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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6/26
    ^^1950년대 남한 4월로 가는 길^^
    kabita & anju
  2. 2005/06/26
    ^^노동운동 위기의 대안는 모엇인가^^
    kabita & anju
  3. 2005/06/26
    ^^볼리비아는 대통령를 좇아 내을 반란
    kabita & anju
  4. 2005/06/25
    ^^사회주의냐 죽음이냐
    kabita & anju
  5. 2005/06/25
    ^^아름 다음 산^^
    kabita & anju
  6. 2005/06/24
    ^^아름 다움^^
    kabita & anju
  7. 2005/06/20
    ^^노동자의 사진 이야기^^
    kabita & anju
  8. 2005/06/17
    ^^운동 건설^^
    kabita & anju
  9. 2005/06/17
    ^^강통으로 만든 장난감들^^
    kabita & anju
  10. 2005/06/17
    ^^아름다운 지구의 모습^^
    kabita & anju

^^1950년대 남한 4월로 가는 길^^


 한국전쟁이 남한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역설적으로 급속한 자본 축적의 기반을 마련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진행된 농지개혁은 전근대적 사회관계를 해체했다. 특히 기생적 지주 계급은 더는 특권계급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전쟁 동안 거대하게 성장한 억압적 국가 기구는 “저임금 장시간 고강도의 초과착취로 특정지은” 억압적 노동통제의 기초를 제공했다. 국가는 모든 계급으로부터 초월해 있었다.

1950년대 한국경제는 ‘종속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일정한 성장을 이루었다. 정성진은 “1954∼59년 GNP의 연평균 성장률은 5.35퍼센트로 1960∼64년 5.5퍼센트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다”고 썼다. 한국경제에서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의 시도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런 성장은 미국의 막대한 원조자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커밍스는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는 유럽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보다 상당히 높고 라틴 아메리카 전체에 대한 군사원조 액수의 4배”에 달했다고 말한다.

박명림이 말했듯이, “미국에게 있어 1950년대 남한은 반공투쟁의 전진기지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 … 체제의 성공적인 진열장”이기도 해야만 했다.

원조 자금은 이승만 정권의 지배수단이 됐다. 이승만 정권은 이른바 ‘3백 산업’으로 표현된 소비재 부문의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을 통해 자본을 축적해 나가려 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본가들을 “만들어” 나갔다.

오늘날의 대표적 재벌 집단은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김동춘이 말하듯이, “시설은 귀속업체의 불하로부터, 원료는 원조 원면으로부터, 그리고 기업자금은 대충자금으로부터 확보할 수 있었던 이들은, 극단적으로 말해 별다른 자본 없이도 권력과 선이 닿으면 하루아침에 재벌이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삼성의 이병철은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같은 옛 일본 기업들을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1950년대의 계급구조는 여전히 핵심 계급 ― 자본가와 노동자계급 ― 이 취약하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1955년에 자본가 계급은 전체 인구 중 1.2퍼센트에 불과했다. 반면 도시 중간계급은 13.3퍼센트, 농민은 67.5퍼센트, 노동계급은 18퍼센트였다.

박동철이 지적하듯이 사적 자본가들은 “국민경제 내에서 지배적 자본 분파로 되었다고 보기 어려웠다.” 박명림은 이 때의 자본가계급은 “국가에 의해 창출된 기생적 계급일 뿐으로서 국가에 대해 어떠한 독립적인 정치적 요구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제정 시대 러시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주에 대한 역사적 투쟁조차 수행하지 못했을 정도로 취약했다.

이승만의 권위주의에 대한 대안이 민주당이라는 사실은 하나의 희극이었다. 민주당은 한민당이라는 지주의 당을 모체로 한 당이었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으로 바뀌어 갔다.

한국 자유주의 정당의 보수적 본질과 무능력은 태생적이었다. 민주당은 조봉암의 ‘개량주의적 강령’조차도 ‘빨갱이’라고 매도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김준연은 “조봉암에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표를 주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9년 조봉암이 사형당했을 때도 민주당은 내심 환영했을 정도였다.

박명림의 말처럼 “노동계급의 급진주의가 부재할 때 자유주의가 독자적으로 보수세력 … 을 타파하고 민주주의를 수립할 가능성은 매우 협애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온갖 부정에도 불구하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은 유권자의 23.8퍼센트, 2백15만 표를 획득하며 약진했다.

