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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현장에서 미래를』37(1998/10)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연구소 제32차 콜로키움 발표문을 지면관계상 대폭 요약정리한 것이다. 원문은 연구소통신방(나우누리 → GO LABOR → 10번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 올려져 있다. - H중공업 노동자와 활동가들에 대한 사례 연구 - 연구논문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신 병 현 연구위원/홍익대 경영학 부교수 1. 노동과정론과 정체성 연구 근대 세계에서의 인간 소외와 노동의 문제는 사람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의미의 원천으로 자리해 왔음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회과학에서는 노동이라는 통념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범주화를 추구해 왔다. 대부분의 사회과학도들의 논의 역시 맑스를 따라 건축가적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 노동의 중요성과 창조성을 묘사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 Paul Du Gay, Consumption and Identity at Work, (London: Sage,1996), pp.11 그리고 산업사회학이나 근대 조직에 관한 연구들 속에서 노동(일), 임노동은 인간 생명성 ) 황기돈, 「생동성의 경제학」, 『산업노동연구』, 제2권 2호, 55~67쪽 또는 안정적이고 일관된 자기 정체성의 핵심적인 원천으로 자리해 왔다. 노동이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해온 중요성은 또한 근대 세계의 중요한 사회적 프로젝트로서 소외 없는 세계에로의 다양한 지향들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분화와 통합의 문제틀 속에서, 그리고 국가 권력을 비롯한 각종 조직화된 사회 기구들에 있어서(나아가 가족 관계나 인간 관계들을 포함하는 타자와 그들의 행동과 통제에 대한 관심들 속에서는 언제나) 사회 공학적 관리 기술의 대상으로 늘 관심의 초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 Nikolas Rose, "Identity, Genealogy, History" in Stuart Hall & Paul Du Gay eds.(1996),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 London: Sage, pp.128-150 여기서 그가 말하는 기술은 "다소 의식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일종의 실천적 합리성에 따라 구조화된 어떤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기술은 인간에 대한 특정한 전제들과 인간을 위한 목표들에 의해 프로그램적 수준에서 지지되는 것들로서, 지식들, 도구들, 사람들, 판단 체계, 건물과 공간들의 잡종적 총합(hybrid assemblages)인데, 여기에는 훈육적 기술과 사목적 기술이 포함된다. 학교, 감옥, 수용소는 푸코가 훈육적 기술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들이다. 따라서 산업화와 연관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산업사회학의 노동과정 연구들이나 경영담론에서는 노동윤리와 노동의 가치가 한결같이 강조되었고, ) C.Perrow, Complex Organizations: A Critical Essay, (N.Y.: Random House, 1979), R.Bendix,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 (N.Y.:John Wily & Sons, 1956), N.Rose, Governing the Soul: the Shaping of the Private Self, (London: Routledge,1989). 노동과 관련된 주체의 생산이나 정체성의 형성이나 변형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 이에 대해서는 Rose Nikolas(1989), Governing the Soul: the Shaping of the Private Self, London: Routledge. 전통적으로 노동자 주체성 및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은 맑스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객관적 소외 논의로, 베버나 뒤르케미안의 경우는 정반대로 무력감이나 도구주의적 가치 지향성에 대한 관심과 같이 주관적인 소외 현상에 대한 논의로 표출되었으나, 양자는 결국 객관적 소외 구조와 의식 혹은 가치 지향성의 탈구 논의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 Paul Du Gay, 윗책, pp.9-27 노동자 의식과 집합 행동에 관심을 둔 대부분의 맑스주의적 계급 연구나 노동과정 연구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 소외로서 노동의 결과물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강조하면서 유적 존재(species-being)로서 노동자들의 인식 부재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도식은 구체적인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는, 초월적 존재의 인식 능력과 같은 계급 의식이라는 관념에 더하여, 주체들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구조적 모순으로 추상화, 일반화시키는 엘리트주의 및 환원주의적 경향을 띠어 왔다. ) 우리는 이러한 추상화의 위험성 즉, 사고 수준에서의 과학적 추상의 현실화, 자립화가 야기하는 사회 관계의 엘리트주의적 조직과 운영의 문제점을 도덕적 주체의 조형과 관리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조직 맥락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20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그 모순의 폭발을 가히 야만적인 강도와 거대한 규모로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자아에 대한 사회 통제 기술에 관한 관심은 조직 심리학을 비롯한 경영담론들에서 그리고 노동 소외에 관한 비판적 관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 중의 하나다. 이러한 모습은 베버주의자나 뒤르케미안의 산업사회학적 전통 속에서도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할지언정 객관적 소외현상을 전제하고 분석을 출발하고 결과로서의 소비영역의 문제점들과 노동자들의 가치지향성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왔다. ) Paul Du Gay, 위의 책. 이러한 객관적 소외현상에 대한 관심의 과잉은 사실상 근대 세계의 주요한 특징이었으며, 노동과 관련된 사회과학의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요한 경향들을 산출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절대적 구분이든 분석적 구분이건 간에) 생산과 소비의 구분, 公과 私의 구분, 일과 여가 혹은 노동과 비노동(work/non-work)의 구분,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구분 도식의 일반화 현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이분적 구분 도식은 그동안 많은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에 의해 비판되어 온 도식, 이데올로기적 통념들이다. 그러나 노동연구나 작업장 문화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쟁점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외의 근원이 노동자들의 가치지향성이나 태도 등과 같이 의식속에 있기 때문에 '직무충실화 프로그램'과 같은 기법들로 노동자들의 소외를 줄일 수 있다고 보는 산업사회학 및 산업심리학적 설명들에 정면적으로 반대되는 연구를 통해서, 노동과정의 분업이 야기하는 객관적 계급구조의 변동과 계급의식의 문제를 사고한 대표적인 연구는 브레이버만(H. Braverman)의 『노동과 독점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뷰러웨이 등의 비판처럼 소외의 주관적 측면을 배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의식과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들어갈 수 없는 한계를 보였다. ) Thompson, Paul & David McHugh(1995) Work Organizationss: A Critical Introduction, 2ed., London: Macmillan,(1988), "Crawling the Wreckage: The Labour Process and the Politics of Production" in Knights, D. & H.Willmott (eds.) Labour Process Theory, London: Macmillan, pp.95-124 뷰러웨이는 노동자들의 주관적 경험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재생산 기제로서, 잉여창출의 은폐와 착취의 불명료화를 야기하는 다양한 기제들을 포함한 작업장 체제(factory regime)와 노동자들의 작업장 게임규칙에의 자발적 연루 메카니즘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 M.Burawoy(1979), Manufacturing Consent, Chicago:Univ. of Chicago. (1985), The Politics of Production, London: Verso. 그의 생산 시점(site)에서의 '동의의 생산'에 관한 논의는 노동자들의 특정한 정체성이 작업장에서의 노동 관행속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창출됨을 잘 보여 주고 있지만, 작업장에서의 동의의 생산이 어떻게 해서 작업장 외부의 사회적 맥락, 즉 노동자 개인적인 조직외적 경험들이나 성, 연령, 인종 등과 같은 사회적 속성들과는 독립적일 수 있는지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우선 '생산', '노동'이라는 범주에 지나친 존재론적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시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들이 그래왔듯이 뷰러웨이도 맑스를 따라서 노동이 인간을 유적 존재로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활동으로 봄으로써, 종족성, 성, 연령 등의 사회적 존재 양식들이 모두 노동에 의해 매개되거나 결정된다고 간주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에 빠지게 된다. ) 이러한 비판은 Paul Du Gay, 윗책, pp. 17-18을 참조할 것 창조적인 노동이나 그것을 보상하고자 하는 행위에의 참여함(예컨대, 작업장에서의 게임)으로서 인간 본질(essence)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 오직 노동뿐이라는 가정은 방법론적 편의주의라는 비판 뿐 아니라, 기존의 구조화된 남성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지배적 권력 관계의 존재론적 지형을 그대로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런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체성 및 정체성 연구와 그에 따른 실천은 자연스럽게 지배질서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또한 생산에 대한 강조의 과잉은 앞서 지적되었듯이, 가족과 같은 '사적' 영역이나 소비 및 여가 영역과는 대조적으로 '공적인' 임노동 영역만을 인간 존재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산출해 왔다. 이에 따라서 노동과정의 분석은 자연스럽게 가시적인 통제 기제를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수동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산출하거나(브레이버만이나 일부 푸코주의적 경향들), 정반대로 작업장 내부의 행동들을 외부의 정치과정으로 환원시킴으로써(대표적으로 산업사회학의 가치지향성 연구들이나 개인사나 가치 및 태도를 강조하는 조직심리학 및 경영담론들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속에서 하나의 노동력으로 어떻게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사실상 기존의 노동과정 연구들에서는 기업의 관리적 통제하의 작업장내 노동자들이 구체적 노동과정 속에서 체험하는 사회·문화적 관계들(lived relations)에 관한 연구나 가족 및 친지 등 직장 외적 사회 관계가 노동과정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연구는 많지 않았다. ) 특히 한국에서는 그러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뷰러웨이(Michael Burawoy)와 영국의 CCCS 초기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M.Burawoy, Manufacturing Consent와 The Politics of Production 그리고 John Clarke, Chas Critcher and Richard Johnson (eds.),(1979), Working-Class Culture: Studies in history and theory, London: Hutchinson & CCCS을 참조할 것. 전통적으로 산업노동 관련 담론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과 소비, 공과 사, 일과 여가를 대립 관계로 설정해 놓고, 이 사이의 탈구 또는 비조응 현상을 허위의식의 극복을 통한 의식화(각성이)나 규범적 통합(가치 혹은 도덕적 지향성, 태도의 변화)의 사회적 기획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주체성이나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뷰러웨이의 경우도 분석적 관점을 생산에 제한함에 따라서 작업자들의 체험된 관계와 사회적 관계들이 노동자들의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분석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 이러한 문제는 분석 결과의 실천적 함의와 관련해서도 구조결정론적 기계론에 다시 함몰될 위험을 초래한다. 2. 분석틀의 탐색 최근의 신자유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자본 합리화는 생산의 합리화 뿐 아니라 소비 및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이르기까지 상품·화폐 회로로 통합시키면서 새로운 '소비자 문화'의 재창출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 Don Slater, Consumer Culture & Modernity,(Cambridge: Polity, 1997), pp.9-16 영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들은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 전반에 많은 변화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고, 기존 문화형식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형식들의 등장을 초래할 수는 있다. ) 영국의 경우, 전후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나타난 전통적 노동자 문화형식의 해체와 지속의 역동성에 관한 논의는, Paul Corrigan & Simon Frith(1976), "The Politics of Youth Culture" in Stuart Hall & Tony Jefferson(eds.), Resistance Through Rituals: Youth subcultures in post-war Britain, London: Hutchinson & CCCS. 우리사회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겪어 온 지난 20여년의 경험은 '조국근대화의 역군', '산업전사'로서 '00가족'으로서 가족구성원들의 생계와 학업유지를 위한 '희생자'로서 다양하게 경영담론 및 정치담론들에 의한 상징적 의미부여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와 담론의 홍수속에서 자신을 보아 온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발전 경험은 기존 농촌사회의 가족 및 연줄 중심적이며 가부장제적인 사회 규범에 의해 강하게 규제되어 왔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 형성과 문화형식의 발전에 중요한 준거로 작용하였을 것이고 전통으로부터 '탈규제되고' 산업화 가치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는' '노동자 문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비교적 장기간의 근속 경험과 가족의 구성에 따른 가장으로서의 독립적 생활은 친인척과의 기존의 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가정 형성을 가져 오고 회사와 가정과의 관계의 밀도가 한층 증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맺는 주요한 사회적 관계들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사회적 타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과 변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적으로 노동자들이 귀속적으로든 성취를 통한 것이든 참여하게 되는 '공동체적' 관계들을 회사와 가족, 그리고 노조와 보다 추상적 관계속에서 참여하는 민족 및 국가 공동체를 분석적 초점으로 설정하였다. 국가경쟁력이나 생산성 증대를 강조하는 주요 정치 및 경영담론 그리고 면접과정과 주요 노동조합의 생활 실태 조사 자료들은 90년대 이후의 호황기 국면에서의 주요 변화로서 임금인상과 소비성향의 증대가 지적되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소비생활 조사나 사기조사 자료들이 보여 주는 임금 불만족 그리고 노조 활동가들이 진단하고 있는 '노동자 도구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화 경향'에 직면해 있음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 『현대중공업 활동가 상태와 의식조사』, 97. 