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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 -신병현

연구논문/『현장에서 미래를』37(1998/10)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연구소 제32차 콜로키움 발표문을 지면관계상 대폭 요약정리한 것이다. 원문은 연구소통신방(나우누리 → GO LABOR → 10번 →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에 올려져 있다.
- H중공업 노동자와 활동가들에 대한 사례 연구 -
연구논문
작업장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와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
신 병 현
연구위원/홍익대 경영학 부교수
1. 노동과정론과 정체성 연구
근대 세계에서의 인간 소외와 노동의 문제는 사람들의 삶에서 핵심적인 의미의 원천으로 자리해 왔음은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전통적으로 사회과학에서는 노동이라는 통념을 통하여 인간에 대한 범주화를 추구해 왔다. 대부분의 사회과학도들의 논의 역시 맑스를 따라 건축가적 이미지를 통하여 인간 노동의 중요성과 창조성을 묘사해 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 Paul Du Gay, Consumption and Identity at Work, (London: Sage,1996), pp.11
그리고 산업사회학이나 근대 조직에 관한 연구들 속에서 노동(일), 임노동은 인간 생명성
) 황기돈, 「생동성의 경제학」, 『산업노동연구』, 제2권 2호, 55~67쪽
또는 안정적이고 일관된 자기 정체성의 핵심적인 원천으로 자리해 왔다. 노동이 임금을 받고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해온 중요성은 또한 근대 세계의 중요한 사회적 프로젝트로서 소외 없는 세계에로의 다양한 지향들 속에서, 그리고 사회적 분화와 통합의 문제틀 속에서, 그리고 국가 권력을 비롯한 각종 조직화된 사회 기구들에 있어서(나아가 가족 관계나 인간 관계들을 포함하는 타자와 그들의 행동과 통제에 대한 관심들 속에서는 언제나) 사회 공학적 관리 기술의 대상으로 늘 관심의 초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 Nikolas Rose, "Identity, Genealogy, History" in Stuart Hall & Paul Du Gay eds.(1996), Questions of Cultural Identity, London: Sage, pp.128-150 여기서 그가 말하는 기술은 "다소 의식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일종의 실천적 합리성에 따라 구조화된 어떤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기술은 인간에 대한 특정한 전제들과 인간을 위한 목표들에 의해 프로그램적 수준에서 지지되는 것들로서, 지식들, 도구들, 사람들, 판단 체계, 건물과 공간들의 잡종적 총합(hybrid assemblages)인데, 여기에는 훈육적 기술과 사목적 기술이 포함된다. 학교, 감옥, 수용소는 푸코가 훈육적 기술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들이다.
따라서 산업화와 연관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주요한 산업사회학의 노동과정 연구들이나 경영담론에서는 노동윤리와 노동의 가치가 한결같이 강조되었고,
) C.Perrow, Complex Organizations: A Critical Essay, (N.Y.: Random House, 1979), R.Bendix, Work and Authority in Industry, (N.Y.:John Wily & Sons, 1956), N.Rose, Governing the Soul: the Shaping of the Private Self, (London: Routledge,1989).
노동과 관련된 주체의 생산이나 정체성의 형성이나 변형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 이에 대해서는 Rose Nikolas(1989), Governing the Soul: the Shaping of the Private Self, London: Routledge.
전통적으로 노동자 주체성 및 정체성에 관한 논의들은 맑스주의자들의 경우에는 객관적 소외 논의로, 베버나 뒤르케미안의 경우는 정반대로 무력감이나 도구주의적 가치 지향성에 대한 관심과 같이 주관적인 소외 현상에 대한 논의로 표출되었으나, 양자는 결국 객관적 소외 구조와 의식 혹은 가치 지향성의 탈구 논의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 Paul Du Gay, 윗책, pp.9-27
노동자 의식과 집합 행동에 관심을 둔 대부분의 맑스주의적 계급 연구나 노동과정 연구들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객관적 소외로서 노동의 결과물로부터의 소외 현상을 강조하면서 유적 존재(species-being)로서 노동자들의 인식 부재를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 도식은 구체적인 노동자들의 삶의 모습과는 유리될 수밖에 없는, 초월적 존재의 인식 능력과 같은 계급 의식이라는 관념에 더하여, 주체들과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구조적 모순으로 추상화, 일반화시키는 엘리트주의 및 환원주의적 경향을 띠어 왔다.
) 우리는 이러한 추상화의 위험성 즉, 사고 수준에서의 과학적 추상의 현실화, 자립화가 야기하는 사회 관계의 엘리트주의적 조직과 운영의 문제점을 도덕적 주체의 조형과 관리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조직 맥락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20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그 모순의 폭발을 가히 야만적인 강도와 거대한 규모로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 이 같은 자아에 대한 사회 통제 기술에 관한 관심은 조직 심리학을 비롯한 경영담론들에서 그리고 노동 소외에 관한 비판적 관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 중의 하나다.
이러한 모습은 베버주의자나 뒤르케미안의 산업사회학적 전통 속에서도 정반대의 방향에서 출발할지언정 객관적 소외현상을 전제하고 분석을 출발하고 결과로서의 소비영역의 문제점들과 노동자들의 가치지향성의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동일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왔다.
) Paul Du Gay, 위의 책.
이러한 객관적 소외현상에 대한 관심의 과잉은 사실상 근대 세계의 주요한 특징이었으며, 노동과 관련된 사회과학의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주요한 경향들을 산출하였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절대적 구분이든 분석적 구분이건 간에) 생산과 소비의 구분, 公과 私의 구분, 일과 여가 혹은 노동과 비노동(work/non-work)의 구분,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구분 도식의 일반화 현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이분적 구분 도식은 그동안 많은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에 의해 비판되어 온 도식, 이데올로기적 통념들이다. 그러나 노동연구나 작업장 문화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제대로 쟁점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소외의 근원이 노동자들의 가치지향성이나 태도 등과 같이 의식속에 있기 때문에 '직무충실화 프로그램'과 같은 기법들로 노동자들의 소외를 줄일 수 있다고 보는 산업사회학 및 산업심리학적 설명들에 정면적으로 반대되는 연구를 통해서, 노동과정의 분업이 야기하는 객관적 계급구조의 변동과 계급의식의 문제를 사고한 대표적인 연구는 브레이버만(H. Braverman)의 『노동과 독점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뷰러웨이 등의 비판처럼 소외의 주관적 측면을 배제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의식과 정체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들어갈 수 없는 한계를 보였다.
) Thompson, Paul & David McHugh(1995) Work Organizationss: A Critical Introduction, 2ed., London: Macmillan,(1988), "Crawling the Wreckage: The Labour Process and the Politics of Production" in Knights, D. & H.Willmott (eds.) Labour Process Theory, London: Macmillan, pp.95-124
뷰러웨이는 노동자들의 주관적 경험을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조명함으로써,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재생산 기제로서, 잉여창출의 은폐와 착취의 불명료화를 야기하는 다양한 기제들을 포함한 작업장 체제(factory regime)와 노동자들의 작업장 게임규칙에의 자발적 연루 메카니즘들을 밝히고자 하였다.
) M.Burawoy(1979), Manufacturing Consent, Chicago:Univ. of Chicago. (1985), The Politics of Production, London: Verso.
그의 생산 시점(site)에서의 '동의의 생산'에 관한 논의는 노동자들의 특정한 정체성이 작업장에서의 노동 관행속에서 노동자들에 의해 창출됨을 잘 보여 주고 있지만, 작업장에서의 동의의 생산이 어떻게 해서 작업장 외부의 사회적 맥락, 즉 노동자 개인적인 조직외적 경험들이나 성, 연령, 인종 등과 같은 사회적 속성들과는 독립적일 수 있는지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우선 '생산', '노동'이라는 범주에 지나친 존재론적 우선성을 부여하는 것이 문제시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맑시스트들이 그래왔듯이 뷰러웨이도 맑스를 따라서 노동이 인간을 유적 존재로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활동으로 봄으로써, 종족성, 성, 연령 등의 사회적 존재 양식들이 모두 노동에 의해 매개되거나 결정된다고 간주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에 빠지게 된다.
) 이러한 비판은 Paul Du Gay, 윗책, pp. 17-18을 참조할 것
창조적인 노동이나 그것을 보상하고자 하는 행위에의 참여함(예컨대, 작업장에서의 게임)으로서 인간 본질(essence)의 잠재성을 실현하는 것이 오직 노동뿐이라는 가정은 방법론적 편의주의라는 비판 뿐 아니라, 기존의 구조화된 남성주의, 인종주의 등에 대한 지배적 권력 관계의 존재론적 지형을 그대로 인정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런 가운데 이루어지는 주체성 및 정체성 연구와 그에 따른 실천은 자연스럽게 지배질서를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연루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또한 생산에 대한 강조의 과잉은 앞서 지적되었듯이, 가족과 같은 '사적' 영역이나 소비 및 여가 영역과는 대조적으로 '공적인' 임노동 영역만을 인간 존재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산출해 왔다. 이에 따라서 노동과정의 분석은 자연스럽게 가시적인 통제 기제를 강조함으로써 지나치게 수동적인 노동자의 이미지를 산출하거나(브레이버만이나 일부 푸코주의적 경향들), 정반대로 작업장 내부의 행동들을 외부의 정치과정으로 환원시킴으로써(대표적으로 산업사회학의 가치지향성 연구들이나 개인사나 가치 및 태도를 강조하는 조직심리학 및 경영담론들에서 나타나는 경향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속에서 하나의 노동력으로 어떻게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키는 경향을 띤다.
사실상 기존의 노동과정 연구들에서는 기업의 관리적 통제하의 작업장내 노동자들이 구체적 노동과정 속에서 체험하는 사회·문화적 관계들(lived relations)에 관한 연구나 가족 및 친지 등 직장 외적 사회 관계가 노동과정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연구는 많지 않았다.
) 특히 한국에서는 그러한 연구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대표적으로 뷰러웨이(Michael Burawoy)와 영국의 CCCS 초기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M.Burawoy, Manufacturing Consent와 The Politics of Production 그리고 John Clarke, Chas Critcher and Richard Johnson (eds.),(1979), Working-Class Culture: Studies in history and theory, London: Hutchinson & CCCS을 참조할 것.
전통적으로 산업노동 관련 담론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생산과 소비, 공과 사, 일과 여가를 대립 관계로 설정해 놓고, 이 사이의 탈구 또는 비조응 현상을 허위의식의 극복을 통한 의식화(각성이)나 규범적 통합(가치 혹은 도덕적 지향성, 태도의 변화)의 사회적 기획으로 봉합하려는 시도로 일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주체성이나 정체성과 관련된 논의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뷰러웨이의 경우도 분석적 관점을 생산에 제한함에 따라서 작업자들의 체험된 관계와 사회적 관계들이 노동자들의 정체성 형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분석에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 이러한 문제는 분석 결과의 실천적 함의와 관련해서도 구조결정론적 기계론에 다시 함몰될 위험을 초래한다.
2. 분석틀의 탐색
최근의 신자유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자본 합리화는 생산의 합리화 뿐 아니라 소비 및 일상생활의 전 영역에 이르기까지 상품·화폐 회로로 통합시키면서 새로운 '소비자 문화'의 재창출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 Don Slater, Consumer Culture & Modernity,(Cambridge: Polity, 1997), pp.9-16
영국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경향들은 노동자들의 삶의 형태 전반에 많은 변화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고, 기존 문화형식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문화형식들의 등장을 초래할 수는 있다.
) 영국의 경우, 전후 급속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나타난 전통적 노동자 문화형식의 해체와 지속의 역동성에 관한 논의는, Paul Corrigan & Simon Frith(1976), "The Politics of Youth Culture" in Stuart Hall & Tony Jefferson(eds.), Resistance Through Rituals: Youth subcultures in post-war Britain, London: Hutchinson & CCCS.
우리사회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겪어 온 지난 20여년의 경험은 '조국근대화의 역군', '산업전사'로서 '00가족'으로서 가족구성원들의 생계와 학업유지를 위한 '희생자'로서 다양하게 경영담론 및 정치담론들에 의한 상징적 의미부여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호와 담론의 홍수속에서 자신을 보아 온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87년 이후의 노동운동의 비약적인 발전 경험은 기존 농촌사회의 가족 및 연줄 중심적이며 가부장제적인 사회 규범에 의해 강하게 규제되어 왔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정체성 형성과 문화형식의 발전에 중요한 준거로 작용하였을 것이고 전통으로부터 '탈규제되고' 산업화 가치에 의해 '재구성되고 있는' '노동자 문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비교적 장기간의 근속 경험과 가족의 구성에 따른 가장으로서의 독립적 생활은 친인척과의 기존의 관계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가정 형성을 가져 오고 회사와 가정과의 관계의 밀도가 한층 증가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맺는 주요한 사회적 관계들은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의미있는 사회적 타자로 작용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사회적 정체성의 형성과 변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적으로 노동자들이 귀속적으로든 성취를 통한 것이든 참여하게 되는 '공동체적' 관계들을 회사와 가족, 그리고 노조와 보다 추상적 관계속에서 참여하는 민족 및 국가 공동체를 분석적 초점으로 설정하였다.
국가경쟁력이나 생산성 증대를 강조하는 주요 정치 및 경영담론 그리고 면접과정과 주요 노동조합의 생활 실태 조사 자료들은 90년대 이후의 호황기 국면에서의 주요 변화로서 임금인상과 소비성향의 증대가 지적되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소비생활 조사나 사기조사 자료들이 보여 주는 임금 불만족 그리고 노조 활동가들이 진단하고 있는 '노동자 도구주의와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화 경향'에 직면해 있음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 『현대중공업 활동가 상태와 의식조사』, 97. 11,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그렇다고 해서 우리사회의 대공장 노동자들이 과연 임금에만 도구적으로 관심을 갖고 '자율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행동 패턴을 보이며, 여가나 소비를 즐기는 '윤택한' 노동자상이나 소비자 문화에 어느 정도로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는 과거 87년 이후 10여년간 보여 온 집합적 노동자로서의 행동과 최근의 변화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로의 변화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또한 우리사회의 집합적 노동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의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의 문제와 관련된 질문이다. 과연 87년 이후로 나타났던 집합적 노동자의 위세 과시가 하나의 독특한 '노동자 문화형식'의 표현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문화형식이 기존의 것들과는 '단절된' 혹은 '탈규제된(de-regulated)' 문화적 표현인지? 그리고 최근의 '변화된' 노동자 행동 성향과 삶의 양식들을 이전의 것들과는 또 다른 전혀 새로운 문화 형식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80년대 중반 3저 호황과 자주적 노동조합의 설립 이후로 주요 대기업 그 중에서도 중화학 공업 종사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 수준은 크게 인상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담론이나 경영담론에서 강조해 왔듯이, 대기업 노동자들이 '윤택한(affluent)' 생활을 향유하고 있는가?
) 포드주의적 축적하의 노동력 재생산구조의 변화 양상을 추적한 드문 연구 중에 한 연구로, 정건화(1994), 「한국의 자본축적과 소비양식의 변화」, 『경제와 사회』, 21호, 봄호, 20~44쪽을 들 수 있다. 비록 이 글에서 그는 87년 이후로 나타나는 생활수준의 향상과 소비양식의 고급화 경향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전형적인 포드주의적 대량생산과 소비양식에서의 변화일 뿐이다.
자본의 이윤율이나 노동분배율에서의 괄목할 많한 패턴 변화가 있었는지의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 예컨대, 정명기(1996), 「포드주의적 임금결정방식에 관한 연구: H사의 사례를 중심으로」, 『산업노동연구』, 2권1호, 135~158쪽
주기적인 임금인상을 통한 경제적 궁핍의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탈피가 이루어 지고 이들이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지닌 소비자군화되었다고 할 때, 과연 이 노동자들의 소비패턴이나 생활패턴에서의 변화를 도구주의나 개인주의와 같은 행동 및 가치 지향성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까?
서구의 청년층(18∼30세 후반)에게서 드러나는 중간층의 미국적 생활 스타일은 우리사회의 경우 극히 소수의 부유한 가정의 청소년층이나 '신 부르주아'라고 부르디외가 말한 연령이 많지 않은 자영의 전문직층에게서나 간혹 드러날 수 있는 예외적인 경향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백화점 세일시 몰리는 소비자들이 비교적 중간수준의 구매력을 지닌 소비층이라고 보면,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소비 패턴은 여전히 대량생산된 표준화된 상품의 구매에 치중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동자 생활 실태조사에서 드러나는 자동차나 가전제품 등 내구재의 구비가 노동자 생활 수준의 향상의 지표인양 거론되기도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포드주의 체계하의 표준화된 상품의 소비패턴일 뿐이다. 물론 연령 별 소비지출 패턴에서 약간의 차이는 드러나지만 이는 결혼을 통한 가정 형성 여부로 설명될 수 있는 생애 생계비 지출 패턴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단지 노동자들이 생산-소비의 순환적인 경제체계의 상품-화폐 관계속에서 월급여 액수나 임금인상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80년대 말 이후의 '상대적인' 소비패턴의 변화가 '풍요'속의 노동자상이나, 소비자 문화 패턴으로의 변화 혹은 도구주의적 경향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Paul Du Gay, 윗책, pp.25-27
노동자 삶속에서 소비가 지닌 중요성은 포드주의하의 표준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의 기능에 수반되는 노동력 재생산 및 문화형식의 변화와 같은, 다른 방식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한편, 전통적 문화형식들의 지속과 변동에 관한 견해 차이들이 있다. 김동춘은, 한국의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연대지향성과 기업협력적 행동의 모순적 공존은 한국 노동자가 기업과 진정한 공동체성(?)을 느낄 수 없는 조건에 있으나 저항 행동 역시 차단당하고 있는 구조적 조건의 반영" 때문이라고 보고, '임금에만 관심을 갖는' '노동자 이기주의'나 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화' 경향을 '자기보존적 이기주의', '기회주의' 혹은 '실리주의'로 설명한다.
) 김동춘, 윗글, 115~116쪽
그는 노동자의 '실리주의적' 성향을 강력한 국가 억압아래 "무력한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자연스런 행위양식"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견해에 따르자면, 노동자들의 실리주의는 언제나 있었던 것이고, 이에 대한 활동가들의 '서운함의 표현'은 자신의 활동에서의 무력감을 동료 조합원 노동자들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결국 그는 생산현장에서의 민주화나 시민적 권리의 확보를 위한 노동운동의 발전에 있어 민주화와 집합적 정치 의식의 제고와 법적 제도적 형식화를 위한 노력과 같은 노동자·노동운동의 각성이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이 된다.
이와는 약간 다른 견해를 보면, '노동자들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경제적 수준 향상'과 대기업 노동자들의 '생애주기의 변화', 투쟁 일변도의 노조활동 경험에서 온 '패배의식', 억압적 노무관리의 약화 및 개별화된 통제와 같은 '미세하고 부분적인 것'들에 대한 '중앙' 집중적 통제, 노조활동에 대한 불이익 대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현장 활동가들과 노동조합이 변화하는 자본의 통제 전략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던 것도 중요한 원인으로 본다.
) 현대중공업노동조합,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윗책, 120~123쪽
따라서 임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실리주의적 행동 경향은 항상 이미 있었던 정치적 억압 때문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동차 등 기타 내구재 소비의 증가나 자녀교육 투자와 같이 생애주기 상의 변화로 인하여 겪는 금전적 압박과 회사의 변화된 통제, 그리고 노조 및 활동가들의 대응력 부재에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노동통제(이에 덮붙이자면 자본의 운동 양식)와 노동자들의 행동 성향을 비롯환 삶의 양식에서의 변화가 초래되고 있으며, 변화하는 이러한 정세적 조건에 따른 노조 및 현장활동가의 변화가 무엇 보다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서 활동가 조직 문제나 교육 문제가 당면한 과제로 제기될 법하다.
우리의 질문에 비추어 볼 때, 위의 김동춘의 진단은 집합적 노동운동의 역사속에서 87년 이후로 나타난 집합적 노동자의 위세 과시와 노동자들의 삶의 양식은 하나의 독특한 '노동자 문화형식'의 표현이라고 보기 힘들며, 이러한 문화형식이 기존의 것들과는 '단절된/ 탈규제된' 문화의 표현형식도 아니라는 해석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의 견해에서 보면 최근의 변화된 노동자 행동 성향과 삶의 양식들을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 문화형식의 표현으로 보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된다.
다른 한편, 김동춘의 견해에 따르면 한국의 정치 경제적 주변성이 노동운동 자체를 주변화시키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노동영역이 지닌 주변부적 한계를 노동자 정당과 산별노조와 같은 법적, 제도적 형식들을 확립함으로써 극복해야 한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 경우,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범세계적 자본운동의 맥락속에서 한국 노동운동의 주변부적 성격을 과연 일국적 시민운동속에서 어떻게 이론적, 실천적으로 용해시켜 극복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단지 구호로만 남을 뿐인 '국제연대' 운운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싶다. 이는 노동운동을 포함한 사회 운동 전체가 주변부성 혹은 제국주의적 지배질서에 대한 인식론적, 이론적 성찰이 부족했던 이유에 기인한다고 본다. 맑스가 '만국의 노동자여 달결하라'고 말했던 상황이 현실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어느 누구도 인식론적, 이론적 문제로 현상황을 진단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오히려, 복거일과 같은 자유주의 문필가에 의해 촉발된 외국어 논쟁으로 이 문제는 희화화될 수 있었을 뿐이다. 조선일보 1998년 7월에 실렸던 한영우(7.9), 이윤기(7.12), 최원식(7.20) 등의 논쟁을 참조할 것.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고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한국 노동운동에서 과연, 성, 인종, 지역주의, 종교 등과 같은 몰적 차별화의 메커니즘에 대한 진정한 관심이 있었는가? 김동춘의 문제제기는 비록 명시적이지는 않았지만, 탈신민성 (post-coloniality)문제는 매우 긴요하고 긴급한 이론적 문제제기인 듯 싶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견해는 다시금 노동조직의 법적, 제도적 형식화나 정당 문제로 퇴행함으로써, 사회운동의 제영역들이 갖는 특수성을 '시민운동'으로 조급하게(?) 혼합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이끈다. 지난 97년 1월의 총파업시, 어떠한 새로운 성찰도 없는 가운데, 노동자의 '시민적' 분노를 도구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총파업을 철저하게 타락시켰던 점을 상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주변성 혹은 주변화 메커니즘과 과정에 대한 문제를 정반대 방향으로 즉 중심과 정체성을 설정하는, 즉 또 다른 외부를 창출할 개연성을 창출하는 전략을 택하는 것같다.
) 이러한 견해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억압적 지배구조하의 노동자들은 본질적으로 해방적인 잠재성과 스스로를 보존할 수 있는 역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즉자적 계급으로서), 그것들은 언제라도 정치, 경제적 위기의 조건만 형성되면 봉기적 속성이 폭발적으로 발현될 것'이라는 기계론적이며, 본질주의적인 전제다. 여기에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못한 개인에서 찾는 지식인의 간지가 숨어 있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실패 경험은 단지 남의 이야기일 뿐인가? 파시즘의 맹아는 우리 주위에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두번째 진단은 대체로 현시기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노동자들의 변화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인 가운데, 현장에서의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다. 특히 노동자 및 활동가들의 일상생활과 조직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현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 다양한 길들에 개방적이다. 이 진단에서 특히 주목할 수 있는 점은 가족에 대한 암묵적인 강조이다. 가족은 전통적으로 산업사회학에서 강조되어 온 중요한 재생산 장치였다. 또한 신보수주의 담론에서 강조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가족을 들 수 있는데, 그것은 기존 질서의 위반이나 일탈을 새롭게 가두는데 효과적인 장치로서 복고적인 가족에 대한 기능에 초점이 두어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노동자의 경우 특히 활동가 그룹의 경우에, 가족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던 것 같다. 주택 문제로부터, 융자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나아가 최근의 능력주의 인사제도와 잔업 문제에 이르기 까지 가족 부양의 부담자로서 노동자가 전면에 부각되었던 것 같다. 87년을 거처서 90년대의 운동 경험은 부모와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결혼과 가족 형성을 통한 가장(부양자)로서의 역할과 지속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과거 70, 80년대에 '조국 근대화의 역군' 혹은 '산업전사'로 호명되었던 노동자 주체 형태와는 분명히 다른 노동자 주체 형태에 대한 확인 필요성과 활동가 조직 및 그들의 활동 방식과 내용에 대한 검토와 대안의 탐색이라는 과제를 제기한다.
본 연구에서는 설문조사 결과를 검토하여 작업장을 중심으로 맺게되는 사회적 관계선들에 초점을 두고 다음과 같은 분석요소들을 추출하였다.
)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한노정연의 현장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이루어진 노동자 실태에 관한 기존의 설문조사 결과들을 검토함으로써 분석적 이슈를 추출하고, 이에 대한 추가적인 면접 및 라이프 스토리 방법에 의해 자료를 수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주요 완성차 공장의 작업장 문화 및 노동자 정체성 형성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1995. 12~1996. 8월까지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병행하여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1996. 12~1997. 2월에 걸처 조선업체인 H중공업 울산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면접을 실시하고 1997. 6~8월에 걸쳐 활동가 경험이 있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면접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연구소와 현중노조에서 발행한 위의 책의 면접자료도 추가적으로 이용하였다.
