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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하는 주체는 탄생했는가?

이 글은 트위터에 한 문단씩 나눠서 올린 것인데, 블로그에는 모아서 올려 놓는다.

 

이 글은 서동진이 최근에 책으로 낸 박사학위논문(책 제목: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에 대한 논평이다. 이 논평의 주 목적은 남은 ‘연구 과제’를 제기하는 것이지, 서동진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서동진은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와 무관한 이야기를 했다. 서점에서 책을 훑어본 뒤 논문 초록을 읽었다. 내용은 1)국가인적자원개발이란 국가 담론 2)인적자원에 관한 경영 담론 3)자기계발이란 문화 담론 분석이다. 현실 분석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마치 한국 사회에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등장한 것처럼 말한다. 담론(쉽게 말해 “이념적 주장”)이 곧 현실이라는 ‘망상’에 빠진 게 아니라면, 그는 자신이 연구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책과 6년전 논문은 거의 똑같지만, 제목이 다르다. (논문-‘자기계발의 의지, 자유의 의지-자기계발 담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 전환과 주체형성’)(책-<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

 

부제의 차이는 의미심장하다. 논문은 ‘담론 분석’이지 ‘현실 분석’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하지만 책의 부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은 마치 ‘현실 분석’인 것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는 책 관련 인터뷰에서도 이런 인상을 준다.

 

논문 초록은 “이 글은 한국 자본주의의 정체성의 변화와 분리시킬 수 없는 상호구성적인 과정으로서 새로운 주체화의 과정에 관심을 둔다”고 밝혔지만, 실제론 담론만 분석했다. ‘담론’이 주체 형성의 ‘결과’를 낳았는지는 따로 검증할 문제다.

 

이미 주체가 형성된 것처럼 말하는 데 동의한다면, 그건 현상에만 집착하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자기계발서를 본다는 사실, 앞다퉈 스펙을 쌓는다는 사실이 ‘새 주체 탄생’의 증거는 아니다. 이게 증거라면 논문까지 쓸 이유가 없잖은가?

 

서동진의 논문(과 책)이 말해주는 것은, 지난 20년동안 국가, 기업, 문화 세력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담론을 퍼뜨렸다는 것 그리고 이 담론이 유행한 것은 민주화가 가져온 ‘자유’와 이 담론이 공명한 탓이라는 것이다. 딱 여기까지다.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이미 등장했다는 주장과 어긋나는 증거들은 실제로 있다. 이번에 나온 서강대 사회학과 석사논문 ‘청년백수와 자기계발’은 기업 요구에 맞추려다 우울증 앓는 부류, 적극적으로 자기계발하다가 좌절한 부류를 보여준다.

 

이 석사논문엔 자기계발 담론을 “상황 탈출”용으로 변형해 수용하는 이들도 나온다. 하고 싶은 일 위해 회사 그만두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프로그래머한테서도 확인된다. “자기계발=영어+전문지식 공부”로 보고 이를 통해 한국을 탈출하려는 것이다.

 

석사논문의 사례와 프로그래머 사례는, “자기계발 담론”이 먹히지 않는 “부분적인 증거”다. 현실적 제약 때문에 그 담론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그 담론이 지배하는 사회”를 탈출하는 데 이 담론을 이용하려 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서강대 석사학위 논문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트위터 글 1 2) 트위터 글 2 3) 트위터 글 3

*프로그래머 사례는 곳곳에 있는데, 예컨대 자바서비스넷 같은 곳을 보라.

* 서동진의 논문 정보는 국립도서관에서 검색할 수 있다.

 

추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증하게 요약한 것이 이 글이다. 이 학자들의 문제 의식에 거의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아직 초고 수준이니, 인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2010/01/08 19:03 2010/01/08 19:03
18 댓글
  1. 고로께 2010/01/09 01:57