그러나 조봉암의 진보당은 노동자 정당이라기보다는 ‘피해대중론’이라는 포퓰리즘 정치를 가진 정당이었다. 게다가 “진보당 안에는 우익 청년단 출신이나 특무기관 출신이 너무 많다”는 불평이 나올 정도로 이념적 스펙트럼도 넓었다.

조봉암이 사형당했을 때도 그를 지지하던 대중의 어떠한 저항도 발생하지 않았을 정도로 진보당은 대중조직, 특히 노동자들에게 뿌리내린 정당이 아니었다.

전후 복구와 더불어 노동자 계급의 수는 증가하고 있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은 꾸준히 증가했지만, 이 당시 노동조합의 특성상 노동자들의 자기조직으로 기능하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 1958년에 4백여 개의 노동조합 가운데 단체협약을 체결한 숫자는 68개에 불과했다.

전평을 분쇄하고 만들어진 대한노총은 부패한 노조관료의 아성이었다. 1955년에는 아예 자유당의 산하기구가 돼 이승만 정권의 핵심적인 동원기구로 기능하고 있었다.

1956년 대한노총은 “백만 근로자는 이 대통령께서 재출마를 하지 않으시면 직장을 포기하고 죽음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재출마 탄원서’를 올리기도 했다.

전쟁의 결과 저항의 구심 역할을 했던 좌파는 국가탄압으로 절멸되거나 월북했고, 설비 파괴와 전쟁 동원은 투쟁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을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게 만들었다. 새 세대의 노동자들 대부분이 바로 어제까지는 농민이었다. 여기에 광범한 산업예비군의 존재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저항에 나서지 못하도록 만드는 조건이 됐다.

제조업은 완만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도시인구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1백50만 명에 이르는 실업자와 2백만 명으로 추산된 농촌의 잠재적 실업 인구를 흡수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도시는 커다란 빈민의 바다였다. 1961년 서울의 취업자 수는 전체 서울시민의 23퍼센트에 불과했다. 나머지 70퍼센트는 불안정하고 비생산적인 ‘서비스부문’ 종사자와 실업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나마 1959년의 위기 국면에서 노동쟁의가 소생하는 분위기를 보여 주었다.

농민들은 미국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원조 곡물과 정부의 저곡가 정책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지만 선거에서는 늘 이승만에게 표를 던지며 보수화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농지개혁이 광범한 자작 소농층을 만들었다는 점과 한국전쟁의 공포와 국가의 억압적 통제가 덧씌워졌기 때문이다. 선거에서 ‘여촌야도’ 현상은 이 시기 전형적인 특징이 됐다.

1950년대에 이룬 가장 인상적인 성장은 교육부문이다. 이 역시 미국의 교육 원조가 커다란 구실을 했다. 1945∼60년 사이에 고등학생 수는 8만 4천3백여 명에서 26만 3천5백여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다. 대학생 수는 7천8백여 명에서 9만 7천8백여 명으로 12배 이상 증가했다.

학생들은 반공집회나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는 관제데모에 동원되기 일쑤였지만, 임대식이 지적하듯이 “30퍼센트가 넘는 실업률로 인해 사회적 불만은 대단했다.”

1950년대 후반 들어 미국은 재정적자를 만회하기 위해 원조를 삭감하게 된다. 게다가 1955년경에 들어서면 과잉투자된 소비재 부문에서도 이윤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면사의 경우 1953년 순이익률이 1백93퍼센트였는데, 1955년에는 6퍼센트로 급락했다. 그래서 1958∼60년에 면방직 공업의 공장 가동률은 65퍼센트로 떨어졌고, 제분공업은 25∼40퍼센트, 제당 공업은 25퍼센트 안팎으로 가동률이 떨어졌다.

1959년 미국의 ‘콜론 보고서’는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국의 원조 없이는 한국 경제가 붕괴할 것이며 … 젊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부자는 점점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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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 위기의 대안는 모엇인가^^


노동운동 위기에 대해 산별노조 건설을 대안으로 보는 시각이 흔하다. 노동운동이 대기업·남성·정규직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조직률이 정체하는 이유를 ‘기업별 노조’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이 ‘계급적 연대와 사회적 연대’에 충실히 복무하기 위해서는, 기업별 노조 체제를 극복하고 산별노조로 조직 형태를 전환해야 한다”(김유선, <한국의 노동: 진단과 과제>)는 것이다.

