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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9/04
    탐정 김전일의 결정적 한마디 - 2011/05/22
    마법사얀
  2. 2011/09/04
    오월, 홍어 - 2011/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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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1/09/04
    메칸더 브이의 슬픈 전설 - 201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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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09/04
    코에이 삼국지의 추억 - 201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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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1/09/04
    스끼다시 내 인생 - 2010/11/14
    마법사얀
  6. 2006/09/20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1)
    마법사얀
  7. 2004/08/26
    첫 글...(1)
    마법사얀

탐정 김전일의 결정적 한마디 - 2011/05/22

 

얼마전 문명이라는 컴퓨터 게임이 높은 중독성 탓에 악마의 게임이라 불리며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기원전부터 미래까지 고유의 문명을 발전시키는 이 게임은 인류 역사의 다양한 요소들을 고루 반영해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영토, 천연자원과 같은 자연 조건들부터 인구수, 재정, 과학기술, 군사력과 같은 물질적 차원 그리고 국제 관계, 문화 수준과 같은 정신적 차원들을 모두 고려해야만 훌륭한 문명을 건설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요소는 행복이다. 구성원들의 행복도가 낮아지면 생산력이 하락하고 재정이 악화될 뿐 아니라 군사력도 약화돼 문명의 존립이 위협받게 된다.

최근 정치권에서는 복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무상급식 찬반으로 시작해 보편적 복지 대 선별적 복지와 같은 개념적 차원의 논쟁으로 발전했고, ‘3+3 정책(무상 급식·보육·의료+등록금·일자리·주거)’과 세대별로 특성화된 ‘생애맞춤형 복지정책’으로 각각 구체화되고 있다. 공공복지지출 비율이 OECD 국가 중 꼴찌인 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복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논의 지형이 구성원들의 행복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몇주전 쌍용자동차에서 구조조정당한 노동자 한명이 숨졌다. 2009년 구조조정 이후 발생한 15번째 죽음이었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노동자들의 외침이 옳았음이 비극적으로 증명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비극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있다. 등록금으로 인한 청년들의 좌절과 죽음이 이어지고 있으며, 높은 빈곤율 속에서 노인들의 자살률은 압도적인 차이로 OECD 1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구성원들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현실에서 복지의 수혜 범위를 논쟁하는 것은 너무 한가로운 일인 듯하다.

행복을 보장받기는커녕 생명이 위협받는 슬픈 현실은 일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 1등 기업 반도체 공장에서는 46명이 암으로 사망했고 대통령 사돈 기업 타이어공장에서는 지난 15년동안 100여명이 사망했다. 공기업인 전력회사의 송전탑을 관리하는 노동자들은 지난 3년동안 50명, 4대강 공사현장에서는 1년 8개월동안 20명이 목숨을 잃었다. OECD 출산율 꼴찌의 한국은 대신 자살률 1등과 산재사망률 1등을 자랑하고 있다.

탐정 김전일은 언제나 등장인물이 거의 죽고 나서야 범인이 누구인지를 알아낸다. 그의 때늦음에 몇몇 독자들은 안타까워하고 몇몇은 빈정거리기도 한다. 그런데 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런 때늦음조차 부러워해야할지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음에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15명의 평택연쇄살인사건, 20명의 4대강변연쇄살인사건. 범인은 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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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홍어 - 2011/05/01

 

