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13년 새해 인사

2013년이 왔습니다. 이 블로그를 우연히 또는 기억하고 가끔 찾아주시는 분들께 인사드립니다.

 

2012년 말은 많은 사람에게 낙담과 혼돈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삶은 또 계속 되는 법이죠. 그리고 이 삶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데서 희망의 씨앗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새해에 한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이 블로그에 글을 좀더 자주 쓰겠다는 겁니다. (착각과 혼란, 현실감 상실을 부추기기 십상인 사교망(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은 좀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함께 희망을 찾아갈 방법을 고민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2013/01/02 09:48 2013/01/02 09:48
7 댓글
  1. 비밀방문자 2013/01/02 10:51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수정/삭제 |  댓글에 답장 |  댓글 고유 주소

  2. 심장원 2013/01/03 10:35

    새해에는 블로그에 글을 좀더 자주 쓰시겠다는 소식이 참 반갑습니다.
    저도 좀 자주 쓰려고 맘을 먹었는데
    어제 사무실 컴퓨터 하드드라이브가 사망....
    ㅠ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수정/삭제 |  댓글에 답장 |  댓글 고유 주소

  3. small eyes 2013/01/25 07:36

    "우연히" 찾아와서 눈팅만 하던 사람입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좋은 글 많이 와서 읽겠습니다.

     수정/삭제 |  댓글에 답장 |  댓글 고유 주소

  4. marishin 2013/03/11 13:22

    다른 글에 붙은 댓글인데,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따라 여기로 옮겨놨습니다. 여기로 옮겨놓는 것은 삭제하면서 일종의 보관용을 만들어둔다는 취지입니다.

    ------
    혁사무당파
    2013/03/10 13:12

    [운동평론]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 2013·03·09 16:34
    최덕효 (한국인권뉴스 대표, 기자)

    1. 분노조절장애와 트라우마

    활동가들이 척박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느끼는 갈등은 일반인들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종종 ‘분노’로 표출되는데, 이는 일상 외에도 운동에 있어 이념적 노선이나 활동가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관계들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분노’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될 때 우리는 일단 ‘분노조절장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활동가들은 통상 현장에서 싸우거나 비난하거나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등의 양태로 나타나는데, 자신의 상황에 대해 불평이나 한탄을 늘어놓는 일 혹은 상대에 대해 못된 사람이나 사기꾼 혹은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등의 행동이 반복되는 것이 그런 증상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러한 증상이 지속될 경우, 그는 자존감과 자기정체성이 붕괴됨으로써 현재 자신이 처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또한 억압된 상처가 무감각한 감정으로 이어져 사회적 제반 인간관계까지 포기하게 되는 불행을 가져오기도 한다.

    분노조절장애와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지만 때로는 개인의 기질이나 가족사 측면에서도 유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 정신병 의사이자 행동생물학자인 보리스 시륄닉 (Boris Cyrulnik)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피해자의 기억 속에 새겨진 트라우마는 마치 그를 따라다니는 유령처럼 그때부터 그의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말한다.

    즉, 이러한 트라우마는 사회적 관계에서 믿음과 신뢰를 잃게 하고, 자신과 타인 사이의 연결을 단절케 한다. 그리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삶을 선택하는 능력까지 상실케 한다. 결국 트라우마는 피해자에게 당시 문제의 시점에만 고통을 주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분노조절장애에서 ‘충동적 분노 폭발형’은 강한 생리적 반응이 동반되어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어 분노가 폭발하는 다혈질 기질에서 종종 발견된다. 양극성 장애(조울증)가 동반된 이 증상의 치료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약물을 복용하면 효과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하나는 ‘습관적 분노 폭발형’인데 이는 통상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분노 표현 자체가 효과적이라는 것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이는 흔히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식의 경험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키워 온 사람이 많으며 치료에는 약물보다는 ‘분노 조절 훈련’이 효과적이다.

    ‘분노 조절 훈련’은 첫째, 분노 폭발을 ‘폭력’으로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즉 신체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 역시 폭력이라는 인식으로 "나는 화를 조절할 수 있으며 이를 표현할 줄 아는 강한 사람"이라는 자기 격려를 수시로 한다. 둘째, 분노 폭발은 어떤 자극에 대해 통상 30초 안에 이루어지므로 이 순간을 넘겨 대화하는 인내가 필요하다. 셋째,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문제해결의 담지자가 됨으로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색하게 한다.

