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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때


 

가운데 강도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나다.

 

그래, 정 힘낼 구석이 없다면

 

저런 낡은 혁명적 상징들의 오마주라도, 천박하게라도 해가며

 

스스로를 자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자위가 한 해 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기만 한다면야 무엇을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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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가열차게 메이데이로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하는 일도 없이 피곤하다.

 

무조건 학교 갔다 집에 오기만 하면 온몸이 무너지듯이 아프고...

 

한번 눈꺼풀을 닫으면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술담배를 줄여야 하는 건가....

 



작년에 선본 꾸릴 때부터 계속 그래왔지만, 무력감은 극대화되어가기만 한다.

 

이렇다 할 전망도, 계획도 내지 못하고 그저 하루하루 근근히 이어나가는 스스로가 무력하기 짝이 없다.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해들을 묶어 전망을 제시하려던 노력도 이제 지쳐서 못해먹겠다.

 

특히 한꺼풀 벗겨놓으면 그저 자신의 오류와 노력부족을 인정하고 감당해내지 못하여 그대로 도망가버린 한 비겁자에 불과한 놈이, 말할 때는 온갖 폼 다 잡으면서 씨부리는 것은 스트레스의 극치다.

 

좀 더 꿈이 많았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과거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이제는 불신과 증오와 포기와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희망이었던 때도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날이 가면 갈 수록 새로운 대학 구성원들의 상상력과 꿈이 빈곤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내가 1학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내 동기들이 1학년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하는 생각이 요즘 들어선 계속 든다.

 

물론, 어디까지나 늙은이의 노욕에 가까운 것이리라.

 

고작 몇 년 사이에 사람이 바뀌었으면 얼마나 바뀌었으랴.

 

언제나 꿈꿀 수 있는 사람은, 현실의 대지에 발붙이고 언덕 너머를 바라보는 상상력의 소유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 소수의 몽상가들마저도 이제는 꿈꾸고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 나가며, 거기에 현실적 토대들을 덧댈 수 있는 여러 조탁과정을 차근차근 거치기에는 너무나도 여유가 없어져 간다는 것이다.

 

코앞의 문제를 스스로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이들.

 

그리고 그 코앞의 문제라는 것은 정말 서글프게도 천박한 문제들이다.

 

현실에서 천박함이 고귀함을 압도했기에, 발목 잡히는 그들이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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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 언론/꼼반 학생회 시대인식 및 학생회론

 

0. 들어가며


  ‘시대인식’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언제나 반복되는 암울한 얘기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매우 어렵다, 누구는 빼앗고 누구는 빼앗긴다, 가난하고 고생만 하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시대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기 확인을 거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답변을 도출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함이다.



1. 시대인식


  프랑스의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 프랑스 전국에서 150만, 파리에서만 30만 명의 학생들이 최초고용계약(CPE)1)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거리에서 넓혀나가고 있다. 언제든 고용하고 언제든 해고할 수 있는,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누군가는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세상을 원하는 욕망들에 거스르는 저항은 비단 저 멀리 외국의 일 뿐만은 아니다.

  올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결국 본회의에 ‘비정규직 보호법안’을 상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700만 비정규직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법안이 자신들을 보호해 주기에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해고시킬 수 있는 계약직 노동자의 전면 사용허가, 근로기준법에도 금지가 명시되어 있는 중간착취가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파견 노동자 사용의 확대. 세상에 악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지성과 비판의 요람이던 대학은 이제 ‘시대의 요구에 따라’ 순응적이고 유용한 인간 상품을 만들어내는 공장이 되어가고 있다. 학사관리 엄정화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은 자신의 상품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저들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기준과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무한 레이스에 몸을 싣는다. 역사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비판정신의 보금자리여 왔던 학생 자치는 무자비한 경쟁의 강요와 직간접적인 탄압으로 서서히 그 활력을 잃어가고, 강요되는 현실에 매몰될 수밖에 없게 된 학생들은 세상이 원하는 순응적 상품으로 잘 가공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공장의 가장 특별한 점은 상품이 스스로 비용을 들여 자신을 제작한다는 점이다. 끝간데없이 오르는 등록금은 이 공장의 공장주가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이윤을 내겠다는 의지가 현실화됨에 다름 아니다.

