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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부지

  • 등록일
    2005/03/12 13:23
  • 수정일
    2005/03/12 13:23
어제 할아버지에게서 밤 늦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스며있는 고독과 맬랑꼴리로 내 마음도 고독과 맬랑꼴리로 가득차 버렸다. 할아버지는 우리 떼거리들과 무언가를 갖이 하고 싶다고 늘쌍 말씀하신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난건 근 3년. 사람들을 만날 때 마다 늘 대뜸하시는 말씀이 "너 밥은 어떻게 먹니?"하는 거였다. 한마디로 이 놈(혹은 년이) 이 지 밥벌이는 지가 하면서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물음이자 훈계인 거다.
몇몇의 젊은 사람들은 할아버지 말투에서 80년대 풍의 권위와 훈계조를 발견하곤 대뜸 반발심을 느끼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스스로 권위를 덜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곤 때론 외경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긴 몇십년 동안 몸과 마음에 길들여져 있는 권위적 사상의 잔재들을 완전히 떨쳐내는 것이란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90년 대 초(이미 이순을 훨씬 넘긴 나이에)에 '과감히' 자신을 공산주의자나 맑시스트가 아닌 아나키스트로 부르기 시작한 할아버지의 변신은 어떤 운동가나 사상가도 하기 힘든 일이다.

할아버지에게도 단점은 많다. 자신이 가진 이념과 사상의 지도를 어떠한 맥락도 고려하지 않은채 대뜸 들이미는 태도라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그것에 의해 쉽게 '재단'하거나 쉽게 '신뢰'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너의 생각을 들어보자'하면서 끝내는 할아버지 자신이 모든걸 얘기해버리는 식이라든지. 그래서 때론 할아버지와 냉랭한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지만, 어쨌든 할아버지만큼 철두철미하게 '자신'인 사람은 본적이 없고, 또 철두철미하게 약속을 지키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스스로 조직화된 하나의 커다란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와 만나면 느슨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고 또 어떤 영감 같은 것을 받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지누집레이블 공연이 있는 그 시간에 상봉이와 묘아에게 열댓번 전화를 했고 전화가 통하지 않자 마침내는 경찰에게 수소문, 할아버지는 결국 경찰차를 타고 드럭까지 가셨단다. 그리고 장터가 열리는 장소에도 찾아봤으나 헛수고, 홍대 근처를 1시간 30분동안 헤맨 끝에 결국 외로운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고 한다. 우리가 사이트 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사이에 이렇게 소외되는 사람도 한 두명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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