    (본문은 ‘레프트119’ 에 발표된 글입니다.)

    2. 이른바 <재능교육지부 투쟁관련 입장서>에 대한 진단

    3월 8일, 진보넷 공개 블로그 ‘한걸음씩’에 <재능교육지부 투쟁관련 입장서(강종숙, 박경선, 유명자)>란 제목의 글(이하 입장서)이 올라왔다. 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므로 해당 실명인물들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간주, 사회심리학적인 측면과 운동적 관점에서 진단해보기로 한다.

    1)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의 <입장서>

    <입장서>는 기본적으로 선악구도를 취함으로써 분노에 갇힌 트라우마 증상의 제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 즉, ‘사실(팩트)’을 기반으로 오늘 불편한 관계에 놓인 동지들에 대해 일일이 실명비판/비난을 쏟아 붓는다. 동지에 대한 마녀사냥 식의 표현이 관계망을 파괴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증상인데, 이러한 십자포화는 <입장서>측이 결과적으로 자승자박하는 ‘피해자 자처하기’의 이면으로 파악된다.

    사실은 진실과 전혀 다른 층위의 이야기로, 현상에 대한 배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운동이 진정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사실과 전체성에서 ‘진실과 총체성’으로 인식이 확장되어야 하며, 이를 토대로 사안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트라우마 상태에서는 인식의 폭이 더더욱 좁아지고 상대적으로 분노가 급증하기에 이에 대한 치유가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2) <입장서>측의 치명적 오류

    재능투쟁은 노조운동이 지닌 숙명적인 조합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그나마 재능동지들은 노동자성 인정도 받지 못한 상태 아닌가), 5년이 넘는 세월동안 여러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진보좌파의 정치운동으로 기반을 넓혀왔다. 따라서 우리 사회와 운동진영은 매우 특별한 이 싸움에 깊이 고마운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아무리 트라우마 상태라고 해도 넘어선 안 될 선이 있다. 그러나 <입장서>측은 이러저러한 개별적인 비판/비난에 이어 경찰과 ‘전기장판’ 이야기까지 써서 선을 넘어버렸다. 성당 측의 배려로 경찰병력 철수가 이루어졌고, 종탑에 ‘전기장판’이 올라갔으니 “침탈로부터의 안전은 확보된 것”인데, “투쟁의 확산이 아니라 종탑사수만을 되뇌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적들 앞에서 행하는, 동지들 각자에 대한 도덕적 비판/비난은 재능투쟁의 정당성에 대한 명분을 순식간에 앗아간다. 동지를 ‘사장님’이라고 단죄하고, 또 다른 동지를 ‘복직의사 없음’을 운운하며 문제 삼았다. 필자는 그 동지가 얼마나 큰 기업을 경영하는지 모르지만, 그 ‘사장님’이 종탑 고공농성에 올라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는 정도는 안다. 여기서 필자는 생계형 자영업조차도 ‘쁘띠’로 규정하고 간단히 배제하려는 철지난 좌파운동의 경직성(노동자주의)을 읽는다.

    초장기 투쟁 속에서 (정도의 차이뿐) 트라우마에 걸리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봐야 한다. 한 동지가 ‘복직의사’가 없다고 말했다고 하자. 싸움을 통해 사측에 질려버린 동지가 트라우마 상태에서 “이 회사, 정말 싫다”라는 느낌을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를 보듬어주기는커녕 말꼬리 잡기 식으로 그걸 팩트로 내세워 맹비난한다면, 그런 조직에서는 동지라고 믿고 편하게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교회재산에 경찰이 진입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조치지만 그들은 필요하면 즉시 달려오게 돼있으니 새삼스럽게 대단한 얘기도 아니다. 특히 몸이 남성들과 다른 여성들이 종탑 고공농성에서 병고에 덜 노출되도록 올린 전기장판을 거론한 것은, 바로 길 건너편 재능교육(본사) 사측에게 조소와 함께 교섭에서도 심리적 여유를 안겨주는 (결과적으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셈이 된다.

    혹자는 이를 간단히 여길지 모르지만, 이러한 행태는 이곳이 만약 전장戰場(사실 대 자본 전장이다)이라면 여지없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마땅한 심히 무거운 죄목에 해당한다.

    투쟁의 확산은 그간 재능투쟁의 성격상 함께 한 동지들 모두가 머리를 맞대며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종탑 쪽 동지들에게만(현 조직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비난하고 책임을 물을 사안이 아니다. 만약 그 동지들의 운동이 조합주의에 매몰된 폐쇄형 구조라면 일부러라도 적극 참여해서 운동을 바꿔내면 될 일이다.