11,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그렇다고 해서 우리사회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과연 임금에만 도구적으로 관심을 갖고 '자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행동 패턴을 보이며, 여가나 소비를 즐기는 '윤택한' 노동자상이나 소비자 문화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는 과거 87년 이후 10여년간 보여 온 집합적 노동자로서의 행동과 최근의 변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로의 변화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또한 우리사회의 집합적 노동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의 문제와 관련된 질문이다. 과연 87년 이후로 나타났던 집합적 노동자의 위세 과시가 하나의 독특한 '노동자 문화형식'의 표현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문화형식이 기존의 것들과는 '단절된' 혹은 '탈규제된(de-regulated)' 문화적 표현인지? 그리고 최근의 '변화된' 노동자 행동 성향과 삶의 양식들을 이전의 것들과는 또 다른 전혀 새로운 문화 형식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80년대 중반 3저 호황과 자주적 노동조합의 설립 이후로 주요 대기업 그 중에서도 중화학 공업 종사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수준은 크게 인상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담론이나 경영담론에서 강조해 왔듯이, 대기업 노동자들이 '윤택한(affluent)'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가? ) 포드주의적 축적하의 노동력 재생산구조의 변화 양상을 추적한 드문 연구 중에 한 연구로, 정건화(1994), 「한국의 자본축적과 소비양식의 변화」, 『경제와 사회』, 21호, 봄호, 20~44쪽을 들 수 있다. 비록 이 글에서 그는 87년 이후로 나타나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소비양식의 고급화 경향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전형적인 포드주의적 대량생산과 소비양식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자본의 이윤율이나 노동분배율에서의 괄목할 많한 패턴 변화가 있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 예컨대, 정명기(1996), 「포드주의적 임금결정방식에 관한 연구: H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권1호, 135~158쪽 주기적인 임금인상을 통한 경제적 궁핍의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탈피가 이루어 지고 이들이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군화되었다고 할 때, 과연 이 노동자들의 소비패턴이나 생활패턴에서의 변화를 도구주의나 개인주의와 같은 행동 및 가치 지향성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서구의 청년층(18∼30세 후반)에게서 드러나는 중간층의 미국적 생활 스타일은 우리사회의 경우 극히 소수의 부유한 가정의 청소년층이나 '신 부르주아'라고 부르디외가 말한 연령이 많지 않은 자영의 전문직층에게서나 간혹 드러날 수 있는 예외적인 경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백화점 세일시 몰리는 소비자들이 비교적 중간수준의 구매력을 지닌 소비층이라고 보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소비 패턴은 여전히 대량생산된 표준화된 상품의 구매에 치중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 생활 실태조사에서 드러나는 자동차나 가전제품 등 내구재의 구비가 노동자 생활 수준의 향상의 지표인양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포드주의 체계하의 표준화된 상품의 소비패턴일 뿐이다. 물론 연령 별 소비지출 패턴에서 약간의 차이는 드러나지만 이는 결혼을 통한 가정 형성 여부로 설명될 수 있는 생애 생계비 지출 패턴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단지 노동자들이 생산-소비의 순환적인 경제체계의 상품-화폐 관계속에서 월급여 액수나 임금인상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80년대 말 이후의 '상대적인' 소비패턴의 변화가 '풍요'속의 노동자상이나, 소비자 문화 패턴으로의 변화 혹은 도구주의적 경향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Paul Du Gay, 윗책, pp.25-27 노동자 삶속에서 소비가 지닌 중요성은 포드주의하의 표준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의 기능에 수반되는 노동력 재생산 및 문화형식의 변화와 같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한편, 전통적 문화형식들의 지속과 변동에 관한 견해 차이들이 있다. 김동춘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연대지향성과 기업협력적 행동의 모순적 공존은 한국 노동자가 기업과 진정한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는 조건에 있으나 저항 행동 역시 차단당하고 있는 구조적 조건의 반영" 때문이라고 보고, '임금에만 관심을 갖는' '노동자 이기주의'나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화' 경향을 '자기보존적 이기주의', '기회주의' 혹은 '실리주의'로 설명한다. ) 김동춘, 윗글, 115~116쪽 그는 노동자의 '실리주의적' 성향을 강력한 국가 억압아래 "무력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런 행위양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노동자들의 실리주의는 언제나 있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활동가들의 '서운함의 표현'은 자신의 활동에서의 무력감을 동료 조합원 노동자들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결국 그는 생산현장에서의 민주화나 시민적 권리의 확보를 위한 노동운동의 발전에 있어 민주화와 집합적 정치 의식의 제고와 법적 제도적 형식화를 위한 노력과 같은 노동자·노동운동의 각성이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이 된다.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보면, '노동자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경제적 수준 향상'과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애주기의 변화', 투쟁 일변도의 노조활동 경험에서 온 '패배의식', 억압적 노무관리의 약화 및 개별화된 통제와 같은 '미세하고 부분적인 것'들에 대한 '중앙' 집중적 통제, 노조활동에 대한 불이익 대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장 활동가들과 노동조합이 변화하는 자본의 통제 전략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본다. )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윗책, 120~123쪽 따라서 임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실리주의적 행동 경향은 항상 이미 있었던 정치적 억압 때문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동차 등 기타 내구재 소비의 증가나 자녀교육 투자와 같이 생애주기 상의 변화로 인하여 겪는 금전적 압박과 회사의 변화된 통제, 그리고 노조 및 활동가들의 대응력 부재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노동통제(이에 덮붙이자면 자본의 운동 양식)와 노동자들의 행동 성향을 비롯환 삶의 양식에서의 변화가 초래되고 있으며, 변화하는 이러한 정세적 조건에 따른 노조 및 현장활동가의 변화가 무엇 보다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활동가 조직 문제나 교육 문제가 당면한 과제로 제기될 법하다. 우리의 질문에 비추어 볼 때, 위의 김동춘의 진단은 집합적 노동운동의 역사속에서 87년 이후로 나타난 집합적 노동자의 위세 과시와 노동자들의 삶의 양식은 하나의 독특한 '노동자 문화형식'의 표현이라고 보기 힘들며, 이러한 문화형식이 기존의 것들과는 '단절된/ 탈규제된' 문화의 표현형식도 아니라는 해석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서 보면 최근의 변화된 노동자 행동 성향과 삶의 양식들을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 문화형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된다. 다른 한편, 김동춘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 경제적 주변성이 노동운동 자체를 주변화시키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노동영역이 지닌 주변부적 한계를 노동자 정당과 산별노조와 같은 법적, 제도적 형식들을 확립함으로써 극복해야 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 경우,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범세계적 자본운동의 맥락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주변부적 성격을 과연 일국적 시민운동속에서 어떻게 이론적, 실천적으로 용해시켜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단지 구호로만 남을 뿐인 '국제연대' 운운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이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 운동 전체가 주변부성 혹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대한 인식론적, 이론적 성찰이 부족했던 이유에 기인한다고 본다. 맑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달결하라'고 말했던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인식론적, 이론적 문제로 현상황을 진단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오히려, 복거일과 같은 자유주의 문필가에 의해 촉발된 외국어 논쟁으로 이 문제는 희화화될 수 있었을 뿐이다. 조선일보 1998년 7월에 실렸던 한영우(7.9), 이윤기(7.12), 최원식(7.20) 등의 논쟁을 참조할 것.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국 노동운동에서 과연, 성, 인종, 지역주의, 종교 등과 같은 몰적 차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었는가? 김동춘의 문제제기는 비록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탈신민성 (post-coloniality)문제는 매우 긴요하고 긴급한 이론적 문제제기인 듯 싶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는 다시금 노동조직의 법적, 제도적 형식화나 정당 문제로 퇴행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제영역들이 갖는 특수성을 '시민운동'으로 조급하게(?) 혼합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이끈다. 지난 97년 1월의 총파업시, 어떠한 새로운 성찰도 없는 가운데, 노동자의 '시민적' 분노를 도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총파업을 철저하게 타락시켰던 점을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변성 혹은 주변화 메커니즘과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정반대 방향으로 즉 중심과 정체성을 설정하는, 즉 또 다른 외부를 창출할 개연성을 창출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같다. )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억압적 지배구조하의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잠재성과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즉자적 계급으로서), 그것들은 언제라도 정치, 경제적 위기의 조건만 형성되면 봉기적 속성이 폭발적으로 발현될 것'이라는 기계론적이며, 본질주의적인 전제다. 여기에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개인에서 찾는 지식인의 간지가 숨어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실패 경험은 단지 남의 이야기일 뿐인가? 파시즘의 맹아는 우리 주위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두번째 진단은 대체로 현시기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노동자들의 변화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인 가운데, 현장에서의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특히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일상생활과 조직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 다양한 길들에 개방적이다. 이 진단에서 특히 주목할 수 있는 점은 가족에 대한 암묵적인 강조이다. 가족은 전통적으로 산업사회학에서 강조되어 온 중요한 재생산 장치였다. 또한 신보수주의 담론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가족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기존 질서의 위반이나 일탈을 새롭게 가두는데 효과적인 장치로서 복고적인 가족에 대한 기능에 초점이 두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노동자의 경우 특히 활동가 그룹의 경우에, 가족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던 것 같다. 주택 문제로부터, 융자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나아가 최근의 능력주의 인사제도와 잔업 문제에 이르기 까지 가족 부양의 부담자로서 노동자가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 같다. 87년을 거처서 90년대의 운동 경험은 부모와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결혼과 가족 형성을 통한 가장(부양자)로서의 역할과 지속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과거 70, 80년대에 '조국 근대화의 역군' 혹은 '산업전사'로 호명되었던 노동자 주체 형태와는 분명히 다른 노동자 주체 형태에 대한 확인 필요성과 활동가 조직 및 그들의 활동 방식과 내용에 대한 검토와 대안의 탐색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 본 연구에서는 설문조사 결과를 검토하여 작업장을 중심으로 맺게되는 사회적 관계선들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은 분석요소들을 추출하였다. )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한노정연의 현장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이루어진 노동자 실태에 관한 기존의 설문조사 결과들을 검토함으로써 분석적 이슈를 추출하고, 이에 대한 추가적인 면접 및 라이프 스토리 방법에 의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주요 완성차 공장의 작업장 문화 및 노동자 정체성 형성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1995. 12~1996. 8월까지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병행하여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1996. 12~1997. 2월에 걸처 조선업체인 H중공업 울산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면접을 실시하고 1997. 6~8월에 걸쳐 활동가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면접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연구소와 현중노조에서 발행한 위의 책의 면접자료도 추가적으로 이용하였다. 먼저 작업장 삶 측면으로서 노동자의 일과 관련된 관계와 노조 및 회사와의 관계로 나누었다. 다시 일과 관련된 관계로서 동료, 직책자-조장, 반장 및 직장, 관리층, 노조간부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쟁점이 되는 분석요소로 추출된 것이 권한의 문제, 작업과 기술의 의미, 교육과 작업사이의 관계, 노동시간과 임금 등의 요소들이었다. 직장밖의 삶 측면에서 형성되는 주요 사회적 관계들은 가족구성원, 친인척 및 친구, 이웃 등이며, 이와 관련된 분석적 요소들로서 가족 관계의 양과 성격, 친인척과의 관계 유지의 성격과 갈등, 친구 관계의 성격, 이웃과의 관계의 성격과 지역사회 활동 참여등이 회사 소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의 여부, 정치 사회적 의식 수준 등이 고려되었다. 3. 노동자 정체성과 활동가 그룹의 문화적 특징 노동자들의 정체감은 가족, 친인척 및 친구, 회사 및 관리층, 노조활동가 및 동료, 국가 및 민족 등 작업장을 둘러싼 기본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1> 참조).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비교되고 부딪혀 갈등하고 변화하고 상황적인,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육체 노동자인 나로서 스스로를 경험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자신의 희망을 하나씩 달성해 가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개별화된 종속적 주체로서 대기업 노동자이다. 