먼저 작업장 삶 측면으로서 노동자의 일과 관련된 관계와 노조 및 회사와의 관계로 나누었다. 다시 일과 관련된 관계로서 동료, 직책자-조장, 반장 및 직장, 관리층, 노조간부와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이들에게 쟁점이 되는 분석요소로 추출된 것이 권한의 문제, 작업과 기술의 의미, 교육과 작업사이의 관계, 노동시간과 임금 등의 요소들이었다. 직장밖의 삶 측면에서 형성되는 주요 사회적 관계들은 가족구성원, 친인척 및 친구, 이웃 등이며, 이와 관련된 분석적 요소들로서 가족 관계의 양과 성격, 친인척과의 관계 유지의 성격과 갈등, 친구 관계의 성격, 이웃과의 관계의 성격과 지역사회 활동 참여등이 회사 소속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의 여부, 정치 사회적 의식 수준 등이 고려되었다.
3. 노동자 정체성과 활동가 그룹의 문화적 특징
노동자들의 정체감은 가족, 친인척 및 친구, 회사 및 관리층, 노조활동가 및 동료, 국가 및 민족 등 작업장을 둘러싼 기본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표1> 참조).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비교되고 부딪혀 갈등하고 변화하고 상황적인, 모순적으로 행동하는 육체 노동자인 나로서 스스로를 경험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자신의 희망을 하나씩 달성해 가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으며, 나름대로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하는 개별화된 종속적 주체로서 대기업 노동자이다. 동시에 집합적 노동자로서 우리사회의 민주화의 역사적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자부심이 있으나, 다소간의 비장함과 책임감을 갖는 노동운동가들과의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지닌채 가족의 생계와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는 나. 그리고 친구나 가족 및 친척에게는 자부심의 원천이 되고 중요한 삶의 터전이지만, 오직 상상속에서만 동일시될 수 있는 회사의 생산직으로서의 나. 한편으로는 존경스럽지만 자괴감의 원천이며, 최고 경영자의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권력을 휘두르는 경영진들과 대립하는 가운데 나름대로의 회사원으로서 자존심과 자긍심을 지닌 나. 이런한 점들을 통해 볼 때,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속에서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그 관계를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며, 다양하고 파편화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되는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만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독특하게 보여 주는 집단은 현장 활동가들이다. 이들은 오랜 노동운동속에서 상호 학습과 경험의 공유가 있었고, 회사나 정부로 부터 주요한 감시 및 탄압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일반 노동자 집단과는 다른 문화적 이질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표1> 작업장 사회관계와 노동자들의 정체성
주요 사회적관계들
관계의 이슈와 정체성 구성의 요소들
가족
- 회사생활에 대한 수치심과 비밀.
- 가정사 : 부모모시기, 형제부양하기, 자녀가 공부를 잘할 경우의 풍족한 교육 못시키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죄의식, 보상욕구.
직장 외부의 친인척이나 친구들
- 회사에 대한 자부심: 어엿한 대기업 직장인, 돈 잘쓰는 00.
회사 내에서의 화이트칼라나 경영층
- 많이 교육받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들의 뛰어남, 존경스럽고 대단한 회장의 선한 의지와는 달리 과잉충성하는 경영진 및 중간관리층에 대한 이상화되고, 자기중심주의적인 비판: 자존심 고양, 주요 적대자 집단.
직책자
- 같은 노동자 이면서도 중간적 위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 일밖에 모르는 성실한 사람들, 요즘들어서는 리더쉽 교육 등으로 변화하는 것을 보고 같이 얘기가 통하기도 하는 사람들.
노조활동가
- 노동자를 위해 희생적으로 노동운동하는 사람들,
- 말잘하는 사람들, 하지만 일부는 농땡이, 감정적이거나 회사에 역이용되는 사람들, 자존심 상하고 피곤하게 만드는 기피대상자들, 노조의 많은 돈을 쓸데 없는데 많이 쓰거나 쓸 수 있는 사람들
- 익명성만 보장되면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
- 없어져서는 안되는 마지막 호소처로서 노조
동료
- 나이많은 동료의 무능력함에 대한 경멸
- 고령자 및 농땡이 동료와 동일한 임금에 대한 불공정성 지각과 애처로운 느낌의 공존
- 나이적은 젊고 빠릿빠릿한 동료들에 대한 의존과 부러움,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직장 및 인생의 선배, 부.
회사
- 상상속만의 동일시 대상
- 자부심과 수치심의 원천, 중요한 삶의 터전이 되는 직장.
국가와 민족의 일원
- 산업전사, 근대화의 기수 - 상상적 허구적 동일시
- 정치에 대한 많은 관심
우선, 노동자와 활동가의 관계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감성적 측면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감성적 측면은 특히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의 물질적 측면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연령 증대 및 회사의 주택보조정책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대부분의 고령 노동자들은 주택 마련할 수 있었으며, 30대 후반에 접어드는 노동자들의 상당 부분이 융자를 통해 주택을 마련하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잔업 등을 통해 융자금을 갚는데 힘겨워하고 있었다. 또한 자가용을 통한 이동 거리의 증대와 사적인 공간(피난처?)의 확보 가능성도 증대시킨다. 가족만의 오붓한 휴일, 여가의 동경, 개인적 쾌락의 추구, 노래방 문화 등은 대중문화와 자율적 공간 확보가능성 증대와 관련해서 과거와는 다른 강도로 정서적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이러한 전통적 문화형식과는 다른 문화형식들이 서서히 등장해 감에 따라 개인주의적 행동 경향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활동가 집단의 경우는 이러한 경향과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잔업 근무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훨씬 적은 임금으로 생활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은 일주일에 한 두 차례 활동사항을 점검하고 조정하는 정례적인 모임에 참여하며 조합원들의 고충을 상담하거나 인간관계 유지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들의 일상생활이 '시간', '술', '돈', '건강'과의 '전쟁'으로 묘사되듯이, 활동가들의 하루 하루 삶은 그야말로 '숨가뿐 삶'이다.
) 현대중공업노조,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윗책, 99~110쪽
여가나 각종 문화생활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들과의 오붓한 시간을 갖기 조차 어렵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이들은 활동가 및 그들의 가족끼리의 유대를 꾀하는 경향이 크다. 그뿐 아니라 이들의 사회적 교류 및 관계망은 일반 노동자들의 그것 보다 '훨씬 넓고 언어 구사'나 가족에 대한 생각 및 자녀 교육에 대한 생각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 윗 책.
하지만, '전쟁'과 같은 '숨 가뿐' 삶속에서 주위의 다른 노동자들의 삶과 직장에서, 가정에서 비교되면서, 그리고 일상적 상호작용속에서 겪어 알게 된 일반 노동자들의 태도와 반응에 실망하면서, 더욱 중요하게는 자신이 속한 조직속에서의 갈등으로 인하여, 활동가들의 몸과 마음은 지치고 마는 측면도 드러난다.
둘째, 이념적 공세, 강압적 통제와 억압적 노사관계 관리에 따라 80년대 말의 노동운동의 비장함과 도덕적 의무감의 풍토는 아직까지는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활동가 집단과 일반 노동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중적인 효과를 갖는 것 같다. 그 하나는, 일반 노동자들은 대의에 따르는 노동운동은 그로부터 사회적, 문화적 자원(예, 권위)을 얻는 사람들(활동가)의 몫이라고 보는 경향을 낳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노동자 일상생활의 많은 비공식적이고 개별적인 기존의 사회적 공간들을 황폐화시켜 갔다. 그로 인해 예컨대 경제적 합리성(?)을 표방하는 노동조합주의적 전통이 서서히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면접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경찰인 동생과의 활동가의 가족내 이념 갈등이나 작업장내 동료들 사이 사적인 동호회의 파괴,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 소원화 등은 작업장 및 개별적 삶의 세계를 이념적으로 구획함으로써 조직내 권력 무기력감과 같은 소외를 노조에서도 동일하게 경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가족, 친구, 자녀와의 갈등에 관해서는 윗책, 100~107쪽을 참조할 것.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노조의 대회사 투쟁에 집단주의적 동조하에 적극적인 참여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단지 도덕적 의무감에 터한 '죄의식을 지닌' 많은 노동자들을 산출하였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셋째, 노동운동의 이념적 자원의 고갈, 대안적 세계에 대한 비젼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80년대 노동운동이 대학출신의 현장활동가들의 활약에 크게 의존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노동운동사에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 질 수 있는 주제일 것이다. 이는 주요 활동가들에게 일차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지만, 일반 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경험하면서 혼란스러워진 이데올로기적 상태에 대한 회의가 탈정치화로 빠지게 하여 현세주의적 생활방식에 집착토록 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추론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소비 일상생활 영역에 대한 상품-화폐 관계의 심화 현상 역시 피상적으로나마 신자유주의 정치 담론에 친화성을 보이도록 하는 것 같다.
이러한 모습은 노동운동의 이념, 조직 운영 원리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생활 세계에 까지 뿌리내려서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 형식들을 창출해 가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고 오직, 활동가 집단 내적으로 공유된 사명감과 경험과 그에 대한 상징적 의미들의 침전된다. 노동운동이 다소 추상적인 구호로만 남거나 조직적 활동 방식의 기계적 성격과 활동가들의 조급성 등이 노동자들의 구체적이고 풍부한 삶의 영역에서의 노동자적 창의성 개발 가능성을 스스로 구속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생활 여건의 변화와 회사의 통제 시도라는 조건의 탓으로 쉽게 자신의 불참("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 원인으로 돌릴 수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동운동의 대안적 비젼이 제시되지 못한 가운데 진행되어 온 노동자 정치 세력화 논의 역시 구체적이지 못하였고, 조합원 대중들의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주요 상급 단체 노조활동가들에 의해 거의 일방적으로 추진되어 온 정당 건설 활동은 철저하게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역시 못 믿을 사람들이 하는 것").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자는 관망자적 평가 태도가 일반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많은 활동가나 노동조합 상층 간부들이 다물 교육, 국가 경쟁력 담론 등 민족주의, 애국주의적 노동운동 담론을 자연스럽게 동일시하는 견해들에 대해 개탄해 하며 노동자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활동가들의 목소리가 크다. 회사의 노사관계 통제 전략이나 감독직 및 노조활동가들의 다물 교육과 외국 시찰 경험 그리고 고충 처리 방식의 일선화(노조의 배제) 등은 노조나 활동가들의 작업장 영향력의 현격한 약화 추세와 어느 정도 상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활동가들의 반응은 "희생의 자세", "무지한(미운)대중관"으로 나타나고 있다.
) 1996년 12월~1997년 1월의 H중공업 교육위원 간담회 자료.
노조에 대한 조합원들의 광범한 비판 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점이나 동료 비난 등은 단지 회사의 관리적 통제 시도에 기인하는 것 뿐아니라, 노조의 관료적 활동 방식이나 활동가들이 보여 왔던 엘리트주의적 방식이나 분파주의적이며 도구주의적 노조 정치에서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원들의 행동 및 가치, 태도의 교육을 강조하는 활동가나 노조 간부의 경향은 노조 역시 경영층과 유사하게(동형적으로) 작업장 권력 체제의 구축과 권력의 작동에 요구되는 기술, 즉 노동자 주체 형성 및 정체성 변화에 대한 강한 관심을 보여 준다.
4. 결론에 대신하여
1) 공통적 특징들
사례 작업장 노동자나 활동가들 역시 작업장내 사회적 관계와 관련된 주요 이슈들에서 다른 작업장에서 확인한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육체노동으로 부터의 탈피 욕구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었으며, 가족 구성원들에게 자신이 수행하는 일을 은폐하고자 하는 수치심이 비교적 적었다. 이 점은 사례 작업장 노동자들의 과거 파업투쟁의 경험에서부터 온 결과라고 볼 수 있으며, 노동과정의 위험성과 노동강도의 세기가 다른 점, 그리고 교육수준이 비교적 낮은 점등으로 어느 정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권한 수용과 관련된 책임감, 불안 및 공포 의식, 거리감이나 소외 정도에서는 다른 작업장들과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작업장이나 공통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항으로는 (1) 일의 내용과 무관하게 육체 노동자들이 화이트칼라 노동자들과 비교될 때, 강한 남성적 이미지로 자신을 표상하려는 경향이 드러나며, (2) 일과 관련된 측면에서나 가족과 관련해서 책임감 혹은 성실성이 노동자들의 대인적 판단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3) 나이가 많을수록 축적된 부나 세상사는 나름의 요령을 자존심 공양의 중요한 원천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4) 노조의 불가피성이 강조되는 동시에 회사와의 상상적 동일시가 (혹은 양가 감정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 등이다.
2) 활동가 집단과 문화적 권위
사례 작업장의 노동자들에게 과거 노동자 투쟁의 상징성은 불균등하게 각인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명성이 있게 한 귀중한 투쟁 경험으로 의미 부여되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동료들 사이의 인간관계의 황폐화를 야기시킨 사건으로 받아들여 지기도 한다. 활동가들이 강조하듯이, 집회시나 활동가들에 대한 반응에서 드러나는 경향을 통해 추론해 보건대, 생활주기의 변화와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일반 노동자들의 감성적 차원에서의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며, 이에 따른 감수성에서의 변화 역시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활동가들의 일상 생활은 일반 조합원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일상적인 감성의 맥락은 우리가 체험한 것들에 색조나 음색 혹은 결을 부여하고, 이에 따라 우리의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며, 이데올로기의 효과에도 영향을 미친다.
) 이에 대해서는 Grossberg L.(1992), We gotta get out of this place: Popular conservativism and postmodern culture, New York: Routkedge.
이렇게 본다면, 활동가들의 문화적 형성을 지배하는 감수성은 대중문화와 사회의 지배적 질서에 동화되어 가는 일반 노동자들의 그것과는 점점 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활동가들의 실천이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과거와는 다른 접점을 형성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일반 노동자들에게 활동가들의 희생은 더 이상 희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의 할 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문화적 자산의 인정) 스스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활동가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일반 노동자들이 삶에서 감성적으로 마음을 쏟는 중요성의 순위가 활동가들의 그것과 너무 크게 차이가 나게 된 점이 아닐까? 과거 엘리트적인 활동가들의 실천들이 계속해서 분절해 들어갔던 노동자들의 삶의 흐름은 '기표의 흘러 넘침'으로 인하여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남은 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지배질서하에 전개되는 '과정들' 뿐이 아닌가?
) 크리스테바(J.Kristeva)는 현대 자본주의는 더이상 도덕적 가치나 사회적 규범에 의존하지 않고, 자본 자체의 운동 '과정을 통한 과정의 재생산'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비록 제3세계의 경우는 여전히 강제적 법이나 규범,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로 특징지워지는 서구 자본주의의 경우는 더이상 그러한 것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발적 주체형태들에 대한 유혹으로서, 연루의 과정을 통해서 적극적이고 생산적인 방식으로 노동력을,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J.Kristeva,(1984),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Y.:Columbia Univ. Press), pp.16
3) 활동가 집단의 위상적 관계
사례 작업장의 활동가 집단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실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놀랍고도 주목할 만한 점은 활동에 대한 그들의 강렬한 투심(投心. investment)이다. 비록 엘리트적 문화의 코드에 의해 분절되고 각인되었을지언정, 그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자신들의 프로젝트와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고자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데올로기적 투쟁속에 특별하게 감성적 효과를 각인하고자 노력하게 되며, 그 투쟁의 효과들이 형성하는 장속에서 활동가로서의 감수성을 공유하고, 다른 문화적 감수성들과 접합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일상적 실천들 속에서, 그리고 주요한 사건들과 관련해서 형성된 문화적 감수성들이 침전된 장은 그 효과로서 활동가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권위와 문화적 자산을 갖게 한다.
) Grossberg L.(1992), 윗책 그리고 신병현(1995), 「'현장'과 노동자 문화정치」, 『현장에서 미래를』,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2월, 5호.
이들에게 드러나는 엘리트주의적 특성, 남성적 의리와 권력 지향성 및 종속성 등은 변화된 조건하에서 이제는 활동에 투심하게 만드는 힘인 동시에 벽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들이 스스로 구성요소가 되어 형성한 조직의 층들은 이제 이들의 활동의 힘과 감성적 맥락을 가두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산별노동조합의 건설' 혹은 '조직의 보존'과 같은 구호들 속에서 은폐된 것은 현장활동가들 및 노동자들의 욕구를 집합적 형태로 분출시키고 발화하는데 장애로 작용하는 벽들이다.
) 현장활동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시기 주요한 장애는 노동자들의 자발적이고 집합적인 요구를 가로막는 민주노총에 반대해야 한다는 역설적 현실이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창립 3주년 심포지움 자료집을 참조할 것. 곽탁성(1998), 「노동운동의 계급적, 정치적 주체형성을 위하여-계급적 단결, 민주주의, 그리고 연대」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노동운동』,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147~182쪽
조직원리와 조직 작동 방식(운영원리)이 서사적이거나 메타 과학적이 되면, 그 조직은 위계화될 수밖에 없음을 기호학의 조직 원리가 보여 준다. 언어적 측면에 초점을 두고 보자면, 즉, 글쓰기로 표현하자면, 활동가들을 활동하게 만드는 힘은 규정할 수 없지만 사회적, 상징적, 육체적 제약을 각인하고 그것들에 의해 규제되는 물질적 육체적 흐름들인
) 쥴리아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이를 기호적 코라(semiotic chora)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J.Kristeva,(1984), 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N.Y.:Columbia Univ. Press), pp.25-33
반면, 노조운동사의 강조와 같은 희생을 강조하는 서사적(과거 지향적 이데올로기적 이야기체) 문체는 상징적 질서에의 포획이다. 긍정과 부정의 대립은 구분되어 변별적 대립 관계지만, 그 대립은 부정되어 동일화 된다. 서사구조는 가족 혹은 유사가족과 같은 구조에 의해 중층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무의식적 표상들로 에너지가 구속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제한적인 공간속에서(즉, 가족 혹은 써클이나 학연, 지연 등의 연줄조직과 같이 유사가족적인 공간속에서) 자유로운 에너지의 순환이 형성되고 반복된다. 이 글쓰기 즉, 실천은 엄격한 언어적 구조에 따르는 규범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의 가족은 실제 가족인 동시에 유사 가족적 집단이다. 이 속에서 말하는 것은 주체의 공간상의 위치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 나는 활동가다!
메타 언어적 특성은 부정을 긍정에 종속시켜 상위 차원이 지닌 긍정성속에 그것들을 봉합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새로운 대상, 그러나 접근 불가능한 대상이 설정될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위계사회의 구조이다. 성층화한(stratified) 거대 조직들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구조이다.
이와 같은 글쓰기 실천은 발화 주체의 위상적 관계를 보여주는 의미화 실천에 관한 기호학적 분류이다.
) J.Ktisteva,윗책, pp.90-106
지금까지의 발화하는 주체로서 활동가들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이 타자와의 관계 즉, 의미 작용과 관련해서 갖게 위상적 관계는 어떠한가? 조직과 활동방식, 가족주의 혹은 유사­가족주의, 그리고 인간됨의 기준을 가르는 기술이 문제인 것 같다.
4) 유사­가족주의와 종속된 주체
일반 노동자들은 물론이거니와 활동가들도 육체적, 경제적, 정치적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과거에는 다소 거리를 두었던 가족주의적 구조속으로 급속하게 재 포획되고 있는 듯하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촌에서의 빈곤과 도시 주변부 계층으로서 중산층적 안식처로서 가족의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거나, 가족으로부터 단신 이탈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단지 희망으로서만 존재해 왔던 가족의 재구성이 이제 현실화되었다. "오로지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는 꿈만을 위해서 실연당한 설움을 (극복하여) 잊으려고 미친 듯이 일하여 반장이 되었다"라는 어느 노동자의 한스런 언급에서 보여지듯이, 그리고 이제는 마누라가 억척스럽게 해서 피자 집을 차렸고 제법 장사도 되기 때문에 "구태여 감독자들 눈치볼 필요가 없다"는 어느 전직 소위원의 언급이나, "그동안 모은 돈으로 땅을 마련했고, 융자받아 집을 지어 가게라도 마련하려 한다"는 쉬고 있는 활동가의 언급들에서 가족이라는 안식처가 부각된다.
공과 사의 도식적 분리 하에, 가족은 피난처로서 표상화되고 있다. 동시에 부양자로서의 의무로 표현되는 가족 구조 속의 위치 설정은 활동가 주체의 발화를 정언적으로 규정짓는 것 같다. 술부는 문법에 정확히 따른다. 가족사의 서사적 구현 속에서 자신의 위치는 가장으로 변하였지만, 여전히 가족 삼각형에 갇혀 있다. 이 삼각형은 집단으로 회사로, 조직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듯하다. 이들의 쉬고 싶다는 표현은 '노동자 권력'으로 부터, 조직으로부터, 동료와 회사로부터의 소외의 표현일 수도 있다.
의식화된 활동가의 경우는 과학과 사상성으로 위계화하는 담론을 산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은 곧 위계적 그물망속으로 스스로를 가두는 방식이 아닐까? 조직 속에서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지식-육체노동의 분리라는 모순은 이론과 실천 속에서 언제나 이미 현실화되었고 또한 현실화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하면 도구로서 '조직'을 운영하는 '기술'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푸코를 따르자면, 그것은 규제적 자아(regulatory self) 이상으로 기능하는 자아를 기획하는 인간으로 인간들을 종속화 하는 사회적 기술이다. 그것은 인간을 통치하고 인간 행위를 바라는 방향으로 조성하기 위한 수단, 기법, 공간, 판단 체계 그리고 프로그램들의 총화이다.
) N.Rose, 윗책, pp.128-150
푸코나 들뢰즈 갸타리 등의 기술 개념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특정 부류의 사람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것이 (즉, 자유를 추구하고, 억압에서 벗어나려 하며, 개인적 권력을 추구하고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동물로서 경험하는 것), 일련의 인간 기술들(human technologies)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 푸코, 들뢰즈와 갸타리의 기술 개념에 대해서는 Deleuze G.(1988), Fouacult, Trs. G.Hand, Minneapolis: Univ. of Minnesota Press. 들뢰즈와 갸타리(1994), 『앙티외디푸스』, 민음사, 부록, 그리고 미셜푸코, 이희원(역), 『자기의 테크놀로지』, 31~86쪽을 참조할 것.
그 기술들은 인간 존재의 제 양상들(modes of being human)을 그것들의 대상으로 취한다.
) 그러한 총체의 공간적 형태에 관해서 이진경, 『근대적 시ㆍ 공간의 형성』, 1997을 참조할 것.
'신중하고 절제적인 삶을 사는 책임있는 아버지', 경영자들이 지닌 권위의 불가침성과 보상의 기대에 터한 '노동자들의 유순함'과 '성실한 노동자'와 같은 이상(ideal)들은 어떤 지식 체계와 윤리적 가치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까? 푸코나 들뢰즈 등에 의하면, 인간됨에 관한 이상과 모델들은 다양한 실천들에서 그리고 인간 행위에 관한 특수한 문제들과 해결책들과의 관계속에서 접합된다는 것이다.
특정한 개인 모델을 윤리적 이상으로 제시하려는 신경영기법들의 프로그램적 시도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경영관리자나 활동가 및 노조 간부들의 합리성의 신화 및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 감수성의 특징이나 스타일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신병현, 윗책.
한/노/정/연
#ANC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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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호 투쟁 평가서

현장에서 희망을 여는 노동자회 평가서입니다
제출용 자료와 내부토론으로 결론내린 자료입니다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사망 투쟁 보고 및 평가회 관련 제출용】
63일간의 투쟁,
누가 감히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평가에 들어가며
배달호 열사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온 몸을 불살라 죽음으로 실천했다. 그리고 63일간의 투쟁이 있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투쟁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승해야 하는가?
투쟁평가는 평가주체에 의해 그 내용이 달라진다. 더구나 그 투쟁이 전국적 쟁점을 이루고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투쟁을 바라보는 입장과 위치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따라서 배달호 열사의 투쟁은 대책위, 민주노총, 금속연맹, 금속노조, 지회, 현장조합원 등 여러 단위에 따라 각각의 입장의 차이가 있다.
배달호 열사의 분신은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충격이었지만 금속노조, 금속연맹, 민주노총 등 민주노조운동의 핵심단위에서는 조직의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배달호 열사 분신과 이후 벌어진 투쟁 상황은 현재 민주노조운동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투쟁이었다.
산별노조를 지향한다는 금속노조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일부에서는 산별노조인 금속노조였기 때문에 이번 투쟁이 가능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말에 동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2.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이었나?
배달호 열사는 금속노조 조합원이다. 그리고 손배가압류 철회, 해고자 복직, 노조탄압분쇄 등 두산중공업의 현실, 나아가 민주노조운동의 현실을 정면으로 고발하며 분신하였다.
적어도 금속노조의 건설은 기업별 노조 투쟁의 한계를 극복하여 민주노조운동의 구심을 세우고자 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투쟁의 중심은 명백히 금속노조여야 했다.
그런데 과연 이번 투쟁에서 금속노조는 주체였는가?
대책위는 “산별노조의 조직력과 집중력이 이번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향후 산별노조로의 확대 강화에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 “이번 투쟁으로 산별노조가 중요한 교섭의 당사자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고 평가한다.
무엇을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하는가?
금속노조가 이번 투쟁을 위해 비상 대의원대회, 비상총회 등 조직적 움직임이 한번이라도 있었는가?