물론, 더 큰 연대를 바라는 노동자들의 염원을 반영하고, 더 넓은 범위로 노동자들을 조직한다는 점에서 산별노조를 지지해야 한다. 실제로, 소산별 노조인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의 가입이 가능하도록 규약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라는 조직 형식이 기업과 업종을 뛰어넘는 노동자들의 단결을 자동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노동운동이 침체돼 있는 미국의 산별노조 AFL-CIO가 그것을 보여 준다. 반면, 한국에서 1987년 노동자 투쟁의 절정기에 기업별 민주노조는 지역과 업종을 뛰어넘는 단결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산별노조도 노동조합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다. 자본주의 내에서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려는 노동조합은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에게 부과한 분리를 수동적으로 반영하기 마련이다. 기업·업종별보다 폭넓은 산업별 조직이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특히 지난 몇 년간 민주노조 운동에서는 현장조합원들의 주도성과 운동이 뒷받침되기보다는 주로 순전한 조직 형식과 상층의 교섭 기구로서 산별노조 건설이 추진돼 왔다. 지난해 보건의료노조의 ‘10장 2조’ 파문처럼 현장조합원 행동보다 산별 노조 간부들의 통제가 강조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노동운동 내 소위 ‘현장파’ 쪽에서는 기존의 산별노조가 ‘업종’ 중심으로 건설되고 있는 것을 문제 삼으며 ‘지역’ 중심의 산별 노조 건설을 대안으로 내세운다.

“교섭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는 산별노조는 업종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지역이 중심이 되는 산별노조를 건설해야 한다.”(김동성 ‘전국민주노조를 건설하자’ <현장에서 미래를> 108호)

그러나 지역이냐 업종이냐는 핵심이 아니다. 핵심은 현장조합원 운동과 주도성이다.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이 점을 놓쳐 왔다. 대부분의 ‘현장조직’들은 현장조합원 운동보다 집행부 장악과 좌파 지도부 수립에 치중했다. 

그래서 사회적 합의주의 반대를 내건 전노투에서도 “‘현장으로부터’, ‘아래로부터’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고] … 상층 중심, 현장 외곽의 활동 방식을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사회주의노동자신문(준) ‘전노투를 탈퇴하며’)

따라서 좌·우파 노조 관료 모두에게서 독립적이면서도 그들이 투쟁할 땐 투쟁의 중추가 되고, 투쟁을 배신할 때는 독립적으로 싸울 수 있는 현장조합원 운동과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이 때, 사회주의자들은 상층 간부들의 협상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 투쟁으로 개혁을 획득하려는 현장조합원 운동도 그 자체로 노동조합의 부문주의와 경제주의를 뛰어넘을 순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투쟁 고양기에 현장조합원 운동을 건설함과 동시에, 사회 근본 변혁을 위한 투쟁과 조직을 건설한다는 과제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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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는 대통령를 좇아 내을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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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에서는 3년 동안 대중 운동이 두 명의 대통령을 권좌에서 쫓아냈다. 농민·노동자·학생 들이 라 파스, 수크레 등 대도시들에서 힘을 결집하고 의지를 과시하자, 카를로스 메사가 6월 6일에 사임했다.

진정한 적은 2003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볼리비아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세계 자본은 메사와 그의 전임자를 가장 신뢰했는데, 볼리비아의 주요 천연 자원인 석유와 가스를 차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압력을 넣었다.

1999년에 세계 자본이 눈독을 들인 것은 물이었다. 벡텔 같은 거대 사기업들이 전국적인 물 공급을 지배하려 했다. 2005년에는 영국가스와 스페인 석유기업 렙솔이 볼리비아의 가스를 지배하고 싶어했다.

6년 전에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이 물 사유화를 저지했다. 코차밤바의 대중 반란이 다국적기업들을 몰아냈다. 지금은 선출된 관리위원회가 물을 배급한다. 그 승리는 라틴 아메리카의 빈국들에서 새로운 저항 운동이 시작됐음을 뜻했다.

투쟁은 여러 전선들로 확대됐다. 수자원 다국적기업들을 성공적으로 몰아낸 연합체는 볼리비아의 석유와 가스를 국유화하기 위한 새로운 연합체를 주도했다.

그와 동시에, 원주민 권리 획득 투쟁의 전투성이 새로운 수준에 이르렀다.