동시에 집합적 노동자로서 우리사회의 민주화의 역사적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자부심이 있으나, 다소간의 비장함과 책임감을 갖는 노동운동가들과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지닌채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는 나. 그리고 친구나 가족 및 친척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중요한 삶의 터전이지만, 오직 상상속에서만 동일시될 수 있는 회사의 생산직으로서의 나. 한편으로는 존경스럽지만 자괴감의 원천이며, 최고 경영자의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영진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나름대로의 회사원으로서 자존심과 자긍심을 지닌 나. 이런한 점들을 통해 볼 때,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그 관계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며, 다양하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는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만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독특하게 보여 주는 집단은 현장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오랜 노동운동속에서 상호 학습과 경험의 공유가 있었고, 회사나 정부로 부터 주요한 감시 및 탄압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 집단과는 다른 문화적 이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1> 작업장 사회관계와 노동자들의 정체성 주요 사회적관계들 관계의 이슈와 정체성 구성의 요소들 가족 - 회사생활에 대한 수치심과 비밀. - 가정사 : 부모모시기, 형제부양하기, 자녀가 공부를 잘할 경우의 풍족한 교육 못시키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 보상욕구. 직장 외부의 친인척이나 친구들 - 회사에 대한 자부심: 어엿한 대기업 직장인, 돈 잘쓰는 00. 회사 내에서의 화이트칼라나 경영층 - 많이 교육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뛰어남, 존경스럽고 대단한 회장의 선한 의지와는 달리 과잉충성하는 경영진 및 중간관리층에 대한 이상화되고, 자기중심주의적인 비판: 자존심 고양, 주요 적대자 집단. 직책자 - 같은 노동자 이면서도 중간적 위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람들, 요즘들어서는 리더쉽 교육 등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고 같이 얘기가 통하기도 하는 사람들. 노조활동가 - 노동자를 위해 희생적으로 노동운동하는 사람들, - 말잘하는 사람들, 하지만 일부는 농땡이, 감정적이거나 회사에 역이용되는 사람들, 자존심 상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기피대상자들, 노조의 많은 돈을 쓸데 없는데 많이 쓰거나 쓸 수 있는 사람들 - 익명성만 보장되면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 - 없어져서는 안되는 마지막 호소처로서 노조 동료 - 나이많은 동료의 무능력함에 대한 경멸 - 고령자 및 농땡이 동료와 동일한 임금에 대한 불공정성 지각과 애처로운 느낌의 공존 - 나이적은 젊고 빠릿빠릿한 동료들에 대한 의존과 부러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직장 및 인생의 선배, 부. 회사 - 상상속만의 동일시 대상 - 자부심과 수치심의 원천,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는 직장. 국가와 민족의 일원 - 산업전사, 근대화의 기수 - 상상적 허구적 동일시 - 정치에 대한 많은 관심 우선, 노동자와 활동가의 관계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감성적 측면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감성적 측면은 특히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의 물질적 측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연령 증대 및 회사의 주택보조정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고령 노동자들은 주택 마련할 수 있었으며,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융자를 통해 주택을 마련하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잔업 등을 통해 융자금을 갚는데 힘겨워하고 있었다. 또한 자가용을 통한 이동 거리의 증대와 사적인 공간(피난처?)의 확보 가능성도 증대시킨다. 가족만의 오붓한 휴일, 여가의 동경, 개인적 쾌락의 추구, 노래방 문화 등은 대중문화와 자율적 공간 확보가능성 증대와 관련해서 과거와는 다른 강도로 정서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전통적 문화형식과는 다른 문화형식들이 서서히 등장해 감에 따라 개인주의적 행동 경향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활동가 집단의 경우는 이러한 경향과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잔업 근무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훨씬 적은 임금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일주일에 한 두 차례 활동사항을 점검하고 조정하는 정례적인 모임에 참여하며 조합원들의 고충을 상담하거나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의 일상생활이 '시간', '술', '돈', '건강'과의 '전쟁'으로 묘사되듯이, 활동가들의 하루 하루 삶은 그야말로 '숨가뿐 삶'이다. ) 현대중공업노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윗책, 99~110쪽 여가나 각종 문화생활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들과의 오붓한 시간을 갖기 조차 어렵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이들은 활동가 및 그들의 가족끼리의 유대를 꾀하는 경향이 크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사회적 교류 및 관계망은 일반 노동자들의 그것 보다 '훨씬 넓고 언어 구사'나 가족에 대한 생각 및 자녀 교육에 대한 생각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 윗 책. 하지만, '전쟁'과 같은 '숨 가뿐' 삶속에서 주위의 다른 노동자들의 삶과 직장에서, 가정에서 비교되면서, 그리고 일상적 상호작용속에서 겪어 알게 된 일반 노동자들의 태도와 반응에 실망하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이 속한 조직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하여, 활동가들의 몸과 마음은 지치고 마는 측면도 드러난다. 둘째, 이념적 공세, 강압적 통제와 억압적 노사관계 관리에 따라 80년대 말의 노동운동의 비장함과 도덕적 의무감의 풍토는 아직까지는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활동가 집단과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중적인 효과를 갖는 것 같다. 그 하나는, 일반 노동자들은 대의에 따르는 노동운동은 그로부터 사회적, 문화적 자원(예, 권위)을 얻는 사람들(활동가)의 몫이라고 보는 경향을 낳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노동자 일상생활의 많은 비공식적이고 개별적인 기존의 사회적 공간들을 황폐화시켜 갔다. 그로 인해 예컨대 경제적 합리성(?)을 표방하는 노동조합주의적 전통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면접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경찰인 동생과의 활동가의 가족내 이념 갈등이나 작업장내 동료들 사이 사적인 동호회의 파괴,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 소원화 등은 작업장 및 개별적 삶의 세계를 이념적으로 구획함으로써 조직내 권력 무기력감과 같은 소외를 노조에서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가족, 친구, 자녀와의 갈등에 관해서는 윗책, 100~107쪽을 참조할 것.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노조의 대회사 투쟁에 집단주의적 동조하에 적극적인 참여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단지 도덕적 의무감에 터한 '죄의식을 지닌' 많은 노동자들을 산출하였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셋째, 노동운동의 이념적 자원의 고갈, 대안적 세계에 대한 비젼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80년대 노동운동이 대학출신의 현장활동가들의 활약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 질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이는 주요 활동가들에게 일차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지만, 일반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경험하면서 혼란스러워진 이데올로기적 상태에 대한 회의가 탈정치화로 빠지게 하여 현세주의적 생활방식에 집착토록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소비 일상생활 영역에 대한 상품-화폐 관계의 심화 현상 역시 피상적으로나마 신자유주의 정치 담론에 친화성을 보이도록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노동운동의 이념, 조직 운영 원리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생활 세계에 까지 뿌리내려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 형식들을 창출해 가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오직, 활동가 집단 내적으로 공유된 사명감과 경험과 그에 대한 상징적 의미들의 침전된다. 노동운동이 다소 추상적인 구호로만 남거나 조직적 활동 방식의 기계적 성격과 활동가들의 조급성 등이 노동자들의 구체적이고 풍부한 삶의 영역에서의 노동자적 창의성 개발 가능성을 스스로 구속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생활 여건의 변화와 회사의 통제 시도라는 조건의 탓으로 쉽게 자신의 불참("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원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운동의 대안적 비젼이 제시되지 못한 가운데 진행되어 온 노동자 정치 세력화 논의 역시 구체적이지 못하였고, 조합원 대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주요 상급 단체 노조활동가들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온 정당 건설 활동은 철저하게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역시 못 믿을 사람들이 하는 것").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는 관망자적 평가 태도가 일반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많은 활동가나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다물 교육, 국가 경쟁력 담론 등 민족주의, 애국주의적 노동운동 담론을 자연스럽게 동일시하는 견해들에 대해 개탄해 하며 노동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크다. 회사의 노사관계 통제 전략이나 감독직 및 노조활동가들의 다물 교육과 외국 시찰 경험 그리고 고충 처리 방식의 일선화(노조의 배제) 등은 노조나 활동가들의 작업장 영향력의 현격한 약화 추세와 어느 정도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활동가들의 반응은 "희생의 자세", "무지한(미운)대중관"으로 나타나고 있다. ) 1996년 12월~1997년 1월의 H중공업 교육위원 간담회 자료.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광범한 비판 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점이나 동료 비난 등은 단지 회사의 관리적 통제 시도에 기인하는 것 뿐아니라, 노조의 관료적 활동 방식이나 활동가들이 보여 왔던 엘리트주의적 방식이나 분파주의적이며 도구주의적 노조 정치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원들의 행동 및 가치, 태도의 교육을 강조하는 활동가나 노조 간부의 경향은 노조 역시 경영층과 유사하게(동형적으로) 작업장 권력 체제의 구축과 권력의 작동에 요구되는 기술, 즉 노동자 주체 형성 및 정체성 변화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여 준다. 4. 결론에 대신하여 1) 공통적 특징들 사례 작업장 노동자나 활동가들 역시 작업장내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주요 이슈들에서 다른 작업장에서 확인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육체노동으로 부터의 탈피 욕구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으며, 가족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수행하는 일을 은폐하고자 하는 수치심이 비교적 적었다. 이 점은 사례 작업장 노동자들의 과거 파업투쟁의 경험에서부터 온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노동과정의 위험성과 노동강도의 세기가 다른 점, 그리고 교육수준이 비교적 낮은 점등으로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권한 수용과 관련된 책임감, 불안 및 공포 의식, 거리감이나 소외 정도에서는 다른 작업장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작업장이나 공통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항으로는 (1) 일의 내용과 무관하게 육체 노동자들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과 비교될 때, 강한 남성적 이미지로 자신을 표상하려는 경향이 드러나며, (2) 일과 관련된 측면에서나 가족과 관련해서 책임감 혹은 성실성이 노동자들의 대인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3) 나이가 많을수록 축적된 부나 세상사는 나름의 요령을 자존심 공양의 중요한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4) 노조의 불가피성이 강조되는 동시에 회사와의 상상적 동일시가 (혹은 양가 감정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 등이다. 2) 활동가 집단과 문화적 권위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에게 과거 노동자 투쟁의 상징성은 불균등하게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명성이 있게 한 귀중한 투쟁 경험으로 의미 부여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 사이의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야기시킨 사건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강조하듯이, 집회시나 활동가들에 대한 반응에서 드러나는 경향을 통해 추론해 보건대, 생활주기의 변화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일반 노동자들의 감성적 차원에서의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며, 이에 따른 감수성에서의 변화 역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활동가들의 일상 생활은 일반 조합원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일상적인 감성의 맥락은 우리가 체험한 것들에 색조나 음색 혹은 결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우리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며, 이데올로기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 이에 대해서는 Grossberg L.(1992),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Popular conservativism and postmodern culture, New York: Routkedge. 이렇게 본다면, 활동가들의 문화적 형성을 지배하는 감수성은 대중문화와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동화되어 가는 일반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점점 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활동가들의 실천이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과거와는 다른 접점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반 노동자들에게 활동가들의 희생은 더 이상 희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의 할 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문화적 자산의 인정)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활동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일반 노동자들이 삶에서 감성적으로 마음을 쏟는 중요성의 순위가 활동가들의 그것과 너무 크게 차이가 나게 된 점이 아닐까? 