지속적 조직동원이 가능했다고는 하지만 실제 대책위 집행위에서 지침식으로 하달되는 책임할당식 간부중심의 인원동원이 중심이었고, 대의원이든 중앙위원이든 조직적 의사결정에 따른 현장을 조직하려는 실천적인 활동은 사실상 찾아볼 수 없었다. 금속노조가 투쟁의 중심이 아니라 대책위의 지침에 따른 인원동원 책임단위로서
역할을 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금속노조가 대책위의 이름으로 자신의 책임을 떠넘긴 것은 아니었는가?
금속노조가 실천적으로 현장을 조직하는 투쟁을 이끌어가지 못하면서 대책위가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것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히려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거나 참가조직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나가지 못하고 집행위 중심의 정치적 협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구조로 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현재의 금속노조가 안고 있는 조합원들의 무관심 ,금속노조 제일주의 등 많은 문제들을 상층부 중심의 교섭력 인정등으로 해결해보려는 조직형식주의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연대투쟁에서 모범을 보여준 투쟁인가?
이번 투쟁은 일관되게(?) 투쟁을 회피하고 협상에 의지하는 투쟁이었다. 투쟁의 주체였던 두산중공업지회는 투쟁을 철저히 외면했다. 결국 지역, 전국의 활동가들이 대리투쟁을 했다는 평가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자발적 연대가 이루어지지 않고 공식적인 지도부지침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며 누구도 책임의 문제를 비껴가려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총연맹을 포함한 각 조직에서 내부적으로 조직적 참여, 대중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노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월 18일 투쟁에서는 지도부의 노력과 대중들의 열정이 나타나 연대투쟁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연대투쟁의 에너지를 형식적 투쟁의 압박용 전술로만 받아들임으로서 이후 현장을 조직하기 보다는 동원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곧 일천 결사대 철회의 결과로 연결되었다.
결국 금속노조와 대책위, 민주노총의 지속적인 협상중심의 합법적인 기조는 사실상 연대투쟁의 진출과 확산을 막았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손배가압류 총파업 결의, 강력한 연대투쟁을 결의했던 일천결사대 투쟁을 하루 전 날에 타결을 기정사실화 한 지도부에 의해 취소된 사건 !
4/2 총파업의 철회에서 발생한 조직적 혼란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3월 11일 정오까지로 협상 시한을 분명히 정해 놓고 1천결사대 투쟁에 임했는데, 노동부장관이 내려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러한 원칙을 완전히 저버렸으며, 당일 밤 늦게까지 아직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1천결사대는 이미 취소하는 것으로 연락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연 그러한 결정을 한 단위는 어떤 단위인가? 타결도 되지 않았는데 타결이라고 보도한 연합뉴스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는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11일 밤 10시 일천결사대를 취소해 놓고 다음날 7시 합의할 때 까지 협상에 매달리지 않았는가?!
결국 일천결사대 취소사건은 두산 자본 측이나, 정부 못지않게 대책위, 금속노조가 얼마나 연대투쟁의 확산을 두려워 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즉 대책위는 일천 결사대를 통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섭의 압박용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사대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사대의 위상과 역할, 활동내용 등에 대한 조합원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인원할당식으로 지침이 내려왔다. 그나마 현장에서는 일천 결사대를 열심히 조직하고 있을 때, 지도부에서는 조합원 대중과의 약속은 외면하고 협상용 카드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4. 누가 감히 "그래도 결과는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이 상황에서 이 정도면 잘한 것 아닌가?”에 대하여
우리가 배달호 열사 투쟁평가 할 때 많이 나오는 말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상황이란 것이 무엇인가? 두산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의 투쟁동력이 없는 상황을 말한다. 현장의 투
쟁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버텨서(?) 협상을 이끌어 낸 것이 대단한 성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산중공업에 투쟁동력이 없었는가? 우리는 배달호 열사 분신한 후 며칠간 수백 명에 달하는 현장의 조합원 동지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집회에 참석했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왜 시간이 지나면서 투쟁의 현장을 외면하게 되었는가?
가장 큰 이유는 두산중공업 지회 집행부가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산중공업은 이후에 폭로된 불법 사찰에서도 드러나듯이 현장조합원들은 엄청난 감시와 탄압의 한복판에 있었다.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현장순회조차 제대로 안하는 집행부, 열사의 시신이 공장 안에 누워있고, 사측의 온갖 회유, 협박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제대로된 파업지침 조차 내리지 않는 집행부, 현장의 감시와 탄압을 뚫고 집회에 참석한 수백 명의 조합원들에게 이런 두산중공업 지회는 어떻게 보였을까?
그리고 이에 대해 금속노조는 지회 집행부가 문제인데 어떻게 할 수 있나며 투쟁의 책임을 미루었다. 뿐만 아니라 금속노조는 대공장인 지회집행부에 대해 올바른 비판조차 제대로 못하고 눈치보기식의 행동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두산중공업 지회가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회피적인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나가는데 방조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이 상황”이다.
결국 투쟁동력이 없었다는 식의 두산중공업 상황평가는 배달호 열사의 분신항거 투쟁에 적극적으로 진출했던 조합원 동지들의 싹을 자르고 뭉개버린 두산중공업지회 집행부의 투쟁회피적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며, 이러한 심각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대공장 지회집행부의 눈치를 보면서 끌려다닌 금속노조 지도부의 방기를 인정하는 것일 뿐이다.
2) “이 정도면 그래도 결과가 좋은 것 아닌가?”에 대하여
이번 투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금속노조 차원에서는 그동안 금속노조를 인정하지 않던 두산중공업이 김창근위원장을 상대로 타결당사자로서 합의를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이 마치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이 그동안 산별노조에 갖고 있던 불신감을 상당부분 해소하게된 근거라도 되는 듯 평가하고 있다.
또 손배가압류에 대한 쟁점화와 제도개선, 연대투쟁에 모범을 보여준 투쟁,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 해고자 복직의 토대 마련, 두산중공업 현장조직력 복원의 토대마련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번 두산중공업 투쟁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개인 손배가압류는 철회되었다. 그러나 40%에 달하는 조합비에 대해서는 합의로서 가압류를 인정하여 노동조합에서는 아직도 조합비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사측의 억지에 의해 만들어진 가압류를 노조가 합의로서 인정하는 최초의 사례가 될 것이다.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발생한 이번 분신투쟁은 사회 정치적으로 대단히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두산중공업 사측이 불법사찰, 한중인수와 처리 문제, 재벌상속의 부도덕성 문제, 부당내부거래 등 전형적인 재벌들의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결국 이러한 조건은 흔히 나타나는 시신탈취, 공권력 투입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으며, 최상의 조건에서 투쟁에 임하게 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도 두산중공업 내부의 투쟁동력을 세워내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사측과 정부에 대한 협상에 매달리고 그 결과 조합비 가압류 인정, 해고자 일부분만 복직, 불법사찰 등 명백히 드러난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재발방지 대책 등이 없는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과연 무엇이 그래도 괜찮은 결과란 말인가?
18명의 해고 동지들 중 5명의 복직합의가 과연 성과인가?
무엇을 근거로 두산중공업 현장 조직력 복원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두산중공업 사측에서 금속노조 위원장을 파트너로 인정해서 합의서에 같이 서명해 준 것이 그렇게도 자랑할 만한 것인가?
5. 결론에 대신하여
우리는 지난 60여 일간 눈물겨운 투쟁을 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너무 초라해 허탈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확인했다. 두산 자본, 그리고 현 정권이 기를 쓰고 배달호 열사의 투쟁을 축소, 은폐시키려 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워던 것은 바로 뻔히 보이는 그들의 작태를 철저히 부숴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투쟁 과정에서 현재 민주노총, 금속연맹, 금속노조 지도부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확인했다. 철저히 깨져버린 비참한 투쟁을 “산별노조의 위력을 보여준 투쟁” “연대투쟁의 모범”으로 미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담함을 느낀다. 결국 민주노조운동의 미래는 현장에서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다시 한번 힘차게 투쟁의 출발을 선언해야 한다.
63일간의 배달호열사 투쟁 평가
1. 배달호열사는 왜 분신하였는가?
1)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손배가압류
열사의 죽음은 단지 두산자본의 악랄한 노동탄압에 의한 것이 아니다. 노동현장에서 노동자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속에서 총자본이 휘두른 서슬 퍼런 현장통제의 칼날이 열사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한국중공업이라는 공기업이 민영화되는 것은 자본의 입장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두산으로 민영화되지 않았거나 설사 공기업으로 유지되었다고 해도 구조조정을 피할 수는 없었으며 현장통제의 강화도 필연적인 것이다.
구조조정에 의한 현장통제 강화는 개별사업장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다. 정권은 언제나 그래왔지만 IMF를 기점으로 자본의 이해를 노골적으로 숨김없이 대변하며 구조조정의 선봉대로서 노동자를 탄압해왔다. 나아가 입법부, 사법부는 물론이고 언론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흐름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져 나갔다.
이러한 것들이 두산중공업에서 현장통제, 블랙리스트, 징계해고, 구속수배, 손배가압류, 식당하도급화, 사택매각 등으로 나타난 것이며, 이는 열사의 유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번 투쟁에서 손배가압류는 사회쟁점으로 떠올랐다.
손배가압류는 멀리 무노동무임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무노동무임금은 파업에 대하여는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자본의 논리로서 87년에서 89년으로 이어지는 노동자투쟁속에서 노동자들의 파업대오를 분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임금도 없다'말은 다시 말하면 '임금은 노동의 댓가이다'라는 것으로 당시 전노협의 임금인상 투쟁의 기본논리였던 '임금은 노동력의 댓가'라는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후 자본은 무노동무임금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임금만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파업기간에 대한 손실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로 파업기간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초기에는 조합간부에 대해 손배청구를 하였지만 나중에는 노동조합과 조합원을 직접겨냥하기 시작했다. 손배소송에 이은 가압류는 법과 제도가 얼마만큼 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무노동무임금에서 손배가압류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자본은 노동자들에게 철저히 자신들의 논리와 통제에 따라
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단결투쟁과 파업을 통해 쟁취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며 생산성향상과 노동자간 경쟁을 통해 자본에게 인정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손배가압류는 단지 법과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의 단결투쟁을 저지하려는 총자본의 전술로 봐야하며, 손배가압류에 의해 빼앗긴 노동자의 생존권과 파업권은 제도개선으로 되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총단결투쟁과 총파업투쟁을 복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2) 민주노조운동의 대응
이번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민주노조운동은 심각한 자기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열사투쟁 기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스스로 '죄인'이기를 자청했다. 하지만 죄값은 개인이 받을 수 있어도 조직에 대한 평가 없이는 과연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는 되돌아 볼 수 없다.
열사가 분신으로 항거한 것은 장엄한 투쟁이었으며, 한 사람의 투사가 이 사회속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개인적 투쟁의 최후수단이었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의 투사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을 만큼 조직적 투쟁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병폐가 노동자에게 어떠한 고통을 주는가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것이 이번 열사의 죽음이었다면, 동시에 열사는 민주노조운동속에서 그러한 상황을 뜰고나갈 어떠한 조직적 투쟁의 전망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을 제기한 것이다.
(1)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통한 구조조정분쇄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비록 결과는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에 의해 왜곡되었지만, 96년 12월 노동법날치기 통과 당시 총파업투쟁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항한 투쟁은 총파업투쟁을 조직하지 않고서는 그 동력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작년 발전노조투쟁 당시 4/2 총파업투쟁 철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민주노총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저지시키기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투쟁현장으로부터의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그 결과 임원진 사퇴라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총파업이 철회된 이후의 상황은 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에 대항한 노동조합의 투쟁은 단일한 대오를 형성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본의 분리전술에 따라 각개격파를 당할 수밖에 없다. 전국의 모든 구조조정 사업장은 단위노조, 지회의 고립된 역량으로 구조조정 싸움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년 두산중공업 지회의 47파업에서 두중 노동자들이 감당했어야 할 그 투쟁의 무게가 민주노총의 4/2 총파업 철회와 과연 무관한 것인가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2) 금속노조의 조직형식주의적 전술배치
작년 집단교섭 당시 두산중공업은 집단교섭에 불참하였다. 그렇지만 경남1지부의 경우 집단교섭이 성사된 것으로 보고 두산중공업 지회만 남겨둔 채로 집단교섭을 진행하였다. 집단교섭과 대각선 교섭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고 투쟁이 형식적 배치로 나아갔다. 금속노조 전체적으로 그렇게 잡아나가게 되었고, 자본은 지회에 대해 더욱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집단교섭과 투쟁은 결국 지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집단교섭은 궁극적으로 산별교섭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집단교섭, 산별교섭의 의미는 무엇인가? 단지 올해나 내년에 얼마만큼 많은 사업장에서 사측이 교섭대표를 파견했는가를 기준으로 삼거나 교섭 테이블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산별교섭이 노동자들의 계급적 총단결을 위한 것이라면 현시기 집단교섭은 금속노동자의 단결투쟁을 조직화해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작년 집단교섭의 경우, 금속노조 차원에서 집단교섭이 성사되었다는 형식적 성과를 남기는 것에 무게가 실리면서 두산중공업지회처럼 철저히 고립되어 집단교섭에 응하지 않는 사업장에 대한 타격투쟁이 형식적 배치로 머물렀다. 이런 상태에서 여타의 사업장은 집단교섭을 진행해버리고 이 집단교섭마저도 원칙도 없이 대각선교섭과 병행함으로써 애초에 상정하였던 원칙과 의미를 살리지 못했다.
즉, 집단교섭을 통한 금속노동자 단결투쟁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투쟁을 펼쳐나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원칙도 없었고, 투쟁의 계획도 부재하였다.
두산중공업 지회의 경우, 작년 47파업이 투쟁의 전술적 측면에서 올바랐는가 잘못되었는가는 이와 같은 금속노조 전체의 문제점이 우선적으로 지적된 속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즉, 금속노조가 투쟁의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현장동력이 떨어져 있는 두산중공업 지회가 과연 '자본과 금속노조의 대리전이다'라고 얘기되었을 정도의 투쟁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가의 문제가 평가될 필요가 있다.
(3) 두산중공업지회의 현장동력 부재
두산중공업 내부적으로 보자면, 이후 통합지도부가 탄생하였으나 임단협 타결안에 대해 뚜렷한 평가도 되지 못하고 당위적인 통합지도부의 틀속에서 그 결과는 결국 받아들여지게 됐다. 반면 임단협 타결안에 대한 문제의식은 완전히 묻혀버리게 되었다. 공기업하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탄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고민도 부재하고 민영화에 대해 그 투쟁을 평가하고 반성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장은 그야말로 얼어붙어 있었다.
한편, 현장활동 부재의 문제는 두산중공업 지회의 문제만은 아니며 대부분의 민주노조가 현시기 공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일부 대공장의 경우에는 대의원의 반 이상을 사측에서 장악한 상태이다. 두산중공업 지회의 현장동력의 문제는 두산중공업 지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민주노조 운동의 현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비롯한 모든 민주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투쟁으로 돌파하겠다는 분명한 계획을 가지지 못했으며, 이러한 점에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열사는 어떠한 전망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2. 투쟁의 과정과 타결에 대한 평가
1)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싸움이었다.
이번 배달호 열사투쟁은 현장을 조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소식지, 분향소 같은 작은 것에서부터도 노력이 없었으며 투쟁의 기간 중에 지역에서 투쟁의 조직화를 위한 대의원대회도 없었으며, 이미 열사투쟁과 무관하게 계획상에 있었던 통합대의원대회에서 안건을 첨가하는 정도에 머물렀을 뿐이다. 중앙차원에서도 대의원대회 같은 책임성 있는 회의체계를 통한 조직화로 가지는 못하고 전국지회장결의대회로 대체하였다. 물론 여태껏 지역에서 볼 수 없었던 지역동지들의 철농참가는 성과로 평가되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간부들 선에서 머물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조합원들을 참여시키기 위한 현장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지역연대가 간부중심이 철농으로 배치되면서 현장 조합원들을 연대투쟁으로 이끌기 위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철농마저도 초기에 비해 이후에는 거의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은 대책위가 이번 싸움을 현장을 조직하여 그 동력으로써 투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해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정권교체기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도 노동부장관의 직접중재에 대해 '한편으로는 이번 두산 중공업 문제에 대한 계속적인 정치권에 대한 입장전달 및 조직화가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 내었던 상황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꿈적도 않는 악랄한 두산을 상대로 현실적으로 물리적인 투쟁방법이나 역량을 통해서 상황을 협상국면 돌파해나가는 것은 여러모로 어려움이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뒤가 거꾸로 되어 있다. 지역만 놓고 본다고 했을 때도 현장을 조직하려는 계획과 의지가 있었는가를 분명히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 시신사수투쟁이 이루어졌다는 것만으로 이에 대한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다.
이번 투쟁의 중요한 문제는 두산중공업의 현장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였다. 장례식에 조합원 참석을 보았을 때 현장을 살렸다는 성과가 없다. 두산중공업 조합원들은 이번 싸움은 금속노조가 대신 싸웠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데 향후 실제 투쟁이 자신의 문제로 닥쳐왔을 때 나설 수 있겠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그 만큼 현장을 조직하는 문제는 절대적인 과제였다. 보일러 공장 조합원들이 자발적 시신사수를 보아도 초기에 현장을 치고 들어가서 붙으면 가능성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방향성 없고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후반기에는 금속
노조 위원장, 지부 및 지회 임원, 민주노총경남본부장 등이 역할을 분담하여 현장순회와 토론회, 아침조회를 실시하였으나 투쟁의 기조가 분명하지 못한 상태 속에서 확실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노동열사 고 배달호동지 분신사망 대책위는 투쟁대책위로서 금속노조의 위상과 역할이 분명했음에도 대책위가 전국과 지역연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해 현장을 조직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두산중공업 현장과 조합원의 상태가 이번 투쟁의 한계였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2월달 들어서는 투쟁전술의 배치가 없었으며 고작 노동부 집회가 고작이었다. 노동부집회에서도 그나마 집회 참석자들은 투쟁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대책위가 이를 자제시키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후 지역동지들은 '집회참석하기도 싫다'는 식의 반응이 나오는 사태로 이어졌다.
2월에 우리가 유리한 국면에서 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정권교체기라는 국면에서 정치권을 이용하려는 방식으로 나가게 되었다. 실제로 대책위 내부에서는 노무현정권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방식으로 인해 특히 2월에 들어서서 폭로가 대책위의 주요 활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두산자본에 대한 폭로는 실제로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손배가압류에 대한 폭로는 그동안 노동자의 삶에 관심도 없던 거대언론에 크게 의존하는 방식으로 나아감으로 인해 손배가압류의 본질보다는 '어떻게 두산은 저렇게 비인간적으로 월급도 안줄 수가 있는가'는 식의 노동자 개인의 고통의 문제로만 국한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열사의 분신으로 이미 손배가압류는 여론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대책위의 중심과제는 여론화가 아니라 어떻게 싸움을 조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동정어린 시각으로 한 가장의 죽음, 경제적 궁핍, 한없는 슬픔 등을 다루었고 국민들도 마찬가지였을 뿐이었다. 손배가압류가 노동자의 생존권뿐만 아니라 노조활동의 자유, 파업권, 노동권을 얼마나 침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역대 정권과 입법부, 사법부에 의해 그리고 언론 스스로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여론은 3/12 노사합의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개인가압류는 해지하였지만, 노조활동의 자유와 관련된 조합비가압류의 문제, 해고자복직의 문제, 부당노동행위처벌에 관한 문제 등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역으로 조합비 가압류를 인정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책위의 전술이 가지는 문제점이 그대로 합의안의 한계로 나타난 것이다.
노동부 특별조사가 시작되고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기자회견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두산중공업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의 통제가 이완되어 이를 계기로 현장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 계기를 살려서 현장조직화로 나가지 못하였고, 폭로와 고소고발에 그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현장투쟁으로 가자고 했을 때 '과연 그게 가능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장을 조직하는 문제는 그 결과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되었는가와 무관하게 투쟁전술로서 충분히 가능했으며 이번 투쟁과정에서 분명히 성과로 남겼어야 했다. 대책위가 현장을 조직하지 않고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은 대책위의 조직운영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책위는 참가조직들의 민주적 의사결정구조로 나가지 못하고 집행위 중심으로 나가게 되었다. 의사결정이 참가조직과 일선실무단위들의 의견수렴과 토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정이 대책위 집행위에 의해 이루어졌다.
현장 투쟁을 중심으로 한 투쟁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는 의사결정구조보다는 정치적 협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3/20 총파업은 조합원들의 찬반투표에 의해 결정된 사안이다. 총파업의 조직화는 중앙에서 지침을 내려서 현장에서 투표를 진행한다고 그냥 통과되는 것이 아니다. 현장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을 시켜야하는 것이며 특히 작년 4/2 총파업의 철회는 조합원들에게 총파업을 설득시키는데 힘든 요소가 되어있다.
총파업을 가결시키는데는 현장에서는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있는 반면에, 타결과정은 너무나도 간단하다. 언제부터인가 총파업 결정은 조합원이 하고, 파업중단과 철회는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 않은 단위에서 알아서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민주노조의 명백한 의사결정구조의 문제를 시간이 없다는 등의 실무적인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2) 연대투쟁에 대한 평가
비단 우리지역뿐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창지역은 금속노조에서 결정이 안되면 어떠한 사업이나 활동이 집행이 안되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연대투쟁을 만들어나가는데 있어 자발적인 움직임이 축소되어가고 공식적인 지도부 지침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으려 하며, 누구도 책임의 문제를 비껴가려 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전에는 연대가 활발하던 것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합법화 과정의 시기와 맞물리면서 활동가를 키워내는 틀이 없어지고 교육도 본조에서 강사섭외까지 관장하여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고, 운영위에서 결정나면 지침을 수행하는 것이 지역활동이 되고 있다.
2월25일 경남1지부 홍지욱 조직부장에게 용역깡패들이 폭행테러를 저질렀을 때 지역의 동지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자발적으로 두산중공업 정문으로 달려왔다. 이를 계기로 지역의 연대를 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지도부의 분명한 방침의 부재로 인해 정문과 중문을 부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본관으로 올라가면 본관이 작살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두번째 문제이고, 그 날 상황은 반드시 본관으로 올라가 본관에서 철야농성을 진행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25일 상황에서 지역동지들은 두산자본에 대한 분노와 함께 투쟁을 이끌고 있는 지도부에 대한 분노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25일 대책위의 무력대응의 문제는 단순한 폭력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이미 열사의 죽음 자체가 경찰과 검찰을 비롯한 정권, 국회, 검찰, 사법부까지 동원된 총자본의 악랄한 보이지 않는 폭력테러에 의한 것이고, 두산자본은 2/24 노동부 1차중재안이 나온 후 대책위가 일정부분 긍정적인 부분을 인정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폭력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두중지회든지 금속노조든지 이러한 상황에서 무력대응을 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의 항복선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25일의 무력대응은 우리 사회속에서 총자본의 강요에 의해 노동조합이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고 필수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조합활동과 연대투쟁의 일부분인 것이다.
2/25 당일 농성장은 많은 지역동지들이 자리를 지켰고, 다음날 아침 선전전에도 대개 참석하였다. 그러나 26일 항의규탄집회가 아무런 내용 없이 본관 앞에서 조용히 마무리 집회를 하는 것으로 끝나면서 당일 농성장은 그야말로 썰물이 빠져나간 것처럼 텅비어 있었다. 형식적인 철농과 집회로는 지역의 연대를 추동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연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확고한 투쟁의 기조속에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투쟁에 임해야 한다. 2/25 상황은 새로운 연대투쟁의 조건을 형성시켜 당시까지의 투쟁의 흐름을 바꾸어줄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그러함에도 대책위가 25일을 기점으로 하여 새로운 투쟁의 전선을 조직하지 않은 것은 전날 발표된 노동부 1차중재안에 대해 대책위가 조건부거부로 입장을 정리한 것과 직결되어 있다.
조건부거부로 정리한 상태에서 그것이 '조건부거부'인지 '조건부수용'인지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으며 향후 일정을 투쟁을 재조직하는 것으로 가기에는 상황이 이미 너무나도 확연한 마무리 협상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즉, 중재안에 대해 얼마를 더 따낼 것인가에 대한 국면이었으며, 대책위로서는 25일 상황이 더 확대되었을 때 그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가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27일 창원 상공회의소 앞 집회가 취소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대책위 평가초안에서는 25일 상황에 대해 '두산중공업 사태를 더 이상 끌고 가기에는 서로가 부담스러운 무거운 과제를 정치권과 노동, 자본진영, 여론에 던져준 계기였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1천결사대에 대한 평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1천결사대 취소에 대해서도 분명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는 '가장 기본적인 노사자율협상이나 타결의 가능성은 60일을 넘기면서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노동부장관의 중재에 나서는 것을 누구도 마다할 사항이 아니었다. 노동부 역시 사전에 두산에 의사타진을 해본 결과 노조측과의 의견을 좁히거나 타결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재에 나설 계획이 없었지만 상황이 급박하다보니 아무런 준비 없이 중재에 뛰어 들었고, 노동부 장관이 생각하는 타결지점은 노조가 생각한 것 보다 낮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중재협상을 통해서 최대한 유리한 타결로 이끌어 가는
것이 현실적이었다고 판단된다. 어쨌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중재협상을 임함으로서 그나마 합의안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고 본다'라고 평가를 했는데 이것을 '벼랑끝 전술의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책위는 1천결사대를 통해 투쟁으로 상황을 돌파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섭전술상의 압박용 수단으로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결사대의 조직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결사대의 위상과 역할, 활동내용 등에 대한 조합원 조직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단지 인원할당식으로 지침이 내려왔다.이것은 중앙과 현장의 완벽한 괴리현상으로 현장에서는 1천결사대 조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중앙에서는 협상용 카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1천결사대투쟁의 조직화는 현장동력의 복구를 통한 연대투쟁의 위상을 가지면서 2003년 투쟁의 힘찬 출발점이 되었어야 했다.