나의 고향은 대구다. 80년대 정계 실력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던 모교 운동장 한켠에는 동문인 전직대통령의 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어린 나에게 ‘전통’은 물가를 잘 잡은 대통령이었고 저쪽 동네의 ‘몰표’를 보며 우리도 분발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당부를 들으며 자라났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로 부산과 한 가족이 되었고 ‘잃어버린 10년’ 동안 저쪽 동네 때문에 지역 경제 다 죽어간다는 말을 듣곤 했다.
최근 프로야구가 전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다. 경기장마다 만원을 이루고 주위 어디서나 야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전라도 지방의 향토 음식인 홍어가 기아 팬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은 듯하다. 특정 팀 팬들을 별명으로 부르는 것이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지만 왠지 홍어라는 표현에는 해태타이거즈의 불타는 버스가 오버랩된다.
홍어가 등장한 것은 2008년 촛불집회 이후인 듯하다. 소수에 대한 낙인찍기를 통해 다수를 동원하는 것은 통제의 기본 수단이다. 인종적 분절이 없는 한국에서 지역적 분절은 권위주의 시절부터 대중을 움직여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집권 세력에 대한 거세지는 비판에 직면해 ‘다수’는 한국사회에서 너무나도 익숙한 분절선을 토대로 상황을 반전시켜 나갔으리라. 태생부터 지역 구분에 기반한데다 대중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있는 프로야구가 훌륭한 매개체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대중들의 삶이 점점 팍팍해진다는 점에서 지역감정의 격화는 이해할 만하다.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조건 속에서 곤경의 원인이 되는 적을 설정하는 것 그리고 영웅을 기다리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다. 그러한 신화 속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선거는 신앙을 고백하는 종교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옆동네 ‘포항사람’에 대한 믿음은 실망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종부세 폐지로 인해 지자체 재정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그리고 수도권 규제완화로 인해 지방 경제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살림살이는 나아질 방도가 없다. 그럼에도 인과관계는 가려진 채 지방과 지방의 대립만이 가시화될 뿐이며 이제 믿음은 ‘구미사람’에게 옮겨간다.
지역감정은 애향심에 대한 모독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사랑하는 것과 봉건영주에 대한 소작농의 충성심이 같은 것이 될 수는 없다. 주인됨이 아니라 주인님을 섬기며 자신의 삶을 더 좋게 가꾸어나갈 수는 없다.
오월 그 때 그 곳, 마지막 밤 마지막 순간의 150명을 기억해본다. 지독한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들이 간절히 바랐던 것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의 외로움과 두려움이 계속되는 것만 같아, 오월이 다시금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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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칸더 브이의 슬픈 전설 - 2011/03/27

 

어린 시절, 지구를 지키는 용사들에 열광하던 나의 애창곡은 랄라라랄라 공격개시를 힘차게 외치는 노래였다. “메칸더 세 용사 단결하면 무적의 메칸더 브이 되어 원자력에너지의 힘이 솟는다.” 천하무적 메칸더 브이에게도 약점은 존재했다. 5분안에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방사능을 쫓아 오메가 미사일이 날아오기 때문에 늘 마음 졸이며 응원하곤 했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악당들도 미사일을 쏘기에는 고민이 됐을 것 같다. 그들이 정복하고픈 지구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같은 세상은 아니었을 테니까.

비극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현장에 투입된 후쿠야마 50은 수많은 생명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본 동북부의 운명이 달려 있는 것이다. 이들의 빛나는 희생에 가려져 이번 사태의 자초지종은 여전히 어둠속에 있다. 이러한 불투명성은 사태 악화의 원인으로 도쿄전력의 대응이 거론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수조원에 달하는 원자로를 보호하려던 민간기업의 합리적 결정은 너무나도 비합리적 결과를 낳고 있다.