과거 엘리트적인 활동가들의 실천들이 계속해서 분절해 들어갔던 노동자들의 삶의 흐름은 '기표의 흘러 넘침'으로 인하여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지배질서하에 전개되는 '과정들' 뿐이 아닌가? ) 크리스테바(J.Kristeva)는 현대 자본주의는 더이상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 자체의 운동 '과정을 통한 과정의 재생산'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비록 제3세계의 경우는 여전히 강제적 법이나 규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로 특징지워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경우는 더이상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 주체형태들에 대한 유혹으로서, 연루의 과정을 통해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노동력을,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J.Kristeva,(1984),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Y.:Columbia Univ. Press), pp.16 3) 활동가 집단의 위상적 관계 사례 작업장의 활동가 집단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실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놀랍고도 주목할 만한 점은 활동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투심(投心. investment)이다. 비록 엘리트적 문화의 코드에 의해 분절되고 각인되었을지언정,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자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적 투쟁속에 특별하게 감성적 효과를 각인하고자 노력하게 되며, 그 투쟁의 효과들이 형성하는 장속에서 활동가로서의 감수성을 공유하고, 다른 문화적 감수성들과 접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일상적 실천들 속에서, 그리고 주요한 사건들과 관련해서 형성된 문화적 감수성들이 침전된 장은 그 효과로서 활동가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권위와 문화적 자산을 갖게 한다. ) Grossberg L.(1992), 윗책 그리고 신병현(1995), 「'현장'과 노동자 문화정치」, 『현장에서 미래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2월, 5호. 이들에게 드러나는 엘리트주의적 특성, 남성적 의리와 권력 지향성 및 종속성 등은 변화된 조건하에서 이제는 활동에 투심하게 만드는 힘인 동시에 벽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들이 스스로 구성요소가 되어 형성한 조직의 층들은 이제 이들의 활동의 힘과 감성적 맥락을 가두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산별노동조합의 건설' 혹은 '조직의 보존'과 같은 구호들 속에서 은폐된 것은 현장활동가들 및 노동자들의 욕구를 집합적 형태로 분출시키고 발화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벽들이다. ) 현장활동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시기 주요한 장애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집합적인 요구를 가로막는 민주노총에 반대해야 한다는 역설적 현실이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창립 3주년 심포지움 자료집을 참조할 것. 곽탁성(1998), 「노동운동의 계급적, 정치적 주체형성을 위하여-계급적 단결, 민주주의, 그리고 연대」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운동』,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47~182쪽 조직원리와 조직 작동 방식(운영원리)이 서사적이거나 메타 과학적이 되면, 그 조직은 위계화될 수밖에 없음을 기호학의 조직 원리가 보여 준다. 언어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보자면, 즉, 글쓰기로 표현하자면, 활동가들을 활동하게 만드는 힘은 규정할 수 없지만 사회적, 상징적, 육체적 제약을 각인하고 그것들에 의해 규제되는 물질적 육체적 흐름들인 ) 쥴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를 기호적 코라(semiotic chora)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J.Kristeva,(1984),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Y.:Columbia Univ. Press), pp.25-33 반면, 노조운동사의 강조와 같은 희생을 강조하는 서사적(과거 지향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체) 문체는 상징적 질서에의 포획이다. 긍정과 부정의 대립은 구분되어 변별적 대립 관계지만, 그 대립은 부정되어 동일화 된다. 서사구조는 가족 혹은 유사가족과 같은 구조에 의해 중층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무의식적 표상들로 에너지가 구속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제한적인 공간속에서(즉, 가족 혹은 써클이나 학연, 지연 등의 연줄조직과 같이 유사가족적인 공간속에서) 자유로운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고 반복된다. 이 글쓰기 즉, 실천은 엄격한 언어적 구조에 따르는 규범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의 가족은 실제 가족인 동시에 유사 가족적 집단이다. 이 속에서 말하는 것은 주체의 공간상의 위치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 나는 활동가다! 메타 언어적 특성은 부정을 긍정에 종속시켜 상위 차원이 지닌 긍정성속에 그것들을 봉합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새로운 대상, 그러나 접근 불가능한 대상이 설정될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위계사회의 구조이다. 성층화한(stratified) 거대 조직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글쓰기 실천은 발화 주체의 위상적 관계를 보여주는 의미화 실천에 관한 기호학적 분류이다. ) J.Ktisteva,윗책, pp.90-106 지금까지의 발화하는 주체로서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이 타자와의 관계 즉, 의미 작용과 관련해서 갖게 위상적 관계는 어떠한가? 조직과 활동방식, 가족주의 혹은 유사가족주의, 그리고 인간됨의 기준을 가르는 기술이 문제인 것 같다. 4) 유사가족주의와 종속된 주체 일반 노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활동가들도 육체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는 다소 거리를 두었던 가족주의적 구조속으로 급속하게 재 포획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에서의 빈곤과 도시 주변부 계층으로서 중산층적 안식처로서 가족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거나, 가족으로부터 단신 이탈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희망으로서만 존재해 왔던 가족의 재구성이 이제 현실화되었다. "오로지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는 꿈만을 위해서 실연당한 설움을 (극복하여) 잊으려고 미친 듯이 일하여 반장이 되었다"라는 어느 노동자의 한스런 언급에서 보여지듯이, 그리고 이제는 마누라가 억척스럽게 해서 피자 집을 차렸고 제법 장사도 되기 때문에 "구태여 감독자들 눈치볼 필요가 없다"는 어느 전직 소위원의 언급이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을 마련했고, 융자받아 집을 지어 가게라도 마련하려 한다"는 쉬고 있는 활동가의 언급들에서 가족이라는 안식처가 부각된다. 공과 사의 도식적 분리 하에, 가족은 피난처로서 표상화되고 있다. 동시에 부양자로서의 의무로 표현되는 가족 구조 속의 위치 설정은 활동가 주체의 발화를 정언적으로 규정짓는 것 같다. 술부는 문법에 정확히 따른다. 가족사의 서사적 구현 속에서 자신의 위치는 가장으로 변하였지만, 여전히 가족 삼각형에 갇혀 있다. 이 삼각형은 집단으로 회사로, 조직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하다. 이들의 쉬고 싶다는 표현은 '노동자 권력'으로 부터, 조직으로부터, 동료와 회사로부터의 소외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의식화된 활동가의 경우는 과학과 사상성으로 위계화하는 담론을 산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곧 위계적 그물망속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방식이 아닐까? 조직 속에서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지식-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모순은 이론과 실천 속에서 언제나 이미 현실화되었고 또한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도구로서 '조직'을 운영하는 '기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푸코를 따르자면, 그것은 규제적 자아(regulatory self) 이상으로 기능하는 자아를 기획하는 인간으로 인간들을 종속화 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것은 인간을 통치하고 인간 행위를 바라는 방향으로 조성하기 위한 수단, 기법, 공간, 판단 체계 그리고 프로그램들의 총화이다. ) N.Rose, 윗책, pp.128-150 푸코나 들뢰즈 갸타리 등의 기술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특정 부류의 사람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 (즉, 자유를 추구하고,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며, 개인적 권력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동물로서 경험하는 것), 일련의 인간 기술들(human technologies)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푸코, 들뢰즈와 갸타리의 기술 개념에 대해서는 Deleuze G.(1988), Fouacult, Trs. G.Hand,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들뢰즈와 갸타리(1994), 『앙티외디푸스』, 민음사, 부록, 그리고 미셜푸코, 이희원(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31~86쪽을 참조할 것. 그 기술들은 인간 존재의 제 양상들(modes of being human)을 그것들의 대상으로 취한다. ) 그러한 총체의 공간적 형태에 관해서 이진경, 『근대적 시ㆍ 공간의 형성』, 1997을 참조할 것. '신중하고 절제적인 삶을 사는 책임있는 아버지', 경영자들이 지닌 권위의 불가침성과 보상의 기대에 터한 '노동자들의 유순함'과 '성실한 노동자'와 같은 이상(ideal)들은 어떤 지식 체계와 윤리적 가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까? 푸코나 들뢰즈 등에 의하면, 인간됨에 관한 이상과 모델들은 다양한 실천들에서 그리고 인간 행위에 관한 특수한 문제들과 해결책들과의 관계속에서 접합된다는 것이다. 특정한 개인 모델을 윤리적 이상으로 제시하려는 신경영기법들의 프로그램적 시도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경영관리자나 활동가 및 노조 간부들의 합리성의 신화 및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감수성의 특징이나 스타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신병현, 윗책. 한/노/정/연 #ANCHOR: |
현장에서 희망을 여는 노동자회 평가서입니다 제출용 자료와 내부토론으로 결론내린 자료입니다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사망 투쟁 보고 및 평가회 관련 제출용】 63일간의 투쟁, 누가 감히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평가에 들어가며 배달호 열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온 몸을 불살라 죽음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63일간의 투쟁이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투쟁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승해야 하는가? 투쟁평가는 평가주체에 의해 그 내용이 달라진다. 더구나 그 투쟁이 전국적 쟁점을 이루고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투쟁을 바라보는 입장과 위치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배달호 열사의 투쟁은 대책위, 민주노총, 금속연맹, 금속노조, 지회, 현장조합원 등 여러 단위에 따라 각각의 입장의 차이가 있다. 배달호 열사의 분신은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충격이었지만 금속노조, 금속연맹, 민주노총 등 민주노조운동의 핵심단위에서는 조직의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배달호 열사 분신과 이후 벌어진 투쟁 상황은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투쟁이었다. 산별노조를 지향한다는 금속노조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일부에서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였기 때문에 이번 투쟁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이었나? 배달호 열사는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그리고 손배가압류 철회, 해고자 복직, 노조탄압분쇄 등 두산중공업의 현실,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을 정면으로 고발하며 분신하였다. 적어도 금속노조의 건설은 기업별 노조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여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투쟁의 중심은 명백히 금속노조여야 했다. 그런데 과연 이번 투쟁에서 금속노조는 주체였는가? 대책위는 “산별노조의 조직력과 집중력이 이번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향후 산별노조로의 확대 강화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 “이번 투쟁으로 산별노조가 중요한 교섭의 당사자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평가한다.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금속노조가 이번 투쟁을 위해 비상 대의원대회, 비상총회 등 조직적 움직임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지속적 조직동원이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대책위 집행위에서 지침식으로 하달되는 책임할당식 간부중심의 인원동원이 중심이었고, 대의원이든 중앙위원이든 조직적 의사결정에 따른 현장을 조직하려는 실천적인 활동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금속노조가 투쟁의 중심이 아니라 대책위의 지침에 따른 인원동원 책임단위로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금속노조가 대책위의 이름으로 자신의 책임을 떠넘긴 것은 아니었는가? 금속노조가 실천적으로 현장을 조직하는 투쟁을 이끌어가지 못하면서 대책위가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거나 참가조직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나가지 못하고 집행위 중심의 정치적 협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구조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의 금속노조가 안고 있는 조합원들의 무관심 ,금속노조 제일주의 등 많은 문제들을 상층부 중심의 교섭력 인정등으로 해결해보려는 조직형식주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연대투쟁에서 모범을 보여준 투쟁인가? 이번 투쟁은 일관되게(?) 투쟁을 회피하고 협상에 의지하는 투쟁이었다. 투쟁의 주체였던 두산중공업지회는 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다. 결국 지역, 전국의 활동가들이 대리투쟁을 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자발적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식적인 지도부지침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며 누구도 책임의 문제를 비껴가려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총연맹을 포함한 각 조직에서 내부적으로 조직적 참여,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월 18일 투쟁에서는 지도부의 노력과 대중들의 열정이 나타나 연대투쟁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연대투쟁의 에너지를 형식적 투쟁의 압박용 전술로만 받아들임으로서 이후 현장을 조직하기 보다는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일천 결사대 철회의 결과로 연결되었다. 결국 금속노조와 대책위, 민주노총의 지속적인 협상중심의 합법적인 기조는 사실상 연대투쟁의 진출과 확산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손배가압류 총파업 결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결의했던 일천결사대 투쟁을 하루 전 날에 타결을 기정사실화 한 지도부에 의해 취소된 사건 ! 4/2 총파업의 철회에서 발생한 조직적 혼란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3월 11일 정오까지로 협상 시한을 분명히 정해 놓고 1천결사대 투쟁에 임했는데, 노동부장관이 내려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러한 원칙을 완전히 저버렸으며, 당일 밤 늦게까지 아직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1천결사대는 이미 취소하는 것으로 연락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연 그러한 결정을 한 단위는 어떤 단위인가? 