없이 현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계급투쟁은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투쟁이었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한 방어의 성격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본은 자유주의적 정치개혁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경제를 전면화하였다. 과거 민주화 운동의 성과 위에 선 김대중-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권은 이런 개인의 욕망을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쟁을 국가적 체제로 코드화하는, ‘국가 경쟁력 강화’와 ‘세계화’, ‘합리화와 효율성’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개인을 ‘무한 경쟁의 장’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실패는 ‘무능력하거나 비현실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유주의 지구화라는 현실에 너무 충실했기 때문에 나타났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에서 이루어진 국익의 논리는 공공성의 논리 또는 사회연대적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특권적 계급인 자본의 논리일 뿐이다. 세계화는 불가피한 현실로 승인되었으며 자본의 경쟁력 강화는 국가경쟁력 강화로 전환되었다. 여기서 국가권력은 이미 자본의 시녀로 존재하며 개인들은 자본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국가권력은 보편이해로 자신을 가장하는 외피조차 벗어던져 버렸다. 국가는 공공성과 대외적인 보호 장치들을 제거해 버렸다. 따라서 국가는 더 이상 ‘보편이해’를 가장한 ‘계급이해’의 장치로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 96-97년 노동법 총파업 투쟁을 비롯한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곧바로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전화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대중들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공세를 몸으로 학습해 왔다. 대중들은 더 이상 자본의 규칙과 규범, 상징적 체계를 믿지 않는다. BBK나 ‘고소영 내각’, ‘강부자 내각’ 등 도덕적 이슈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4.9총선이 ‘뉴타운 건설’ 공약 속에서 이기적인 아귀다툼이 되어버린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제도적 규칙의 영향력이 쇠퇴했음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런 대중의 자본주의적 상징체계의 와해가 자본 그 자체를 향한 투쟁과 반자본의 역동성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죽음, 파괴의 욕망이 작동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성의 힘으로 전화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중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현행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의 부정은 그들에게 ‘생존의 포기’와 ‘죽음의 공포’를 유발한다. 따라서 대중의 선택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대중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자신의 삶이 보다 나아지길 바라는 욕망을 따라 움직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규범과 가치가 아니다. 맹자는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대다수의 대중이 지금 직면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생존’이다. 생존의 벼랑에서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욕망은 차라리 단순하다. 그것은 그 권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 소박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보다 더 강력한, 실제로 그 꿈을 실행시킬 수 있는 타자의 욕망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꿈꾼다. 그들은 자기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누군가에게 자신의 욕망을 동일화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은 ‘도덕적 규범’을 포기할 정도로 강렬한 욕망에 비례하여 그 욕망의 대리적 구현자에 대한 의혹을 가지고 있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위로부터의 민주화’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정권인 이상 애초부터 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하는 권력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대중들의 열망과 욕망을 배반하면서 빈부격차의 확대와 빈곤, 실업을 양산하였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광적인 지지와 집단적 패거리화는 그들의 욕망을 반영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배반’이었다. 그것을 통해 대중은 국민국가에 대한 믿음을 상실해 왔다. 규칙은 파괴되었고 이 사회의 법적-제도적 권위는 훼손되었다. 사상 최악의 46%라는 투표율, ‘찍을 사람이 없다’거나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보이콧을 행사한 유권자들은 이미 그것이 헛된 미망임을 알고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반체제적, 반제도적인 도발성이 잠재되어 있다.
