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듬

2008/01/28 21:22 09

 
서머타임

 

_김이듬


발목은 시들어간다
걸음을 낭비했다
위세척을 하고 난 너는 더욱 고통스러워하고
여름이 제일 추워, 나는 없어질 거야
너는 눈물을 흘리며 웃지만
해가 뜰 때까지만 같이 있어줄게
풍선을 불어줄게
날아오르다가 터지겠지
꿀벌은 꽃잎 속에서
고양이는 나무 위에서
너는 내 무릎을 베고

 

아니, 널 따라하지 않아
왜 남은 날들을 신경써야 하니
잘 하려니까 심장을 멈추고 싶잖아
난 일광을 낭비할 거야 날 낭비할거야
낮에는 커튼을 치지
많이 걷지 않고 버스에서 곧잘 자
뭘 찾으려고 넌 거기까지 갔었니

 

내 모닝콜은 거슈윈의 자장가
내일 못 일어나도
여름은 살기 좋은 계절
여름은 죽기 좋은 계절
그럴 리 없지만
물고기는 수면 위를 날고 목화는 익어가는데
아빠는 부자 엄마는 멋쟁이
그러니 아가야 울지 말아라

 

 

 

일요일의 세이렌

 

_김이듬

 

 

  다독여 모셔놓았던 눈사람을 냉장고에서 꺼냈습니다. 그땐 왜 그랬을까요? 모든 독신자와 모든 걸인들과 모든 저녁의 개들에게 묻습니다. 가르쳐주시겠어요? 이 허기는 살아 있는 동안 끝날까요? 늦봄, 양손에 쥔 한 덩이씩의 눈을 주먹밥처럼 깨물며 이상한 사이렌 소리를 듣습니다. 댐이 방류를 시작합니다. 강가의 사람들은 신속히 밖으로 나가주십시오. 진양호 댐 관리소에서 알려드립니다. 사람들은 들었을까요? 내 방은 강에서 멀리 있는데 물 빠진 청바지 같은 하늘엔 유령들이 득시글거립니다. 가르쳐주세요. 눈사람처럼 내 다리는 하나로 붙어 광채를 띤 채 꿈틀댑니다. 나는 어느 바다로 흘러갈까요? 혼자 그곳에 갈까요? 손바닥에서 입에서 흘러내리는 이것이 한때 머리였는지 몸통이었는지 아무것도 아니었는지 나는 왜 지금 막 사라진 것들에만 쏠릴까요? 부르면 혼자 오시겠어요?

 


레일 없는 기차

 

_김이듬

 

 

  몇 해 만에 기차를 탔습니다. 정하지 않은 목적지로 떠나보긴 참 오랜만이네요. 파파야 나무 숲 속을 걷고 있는데 파랗게 바다가 펼쳐졌습니다. 나는 만돌린을 안고 해변에 누워 있었습니다. 추워서 노란 모래 사자 입 안에 다리를 집어넣고 잠들었습니다.
  네, 깜빡 잠자는 꿈을 꾼 게지요. 놀라 눈을 떠보니 내 머리는 낯선 사람의 어깨 위에 놓여 있네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의 구레나룻에 닿은 머리칼. 누군가 우릴 보면 먼 데 도망하는 연인쯤으로 알겠지요.
어쩌죠? 후다닥 고개 들고 미안해요 말해야 하는데 이 언저리, 무릎까지 빠지는 모래 언덕에 내 이마를 대고 조금만 더 잠들지 몰라요. 당황한 듯 굳어 있는 더운 베개가 이토록 설레는 꿈을 준다면.
  모르는 사람들이 내릴 때마다 기차는 울며 흔들립니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시끄럽지 않아야 할 텐데. 지진을 감지한 박쥐가 입 안에서 기침이 되어 터져 나오려는 걸 꾹 참습니다.
다시 눈떴을 때 나는 혼자 긴 등받이에 기대어 있길 바랍니다. 구멍 난 희뿌연 의자에 손가락을 벌린 채. 닿지 않는 건반을 두드리는 환청, 발소리가 들리고 해사한 햇살을 가르는 동굴을 지나 그림자들은 해변으로 흘러갑니다.

 

 

 

 

 

 

 

시집 <명령하라 팜 파탈> 2007년 문학과지성사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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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8 21:22 2008/01/2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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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달군  2008/01/29 15:5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좋다.
  2. 여름:녀름  2008/01/29 22: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 시집사서 시 더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