2003년 9월에 이 두 세력이 단결하자 정부는 끔찍한 폭력을 휘둘렀다. 60여 명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됐고, “그링고”[미국인]이라는 악명을 얻었던 대통령 로사다가 물러났다.

그의 후임인 카를로스 메사는 가스 관련 국민투표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가스 산업을 국유화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다국적기업들과의 협정을 파기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지난 3월에 볼리비아 의회는 다국적기업들이 지불하는 18퍼센트의 사용료(로열티)에 32퍼센트의 세금을 추가 부과하는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운동의 요구와는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던 메사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5월 중순에 대중 운동은 정치권의 권모술수에 염증을 느꼈고, 새로운 저항 운동이 국유화라는 간명한 요구를 걸고 등장했다.

엘 알토는 원주민 인구가 1백만 명이고, 수도 라 파스보다 약 3백 미터 높은 고원지대다. 그 곳에서 일어난 무기한 파업은 새로운 국면이 시작됐음을 뜻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조직된 저항의 역사는 오래됐다.

그들의 대다수는 볼리비아노총(COB)의 핵심 기반이자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영웅적인 투쟁이 벌어졌던 폐광 지역 출신들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펠리페 퀴스페가 이끄는 아이마라[페루와 볼리비아의 인디오] 권리 운동의 중심이었다. 아이마라는 볼리비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지금 엘 알토는 또다시 전국적인 운동의 중심이다. 그러나 2003년과 2005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었다. 이번에는 COB와 노동조합들, 특히 교사 단체들이 학생, 주택조합, 지역사회 단체를 포함하는 광범한 동맹의 주축이다.

위기가 심화하자 차파레 코카잎 재배농들의 지도자 에보 모랄레스가 점점 더 중요한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모랄레스는 MAS(사회주의운동당)의 지도자이고, 물 사유화 전투를 이끌면서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됐다. 그는 2002년 대선에 출마해 2위(22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러나, 모랄레스는 그 뒤 중앙 정치무대로 옮아갔다. 그는 국유화 요구를 거론하지 않았고, 50퍼센트의 로열티를 물리자고 주장했다. 그리 되면 더 많은 돈이 정부 금고로 들어갈지는 몰라도 자원 통제권은 다국적기업들의 수중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사태가 긴박하게 전개되자, 5월 말에 가톨릭 교회가 원주민 요구들, 제헌의회, 지방자치를 놓고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타협안이었다. 그리고 모랄레스는 타협안을 지지했다.

사실, 그것은 운동의 명확한 요구를 훼손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지방자치는 무해한 요구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많은 가스가 발굴될 예정인 산타 크루스를 중심으로 한 볼리비아 동부 지방에 대한 기업주들의 강력한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것이다.

모랄레스에게 중요한 문제는 차기 선거 결과다. 그의 관심사는 중간계급 지지 기반이 약화되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섬뜩하리만치 낯익은 느낌을 준다.

이것은 브라질 대통령 룰라와 아르헨티나 대통령 키르히너의 주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훨씬 더 극적인 것은, 대중 운동의 지지 덕분에 2000년에 에콰도르 대통령에 선출됐던 루시오 구티에레스의 처지였다.

구티에레스가 약속을 어기고 세계 자본과 거래하는 데 매달리자 거대한 대중 저항이 일어나 일주일 만에 구티에레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카를로스 메사의 사임은 언젠가는 닥칠 일었다. 그를 상원의장 바카 디에스 ― 산타 크루스 경제인연합회의 중심 인물 ― 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대중적 반발 때문에 좌절됐다.

대법원장 에두아르도 로드리게스가 새 임시 대통령이 됐다. 선거에 모든 희망을 걸면서 판을 깨지 않으려는 모랄레스 같은 사람들은 로드리게스를 친개혁파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볼리비아 운동은 오랜 기억을 갖고 있다. 지금 전국적인 시위와 저항에서 등장하는 슬로건은 단순명쾌하다.

첫째, 1조 5천억 세제곱미터가 매장돼 있다고 추정되는 천연가스의 국유화. 둘째, 그 부가 전체 볼리비아인들을 위해 사용되도록 보장해 줄 혁명적 민중의회.

민중의회는 한 달 동안 계속된 동원에 참가한 기층대중의 조직들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의 기구이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권력과 국가를 뜻할 것이다.

누가 통제하든 간에 자본주의 정부는 생존 조건을 협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미 대통령궁의 새 주인들이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음을 봤다. 운동이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혁명적인 비전이다.