타결도 되지 않았는데 타결이라고 보도한 연합뉴스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1일 밤 10시 일천결사대를 취소해 놓고 다음날 7시 합의할 때 까지 협상에 매달리지 않았는가?! 결국 일천결사대 취소사건은 두산 자본 측이나, 정부 못지않게 대책위, 금속노조가 얼마나 연대투쟁의 확산을 두려워 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대책위는 일천 결사대를 통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섭의 압박용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사대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사대의 위상과 역할, 활동내용 등에 대한 조합원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인원할당식으로 지침이 내려왔다. 그나마 현장에서는 일천 결사대를 열심히 조직하고 있을 때, 지도부에서는 조합원 대중과의 약속은 외면하고 협상용 카드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누가 감히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이 상황에서 이 정도면 잘한 것 아닌가?”에 대하여 우리가 배달호 열사 투쟁평가 할 때 많이 나오는 말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란 것이 무엇인가? 두산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현장의 투 쟁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버텨서(?) 협상을 이끌어 낸 것이 대단한 성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산중공업에 투쟁동력이 없었는가? 우리는 배달호 열사 분신한 후 며칠간 수백 명에 달하는 현장의 조합원 동지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집회에 참석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왜 시간이 지나면서 투쟁의 현장을 외면하게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두산중공업 지회 집행부가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은 이후에 폭로된 불법 사찰에서도 드러나듯이 현장조합원들은 엄청난 감시와 탄압의 한복판에 있었다.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현장순회조차 제대로 안하는 집행부, 열사의 시신이 공장 안에 누워있고, 사측의 온갖 회유, 협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제대로된 파업지침 조차 내리지 않는 집행부, 현장의 감시와 탄압을 뚫고 집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조합원들에게 이런 두산중공업 지회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이에 대해 금속노조는 지회 집행부가 문제인데 어떻게 할 수 있나며 투쟁의 책임을 미루었다. 뿐만 아니라 금속노조는 대공장인 지회집행부에 대해 올바른 비판조차 제대로 못하고 눈치보기식의 행동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두산중공업 지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회피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나가는데 방조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 상황”이다. 결국 투쟁동력이 없었다는 식의 두산중공업 상황평가는 배달호 열사의 분신항거 투쟁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조합원 동지들의 싹을 자르고 뭉개버린 두산중공업지회 집행부의 투쟁회피적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며,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공장 지회집행부의 눈치를 보면서 끌려다닌 금속노조 지도부의 방기를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2) “이 정도면 그래도 결과가 좋은 것 아닌가?”에 대하여 이번 투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금속노조 차원에서는 그동안 금속노조를 인정하지 않던 두산중공업이 김창근위원장을 상대로 타결당사자로서 합의를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치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이 그동안 산별노조에 갖고 있던 불신감을 상당부분 해소하게된 근거라도 되는 듯 평가하고 있다. 또 손배가압류에 대한 쟁점화와 제도개선, 연대투쟁에 모범을 보여준 투쟁,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 해고자 복직의 토대 마련, 두산중공업 현장조직력 복원의 토대마련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번 두산중공업 투쟁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개인 손배가압류는 철회되었다. 그러나 40%에 달하는 조합비에 대해서는 합의로서 가압류를 인정하여 노동조합에서는 아직도 조합비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측의 억지에 의해 만들어진 가압류를 노조가 합의로서 인정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다.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발생한 이번 분신투쟁은 사회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두산중공업 사측이 불법사찰, 한중인수와 처리 문제, 재벌상속의 부도덕성 문제, 부당내부거래 등 전형적인 재벌들의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결국 이러한 조건은 흔히 나타나는 시신탈취, 공권력 투입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으며, 최상의 조건에서 투쟁에 임하게 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도 두산중공업 내부의 투쟁동력을 세워내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측과 정부에 대한 협상에 매달리고 그 결과 조합비 가압류 인정, 해고자 일부분만 복직, 불법사찰 등 명백히 드러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 등이 없는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과연 무엇이 그래도 괜찮은 결과란 말인가? 18명의 해고 동지들 중 5명의 복직합의가 과연 성과인가? 무엇을 근거로 두산중공업 현장 조직력 복원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두산중공업 사측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을 파트너로 인정해서 합의서에 같이 서명해 준 것이 그렇게도 자랑할 만한 것인가? 5. 결론에 대신하여 우리는 지난 60여 일간 눈물겨운 투쟁을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너무 초라해 허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확인했다. 두산 자본, 그리고 현 정권이 기를 쓰고 배달호 열사의 투쟁을 축소, 은폐시키려 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워던 것은 바로 뻔히 보이는 그들의 작태를 철저히 부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투쟁 과정에서 현재 민주노총, 금속연맹, 금속노조 지도부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했다. 철저히 깨져버린 비참한 투쟁을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 “연대투쟁의 모범”으로 미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함을 느낀다. 결국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는 현장에서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다시 한번 힘차게 투쟁의 출발을 선언해야 한다. 63일간의 배달호열사 투쟁 평가 1. 배달호열사는 왜 분신하였는가? 1)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손배가압류 열사의 죽음은 단지 두산자본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속에서 총자본이 휘두른 서슬 퍼런 현장통제의 칼날이 열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한국중공업이라는 공기업이 민영화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산으로 민영화되지 않았거나 설사 공기업으로 유지되었다고 해도 구조조정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현장통제의 강화도 필연적인 것이다. 구조조정에 의한 현장통제 강화는 개별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다. 정권은 언제나 그래왔지만 IMF를 기점으로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숨김없이 대변하며 구조조정의 선봉대로서 노동자를 탄압해왔다. 나아가 입법부, 사법부는 물론이고 언론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흐름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나갔다. 이러한 것들이 두산중공업에서 현장통제, 블랙리스트, 징계해고, 구속수배, 손배가압류, 식당하도급화, 사택매각 등으로 나타난 것이며, 이는 열사의 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번 투쟁에서 손배가압류는 사회쟁점으로 떠올랐다. 손배가압류는 멀리 무노동무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노동무임금은 파업에 대하여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자본의 논리로서 87년에서 89년으로 이어지는 노동자투쟁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대오를 분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임금도 없다'말은 다시 말하면 '임금은 노동의 댓가이다'라는 것으로 당시 전노협의 임금인상 투쟁의 기본논리였던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라는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자본은 무노동무임금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임금만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파업기간에 대한 손실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파업기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초기에는 조합간부에 대해 손배청구를 하였지만 나중에는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직접겨냥하기 시작했다. 손배소송에 이은 가압류는 법과 제도가 얼마만큼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노동무임금에서 손배가압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철저히 자신들의 논리와 통제에 따라 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단결투쟁과 파업을 통해 쟁취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며 생산성향상과 노동자간 경쟁을 통해 자본에게 인정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손배가압류는 단지 법과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단결투쟁을 저지하려는 총자본의 전술로 봐야하며, 손배가압류에 의해 빼앗긴 노동자의 생존권과 파업권은 제도개선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총단결투쟁과 총파업투쟁을 복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2) 민주노조운동의 대응 이번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열사투쟁 기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스스로 '죄인'이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죄값은 개인이 받을 수 있어도 조직에 대한 평가 없이는 과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는 되돌아 볼 수 없다. 열사가 분신으로 항거한 것은 장엄한 투쟁이었으며, 한 사람의 투사가 이 사회속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적 투쟁의 최후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투사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조직적 투쟁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병폐가 노동자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번 열사의 죽음이었다면, 동시에 열사는 민주노조운동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뜰고나갈 어떠한 조직적 투쟁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제기한 것이다. (1)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통한 구조조정분쇄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비록 결과는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96년 12월 노동법날치기 통과 당시 총파업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한 투쟁은 총파업투쟁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그 동력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작년 발전노조투쟁 당시 4/2 총파업투쟁 철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저지시키기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투쟁현장으로부터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임원진 사퇴라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총파업이 철회된 이후의 상황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에 대항한 노동조합의 투쟁은 단일한 대오를 형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본의 분리전술에 따라 각개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다. 전국의 모든 구조조정 사업장은 단위노조, 지회의 고립된 역량으로 구조조정 싸움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년 두산중공업 지회의 47파업에서 두중 노동자들이 감당했어야 할 그 투쟁의 무게가 민주노총의 4/2 총파업 철회와 과연 무관한 것인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 금속노조의 조직형식주의적 전술배치 작년 집단교섭 당시 두산중공업은 집단교섭에 불참하였다. 그렇지만 경남1지부의 경우 집단교섭이 성사된 것으로 보고 두산중공업 지회만 남겨둔 채로 집단교섭을 진행하였다. 집단교섭과 대각선 교섭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투쟁이 형식적 배치로 나아갔다. 금속노조 전체적으로 그렇게 잡아나가게 되었고, 자본은 지회에 대해 더욱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집단교섭과 투쟁은 결국 지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집단교섭은 궁극적으로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집단교섭, 산별교섭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올해나 내년에 얼마만큼 많은 사업장에서 사측이 교섭대표를 파견했는가를 기준으로 삼거나 교섭 테이블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산별교섭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총단결을 위한 것이라면 현시기 집단교섭은 금속노동자의 단결투쟁을 조직화해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작년 집단교섭의 경우, 금속노조 차원에서 집단교섭이 성사되었다는 형식적 성과를 남기는 것에 무게가 실리면서 두산중공업지회처럼 철저히 고립되어 집단교섭에 응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한 타격투쟁이 형식적 배치로 머물렀다. 이런 상태에서 여타의 사업장은 집단교섭을 진행해버리고 이 집단교섭마저도 원칙도 없이 대각선교섭과 병행함으로써 애초에 상정하였던 원칙과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 즉, 집단교섭을 통한 금속노동자 단결투쟁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투쟁을 펼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원칙도 없었고, 투쟁의 계획도 부재하였다. 두산중공업 지회의 경우, 작년 47파업이 투쟁의 전술적 측면에서 올바랐는가 잘못되었는가는 이와 같은 금속노조 전체의 문제점이 우선적으로 지적된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즉, 금속노조가 투쟁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동력이 떨어져 있는 두산중공업 지회가 과연 '자본과 금속노조의 대리전이다'라고 얘기되었을 정도의 투쟁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평가될 필요가 있다. (3) 두산중공업지회의 현장동력 부재 두산중공업 내부적으로 보자면, 이후 통합지도부가 탄생하였으나 임단협 타결안에 대해 뚜렷한 평가도 되지 못하고 당위적인 통합지도부의 틀속에서 그 결과는 결국 받아들여지게 됐다. 