    저 역시 독서를 마친 상황이 아니기에 조심스럽습니다만 몇가지 이견을 표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이미 사회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여러 갈래의 길들이 있겠죠. 재화의 생산이나 화폐의 움직임을 살필 수도 있고, 정념이나 무의식을 볼 수도 있고, 또 상징적 의사소통을 위해 동원하는 언어나 담론도 하나의 대상이 됩니다. 물론 이 담론을 온전히 언어적인 것으로만으로 이해하면 곤란하겠지만요.
    다수의 상이한 이론적 지향과 관심을 가지는 담론 분석, 그 중에서도 이 경우 푸코적인 담론분석이라고 할때요. 분석의 결과로써 우리가 만나게 되는 주체성이 현실에서 웃고 거짓말하며 담배피우고 창밖을 거니는 개인들, 자아 혹은 개체와 차이가 있다고 말함으로써 분석을 의문시하는 건...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생각입니다. 푸코적 노선 혹은 계보학적 담론분석이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주체, 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주체화 효과이고 장치인 까닭입니다. 그 안에서 제 삶을 재고 체험을 해석하는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주체를 길러내고, 그것을 확장하여 사회의 운영원리로 삼는 권력의 기술에 붙여진 이름은 물론 통치성입니다.
    이 책의 경우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국가와 노동, 교육의 영역에서요.. 이를테면 어떻게 직무를 정의하고 평가하고 그에 따라 상벌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주체를 동기화하는지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개인을 주체로 빚어내는 권력의 다양한 기술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면 한명의 작가로서 푸코의 독특함, 그 스타일의 유용함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물론 그를 사용한다면 그의 사유노선에 따른 난점을 떠맡는다는 것일 텐데, "기계적 환원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하신 부분에 대해선 공감합니다. 주체성엔 분명 외부의 장치들을 초과하는 잉여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우울증 앓는 부류, 적극적으로 자기계발하다가 좌절한 부류"가 반증이 된다기보다는 이 책의 견해를 지지한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은 제가 해당 눈문을 읽지 않아서일까요? 뿐더러 어디까지나 방법론에 한해서 말씀드리는 것이인데.. 구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혹은 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출간된다 해서 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명제나 가정들이 바로 기각되거나 무의미해 지는 것은 아니겠죠.
    잘 아시겠지만 어떤 무엇에 대한 설명이 곧장 그 무엇인 현실은 아닙니다. 현실을 연구하는 그 어떤 방법론으로도 현실 그 자체를 대체할 수는 없겠죠. 추상에서 구체로라든가 이념형 혹은 현실대상과 지식대상간의 환원불가능한 간극에 대한 지식생산이론 등이 지시하는 사태는, 비록 결이 다를지라도, 상관적인 내용을 나눠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그렇습니다. 인터뷰나, 서평, 포스팅으로 기대했던 바, 87년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실천, 민주화나 탈훈육의 충동이 어떻게 반해방적 결과로 귀결되었는지, 어떻게 자유가 억압이 되었는지 읽을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치 탈주술이라는 계몽적 이성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새로운 신화로 결과했는지 계몽의 변증법이 말해주듯, 이 책에서 저는 말하자면 자유의 변증법을 읽을 수 있게 되길 기대했습니다. 물론 마저 읽어야겠지만요. 대상으로 삼은 시계열적 폭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그러기에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이 아쉬운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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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1/09 14:50

      푸코 이야기까지 하고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제 관심은 아주 상식적입니다. 더 복잡한 이야기는 푸코 연구하는 사람들과 하심이 마땅할 겁니다.

      제 질문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제 질문은: 서동진은 한국 사회의 지배 담론을 분석했다. 그런데 그 담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람들은 어떤 상태인가, 그들에 대한 해명은 필요 없는가, 그들을 분석하지도 않고 그들이 새로운 주체로 탄생했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서강대 전 교수팀이 쓰고 있다는 페이퍼가 제기하는 질문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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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로께 2010/01/10 01:06