    그리고, 만약 <입장서>측이 글에서 암시한 것처럼 재능지부가 전혀 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오류에 빠진 조합원들로 구성된 집단이었다면, 구 지도부의 다수인 <입장서>측은 그동안 이를 은폐한 채 운동을 흉내 내며 기만했다는 혐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3. 재능투쟁 제대로 하기

    비밀 아닌 비밀을 밝힌다. 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 페친인 양쪽에 나름 핫라인을 가동해서 재능투쟁을 둘러싼 내부의 간극을 좁히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리고 집회를 통해 자연스레 양쪽 동지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접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내가 어느 특정단체 소속이 아닌 까닭에 어쩌면 좀 더 균형 잡힌 사고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입장서>에는 ‘폭언폭행’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조직 내 소통구조가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이런 현상은 비단 재능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운동진영 곳곳에 암초로 자리하고 있는 만만찮은 과제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한 사안들은 그때그때 정리했어야 마땅한 사안으로 조직과 리더의 총체적 역량에 관한 문제로 봐야 한다.

    <입장서>는 “비없세 동지들의 제안에 따라 개최한 학습지노조 대의원대회에 참석한 4인의 대의원 가운데 박경선은 강종숙을, 비대위측 강경식은 황창훈을 지지했고, 나머지 두 명 또한 황창훈을 지지해 결국 황창훈을 직무대행으로 뽑았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여기 참여한 두 대의원에 대해 불성실한 활동 등을 들어 대의원 ‘자격 미비’를 간접 암시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그 대의원대회에 자격이 없는 대의원이 나왔다면 출마자들은 애초 경선을 거부하고 대회를 진행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경선이 진행됐다는 건 그 두 사람에 대한 대의원 자격을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시일이 경과한 후 <입장서>에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것은 선거에 패한 결과를 받아들이기 싫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될 수 없다.

    한편, <입장서>측은 결론부에서 이렇게 제안하고 있다. “재능교육지부투쟁은 공대위를 비롯한 연대단위와의 소통과 합의를 통해 마무리 되어야 합니다. ‘사측과의 합의(타결)안’, ‘타결 이후의 방침과 계획’, ‘타결 이후 노조체계와 역할’에 대한 방안까지 전반적인 사항을 열어놓고 이에 대한 사전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일괄 합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합의가 선결되지 않으면 지금처럼 각각 따로 가는 상황이 이어질 것입니다.”
    (중략)
    “지난 5년 투쟁을 함께 해 왔던 조합원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구조를 시급히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그 정당성을 전혀 인정받고 있지 못한 비대위와 직무대행을 더 이상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몇 사람도 안 되는 동지들을 (진위와 무관하게) 운동적/정치적으로 무자비하게 저격해놓고는 난데없이 ‘일괄 합의’를 던지는 데에서, 필자는 진보좌파진영을 상대로 한 강박적 이데올로기의 선전전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또한 연대단위의 제안 하에 이루어진 학습지노조 대의원대회 경선 결과를 부정하는 자기모순에서 ‘그 정당성’이 특정인에게만 국한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독선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각각 따로 가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에서 시청 환구단 농성장에 세워질 것 같은 새로운 깃발이 연상된다.

    필자만 그런가. ‘제안’은 미시에 갇히지 않고 낮은 자세에서 시작해야 빛이 나는 걸로 알고 있다. 오늘 이 척박한 운동 속에서나마, 권력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그런 제안의 겸허함을 지닌 동지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지난한 투쟁 속에서도 우리들의 작은 기쁨은 큰 기쁨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오늘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재능투쟁에 연대하고 있는 동지들은 <입장서>에 구구절절이 적힌 온갖 혐의와 의문투성이로 가득한 문건을 보면서 이제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직접적 발단이 된 2월 6일 재능지부 조합원 두 명이 종탑에 오르기 전까지의 재능지부 5년간의 투쟁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만약, 대의원대회에서 구 지도부가 다시 선출되었다면 <입장서>와 같은 내용의 문제 제기가 이처럼 거칠게 던져질 수 있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나와야만 <입장서>측의 문제 제기는 비로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동지들! 마음을 추스리자. 분노를 다스려 운동의 에너지를 자본을 향해 집중하자. 어떤 경우에도 동지들 간의 소통을 포기하지 말자. 혹여 자신이 운동을 빙자한 '관료'가 아니라면 말이다.