  여성들은 이러한 흐름에 저항하고자 뭉친 해방구 안에서조차 해방되지 못한다. 그녀들의 감수성과 그녀들의 존재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비정상으로 낙인찍히고, 그들의 목소리는 가서 닿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허공의 외침이 되기 십상이다. 근대적 시민권조차 인정받지 못하곤 하는 그녀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스스로의 존재가 짓밟힐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학교 안팎을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성폭력과, 그 극한점에 있는 성매매, 밤길을 다닐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에 항의 한 번 해보는 것조차 온갖 낙인과 마녀사냥을 감수해야만 하는 이 현실은, 그녀들에게 그저 침묵하기를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참 ‘멋진 신세계’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사람들은 저항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모두가 힘을 합쳐 현실의 질서에 도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라 말한다. 민주화되고 천지가 개벽된 이 세상에, 저항은 폐기되고 정치는 취향이 된다. ‘다양성’이라는 신에 경배하는 신도들은, 이 축복받은 자유의 공간 속에서 자기 취향에 따라 기성품으로 제작된 견해를 골라잡아서, 아무에게도 ‘강요’하지 말고 알아서 즐기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 복음의 전도사들은 ‘이제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하기도 하고, ‘등록금 인상은 협상과 스폰서 유치로 해결해야 한다’고 선언하기도 하며, ‘여자들도 살기 좋아졌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투쟁 이외엔 극복할 수 없는 모순 같은 것은 사라졌으니, 이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평화롭게 대화하고 소통하자 한다. 이 ‘말씀’대로라면, 분명히 우리는 ‘멋진 신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그 말씀이 거짓이라는 것을 직시할 수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전투경찰의 날카로운 방패날 앞에 버티고 서야만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으며, 그저 우리의 삶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보려고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학생들이 있고, 밤에 택시 한 대 잡아타기가 두려운 여성들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항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저항은 낡은 것이라 선언하는 사람들, 이 간극 속에 놓인 하나의 필연성은 바로 이 시대가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대와 저항을 가장 두려워하며, 그것의 파괴를 무엇보다도 먼저 수행하려 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가 노동자와, 학생이 학생과, 학생이 노동자와, 남성이 여성과 연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질서 유지의 핵심이다.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부조리에 대한 한탄과 불평들을 저항이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의 핵심은 사람들의 말을 파편화시키고 자기 안에 고이 간직할 취향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간극의 형성은 생존과 삶의 질을 볼모삼아 타인을 외면하고 자기 안에 파묻히도록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에 기초한다.

  그러나 타인의 일은 저 높은 벽 너머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 될 수 없다.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대학 구조조정과 학생의 상품화는 무엇보다도 우리를 양질의 노동력, 즉 이 시대의 질서를 재생산하는데 유용하고 순응적인 노동력으로 만드는데 그 의도가 있으며, 따라서 노동의 자본에 대한 저항과 하나의 맥락 속에 있다. 내가 A+를 받고 고시를 패스하여 이 시대가 바라는 고급인력으로 거듭난다 해도, 그 발밑엔 언제나 C+와 비정규직의 칼날에 목이 날아간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할 것이다. 여성의 삶을 착취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는 남성들은 결국 그 틀 속에 사로잡혀 언제까지나 파편화된 인간관계와 성적 역할을 강요받는 꼭두각시들이 되어갈 뿐이다. 이것들은 나와 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며, 우리 모두의 인간다운 삶과 해방의 문제이다.

  이러한 시대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연대이며, 그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질서를 위협하는 것 또한 연대이다. 따라서 이 시대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연대를 가장 우선적으로 파괴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실천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그것에 저항하여 연대의 전선을 회복하는 것이다. 같거나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공유하는 이해관계와 욕망들을 위해서 함께 어깨를 걸고 전진하는 것, 이러한 연대를 복원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이 시대를 직시하고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2. 학생회론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건설한 학생회는, 과연 어떠한 학생회가 되어야 하는가? 연대의 복원과 저항의 몸짓들에 대한 요구 속에 우리의 학생회는 어떤 위치에 자리 잡고 서 있는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남겨져 있는 학생회론의 유산은 무엇보다도 네트워크 학생회, 혹은 소통과 공동체의 학생회론이다(전자와 후자가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함께함’이라는 따뜻한 수사법은 피 튀기는 정파투쟁과 비운동권은 사람 취급도 안하던 냉혹한 운동권의 역사를 넘어, 어느새 학생회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정착해야 할 필수 코스가 되었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클라이언트들의 실종으로 이미 실패를 선고받았고, ‘소통’의 강조 역시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담론들이 동사무소나 동문회가 아닌, 학생회라는 것의 본질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함께함, 소통을 얘기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함께하고 소통하며 살아간다. 함께함과 소통에 대한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는 이미 충족될 만큼 충분히 충족되고 있으며, 학생회는 그 유일한 선택지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현실을 외면해 왔던 것은 아닌가? 대중에게 이미 학생회는 함께함과 소통의 걸림돌이 되어 버렸는데, 우리는 아직도 학생회는 함께함과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고 그저 윤리적으로 선언해 왔던 것만은 아닌가?

  학생회란 무엇인가? 사전적 정의에 가깝게 말했을 때, 그것은 학생 대중이 건설하는 학생자치기구이다. 즉 학생회란 학생들이 자치활동을 하기 위해 건설하는 조직이다. 그렇다면 자치활동, 자치란 무엇인가? 자치란 self-governance, 즉 무엇보다도 우리 스스로 우리의 정치적 원칙을 정하고 공동체를 우리의 판단과 결의에 따라 운영해 나가는 활동이다.