그리고 그 씨앗들이 라 파스와 엘 알토의 거리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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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냐 죽음이냐

 



좋은 혁명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말한다


제국주의에 맞서 모든 형태의 투쟁을 준비하자.


평화, 우리는 모두 이라크다.


사회주의냐 죽음이냐


사진 아래의 NO는 'Vota No'를 의미합니다. 즉, 차베스 탄핵투표에 반대한다는 별도의 선전입니다. 어쩌면 아래의 '죽음'에 NO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좀 지저분해 보이는 벽들이지만 모두 베네수엘라 까라까스의 시내 중심가 지역입니다. 마지막의 '사회주의냐 죽음이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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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 다음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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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 다움^^

[나만의 이미지닉! 마이박스->관리->기본설정]
시원한 폭포 자연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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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사진 이야기^^

  ^^저 번쩨 이야기^^


부평공장 출근저지투쟁에서 만난
그들의 사랑과 그들의 분노
 (Click)

 

^^두번째 이야기^^

대우자동차 노동조합 정리해고 반대투쟁  (Click)

2001년 2월 16일, 1700여명의 정리해고 통지에 뒤이은 야만적인 공권력 투입. 살기 위해 일어선 노동자들. 그리고 그들과 어깨를 같이 하는 사람들... 지금 부평은 싸우고 있습니다.

 

 

^^ 세번째 이야기 ^^

쇼 밀레니엄의 뒤안  (Click)

Millenium을 맞이하기에 모두들 분주했다.
Show는 성대하고 화려했다. 지나칠 정도로...
한해가 끝날 무렵 온 나라가 떠들썩한 일이 생겼을 때 누군가가 쓴 글을 보았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노벨 평화상에는 평화가 없다.
 먼저가신 열사들이 무덤에서 어이없어 웃겠다.' 라고..

지난 6년간 찍었던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이 작업을 했다.
우울했다.
그때의 사진들이 지금도 유효한 것을 보면서 6년 전부터 작년,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의 요구는 변하지 않았고 우리의 현실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았다.
최루탄 자욱하던 거리와 깨진 돌맹이들. 우리는 지금도 원직복직을 향한 투쟁을 하고 있으며 철거촌의 빈민들은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거리엔 노숙자들이 더 늘어가고 미군들은 여전히 우리의 땅을 짓밟고 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위대한 자(?)들은 일하지 않고서도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러나 우리의 함성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멀리 퍼져 마침내 해방의 그날이 오게 만들 것이다. "The Perfect day"를 위하여... 


 


^^네 이야기^^

마침내 신새벽은 오리라!
- 2000 한국통신 총파업  -->  (Click)  *재편집판

오랜만에 밤 하늘의 별을 보며  동지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힘들지 않다던 한 여성 조합원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통신 조합원들은 비바람과 눈보라 속에서도 비닐 하나 덮고 꿋꿋이 농성장을 지키며 열심히 투쟁하였습니다. 이번 명동성당에서의 4박 5일간의 총파업투쟁은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정책과 공기업의 민영화, 해외매각방침에 조합원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전면으로 맞서 싸우면서 척박하고 어려운 우리 노동현실에 투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총파업투쟁이 끝났지만 많은 아쉬움도 남겼습니다.
이제 각자의 작업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또한 지금도 얼어붙은 땅 위에서 열심히 투쟁하는 한통계약직 동지들 뿐 아니라 다른 사업장의 동지들과 연대할 것을 믿습니다. 언제 어디서건 따듯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동지와 서로에 대한 믿음이 함께 하는 한 마침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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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 건설^^

   

  운동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정치 조류들 간의 연합체(공동전선)를 건설해야 한다. 그래서 운동은 광범한 연합과 사실상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연합체의 장점은 단일한 또는 제한된 대의를 중심으로 매우 다양한 사람들을 광범하게 아우를 수 있다는 점이다. 반전운동은 평화운동가, 종교운동가, NGO 활동가, 좌파민족주의자, 노조원, 청년·학생, 환경운동가, 여성주의자, 이주노동자, 사회주의자 등등을 결속시키고 있다.