    ▒ 관련기사 바로가기
    [운동평론]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2)
    [운동평론]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1)

    혁사무당파
    2013/03/10 13:16
    (다음은 위 글에 대한 반론으로, 진보넷 속보에 실린 lcrlcr님의 글) 재능 학습지 투쟁에 관한 내부 논쟁에 대한 입장
    들어가며
    재능 학습지 투쟁의 전체 과정이 고공농성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다. 재능 공대위 활동을 수 년 동안 함께 진행해온 당사자로써 입을 닫고 있는 것이 아무런 입장도 없이 책임회피로 비춰질지 알면서도 정확히 글로 두 번 이야기했다. 한번은 자칭 황창훈 학습지노조 직무대행이 2월 25일에 공대위 회의소집 요구를 카톡방에 올리자 “황창훈 직무대행을 선임까지 오는 과정이 정치적으로나 운동적으로 반동적이고 퇴행적이라 판단하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적인 도리로도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황창훈이 소집하는 공대위 회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다른 한번은 최덕효 인권뉴스 대표가 3월 5일에 “재능투쟁&적전분열”를 작성하고 개인적으로 보내오자 그에 대한 사적 답변을 보냈으나, 이미 페이스북 등에 공개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최덕효 대표의 페이스북 답글로 올리게 되었다. 지금 쓰고 있는 최덕효 대표의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라는 글에 대한 개인적 입장이 공식적으로 공개적인 글이 되겠다. 이글에 대한 대답으로 일단은 기간 종탑농성에 대한 의견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다고 느낀다. (최덕효 대표의 그동안 재능 투쟁에 대한 헌신적인 연대와 레프트 119 활동을 하면서 느낀 것들이 트라우마적 관점에서 이번 재능투쟁에 대한 여러 우려지점들로 나타났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정치적 관점에 대한 일정한 차이가 있어서 불가피하게 입장을 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친분도 있고, 선배로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부족한 것은 본인의 책임임을 밝혀둔다.)

    공개된 논쟁

    학습지 노조 내부의 동의가 완결치 않았고 공대위 단위에 대한 사전 언질도 없었지만, 고공농성이 시작되자마자 공대위는 이 투쟁을 승리로 완결짓기 위해 많은 노력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러한 과정이 3주는 지속되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말을 아꼈다. 동시에 그 시간은 재능 비대위로부터 시작되어 급기야는 황창훈 직무대행 선임에 이르기까지 종탑농성 투쟁의 성격을 온전하게 규정지어줄 수 있는 사건들을 양산해냈다. 처음에는 고공투쟁의 성격이 불분명해서 어떻게든 봉합하고 추스르고 가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그러한 노력도 한계에 봉착해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립하는 두 견해, 양쪽 진영의 투쟁속에서만 통일을 가능하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러한 시기가 왔다는 것의 증거는 재능투쟁에 관한 온라인상의 의견들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중립적인 형식을 갖추면서 나온 의견들이 그것의 형식과는 다르게 특정한 입장을 채택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도 그렇지만, 노동자 내부의 입장차이도 첨예한 상황에 처해있을때 중립적은 입장은 존재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중립적 형식을 취하며 그간 논지를 구성해오던 모든 사람들, 공대위 내부건 아니면 외부건 상관없이 사태의 발전에 따라 어느 한쪽의 입장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특히 중립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동지들에게 가장 심각한 난관을 조성하고 걱정거리를 안기고 있는 것이다.