  즉 학생회는 본질적으로 대중정치의 요람이며, 학우 대중의 공통된 이해관계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세우고 학우 대중의 연대를 모색하는 조직이다. 이 때 ‘학우 대중의 공통된 이해관계’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야 한다면, 우리는 앞서 논의했던 시대적 조건들을 간과할 수 없다. 왜냐면 학생들 역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존재들이며, 따라서 시대가 우리를 중립적일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수한 자치활동을 얘기하기엔 이미 우리 운명의 너무 많은 부분을 결정당하고 있다. ‘역사의 종말점’으로 선언된 신자유주의 질서는 우리가 나아가 살아가게 될 사회에 착취와 억압의 짙은 상흔을 남기고 있고, 이제는 우리의 캠퍼스 안에까지 침투하여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다. 수천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성별 권력의 구조가 여남 모두의 존재를 비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며, 정상-비정상의 위계서열 속에서 장애인들의 권리는 무시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학생회의 활동이 진정한 의미의 ‘자치활동’이기 위해선 그 운동은 무엇보다도 저항의 움직임이어야만 한다. 외부에서 강제되는 권력관계를 거부하고 우리의 원칙들을 관철시켜 나가는 것, 그러한 움직임을 대중적으로 기획해 내는 것이 바로 학생회의 활동이고 학생회의 자치이다.

  따라서 학생회는 무엇보다도 해방구여야만 한다. 그저 함께 하기 위해 뭉친 공동체가 아니라, 민주적 자치와 정치적 고민들을 풀어나가는 해방구로서의 역할만이 학생회의 존재 가치이다. 그리고 이러한 해방구는 학우 대중의 실질적-정치적 이해관계에 복무하고, 동시에 그 이해관계를 설정해 나가는 원칙들을 구상함에 있어 우리의 자치를 가로막고 있는 이데올로기 지형에 균열을 낼 수 있어야만 한다. 또한 이 해방구 안에서 우리는 연대를 재확인하고, 어떤 연대를 통해서 무엇을 일구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대중적인 정치적 의식들을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이것을 제 1원칙으로 천명했을 때 우리는 다시 학생회를 통해 새로운 운동의 전망을 마련해나갈 단초들을 구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학생회가 정치적 공간, 그 이상도 이하도 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정치성을 배제하지 않는 소통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성 그 자체가 학생회의 본질이자 생명이라고 선언한다. 네트워크가 아니라 실질적 연대를 모색한다. 학우 대중의 정치적 이해관계, 우리의 몸짓과 시대와의 관계, 학우들의 정치적 목소리들을 모아내고 충돌시키는 정치적 의사소통의 과정 같은 것들을 고민하지 않는 학생회는 학생회가 아니라 단순한 MT조에 불과하다.

  이러한 원칙의 재확인이 왜 필요한 것인가, 단순히 말의 향연 뿐은 아닌가라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자치의 원칙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부정 속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학생회의 키를 다시 단단히 잡기 위해서이다. 90년대 이후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 계속되는 자기부정의 요청 속에서 어느 샌가 그 근본적인 원칙의 닻을 잃고 휩쓸리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원칙의 재확인은 분명히 필요하다.

  물론 자치공동체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만 한다. 또 그 과정에서 학생회가 역사적으로 담지해 왔던 수많은 문화-권력적 모순들은 냉정한 비판과 지속적인 자기부정을 통해서 극복되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와중에 자치공동체로서의 학생회라는 정체성과 그 정체성의 기본원칙들을 조금씩, 조금씩 - 의식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 잊어 왔던 것이 아닌가?

  제 24대 언론/꼼반 학생회는 이러한 실종되어 가는 원칙들을 재확인하고, 다시 한번 학우들 앞에 학생회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세부적 원칙들에 기초하여 활동할 것이다.

  첫째, 학생들의 교육권에 대한 요구를 모아내고 그것을 쟁취할 투쟁을 선도한다.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의해 재편되는 교육과 그 속에서 시대의 질서에 부응하는 인간형으로 개조될 것을 요구받고 있는 학생들의 문제는 이제 우리의 투쟁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 제 24대 학생회는 학생들의 삶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권리를 가로막는 시대의 질서에 저항하는 몸짓들을 건설한다.

  둘째, 여성주의적 공동체의 건설을 지향한다. 우리의 삶을 왜곡하는 또 하나의 질서인 성별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남성중심적인 공동체 문화를 혁신하고 여남이 모두 함께할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 것은 그러한 성별 권력의 구조를 철폐해 나가는 작은 한 걸음이 될 것이다. 따라서 제 24대 학생회는 대내적으로 여성주의적 공동체 건설을 모색하고, 대외적으로 여성들의 저항에 연대함으로써 성적 불평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한다.

  셋째, 투쟁하는 노동자/민중들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우리의 삶을 옥죄는 수많은 조건들 ― 무한경쟁의 격화, 청년실업, 생계위협 ― 은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이해관계가 학교 밖의 저항의 몸짓들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제 24대 학생회는 이러한 저항에 연대함으로써 꼼반 학우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그 내용에 대한 대중적인 정치적 소통을 기획해 나간다.


1) 최초고용계약(CPE: Contrat Premiere Embauche)이란 고용주가 26세 미만의 사원을 최초로 고용한 경우 처음 2년 안에는 어떠한 제한이나 사유 없이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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