대안세계화운동도 비슷하다.이것은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1987년 6월항쟁 등 반독재 운동과 1996년 말∼1997년 초 노동법 개악 반대 투쟁 등에는 광범하고 상이한 정치세력들이 단일한 요구를 내놓고 참가해 연합했다.
   광범한 운동의 강점은 이러한 다양성이다. 운동의 이러한 다양성을 상징하는 사람들, 가령 평화주의자, 민족주의자, 비(非)노동자, 노무현을 반대하지 않는 사람 등과 함께하지 못하겠다며 반전운동에 종파적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대중이 그 운동의 결속을 염원하는 심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중의 단결 염원이 강력할 때 일부 사람들이 정치조직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정치조직이 운동에 대해 진정한 관심도 없으면서 운동을 지배하고는 자신의 의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가진다. 실제로 그런 단체들이 있다. 개량주의자들도 흔히 운동의 급진적 에너지를 약화시키곤 한다. 그런 사람들, 그런 정치조직들에 대해 많은 활동가들과 많은 참여자들이 건강한 의구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전술·전략을 둘러싸고 논쟁이 일어나는 것도 초기에 단결을 이룬 일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이라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운동은 전개돼 감에 따라 특정 국면마다 고비를 맞게 된다. 더구나 운동이 권력자들의 이익에 위협이 될 만큼 발전하면 우익과 국가의 세력에 부딪히게 된다. 이런 고비 고비마다 주요 활동가들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을 내려야 한다. 다음 스텝은 무엇일지, 가장 효과적인 투쟁 방법은 무엇일지 등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대안세계화운동과 반전운동이 그랬다. 2001년 7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열린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 반대 시위 참가자 카를로 줄리아니가 경찰 발포로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에 맞선 항쟁에서 이탈리아 재건공산당(리폰다치오네)이 한 구실은 결정적이었다. 리폰다치오네의 호소에 응답해 30만 명이 제노바로 운집했고 전국적인 하루 총파업도 벌어졌다.

또한, 9·11 이후 대안세계화운동은 반전운동으로 전환해야 하는지를 논의해야 했다. 2002년 11월 유럽사회포럼 직후 대안세계화운동의 우파 베르나르 카쌍은 <신좌파평론> 지에서 영국인 참가자들과 이탈리아인 참가자들이 너무 반전을 강조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반전운동으로의 전환이 옳았음은 2003년 이라크 공격 반대 2·15세계행동 이후 전개된 상황이 입증했다.
  그러나 대안세계화운동 안에서 좌우 양극화 현상이 전보다 훨씬 첨예하게 나타났다. 특히 프랑스 아탁(ATTAC;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이 운동 내부의 개량주의 경향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아탁의 지도자인 베르나르 카쌍 등 우파쪽 주장의 요지는 좌파가 운동보다 당(정당)을 우선시하며 당의 이익을 위해 운동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자율주의 경향은 우파를 거들고 있다).
  하지만 아탁이나 디소베디엔티(대표적인 자율주의자들) 같은 단체들도 당이다. ‘당’ 하면 뭔가 거창한 것, 본격적인 의미의 현대적 정당, 즉 대의원대회나 중앙위원회 같은 선출된 기구를 갖추고 명확한 구조를 갖춘 조직을 생각하는데, 맑스주의적 의미로는 꼭 그렇지 않다. 사회 변화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중심으로 모인 일단의 사람들이면 그게 바로 당이다.
  그 규모가 매우 작다면 적어도 당의 맹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병아리가 참새나 독수리가 아니라 닭인 것처럼, 당의 맹아와 당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다.
  당은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나게 마련인, 운동의 결과물이다. 운동이 전개돼 감에 따라 특정 쟁점들, 특정 문제들도 함께 제기되기 마련이다.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놓고 상이한 분파들이 형성되고, 이러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다 보면 비슷한 고비가 닥칠 때 해결책이 무엇일지를 놓고 대강 큰 구도가 형성된다. 이렇게 해서 당이 형성된다.
  (이 당들은 자신들이 참조할 만한 역사적 선례와 대강의 이론적 전범 같은 게 있음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준거로 하기 시작한다. 가령 일찍이 1980년대 후반에 친북 공산당이라 할 만한 조류와 친소 공산당이라 할 만한 조류로 남한 좌파 운동은 양분됐다. 후자는 오늘날 세분화해, 자율주의를 포함한 매우 다기한 경향을 띠고 있다.)
  당이 운동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당 조직 문제와 운동의 발전 문제를 서로 대립시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운동이 내부 위기를 극복하고 진전을 이룩하고자 하는 결정적 순간에는 당이 필요하다.
   운동 탄생기에는 단결이 자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계속해서 단결이 자생적일 수는 없다. 단결은 만들어 나아가는 것이고, 투쟁해서 얻는 것이다. 단결을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단결은 운동으로부터 자생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모종의 당이, 모종의 정치적 입장이 운동의 주요 쟁점들과 대결해 해결책을 내놓음으로써 운동의 미래 결속을 보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운동은 불일치와 실패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사회 변혁을 이루고자 하는 당이라면 운동을 찬탈하거나 운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이 사회 변혁을 향해 나아가도록 운동과 연계를 갖고 끊임없이 접촉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과 운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당이라면 말이다.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당을 건설하는 것과 운동을 건설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러므로 단지 광범한 운동들의 건설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운동 건설에만 매몰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세 가지 있다.