좌파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그러나 87년 이후 좌파 정치는 보수 우파의 담론 헤게모니에 스스로를 투항시켜 왔다. 보수 우파들의 논리는 언제나 주어진 현실을 기반으로, 현실주의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들에게는 미래가 없다. 주어진 현실이 영원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논리가 바로 그들의 전통-보수(保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또한 이 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성을 외치며 비현실적인 길이 아니라 ‘현실적’인 길을 원했다. 대중적인 것=현실적인 것이라는 사고 속에서 작동하는 정치학은 언제나 주어진 것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포로가 되어 있는, 그리하여 결국 자본의 욕망 속으로 포획되어 들어가는 ‘실정성의 정치학’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것은 주어진 현실을 승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들은 주어진 현실의 규칙과 규범이 오히려 그들 자신의 족쇄가 되며 그들 자신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그들은 더욱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길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현실적인 길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실질적인 주도권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본’이기 때문이다. 정리해고와 파견근로제 실시, 부당노동행위가 있어도 현장의 운동은 자꾸만 실리화되었다. 노조 간부는 이미 노조 관료가 되어 가고 있었다. 대중적인 욕망은 탁구공과 같다. 그것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노조 간부는 그 욕망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전부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현실’로 전제한 이후에 대중의 욕망을 적절하게 조절하고 통제하는 실리의 정치, 실정성의 정치학을 추구했다. 따라서 한국의 좌파운동은 이미 기존의 체제와 제도를 부정하는 대중적 행위보다 퇴행적이었다.
그들은 대중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중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자신의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좌파는 이런 희망을 대중에게 주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이 ‘실정성의 정치학’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적 시민-개인주의적 인간에 기반하고 있는 시민사회운동이 그러했으며 노동자의 경제적 이해를 정치학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는 한국의 관료화된 노동운동이 그러했다. 게다가 좌파의 정치운동을 지향하는 정파운동은 80년대의 서클 운동과 연고적인 봉건적 운동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들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힘=권력’이다. 물론 이 ‘힘에의 의지’는 이중적이다. 대중은 모래알같이 흩어진 나약한 개인들이다. 여기서 권력은 생성될 수 없다. 문제는 그들의 힘이 결집되는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권력의 집단적 생성, 권력의지의 집합체가 생성되지 않는다면 대중의 ‘권력 의지’는 정반대의 ‘의지’, ‘권력의 품으로 안기는 길’로 전화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대중들의 권력 의지는 철저하게 양면적이다. 그것은 죽음 본능이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죽음 본능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낡은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들의 힘으로 생성되지 않는 이상, 대중의 권력의지는 더욱더 강한 대타자를 요구하는, 파시스트적 권력을 요구하는 욕망으로 전화될 수 있다. 박정희-이명박으로 이어지는 한국에서의 파시스트적 권력에 대한 신드롬은 이런 욕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대중의 욕망이 지닌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대중의 권력의지를 대중 자신의 권력으로 전화시켜야 하는 좌파 정치운동의 문제이다. 지난 10년 동안 좌파는 그 권력의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난 대선과 4.9총선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보수화된 것은 대중이 아니라 좌파운동 그 자체이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한국의 좌파는 없다.


5. 적대적 모순의 다원화와 좌파의 실패

좌파의 보수화는 87년 이후, 그리고 90년대 현실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지배체제의 재코드화가 진행되었던 ‘위로부터의 민주화’와 함께 진행되었다. 한국의 진보운동은 자유주의적 민주화와 대중소비사회의 다원화 속에서 진로를 잃고 오히려 주어진 현실에서 대중의 욕망을 좇아가는 ‘실정성의 정치학’으로 빠져들었다. 보비오의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과 하버마스의 생활세계가 시민운동의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제공하면서 시민사회의 주류로 등장하는 동안 이들과 대립했던 좌파는 자본주의적 지배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현대성의 지평을 탐색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발본적인 세력으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그런 방향 전환의 기저에는 정치에 대한 니힐리즘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것은 87년 민주항쟁에 이은 ‘위로부터의 수동혁명’ 속에서 포획되고 자유주의적으로 구축되는 지배헤게모니에 대한 좌파의 좌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대중은 자본의 지배 헤게모니 안으로 코드화되어갔다. 자본의 강력한 힘은 대중을 조직했다. 좌파는 좌절했으며 대중의 욕망을 조직하는 ‘권력’에 공포를 느꼈다. 현실적으로 더욱 냉혹해지는 자본의 공세에도 대중은 자본의 지배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결핍’은 생산되었지만 그들은 ‘향유’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좌파의 현실 정치학은 생산과 권력의 거시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생활과 장소, 소비의 영역으로 대체되었다. 아울러 현실에 대한 비판은 대중의 욕망을 더욱 급진화할 수 있는 정치적 강령과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행동적 급진주의와 정치적 급진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사회문화적 소비와 욕망을 심리적이고 미학적으로 탐색하면서 근대성의 내면을 파헤치는 이론적 급진주의와 미학적 비판주의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좌파가 상실한 것은 ‘대중의 역동성’을 정치적 권력체로 조직하는, 유물론적 정치학의 ‘변증법적 예술’이다.