또한, 작년 4/2 총파업의 철회에서 발생한 조직적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3/11 정오까지로 협상 시한을 분명히 정해 놓고 1천결사대 투쟁에 임했는데, 노동부장관이 내려왔다는 사실 하나로 그러한 원칙을 완전히 저버렸다. 지난 투쟁의 평가를 통해 정한 원칙을 스스로 간단히 뒤집어 버린 것이다.
또한 11일 밤 아직 협상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1천결사대는 이미 취소하는 것으로 연락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과연 그러한 결정을 한 단위는 어떤 단위인가? 앞서 말한 대책위의 의사결정 구조는 어떠했는가를 다시 짚어볼 수 있는 부분이다. 다음날 12일 새벽, 협상이 결렬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갔는데 11일 늦은 밤 상황에서 과연 1천결사대를 취소한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타결됐다고 보도한 연합뉴스나 타결되지도 않았는데 타결될 것으로 보고 1천결사대를 취소한 것이나 무엇이 다른가?
3) 교섭의 비민주성
대책위가 구성되고 대책위의 요구가 확정된 이후 교섭의 과정에서 요구가 구체화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 요구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공유가 되지 않았다.
대책위 구성조직의 각급 회의단위서는 물론이고 대책위 실무자선에서도 공개되지가 않았다. 특히, 노동부 1차중재안이 나오고 난 이후에 대책위 내에서 조건부거부로 정리된 이후부터 노동부장관의 중재까지의 시기에서 대책위 요구안이 정리되는 과정이 전혀 공유되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동부 장관의 중재가 진행되는 도중, 지역방송의 보도에 보도된 내용조차 실제로 대책위가 그런 요구안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초기 대책위 구성시 유족의 동의, 대책위, 지역, 지회의 동의가 전제되어야 합의한다는 타결에 대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도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지역차원에서 협상의 마지노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이 없었다는 점과 노동부 1차중재안에 대한 조건부거부가 가지는 문제점에 대한 문제제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반성이 필요하다.
또한, 노동부장관 중재 당시 내부 혼란으로 단일화되었지만, 협상에 있어 공식적 통로와 비공식적 통로를 동시에 가동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과연 비공식 라인은 무엇이었으며 그것의 필요성은 있었는가? 비공식 접촉에서는 무엇을 다루었는가? 마찬가지로 비공식적 정치권과의 협상 등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민주노조에서 요구안의 확정과 교섭, 타결과정은 철저히 공개되어야 한다. 이번 대책위의 협상과정의 비공개는 민주노조의 원칙에 따르면 완전히 불신임 대상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4) 합의안에 대하여
합의안은 여론과 정치적 협상에 의존한 싸움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개인손배가압류는 해결이 되었으나 여타의 조합활동의 자유와 파업권, 노동권의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대책위 평가 초안에서는 이번 투쟁의 성과로서 개별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을 성과로 보면서 '쟁의권의 정치사회쟁점화와 제도개선'을 이끌어 냈다고 평가하고 있다.
방용석 전 노동부장관의 합법파업발언은 부하직원인 노동부 관료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했으며 이번 합의에
서 47파업에 대한 합법여부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 단지 방용석 전 장관의 합법파업발언을 놓고서 '제도개선으로 이어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이번 열사투쟁을 통해 개별사업장에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은 수많은 사업장의 손배가압류가 실제로 무력화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물론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킨 것이 성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열사투쟁이라는 틀 속에서조차 개별사업장의 조합원 개인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철회시켰을 뿐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이번 열사투쟁속에서 한번의 토론회를 빼고는 전국의 수많은 손배가압류사업장의 연대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 더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며 사실 이 한계가 더 중요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또한 대책위 평가초안에서는 '해고자복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해고자 18명이 모도 부당해고자이고 특히 3-4명 정도는 이번 투쟁이 아니었어도 해고무효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충분히 복직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고자 복직의 문제가 투쟁의 전 과정에서 일관되게 쟁점으로 제기되지 못하고 마무리 시점에서야 논의가 되었다.
따라서 단지 합의안에 5명 복직을 명시했다고 향후 해고자 복직의 문제가 중요한 쟁점을 부각되지는 않으며 '해고자 복직의 토대 마련'이라는 평가는 형식적 평가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책위 평가 초안처럼 '비록 합의내용은 부족하였지만 그 동안의 투쟁으로 인해 현장의 자신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였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야말로 형식적인 문구에 불과하다.
과연 63일간의 투쟁을 돌아보았을 때, 어떠한 토대가 형성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얘기되어야 한다. 두산중공업 현장동력의 문제는 일관되게 제기된 문제였으며, 타결에 즈음한 시점에서 진행된 두중지회 파업에 확대간부를 포함하여 60여명이 참석하였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이번 투쟁을 계기로 소위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번 투쟁에서 가장 정치적 성과를 얻은 것은 바로 노무현 정권이다. 노무현 정권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자신의 기반으로 한다. 자칫 배달호 열사의 투쟁으로 인해 그러한 정치적 성격이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폭로될 수 있는 위기에서 정치적 협상을 통해 원만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낙관론이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노무현 정권 하에서 민주노총이 단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투쟁전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3. 향후과제
열사부인께서는 금속노조에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는지, 왜 금속노조의 분명한 방향설정을 하지 못했지를 평가해봐야 한다.
대책위 평가초안은 '이번 투쟁을 계기로 인적 물적 집중력, 지속성, 그리고 조직력에 있어서 산별노조의 위력이 발휘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를 구체적 자료와 사실, 지역의 동지들의 평가를 가지고서 거론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대책위 평가 초안은 '특히 두산중공업 지회의 경우 조합원들이 그동안 산별노조에 대하여 갖고 있던 불신감은 이번 투쟁을 통하여 상당부분 해소되었다고 판단된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두중지회 조합원들이 금속노조와 대책위에 대해 이전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일부분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신 싸워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지 계급적으로 함께 단결하여 함께 투쟁하는 '산별노조'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은 아니다.
오히려 열사투쟁이 끝나고 산별 확대보다 반대현상으로 가고 있다.
산별노조를 표방하지만 열사부인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금속노조 위원장이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위원장이 권한을 가졌다하더라도 지침을 하달했을 때 현장동력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중앙에서도 힘을 쓸 수가 없다. 지금 상태는 현장을 강화하는 것보다는 지침을 내리고 그
지침을 수행하는 것으로 활동이 되고 있다. 지금 구조로서는 지회는 중앙에 대해서, 중앙은 지회에 대해서 서로 핑계를 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현장이 강화되어야 지역이 강화되고 지부가 제대로 설 수 있다. 각 지회가 어떻게 강화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지부와 지회의 역할에 대한 고민속에서 사업의 성과가 축적되고 훈련되지 않는다면 지부를 제대로 세울 수 없다. 이러한 속에서 금속노조를 현장동력에 기반한 노동자의 투쟁조직으로 새롭게 재편하여야 한다.
또한, 금속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사업장과의 연대의 문제에 있어 금속연맹과 금속노조의 역할과 임무에 대해 공동투쟁의 조직화라는 관점에서 의견을 모아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현장에서는 현장을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자발적 모임들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동시에 상호 연대와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한편 이번 투쟁을 통해 향후 민주노조운동이 노무현정권에 대한 분명한 입장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제기되었다. 열사투쟁을 평가해볼 때 민주노조운동 내부에서도 노무현 정권에 대한 기대가 분명히 있으며 이것이 정치적 협상으로 가는 판단의 근거이기도 했다. 노무현 정권은 분명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그러한 노선에서 한 발치도 물러섬이 없으며 이번 열사투쟁에서 과연 정권이 허용해주는 선 이상을 넘어섰는지 평가를 해야한다. 이것이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면 향후 5년간의 민주노총의 투쟁은 단일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분쇄투쟁전선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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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간부 형성 연구

노동조합단체 상근간부의 형성에 관한 연구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오건호 (서울대학교 사회학 박사)
인수범 (서울대학교 사회학 박사과정)
1. 문제 제기
1990년대에 있어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은 그 조직규모가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정치적 위상과 조직체계에서는 발전적인 변화를 이루어 왔다. 특히, 최근의 경제위기 국면 속에서 경제구조 재편(예: 금융·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재벌개혁)과 이에 따른 고용감축의 현안문제들에 직면하게 된 노동조합들은 기존 기업별 조직체계에서 비롯되어지는 실천적 대응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보다 집권화된 산별 조직에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노동조합운동의 주체적 지형에 있어 그 실천적 대응의 비중과 중요성이 개별 기업 차원에서 산별 또는 전국 수준으로 점차 옮겨가고 있는 것을 확인케 된다. 초기업수준의 노동조합단체가 차지하는 위상이 더욱 높아지는 만큼, 이들 상급 노조단체를 이끌어가는 상근 간부들의 역할이 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본 연구는 초기업수준의 상급노동조합단체들에 종사하는 상근 간부역량에 대한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구체적인 실태분석을 하고자 한다.
) 이 논문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주관하에 진행되고 있는『한국 노동조합의 간부역량 강화방안』의 연구 일환으로써 작성되어진 것이다.
2. 노조 상근간부에 대한 기존 연구문헌 검토와 개념적 유형화
노동조합의 상근간부들(full-time officers)에 대한 고전적 논의는 19세기 말에 노동조합조직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하였던 웹부부의 저작에서 찾아질 수 있다(Webbs 1894; 1897). 웹부부는 전업의 노동간부층의 등장을 통해 노동조합 내부에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갈등에 주목하여 지적하고 있는 바, 노동조합의 운영을 위한 상근체계가 도입됨에 따라 조합원의 의사를 반영하는 '민주주의(democracy) 원리'와 조직 활동 및 기능의 '효율성(efficiency) 원리' 간에는 근원적인 모순-긴장관계가 조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조 상근간부들에 대한 비판적 논의를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온건한 시각을 대표하는 다원주의 노사관계론과 급진적 시각을 대표하는 맑스주의적 노사관계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다원주의 노사관계론에 따르면(Donnovan 1968; Clegg 1976: Batstone 1988), 노조 상근자들은 교섭과정에서 고용주와 잦은 접촉을 가지며, 고용주로부터 파트너쉽을 인정받는 것이 자신의 권한 강화에 중요하기 때문에 고용주와 타협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한편, 맑스주의 노사관계론에서 제기되는 노조 상근간부에 대한 비판은 보다 근원적이다(Cliff 1971; Kelly 1988). 맑스주의 연구자들은 다원주의 노사관계론이 인정하는 노조 상근간부들의 제도적 기능, 즉 조합원의 여러 이해를 조정하는 역할과 사용자와의 협상을 통해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역할 등에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이러한 상근간부의 제도화된 역할 수행을 통해 일반 조합원들이 지니는 계급의식의 단초가 희석되어 왔다고 비판한다. 또한, 사용자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지위가 보장되기 때문에 노조 상근자들은 사용자와의 타협에 적극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신의 조직권력에 연연해 왔다고 주장한다.
표 1: 한국 노동조합 간부들에 대한 유형화>
유형화 기준
유형적 특성
노조 조직 체계상의 위상
전국 중앙조직의 간부층 (예: 양노총 및 지역본부)
산별 연맹 또는 산별노조 및 산하 지역본부의 간부층
단위 기업별 노조의 임원 및 상집간부
작업장의 현장간부층 (예: 대의원 및 소위원)
근무형태
전임·상근
반전임·반상근
비전임·비상근
선발 경로
선출직(예: 노조 임원 및 대의원)
채용직(예: 상급단체의 집행간부 일부와 단사 노조 둥의 사무보조원 등)
산하조직 파견직 (예: 상급단체의 집행간부 일부)
지명직(예: 단사노조의 상집간부와 상급단체의 정무직·지도위원 등)
자발적 참여형 (예: 단사 노조의 소위원 및 자원봉사자 등)
급여지급형태
노동조합 지급 (예: 채용직, 해고자출신의 조합 임원·상집간부 등)
소속 회사 지급 (예: 파견직 및 상급단체 파견인정의 임원, 단사노조의 임원·상집간부)
무보수 활동가 (예: 대·소위원 및 자원봉사자 등)
출신배경
현장 노조(노동자)출신
학생운동(지식인) 출신
학생운동과 단사노조 경험 보유
전문적 기능 보유
활동지향성
활동가(activist)형
지도자(leader)형
실무전문가(expert)형
관리자(managerialist)형
기업별 조직체계에 기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에 종사하는 간부층에 대해 주요 활동 특성 및 양태를 중심으로 대략 유형화해 보면 표 1>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노동조합 간부층에 대해 그 인적 구성과 활동양태의 주요 속성들을 중심으로 종합적인 유형별 분류를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노조 상근간부의 활동성향은 '계급민주주의'와 '조직효율성'라는 이론적인 이중 척도에 의해 단순히 규정되기보다는 다양한 유형범주들의 복합적 조합(combination)을 통해 다중적인 분류(multi-dimensional typology)방식으로 분석되어져야 하겠다.
3. 노동조합단체 상근간부 역량의 역사적 형성과정
1) 한국노총
한국노총의 경우, 1950년대 대한노총의 시절에서나 1960년대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에 의해 철저히 통제·보호받는 비자주적인 조직의 위상을 드러내 왔다. 그동안 한국노총의 지도부는 정권 또는 사용자와의 밀착관계 유지를 통해 정·관계로의 입신출세를 추구하는 소위 "관리자형"의 간부속성을 다분히 지니고 있었다. 한국노총 및 산하 상급단체들에서는 주요 단위노조 위원장출신인 상층 지도부 중심의 조직활동 및 운영이 이루어짐에 따라 하위직의 상근간부(일반채용직 및 조직파견직) 대부분은 단순히 보조적이거나 주변적인 역할과 기능의 실무업무("단순 실무전문가"유형)에 종사하여 왔던 것이다. 다만, 민주노동운동의 조직화가 가시화된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노총내 개혁지향의 지도부가 현장 조합원 중심의 대중적인 활동에 역점을 두는 "지도자형"으로 변신함에 따라, 한국노총내 일반 상근간부들이 차지하는 전문적인 활동의 비중과 중요성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고 하겠다.
2) 민주노총
민주노총의 경우에는 상급노조단체의 건설과정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한 다수의 학생운동 출신자들과 민주노조 조직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현장 노동자활동가들이 중앙조직 및 산하연맹조직의 상근 간부층을 형성하여 왔다. 특히, 정권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위로부터 조직된" 한국노총의 역사적 궤적과는 달리 민주노총에서는 단사노조-산별연맹-중앙조직의 결성과정이 철저히 현장 활동가들에 의한 "밑으로부터의 조직"에 의해 이루어진 만큼, 이들 활동가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있는 상근간부들이 상급단체 운영 및 활동추진에 있어 행사하는 영향력의 비중은 자못 크다고 하겠다. 또한, 민주노총의 결성에 이르기까지 정권과 사용자의 탄압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전개해온 집단적 실천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대다수 상근간부(선출직 임원 포함)들은 이념적 정치의식성과 전투적인 실천지향성을 강하게 지니는 "활동가유형"에 상당히 근접한 것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민주노총 상근간부들의 이러한 이념지향성은 그 운동노선과 실천관점에 따라 다양한 분파적 활동경향으로 계속해서 표출됨으로써 조직내 소모적인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문제요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4. 양 노총 상근간부의 경력 현황에 대한 비교
이 장에서는 우리나라 노조 상근간부의 현황과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2000년 8월 중순부터 9월 현재까지 진행하고 있는 설문조사 결과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분석하고 있다. 이 설문조사는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양 노총의 지역본부, 각 산별연맹(혹은 산별노조) 등 총 77개 상급노조단체들의 전수를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조운동에서 양 노총이나 산하 산별(연맹)단위에서 채용직으로 일하는 일반상근직 간부들은 노조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핵심적 집단이다. 이후 기업별/연맹 조직형태에서 명실상부한 산업별조직으로 노동조합조직이 전환되면 이들 일반상근직의 역할은 산업별노조 중앙의 역할이 증대하는 만큼 크게 부상할 것으로 예측된다. 산업별 혹은 일반직 전국노조가 대부분인 서구의 경우에도 이들의 역할과 한계(소위 '노조관료제론')에 관한 논의가 노동조합 조직논의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우리나라 일반상근직 간부의 직전경력에서 양 노총계열별로 상당한 차이가 발견된 것은 유의미한 시사를 던져준다. 비록 아직은 조사가 완료되지 않았고 더불어 세부적인 심층조사가 뒤따를 예정이지만, 민주노총계열의 경우 처음부터 노조운동을 위해 참여했던 의식적인 대졸자 지식인들이 일반상근직의 많은 자리를 맡고 있는 반면에 한국노총계열의 조직에서는 노동조합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이 노조활동 외부에서 채용된 상근간부가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일반상근직의 경력 차이는 양 노총계열의 활동방향 차이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변수중의 하나일 수 있다.
5. 맺음말
양 노총의 일반 상근간부들이 보이고 있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노총의 상급노조단체에 소속된 상근간부들의 신분과 위상은 공통적으로 상당히 불안정할 뿐 아니라 매우 취약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실제, 이들 상근간부들은 노동운동의 활동가로서 많은 헌신을 요구받는 반면, 직업으로서 보장되어야 할 경제적 보상과 개인 경력개발 그리고 직장생활 질에 있어서는 매우 열악한 처지에 방치되어 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급변하는 사회·경제적 환경속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노조 조직의 핵심 자원이라 할 수 있는 이들 상근 간부층의 역량 발휘가 극대화될 수 있도록 제반 여건 조성을 위한 의식적이며 정책적인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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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 조희연

광주민중항쟁과 80년대 민주화운동
-87년 이전까지를 중심으로
조희연(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1. 머리말
광주민중항쟁은 한국전쟁 이후 80년까지의 '지배와 저항의 상호작용' 속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특별한' 사실들이 복합되어 있었던 사건이었다. 80년 광주에서는 '공공성'과 국민적 성격을 표방하던 국가권력이 야만적 학살을 자행했으며, '자유의 수호자'이자 '혈맹'으로 인식되었던 미국이 '기대된' 행동을 하기 보다는 학살 정권의 지지자가 되었고, 온순하기만 하고 독재정권에 '적응'하여 지내는 것처럼 보였던 민중들이 총을 들고 싸웠던 사건이었다. 80년대의 운동은 이처럼 광주 민주항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적 진실'들을 '재해석'하듯이 끌어내어 80년대 운동의 자양분으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70년대까지의 운동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혁명지향적' 운동으로 변화되어간다.
한국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볼 때, 광주민중항쟁은 60·70년대 운동과 80년대 운동을 질적으로 구별지우는 '비약'의 계기였다. 80년대 운동은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체험적 인식·소급적 성찰을 통하여 혁명지향적 운동으로 변화되어갔다. 이 글은 광주민중항쟁이 80년대 민중적·혁명적 운동으로의 질적 비약에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였는가를 다음과 같은 작업을 통해 밝히고 자 한다. 특별히 80년대 초반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에 이르는 비합법적 논쟁 및 합법적인 운동문건 분석을 통하여, 어떻게 광주민중항쟁이 운동의 혁명적 전환의 계기가 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광주민중항쟁은 그 사건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엄청난 '잠재적 진실'을 통해 80년대 운동이 혁명지향적 운동으로 발전되어 가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 진실규명과 학살자 처벌 등 그 자체가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투쟁의 구성적 내용이기도 하였다. 이른바 광주문제는 그 자체가 전 사회운동이 투쟁을 통해서 그 해결을 '쟁취'하여야 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광주문제가 공론화되고 해결되어 가는 과정은 바로 80년대 사회운동이 자기발전을 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광주문제가 어떻게 쟁점화되어가는 지를 검토하게 된다. 그를 통해 80년대 운동이 어떻게 변화되어가는 가를 분석하게 된다.
2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유산을 투쟁대상인식과 투쟁주체 인식의 급진화라는 견지에서 분석하게 되며, 3절에서는 80년대 비합법적 논쟁 속에서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유산이 어떻게 재해석되면서 80년대의 혁명지향적 운동의 지적·의식적 기초들이 명확화되어가는 가를 분석하게 된다. 3절은 일종의 '광주의 의미를 둘러싼 쟁투'를 다룬다고 하면, 4절에서는 광주문제 자체를 둘러싼 쟁투를 다루게 되는데, 이는 광주문제가 8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핵심적 구성내용이 되어가는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다. .
80년 5.17부터 6.27까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는 광주사태, 광주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다양한 용어들이 사용된다. 이 글에서는 광주항쟁을 통해 80년대 운동이 '민중주체의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 변화되었음을 중시하는 견지에서 광주민중항쟁이라는 개념을 주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와 동시에 80년 광주에서의 양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 구속자 석방, 학살자 처벌, 희생자 보상, 관련자 명예회복 및 배상, 기념사업 등 일련의 정치적·사회적 쟁점이 사회운동권과 정치권의 중요한 쟁점으로 존재하였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항들을 포괄적으로 '광주문제'라는 표현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2. 광주민중항쟁의 지적·의식적 충격
60년대 이후 한국민주화운동을 분석할 때, 그 이념적·정치적 성격의 발전과정을 필자는 60년대=소시민적 민주화운동, 70년대='민중주의'적 민주화운동, 80년대=민중적·혁명적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한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60·70년대 운동으로부터의 80년대 운동으로의 질적 비약의 지점에 바로 광주민중항쟁이 존재하고 있다. 총괄적으로 필자는 60·70년대의 '자유주의적'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의 전환이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나타나게 되었었다고 생각한다. 즉 "80년대 전반 --- 특히 80년대에서 84년까지 ---은 70년대의 사회운동이 80년대의 변혁운동으로서 자기 정립을 해가는 과도기적 시기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80년의 정치적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자성적 평가 속에서 70년대의 운동수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운동의 주체적 조건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이 --- 비공식적 수준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분단과 6·25전쟁을 통해 단절을 겪었던 한국의 사회운동은 바로 이 시기에 60년대의 소시민적 민주화운동 단계, 70년대의 민중주의(populism)적 운동 단계를 뛰어넘어 한국사회의 총체적 변혁을 전망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혁명적 민중운동으로 변신할 수 있는 조건을 예비하게 된다."
)조희연, 1989a, "80년대 사회운동과 사회구성체논쟁", 박현채·조희연 편, {한국사회구성체논쟁} 1권, 죽산(폐업 후 한울에서 발행).
사회운동의 이러한 질적 비약은 물론 구조적으로 근거지어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60년대 이후의 종속적 자본주의화로 인한 사회경제적 모순과 계급 갈등의 현재화(懸在化)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질적 비약의 주체적 조건은 무엇보다도 80년의 정치적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소급적 반성 위에서 확보되는 것으로 보인다. 70년대까지의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바로 그 한계가 80년 봄의 패배'에 총체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라는 고민에서부터 80년대 운동의 비약과 '거듭남'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표현은 80년대 운동가들에게 광주가 무엇이었는가를 웅변하여 주고 있다. "아직도 초연이 가시지 않은 광주 영령들의 제단 앞에서 우리는 선언한다. 군부의 폭력 앞에 무수한 민주시민들이 쓰러져 간 80년 5월 광주에서부터 이 땅의 민주화운동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또 그때 흘린 피로 다져진 이 땅의 민주화운동에 살아있는 우리가 새 깃발을 드높힐 것임을, 휴전선에 있는 군대를 빼돌려 반독재 민주화를 외치는 동족에게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고 대검을 휘둘러 무수한 생명을 참혹하게 앗아간 독재정권은 반드시 민족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광주시민의 절박한 기대를 져버리고 군사정권의 민중학살 행위를 방조하고 승인했던 미 행정부의 정책적 과오를 우리 민족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전두환 군부독재타도'를 외치혀 맨몸으로 민주주의 방패가 되었던 광주민중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우리는 80년 5월의 불꽃 속에서 투혼을 안고 태어난 광주의 아들 딸들이어야 한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아, 5월 이여! 광주여! 영원한 민주화의 불꽃이여", 1984.5.19,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51.8 광주 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권, 411-414쪽.
이른바 광주사태의 핵심적인 본질은 무장군인들에 의한 양민학살과 그러한 학살에서의 한미공조, 그리고 그에 대한 민중들의 무장자위투쟁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은 신군부집권세력의 쿠데타에 대응하는 민중들의 자발적 저항이었고 신군부집권세력은 이 저항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였고, 민중들은 다시 이에 대응하여 '무장'투쟁
)'시민전쟁'이라는 개념은 이를 잘 부각시키고 있다. 안병욱, 1999, "5.18, 민족사적 인식을 넘어 세계사의 지평으로", 학술단체협의회 편, 1999, "5.18은 끝났는가", 푸른 숲.
을 전개하였던 사건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남한사회의 운동이 갖는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운동의 한계지점과 극복지점 및 발전전망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운동은 이러한 한계지점을 성찰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현실화시켜가게 되는 것이다.
광주가 제기한 새로운 인식들>
"왜 광주민중항쟁이 실패하였는가""광주민중항쟁에 표현된 70년대 운동의 한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심각하게 제기되면서, 사회운동의 주체, 인식적 기초, 대상, 동력, 방법 등에 대한 반성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반성은 크게 다음과 같은 몇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부분의 서술은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89, 앞의 글, 15쪽.