      '주체의 탄생'이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불충분하지 않나, 최소한 간단한 서베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제기하신 물음에 동의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앞서 밝힌대로 주체성의 특유의 과잉이라거나 개개의 전략이라는 측면에서는 더더욱요. 기계적 환원주의 혹은 기능주의의 유혹 또한 대단히 강력하죠. 하지만 또한 분명한 것은 이 책이 분석대상으로 삼는 담론을 이념적 주장으로 환원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작업장이나 학교 등속의 장소에서 동원되는 주체화의 장치들, 정책이나 제도, 관행, 실천은 관념이나 단순한 메세지가 아닙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데올로기 비판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지 무려 담론 비판씩이나 요구되겠습니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정치적 합리성. 이 새롭게 등장한 성격의 권력은 주체에게 직접적으로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지 말아라, 명령문의 형식으로 전달되고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인으로 하여금 적극적인 행위의 가능성의 공간을 마련해주죠. 기필코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는, 자기 돌봄이라는, 모든 사회적 행위의 규준으로서의 자기. 이걸 열었다는 겁니다.
      과거 훈육적 자본주의의 단계에서 주체는 그저 그것을 하기를 요구받을 뿐이었다면, 이제 그것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진심으로 원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 과정을 전적인 자유로서 경험하게 되고요. 그 자유가 허구적이 아니라 진실하다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담론분석이 요청되는 거죠. 이 책이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은 개인이 사회와 관계하는 특정한 방식, 권력의 새로움에 대한 분석이기에 개개의 성공과 실패, 얼마가 성공했고 얼마가 실패했고 또 얼마가 도피했는지 헤아리는 것이 필수적이진 않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세기 위해 전제되는 가정, 오히려 그 헤아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다고 해야겠죠.
      따라서, 아래 댓글에서 밝히신 견해에 대해, 실제 주체가 자기계발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도피하느냐 혹은 초과달성 해서 엄친아로 등극하느냐의 여부는 이 책의 결론과 직접적인 인연을 갖지 않습니다. 개인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에 진입하느냐, 그들에게 어떤 형상이 부여되느냐, 그 안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가... 이런 것들을 마름질하고 본을 제공하는 권력과 담론에 대한 분석, 이를 통해 오늘날 기능하고 있는 주체성의 성격을 그려보는 것. 간단히 말해 그 어떤 결과라도 이 모든 게 내 탓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 우리가 진입했다는 거죠. 먼저 사람들이 있고 담론이 들어와 어떤 행위를 하게 혹은 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견해만큼 이 책을 오해하는 것도 없을 겁니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회사를 그만둔 프로그래머의 사례 같은 것은 전적으로 이 책이 지지하는 견해를 뒷받침합니다. 자기의 성향과 능력, 자질을 실현시키기 위해 안정된 조직을 떠나 모험을 감행할 수 있는 주체만큼 오늘날 기업에서 환영받는 것도 없을 겁니다. 하루에도 수백줄의 코드를 짜넣어야 하는 남한의 프로그래머들에겐 꿈같은 이야기겠지만 근무시간의 20퍼센트를 자기를 위해 할당하는 구글이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을 탁월하게 예시해 준다고 하겠죠.
      근데 다 읽어놓지도 않고 너무 많이 떠드는 것 같아 조금 그렇긴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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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Carrot 2010/01/09 13:09

    제시하신 세가지 논문의 내용들이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등장과 어떻게 어긋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약해주신 내용 말고 원래 자료를 읽고 이해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 요약 내용만을 봤을 때는 그 사례들 역시 자기계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가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든지, 표현이 모호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셨는지요? 추가된 부분을 읽어보면 거칠게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잘 정리는 안 됩니다. 설명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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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1/09 14:56

      백수 사례를 든 것은, 자기계발하라는 메시지가 곧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을 뜻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저들이 자기계발에 강박을 갖더라도 결국 담론이 상정하는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저 담론이 없을 때도 좋은 직장 얻기 위해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러니 좋은 직장에 가려고 공부하는 사람 그 자체가 "자기계발하는 주체"는 아닙니다. 물론 저 사람들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담론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제 주장의 요점은 "담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곧 "주체의 탄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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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arrot 2010/01/10 02:06

      이해했습니다. 답변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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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0/01/09 16:15

    자기 계발하는 주체가 등장한다는 것이 그로부터 소외되는 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하고는 다르지 않습니까? 서동진 씨를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등장이란 것이 단순히 자기 계발 담론에 완전히 적응한 사람들만 세상에 존재한다는 식의 주장이었다면, 이것은 신자유주의에 고통받는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를 비판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모두들 자기계발하면서 행복할텐데, 뭐하러 비판을 합니까? 책 표지에 나와있는 그림만 봐도, 자기계발에 꺽여버린 고개와 사람들의 절망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계발의 주체가 탄생했다는 것은 자기계발에 성공한 주체만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계발이 권력게임의 룰이 된다는 말입니다. 권력 자체가 위계를 가정하는 것인데, 우위를 차지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당연히 존재하고, 우위를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통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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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rishin 2010/01/09 17:29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담론 분석만 가지고 당연시하지말고 검증하자는 소립니다. 이 말이 그렇게 불분명하거나 어려운 말입니다?
      탈락자(?) 문제를 거론하는건 저 이데올로기는 실제로 구현될 수 없는 단순 압박수단일 가능성때문입니다. 물론 그런지 아닌지는, 서동진식 접근 곧 담론분석으로는 절대 알 수 없고 실제 사람들을 만나고 연구해야 알 수 있는 일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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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1/10 08:04