그들은 ‘대중’을 알자고 말한다. 한편에서는 ‘대중’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대중은 숭배의 대상도, 비판의 대상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중의 양면성은 곧 자본주의라는 현실, 자본이 내적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는 모순의 효과이기 때문이다. 분명 대중은 상품 물신성의 지배적 효과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자본은 모든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완전하게 포획할 수 없다. 자본의 한계는 고진이 말했듯이 임노동과 자연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이 유지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것을 온전히 포획할 수 없다.
자본은 기본적으로 생산과 소비라는 이원적 체계의 정치경제학적 지형을 벗어날 수 없다. 생산과 소비는 분리되어 있지만 서로 균형을 맞추며 맞물려 작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불황과 공황으로 빠져든다. 생산량에 맞추어 소비량이 조절되어야 하며 소비를 통해서 생산의 힘이 창출되어야 한다. 여기서 양자를 매개하는 것은 ‘임노동’이다. 자본은 ‘임노동’ 없이 생산을 가동할 수 없다. 임노동의 재생산은 소비로부터 주어진다. 따라서 임노동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모순은 중첩적으로 응축된다. 대중소비사회는 자본의 이 모순을 임노동자에게 전가하면서도 다양한 소비 욕망의 창출을 통해서 지배를 구축했다. 이것은 물론 자본의 의식적인 의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기보다 자본의 생산이 요구하는 내적 논리를 따라 이루어졌다. 대량생산, 거대하게 축적된 자본은 대중의 거대한 소비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대중소비사회의 창출은 자본의 지배에서 이중의 효과를 낳았다. 첫째, 임노동을 더욱더 생산의 지배 메커니즘으로 끌어들였다. 다원화된 소비의 양태를 통해 ‘향유’의 메커니즘을 생산하고 이에 대한 욕망을 코드화함으로써 대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돈을 획득하는 생산의 장에서의 몰입, 자본주의적 생산의 지배를 자신의 필요로 바꾸어 놓았다. 사람들은 소비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일을 한다. ‘돈만 있으면 이 세계는 정말 살만한 곳이다.’ 둘째로,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 모래알처럼 개별화된 개인을 소비하는 개인으로 바꿈으로써 정치적 지배의 억압성을 감추었다. 문화산업과 상품미학은 대중의 욕망을 다원화된 상품적 욕망으로 코드화함으로써 냉혹한 자본의 지배를 망각하고 사회적 갈등과 대립을 해소하도록 만든다. 여기서 ‘실사회의 종언’이, 보드리야르의 ‘시물라시옹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런 지배의 효과에도 생산과 소비의 이원적 체계, 그리고 자본 증식으로 자연을 착취하는 자본의 지배는 자본의 적대선을 공간적으로 확장하면서 모순을 중첩적으로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소비욕망은 생산 내부에서 착취의 논리로 전환되며 노동자들을 자본의 지배에 순응시키는 기제가 된다.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유연생산체제는 다품종소량생산과 다양한 욕망의 스펙터클을 펼쳐놓지만 그런 욕망의 다원화는 생산의 영역에서 배제되고 박탈된다. 생산의 영역에서 모순은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배제로 이어지고 소비자인 임노동의 소득을 박탈한다. 일시적으로 노/자의 단일한 모순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파견 근로와 변형노동, 파트타임노동으로 분산되며 이주노동자와 같은 인종적이고 민족적인 차별과 여성노동자에 대한 이중적 착취로 변형되며 노동자 내부의 대립과 갈등으로 분산된다. 