첫째, 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이 소시민적 운동관, 포퓰리즘적 운동관을 극복하지 못했으며 변혁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지 못했다고 하는 반성이다. 예컨대 억압적 국가권력에 대한 양심적 비판이나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 있었을 뿐, 정치권력의 획득이나 경제체제 자체의 변혁에 대한 전망과 의지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체제변혁적 투쟁으로 전화시킬 목적의식적 전위가 또한 부재했다는 반성이다. 광주민중항쟁이 대중들의 혁명적 진출과 변혁역량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고 할 때, 문제는 대중을 지도할 전위의 형성과 그러한 전위와 대중의 굳건한 결합 여부인데, 이점에서의 역량부족이 사회운동의 근본한계라는 것이다. 셋째, 80년 봄의 패배는 노동계급 등 주력군의 미성장에 그 근본원인이 있으므로 기층민중, 특히 노동계급의 성장과 그 정치적 진출을 가속화하는데 집중적인 역량이 투입되어야 한다는 반성이다. 즉 70년대까지의 사회운동이 주로 학생, 지식인, 일부 선진적인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중적인 계급운동이 되지 못하였으며, 주력군이 미성장한 상태에서의 방어전적 성격 이상을 띨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70년대 사회운동의 추진 동력'이 갖는 계급적 한계를 가리킨다. 넷째, 군부독재체제를 지원하는 외세에 대항하는 반외세자주화'역량이 결여되었다는 반성이다. 특히 광주사태에 대한 미국의 비호 때문에 70년대 사회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미국에 대한 소시민적 환상'이 깨어짐으로써, 광주사태는 민족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실을 극복 할 수 있는 대중의식과 주체적인 역량을 확보해내는 것이 80년대 사회운동의 핵심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다섯째, 투쟁의 대상과 관련하여, 60,70년대의 사회운동은 자유주의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기집권이나 독재 등의 용어로 정의되는 바와 같이 단순히 지배권력의 폭력성과 억압성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사항이 운동의 총체적 성격에 대한 것으로 '소시민적 운동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의 전환'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면, 두 번째 사항은 '혁명적 전위주의'의 당위성을 지적하고 있다. 다음 세 번째의 반성은 민중주의 혹은 민중주체주의 인식을 지적하고 있으며, 넷째는 반미주의로의 지향, 다섯째는 반파쇼운동으로의 지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광주를 '경험'하면서 그리고 광주를 '돌아보면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의 전환에는 한편에서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내포되며, 다른 한편에서는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내포된다.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관련하여, 전두환 독재정권을 파쇼적 국가권력으로 인식하게 되며, 나아가 그것이 대미종속적인 권력으로 인식하게 된다. 다음으로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전환과 관련하여, 노동자계급 등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이 나타나게 되며, 이와 동시에 혁명적 전위주의 인식도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된다.
여기서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바, 즉 첫째 국가권력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둘째는 미국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셋째 운동의 실천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노동운동, 민중주의, 현장노선 등)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80년대 운동이 60·70년대 운동과 결정적으로 다른 측면은 그것이 단순한 반정부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반'파쇼' 혁명운동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반파쇼주의), 반외세 자주화운동, 특별히 반미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점(반미주의), 중산층, 학생, 지식인운동에서 노동자계급 등 민중이 중심이 되는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는 점('민중'주체주의)을 들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 운동이 바로 이러한 질적 비약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래서 이 3가지 측면을 80년대 초중반 비합법적인 운동논쟁 및 문건 분석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다.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구체화되어가는 운동의 전환을 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민중항쟁 이전 반독재민주화운동
측면
광주민중항쟁 이후 반독재민주화운동
'자유주의'적 운동
총체적 성격
혁명적 민주주의운동
장기집권 군부독재
투쟁대상의 재인식
독점자본의 이해를 밀착되어 있는, 파쇼적 억압기구(반파쇼운동)
미국=민주화운동에 우호적인 '혈맹'
광주학살을 방조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반미주의)
지식인, 학생,양심적 정치인 등 범(汎)재야 중심 운동
투쟁주체의 재인식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민중주체주의)
비합법적 전위조직을 제외하고서는 문제의식 부재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지도하는 전위세력 필요(혁명적 전위주의)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국가권력의 폭력성과 종속성>
먼저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혹은 대적(大敵) 인식의 급진화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주지하다시피 광주민중항쟁에서는 신군부세력의 지시에 의하여 안보의 파수꾼인 '국군'이 양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하였던 사건이었다. 이것은 국가의 야만적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국가권력의 폭력적 본질이 양민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 속에서 투명하게 드러났고, 이는 그에 대응하는 운동의 혁명적 인식을 강화시켜 주었다.
정치학적으로 볼 때, 국가의 본질은 '일정한 영토적 공간(territoriality)에서의 폭력의 합법적 독점체(monopoly of violence)'이다
)Jessop, B., 1990, State Theory: Putting Capitalist States in their Place, Pennsylvania: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참조.
. 이 점은 근대국가라는 영토적 경계 내에서 일체의 무장력이 중앙집중적 국가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폭력적 본질은 역설적으로 쉽게 노정되지 않는다. "권력은 총칼에서 나오지만 권력이 총칼을 사용할 때 가장 약해진다". 부마항쟁은 그 투쟁을 통해 집권군부세력의 내적 균열을 통해 80년의 불완전한 민주공간을 열었는데, 그 제한된 민주공간을 부정하면서 '유신적' 질서를 재구축하고자 하는 신군부세력에 대해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했던 광주민중들에 대해 신군부세력은 전면적인 학살로 대응하였다. 역설적으로 이 학살은 국가의 폭력적 본질을 투명하게 만들고 그래서 80년대 민주질서를 향한 저항을 심화시켰고, 80년대 저항의 정신적·지적·도덕적 원천으로 작용하게 된다.
필자는 한국전쟁 이후의 분단상황에 의해 조성된 독특한 남한의 정치사회적 조건을 '반공규율사회'로 표현한다. 반공규율사회란 "내전이라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반공이데올로기가 일종의 가상적인 국민적 합의로 내재화된 동질적인 '극우공동체'"
)조희연, 1998, {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 당대, 63쪽.
라고 할 수 있다. 반공규율사회란 반공이라는 명분 하에 저항운동이 통제되고 규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저항운동의 규율은 '무장'저항의 통제와 규율도 포함된다. 이처럼 저항운동이 통제되기 때문에 국가권력은 용이하게 지배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의 저항운동은 세계 최대의 전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비무장'평화'운동의 형태로 표출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 반공규율사회적 상황은 저항운동이 규율되고 그 결과 국가권력의 재생산을 용이하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만드는 데서 더나아가
)조희연, 1998, 앞의 책, 2장 참조.
, 국가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을 규율하는 효과까지 지니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80년대 광주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현대사 속에서 국가권력은 사실 지속적으로 폭력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남한의 국가권력은 국가테러리즘과 폭력을 기초로 출현한 국가였다. 50년대 좌익잔류세력을 소탕하기 위한 이승만정권의 탄압은 가히 '백색테러리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60년대 이후에도 개별적 국가폭력(박정희 시기 동안의 숱한 위수령과 군대동원)은 지속되었다
)반공규율사회적 조건 속에서 저항폭력의 규율과 동시에 국가폭력의 규율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반공규율사회적 조건은 한편으로는 저항폭력도 규율하였지마는 다른 한편에서는 전면적인 국가폭력도 규율하였다는 것이다.
. 물론 그것은 양민에 대한 집단학살의 형태로 폭력적이지는 않았지만, 60년대 이후 군부정권 하에서 국가권력은 지속적으로 폭력적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국가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반공규율사회적 조건으로 규율되고 국가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투명하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군대는 안보를 위한 '파수꾼'으로서의 이미지를 지속시킬 수 있었다
)반공은 국가권력의 계급성과 폭력성을 잠재화하면서 국가권력의 공공적 성격, 민족적 성격, 국민적 성격을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개발독재는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전사회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성장을 지원할 정도로 '계급적'이었지만, 탈계급적이고 국민적 실체로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 그 결과 70년대까지 국가권력의 계급성과 폭력성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낮은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으로 인하여 이러한 조건은 변화하게 된다. 국가권력의 야만적이고 적나라한 폭력성은 국가권력의 본질을 투명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군부독재정권은 어떤 점에서는 '자연스럽게' 학생들에 의해 '적(敵)'으로 규정된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 12.11.
. 이것은 70년대까지의 도덕적이고 양심범적인 정부비판운동에서 혁명적 운동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각성을 동반하게 된다. 정부는 새롭게 파쇼정권으로 재정의된다. 여기서 반파쇼투쟁이 중요하게 부각되게 된다. 파쇼적 인식은 지배의 계급적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속화시키게 된다. 여기서 계급적 본질은 지배의 자본주의적 성격을 의미하고, 여기서 80년대 중반 이후 사회운동의 사회주의적 지향도 바로 여기서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폭압의 주체가 되는 국가의 폭력적 본질이 '백일하에' 노정됨으로써, 재민주화는 지배적 시대정신이 되고 그에 대항하는 민주화투쟁이 '성전(聖戰)'이 되는 정신적 전환이 나타나게 되었다
)조희연, 2000, "'저항의 시대정신화', 반유신투쟁과 광주민중항쟁":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논평", 5.18 2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새로운 천년을 열며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 200. 5.15, 전남대 국제회의동, 39쪽..
두 번째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관련하여서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국가권력의 종속성 혹은 '식민지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광주민중항쟁이 80년대 혁명적 인식으로의 전환에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국가 및 지배권력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을 부여한 것이었다.
그동안 자립적인 것으로 비쳐지고 있었던 남한의 지배권력이라는 것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하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사실 반공규율사회적 조건은 국가권력에 대한 폭력성에 대한 인식을 규율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의 국가권력과 미국과의 관계, 즉 국가권력의 종속성 문제에 대한 인식을 규율하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친미'적 인식이 남한에 강력하게 존재하게 된 데는 전후 냉전체제에 남한의 자발적 통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먼저 베트남과 달리 미국이 남한에서 '해방자'로 인식되는 것과 연관이 있다. 남한의 자력으로 독립을 획득할 가능성이 없었고 연합군에 의한 일본의 패퇴로 인하여 '시혜적'으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국은 '해방자'로 인식되는 측면이 강하였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남한과 대만 같은 경우 내전과정에서 각각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해방 이후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남한의 경우 한국전쟁 초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역이 북한군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데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UN군의 개입이 없었다면 공산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은 특별히 남한의 지배세력의 주요한 구성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극우보수세력에게는 미국을 해방자로 부각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조희연, 1999b, "경제성장과 정치변동-'반공규율사회'와 '국가주의적 발전동원체제'의 형성, 균열, 위기 및 재편의 과정", {성공회대학논총} 제13호, 27쪽.
이런 역사적 요인으로 인하여 남한에서 미국은 해방자, 혈맹, 민주주의와 자유의 수호자라는 긍정적 이미지를 가지면서 존재할 수 있었고, 80년 이전까지 이것은 하나의 가상적인 합의 같은 것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초기 광주민중항쟁 당시 미 항공모함의 도래에 대해서, 광주의 군중이 환호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미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공유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 제7함대 소속 항공모함 2척이 부산에 정박하여 전두환 일파의 더 이상의 무모한 만행을 견제하고 있으며"라는 표현이 광주시민결의문에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당시의 시각을 알 수 있다. 광주시민일동, "광주시민여러분께:23-26일까지의 시민결의", 1980.5.25,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62쪽.
. 이런 속에서 반미는 성역의 주제였다. 그러나 광주민중항쟁에서의 전두환 신군부세력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반미무풍지대'였던 남한에서 반미문제가 제기되는 중요한 계기를 부여하였다. 이제 남한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싸움만이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미국에 대한 투쟁이 없이는 민주화가 달성될 수 없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게 되었다. 이제 '꼭두각시'인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남한의 저항운동은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
다음으로 광주민중항쟁은 위와 같이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를 동반함과 동시에,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를 동반하였다. 즉 광주민중항쟁은 폭력적인 국가권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새로운 투쟁적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이전까지 군부독재에 대항하여 싸우는 학생이나 지식인 등에 대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보이지 않던 민중들이 '무장' 투쟁하는 새로운 민중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식인 및 학생들의 인식의 전환을 촉발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사실 5.17 계엄 확대 이후 서울의 봄을 주도하던 '서울의 학생운동'이 퇴조하고 난 그 자리에 전투적인 민중의 상을 보여준 사건이 광주민중항쟁이었던 것이다. "5월은 민중이 바로 민주화운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피로써 증거한 투쟁의 달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앞의 글, 411쪽.
라는 표현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이러한 새로운 민중의 모습은 두가지 측면에서 지적·운동적 파급을 미치게 된다. 첫째는 운동 혹은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민중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민중주체주의'적 사고를 명확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째는 대중들의 전투성을 자연발생적 상태에서 목적의식적인 혁명으로 선도하는 혁명적 전위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민중주체주의적 사고의 맹아는 70년대 이미 생겨나고 있었다. 70년대 후반 민중 개념의 확산에 이어, 학문적으로도 민중사회학, 민중신학 등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인식이 나타나고 있었다
)조희연·김동춘, 1990, "80년대 비판적 사회이론의 전개와 '민족·민중사회학", 한국사회학회 편, {한국사회의 비판적 인식: 80년대 한국사회의 분석}, 나남, 24쪽.
. 물론 70년대의 민중주체주의는 '민중주의'(populism)적 성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으며, 혁명적 민중관(民衆觀)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80년대의 민중은 계급적으로 분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계급인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적 민중주체주의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인식된다.
광주항쟁은 70년대까지의 운동이 의연히 재야지식인 중심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각인시켜 주었고, 결국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지식인 중심의 운동에서 민중중심의 운동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합의되는 계기를 부여하였다. 즉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하여, 70년대 까지의 소시민적이고 민중주의적 운동이 노동자 중심, 민중 주체의 운동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70년대 후반에 학생운동의 소수파로 존재하고 있던 현장론이 강화되어 학생운동 선진그룹들의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그것이 실행에 옮겨져 이른바 '존재이전' 혹은 '하방'이 나타나는 것도 이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민중주체주의적 사고의 강화는 전체변혁운동 속에서 각 부분운동 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80년 이전까지의 운동이 학생운동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에 힘입어 전선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면, 80년 이후에는 노동운동 등 민중운동이 중심적 운동이며 이것의 강화가 여타 운동의 투쟁전략 선택에 중요한 고려사항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나게 되었다. 70년대 운동과 80년대 운동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는 후자에서는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이 운동의 중심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이 강화되지 않고서는 독재정권을 전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80년대 초반의 비합법적 논쟁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학생운동이 바로 이러한 민중운동의 강화와 어떻게 연관되어야 하는 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논쟁에서는 바로 민중운동의 강화에 학생운동의 역할이 어떻게 배치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민중주체주의는 혁명적 전위주의와 함께 진행되고 있음에 주목하여야 한다. 광주항쟁은 민중들에 의한 '무장'투쟁으로까지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전위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이 혁명적 전위는 물론 민중에서부터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감하면서도 80년대 학생운동은 스스로가 '전위형성의 중요한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정치사상적으로 무장하고 철의 규율을 가지며 대중운동에 대한 지도능력을 갖는 전위의 형성은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차적인 과제라는 인식을 활동가들이 공유해가게 되었다. 80년대 초반 레닌의 전위당론
)80년대 초중반 레닌저작 붐은 이를 반영한다. 당시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레닌의 전위당론에 대한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93, {한국사회운동과 조직}, 한울, 36-57쪽.
이 급속도로 유입되고 CA(제헌의회 그룹)
)CA의 노선과 활동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강신철 외, 1988,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270-296쪽. 그 공소내용에 대해서는 세계편집부 편, 1986, {공안사건기록: 1964-1986}, 세계 참조.
와 같이 스스로 정치사상적 전위임을 자임하고 조직화를 한 경우도 이러한 지적 맥락에서 나오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저항의 '시대정신화'와 광주>
이처럼 투쟁대상과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은 70년대 말-80년대 초의 운동가들이나 대중들의 의식에서 볼 때는 분명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급진적 인식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활동가들에게 급속하게 확산되어 나갔다. 이처럼 급진적 인식의 급속한 확산은 광주학살을 통하여 통치세력의 도덕적 기반이 완전히 붕괴하게 됨으로써 저항이 시대정신이자 '유행'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60년대 근대화가 시대정신이었다면 민주화가 시대정신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사회는 해방과 동시에 통일된 진보적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하지 못하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극우보수적인 분단반공질서로 고착화되게 된다. 4.19혁명은 바로 이 분단질서의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었고 이는 불완전한 민주질서를 낳았다. 4.19혁명이 민주질서를 낳는 민중들의 혁명적 행동이었다면, 5.16쿠데타는 이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질서를 향한 보수적 군부세력들의 반혁명적 행동이었다. 41.9혁명 후 한국사회는 바로 이처럼 민주질서를 향한 민중들과 그와 반대로 반민주질서를 유지하려는 지배세력의 갈등과 길항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바로 4.19혁명을 통해서 불완전하게 실현된 민주질서(그것을 담지하는 세력)와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실현된 반민주적 질서(그것을 담지하는 세력) 간의 이 갈등과 길항의 역사는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60,70년대 박정희체제와 그에 대응하는 광주민중항쟁은 바로 이러한 한국현대사의 근본갈등의 기조 속에 존재하는 역사적 사건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반민주질서가 재생산되는 형태가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반민주질서의 질적 내용이 변화하고 민주와 반민주의 상호관계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4.19혁명 이전의 반민주적 질서로서의 이승만정권과 4.19혁명 이후의 반민주질서로서의 박정희 정권 간의 관계에서 보면, 연속과 변화를 동시에 보이고 있다. 연속이라는 점에서 보면, 5.16 이후 혁신세력에 대한 전면적 탄압에서 보여지듯이 '반공주의'에 의해 반민주질서를 유지재생산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변화라는 점에서 보면, 박정희정권은 '근대화프로젝트'(절대빈곤으로부터의 탈피, 경제개발계획의 추진 등)를 통해 '전향적'인 이데올로기 동원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논평자는 박정희정권을 '국가주의적인 발전동원체제'
)조희연, 1998a, 앞의 책, 1장 2절.
로 표현한다. 즉 국가주도적인 발전(성장)을 향한 총동원체제라는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박정희 정권은 60년대 내내 거대한 저항을 받았으면서도, '체제적 위기'에 직면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박정희체제는 70년대초를 거치면서 '체제적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이요인은 경제적 위기, 정치사회적 위기, 동북아의 탈냉전화 기류에 기인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위기 등이 복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위기에 대응하는 박정희정권의 '전략적' 선택양식은 '체제의 부분적인 개방화'와 체제의 한단계 높은 '전체주의화'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70년대 초반의 위기와 그에 기반을 둔 저항에 위협받은 박정권은 여기서, 한단계 높은 군부정권의 전체주의적 강화를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박정권의 전체주의적 강화는 그에 대항하는 저항을 점차 강화시켜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서 70년대는 민주질서와 반민주질서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60년대와 다른 거대한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60년대에는 근대화프로젝트를 통하여, 또한 안보논리의 이데롤로기적 효과에 의하여 '반민주질서의 유지논리'가 '민주질서를 향한 저항의 논리'를 압도하고 있었다면, 70년대에는 바로 그러한 상호관계의 역전이 일어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70년대에는 바로 근대화프로젝트의 동원력이 약화되고 오히려 근대화의 구조적 모순이 전면화되면서 '재민주화'의 프로젝트와 그것을 향한 저항은 보다 강화되어갔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70년대 반유신저항은 80년대와 달리 '저항의 시대정신화'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80년대로 가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60년대 사람들은 쉽게 박정희 정권의 선전에 따라 '민주주의가 밥먹여주냐'고 말하였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사람이 밥만 먹고 사냐''자유가 빵 보다 귀하다'고 말하게 되었으며, 모두의 가슴 속에 '민주주의를 향한 타는 목마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때로 박정희의 헤어스타일을 흉내내는 부류가 있어도, 우리 사회의 깊은 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 쟁취한 것인데, 감히 누가 이를 거역할 것인가"하는 깊은 성찰이 무게를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신체제가 반민주질서의 '체제적 위기'에 대응하여 반민주질서를 '전체주의'적 억압을 통해서 유지재생산하려고 했던 체제라고 한다면, 유신 하의 저항운동은 이러한 전체주의적 억압에 대항하면서 저항의 전국화, 저항의 시대정신화에 접근하여 갔던 것으로 보여진다. 80년 광주항쟁과 그 이전의 79년 부마항쟁(이들 중간에는 80년 봄이 있다)은 바로 이러한 저항발전의 최정점에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80년 광주민중항쟁과 79년 부마항쟁은 유신체제 하에서 성장하여 온 저항의 총괄이자 그 정점을 상징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할 점은, 부마항쟁과 광주가 똑같이 반유신투쟁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부마항쟁이 80년 봄의 '불완전한' 민주공간을 열었던 반면에,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의 '찬란한 투쟁의 시기', 독재타도를 향하여 '혁명적' 진군(進軍)이 전개되었던 시기를 직접적으로 예비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은 70년대와 달리 민주질서를 향한 저항이 반민주질서의 유지논리를 압도하면서 저항이 시대정신이 되었던 시기로 가는 '비약'의 계기이자 출구였고, 80년대 '재민주화'(4.19에 의해 정립되었으나 5.16에 의해서 부정된 민주질서의 회복)가 지배적 시대정신이 되는 도덕적 기초를 만든 사건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이전의 반유신투쟁과 이후 80년대 반독재민주화운동과 함께--은 민주질서를 향한 '희생의 축적'을 통하여, 민주주의적 가치와 민주주의 제도를 부정하는 행위를 감행하는 데 따르는 '반역(叛逆)의 도덕적, 정치적 부담'을 크게 만들었다. 해방후 우리에게 있어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이식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유신투쟁을 통해 흘린 피와 희생,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치룬 피와 희생, 80년대를 통해 흘린 희생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역사적 과정이 없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언제나 사치스런 것으로 치부되기 쉽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던져지게 된다???. 반유신투쟁과 광주민중항쟁, 나아가 80년대의 민주투쟁은 바로 민주주의의 역사적 무게를 만들어낸 사건들이었고, '민주질서의 파괴'가 동반하는 도덕적, 정치적 '비용'과 후과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만든 사건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 이를 통해 70년대까지 학생들 및 지식인, 선진적 민중 중심의 저항운동은 이제 국민적인 저항운동으로 전화되어간다.
이런 점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유신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연속적 정점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뛰어넘어 80년대 저항의 시대정신화를 가능케 한 '비약'의 계기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반유신투쟁이 '저항의 시대정신화'를 예비하였다면, 광주민중항쟁은 그것으로 '비약'하는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이다.
3. 80년대 전반기 비합법논쟁과 광주의 혁명적 유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80년대 운동이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 자기인식을 하게 되는 과정을 80년대 전반기 비합법논쟁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 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에 담겨진 '혁명적 진실'들이 어떻게 쟁점화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떻게 혁명적 민주주의운동으로서의 자기인식이 심화되어가는 지를 살펴보게 된다.
70년대까지의 '자유주의'적인 운동인식은 80년대 초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소급적 성찰을 통해 혁명적 민주주의운동 인식으로 전환되어가게 된다. 80년대 초반은 전두환 정권의 초기 폭압적 정책이 실시되고 있었고 혁명적 논의 자체가 공개적인 차원에서 전개될 수 없었기 때문에, 80년대 초반 다양한 비합법적 운동논쟁을 통해서 구체화되어가게 된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광주민중항쟁의 운동사적 의미가 재해석되면서 80년대 운동발전의 정신적·지적 자산이 되어간다.
무림-학림논쟁>
광주민중항쟁이 신군부세력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 그리고 전두환 정권의 초기 공세적인 폭력적 사회통제정책이 실시되면서 운동은 침잠기에 들어가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을 성찰하면서 80년대적인 혁명적 인식이 구체화되는 과정은 80년대 초반 다양한 비합법적 논쟁을 통해서 추적할 수 있다. 최초의 비합법적인 운동논쟁은 무림-학림논쟁(이른바 무학논쟁)이었다. 무림이나 학림이라는 용어는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붙여져 이름이다. 무림사건은 80년 12월 11일 서울대의 시위 때 뿌려진 '반제반파쇼투쟁선언'이라는 유인물이 배포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공안당국이 학생운동 핵심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행한 사건이었다. 학림 사건은 이태복 씨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약칭 전민학련 및 전민노련 사건을 말한다. 이 논쟁은 "80년 하반기부터 81년 시기까지 서울대 학생운동 내부에서 80년 상반기투쟁을 주도했던 그룹과 이에 비판을 가하면 등장했던 그룹 사이에 주로 80년 2학기 학생운동의 투쟁방침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비롯되어 그 범위가 전대학적으로 확산되고 내용이 학생운동 전반의 위치와 역할 향후 변혁운동의 전망과 그를 실현할 조직형태를 둘러싼 문제로까지 심화되어 전개된 일련의 논쟁을 일컫는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24쪽.
무림-학림 논쟁은 80년 봄의 투쟁 및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평가를 쟁점으로 하면서 학생운동의 향후과제와 지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전개되었는데, 여기서 80년의 패배의 원인, 광주항쟁의 교훈, 학생운동의 당면과제 등의 쟁점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패배의 근본원인이 주체역량의 취약성이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학생운동의 당면과제는 무엇인가라는 것이 논쟁의 출발문제의식이었다. 여기서 더나아가 주체역량의 강화를 위한 방법론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무림진영과 학림진영으로 나뉘어지게 된 것이다.
