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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 일반 두더지학에 대한 시론> - 다니엘 벤사이드

그는 1965년의 출판 이후 '무시무시한 정신 쇠약'에까지 이르는 깊은 불안을 나타낸다. "내가 정치에서 행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에 대한 일종의 순수 사유이다." 당시에 우리는 그를 바로 이렇게 이해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문에 우리는 결코 알튀세르주의자였던 적이 없다.

 

 - 4. 루이 알튀세르와 마주침의 신비 中

 

내기를 걸어야 한다! 바디우는 이 파스칼적 명령을 자기 입장에서 다시 가져온다. 즉, "공산주의 정치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고. 왜냐하면 "당신은 공산주의 정치를 결코 자본에서 연역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기는 모든 참여의 철학적 형태이다. 그것은 실증적 지식의 독단적 확실성과 현세적이고 노쇠한 냉소적 회의주의를 역류해, 진리라는 공백의 자리에서 파스칼의 숨은 신 같은 존재와 불확실한 관계를 맺기 때문이다.  ...  "파스칼의 내기는 세계의 가치들이 제한적이라는 데 만족해 버리는 회의주의와 무관하며, 세계 안에서 진정하고 충족적인 가치를 발견햇다고 믿는 독단주의와도 무관하다. 왜냐하면 이들의 정립에는 내기가 강제적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회의주의와 독단주의는 동일시될 수 있다. 양자 모두 살아남기에 충분할 정도의 확실성과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한에서."

 

실제로 혁명적 사건에의 충실성은 언제나 테르미도르의 위협에, 어제에도 있었고 오늘에도 있는 테르미도르주의자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사랑에서의 테르미도르가 사랑을 냉각시키듯이, 정치에서의 테르미도르도 그렇다. 즉, 그토록 많은 항복의 기회가 있다! 목을 숙이고 등을 굽히라는 수많은 유혹이 있다. 피로 때문이든 신중함 때문이든 그토록 많은 체념과 타협의 구실이 잇다! 여기에는 좋거나 나쁜 합리적 근거도 잇다. 가령 최소의 악을 선택함으로써 (이는 곧 최악으로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최악의 정치는 만들지 않기 위해,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혹은 매우 간단히 '책임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데 정치에 대한 책임성은 무엇을 가지고 어떤 단위의 시간으로 측정되어야 하는가?

 

 - 5. 알랭 바디우와 사건의 기적 中

 

※ 강조는 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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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초심.

아끼는 후배의 싸이에 간만에 들어가봤더니, 메인사진이 레닌으로 바뀌어 있었다.

 

방명록을 없애고 게시판에 새로운 시리즈를 연재할 생각인가 보다. 제목은 <레닌을 좋아하는 과외선생님>. 웃기다 ㅋ

 

'약간은 무모한 레닌. 그런 무모한 레닌이 좋다'는 후배의 고백(?)이 처음엔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잠시후 뭔가 숙연해졌다.

 

 



나도 '레닌을 좋아하는' 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해 왔다.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

 

그런 레닌을 좋아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일종의 영웅주의일수도 있겠지만...ㅋ

 

그의 강철같은 의지, 혁명에 대한 무한한 신뢰, 날카로운 정세인식과 실천에 나섬에 있어서의 단호함은 실로 내게 귀감이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시대가 사람을 낳는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레닌을 바라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대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 태어나, 레닌은 절대 되지 못하지만 마치 제논의 역설과도 같이 따라잡지 못하는 그 레닌의 뒷모습을 향하여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레닌을 낳기에 충분한 시대를 만들어 간다.

 

내 블로그에 가득한 이 붉은색에, 나는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강철같을 줄만 알았던 나의 의지는 세파 속에 꺾어져 가고, 혁명에 대한 신뢰는 날이 갈수록 바래어 가며, 정세인식은 무뎌지고 실천에는 주저하게 되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처음 체를, 트로츠키를, 레닌을, 그리고 맑스를 만났을 때 그 두근거리던 초심으로.

 

윤상원을, 전태일을 떠올릴때 눈시울이 붉어지던 그 초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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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분노를 잊었는가

맑스는 저 유명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에서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는 분노다"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거꾸로 말하면, 분노가 결여된 공간에서는 어떠한 비판도 불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지금 이 땅에서 그들은 무엇에 분노하고 있는가. 21세기 백주대낮에 경찰에게 사람이 맞아죽었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인의 감성 상 용납되지 않는 사건에 분노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체할 수 없는 열광 속에서 가려진 한 과학적 연구의 맹점들을 짚어낸 한 언론매체에 분노하고 있는가.

 

거리에서, 사업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사람들이 쓰러져 가고 있는데, 왜 사람들은 분노하지 않는가.

 

그들은 정녕 분노를 잊었는가? 어떤 사건 앞에서, 어떤 시점에, 어떤 방식으로 화를 내야 하는지 정말 잊었단 말인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옥죄고 형제자매들을 죽이는 것들에 대해선 허허 웃으면서 받아줄 수 있고, 대신 자신과는 상관없는 어떤 과학자의 명예에 대해선 불같이 화를 내 줄 정도로 성인군자가 되었단 말인가?

 

그들의 모든 권리가 부정되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이제 화를 낼 권리마저 잊어가고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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