첫째 사례는 ‘노동자의 힘’(이하 노힘으로 줄임)이다. 전에 말했듯이, 박성인 등 이 단체의 창립자들은 노동조합 운동에서 잔뼈가 굵은 탁월한 활동가들이다. 그들이 거의 20년에 걸쳐 내린 노동조합 뿌리 더하기 친(親)노힘 맑스주의 지식인들의 존재는 노힘이 노동계급 내에서 민주노동당 다음으로 중요한 정치세력이 되게 해주었다.
  노힘 회원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의 수는 다함께의 민주노총 조합원 수의 갑절은 좋이 넘을 것이다. 더구나 그 노조원들의 활동가로서 의 비중을 비교하면 노힘이 다함께보다 노동계급 운동 안에서 더 중요한 세력임은 명백하다.

  그러나, 사회변혁적 선전·선동에서 시작해 노동조합 속으로 뿌리를 내려간다는 전략을 추구하는 다함께와 달리, 노힘은 노동조합으로부터 당을 건설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덕분에 노힘은 사회적 기반이 비교적 안정돼 있지만, 그 기반의 정치적 소극성과 회피성의 영향을 받아 이데올로기가 모호하다.(다함께는 이데올로기가 예각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사회적 기반은 조직노동자보다 청년·학생과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더 많아 불안정하고 들뜬 상태라 할 수 있다.)

  노힘의 범좌파 전략이 지닌 문제점도 있다. 범좌파 결집을 통한 좌파 노조 지도부 세우기가 핵심인 이 전략은 1997년까지는 그런대로 효과가 있었다. 1998년 이후 주로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때문에 노조 상근간부층의 일부인 좌파 집행부도 운신의 폭이 좁아지자 이 전략은 개량주의의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함이 드러나고 있다.
  노힘이 노조 운동과 노조 내 좌파 네트워크 건설에 주력해 오는 동안 노힘의 이데올로기는 온갖 정치적 전통들의 무정형의 합성물이 돼 있다. 그 전통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노힘에게 가해진 다양한 압력들을 반영하는 것들이다.
  둘째 사례는 프랑스의 LCR(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이다. LCR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전반부의 운동 침체기 동안 특정 작업장이나 노조 또는 캠페인에 몸담고 있는 활동가들의 연합체로서 살아남았다. 이는 일반적 맑스주의 정치에 기초한 선전을 일상 활동으로 삼음으로써 침체기를 살아남은 영국 SWP(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략과는 매우 다른 생존 전략이었다.