    트라우마 1
    재능투쟁을 운동적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라는 심리학적으로 다루는 것의 한계는 분명하다. 일반적인 트라우마는 약물로 어느 정도 치료할 수 있겠지만, 운동 속에서 쌓인 트라우마는 약물로 해결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약물이 자본에 대한 분노와 활동가 사이의 분노를 구분해서 치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들, 권력자들에 대한 트라우마의 치료는 그 분노를 표출하게 함으로써 해결하는 방안과 약물과 같은 인위적인 방식으로 억누르는 전혀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트라우마를 통해 사회병리적 현상을 다루는 것은 적합할 지 몰라도 운동에 대한 진단은 전혀 다른 문제인것 같다.
    “일반적으로 활동가들의 논쟁과 투쟁”, “기간 기아차나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에서 나타난 이른바 일부 정규직 조합활동가들의 활동가들에 대한 폭력” 등은 모두 분노와 폭력을 다소간 동반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활동가들의 탓으로 규정할 수 없다. 분노조절장애라고 손쉽게 규정하는 정신과 방식의 심리치료 한계는 명백하다. 따라서 재능 투쟁 내부 문제에서는 정신과 의사들의 방식을 따라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의 관점은 운동가적 관점이 아니라 정신과의사의 관점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재능 사안이 공개되는 것을 극구 만류하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공대위 등에 한정된 재능 내부의 논쟁들을 페이스북이나 진보넷 속보게시판을 통해서 가장 먼저 외부화하고 공개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마치 특정분야 전문의사가 자신이 진단할 전문 환자를 찾은 것처럼 여기면서 “여기에 내가 치료할 환자가 있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한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트라우마로 설명해야만 하는 또 다른 트라우마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트라우마 2
    운동가적 관점에서 분노와 폭력의 근원에 대해 접근한다면 정치적 입장의 차이, 투쟁전술에 관한 차이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분노와 폭력은 그것의 원인을 찾을 때에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당사자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경우 공론화의 과정을 거쳐서 운동진영 내부의 논쟁속에서 운동적 관점으로 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없이 한쪽에게만 가슴에 꼭꼭 묻어두라고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폭력이다. 세부적인 것을 가정 먼저 대외적으로 공개한 당사자가 비대위쪽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활동가들의 논쟁을 분노대 분노, 폭력대 폭력으로 해석한다면 정치적 논쟁은 사라져버리고, 자본가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관료들에 대한 분노와 “폭력”을 표출하는 활동가들은 분노조절 장애를 앓고 있는 환자쯤으로 치부되어버릴 것이다. 트라우마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을 어느정도 설명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운동하는 개인들의 정치적 투쟁을 설명해줄 수는 없다.
    자본에 맞서 조금만 투쟁해본 동지들이라면 자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맞선 정당한 폭력적 수단의 필요성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한다. 물론 이러한 분노의 에너지가 개별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응집되어서 적재적소에 배치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정치적 입장에 따른 투쟁의 결과물로만 나타날 수 있다. 자본에 대한 분노와 폭력은 무조건적이지만 노동자들 내에서의 “분노와 폭력”은 최후의 것이라는 측면에서만 차이를 가진다.

    고공투쟁의 성격
    재능 고공농성 투쟁의 성격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재능자본을 향한 투쟁이고, 두 번째는 기존 지도부를 끌어내리기 위한 투쟁이다. 나를 포함한 일부 동지들은 고공농성과 동시에 그렇게 간파했다. 첨탑고공 농성투쟁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비대위 측의 “신의 한 수”였다. 고공농성 당시에 첫 번째는 누가 봐도 분명한 것이었고, 두 번째는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나서도 안 되었다. 그래서 공대위를 비롯한 단위는 기존 운동진영이 종탑투쟁에 함께할 수 있도록 공대위를 확대하고, 투쟁계획을 일주일 단위로 내왔다.
    그리고 공대위에서는 고공농성을 주도한 동지들과 함께 올라간 다다음날 사측의 교섭요청에 대응해서 교섭응답 공문을 보내고 설 다음주부터 교섭에 들어가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공농성 주도세력은 공문을 보내지 않고 비대위를 결성했다. 비대위 결성 직후에 교섭공문 답신도 비대위로 보냈지만, 사측이 봐도 비대위가 아무런 권한도 없어서 교섭은 진행될 수 없었다. 그리고 비없세, 기존 지도부, 자칭 비대위의 합의도출로 2월 마지막주에는 교섭을 진행하기로 했지만, 비대위쪽 진영은 이 합의마저도 거부하고 자신들을 학습지노조 직무대행과 재능지부 직무대행으로 선출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비없세의 중재안마저도 깨버림으로써 운동진영에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었고, 사측도 교섭을 할 수 없는 처지에 와 버렸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종탑투쟁의 두 번째 목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비대위 측은 사측의 교섭요청에도 불구하고 3주간의 시간을 자신들이 학습지 노조와 재능지부를 장악하는데 온힘을 쏟았던 것이다. 이명박 정권 내내 운동진영에서까지 비야냥을 들어가면서 “단체협약 원상회복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면서 끈질기게 투쟁한 결과, 재능 사측이 자신들은 언제라고 교섭할 준비가 되어있다며 거의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비대위 측은 투쟁막바지까지 내부분열상을 사측에 공표했고, 납득할 수 없는 행위를 계속 전개했던 것이다.