이 논쟁에서 '투쟁지양론'이라고 불리우는 무림진영은 기존의 학생운동의 '소모성' 시위가 '적'들의 필요없는 공격을 유발하고 역량을 불필요하게 소진시킬 수 있으므로, 시위 중심의 학생운동을 자제하고, 학생운동 역량이 체계적으로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으로 이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중주체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이 강화되는 것이 선차적인 과제이므로, 학생운동은 자체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기 보다는 이러한 과제 중심으로 투쟁이나 활동이 배치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알려지기로는, 80년 12월 11일 서울대 시위는 '내적 준비를 위해 시위를 자제하자'는 취지로 학림진영의 시위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유인물을 배포하고자 하였던 것인데, 이것이 공안당국에 의해 적발되고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면서 무림진영의 지도그룹이 대거 구속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반해 학림진영은 '직접투쟁론'이라고 불리웠는데, 무림진영에 대해 일종의 '투쟁포기론'으로 비판하면서, 무림진영이 투쟁을 하려는 학생들을 오히려 방해하고 투쟁을 가로막다가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유인물을 배포함으로써 학생운동의 방향전환이나 조직보존은 고사하고 역으로 공안당국의 침탈을 자초했다고 비판하면서, 반대의 입장에서의 학생투쟁을 가속화하고자 하였다. 학림은 80년 5월 실패의 원인이 조직의 결여에 있다고 보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화 및 그 통일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학생운동은 전면적 투쟁을 통해 이러한 정치적 공간을 확장하여야 한다. "학림진영은 자연발생적 고립분산적 운동을 지양한다는 목적 하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적 통일(민학련과 민노련)을 시도하여 80년 5월 이후 침체되었던 학생운동의 활성화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일송정 편집부, 1988, {학생운동논쟁사}, 일송정, 34쪽.
"고 평가된다. 학림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침체에 빠져있는 전체운동의 활성화를 위해서 상대적으로 복원력이 크고 조직화되어 있으며 한국현대사를 통해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던 '문제제기집단'으로서의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서 '문제해결집단'으로서의 기층민중운동(특히 노동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25쪽.
. 학생운동이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서 여타의 운동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여야 하며, 이를 통해 학생대중조직의 발전도 이루어지며, 이 과정에서 받는 개인적 탄압 속에서 오히려 운동가로서 단련되며, 운동에 대한 자기헌신적 소명의식이 더욱 굳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이 초기의 무림, 학림 논쟁에서 인식의 혁명화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국가 및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이 질적으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이 당시 공안당국에 의해 학생운동의 '좌경화'로 매도되고 검거선풍의 단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70년대 학생운동의 문건과 달리 이 선언은 '우리의 적은 누구인가'라는 표현과 같이 이전과는 구별되는 '혁명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대적(大敵) 인식은 70년대까지의 학생운동의 정부인식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인식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70년대 까지의 학생운동은 박정권의 장기집권과 억압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정권을 '적'과 같은 대적(大敵) 개념으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학생운동에서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이 급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광주민중항쟁에서 보여진 집단학살 때문에 지배권력의 폭력성과 억압성이 투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그 반사인식으로서 80년대 운동이 지배권력에 대한 보다 철저한 혁명적 인식을 가져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70년대까지의 국가 및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은 다분히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80년대의 인식은 권력의 본질적 성격, 특별히 그 폭력성과 반민중성에 대한 인식이 철저화되어가게 된다.
새로운 혁명적 인식 속에서, 정부는 이제 '파쇼'정권이라는 식으로 규정된다. 파쇼라는 말은 '파시즘(Fascism)'이라는 말의 대중적인 선전선동용어인데, 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반공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운동의 순수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60,70년대 운동에서 기독교 운동 등 종교운동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부분을 이룬다는 점(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편, 1982, {1970년대 민주화운동과 기독교}, 민중사), 종교운동이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순수성을 지원하는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외피'의 구실을 한다는 점, 많은 운동가들이 교회에 '이중멤버쉽'적인 지위를 가지면서 활동하였다는 점 등은 이러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 운동은 대단히 절제된 용어로 사용되게 되고 '자유주의적' 개념들로 표현된다
)물론 60년대의 통일혁명당이나 70년대의 남민전과 같은 당시의 비합법적 혁명전위조직에서는 그러한 혁명적 인식이 혁명적 개념과 용어로서 표현된다(조희연, 1993 참조). 그러나 그것은 조직원에게만 '유통'되는 문건이다. 그러나 80년대의 학생운동의 '비합법' 문건들은 전두환 정권 하에서 합법성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비합법일 뿐이지, 학내 선진 학생운동가들, 심지어 일반 학생들에게까지도 '유통'되는 문건이라는 점에서 60,70년대와는 질적으로 구별된다.
. 파쇼적 인식은 단순히 국가권력의 폭력성 문제를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독점)자본의 계급적 도구라는 인식, 나아가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국가권력을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이러한 인식의 발전에 광주민중항쟁이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광주항쟁은 70년대까지의 운동이 80년대의 운동으로 발전해가는 정신적·지적 원천이 되게 된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에서 직접적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언급한 부분을 보면 "70년대의 학생운동은 우리의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전체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했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해 민중과도 유리되었다. 또 민중의 피의 선언인 광주항쟁 마저 이를 주도할 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표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광주민중항쟁의 운동사적 의미를 대적 인식의 철저화와 투쟁대상 인식의 급진화의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무림-학림 논쟁에서는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함께 투쟁주체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혁명의 주체가 지식인이나 다양한 재야세력에서부터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이라고 하는 인식이 강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민중주체주의에 대한 강조는 특별히 무림 진영에서 각별하게 나타난다. 다음의 문건은 그것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우리의 궁극적 과제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며 이것은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과 진보적인 지식인 세력이 스스로 조직화되어 이땅에서 파쇼지배체제를 축출하고 민족통일을 성취하는 위대한 민중투쟁의 승리만으로 가능하다. 이를 위한 70년대 학생운동은 우리의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학생들의 전체역량을 효과적으로 발휘하지 못하했으며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천적으로 극복하지 못해 민중과도 유리되었다. 또 민중의 피의 선언인 광주항쟁 마저 이를 주도할 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들 대중의 적인 파쇼집단을 섬멸할 수 있는 주체는 아직 근로대중의 조직화, 세력화가 되지 않는 마당에서 학생들이 민중전체투쟁의 주도체로서 자기 변신을 통해 이룩하여야 하는 것이 역사적 요구이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12.11.
".
이러한 논지에서 무림은 학생운동이 시위 중심의 운동으로부터 민중운동의 강화를 위한 중심에 놓는 방향으로 투쟁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시위만능의 투쟁관은 타기되어야 한다. 시위는 그것을 포함한 모든 전술적 요소의 전체적 고려하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그래야만 비로서 학생운동은 적들에 대한 탄력적인 전체적 응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학생운동 세력의 민중운동에로의 수렴과정이 보다 집단화되고 체계화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광범한 반파쇼 민중연합이 이념적·조직적으로 성숙될 것이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12.11.
학생운동의 선도적 투쟁역할을 강조하는 학림진영에서조차도,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의 중심성과 지도성을 부정하지 않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역시 70년대의 투쟁주체인식과는 질적으로 발전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학림진영은 운동의 지도권 문제와 관련하여 "학생운동이 과도하게 첨예화되어 있고, 교회는 기회주의적 속성이 농후하며 청년운동은 미약하므로 노동운동이 운동의 지도부가 되고 학생운동이 보조집단, 문제제기집단이 된다"
)일송정 편집부, 1988, 앞의 책,33쪽.
고 말하고 있다. 학림진영에 따르면, 학생운동은 "계속되는 그 고유의 정치투쟁을 통해 민중항쟁의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민중운동의 선도체이지 주도체는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는 학림진영에서도,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주도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동시에 무림-학림 논쟁 속에서는 이러한 민중주체주의의 이면에서 동시에 혁명적 전위주의적 사고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0년대에 초반 운동가들을 지배하였던 하나의 사고는 80년 봄의 패배와 광주민중항쟁의 실패가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지도할 '혁명적 전위세력'과 그 조직의 부재에서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80년대의 운동이 목적의식적인 혁명운동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전위적 인자와 세력들이 배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80년대 첫 비합법적 혁명논쟁인 무림-학림 논쟁에서도 이 점이 잘 나타나고 있다. 무림문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민중의 피의 선언인 광주항쟁 마저 이를 주도할 세력 즉 조직된 민중역량이 없어 실패하고 말았다"
)'반제반파쇼투쟁선언', 1980.12.11.
. 따라서 혁명적 전위가 형성되지 않고는 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혁명적 전위가 형성되는 경로, 그 속에서의 학생운동의 지위와 관련하여서는 상이한 입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즉 무림 진영 같은 경우는 학생운동이 산발적 투쟁의 한 요소가 아니라, 전체투쟁의 주도체로서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학생운동이 보다 적극적으로 '존재이전'을 통해 혁명운동의 전위형성을 가속화하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학림진영 역시 80년 5월의 실패의 원인이 조직의 결여에 있다고 보고,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조직화 및 그 통일화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학생운동은 전면적 투쟁을 통해 이러한 정치적 공간을 확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학림진영은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지도할--낮은 수준의--전위적 조직을 구성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민학련과 민노련에 대해서는 세계편집부(1986) 참조
, 실제 민학련이나 민노련 같은 조직을 통해 운동에 대한 주도적인 개입을 시도하였다.
야비-전망 논쟁>
무림-학림 논쟁에 이어 전개된 야비-전망 논쟁은 80년대 초반 학생운동 내부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논쟁으로서, 대적 인식의 급진화, 투쟁 주체 인식의 급진화, 외세인식의 급진화라는 광주민중항쟁의 운동사적 교훈이 보다 구체적으로 진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야비-전망 논쟁은 82년 상반기 팜플렛 형식의 소책자를 통해서 전개되었던 논쟁이며 이전 무림-학림 논쟁이 보다 심화된 논쟁이었다. 야비는 '야학비판'이라는 제목의 팜플렛과 그 노선을, 전망은 '학생운동의 전망'(이하 '전망'이라고 한다)이라는 제목의 팜플렛과 그 노선을 의미한다. 당시에는 80년 말 무림 사건 및 91년 학림사건으로 인해, 학생운동의 지도적 역량들이 대거 구속된 상태였는데, 학생운동의 역할 및 민중운동에 대한 관점 등을 둘러싸고 직접투쟁론, 투쟁지양론,학생운동포기론,준비론 등의 다양한 입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야학비판'은 과거 무림의 입장의 연속선 상에 있으며 투쟁지양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으며, 학생운동의 전망은 학림의 입장의 연속선 상에 있으며 직접투쟁론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학림의 맥을 잇고, 투쟁성을 강조하는 입장인데 반하여, 후자는 무림의 맥을 잇고 대중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야학비판'의 논리를 정리하여 본다면, "현 운동단계는 혁명적 전위세력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므로 각 운동은 '상대적 독립성'을 갖고 단계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학생운동은 일상투쟁(학내, 문화, 대중 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노동운동은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나아가야 하고 야학운동은 정치사상교육으로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매개해야 한다". 민중운동에 대해서는 "아직 역량의 미성숙 상황으로 대중 확보에 운동을 집중시킬 단계이지만 학생운동은 전체운동의 정치투쟁을 주도해왔던 '주도체'로서 전위형성의 요구와 정치투쟁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노선, 즉 투쟁노선과 조직노선을 확립해야 한다"
)'야학비판', 일송정 편집부, 1988, {학생운동논쟁사}, 일송정에 재수록.
고 말하고 있다. '야학비판'은 학생운동이 무조건적으로 정치투쟁 중심으로 전개됨으로써 역량을 소진시키는 데 반대하고, 오히려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지원역할과 전위형성을 매개적 역할을 중심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야학비판'은 학생운동이 직접적인 민중운동 지원 투쟁 보다는, 전위형성을 위한 하나의 독자적인 통로로서 일상투쟁을 통한 대중확보를 통하여 전위전위세력을 형성해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생시위는 학생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무기이고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에 학생운동의 궁극적 목표를 두는 것은 잘못이다". 학생시위가 민중운동의 지원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인데 이는 부차적인 것이고 직접적인 지원은 민중과의 결합을 강화시켜 가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 속에서 '야학비판'은 '존재의 이전' 즉 노동운동으로의 투신을 학생운동의 본질적인 일부로 포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가 그 존재를 벗어나려고 하는 생각은 공상일 수 있지만 학생이 학생이라는 존재를 벗어나는 것은 아직 현재화되지는 않았지만 곧 현재화되는 객관적인 미래이다. 학생존재의 이러한 성격은 학생들이 그 존재의 이전 즉 미래의 존재를 예정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것을 의미하여 그것은 학생운동 자체도 이전준비를 본질로서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위의 형성이라는 정책적 입장에서도 이 '존재의 이전'문제는 중시되어야 한다"
)'야학비판'.
'라고 말하고 있다.
전망은 이에 반해 학림의 입장을 계승하면서 직접투쟁론의 입장에서 전위 정치세력 형성을 위한 민중노선의 확립문제, 정치시위문제 등의 쟁점에 대하여 다른 주장을 하였다. 전망은 "진정한 민중노선이란 상황에 대처해 끊없이 적을 폭로하고 민중항쟁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80년 5월 투쟁을 통해 한국의 변혁운동의 가능성을 검증받았다. 즉 학생시위 선봉-민중합세-민중봉기-연속적 도시봉기. 따라서 현대 유일한 투쟁가능집단인 학생세력은 민중을 대변하여 투쟁의 선봉을 담당하여 전민중적 투쟁의 발판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합세 봉기화하고 이것이 다른 도시에 퍼져 나간다. 이렇듯 현 운동단계에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선도체로서의 정치투쟁을 요구받고 있고 아울러 학생운동가들의 배출을 통해 전체운동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민중으로의 침투, 결합을 학생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상정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이는 학생운동이 범위를 과도하게 확대하는 대신 그 고유의 정치투쟁을 외면하는 것이다"
13)'학생운동의 전망], 일송정 편집부 1988, 앞의 책에 재수록.
. 전망은 학생운동이 적극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군부파쇼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야 하며 정치투쟁을 통해 여타의 운동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운동으로의 이전이 학생운동의 고유한 과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적 시위와 관련하여, 가두시위야말로 학생운동의 최고의 투쟁형태라고 보았다. 정치투쟁의 궁극적인 장소는 가두이며 여기에 서 학생운동은 민중을 직접적으로 선전선동하고 그를 통해 전민중적 봉기의 기반을 확대할 수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가두시위의 시기, 형태, 슬로건 등 다양한 전술이 개발하는 것이다. 정치투쟁 일변도라는 식으로 학생운동의 투쟁을 비판하는 것은 학생운동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의 소치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은 부단한 대적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함으로써 민중들의 독재정권으로부터의 이탈을 가속화시켜 왔으며, 여타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역할도 맡아왔다는 것이다. 나아가 학생운동은 어떤 점에서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받는 탄압 속에서, 아니 오히려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성장하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학생운동은 현장으로의 이전을 준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두 정치투쟁을 통해 혁명적 전위로 성장하여 가며, 학생들의 쁘띠부르주아지적 계급속성을 극복해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야학비판'과 전망의 논쟁 역시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형성된 혁명적 인식의 단초들이 학생운동의 투쟁노선을 둘러싸고 직간접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럼 앞서 제시한 바와 같이,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주어진 새로운 혁명적 인식의 단서들이 야비-전망 논쟁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기로 하자.
야비-전망 논쟁 단계에서는 국가 및 지배권력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인식이 보여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야학비판'의 서술 속에서 이 점과 관련하여 특징적인 점은, 운동진영 내부에서 5.17과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외교론'이 소멸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 대목이다. 5.17과 광주사태는 사회운동권 내에서의 온건한 노선, 비혁명적 노선의 주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5.17과 광주민중항쟁은 운동권 내부에 다음과 같은 현상을 가져왔다고 '야학비판'은 말한다. '야학비판'에 따를 때, 5.17과 광주사태는 사회운동권 내에서의 온건한 노선, 비혁명적 노선의 주변화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제국주의에 대한 보다 명료한 입장이 확인되어졌다. 적어도 진보적 학생운동에서 '외교론'의 침투는 저지되었다"
)야학비판.
. 여기서 외교론은 한국의 민주화를 함에 있어 서방세계에 대한 호소와 그들의 압력에 의한 민주화를 사고하는 경향을 의미하며, 야학비판은 일제시대에도 3.1운동 이후 항일 운동노선이 '무장투쟁론'외교론''준비론' 등으로 분화되었듯이, 60,7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내부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존재하였는데, 광주항쟁 이후에도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이러한 외교론적 경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외교론은 투쟁 대상에 대한 자유주의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으며 대적 인식의 불철저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전망은 80년 5월 투쟁과 관련하여 학생운동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적의 정체와 본질이 구체적으로 인식되지 못했다. 이는 적이 누구인가? 폭력기구로서의 적의 성격이라는 문제를 추상적으로 알고 있을 지라도 구체적으로 우리 머리 속에 와닿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쯤 보여줬으면 물러서겠지""미국이 전두환 정도는 처리해주겠지" 등의 아전인수격의 안이한 생각들만 하고 있었다. 이는 5.17 쿠데타와 광주대학살에서 여지없이 깨지게 된다
)일송정 편집부, 1988, 앞의 책, 300쪽.
". 국가나 정권에 대한 사회운동의 인식은 그것의 장기적 집권의 문제나 독재적 탄압의 문제 등 '현상'적인 문제들을 강조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망에서는 폭력기구로서의 국가에 대한 인식이 구체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정부는 혁명적 타도의 대상으로 인식되게 된다.
다음으로 지배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이 '전망'에서는 보다 구체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한 독재정권의 배후에 미국이 있다는 인식이, 광주학살에 대한 경험 속에서 움트게 되었다. 광주항쟁 당시, 미 7함대가 한반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이 알려졌을 때, 광주시민들은 미국의 전두환 독재세력을 응징할 것으로 생각하고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묵인 하의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학살은 미국에 대한 보다 '구조적' 인식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생각된다. 전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보수권력의 정체가 폭로되었다. 미국 보수권력은 해방 후 그 정체를 감추고 이 땅에 친미적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광주민중봉기라는 치열한 전면전에서 그 반민족, 반민중적인 성격은 더 이상 감출 여지 없이 폭로된 것이다. 미국 보수권력은 미국 작전지휘권 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광주시위 군준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전두환 일당의 요청에 동의, 광주학살극에 명백히 참여함으로써 광주 대학살극의 공범자로서 스스로를 규정짓게 되었다
)'학생운동의 전망'.
".
이제 '꼭두각시'인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게 된다. '야학비판'에서도 "제국주의에 대한 보다 명료한 입장이 확인되어졌다. 적어도 진보적 학생운동에서 '외교론'의 침부는 저지되었다. 그러나 그 진영은 아직도 강력하다"라고 적고 있다. '야학비판'이나 전망 문건이 학생운동의 과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반미문제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으나, 70년대와 다른 철저한 반미적 인식, 독재정권과 미국의 유착에 대한 급진적 인식이 당연하게 내재화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꼭두각시'인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그 배후에 있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발전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게 된다.
다음으로 야비-전망 논쟁 속에서는 민중주체주의적 입장은 하나의 '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주의 노선의 강화를 가져왔다. 이 민중주의 노선은 다양한 함의를 갖는데 그것은 민중지원투쟁의 강조,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축소론, 사회운동에서의 민중주체성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야비-전망 논쟁은 민중운동의 발전, 민중의 혁명주체로의 발전에서 학생운동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된 논쟁이었다. '야학비판'은 무림의 인식을 계승하여 학생운동이 학생운동 중심으로 투쟁을 전개하지 말고 민중운동으로의 투신을 통해 민중이 혁명의 주체로 발전되어 나오도록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며 '존재이전'을 통해 혁명적 전위가 형성되는 일 구성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학림 역시 학생운동의 정치투쟁을 강조하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학생운동의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통해 민중운동이 발전되어 나오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해야 하며, 스스로의 선도적 투쟁 속에서 혁명적 전위가 구성되어 나와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광주민중항쟁의 평가와 관련하여, 전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민중의 잠재력이 증명되었다. 우리는 저들을 과대평가하고 민중의 현실적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패배주의에 빠져있음을 깊이 반성하여야 한다. 학생시위에 대한 정권의 잔인한 만행에 그토록 열렬히 일어서는, 그리하여 저들의 무참한 난사에 즉각 무장하여 결국 포악한 무리를 일주일이나 내쫓아 광주를 지켰던 그 민중의 역동적인 잠재력은 우리 투쟁의 승리를 약속하는 횃불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 전망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봉기의 한계가 드러났다. 실로 광주민중봉기는 30만 시민의 열렬한 투쟁으로 최정예 군대인 공수부대를 격퇴한 민중의 잠정적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공수대가 퇴각한 바로 그 시각부터 민중의 폭발적 에네르기는 서서히, 그리고 급속히 무너져갔다. 왜 그랬는가? 조직에 의한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에 이해 준비되고 동원되고 지도되어야 한다. 조직은 운동에 있어 양적 확대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역랴에 통일성, 기동성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80년대 초반의 흐름 속에서는 이러한 민중주의적 노선의 '혁명적 전위주의'적 입장과 함께 부각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주체성을 정착시키는 계기였지만 동시에 전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도 아울러 제시되어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은 어떻게 자연발생적 투쟁이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발전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 계기였다. 어떤 점에서 80년대 초반의 맥락 속에서 '과잉전위주의'적 경향이 촉발되기도 하였다고 하는 평가도 있으나, 70년대와는 다른 고민을 갖게 만든 사건이 광주민중항쟁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당시 남민전 지도부가 감옥에서, 남민전이 파괴되지 않았다면 광주항쟁의 경과를 달라졌을 것이라고 탄식했다는 말이 회자되었던 것에서도 나타난다.
광주민중항쟁은 민중들에 의한 '무장'투쟁으로까지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자연발생성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대중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을 목적의식적인 투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전위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동반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학생운동 중심의 운동 파악에서 노동운동 및 민중운동 중심성을 강조하는 입장이 나타났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운동을 지도하는 전위세력의 형성을 강조하는 입장도 나타났다. 그런 점에서 야비-전망 논쟁 속에서는 민중운동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면서 동시에 운동을 지도할 혁명적 전위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하는 점이 강조되었다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전망이 제기하는 흥미로운 쟁점은 왜 광주민중항쟁은 실패하였는가. 운동노선적 측면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어떤 운동의 경로를 보여주고 있는가라는 점에 대해서 다음을 보자. "80년의 경험에서 우리는 학생시위-시민합세-민중봉기-연속적 도시봉기라는 한국변혁운동의 고유한 발전모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광주민중항쟁이 패배로 끝난 것은 이것이 타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생운동은 선도적 정치투쟁>으로 사회대중에게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물론 문제해결집단은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 학생운동은 타부분이 가지고 있지 못한 투쟁역량>으로 전체운동을 선도하는 선도체>인 것이다"('학생운동의 전망'). 전망의 경우, 광주민중항쟁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혁명의 현실적 형태는 도시민중봉기 형태가 될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조희연, "80년대 학생운동과 학생운동론의 전개", 사회비평 창간호. 1988).
80년대 초반의 전반적인 인식은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이끌 혁명적 전위세력의 형성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야학비판'은 혁명적 전위세력이 기층민중으로의 '존재 이전'을 통해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전망은 학생운동의 정치투쟁 자체를 통해서 형성되어가야 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전위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은 '야학비판'의 내용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 현재 변혁운동의 단계는 올바른 지도노선을 가진 전위조직 역량의 형성이 절실히 필요로 되는 단계이다. 그러나 여타부분은 이런 과제를 담당할 만큼 성숙되어 있지 못하므로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학생운동이 전위형성의 모태가 되어야만 한다"
)'야학비판'.
전망은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자연발생적 봉기의 한계가 드러났다. 실로 광주민중봉기는 30만 시민의 열렬한 투쟁으로 최정예 군대인 공수부대를 격퇴한 민중의 잠정적 승리를 의미했다. 그러나 공수대가 퇴각한 바로 그 시각부터 민중의 폭발적 에네르기는 서서히, 그리고 급속히 무너져갔다. 왜 그랬는가? 조직에 의한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직에 이해 준비되고 동원되고 지도되어야 한다. 조직은 운동에 있어 양적 확대를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역량에 통일성, 기동성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이렇듯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혁명적 투쟁으로 통일화하는 전위세력과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80년대 초반 일련의 비합법적 논쟁을 통해 학생운동의 선도적 그룹의 인식이 급속하게 혁명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현실적인 전위조직을 형성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80년대 초반은 대단히 조심스럽고 유보적인 자세가 지배하고 있었다. "81년 전국민주노동자연맹>과 전국민주학생연맹>사건 이후 전위조직의 형성시도나 그에 관한 논의조차 금기시되어졌고, 셀(cell)>론이 맹위를 떨치면서 노동현장으로 대거 이전했던 현장활동가들은 소그룹>의 형태만을 유지하면서 노동계급과의 존재적 동일성>에 일차적 비중을 두는 경제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장활동 속에 대부분 침잠하게 된다"
)(일송정? 강신철?)
조희연, 비평.