그러나 그런 대립과 갈등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 양자로부터 축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하의 노동자들의 양면성에는 이런 내부 분할과 반자본의 일탈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특히 자연과 소비의 일상적 생활 영역에서 나타나는 자본의 내적 모순은 모든 생명에 대한 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자본의 모순은 생산에서가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삶의 차원에서 적대성을 생산한다. 그것은 적대적 모순이 사회운동 차원으로 확장됨을 의미한다. 미국 쇠고기 수입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량생산을 하는 축산업이 낳은 광우병이었다. 그러나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유전자변형생물체와 식품들이 우리의 식탁을 위협하며 환경호르몬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먹을거리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으며 인간의 생명 자체가 자본 증식의 도구가 되고 있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 발생하는 인종적이고 성적인 착취의 구조뿐만 아니라 소비 영역에서 발생하는 교육, 의료, 먹을거리, 환경과 같은 문제들이 ‘반자본’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여기서 생산 영역에서 진행되는 계급적대의 구조는 사회 영역에서 진행되는 공동체의 생활적인 문제들과 직접적으로 중첩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생산이냐 소비냐, 또는 거시적 구조냐 미시적 생활세계냐, 국가냐 생활이냐의 대립에 있지 않다. 60년대 이후 서구의 소비자자본주의와 소비사회론을 비롯하여 고진까지 ‘소비’에 중심을 두고 ‘생활’의 영역에서, 일반 시민들의 삶의 영역에서 ‘변혁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이런 자본의 정치경제학적 모순, 즉 생산의 내부에 존재하는 적대의 메커니즘과 모순의 중첩성을 망각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생산 중심의 노동운동, 또는 노동자계급 중심성만을 외치면서 소비의 영역을 쁘띠부르주아적 시민운동으로 치부하는 소위 ‘정통’적 맑스주의 또한 소비의 영역이 생산의 영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의 모순을 전가시키고 분산시키는 또 다른 지배의 양식이라는 점을 보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의 지배에 대항하는 ‘대중적 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결합, 노동운동의 정치화와 사회운동의 적색화, 적․녹․흑의 연정이 필요하다. 사실, 지난 10년간 한국의 좌파운동은 그전에 그들이 기반하고 있었던 노/자간의 단일한 적대에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지형을 상실하고 있었다. 이에 좌파들의 전략도 바뀌었다. 특히, 시민운동의 성장과 더불어 좌파 또한 다양한 영역으로 자신의 영역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좌파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상실하는 대가를 지불했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을 고수하는 소위 ‘정통’ 맑스주의자들의 완고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시민사회운동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소위 진보운동 진영 내부에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계급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맑스주의와 무정부적 코뮌 운동의 대립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대립은 역설적이게도 적대적 모순을 다원화하는 자본의 분산 전략과 지배적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확장되는 자본의 모순에 대한 대중적 열망을 결집시키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에 대한 임무의 해체 또는 망각이었다.