      왜 이 책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지 모르겠군요. 밑에 보니까 헛소리라는 심한 말까지 써가면서 깍아 내리는데, 저의가 의심스럽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서 이제까지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 했던 공공성이나 복지 영역들을 모두 개인들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면서 기업논리를 전사회의 모든 영역에 퍼뜨리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광범위하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는 바 아닙니까? 자기계발 담론 자체가 모든 개인이 자기게발에 성공하는 사회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 책도 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먼저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려고 노력을 해보세요. 쓸데없는 트집 잡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사람들을 만나고 연구해야 알 수 있는 것의 내용이 고작 탈락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정도라면, 이미 서동진 씨가 다 알고, 인정하고 있는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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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marishin 2010/01/10 02:36

    고로께님께.
    술을 마신 김에 용기를 내어 이야기를 합니다.
    1. 자신을 돌보라는 메시지는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그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 논리에요.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떻게 자본의 품에 안기게 되는지 궁금하면 산본마쓰를 구글에서 검색해 보고 나오는 책을 읽으세요. 그리고 산본마쓰 책을 읽으면,지금 말씀하시는 이야기는 이미 그람시부터 고민한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될 겁니다. 제가 공부를 안해서 푸코 따위에 관심없다고 한 줄 아세요?
    2.저는 이 책의 맥락 따위에도 관심 없는 사람입니다. 그건 이 책을 논평하는 데 관심있는 사람들 모임에 가서 말하세요. 중요한 것은 이 책의 맥락이 아닙니다.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지독한 이데올로기 공세(담론을 이념적 주장으로 환원하면 안된다고요? 그럼 뭔데요?)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도대체 그들이 지금 어떤 지경에 있는지 그걸 세밀하게 들어다보지도 않고 헛소리하지 말라는 게 그렇게 고까운 이유가 뭔지, 스스로 돌아보세요.
    3. 그리고 필요한 말이 있으면 트위터를 통해서 저에게 말하세요. 여기 댓글 달아서 제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쓸데 없는 선입견을 남기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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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oPool 2010/01/10 10:02

      덧글의 수신자가 고로께님이라 덧글을 읽고 이런 지적을 남겨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marishin님께서 글의 서두에서 밝히신 것처럼 marishin님의 글 또한 서동진의 책에 대한 논평인데 고로께님께 '이 책을 논평하는 데 관심있는 사람들 모임에 가서 말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나요? 그리고 3.과 관련하여 쓸데 있는지 없는지는 글과 덧글들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하게 놔두시면 안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는데 논의가 트위터로 옮겨가면 아쉬울 것 같아서요. marishin님의 글도, 고로께님 등의 덧글들도 잘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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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로께 2010/01/10 15:17

      책이 하나의 사물인 한, 그 물건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앞서 그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따져보는 일은 결코 회피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이야기를 꺼내봤습니다. 이견을 주고받는 동안 자연스레 이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 드러날수 있을 거라고, 저 자신에게도 좀더 명료히 생각을 가다듬는 기회가 될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한 제 기대나 생각이 marishin님이 이 포스팅을 등록하신 의도를 왜곡할 수 있다는 염려를,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닐지라도, 개인블로그 운영자가 요청하는 것인만큼 받아들입니다. 비록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쌓여있긴 하지만요. 이 댓글을 마지막으로 저는 더 이상 이 주제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내용의 포스팅 기대하겠습니다. (제가 가졌을지도 모를 궁금함을 대신 풀어주신 NeoPool님께도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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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marishin 2010/01/10 12:50

    neopool님께
    1. 제가 논평에 관심없다고 쓴 것은 바로 앞에 "이 책의 맥락 따위에 관심없다"는 맥락에서 한 말입니다. 이 책의 내용을 논평하는 데 관심없다는 뜻.(실제로 전 책 내용 논평하지 않았구요.)
    2. "쓸데 없는"이라고 한 것은, 제 글의 목표가 바로 저 담론분석이 곧 현실인 것처럼 저 담론 자체에 집착하는 행위는 쓸데 없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분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비판하는 행위를 저 댓글은 촉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런 선입견이 없어야, 제 주장을 중심으로 한 논의가 된다고 봅니다. 물론 제 주장을 중심으로 논의하기 싫은 분도 있을텐데, 그러면 그것에 관심있는 분들끼리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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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Marishin 2010/01/10 13:14

    Neopool님께
    담론분석 자체가 쓸데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개인들의 삶속 현실) 분석의 대체품으로 삼으려는 시도가 쓸데없다는 소립니다. 담론분석은 텍스트 분석이고 텍스트가 현실과 무관하진 않지만 현실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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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marishin 2010/01/10 14:17