    비없세와의 합의파기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놓고도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에서는 “3인 입장서”의 전체 과정을 보지 않고 지엽적인 조각들을 꺼낸 뒤에 온정주의적 해석을 곁들이면서 비대위 측을 옹호하고 있다. 3인을 포함하여 공대위, 그리고 나까지 포함해서 잘못한 것이 있다면 기간의 과정을 소상하게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운동진영 전체에 진작 공표하고 공론화시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도 온정주의로 인해 운동가로서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데 반성한다. 이제야 공개했냐고 비꼬면서 물타기 하려고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개적 논쟁은 문제의 핵심에 한발자국 들어갔다는데 의의가 있다.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의 필자는 정보의 제한으로 학습지 노조 대대가 비없세의 중재에 의해서 성립되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더라도 학습지 대대에서 직무대행 선출과정을 언급하는 것을 조금만 살펴보자. 운동가라면, 그리고 기본적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원 위장전입”, “페이퍼당원 동원”과 같은 짓거리를 결코 정상적인 것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능 5년의 투쟁동안 한 번도 투쟁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을 데려다가 거수기로 이용하는 것이 제정신이고 정상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황창훈 직무대행은 연이틀 연속으로 “학습지노조 서경본부 비대위원장”, “학습지 노조 직무대행” 감투를 쓰게 됨으로써 학습지노조 임원 겸직금지 조항에도 위배된다. 그 뿐 아니라 학습지 노조 대대는 비없세의 중재로 성립했고, 기존의 강종숙 위원장이 투쟁 마무리때까지만 직무대행을 유지하기로 비없세와 양자간 합의한바가 있다. 이는 투쟁하고 있는 조합원들은 대부분 아는 사실들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비대위 측 사람들에게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전위투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도, 노동조합 활동가도 아닌 단지 인간의로서의 기본적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일 따름이다. 황창훈 직무대행 선출과정은 비없세와의 합의 내용은 시궁창에 박아버리고 형식만 취하는 가장 나쁜 경우를 보여주었다.

    단일한 깃발을 들고 투쟁하기 위해
    아마 기존 몇 차례의 시도가 비대위측에 의해서 파탄나지 않았다면 3인의 입장서는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종탑에 올라간 시점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공개된 투쟁을 공대위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하지 않았다. 지난 3주 동안에 공대위, 비없세를 비롯해서 상황악화를 막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이 오고 갔다. 비대위 측의 강공 드라이브를 막고 온전하게 끝낼 방안들이 수차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동지들을 저격한다고 비판한다면 지난 과정을 소상히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듯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라도 그동안 투쟁에 함께 참여한 동지들이 모든 사항들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 모든 동지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사회적으로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것 속에서만 재능자본과의 투쟁에서 단일한 전선을 형성할 수 있다.
    “재능지부 투쟁에서 보는 운동의 어려움 & 극복하기(3)”의 마지막 두 가지 질문(“그렇다면, 문제의 직접적 발단이 된 2월 6일 재능지부 조합원 두 명이 종탑에 오르기 전까지의 재능지부 5년간의 투쟁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만약, 대의원대회에서 구 지도부가 다시 선출되었다면 <입장서>와 같은 내용의 문제 제기가 이처럼 거칠게 던져질 수 있었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투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비없세와의 합의 내용을 인정하고 지금이라도 합의의 정신이 지켜진다면, 전열을 정비해서 단일한 깃발을 들고 재능자본에 맞서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일한 깃발은 당면한 재능 자본에 맞선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단일한 깃발을 가지고 투쟁한다는 것이 비대위측과 재능자본에 대한 당면의 요구투쟁 이외의 문제, 즉 종탑농성과 동시에 비대위에서부터 학습지노조를 장악해가는 과정의 반동적이고 퇴행적인 행위라는 정치적 성격규정을 면죄받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난 5년간의 투쟁은 학습지 조합원들과 재능 공대위, 기독대책위 등 사회적인 유무형의 연대 속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 또한 운동진영의 합의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수정/삭제 |  댓글에 답장 |  댓글 고유 주소

트랙백0 트랙백
먼 댓글용 주소 :: https://blog.jinbo.net/marishin/trackback/352

앞으로 뒤로

외국 진보 진영의 글을 번역해 공개하는 걸 주 목적으로 하지만 요즘은 잡글이 더 많습니다. mari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