흔히들 원자력은 가장 경제적인 에너지원으로 평가된다. 순간을 사는 이들에게 그 계산은 유효할지 모른다. 비용은 후대에 전가한 채 이득만을 계산한다면 그만큼 경제적인 것이 없으리라. 그러나 시간은 흘러가기 마련이며 원자력 발전에 드는 비용은 폐기물 처리와 발전소 폐쇄와 같은 전체 과정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얹어 놓는 사람은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또 자신이 먹은 후 누군가가 설거지를 헤야 한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일본의 비극은 숟가락만 얹어 놓는 사람들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통해 생산 과정에 어떤 원리가 적용되며 어떤 가치가 추구되는지가 바로 사용자의 생명과 직결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시장원리라는 이름 아래 안전보다 이윤을, 공공성보다 효율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정보의 장막 안에서 의사결정의 무제한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발전 속에 숨겨진 비용은 편서풍을 타고 사라지는게 아니라 자본의 타자들, 즉 노동자와 자연에게 돌아가고 있다. 하이 리턴을 노렸던 원자력 발전은 생명이라는 담보물에 하이 리스크를 남길 뿐이다.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인식되지 못했던 가치들은 재앙 앞에서 자신들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978년 설계수명 30년의 고리 1호가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 후 34년, 고리 1호는 여전히 발전 중이다. 그러나 잔치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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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에이 삼국지의 추억 - 2011/03/06

 

나를 사로잡았던 첫 컴퓨터 게임은 코에이에서 만든 삼국지 2였다. 학교가 끝나면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중원 제패의 꿈을 키우곤 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 어렵게 느껴지던 삼국지가 게임을 통해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다. 여포는 무력이 100이라 천하무적이지만 지력이 낮아 계략에 잘 걸린다. 무력이 99인 관우에 비해 93인 하후돈은 최고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잘 싸우는 녀석이다. 지력 98인 주유도 똑똑하긴 하지만 100인 공명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게임의 정보들은 수많은 등장인물을 바라보는 길잡이가 됐고 이를 통해 그들을 더 쉽고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유비는 그다지 인상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능력치가 고루 높은 조조에 비해 매력만 100일뿐 다른 능력치는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더 훌륭한 조조가 주인공이 아님이 의아하게만 여겨졌다. 그 후로도 삼국지를 읽으며 유비가 추구했던 대의, 시대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패권보다 민중의 삶을 더 우선했던 그의 정치적 노선을 인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중국인들이 유비를 사랑했던 이유가 숫자로 드러나지 않음은 먼 훗날에야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유비는 그저 무능력하고 찌질한 인물일 뿐이었다.

내년부터 국립 서울대에는 많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대학의 운영, 즉 대학이 무엇을 지향하고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해 논의하는 모습들도 많이 달라진다. 이제 유사한 지향점과 관점을 공유하는 일군의 사람들이 여러 다양한 학문들의 가치와 성과를 측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에 따라 자원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미래를 장악한다. 회계장부의 숫자로 파악되는 우리의 현재는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이윤이 아니라 가치를 지향하는, 이윤과 무관한 학문을 추구하는 존재들은 자신의 언어를 빼앗긴 채 숫자에 의해 호명당하게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적자를 냄으로써 공동체의 안녕을 위협하는 요소로 전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의 신비를 밝히려는 노력은 실용성과 상관없이 아름다우며 한국 사회에 대한 고민은 외국 논문 등재 횟수와 상관없이 소중하다.

진리가 강의실 안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대학생들은 교과서가 말해주지 않는 진리들에 헌신했으며 그 진리들을 세상과 함께 나누고자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거꾸로 우리들은 강의실 안의 진리를 찾아야 할 때일지도 모른다. 시장의 원리와 대학의 원리가 다르다고 믿는다면, 진리가 이윤으로 표현되지 않으며 학문의 무게를 화폐로 잴 수 없다고 믿는다면, 학문 공동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할지 대학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다. 미래가 확정되기까지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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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끼다시 내 인생 - 2010/11/14