80년대 초반의 무림-학림논쟁, 야비-전망 논쟁은 선진학생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하는 논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지향적 논쟁이 진행되는 것과 함께, 전두환정권에 대항하는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이 발전되어 가면서, 이러한 비합법적 논쟁의 핵심적인 내용들은 점차 학생운동의 대중적 운동 및 사회운동 내에서도 확산되어가게 된다. 85년 2.12 총선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연) 내부에서 이루어진 CNP논쟁
)이에 대해서는 조광, "민주변혁(CNP)논쟁에 대하여", 박현채·조희연 편, 1989a, 앞의 책, 180-189쪽 참조.
은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부각된 혁명적 인식이 이제 일반 활동가들로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당시 학생운동 출신의 선진적 청년활동가의 조직체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내에는 여러 세대의 활동가들이 모인 관계로 그 이념적 차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러한 이념적 차이--이것은 변혁의 계급적 전망과도 관련된다--를 명확히 하면서 변혁적 사회인식의 내용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이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처음 2·12총선 참여논쟁의 연속선상에서 변혁운동의 주체세력을 누구로 설정할 것이며, 중산층이나 야당정치인과는 어떤 관계를 설정할 것인 하는 문제에서 시발되었으나, 이 논쟁은 변혁운동의 주체세력에 대한 평가에서 나아가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사회의 변혁운동단계는 무엇이며, 무엇을 대립물로 하는가 라는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변혁운동의 대립물과 단계를 과학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모순론'이 도입되고, 사회구성체 분석이 변혁이론의 중심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이 당시 논쟁에서는 시민민주혁명론(CDR: civi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론(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론(PDR: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으로 입장이 대별되었다. 이것들은 당시 민청련 내부에 존재하는 운동론적·실천적 경향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상의 서술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주화의 길} 제15호, 39-40쪽 참조.
시민민주혁명론은 민청련의 선배그룹들의 경향성을 의미하였는데, 70년대부터 이어지는 국민운동적 입장이었다. 이 입장은 전두환 독재정권과 미국의 전반적인 제3세계 정책과는 괴리가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70년대 말 이후 제3세계는 우익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던 정책에서 민주화를 추동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따라서 전두환 독재정권과 미국 사이에는 상대적 갈등이 존재하게 된다. 외세의 문제는 현단계에서는 중요하지 않으며, 현단계의 중요한 과제는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정부 수립이 된다고 파악하였다. 시민민주혁명론의 입장에서는 엄밀한 계급적 분석방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으며, 반독재민주화운동에서는 정치적으로 각성된 지식인, 학생, 재야민주인사, 양심적 정치인 등 중간계층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된다. 반면에 민중민주혁명론은 당시 노동운동권 및 노동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학생운동 그룹들의 전반적인 인식의 경향을 지칭하는 것이었는데, 보다 계급주의적 입장에서 한국사회구성과 변혁을 사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이해된다. 이 입장에 따르면 한국사회에 외세문제가 현존하고 있으나 그것 조차도 계급모순의 관점에서 바로보지 않으면 않된다. 한국사회의 국가권력은 독점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라는 것이 지배적 측면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은 당연히 변혁운동의 주체도 노동자계급 등 기층민중이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기층민중과 중간층의 계급적 입장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여야 하며, 학생운동은 이러한 기층민중운동의 강화를 중심에 놓고 사고하여야 한다.
당시 민청연 내부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덩던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민주혁명론은 시민민주혁명론을 우경적 입장으로, 민중민주혁명론을 좌경적 입장으로 파악하면서, 민족적 과제와 민주적 과제를 통일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모순을 중시하면서, 이러한 반외세의 과제는 군사정권에 의해 억압받는 집단 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은 계급계층들이 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주체는 노동자계급 등 기층민중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학생, 양심적 지식인, 종교인 등 양심적이고 민족적인 중간계층도 차여하는 폭넓은 연합전선이 구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과정에서 CDR(civil democratic revolution)론은 소시민적 사회관, 낭만적 운동관에 기초하고 있는것으로 비판받았으며, NDR(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론과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론은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과제를 해결해야하는 변혁, 노동계급을 주체세력으로 하는 변혁의 문제를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공감을 얻었고, 이 점은 그 후 변혁론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일단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ND와 PD의 상호관계에 대한 통일된 인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소시민적 운동관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는 점이다. 즉 80년대 전반기를 거치면서 사회운동권, 특별히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한국사회의 변혁의 전망에 대한 소시민적 (혹은 쁘띠부르조아적) 인식이 광범위하게 비판되고 극복되었다. 예컨대 민주화를 전망할 때 민주화의 체제적 내용은 배제하면서 억압적인 군부통치의 부분적 이완이나 완화를 추구하는 소시민적 민주화관에 대한 비판이 널리 공유되었다
)조희연, 1989a, 앞의 글, 18쪽.
당시 학생운동 출신의 중견 재야활동가이 많았던 민청년 내부에서 민족민족'혁명'론이나 민중민주'혁명'론이 논쟁의 중심축으로 설정되는 것만으로도 80년대 초반 구체화되어온 혁명적 인식이 사회운동 내부에서 확산·정착되어 가고 있으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민청연의 중심멤버들이 대체로 70년대 학생운동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80년대적 인식이 이전 시기의 활동가들 사이에 확산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CNP논쟁에서 광주민중항쟁이 부여한 3가지 차원에서의 인식의 급진화에 있어 훨씬 진일보한 논의들이 제기됨을 알 수 있다. 먼저 변혁대상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변혁대상의 성격과 관련하여 CNP논쟁에서는 투쟁대상권력의 성격에 대하여 이전에 비해 진일보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독재권력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독점자본을 물적 토대로 하는 제국주의와 연계된 세력으로 보고 있으며, "당면과제를 독점자본 및 그 유지세력인 합법화된 폭력으로서의 군부독재타도에 두고 그후 기층민중이 되는 민중권력을 수립한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지배권력의 본질로서의 폭력성에 대한 인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을 제국주의 및 독점자본에 기반을 둔 군부파쇼세력과 한국민중간의 모순"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사실 독재권력, 군부권력 등은 지배권력의 일정 측면, 특별히 국민이 의사에 반하는 집권의 장기성이나 국민들에 대한 지나친 억압정책 등을 부각시키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민족민주혁명론이나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군부정권을 개념적으로 '파쇼'로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그 내포적 의미로서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기반을 둔 계급적이고 반민족적인 실체로서 인식하게 된다.
이미 투쟁의 대상이 단순히 장기집권을 하는 군부정권일 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의 지배도구이며 외세에 의해 조정되고 있는 도구이며 지배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폭력으로 무장된 실체로서 인식되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전두환 독재정권이 외세종속적인 정권이며 파쇼적 권력이라는 점을,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제국주의 뿐만 아니라 독저자본에 의해 종속된 실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즉 한국사회는 그 자본주의적인 경제적 기초에서 볼 때 독점자본이 지배블럭의 기본적인 구성원이며, 여기에 독점자본의 계급적 이해를 폭력적으로 관철하는 파시즘적 국가권력과 이러한 파시즘-독점자본의 유착체제를 비호하는 외세가 지배블럭의 주요한 구성원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점자본과 파시즘적 국가권력과 외세로 구성되는 지배블럭이 변혁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되었던 것이다.
다음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이 강화되는 것과 함께, 저항주체에 대한 인식, 특별히 민중주체주의적인 인식이 강화되어가게 된다. 물론 시민민주혁명론의 경우에는 60·70년대 초반 학생운동 선배그룹들의 경향성인데 이 입장은 기층민중운동 중심의 사고에 있어서는 불철저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민족민주혁명론과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는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이 나타나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민족적 모순과 군사파쇼적 모순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민중이라고 보고 있다. 민족민주혁명론의 경우 중간층 세력이나 소부르주아지와 자유주의자들도 제휴세력이라고 보고 있기는 하지만, 노동자·농민·빈민이 변혁의 주도세력이고 진보적 청년학생이 선도세력이라고 하는 식으로 인식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알 수 있다. 민중민주혁명론의 경우 중간계층의 기회주의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여 농민, 빈민 등 기층민중이 제국주의와 파쇼에 대항하는 저항의 중심주체라는 인식을 강조하고 있다.
CNP논쟁에서의 민족민주혁명론은 그후 85년 경 삼민혁명론에 이르기까지 비록 명시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학생운동의 기본적인 지향으로 존재하게 된다. CNP논쟁이 이루어지던 85년을 경과하면서,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은 계급론적 인식과 결합하면서 더욱 명확화되어갔다. 즉 사회운동의 계급적 기초에 대한 인식이 한국사회의 계급구성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확산되었다. 그 결과 변혁의 계급적 전망(脫자본주의적인 변혁)이 명확해졌으며,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운동의 주도성, 나아가 지도성이 강조되었다. 1960년대 이후 종속적 자본주의화의 과정은 ---종속성으로 인한 여러 파행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자본주의적 재편의 과정이며 이에 따라 사회 전성원의 프롤레타리아화가 진척되고 그 결과 한국사회 계급구성에서 노동계급이 압도적 다수가 되었으며 노자간의 계급모순이 기본모순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이 공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사회운동은 노동계급을 주력군으로 하는 계급해방운동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 또한 널리 공감되었다. 이러한 계급해방운동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주도성(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을 가지며, 노동운동이 제반 사회운동 속에서 중심적이며 주도적인 위치를 갖는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1985년은 특히 노동운동의 고양기였던 만큼, 또한 최초의 연대투쟁의 모범이기도 했던 구로동맹파업이 일어났던 해였던 만큼, 위와 같은 점이 더욱더 증폭되어 강조되었다.
사회운동 내에서 CNP논쟁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학생운동 내에서는 삼민혁명론의 형태로 80년대적인 혁명적 인식이 종합되어 나타나게 된다. 광주민중항쟁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제기된 혁명적 인식의 제요소들은 85년 경 삼민혁명론에서 종합화된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광주민중항쟁을 계기로 주어진 혁명적 인식들은 사회운동진영, 특별히 학생운동 선진인자들 내부에서는 이제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가게 된다. 이것은 학생운동에서 민족·민주·민중혁명이라는 삼민혁명론이 지배적 화두가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혁명적 인식의 발전에는 80년대 초반의 엄혹했던 상황에서 83년말부터 유화국면이 실시되면서, 운동은 급속히 회복되고 대중적 투쟁으로 발전되어가는 운동 자체의 발전이 있었다. 학생운동 선진인자들 내부에서의 '상식'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의 기본적 지향성으로서의 민족, 민주, 민중이념(소위 '삼민' 이념)이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공통인식이 되고 대중적으로도 확산되어가게 된다
)유화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 83년 후반부터 소위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이 터지는 85년 상반기까지 수도권의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학생운동의 방향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는데, 이를 통칭하여 깃발-반깃발(Flag-Anti Flag)논쟁 혹은 MT-MC논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칭은 기왕의 학생운동의 지도체와 노선에 대한 문제제기그룹이 '깃발'이라는 팜플렛을 발행한데서 연유한다. 이 논쟁은 기본적으로 무림-학림 논쟁에 연속성을 갖고 있는데, CNP논쟁에서 NL과 PD논쟁으로의 과도기에 핵심적인 학생운동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쟁은 학생운동의 방침을 둘러싼 전술논쟁의 성격의 지니고 있고 '정치노선'적인 입장에서의 대립 지점들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는다.
"85년 학생운동에 있어서의 큰 특징 중의 하나가 그 이념의 대중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삼민' 혹은 '민중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함축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명시적으로 극복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학생운동 내부에서 개념적으로 명시화된 것은 {삼민}이라는 소책자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94-95쪽.
. '삼민' 혹은 '민중민주주의'가 학생운동 내부적으로는 이미 정리되고 공유되는 바였지만 이러한 이념성이 대중(학내·학외) 앞에 공개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한 것은 85년부터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학생운동이 이념성은 학내대중에게는 대중조직 속에서의 학습·토론, 대자보와 '자유언론' 등의 매체를 통한 선전사업, 그리고 각종 대중집회 문화활동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삼민혁명에서는 민중민주주의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우리의 운동은 이 민중민주주의의 민족혁명을 목표로 하는 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운동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왜 민중민주주의의 혁명인가? 혁명의 주체가 민중이며, 혁명이 건설한 새 사회의 정치체계는 부르조아가 지배하는 부르조아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중이 지배하는 민중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왜 민족혁명인가? 반제·반매판독점자본혁명이기 때문이며 혁명이 건설할 새 경제체제는 민족혁명 경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의 개념은 지난 10년간 우리가 '민중이 역사의 주체다''민중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사회가 건설되어야 한다'라는 말들로서 그 내용을 표현해온 개념이다"
)'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운동의 기본개념을 정립하자', 강신철, 1988, 앞의 책, 94쪽에서 재인용..
. 삼민혁명론은 파쇼체제의 성격을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당시에는 三反으로 말했다. 파쇼체제는 삼반체제가 된다)으로 규정하였고, 그에 대응하여 민족운동, 민주운동, 민중운동이 안티테제로 설정되었다.
이상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민주·민중혁명은 80년대 혁명적 인식의 제측면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족민주혁명은 지배권력의 종속성과 파쇼적 억압성을 전제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의 성격을 정식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의 성격은 반민족, 반민주혁명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지배권력의 성격을 정식화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민중혁명은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반민족, 반민주적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혁명의 주체가 바로 민중이고 그래서 민중주체주의적인 혁명이 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념의 심화과정은 동시에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확산·심화시켜나가는 과정이었다. 삼민이념이 대중화되어가는 바로 그 시점에 광주민중항쟁의 성격에 대한 대대적인 대중적 선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85년경에는 이에 관한 명확한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된다. "이전 시기에는 주로 유인물이나 대자보 혹은 입에서 입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언급되어왔던 광주민중항쟁에 대해 서울대를 포함한 서울의 몇 개 주요대학의 학생회 산하 학술부역량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광주민중항쟁의 재조명}이란 책자 및 토론회가 그 대표적인 성과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장구한 민족해방투쟁의 역사 속에서 올바르게 위치지워지고 그 의의와 교훈이 체계적으로 대중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강신철 외, 1988, 앞의 책, 95쪽.
". 이러한 노력을 포함하여 85년 이후로는 '삼민'이라고 통칭되는 이념이 학생대중들 속으로 급속히 전파되기 시작했으며,이는 반합법투쟁위원회명칭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었다. 85년 하반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와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라는 명칭을 보면, 바로 삼민혁명의 심화라고 해석할 수 있다.
NL과 CA논쟁
)박현채·조희연은 CNP논쟁을 '1단계 사회구성체논쟁'으로, NL과 CA논쟁을 ''2단계 사회구성체논쟁'으로 정리하였다. 1단계 논쟁에는 학계에서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주변부자본주의론 간의 논쟁도 포함한다. 1단계 논쟁은 맑스주의적 방법론'의 확립이라는 문제의식 하에 전개되었다고 하면, 2단계 논쟁은 민족해방론'의 대두에 의해 계기지어지면서 제국주의의 지배' 혹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 문제를 핵심쟁점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현채·조희연, 1989a, 앞의 책 참조.
에서는 지배권력의 성격에 대하여 보다 예각적인 입장을 보이게 된다. 삼민투의 경우 지배권력의 성격에 대한 병렬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NL과 CA단계에서는 NL은 지배권력의 종속성에 대하여, CA는 지배권력의 계급적 억압성에 대하여 보다 예각화된 입장을 드러내게 된다. NL은 NLPDR(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의 약자로서 민족모순을 중심으로 남한의 사회구성과 변혁을 사고하는 입장이며, CA는 Constituency Assembly(제헌의회)의 약자로서 맑스-레닌주의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입장인데 개헌을 통한 지배체제의 재편 보다는 제헌의 관점에서 지배체제를 혁명적으로 타파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다.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사민혁명론은 광주민중항쟁과 80년의 패배의 경험 속에서 길어올려진 혁명적 인식의 요소들이 종합된 것이라고 한다면, 삼민혁명론 이후는 그러한 혁명적 인식의 요소 중 지배적인 측면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보다 예각화된 혁명적이론을 둘러싼 논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즉 85년 이후 NL과 CA의 경우 삼민혁명론에서 병렬적으로 제기된 혁명적 인식의 여러 요소 중 무엇이 지배적인 것인가를 중심으로 정파적 대립이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민족해방론은 지배권력의 성격 중 지배적인 성격이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해서 종속성을 지배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보다 근본주의적 방식으로 정식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민중민주론은 지배권력의 성격 중 지배권력의 파쇼적 억압성에서 더나아가 맑스-레닌주의적 입장을 전제로 하면서, 지배권력이 독점자본의 계급적 도구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조하게 된다.
그러한 분화의 구체적인 과정을 본다면, 86년 경부터 자민투가 서울대에서 발족하고 반제직투反帝直鬪), 반전반핵투쟁을 중심으로 각 대학으로 확산되어가면서 이른바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은 확산되어가게 된다. 자민련은 기관지 '해방선언'을 통해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조국통일'의 3대투쟁을 선언하고 한국사회의 변혁의 논리로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을 주장하게 된다. 기왕의 MT계열은 NDR론을 기본골간으로 계승하면서 반제반파쇼투쟁을 선언하는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조직하고 기관지로서 '민족민주선언'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학생운동은 86년 상반기 이후 '자민투'와 '민민투' 조직으로 양분되었으며 '해방선언' 및 '민족민주선언'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하게 되는 것이다
)일송정 편집부, 1989, 앞의 책, 120-121쪽.
. 이 입장은 사회구성체론적 입장으로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갖고 현실투쟁 상으로는 반제직접투쟁론'이라는 이름을 85년말 경 출현하였다. 이 입장은 80년 초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 85년 5월 서울 미문화원 농성사건'을 획기적인 반미투쟁의 시발로 평가하면서, 그 투쟁의 성과를 IMF총회 저지투쟁을 매개로 확산시키고자 하였으며, 수입시장 개방요구에 드러나는 미국의 침략적 본질을 철저한 반미투쟁으로써 폭로·선전하고자 하였다.
이 입장이 처음 반제직접투쟁론으로 등장한 시기는 개헌국면이었다. 당시는 정치적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된 개헌문제에 대하여 학생운동, 나아가 전체운동이 어떠한 입장과 전술을 수립할 것인가 하는 점이 핵심적인 쟁점이 되고 있었다. 과연 당시의 상황이 개헌국면인가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개헌 국면으로 규정한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며, 또한 운동권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즉 개헌투쟁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닌가, 참여한다면 어떤 목적하에서 어떤 슬로건을 내걸고 어떤 투쟁원칙하에서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반제직투론이 등장하던 시기에 학생운동의 대세는 전학련'의 입장으로 대표되는 파쇼헌법철폐투쟁론'으로 수렴되고있었다. 이에 대해 반제직투론'은, 개헌은 외세의 식민지 파쇼체제의 안정화 음모'이므로 반파쇼투쟁'을 그 본질적 투쟁인 반미자주화투쟁으로, 즉 한반도의 실질적 지배자인 미국에 대한 직접적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입장은 85년 겨울을 거치면서 제3세계 변혁론 일반, 동구에서의 인민민주주의 혁명론', 한국 좌익운동사, 북한의 통일론과 혁명론 등에 대한 폭넓은 연구의 바탕 위에서, 서구의 일반 변혁이론과 구별되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론'으로 재정립되게 된다.
이 입장은 86년초 반전반핵' 팀스피리트 반대' 양키 용병교육 반대' 등의 투쟁을 계기로 반외세자주화'를 전면에 내걸면서 학생운동의 주류로 자리잡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의 투쟁방식은 좌편향'적인 것이라고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86년의 여러 정치적 경험 --5.3인천사태, 건대사건 등---을 통해 그러한 편향이 극복되면서 대중노선'에 기초한 투쟁방식이 그 중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87년의 직선제개헌'이라는 슬로건 역시 이런 맥락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입장에 따르면, 기존의 운동은 반파쇼민주화'의 지평에 머물렀으며 그것을 반외세자주화' 조국통일'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였다. 정작 이 3대 투쟁에서는 반외세자주화가 중심축을 이루는 것이며, 민주화와 통일(혹은 통일촉진운동)은 자주화를 위한 실천공간의 확대에 기여하는 것으로 위치지어져야 한다고 본다.
자민투와 당시 NL의 논리를 보자. "한국사회는 식민지성과 반(반)봉건성을 띈 자본주의사회구성체로서, 경제적 토대로서의 예속자본주의와 국가로서의 신식민파시즘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국의 신식민지 Fascism은 미제국주의와 예속자본가, 지주의 한국민중 지배의 도구로서 다은과 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다. 미제국주의의 지원없이는 하루도 지탱될 수 없는 괴뢰정권'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 괴뢰정권은 "한국의 민족해방운동의 폭력적 진압과 사회주의 공격을 위한 양키 지휘하의 미군 4만, 식민지용병으로서의 국군 70만, 민중을 정치로부터 소외시키는 '수다스런 오두막'으로서의 국회, 신식밈ㄴ지파쇼지배의 충실한 주구로서의 반동관료의 행정조직, 민중탄압의 첨병인 경찰조직, 신식민지 파쇼지배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잡아가두는 감옥 등"이 괴뢰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조직적 기반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국사회는 "미제와 미제의 앞잡이(예속자본가, 지주, 반동관료, 괴뢰정권)에 의해 파쇼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는 사회"로 파악된다.
자민투에 대립하여, 민민투는 "한국의 사회구성은 자본주의의 역사성 속에서 신식민지예속독점자본주의 단계이며, 이에 기반한 미국의 대소전진기지로서 예속군부파쇼를 국가권력으로 한다. 이는 우리 운동의 성격을 극명히 하는 바, 반제반군부파쇼 민족민주연립정부수립을 목표로 한다""우리 투쟁의 기본침로는 미국의 대소전진기지로서, 신식민지예속독점자본의 상부구축으로서, 미제국주의와 예속파시즘의 유착고리로서 '매판 정치군부처단'을 투쟁의 집중적 매개로서 정립하고, 이를 위해서 대중의 상식을 뛰어넘는 정치폭로의 전국적 조직화를 수행하여, 민족민주전선의 실천적 토대를 구축한다. 또한 군부파쇼와 기회주의적 야권의 정치적 갈등을 예각화하면서 대중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전술적 매개로서 활용하며, 여권의 기회주의성을 폭로,고립시켜 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 )'민족민주전선' 창간호, 일송정 편집부, 1989, 앞의 책, 123쪽에서 재인용.
NL 및 자민투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정형화된 혁명적 인식의 여러 차원 중 지배의 종속성과 식민지성을 한국사회 성격의 제1의적 측면으로 설정하고 혁명의 성격을 바로 그 문제와 대결하는 반제반미혁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의 당위성에 대한 역사적, 사실적 근거는 광주민중항쟁에서의 미국의 개입이었다.
이 입장은 기존의 사회운동과 그 인적 기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몇가지 중요한 문제제기를 하게 된다
)이상은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89a, 앞의 글,26-29쪽.
. 첫째, 한국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은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적 지배'에 의해 규정된다고 하는 점이다. 한국사회의 식민지성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한국사회 구조분석 및 사회운동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의 변혁은 그러한 식민지성의 극복을 주요과제로 하는 민족해방혁명'(NLR)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사회의 분석에서 남한사회만을 독자적인 단위로 놓고 사회구성체적 분석을 하는 것은 분단이데올로기를 용인하는 것에 다름아니며, 따라서 한반도전체적' 민족전체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른바 반국적 시각'이 아니라 일국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한사회는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미해방된 지역이며 북한사회는 그 지배로부터 벗어난 민주기지'이므로, 남한사회의 변혁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사회의 변혁역량에 대한 적절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사회 내부로 보면 6·25 이후 단절을 경험하고 새롭게 성장한 변혁운동이 과거의 전통과 연속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셋째, 2차대전 후 한국사회에 대한 외세의 지배과정은 군사적 점령과 전쟁을 통해 민족역량을 무력으로 소멸시키고 일방적으로 토착국가권력을 구축시켰는데 이는 정치적 병합에 가까운 것으로서, 토착국가권력은 자율적인 것이기보다는 외세에 전면적·총체적으로 예속되어 있는 괴뢰'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의 과제는 연속적으로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넷째, 반(半)봉건적 성격에 대한 강조이다. 이 반봉건성이야말로 한국사회에 대한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지배'가 가져온 반동적 결과의 집중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가 발달했다고 해도 민족분열이 고정화되고 통일민족의 형성이 저지되며, 자립적 민족경제의 기반이 축소·파괴되고 예속성만 심화된다면, 반봉건의 청산'을 운위할 수 없다 는 것이다.
다섯째, 제국주의적 지배로부터의 북한사회의 해방' 및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철학적·사상적 기초가 된 바 있는 주체사상' 혹은 주체철학'을 조직적·사상적 통일성'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의 기본원칙을 제국주의단계의 식민지종속형 사회의 변혁과정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더 나아가 맑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한---사상이라는 것이다.
여섯째, 기왕의 2단계 혁명론---당면 부르조아 민주주의혁명이 근본변혁'으로 성장·전화한다---을 부정하면서, 식민지종속형 사회에서의 변혁은 노동계급에 의해 영도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광범한 제계급·계층에 반제애국통일전선으로 결집되고 이에 의해 민주변혁과 나아가 근본변혁이 수행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혁의 길에서는 반제통일전선 내에서 어느 계급이 헤게모니를 갖느냐에 의해 변혁의 성격이 결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반제통일전선의 건설·확대와 그 내부에서의 노동계급의 헤게모니 획득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입장에서는 자주적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주변혁의 달성은 부르조아혁명의 틀 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등 민중의 헤게모니가 관철되는 PDR(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적 성격을 갖게 되며, 본질상 그것은 이미 근본변혁의 1단계, 혹은 프롤레타리아독재의 1단계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NLPDR이라는 변혁론을 수용하는 입장들의 기본적인 사회이론적 토대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후 반봉건론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이 입장에서 식민지자본주의론'
) 그 원형적 입장에 대해서는 '만만세' 참조. 서울지검 공안부 편, 1990, {좌경이론의 실제, 100-113쪽; 박현채·조희연,,1989a, 1989, 앞의 책, 366-373쪽에 재수록.
