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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울성은 자본가에게만 적용된다..

군대 있을 때 '산업시찰' 이란 이름으로 경북 영주에

있는 KT&G 제조창에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안내원의 소개를 따라 제조공정을 구경하기 위해

공장 안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이 공장에서 우리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우리 회사가 얼마나 완벽한 무인공정 체제를 자랑하며,

얼마나 최고의 장비를 들여와, 효율적인 생산체제를 보여주는지'

였다.

 

쉴새없이 담배가 만들어지는 커다란 공장은 과연 기계를 조작하

는 몇몇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부 로봇이나 자동화 기계를

통해 모든 것이 '빠르고, 많이' 생산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에 도입한 기계는 전 세계에 몇대 없는 것으로

독일에서 생산한 최고의 기계다.

그러나 독일 내 담배회사에 이 기계는 도입되지 않았다.

안내원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간략히 '사회와 노조'의

문제 때문이라 했다.

 

안내원의 이 말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독일은 이 좋은 기계를 자국에서는 쓰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이 공장에 나와 일을 한다.

자동화공정을 할 능력이 없는게 아니라 의지가 없는 것.

이것이 과연 자본가에게, 그리고 흔히 말하는 '국가경제'에

효율적인 일인가.

 

'효율성' 이란 반드시 추구해야하는

아프리오리하게 검증된 절대진리 아니었던가.

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기에, 독일이란 나라는

이렇게 '비효율적'인 것일까?

 

'이성'적인 사람은,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효과를 내는

'효율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자본주의에서 이성은 조금의 노력으로 최대의 결과를 내는 데 

소모된다. 왠지 도둑놈 심보 같은 느낌이 들지만, 화폐가 통용

되는 모든 사회는 이 원칙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다.

 

 

맑스의 도식과 개념을 빌려와 이야기하자면,

자본을 가진 자가 생산설비에 투자를 하는 것은 당연.

자본의 궁극목적이 더 많은 이문을 남기는데 있으므로, 

인건비를 줄이고 생산설비를 투자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길이다.

 

여기에 투하되는 노동량이 기계에 의해 완전 대체될 때,

도식에서 '인건비' 혹은 '필요노동'으로 처리되는

'일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사라지게 된다.

 

KT&G 제조창이 최신의 설비로 무인공정화, 자동화되면,

그 첨단 과학기술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에 매료되는 뒤편으로

그만큼의 '일하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잃는다.

 

효율성이 만능의 법칙이 되었기에,

최첨단 설비를 투자해서 사람없이도 돌아가는 생산설비를

구축하는 일은, 불가피를 넘어,

 

과학기술이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그 신비한 효과에

(실제로 로봇이 사람처럼 움직여, 일들을 처리하는 모습이

내 눈앞에 바로 펼쳐졌을 때의 그 경이로움이란 )

힘입어, 모종의 당위성마저 획득해 버린다.

 

그 효과를 선전하기 위한 여러 전략의 일환으로

사람들 모아서 '우와 신기하네' 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이런 견학 프로그램도 나오는 것이다.

 

('신기하다'라는 감정영역이, '그것이 옳다'는 이성영역으로

 넘어가는 이 과정은 내가 겪어보니 모순없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저런 최첨단 기계설비를 만들 능력이 되면서도, 그리고

실제로 만들어 내어 다른 나라에 판매하고 있으면서도,

자국에서는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 엄청나고

경이로운 과학기술의 집약체를 사용하지 않는 독일.

 

독일인들은 과연, 효율성을 추구할 줄 모르는 미련한 바보들일까.

 

적어도 한국인의 대부분은 이들 행동의 '비효율성'을 들어

이들을 바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비효율성'을 지적하는

이들의 수만큼, 한국은 '효율성'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효율성도 짝퉁임을 알수 있다.

한국사회에서(비단 한국사회 뿐이겠냐만) 

이성은 '화폐로 측량할 수 있는 이성' 이고,

효율성은 '조금 내고, 많이 먹는' 도둑놈 심보를 세련되게 추구

하는 일의 다름 아니다.

 

짝퉁 효율성 만능주의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

그렇기에, 비정규직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위한 불가피한

'효율적 선택' 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은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받는 이들의 가장 '효율적'인 수단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회사가 돌아갔을때와 비교하는 도식으로

'얼마얼마의 손해를 낸' 불법적인 사건이 되어,

오늘의 이랜드 사람들처럼 개처럼 끌려나가 법앞에 심판받는다.

 

여기서 효율성은 '자본가에게만 적용되는' 효율성인 것이다.

"정상적으로 회사가 돌아갔을 때 하루 평균 얼마를 벌 수 있는데"

를 계산하는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회사에 없어 영구히 일을 하지 않았을때, 자신들은

한푼도 벌 수 없는 실업자 신세가 된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처럼  이성이 '모든 관계를 손익계산으로 주먹구구하게 만들고'

효율성이 '강한 자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효율성' 이라면,

 

그건 분명 '옳지 않다.'  

논리적으로 적합하다, 틀리다가 아니라

가치판단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옳은 것으로 포장하고, 인식시키는 노력은

이데올로기적이다.

 

부지불식간에 우리에게 "효율성=무조건 바람직"의

도식이 들어와 앉아 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수많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있다.

그 중 하나인 '노동'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독일은 과감히 '비효율'을 선택했다.

 

한국은 효율성의 악셀을 밟아,

모든 효율이 자본가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하는 길을

빠르게 질주하고 있다.

 

 

끝맺는다. 그래서 뭘 어쩌잔 말인가?

 

완전한 개인으로의 인간은

그 모든 준거의 틀이 '자본' 이 아닌 '인간'에서

나와야 옳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것 아니고, 자본가를 박살내서

프롤레탈리아 세상을 만들자는 것 아니다.

 

다만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현상의 이면에

인간적 삶의 상실이 자리잡을 수도 있음을

통찰하길 원할 뿐. 

 

더불어

'효율성'이라는 단어가

'좋고 옳으며 최선'이라는 가치판단적인 함의를 담게

되는 것은 경계하여야 할 일임을 인식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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