6. 대중에 대한 공포와 대중의 권력

대중은 언제나 꿈을 꾼다. 유토피아는 그들이 꾸는 꿈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꿈이 미래를 창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유토피아적 꿈을 꾸지 않는다. 그들은 각박하게 경쟁하면서 생존의 벼랑으로 몰아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아니라 상호 호혜적으로 교환하는 코뮌적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일 뿐이다. 그들은 언제나 현실에서 그것을 ‘공상’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이상’이 ‘공허한 원칙’처럼 느껴지는 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어딘가에 이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세계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른 세계가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과 비전을 현실화할 수 있는 ‘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혁명은 광기이며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속으로 몰려드는 대중적 폭발력은 그 힘을 느끼는 순간, 점화된다. 따라서 현실화의 문제는 지금 경험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있지 않다. 현실화는 지금 존재하는 현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 힘의 문제이다. 대중들이 더 이상 다른 세계를 꿈꾸지 않고 자본으로 투항하는 것은 그것의 힘을 발견할 수 없거나 믿음을 줄 수 있는 비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전은 단순한 관념 또는 이론적인 정책이거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실현할 수 있는 결집된 힘이다. 한국의 좌파들이 ‘잃어버린 10년’은 바로 이것이며 다시 솟구쳐 오르는 대중투쟁 속에서 피어나는 미래를 창조해야 하는, 그들이 책임져야 할 것은 ‘권력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중의 권력 의지가 지닌 이 양면성에서 지식인들은 공포를 느낀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소위 진보적이었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대중파시즘이라는 유령과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제도적 신화가 유행했다. 지난 10년간 유포되었던 대중독재, 대중파시즘이라는 대중공포증은 진보적 지식인들의 제도권으로의 투항을 합리화하는 변호론이 되었으며 그들만의 엘리트주의를 생산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역으로 정치적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고 적극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되었다. 반면 ‘현실성’을 이야기하면서 ‘제도권으로 투항한 지식인들’은 현재 주어진 지배 권력과 체제만을 현실적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기 이익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개인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것은 대중 위에 서는 정치권력으로의 투항이며 엘리트주의자로서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권력자로의 변신이다.
그러나 좌파들 또한 이런 공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좌파 운동은 이런 담론에 대한 대립 지점에 서 있었다. 제도적 포획과 코드화를 벗어나 대중 자신의 권력, 코뮌적 권력을 꿈꾸었던 비제도적 좌파들은 그 반대편에서 ‘국가=전체주의’라는 유령을 만들어왔다. 그들은 대중의 욕망을 전치시키는 대타자에 대한 환상을 파괴해 왔다. 그들은 부르주아 대의제가 생산하는 ‘재현=대표(representation)’의 코드화를 벗어난 민중 자신의 권력, 코뮌적 자치 권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의 양면성을 무시하거나 애써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대중은 그들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때론 국가로, 정당으로, 과학자(황우석)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들이 대중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 출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 그들의 욕망을 대변할 수 있는 권력을 요구한다. 물론 여기에 전체주의와 포풀리즘의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욕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데 있지 않다. 그들의 욕망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은 주어진 자본주의적 현실로부터 비상구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대표=대리’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민중이 자기 스스로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권력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강력한 국가 권력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그들 스스로 노예가 되길 바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 권력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열정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희망을 주어야 한다. 권력의 지평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하여 부르주아적 헤게모니가 아니라 민중적 헤게모니를 창출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 대중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경우,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처럼 국가장치를 장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다. 문제는 의회를 통한 국가권력의 장악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이런 전술적 문제가 아니라 그 권력이 사용되는 방향이다. 베네수엘라의 혁명은 비록 위로부터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지만 그것의 성패는 그 권력을 민중들에게 돌려주는 것, 민중들 자신을 권력의 주인이자 자치적 권력체로 조직할 수 있는 민중권력을 창출하는 데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화에 대한 경계와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열망을 권력화하는 데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이다. 대중이 ‘영웅’을 요구한다고 벌써부터 두려워할 문제는 아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길은 다양하다. 