G20 회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듯하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국격이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가 들려온다. 교통 통제를 비롯한 정부의 여러 조치들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시민의식에 대한 찬사도 쏟아진다.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고 배려하는 와중에서 빚어진 소소한 해프닝들도 들려온다. G20 동안 분뇨 수거가 중단됐으며, 택시기사들의 두발은 깔끔하게 정돈됐고, 감나무의 감들은 철사에 매달려 떨어질 염려가 없었다고 한다. 장갑차와 녹색 펜스로 둘러쳐진 코엑스에서 미키마우스 옷을 입은 이는 쭟겨나고, G20 홍보 포스터에 쥐그림을 그렸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지난 6일 1인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가 사망했다. 도토리만 받아서 고기반찬은 커녕 라면만 줄곧 먹었기 때문일까. 37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음원수익 분배 등의 음반 산업의 구조적 문제와 함께 인디음악인들의 처우에 대한 관심이 생겨나고 있다. 음악을 위해 기타를 팔고 치킨 배달을 해야 하는 현실을 노래하던 그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님을 인정했다. 무겁고 안 예쁘기에 세상은 그에게 찌그러져 살라 했지만, 루저라는 딱지에 무릎 꿇는 것이 아니라 건방진 세상아 덤벼라 라고 당당히 노래했다. 삶의 무게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렸던 그의 노래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저마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이른바 비하 논란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중 누군가의 현실을 얘기하는 것이 비하로 여겨지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된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달빛요정의 대표적 노래 중의 하나인 ‘절룩거리네’는 장애인 비하라는 이유로 방송금지조치를 당했다. 제목과 함께 ‘내 발모가지 분지르고 월드컵코리아, 내 손모가지 잘라내고 박찬호20승’이라는 구절이 문제가 됐던 것 같다. 월드컵과 박찬호는 국격을 높이는 일이지만, 매일 산업재해로 266명이 다치고 6명이 사망하는 산재사망률 OECD 1위인 한국의 현실을 말하는 것은 누군가를 비하하는 일로 비쳐진 것이리라.

 

물론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은 달빛요정이 아니라 슈퍼스타 케이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얼마나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가이다. 전기모터로 돌아가는 청계천이 하천이 될 수 없듯, 아무리 예쁘고 화려하더라도 신화는 현실이 될 수 없다. 절망 만큼의 성숙 그 깊이 만큼의 희망. 누군가의 격을 높이는 것은 그 존재의 현실을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노예를 비하하는 것은 스파르타쿠스가 아니라 시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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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를....

제목은 그냥 내가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 중에 한 구절이구...

 

최근 .. 이바닥에....내가 속한 공간이 .. 아마도 현재로서는 내가 유일하게 속한 공간인데.... 그것도 매우 느슨하긴 하지만... 없어지기로 하는 결정을 내리는 자리에 갔었다.

 

난 완전히 결정을 내리는 자리인 줄 알고 간건데.. 그런 건 아니고 토론회 내지는 공청회 정도의 자리였던가 보다.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 어느덧 10여년. 직간접적으로 크고작은 참 많은 공간들에 기웃거렸었고, 참 많은 공간들이 사라졌다. 내가 기웃거렷던 공간들은 내가 뛰어나와서 멀어졌다기 보다는 대부분 내가 끝자락을 부여잡고 있을 때 "망했다"!!

 

이젠 별다른 느낌도 없다. 마치 식물인간 처럼 목숨을 연명하고만 있다는 사실을 모두들 그리고 나 역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나....

 

이제 이 바닥에 나의 공간은 전혀 없어졌다.

 

10여년전만 하더라도. 아니 5년전만 하더라도 그런 것 따윈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있을 만한 공간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그런건 쓸데없는 것 마치 일종의 사치나 혹은 자기 몫 확보하는 것 따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공간이 없는 내게... 이젠 이 바닥에 기웃거리는 것조차 자신이 없다.

 

아니 공간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차라리 문제는 공간이 없음을 핑계삼는 내 자신이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정말 자신이 없다.

 

선배도 동기도 후배도 없는 것... 뭐 몇년째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치 '사업파트너'와 같은 '동지'들과 무언가를 해나가는 것은, 적어도 나같은 수준의 사람으로서는 아직 벅찬 일인 듯만 하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함께 해나간다는 것만으로는 점점 깊어져가는 나의 패배주의와 무기력증과 냉소주의를 막아낼수가 없는 듯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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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

글이 써질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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