LCR은 각 부문에 튼튼히 뿌리내린 활동가들을 많이 확보하게 됐다. 그 덕분에 LCR은 더 큰 활동가 네트워크들의 형성에 상당한 기여를 했고,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 이후 운동의 고양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예컨대 LCR은 아탁의 부상에도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러나 LCR은 연합체이기 때문에 정치적 결속력이 약하고 정치조직으로서 개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예컨대 LCR은 대선후보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프랑스 청년들의 반자본주의 정서를 훌륭하게 대변함으로써 2002년 대통령 선거운동을 매우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나 1차 투표에서 당시 사회당 총리 조스팽이 탈락하고 2차 투표에서 주류 우파인 시라크와 파시스트인 르펜이 맞붙게 되자 LCR의 광범한 지도부는 시라크에게 투표하자고 호소함으로써 개량주의의 압력에 굴복했다.
  아탁은 원래 1988년에 창립했는데, 아탁에서 활동하고 있는 LCR 멤버들은 2002년 가을이 돼서야 처음으로 총회를 열었다. 이토록 결속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LCR은 아탁 내 우파가 점점 더 크게 영향력을 발휘할 때마다 그에 대응할 힘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LCR은 시라크의 우파 정부가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머리 스카프) 착용을 금지했을 때도 개량주의자들의 압력에 맞서 싸우기보다는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길을 택했다.
  셋째 사례는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이다. 재건공산당은 1990년대 초반에 이탈리아 공산당에서 분리해 나온 당으로서 처음에는 약간 스탈린주의적 경향을 띠었었다. 공식적인 당 강령만 놓고 본다면 재건공산당은 소규모 좌파개량주의 정당이다. 이탈리아 전국에서 당의 득표율은 5퍼센트 정도이다.
  하지만 1998년부터 재건공산당은 명백히 좌경해 왔다. 특히, 앞에서 언급했듯이 제노바에서 재건공산당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또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재건공산당의 입장은 매우 단호했고 반전 시위에도 많은 사람을 참가시켰다.
  재건공산당 지도자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당을 운동에 개방해야 하고 당이 운동과 하나가 돼야 한다는 등의 입장을 분명히 해왔다. 게다가 그는 매우 급진적으로 말한다. 그는 체 게바라와 레닌을 인용하곤 하는데, 이는 결코 오늘날 서유럽의 중도좌파 정치인들이 통상 쓰는 언어가 아니다.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베르티노티 당 개념의 결정적 문제점은 당과 운동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이 곧 운동이며 운동이 곧 당인 것이다.
  이것은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당 개념인 동시에, 자율주의의 당 개념이기도 하다. 카우츠키와 스탈린,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당과 계급을 동일시했다. 그들에게 “당은 계급을 대표한다.”(1903년 레닌이 멘셰비키의 당 개념을 비판적으로 요약한 말)
   베르티노티의 경우 스탈린주의적 가정에 따라, 즉 당이 운동을 지배해야 한다는 뜻에서 당과 운동을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그는 공산당 출신이 아니다.)
  하지만 당과 운동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재건공산당은 운동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전략이 없다. 자율주의도 당과 운동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전략이 없다.
  이렇게 전략이 없다 보니 올해 초 리폰다치오네는 DS(민주좌파당 또는 좌파민주당) 주도의 ‘올리브나무 연립’ 정부에 들어간다는 전략을 새로 세웠다. 로마노 프로디가 이끄는 DS는 옛 공산당의 후신으로, 지난 10년 동안 ‘제3의 길’을 추구해 왔다.
  리폰다치오네의 유턴이 최종 결정되던 지난 3월 초 당대회에는 자율주의 그룹 디소베디엔티의 리더인 프란체스코 카루조도 참석했다. 전날 그는 리폰다치오네의 중도좌파 정부 입각 계획에 동의한다고 발표했다.
  전략적으로 사고하려면 먼저 당과 운동을 구별해야 한다.
  당과 운동의 구별이 당과 운동의 분리를 뜻하는 건 아니다. 둘의 관계는 명령이 아닌 대화이다. 비유하자면, 공장 직반장과 노동자의 관계가 아니라 파업위원회 동지들 간의 관계와 비슷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말하기를, 군사 전략·전술은 전선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사병들이 처음 창안한 것으로, 훌륭한 지휘관은 그것을 채택해 전 부대로, 전군으로 보편화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당이 없다면 이렇게 운동 속에서 상호 학습과 상호 교육을 포함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선진 소수가 다수를 설득해 자기편으로 끌어당기는 것, 사람들에게 확신과 자신감을 심어 주고 투쟁성을 고양하는 것은 중요하다.
  운동과 공동전선들을 건설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운동 내부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여야 한다. 추상적이고 종파적인 방식으로 투쟁해서는 안 된다. 투쟁 과정에서 유기적으로 제기되는 핵심 쟁점들을 수렴해야 한다.
  당을 건설하는 것과 운동을 건설하는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을 뿐 아니라 긴밀히 연관돼 있다. 당을 건설하려면 운동에 무조건 뛰어들어야 하며, 운동 안에서 맑스주의 사상을 자신 있게 주장하기 위해 우리 대열을 정비해야 한다.
   요컨대 노동계급의 해방은 그 자신의 일이라는 것, 당이 계급을 대행하지 않는다는 것, 당은 그것을 돕는 일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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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통으로 만든 장난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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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지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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