반면 임단협 타결안에 대한 문제의식은 완전히 묻혀버리게 되었다. 공기업하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도 부재하고 민영화에 대해 그 투쟁을 평가하고 반성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장은 그야말로 얼어붙어 있었다. 한편, 현장활동 부재의 문제는 두산중공업 지회의 문제만은 아니며 대부분의 민주노조가 현시기 공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일부 대공장의 경우에는 대의원의 반 이상을 사측에서 장악한 상태이다. 두산중공업 지회의 현장동력의 문제는 두산중공업 지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민주노조 운동의 현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비롯한 모든 민주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투쟁으로 돌파하겠다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지 못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사는 어떠한 전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2. 투쟁의 과정과 타결에 대한 평가 1)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싸움이었다. 이번 배달호 열사투쟁은 현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소식지, 분향소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도 노력이 없었으며 투쟁의 기간 중에 지역에서 투쟁의 조직화를 위한 대의원대회도 없었으며, 이미 열사투쟁과 무관하게 계획상에 있었던 통합대의원대회에서 안건을 첨가하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다. 중앙차원에서도 대의원대회 같은 책임성 있는 회의체계를 통한 조직화로 가지는 못하고 전국지회장결의대회로 대체하였다. 물론 여태껏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지역동지들의 철농참가는 성과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간부들 선에서 머물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조합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현장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역연대가 간부중심이 철농으로 배치되면서 현장 조합원들을 연대투쟁으로 이끌기 위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철농마저도 초기에 비해 이후에는 거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대책위가 이번 싸움을 현장을 조직하여 그 동력으로써 투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해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정권교체기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도 노동부장관의 직접중재에 대해 '한편으로는 이번 두산 중공업 문제에 대한 계속적인 정치권에 대한 입장전달 및 조직화가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 내었던 상황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꿈적도 않는 악랄한 두산을 상대로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투쟁방법이나 역량을 통해서 상황을 협상국면 돌파해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뒤가 거꾸로 되어 있다. 지역만 놓고 본다고 했을 때도 현장을 조직하려는 계획과 의지가 있었는가를 분명히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신사수투쟁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이에 대한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번 투쟁의 중요한 문제는 두산중공업의 현장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였다. 장례식에 조합원 참석을 보았을 때 현장을 살렸다는 성과가 없다.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은 이번 싸움은 금속노조가 대신 싸웠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데 향후 실제 투쟁이 자신의 문제로 닥쳐왔을 때 나설 수 있겠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 만큼 현장을 조직하는 문제는 절대적인 과제였다.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이 자발적 시신사수를 보아도 초기에 현장을 치고 들어가서 붙으면 가능성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방향성 없고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후반기에는 금속 노조 위원장, 지부 및 지회 임원, 민주노총경남본부장 등이 역할을 분담하여 현장순회와 토론회, 아침조회를 실시하였으나 투쟁의 기조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 속에서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사망 대책위는 투쟁대책위로서 금속노조의 위상과 역할이 분명했음에도 대책위가 전국과 지역연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현장을 조직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두산중공업 현장과 조합원의 상태가 이번 투쟁의 한계였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2월달 들어서는 투쟁전술의 배치가 없었으며 고작 노동부 집회가 고작이었다. 노동부집회에서도 그나마 집회 참석자들은 투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대책위가 이를 자제시키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후 지역동지들은 '집회참석하기도 싫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사태로 이어졌다. 2월에 우리가 유리한 국면에서 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정권교체기라는 국면에서 정치권을 이용하려는 방식으로 나가게 되었다. 실제로 대책위 내부에서는 노무현정권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방식으로 인해 특히 2월에 들어서서 폭로가 대책위의 주요 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두산자본에 대한 폭로는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손배가압류에 대한 폭로는 그동안 노동자의 삶에 관심도 없던 거대언론에 크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감으로 인해 손배가압류의 본질보다는 '어떻게 두산은 저렇게 비인간적으로 월급도 안줄 수가 있는가'는 식의 노동자 개인의 고통의 문제로만 국한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열사의 분신으로 이미 손배가압류는 여론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책위의 중심과제는 여론화가 아니라 어떻게 싸움을 조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동정어린 시각으로 한 가장의 죽음, 경제적 궁핍, 한없는 슬픔 등을 다루었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 손배가압류가 노동자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노조활동의 자유, 파업권, 노동권을 얼마나 침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대 정권과 입법부, 사법부에 의해 그리고 언론 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여론은 3/12 노사합의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인가압류는 해지하였지만, 노조활동의 자유와 관련된 조합비가압류의 문제, 해고자복직의 문제, 부당노동행위처벌에 관한 문제 등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조합비 가압류를 인정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책위의 전술이 가지는 문제점이 그대로 합의안의 한계로 나타난 것이다. 노동부 특별조사가 시작되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기자회견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두산중공업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의 통제가 이완되어 이를 계기로 현장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 계기를 살려서 현장조직화로 나가지 못하였고, 폭로와 고소고발에 그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현장투쟁으로 가자고 했을 때 '과연 그게 가능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장을 조직하는 문제는 그 결과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되었는가와 무관하게 투쟁전술로서 충분히 가능했으며 이번 투쟁과정에서 분명히 성과로 남겼어야 했다. 대책위가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은 대책위의 조직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책위는 참가조직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나가지 못하고 집행위 중심으로 나가게 되었다. 의사결정이 참가조직과 일선실무단위들의 의견수렴과 토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정이 대책위 집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장 투쟁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는 의사결정구조보다는 정치적 협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3/20 총파업은 조합원들의 찬반투표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다. 총파업의 조직화는 중앙에서 지침을 내려서 현장에서 투표를 진행한다고 그냥 통과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을 시켜야하는 것이며 특히 작년 4/2 총파업의 철회는 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을 설득시키는데 힘든 요소가 되어있다. 총파업을 가결시키는데는 현장에서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타결과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언제부터인가 총파업 결정은 조합원이 하고, 파업중단과 철회는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은 단위에서 알아서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민주노조의 명백한 의사결정구조의 문제를 시간이 없다는 등의 실무적인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연대투쟁에 대한 평가 비단 우리지역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창지역은 금속노조에서 결정이 안되면 어떠한 사업이나 활동이 집행이 안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연대투쟁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 자발적인 움직임이 축소되어가고 공식적인 지도부 지침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려 하며, 누구도 책임의 문제를 비껴가려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전에는 연대가 활발하던 것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합법화 과정의 시기와 맞물리면서 활동가를 키워내는 틀이 없어지고 교육도 본조에서 강사섭외까지 관장하여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운영위에서 결정나면 지침을 수행하는 것이 지역활동이 되고 있다. 2월25일 경남1지부 홍지욱 조직부장에게 용역깡패들이 폭행테러를 저질렀을 때 지역의 동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두산중공업 정문으로 달려왔다. 이를 계기로 지역의 연대를 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지도부의 분명한 방침의 부재로 인해 정문과 중문을 부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본관으로 올라가면 본관이 작살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두번째 문제이고, 그 날 상황은 반드시 본관으로 올라가 본관에서 철야농성을 진행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25일 상황에서 지역동지들은 두산자본에 대한 분노와 함께 투쟁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에 대한 분노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25일 대책위의 무력대응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이미 열사의 죽음 자체가 경찰과 검찰을 비롯한 정권, 국회, 검찰, 사법부까지 동원된 총자본의 악랄한 보이지 않는 폭력테러에 의한 것이고, 두산자본은 2/24 노동부 1차중재안이 나온 후 대책위가 일정부분 긍정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폭력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두중지회든지 금속노조든지 이러한 상황에서 무력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항복선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25일의 무력대응은 우리 사회속에서 총자본의 강요에 의해 노동조합이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고 필수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합활동과 연대투쟁의 일부분인 것이다. 2/25 당일 농성장은 많은 지역동지들이 자리를 지켰고, 다음날 아침 선전전에도 대개 참석하였다. 그러나 26일 항의규탄집회가 아무런 내용 없이 본관 앞에서 조용히 마무리 집회를 하는 것으로 끝나면서 당일 농성장은 그야말로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비어 있었다. 형식적인 철농과 집회로는 지역의 연대를 추동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확고한 투쟁의 기조속에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투쟁에 임해야 한다. 2/25 상황은 새로운 연대투쟁의 조건을 형성시켜 당시까지의 투쟁의 흐름을 바꾸어줄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함에도 대책위가 25일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투쟁의 전선을 조직하지 않은 것은 전날 발표된 노동부 1차중재안에 대해 대책위가 조건부거부로 입장을 정리한 것과 직결되어 있다. 조건부거부로 정리한 상태에서 그것이 '조건부거부'인지 '조건부수용'인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향후 일정을 투쟁을 재조직하는 것으로 가기에는 상황이 이미 너무나도 확연한 마무리 협상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즉, 중재안에 대해 얼마를 더 따낼 것인가에 대한 국면이었으며, 대책위로서는 25일 상황이 더 확대되었을 때 그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가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7일 창원 상공회의소 앞 집회가 취소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대책위 평가초안에서는 25일 상황에 대해 '두산중공업 사태를 더 이상 끌고 가기에는 서로가 부담스러운 무거운 과제를 정치권과 노동, 자본진영, 여론에 던져준 계기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1천결사대에 대한 평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천결사대 취소에 대해서도 분명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는 '가장 기본적인 노사자율협상이나 타결의 가능성은 60일을 넘기면서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노동부장관의 중재에 나서는 것을 누구도 마다할 사항이 아니었다. 노동부 역시 사전에 두산에 의사타진을 해본 결과 노조측과의 의견을 좁히거나 타결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재에 나설 계획이 없었지만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중재에 뛰어 들었고, 노동부 장관이 생각하는 타결지점은 노조가 생각한 것 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재협상을 통해서 최대한 유리한 타결로 이끌어 가는 것이 현실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재협상을 임함으로서 그나마 합의안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고 본다'라고 평가를 했는데 이것을 '벼랑끝 전술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책위는 1천결사대를 통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섭전술상의 압박용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사대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사대의 위상과 역할, 활동내용 등에 대한 조합원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인원할당식으로 지침이 내려왔다.