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밥상! 받거나, 차리거나"

View Comments

“밥상! 받거나, 차리거나”

- 경제와 노동공방, 네 번째 포럼 <밥상 이데올로기> 참여 후기

 

소목(NGA/SF)

 

추석연휴가 막 끝나고, 시집을 다녀온 활동가와 점심을 먹으며, 종가집 며느리로서 너무나 괴롭다는 고민을 함께 나눈 적이 있다. 연중 10번 정도 제사를 지내고 제사 한번에 30명 정도의 제주가 방문을 한다니. 그에 따르는 엄청난 노동을 시어머니는 평생 묵묵히 해오셨다는 이야기, 당신이 죽기 전에는 그 노동의 굴레에서 벋어나기 어렵다는 것, 이런 상황에 대해 그 활동가가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

 

경제와 노동공방의 포럼에 관한 웹자보를 보고, “밥상은 뭐고, 이데올로기는 뭘까?, 아마도 밥상이 차려지기까지 그리고 또다시 차려지기까지 무수한 수고의 실재를 비가시화하고 은폐하는 생각들, 언설, 규범, 관습들 정도가 아닐까?” 정도 생각하고 포럼에 참석했다. 이날따라 참석자가 참으로 적어서 아주 오붓하게 그렇지만 찐~하고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무엇보다 짧은 글이지만 반짝 반짝 통찰력이 빛나는 글을 준비해오신 발제자 아로미샘 덕분이다.

 

“생존을 위해 먹어야 하지만 ‘밥상’ 안에는 생존 그 이상의 의미와 관계가 들어있다.” 참으로 핵심적인 지적이 아닌가! 이번 포럼은 우리가 밥상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볼 수 없었던, 아니 보지 않으려 했던 밥상, “그 이상의 의미와 관계”에 관해 이야기를 비로소 함께 시작해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맘껏, 원 없이 다 풀어놓은 것은 아니다. 문제제기를 끄집어내느라 시끄러웠고, 그중 밥상의 의미와 노동에 관해서 조금, 논의를 했을 뿐이다.

 

아로미샘은 발제글에서, “밥상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을 둘러싼 성별 분업 구조에 최근 유기농, 채식 등 소위 ‘살림의 밥상’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밥상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라고 했다.

 

발제글은 밥상의 가부장적 의미, 밥상 (생산)노동의 성격, 밥상을 둘러싼 성별분업에 더해서 최근에 먹을거리와 관련해서, 자본에 의해 부가되는 윤리적 소비문제, 그리고 그 윤리적 소비자로서의 여성-어머니라는 정체화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시간상의 제약도 있고 워낙 할 말들이 많아서, 아로미샘이 발제하신 뒷부분, 새롭게 부가되는 밥상과 관련된 윤리적 소비라는 이데올로기에 관해서는 논의를 하지 못했고, 훗날 다시 하기로 했다.

 

밥상노동은 다른 가사노동과 달리 매일 반복되는 노동이고 복합적이고 숙련을 요하는 노동이다. 그렇지만 3D노동이기도 하다. 밥상노동의 이러한 정의, 특징 자체로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이러한 노동을 각자가 한다면, 노동에 드는 수고보다 이를 통한 향유가 클 경우에만 노동을 하고 반대의 경우라면 생략하거나 대충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밥상노동이 “받거나, 차리거나”(아로미, 발제문에서 인용)의 노동이라는 것이다. 받는 놈 따로 있고 차리는 놈 따로 있는, 받는 놈은 매일 받고 차리는 놈은 매일 차리고…. 매일 밥상을 차리는 여성의 입장에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오로지 한 끼도 요구하지 않는 0식이(님) ~ 간식까지 하루 네 끼를 요구하는 4식이(간나새끼)로 분류될 뿐…. 게다가, 남편-시아버지의 조상의 밥상까지 아내-시어머니가 차려야 하니….

 

“남성들은 저녁 늦게 퇴근해서 밥상 노동을 하기가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여성은 잔업, 철야와 같은 격한 노동과 늦은 귀가에도 다음 날의 밥상을 위해 잠을 미룬다.” 복합적, 숙련의 노동이라 “남성들은 해 본적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하는데, 그건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밥상을 차리는 것은 여성-어머니-아내이고 이들의 노동의 결과물을 앉아서 받는 사람들은 남성-아버지-남편이다.”

 

이쯤에는, 드는 의문은 언제부터 남자, 여자는 이렇게 받는 사람, 차리는 사람으로 길러지고 정체화되는 것일까? 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도 논의를 했다.

 

여기서, 발제자의 통찰력이 또 한 번 빛난다. “자연 세계에서 모든 생명체는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자기 힘으로 구하지만 인간만은 타인의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밥상의 이데올로기는 참으로 막강하다. 인간적 동물성, 자연성까지도 거스르고 있으니….

 

“밥상은 가부장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 받는 구체적 장소이다.” “밥상 생산 담당자는 가부장의 취향에 민감해야 한다. 노동과정에서 생산자는 소외된다. 여성-어머니-아내들에게 최고의 밥상은 남이 ‘차려준 밥상’이다.”

 

그렇다면 밥상은 생존을 위해 먹는 것 이상, 즉 남자는 식욕을 넘어서 자신의 남성성, 가부장성을 향유하는 장소이지만 여성의 먹는 것에 대한 향유는 고사하고 소외된 노동을 해야 하는 장소가 되는 것인데…. 결국 우리고 고민해야 할 문제는 “밥상 노동이 여성의 노동에서 모두의 노동으로 전환되려면 어떤 기획과 시도가 필요한 것일까?”일 것이다.

 

이때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밥상노동을 분배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누구나가 향유와 노고(노동)를 적절히,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밥상노동을 조직하는 문제…. 거칠게 말을 하자면, 가정 내 밥상노동은 돈의 힘으로 외주화(외식 혹은 매식)될 수 있고, 지금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집안에서의 투쟁과 소란 없이, 밥상노동의 굴레에서 많은 여성들(간간히 남성도)이 해방되지만 고스란히 식당여성노동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본래의 가부장성에 더해 서비스라는 돈의 힘을 보태서(손님은 왕)…. 식당노동자뿐만이 아닌 것 같다. 대형마트의 식품매장과 시식코너에서 일하는 많은 중장년층 여성들까지 생각해보면. 그렇다면 소란과 싸움의 장이 집안에서 밖으로 확대된 것일 뿐.

 

아로미샘이 지적한데로 “밥상을 둘러싼 의미와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 또한 그 이데올로기도 더욱 정교화되었고 단단해졌다. 고로 이에 대한 대결의 구도는 더욱 혼미해질 수도 있다. 이와 관련된 주체도 여럿이 되는 것이 아닐까? 어디서 논의를 시작해야 하나? ‘밥상(노동)의 공공화!’를 주장해야 하나? 적어도 윤리적 소비에 관해 운운하기 전에 ‘밥상’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밥상노동의 실재를 드러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2011. 9. 30)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1/10/10 11:44 2011/10/10 11:44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Newer Entries Older Ent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