그것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좌파에게 오직 하나의 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민중 스스로 정치가가 되고 ‘정치적 권력체’가 되도록 그들을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을 성취하는 길은 주어진 현실의 모순 속에 있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이 사회적 변혁의 과정 또한 하나의 길, 하나의 경로를 가지는 것도 아니며 한 번의 혁명으로 이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80년대의 좌파운동이 가지고 있는 지식인의 관념적 사고이거나 순진한 생각일 뿐이다. 한 번의 혁명으로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혁명이 근본적인 것은 그것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질의 사회적 형태와 권력의 형식을 창조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혁명의 순간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연속적이고 영구적인 혁명의 출발일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좌파 운동 내부에는 이런 순진함이 존재한다. 순진함은 그것의 열정으로 표현될 때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순진함이 현실의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할 때, 혁명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반동적 권력이 될 수 있다. 소위 레닌주의자를 자처했던 ‘왕년의 볼셰비키’가 그러했으며 ‘이성의 화신’으로 전화된 스탈린주의적 당 독재가 그러했다. 그들은 새로운 세계의 개척자, 사회주의 혁명의 계몽가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아니다. 우매한 대중들이 혁명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권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모순적인 현실의 운동, 모순적이기 때문에 역동적인 대중의 삶을 직시할 수 있는 유물론적인 정치학이 필요하다. 만일 레닌주의적 원칙과 계급투쟁의 단순화로 현실을 재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대중의 양면성을 자신의 과학과 이성으로 단죄하고 바꾸고자 하는 엘리트주의, 대리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제도냐 반(反)제도냐에 있지 않다. 의회주의와 반(反)의회주의의 대립쌍은 동일한 오류를 반복할 뿐이다. 시민운동과 정치-정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의회주의 노선을 따르는 전자는 ‘실정성의 정치학’에, 후자는 생디칼리즘적인 주의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을 뿐이다. 이제는 이 대립을 벗어나 ‘반자본’의 대중적 권력의지, 집합적 권력의지를 창출하기 위한 좌파 공동의 정치 전략과 전술이 모색되어야 한다.


7. 집합적 권력의지를 향한 좌파의 정치

대중은 자본의 모순 속에서 자신의 모순을 반복적으로 생산한다. 대중의 역동성은 이 모순의 반복 속에서 예측불가능하게 튀어나온다. 따라서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희망을 만드는 것은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대중, 즉 민중이다. 4.9총선의 참패를 느낄 사이도 없이 대중의 반란은 시작되었다. ‘이명박 탄핵서명운동’과 ‘촛불집회’를 만든 것은 좌파가 아니라 대중이었다. 좌파가 한국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을 때 대중은 이미 행동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는 한국의 좌파가 그 행동에 대해 행동으로 대답할 때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집회를 쫓아다니면서 촛불 하나를 더 켜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이미 그 행동을 스스로 조직했다. 한국의 좌파들이 해야 할 일은 대중의 파괴적 힘을 ‘민중의 권력’으로, 민중 자신의 권력으로 조직하는 ‘권력 의지의 집합체’를 창출하는 것이다. 대중에게 목마른 것은 미래의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힘이다.
이 힘을 창출하기 위해서 좌파는 첫째,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펼쳐놓는 자본주의 사회의 내적 모순을 거시적으로 탐색하는 정치경제학적 지형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미학적이고 해석적인 근대성에 대한 탐색은 미시적 작동을 밝혀주지만 적대의 기본적인 선을 등한시하거나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오늘날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은 ‘노/자의 단일한 적대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계급적대의 모순은 다양한 적대의 선을 타고 분산되며 적대적 대립의 양축을 약화시킨다. 게다가 그런 적대적 모순의 다원화, 다양화는 자본의 내적 모순을 해소할 수 없으며 일시적으로 적대의 선을 분산시키며 궁극적으로 자본의 내적 모순을 확장시킬 뿐이다. 따라서 적대의 선을 분산하는 운동은 결국 자본의 책략에 말려드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둘째, 적대의 선이 다원화되는 생산-소비의 영역에서 중첩되고 응축되는 적대의 선을 다시 포착해야 한다. 적대의 선이 다양화하는 것은 곧 ‘반자본’적 운동의 지평이 확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생산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실업자와 노동자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적색과 녹색, 적색과 흑색의 대립을 넘어 함께 자본의 힘에 대항하면서 민중적인 권력, 민중의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 비전과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그것은 적대적 모순을 분산시키면서 적대의 선을 약화시키는 자본의 전략에 맞서 확산을 새로운 사회의 창조적 힘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영역의 확장은 새로운 사회구성의 힘이다. 따라서 생산 영역에서의 다양한 계급운동과 생활 영역에서의 시민운동, 그리고 자본의 반생명적, 반인간적 지배에 대항하는 사회운동의 보편성을 반자본이라는 공통의 전략 속에서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것은 중첩되는 모순의 공통성을 통해서 연대의 틀을 짜는 것이자 새로운 사회의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며 대중들을 대항적 권력체로, ‘권력의지의 집합체’로 묶어내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물론 코뮌이다. 자본의 적대적 모순은 다양한 형태의 코뮌을 생산한다. 문제는 이 코뮌을 반자본의 대항적 권력체로, 자본을 대체할 수 있는 권력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리주의를 반복하거나 제도화, 권력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기존의 국가 장치까지를 포함한 ‘민중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전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문제는 국가 권력이 아니라 그 권력이 전략적으로 향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의회전술을 포함하여 민중적 권력을 생산할 수 있는 공동의 전략과 전술, 아젠다를 개발하고 공동행동을 조직해야 한다.