이것은 중앙과 현장의 완벽한 괴리현상으로 현장에서는 1천결사대 조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중앙에서는 협상용 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1천결사대투쟁의 조직화는 현장동력의 복구를 통한 연대투쟁의 위상을 가지면서 2003년 투쟁의 힘찬 출발점이 되었어야 했다. 또한, 작년 4/2 총파업의 철회에서 발생한 조직적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3/11 정오까지로 협상 시한을 분명히 정해 놓고 1천결사대 투쟁에 임했는데, 노동부장관이 내려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러한 원칙을 완전히 저버렸다. 지난 투쟁의 평가를 통해 정한 원칙을 스스로 간단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또한 11일 밤 아직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1천결사대는 이미 취소하는 것으로 연락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연 그러한 결정을 한 단위는 어떤 단위인가? 앞서 말한 대책위의 의사결정 구조는 어떠했는가를 다시 짚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날 12일 새벽, 협상이 결렬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는데 11일 늦은 밤 상황에서 과연 1천결사대를 취소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타결됐다고 보도한 연합뉴스나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타결될 것으로 보고 1천결사대를 취소한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3) 교섭의 비민주성 대책위가 구성되고 대책위의 요구가 확정된 이후 교섭의 과정에서 요구가 구체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요구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유가 되지 않았다. 대책위 구성조직의 각급 회의단위서는 물론이고 대책위 실무자선에서도 공개되지가 않았다. 특히, 노동부 1차중재안이 나오고 난 이후에 대책위 내에서 조건부거부로 정리된 이후부터 노동부장관의 중재까지의 시기에서 대책위 요구안이 정리되는 과정이 전혀 공유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동부 장관의 중재가 진행되는 도중, 지역방송의 보도에 보도된 내용조차 실제로 대책위가 그런 요구안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초기 대책위 구성시 유족의 동의, 대책위, 지역, 지회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합의한다는 타결에 대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지역차원에서 협상의 마지노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는 점과 노동부 1차중재안에 대한 조건부거부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반성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부장관 중재 당시 내부 혼란으로 단일화되었지만, 협상에 있어 공식적 통로와 비공식적 통로를 동시에 가동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과연 비공식 라인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필요성은 있었는가? 비공식 접촉에서는 무엇을 다루었는가? 마찬가지로 비공식적 정치권과의 협상 등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민주노조에서 요구안의 확정과 교섭, 타결과정은 철저히 공개되어야 한다. 이번 대책위의 협상과정의 비공개는 민주노조의 원칙에 따르면 완전히 불신임 대상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4) 합의안에 대하여 합의안은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싸움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개인손배가압류는 해결이 되었으나 여타의 조합활동의 자유와 파업권, 노동권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서는 이번 투쟁의 성과로서 개별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을 성과로 보면서 '쟁의권의 정치사회쟁점화와 제도개선'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방용석 전 노동부장관의 합법파업발언은 부하직원인 노동부 관료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으며 이번 합의에 서 47파업에 대한 합법여부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단지 방용석 전 장관의 합법파업발언을 놓고서 '제도개선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이번 열사투쟁을 통해 개별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은 수많은 사업장의 손배가압류가 실제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이 성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열사투쟁이라는 틀 속에서조차 개별사업장의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켰을 뿐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이번 열사투쟁속에서 한번의 토론회를 빼고는 전국의 수많은 손배가압류사업장의 연대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더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며 사실 이 한계가 더 중요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대책위 평가초안에서는 '해고자복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해고자 18명이 모도 부당해고자이고 특히 3-4명 정도는 이번 투쟁이 아니었어도 해고무효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충분히 복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고자 복직의 문제가 투쟁의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쟁점으로 제기되지 못하고 마무리 시점에서야 논의가 되었다. 따라서 단지 합의안에 5명 복직을 명시했다고 향후 해고자 복직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을 부각되지는 않으며 '해고자 복직의 토대 마련'이라는 평가는 형식적 평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책위 평가 초안처럼 '비록 합의내용은 부족하였지만 그 동안의 투쟁으로 인해 현장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였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문구에 불과하다. 과연 63일간의 투쟁을 돌아보았을 때, 어떠한 토대가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되어야 한다. 두산중공업 현장동력의 문제는 일관되게 제기된 문제였으며, 타결에 즈음한 시점에서 진행된 두중지회 파업에 확대간부를 포함하여 60여명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번 투쟁을 계기로 소위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번 투쟁에서 가장 정치적 성과를 얻은 것은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자신의 기반으로 한다. 자칫 배달호 열사의 투쟁으로 인해 그러한 정치적 성격이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폭로될 수 있는 위기에서 정치적 협상을 통해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낙관론이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노무현 정권 하에서 민주노총이 단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투쟁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3. 향후과제 열사부인께서는 금속노조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는지, 왜 금속노조의 분명한 방향설정을 하지 못했지를 평가해봐야 한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이번 투쟁을 계기로 인적 물적 집중력, 지속성, 그리고 조직력에 있어서 산별노조의 위력이 발휘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를 구체적 자료와 사실, 지역의 동지들의 평가를 가지고서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책위 평가 초안은 '특히 두산중공업 지회의 경우 조합원들이 그동안 산별노조에 대하여 갖고 있던 불신감은 이번 투쟁을 통하여 상당부분 해소되었다고 판단된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두중지회 조합원들이 금속노조와 대책위에 대해 이전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신 싸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계급적으로 함께 단결하여 함께 투쟁하는 '산별노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열사투쟁이 끝나고 산별 확대보다 반대현상으로 가고 있다. 산별노조를 표방하지만 열사부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금속노조 위원장이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위원장이 권한을 가졌다하더라도 지침을 하달했을 때 현장동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중앙에서도 힘을 쓸 수가 없다. 지금 상태는 현장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지침을 내리고 그 지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활동이 되고 있다. 지금 구조로서는 지회는 중앙에 대해서, 중앙은 지회에 대해서 서로 핑계를 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장이 강화되어야 지역이 강화되고 지부가 제대로 설 수 있다. 각 지회가 어떻게 강화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지부와 지회의 역할에 대한 고민속에서 사업의 성과가 축적되고 훈련되지 않는다면 지부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 이러한 속에서 금속노조를 현장동력에 기반한 노동자의 투쟁조직으로 새롭게 재편하여야 한다. 또한, 금속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사업장과의 연대의 문제에 있어 금속연맹과 금속노조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공동투쟁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의견을 모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현장에서는 현장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자발적 모임들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동시에 상호 연대와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한편 이번 투쟁을 통해 향후 민주노조운동이 노무현정권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기되었다. 열사투쟁을 평가해볼 때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으며 이것이 정치적 협상으로 가는 판단의 근거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은 분명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그러한 노선에서 한 발치도 물러섬이 없으며 이번 열사투쟁에서 과연 정권이 허용해주는 선 이상을 넘어섰는지 평가를 해야한다. 이것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면 향후 5년간의 민주노총의 투쟁은 단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투쟁전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ANCHOR: |
노동조합단체 상근간부의 형성에 관한 연구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오건호 (서울대학교 사회학 박사) 인수범 (서울대학교 사회학 박사과정) 1. 문제 제기 1990년대에 있어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그 조직규모가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치적 위상과 조직체계에서는 발전적인 변화를 이루어 왔다. 특히, 최근의 경제위기 국면 속에서 경제구조 재편(예: 금융·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재벌개혁)과 이에 따른 고용감축의 현안문제들에 직면하게 된 노동조합들은 기존 기업별 조직체계에서 비롯되어지는 실천적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보다 집권화된 산별 조직에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주체적 지형에 있어 그 실천적 대응의 비중과 중요성이 개별 기업 차원에서 산별 또는 전국 수준으로 점차 옮겨가고 있는 것을 확인케 된다. 초기업수준의 노동조합단체가 차지하는 위상이 더욱 높아지는 만큼, 이들 상급 노조단체를 이끌어가는 상근 간부들의 역할이 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본 연구는 초기업수준의 상급노동조합단체들에 종사하는 상근 간부역량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구체적인 실태분석을 하고자 한다. ) 이 논문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주관하에 진행되고 있는『한국 노동조합의 간부역량 강화방안』의 연구 일환으로써 작성되어진 것이다. 2. 노조 상근간부에 대한 기존 연구문헌 검토와 개념적 유형화 노동조합의 상근간부들(full-time officers)에 대한 고전적 논의는 19세기 말에 노동조합조직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하였던 웹부부의 저작에서 찾아질 수 있다(Webbs 1894; 1897). 웹부부는 전업의 노동간부층의 등장을 통해 노동조합 내부에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갈등에 주목하여 지적하고 있는 바, 노동조합의 운영을 위한 상근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조합원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주주의(democracy) 원리'와 조직 활동 및 기능의 '효율성(efficiency) 원리' 간에는 근원적인 모순-긴장관계가 조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조 상근간부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온건한 시각을 대표하는 다원주의 노사관계론과 급진적 시각을 대표하는 맑스주의적 노사관계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다원주의 노사관계론에 따르면(Donnovan 1968; Clegg 1976: Batstone 1988), 노조 상근자들은 교섭과정에서 고용주와 잦은 접촉을 가지며, 고용주로부터 파트너쉽을 인정받는 것이 자신의 권한 강화에 중요하기 때문에 고용주와 타협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한편, 맑스주의 노사관계론에서 제기되는 노조 상근간부에 대한 비판은 보다 근원적이다(Cliff 1971; Kelly 1988). 맑스주의 연구자들은 다원주의 노사관계론이 인정하는 노조 상근간부들의 제도적 기능, 즉 조합원의 여러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과 사용자와의 협상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역할 등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상근간부의 제도화된 역할 수행을 통해 일반 조합원들이 지니는 계급의식의 단초가 희석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또한, 사용자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에 노조 상근자들은 사용자와의 타협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조직권력에 연연해 왔다고 주장한다. 표 1: 한국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유형화> 유형화 기준 유형적 특성 노조 조직 체계상의 위상 전국 중앙조직의 간부층 (예: 양노총 및 지역본부) 산별 연맹 또는 산별노조 및 산하 지역본부의 간부층 단위 기업별 노조의 임원 및 상집간부 작업장의 현장간부층 (예: 대의원 및 소위원) 근무형태 전임·상근 반전임·반상근 비전임·비상근 선발 경로 선출직(예: 노조 임원 및 대의원) 채용직(예: 상급단체의 집행간부 일부와 단사 노조 둥의 사무보조원 등) 산하조직 파견직 (예: 상급단체의 집행간부 일부) 지명직(예: 단사노조의 상집간부와 상급단체의 정무직·지도위원 등) 자발적 참여형 (예: 단사 노조의 소위원 및 자원봉사자 등) 급여지급형태 노동조합 지급 (예: 채용직, 해고자출신의 조합 임원·상집간부 등) 소속 회사 지급 (예: 파견직 및 상급단체 파견인정의 임원, 단사노조의 임원·상집간부) 무보수 활동가 (예: 대·소위원 및 자원봉사자 등) 출신배경 현장 노조(노동자)출신 학생운동(지식인) 출신 학생운동과 단사노조 경험 보유 전문적 기능 보유 활동지향성 활동가(activist)형 지도자(leader)형 실무전문가(expert)형 관리자(managerialist)형 기업별 조직체계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에 종사하는 간부층에 대해 주요 활동 특성 및 양태를 중심으로 대략 유형화해 보면 표 1>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노동조합 간부층에 대해 그 인적 구성과 활동양태의 주요 속성들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유형별 분류를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조 상근간부의 활동성향은 '계급민주주의'와 '조직효율성'라는 이론적인 이중 척도에 의해 단순히 규정되기보다는 다양한 유형범주들의 복합적 조합(combination)을 통해 다중적인 분류(multi-dimensional typology)방식으로 분석되어져야 하겠다. 3. 