    위에 딱님께.
    1. 저는 저 책에 적대적이지 않아요. 헛소리라는 표현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헛소리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가 학자이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 논문은 담론분석 다시 말해 문서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지 분석한 것입니다. 학자라면 딱 그 이야기만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책으로 내면서 언론 인터뷰 따위에서 우리가 모두 "아는 사실" 곧 "우리 모두 자기계발하라는 압력 속에 시달리는 존재"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이 사회에 "자기계발하는 주체"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헛소리라고 한 겁니다. 일반인은 이렇게 말해도 그만이지만, 학자는 이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저는 학자들의 이런 불성실하고 자신의 연구 주제를 넘어서는 행위에 아주 "적대적"입니다.
    2. 실제 연구해야 알 수 있는 내용이 "고작 탈락자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정도"라구요? 그리고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구요? 만약 이런 식이면 서동진이 몇년동안 애써서 "정부와 기업의 문건과 쓰레기같은 자기계발서"의 텍스트분석을 해서 "고작" 알아낸 것이 딱님의 표현대로라면 "자기계발 담론을 통해서 이제까지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 했던 공공성이나 복지 영역들을 모두 개인들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면서 기업논리를 전사회의 모든 영역에 퍼뜨리는 것을 정당화한다는 것"이잖아요? 이건 우리가 모르던 건가요?
    2-1. 제가 보기에 이게 "한국 좌파"(딱님을 지칭하는 게 아님)의 전형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뭘 아는지, 뭘 모르는지, 우리가 아는 듯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별하는 것부터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3. 제가 서동진에게 "적대적"이라면, 이데올로기 효과 때문입니다. 어차피 베스트셀러가 되긴 어렵지만, 서동진이 주체의 탄생을 기정사실화하는 듯 발언을 하는 상황에서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고 기정사실화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이데올로기 공세가 얼마나 가짜인지를 구체적인 일터 연구와 구체적인 수용자 연구를 통해 실증적으로 깨부시지 않는 한, 그 담론의 효과를 강화하기 딱 좋다는 것입니다.(오해 소지를 피하려 수정했음.)
    4. 마지막 부분은 제가 쓴 글과 무관하고 그저 여담으로 쓰는 것입니다.
    정말 웃긴 것은 서동진의 결론입니다. (사실 담론분석과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도 불분명하지만, 그의 결론은 "자유"로는 불충분하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자유를 누리고 있나요? 굶어죽을 자유가 자유인가요?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자기계발만 할 자유가 진짜 자유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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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1/10 18:40

    서동진 씨의 연구는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70-80년대에 권력이 형성되던 메커니즘으로서 생명권력이 90년대이후 어떤 변모를 겪는지를 연구함으로써 좌파 학자들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던 신자유주의의 주체 형성 전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좌파 학자들이 신자유주의를 분석함에 있어서도 공공성이 파괴된다는 점에는 동의를 했지만, 왜 그것이 광범위한 저항으로 좀처럼 연결되지 못하는지를 제대로 분석할 수 없었어요. 서동진씨의 연구는 자기 계발하는 주체라는 담론 전략이 주체들에게 집단적 저항보다는 개인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스펙쌓기를 통해서 체제 내에서의 위치를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나아가도록 개인들을 채널링했다는 것을 분석하고, 이것을 위해서 어떤 기제들이 사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합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푸코적인 분석의 연장이지만, 우리 나라에서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한 의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동진 씨의 책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고 기정사실화한다는 것은 근거 없는 비난에 불과합니다. 저항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게임을 분석해야 하고, 어디서 새로운 대안적 권력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자유에 대한 그의 고민이야말로 그런 지점이 있지요. 신자유주의가 자유에 대한 개인들의 열망을 활용해서 어떻게 자발적인 복종들을 이끌어 냈는지를 말하고, 자유의 개념 자체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를 고민하잖아요? 그가 자유 만으로 안된다고 말하면서도 자유라는 개념을 버릴 수는 없고, 평등이라는 것과 다시 접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확히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굶어죽을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잖아요. 내가 보기에 신기섭 씨는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적대감때문에 논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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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Marishin 2010/01/10 20:41

    한마디만 하자면 서동진의 분석이 이데올로기 공세를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는 게 아니라 그가 주체의 탄생을 기정사실화 하는 행위(언론인터뷰 따위)가 그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겁니다.(제가 쓴 댓글을 다시 보니 오해의 소지가 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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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