셋째, 좌파의 유물론적 정치학을 복원해야 한다. 유물론적 정치학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주목하며 그 모순에 의해 생성되는 변혁의 파토스와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열정을 자본과 다른 사회의 질과 형식으로 주체화하는 정치이다. 대중의 양면성은 관념적으로 재단되거나 비판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형식 속에서 에토스적으로 조직되어야 할 대상이다. 대중의 양면성은 대중 그 자신의 본래적 속성이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그들이 살고 있는 현실사회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대중의 양면성은 끊임없는 혁명의 파토스를 만들어내는 현실적 기반이며 새로운 사회의 대중적 열망을 정치적 주체로서, 대중의 자기 통치 권력으로 조직할 수 있는 원천이다.
그러나 그런 대중의 열정은 결코 그 자체로 자본을 대체하는 사회적 권력이 될 수 없다. 대중들은 새로운 사회를 생산하는 형식 속에서 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이념을 쫓는 좌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좌파가 대중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사회의 권력적 형식, 새로운 주체화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창안하면서 자본주의와 전혀 다른 질의 사회적 형식을 지금-여기서 만들어간다는 점이다. 그것은 자본의 내적 모순에 근거하지만 결코 그 내부적 형식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을 자본의 외부, 새로운 사회의 형식으로 바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형식과 질을 가진 조직적 형식을 지닌다. 이것을 ‘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 위에 서는 권력이 아니라 대중의 권력을 창출하기 위한 권력적 체계와 위상을 가진 조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권력 장악을 목적으로 의회정당 또는 스탈린적 정당 개념을 넘어서야 하며 비제도적인 정당이 되어야 한다. 비제도적 정당은 그 자체가 자본의 안에서 밖을 모색하고 밖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모순의 끊임없는 재생이며 그 재생의 과정 속에서 미래를 생산한다. 연꽃은 진흙탕 속에서 자신을 정화하여 꽃을 피운다. 진흙탕은 현실이다. 문제는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역동적 힘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결단이다. 행위는 무오류로부터 나올 수 없다. 행위는 오류를 검증하려는, 그리하여 스스로 추락하며 다치는 행위를 통해서 생산된다. 좌파의 관념화된 정치학이 전화되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대중에 대한 공포가 계몽을 만들고 지도자를 만들고 대리주의적 권력과 관료주의를 만든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말했듯이 “진실로 혁명적 운동이 범한 오류는 현명한 중앙위원회가 절대적으로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성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좌파는 이 역사적 짐을 스스로 떠맡는 자들이다. 대중은 결코 그 자체로 혁명적이지도 반혁명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대중은 모순적이며 이 모순이 그들로 하여금 진실로 혁명적이게 만든다. 문제는 그 혁명성을 새로운 집합적 권력의지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좌파는 이 모순을 떠안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또한 혁명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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