노동조합단체 상근간부 역량의 역사적 형성과정 1) 한국노총 한국노총의 경우, 1950년대 대한노총의 시절에서나 196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철저히 통제·보호받는 비자주적인 조직의 위상을 드러내 왔다. 그동안 한국노총의 지도부는 정권 또는 사용자와의 밀착관계 유지를 통해 정·관계로의 입신출세를 추구하는 소위 "관리자형"의 간부속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한국노총 및 산하 상급단체들에서는 주요 단위노조 위원장출신인 상층 지도부 중심의 조직활동 및 운영이 이루어짐에 따라 하위직의 상근간부(일반채용직 및 조직파견직) 대부분은 단순히 보조적이거나 주변적인 역할과 기능의 실무업무("단순 실무전문가"유형)에 종사하여 왔던 것이다. 다만, 민주노동운동의 조직화가 가시화된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노총내 개혁지향의 지도부가 현장 조합원 중심의 대중적인 활동에 역점을 두는 "지도자형"으로 변신함에 따라, 한국노총내 일반 상근간부들이 차지하는 전문적인 활동의 비중과 중요성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하겠다. 2) 민주노총 민주노총의 경우에는 상급노조단체의 건설과정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한 다수의 학생운동 출신자들과 민주노조 조직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현장 노동자활동가들이 중앙조직 및 산하연맹조직의 상근 간부층을 형성하여 왔다. 특히, 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된" 한국노총의 역사적 궤적과는 달리 민주노총에서는 단사노조-산별연맹-중앙조직의 결성과정이 철저히 현장 활동가들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조직"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이들 활동가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근간부들이 상급단체 운영 및 활동추진에 있어 행사하는 영향력의 비중은 자못 크다고 하겠다. 또한, 민주노총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정권과 사용자의 탄압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온 집단적 실천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대다수 상근간부(선출직 임원 포함)들은 이념적 정치의식성과 전투적인 실천지향성을 강하게 지니는 "활동가유형"에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민주노총 상근간부들의 이러한 이념지향성은 그 운동노선과 실천관점에 따라 다양한 분파적 활동경향으로 계속해서 표출됨으로써 조직내 소모적인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문제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4. 양 노총 상근간부의 경력 현황에 대한 비교 이 장에서는 우리나라 노조 상근간부의 현황과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2000년 8월 중순부터 9월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설문조사 결과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분석하고 있다. 이 설문조사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 노총의 지역본부, 각 산별연맹(혹은 산별노조) 등 총 77개 상급노조단체들의 전수를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조운동에서 양 노총이나 산하 산별(연맹)단위에서 채용직으로 일하는 일반상근직 간부들은 노조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핵심적 집단이다. 이후 기업별/연맹 조직형태에서 명실상부한 산업별조직으로 노동조합조직이 전환되면 이들 일반상근직의 역할은 산업별노조 중앙의 역할이 증대하는 만큼 크게 부상할 것으로 예측된다. 산업별 혹은 일반직 전국노조가 대부분인 서구의 경우에도 이들의 역할과 한계(소위 '노조관료제론')에 관한 논의가 노동조합 조직논의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우리나라 일반상근직 간부의 직전경력에서 양 노총계열별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 것은 유의미한 시사를 던져준다. 비록 아직은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고 더불어 세부적인 심층조사가 뒤따를 예정이지만, 민주노총계열의 경우 처음부터 노조운동을 위해 참여했던 의식적인 대졸자 지식인들이 일반상근직의 많은 자리를 맡고 있는 반면에 한국노총계열의 조직에서는 노동조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이 노조활동 외부에서 채용된 상근간부가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일반상근직의 경력 차이는 양 노총계열의 활동방향 차이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일 수 있다. 5. 맺음말 양 노총의 일반 상근간부들이 보이고 있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노총의 상급노조단체에 소속된 상근간부들의 신분과 위상은 공통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할 뿐 아니라 매우 취약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 이들 상근간부들은 노동운동의 활동가로서 많은 헌신을 요구받는 반면, 직업으로서 보장되어야 할 경제적 보상과 개인 경력개발 그리고 직장생활 질에 있어서는 매우 열악한 처지에 방치되어 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급변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조 조직의 핵심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상근 간부층의 역량 발휘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제반 여건 조성을 위한 의식적이며 정책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ANCHOR: |
이 책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러시아 등 유럽 5개국의 산업화 과정을 비교하고,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을 고찰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19세기 노동운동이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종래의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산업화의 전진적 과정, 수공업 부문의 중요성, 수공업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문화 등을 강조한다. 이것은 1970년대 노동사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서론
1장 영국 산업사회의 성립과 노동계급 (이영석)
2장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김현일)
3장 19세기 독일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 (안병직)
4장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 (안재흥)
5장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산업화와 혁명적 노동계급의 형성 (이채욱)
김경일 (정신문화원, 사회학) 정현백 (성균관대, 서양사)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 5개국의 산업화과정, 노동계급의 등장과 존재양태 그리고 노동계급의 조직화과정을 520쪽에 걸쳐 포괄적이면서도 밀도있게 서술한 책이다. 요즈음 해외에서 잘 알려진 서양사관련 서적들이 국내에 많이 번역되고 있어, 역사학도나 일반독자들이 서양사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적들이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국가나 시대에 국한되기가 일쑤여서, 중등교육과정의 세계사교육이 부실한 우리 현실에서는 몇몇 나라들의 상황을 비교하여 서술하는 서양사서적의 필요성을 통감하던 차였다.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바로 이런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서론에서 밝힌 대로 약 2년 가까이 진행된 공동작업의 결과로 나온 만큼, 서술 자체가 대체로 일관성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다듬어서, 책 전체의 서술이 견실하게 잘 다져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오랜만에 서양사학계에서 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연구서가 나온 것 같다.
이 책은 카츠넬슨의 '노동계급의 형성'의 서술방식과 상당히 유사하고, 이영석교수 자신도 본문에서 직접 카츠넬슨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카츠넬슨의 책보다도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의 비교는 더 소략하다. I. Katznelson and A.R. Solberg eds., Working Class Formation: Nineteenth-Century Pattern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을 참조.
Jurgen Kocka, Suggestions and Debates. New Trends in Labour Movement Historiography: A German Perspektive,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 1997 (No.42), p.68 참조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 책,영화 | 2004/09/10 08:15 | |||||||||||||||
http://blog.naver.com/adisabaa/1400056937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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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헬스의 [정당사회학] | 독서노트 | 2005/02/14 0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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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먹은 술때문에 오늘 하루를 통채로 잡아먹는 가 싶었는데 겨우 저녁때 눈을 뜨고 그동안 잡고 있던 미헬스의 [정당사회학]을 읽어내려갔다. 설연휴 기간에 읽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는데 그런대로 목표는 이룬 셈이다. 책을 덮고 나서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들을 짧은 글로 옮겨보려고 하는데 머리속만 복잡하고 잘 잡히지는 않는다. 어제먹은 술 탓이기도 할터이다.
1.
독일사민당이라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민주정당안에서 어떻게 비민주주의적 경향성과 과두제가 등장하는 가에 대하여 미헬스는 매우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주제일지도 모르겠지만, 민주적 정당이 어떻게 비민주적인 정당으로 바뀌어가는가에 대한 미헬스의 질문은 책이 쓰여진지 백여년 가까지 지났지만 여전히 빛을 발한다. 질문은 낡은 것일지 몰라도 답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미헬스는 자신의 발견과 이론을 하나의 법칙으로 정립했다. 정당을 포함한 노동조합 혹은 그 이외의 모든 조직형태에서 과두제의 등장과 성립은 하나의 철칙이다. 베버에게 있어 관료제가 근대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철창(iron cage)였다면 미헬스에게 있어 과두제가 바로 그것이다. 관료제는 과두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2.
미헬스의 지적에서 흥미를 더하는 것은 과두제를 단순히 지도자와 지도부의 권력욕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과두제를 근대적 질서의 하나로 바라보는 것에서 나온다. 동시에 이것은 대중의 무관심과 방관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은 대중의 선택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즉, 대중은 과두제를 지탱하고 선택한다.
3.
운동과 조직의 전문화는 필연적으로 운동에 엘리트적 요소를 강하게 요구한다. 지식인의 비중이 중요하게 제기되고 '지식'이 '운동'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내 생각엔 운동의 대안이 중요하게 자리매김되면 될수록 운동의 엘리트성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나는 사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운동문화와 운동사회는 다분히 <엘리트적 요소>가 강하게 자라온 사회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중과의 결합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운동에 있어서 대중의 몫과 비중이 점점 상실되어왔다고 보여지는 측면이 존재한다. 대중을 위한 운동일수는 있지만 대중을 경유하지 않는 운동이 존재한다.
4.
조직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필요가 조직을 정당화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 미헬스가 말하는 법칙이라는 것을 우리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조직내에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의 과두제적 요구가 아닌 다른 요구들로부터 오는 다른 법칙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법칙들이 결합되면서 정당의 조직질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게다. 무엇이 과두제를 막을 수 있을까. 무엇이 실제적인 대중의 지배를 이룩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가. |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일 읽고 | 다시읽기 | 2005/05/01 03:18 |
http://blog.naver.com/rnstkddl/60012384351 | |
한국 노동 계급 형성 연구에서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 공돌이 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하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핵심적인 질문
1. 한국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문화적 , 정치적 장애를 극복하고 강력한 노동자 정체성을 만들어 냈는가?
2. 어떤 구조적 , 인구학적 조건들이 이러한 과정을 촉진했는가?
3.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처럼 놀라운 용기와 열정으로 가부장제적 권위에 도전하게 만든 공장내의 실존적 경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4.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과 정치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어디서 문화적, 조직적 자원을 이끌어 냈는가?
톰슨의 계급 개념은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 계급이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보다 인간 행위자의 역활, 즉 계급을 "만들어 내는 " 자아활동을 더 우선시한다. 그가 웅변하듯이
" 계급은 자신들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것이 계급의 유일한 정의이다."
톰슨의 역사주의적, 행위자 지향적 계급 개념은 생산과정과 생산과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 사회제도의 역활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물질적 조건을 인식하고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이런 조건에 반응하는지는 "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영행을 받는다고 톰슨은 주장한다.
계급은 사회적 문화적 형성(자주 제도적 형태를 갖게되는)으로서, 추상적으로 혹은 고립되어 정의될 수 없고, 다른 계급과의 관계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즉- 행위와 반응, 변화와 갈등속에서- 이루어진다.
계급을 말할때 우리는 동일한 일련의 이해와 사회적 경험, 전통,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계급으로 행동할 성향을 가지고 있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행동과 의식속에서 자신들을 계급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는, 대단히 느슨하게 정의된 일단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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