이라는 또다른 분화된 입장도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내적으로는 그 사회이론적 규정에서 분화를 겪으면서 그 입장을 더 정밀화해가는데, 나중에는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론'
) 식민지반봉건론'은 그 반봉건론'에 대한 비판과 내부에서의 식민지자본주의론'적 경향의 대두에 대응하여 식민지 반(半)자본주의론'으로 개념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개념전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가지 평가가 존재한다. ① 그러한 개념전환은 사회경제적 분석의 내용변화를 전혀 수반하지 않고 있으므로 무의미하다. ② 그간 NL론에서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에 대한 적극적 분석이 부재한 상태였는데 식민지반자본주의로의 개념전환은 그러한 분석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진일보한 시도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에 대해서는 박현채·조희연 편(1989a) 제6부 1장 2절; 한국사회 성격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문제에 대하여 ,열사람 편집부 편, 1989, {민족해방운동의 사상과 이론}, 열사람 참조.
이라는 입장으로까지 나아간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적 입장이 정립되어가는 것에 대응하여, 그 반대의 입장에 선 부류들은 이른바 민족민주혁명론'(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NDR)이라는 변혁론을 근거로 하면서 전술적으로는 제헌의회(Constituent Assembly, CA) 소집론으로 정형화되어간다. 이 제헌의회론은 출발 당시 사회구성체에 대한 논의를 현학적이고 비실천적인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당면 정치적 상황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나타내는 전술적 결의'를 통일시키는 일에 모든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에 이 그룹은 사회구성체론을 도입하여 한국사회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게 된다.
이 입장 내부에도 다양한 편차가 있어 일률적으로 정식화하기는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징적인 주장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식반론의 식민지 규정에 대립하여 신식민지'라는 규정을 수용하고 있다. NL의 식민지 규정은 후진사회에서 전후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직접지배에서 간접지배로의 전환을 적절히 해명하지 못하며, 또한 자본주의 발전에 의해서 제국주의의 토착동맹세력이 전환(지주계급에서 독점자본가계급으로)한다는 사실도 간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후진국 민족해방운동의 고양, 사회주의권의 확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에 대응하여 이전의 지배와 착취방식을 포기하고 간접지배와 자본주의적 수탈양식을 매개로 한 새로운 지배를 시행한다는 것이다. 둘째, 이 입장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 토착국가권력의 전면적 예속성을 강조하는 데 반하여 토착국가권력의 완전한 자율성을 강조하지는 않으나, 토착국가권력의 독자적인 (자본주의적) 물적 토대가 존재하며 따라서 토착국가권력의 지배적 성격은 외세에의 예속'에서 보다는 독점자본가계급의 계급적 지배도구'라는 점에서 주어진다고 본다.
한편 변혁의 과정에 대해서 CA는 소비에트적인 이행의 길'을 변혁의 일반적 과정으로 수용하면서 연속 2단계론'적 혁명모델을 상정한다.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정식화되는 한국의 사회구조는 한편으로 근본적 변혁을 위한 물질적 전제를 광범위하게 창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본적 변혁을 제약하는 물질적·정치적 조건도 창출한다. 즉 낮은 생산력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성장과 투쟁력의 발전이 지체되며, 정치적 자유가 박탈되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화와 조직화가 심각하게 장애를 받게 된다. 당면 민주변혁은 이 두 가지 제약조건을 타파함으로써 근본변혁으로 성장·전화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력발전에 대한 질곡을 제거함으로써 근본변혁의 물질적 전제를 확보하고,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통해 자본주의 자체를 극복하기 위한 계급투쟁이 전면화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다. 이때 반제반파쇼민주화'를 지향하는 당면 민주변혁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생산력을 전면적으로 개화시킨다는 점에서 부르조아혁명에 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CA의 NDR적 입장에서는 부르조아적 혁명으로서의 당면 민주변혁이 근본변혁을 위한 물질적·정치적 조건을 창출하면서 근본혁으로 성장·전화해가는 것이 된다. 이러한 CA적인 혁명모델을 NL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의 일반적 형태, 즉 혁명적 국가권력의 소비에뜨적인 형태'에만 집착하는 것으로서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사회의 변혁과정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두 입장의 대립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논쟁의 출현이 NL의 대두에 의해 계기지어졌기 때문에, 제국주의 지배'의 문제를 전면화시킨 NL적 시각이 던진 운동사적·이론사적 파장을 먼저 분석해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먼저 운동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85년 학생운동권 내의 MT는 과학적 운동론의 정립을 표방하면서 계급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의 전망을 강조하고 나왔으며, 이것이 광범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85년의 운동과 이론적 작업을 규정하는 사회인식의 기본적 내용으로 정착하였다. NL의 대두는 바로 이처럼 85년의 인식지평에서 확인된 계급해방의 문제를 민족해방'의 전망에서 재조명할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NL의 대두에 의해, (남한) 사회 변혁을 단순히 계급해방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넘어서서 계급해방과 민족해방이 통일된 새로운 사회변혁의 유형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한국사회운동을 인식하는 것은 한 사회의 계급해방의 과정을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좀더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한편 이론사적으로 본다면, NL론의 대두는 한국사회를 단순히 계급모순만이 심화되고 있는 자본주의사회 일반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서서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착종되어 있는 식민지종속형사회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사회)로 바라볼 수 있게 됨으로써, 제국주의적 규정성과 한국자본주의의 특수성의 통일적 파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이론적 과제에 착안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85년의 인식지평에서는 한국사회의 계급해방적 변혁에 복무하는 이론적 도구로서의 맑스주의'적 (혹은 ML주의적)원칙과 방법론의 정립이 이론적 중심과제가 되었다고 한다면, NL의 대두로 계기지어진 86년의 인식지평에서는 위와 같은 현실파악에 대응하여 식민지종속형' 사회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이 중심과제가 된다. 이 과제는 식민지종속형 자본주의화의 길을 경험하는 사회가 선발자본주의사회나 혹은 후발자본주의사회 등 제국주의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겪는 사회와 어떤 차별성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의 해명과 연관되어 있다. NL은 자본주의 일반의 분석논리만으로 한국사회를 분석하려는 경향들을 비판하면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계급모순의 프리즘에 의해서만 분석될 수 없는, 선진자본주의사회와 질적 차별성을 갖는 사회로서의 한국사회가 갖는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85년의 인식지평에서는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발전과 그에 따른 계급모순의 심화를 적극적으로 파악했다고 한다면, NL의 대두에 의해 전화된 논쟁지평에서는 바로 그러한 자본주의적 발전에 제국주의적 규정성 속에서 갖게 되는 특수성 그리고 그러한 계급모순이 민족모순과 결합됨으로써 갖게 되는 발현의 특수성을 더 적극적으로 파악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셋째, 그러나 사회구성체 및 변혁론 차원에서의 이러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의 삼민혁명론적 입장이 NL적 입장으로 단순화·예각화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남한혁명론 및 남한 사회구성체 인식에 있어서의 일정한 퇴행이 나타나게 된다고 보여진다. 그것은 미제국주의의 지배로 인하여 남한사회의 문제점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남한자본주의발전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같은 규정을 도식적으로 적용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이 규정은 일제하 혹은 해방공간에서의 남한사회 성격이라고 한다면, 60년대 이후 '식민지종속형' 자본주의발전--그것이 '식민지종속형'이라고 하더라도--이 가져온 남한 지배구조의 변화를 분석에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나아가 변혁론의 입장에서도 남한지배계급의 물적 토대와 정치적 자율성--그것이 제한적이라고 하더라도--을 '극소주의'적으로 인식하는 한계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NL 대 CA의 대립을 당시의 개헌국면에서의 투쟁방침의 차이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민족해방론과 민중민주주주의론은 정립 이후에는 당면 개헌투쟁에 대한 방침을 둘러싸고 가장 핵심적으로 대립하였다. 사회구성체론적이나 변혁론적 입장의 차이는 바로 그러한 당면 투쟁방침의 차이를 근거지우는 구조적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변혁적 입장을 둘러싼 입장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이었다고 하면, 이제 일정하게 정립을 완료한 상태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투쟁의 방침을 둘러싼 논쟁과 갈등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투쟁방침과 관련하여, 86년 이후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중요한 변화는 개헌투쟁국면 속에서 민족해방론이 대중노선을 표방하면서 직선제 개헌을 부각시키면서 혁명적 전위조직 건설의 문제의식 보다는 대중적 투쟁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게 된다는 것이다.
85년 2.12총선에서 신민당이 승리하면서, 개헌문제는 중요한 현안이 된다. 당시 학생운동을 비롯한 저항운동진영은 85년 하반기부터 97년 까지의 시기가 개헌을 위한 투쟁국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85년 하반기와 86년 상반기에 개헌투쟁을 둘러싼 입장은 개헌투쟁무용론, 직선제개헌론, 민주제개헌투쟁론,삼민헌법 쟁취론, 파쇼헌법철폐투쟁론 등으로 나뉘어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의 개헌투쟁은 그것을 목적의식적인 혁명투쟁의 관점에서 어떻게 위치지우고 이용할 것인가하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에 86년을 지나면서, 민족해방론의 입장은 개헌투쟁이 기본적으로는 미제국주의에 의한 파쇼체제의 재편시도라고 바라보면서, 미국은 기본적으로 파쇼체제의 변형을 목표하고 있지만, 민중적 압력을 통해 미제국주의가 파쇼체제를 민주적인 방향으로 재편하도록 강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와 파쇼세력 간에는 일정한 긴장과 갈등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직선제는 군사독재정권을 통해 남한을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국민의 손에 의한 권력창출의 기회를 부여하게 됨으로써, 미국 자신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군사독재의 재집권을 어렵게 함으로써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따라서 직선제는 미국의 식민지지배에 파열구를 낼 수 있는 혁명적 슬로건이다""직선제는 가시적 전선으로써 대중투쟁이 고양되어가는 과정에서 노골화되는 미국의 군부정권 지원의 실체를 폭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광범위한 대중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고 반민자주화의 섬광을 조직하여 반미자주화투쟁을 대중적으로 전개시켜 나갈 수 있다"
)일송정 편집부, 1989, 앞의 책, 134쪽.
라고 인식하였다.
반면에 민민투 쪽에서는 당시 상황을 '개헌국면'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류라고 판단하고, 개헌투쟁을 곧바로 반미투쟁으로 hf고 가려는 것을 반대하면서, 당면 헌법을 매개로 한 혁명적 정치투쟁으로의 발전이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면서, 제헌의회 소집을 통한 민중헌법 쟁취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민민투는 부산, 광주, 대구, 대전 등 전국의 주요도시에서 신민당의 개헌 현판식을 대중들의 혁명적 권리투쟁과 진정한 민중적 권력의지를 부상시키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개헌국면을 보수주의자들의 개량적 지배체제 재편의 계기로 방치하고 않고 이것을 혁명적 계기로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86년 4월 29일 연세대에서 '전국 반제반파쇼 민족민주투쟁학생연합'(민민학련)이 결성되면서 발표한 성명서에 따르면, "혁명적 민중은 '개헌'이 아니라 '제헌'을 요구한다--제헌의회 소집은 반동적 군사정권에 대한 민중의 혁명적 투쟁의 선언이며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주화 선언이며, 국회 등을 매개로 한 자유부르조아들의 추잡한 타협과 개량적 음모에 대한 폭로이다"
'혁명운동의 기수를 제헌의회 소집으로'.
라고 규정하였다.
자민투가 직선제 개헌을 개헌투쟁의 슬로건으로 정식화하게 되면서, 80년 이후 혁명화의 방향으로 급진화되어오던 학생운동은 대중성이란 이름으로 분명한 방향 선회를 하게 된다. 이러한 방향 선회는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의 투쟁에 중요한 변화를 동반하게 된다. 첫째는 당면 투쟁에서 '자유부르주아'(liberal bourgeoisie)적인 야당 정치인들과의 결합을 초래함으로써 이전과는 획기적으로 다른 대중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전과는 달리 개헌투쟁은 대중적인 투쟁으로 전개될 수 있게 되며, 이것은 87년 6월 항쟁이라는 정점을 향해 달려가게 된다. 자민투가 직선제 개헌론으로 선회하게 되면서, 87년 6월 항쟁에서의 국민적인 직선제 개헌 투쟁이 가능하게 된다. 민족해방론의 대중노선은 제도정당들의 입장과 결합되면서 직선제 개헌 투쟁이라고 하는 국민적 투쟁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80년대 반독재투쟁의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고 평가할 수 있다.
둘째 이와는 반대의 측면인데, 이것은 운동의 '개량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보수정치인들의 정치투쟁과 혁명진영의 개헌투쟁이 혼합됨으로써 제도권 정당들이 '개량'적인 방향으로 직선제 투쟁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대중들이 6.29 선언이라는 기만적 선언에 만족하면서 주저앉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된다. 87년 6월의 대립축이 6월 항쟁과 6.29 선언이라고 할 때,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6.29선언이라고 하는 '위로부터의' '개량'정책에 의해 수습되게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6월 민주항쟁의 '이중성'이다
)87년 6월 항쟁의 이중성(원인으로 본 이중성, 결과로서의 이중성)이다. 6월 항쟁은 군부정권을 퇴진시킴으로써 민주적 공간을 확장하였다는 점에서 진일보하였으나, 6월 항쟁을 통해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가 지배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본적인 민주화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6월 항쟁의 성격이라는 점에서 보면, 80년대 변혁적 논의와 실천의 맥락에서 보면, 지나치게 우경적인 투쟁으로 경도되었다. 그래서 제도정치세력과 군부세력 간의 타협의 가능성을 부여했으며, 6.29선언으로 중단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조희연, 1999a, "'종합적 시민운동'의 구조적 성격과 그 변화의 전망에 대하여", {당대비평} 겨울호.
또하나 중요한 점은 NL 대 CA의 새로운 대립구도 속에서 이전의 '원칙적인'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는 보다 현실적인 노선으로 구체화되게 된다. 즉 NL이 이전의 민중주체주의를 현실적인 노선으로, 즉 대중주의 노선으로 정립시켜가게 된다면, CA는 이전의 혁명적 전위주의를 보다 현실적인 노선, 즉 전위조직 건설노선으로 실현시켜가게 된다.
어떤 점에서 민족해방론의 대중노선 표방 속에서, 그 이전까지 혁명적 전위주의의 흐름에 일정한 반전이 나타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배태된 혁명적 인식, 즉 대중의 자연발생적인 주체성이 광범하게 존재하고 그 자연발생성에 혁명적 목적의식성을 보장하는 혁명적 전위의 부재로 혁명이 유실(流失)되고 있다고 하는 인식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민족해방론이 제기되면서, 그러한 혁명적 전위주의에 대립되는 대중노선이 보다 강조되어 왔다. 광주민중항쟁을 통해서 주어졌던 민중주체주의는 현실적인 대중주의노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앞서의 민중주체주의는 원칙적으로 입장으로서 혁명적 전위주의라는 목표와 결합된 채로 전개된 것이었고 한다면, 민족해방론에서의 민중주체주의는 일종의 대중주의 노선으로 경도되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민족해방론의 입장 변화와 달리, CA는 혁명적 전위주의의 입장을 보다 '현실적인' 입장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즉 이전의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가 '원칙적'인 입장이었던 데 반하여, 이제는 보다 현실적인 시도로 나타나게 된다. CA그룹은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에 투철한 전위'가 현실적으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의 혁명론을 따르는 제헌의회 입장에서는 철의 규율을 갖고 대중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사회민주주의적 혁명투쟁으로 지도하는 직업적 혁명가로서의 전위가 필요하다고 보았고, 스스로 이를 조직적으로 자임하였다. 이전까지 민중주체주의와 혁명적 전위주의는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되지는 않았으나, NL과 CA가 당면 개헌투쟁국면에서 대립하게 되면서, 한쪽은 혁명적 전위주의를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대중주의적 방향으로 더욱 선회해가게 된다고 생각된다. 어떤 점에서 상호침투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운동 내부에서 민족해방론이 대세를 점해가면서, '개량화된' 대중노선이 보다 중심화되어가고, 반대로 CA의 전위주의적 입장은 제헌의회 그룹 내의 소수입장으로 존재하게 되며, 대중성을 제약된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평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NL과 CA의 논쟁 이전의 논쟁은 '광주'를 자양분으로 하여 70년대적인 자유주의적 인식을 뛰어넘어 혁명적 인식을 '획득'되는 과정의 논쟁이었다. 그러나 NL과 CA논쟁 부터는 그러한 혁명적 인식이 일정하게 '획득'된 상태에서 그러한 혁명적 인식들이 보다 체계화된 혁명이론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의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선진적인 학생운동진영이나 사회운동, 노동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운동이 혁명지향적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문제는 그러한 혁명이 어떤 혁명이고 어떤 혁명운동이냐는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전의 논쟁에서는 광주의 경험과 교훈을 성찰하면서 혁명성을 발전시키려는 방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후의 논쟁에서는 그 논리 전개에서 일정하게 '광주'로부터 자립화한 측면이 존재한다. 혁명적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추동력은 바로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주어졌지만, 이제 혁명적 인식은 자립하여 자기전개를 하게 되는 것이다.
NL과 CA논쟁에서는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의 급진화와 투쟁주체인식에 있어서의 급진화 양면 모두에서 '획기적인' 인식의 심화가 나타나게 된다. 먼저 투쟁대상에 대한 인식의 급진화와 관련하여, 지배의 폭력성(파쇼적 성격)과 계급성 나아가 지배의 종속성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게 전제되고 있다. NL은 지배의 종속성은 지배의 식민지성이라는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CA는 지배의 계급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NL의 경우에 있어서도, 지배의 폭력성과 계급성이 고려되고 있으며, 그것은 매판독점자본가계급 등이 남한의 식민지권력을 운영하는 한 주체로서 참여한다는 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CA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남한국가는 남한독점자본가계급의 지배도구이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의 지배도구라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투쟁대상에 대한 혁명적 인식은 공유되어 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으로 투쟁주체인식의 급진화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앞서의 논쟁에서 드러났던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은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으로 보여진다. 민중의 구성에 있어서 이견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나, 양자 모두 노동자계급이 중심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노동자와 농민, 빈민 등이 민중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있으며, 학생집단은 선도적인 정치투쟁에 있어서, 혁명적 전위 형성에 있어서의 적극적인 역할 등으로 '주요역량'의 지위를 갖는 것으로 공히 파악되고 있다
)NL과 CA의 계급분석 및 혁명세력 구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조희연, 1989b, "현단계 사회구성체논쟁의 구도와 쟁점에 관한 연구", 박현채·조희연 편, {한국사회구성체논쟁} 2권, 죽산(폐업 후 한울에서 발행).
. 투쟁주체라는 점에서 NL과 CA가 갖는 것은 중간층의 혁명운동에서의 지위, 민족모순에 대항하는 중소부르주아지의 혁명적 잠재력의 문제 등 민중의 상층범위에 있어 이견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주체주의적 인식에서는 더욱 심화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4. 80년대 '광주문제'의 운동화과정
)광주를 둘러싼 쟁투(爭鬪)는 필자는 '광주의 의미를 둘러싼 쟁투', '광주문제 자체를 둘러싼 쟁투', '광주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쟁투'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80년대 전반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의미의 재해석과 계승을 둘러싼 쟁투를 광주의 의미를 둘러싼 쟁투라고 한다면, 광주문제 자체를 정치사회적 쟁점으로 만들기 위한 저항진영과 그것을 은폐하고 호도하기 위한 독재정권의 쟁투를 '광주문제 자체를 둘러싼 쟁투'라고 할 수 있다. 87년 이후는 광주를 배경을 한 신민당 및 평민당 등의 주요야당으로의 부상, 광주문제의 국민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투쟁으로 인하여 어떤 형태로든 광주문제의 정치적 해결이 모색되지 않으면 않되는 국면으로 되어간다. 87년 12월 대선에서 비록 군부세력이 재집권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87년 6월 항쟁의 규정성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광주문제의 해결이 필요하고 그런 점에서 이후의 시기는 광주문제의 해결'을 둘러싼 쟁투의 과정이 된다. 그런 점에서 '광주문제 해결을 둘러싼 쟁투'의 시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해결을 둘러싼 쟁투의 과정에는, 광주문제의 타협적 해결을 지향하는 흐름과 광주문제의 비타협적 해결을 둘러싼 흐름, 이 양자의 긴장과 갈등이 지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96년??? 전두환의 구속은 타협적 해결의 방향으로 가던 흐름이 '아래로부터의' 비타협적 해결요구투쟁에 의해 반전된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앞 절에서는 사상이론투쟁의 견지에서 광주민중항쟁의 정신적 유산이 어떻게 80년대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의 혁명화를 위한 지적, 정신적 기초로 수용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 자체가 규명되고 해결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으로서 어떻게 쟁점화되고 투쟁해 가는 가를 분석하고자 한다. 앞 절에서의 분석이 주로 광주의 정신적 유산이 어떻게 80년대 혁명적 인식의 자양분으로 전화되어가는 가를 살펴본다고 하면, 이 절에서는 광주민중항쟁에서의 국가권력의 폭압성, 양민학살, 학살자 처벌 등의 문제가 어떻게 쟁점화·운동화되어가는 가를 사회운동 슬로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의 분석이 주로 비합법적인 문건이나 운동에 초점을 두었다고 하면, 이 절은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문건과 운동에 초점을 두게 된다.
80년대의 전과정을 통하여 광주민중항쟁의 올바른 자리매김, 진상규명, 광주학살 처벌 등은 80년대 운동의 핵심적인 이슈이자 직접적인 요구사항이었으며 반독재민주화투쟁의 구성적 내용이었다. 특별히 80년대 운동에서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은 80년대 운동의 존재기반이자, 정신적 기반이었고, 운동의 직접적인 요구사항이었다.
'광주문제'가 쟁점화되는 과정은 크게 세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83년 말 유화국면까지의 시기를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한편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의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구속자 석방, 진상규명 등을 중심으로 운동이 전개되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광주문제가 선도적으로 제기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둘째의 시기는 유화국면 이후 85년 2.12총선까지의 시기인데, 유화국면의 시행으로 합법적·반합법적 공간이 확대되면서, 광주 진상규명과 구속자 석방, 학살자 처벌 등이 피해자 중심의 운동에서 사회운동 전반의 공개적인 이슈로 제기되기 시작하며 광주문제가 사회운동의 핵심적 구호와 이슈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세 번째 시기는 85년 2.12총선 이후 87년 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운동정치'로부터 '제도정치'로 이동한
)조희연, 1989a,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당대, 11-19쪽.
야당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이를 쟁점화하면서 광주문제가 재야이슈이자 원내이슈로 전개되는 단계이다.
첫 번째 시기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시기에서의 광주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여러 차원에서 다른 성격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광주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폭넓은 공감대를 갖는 운동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인 차원에서는 그것이 공개적인 투쟁이슈로 부각되지는 못하고 있었고 학생운동 등 선도적 투쟁에서만 저항의 이슈가 되고 있었다. 공개적 차원에서는 단지 피해자 중심의 운동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먼저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피해자가 2,000여명에 이르는 대사건이었고,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사건의 본질이 너무도 명확한 상태였기 때문에, 넓은 공감대 위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공감대 속에서 광주의 학생운동은 서울의 학생운동과 같이 급진화되어가고 있었다. 전남대 9.29 학내 사태에 살포된 유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적과 아의 계급적 모순이 폭발적으로 격화 5.18광주민중봉기의 혁명적 좌절을 겪고 이제 우리는 한반도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으로서 제국주의적 파쇼의 반동적 일체화를 통탄의 아픔으로 경험하면서""4.19 이후 민중역량의 집결된 표현으로서 광주민중봉기는 적들과의 혈투를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적의 기득권을 재편하는 매판 파시스트 체제의 구축을 허용하고 축적된 민중역량의 분열과 와해, 이념적 혼란 및 당면 투쟁목표였던 민주적 제조건을 획득하지 못하였으나"5.18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첫째 전략부재의 무계획적 싸움--둘째--민중의 혁명적 요구와 투쟁내용의 급진적 수용에 실패--세째--민주적 제도적 조정과 전술적 응전력의 확보 및 고립분산된 모든 운동세력의 통일과 역량이 결핍--마지막으로 학생운동은--단순한 전체투쟁의 기폭제 역할로 끝나버렸다. --광주민봉은 해방이후--축적되어온 역량의 최고형태의 표현임과 동시에 교회운동, 인권운동, 학생운동체들의 결정적 자기한계를 나타낸 투쟁이었다. 5월 싸움은 싸움의 질적 전환을 요구하였고, 어떠한 세력이 주도하여 어떠한 내적 준비와 어떻게 하면 적을 효과적으로 타격을 가할 것인가를 보여준 싸움이었다."(전남대 "9.29 사태 유인물 내용 분석 및 해설", 1981.10,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235-240쪽). "싸움은 이제 단순한 현상유지와 현상개량의 보완적 싸움이 아니라 보수적 파쇼체제와 진보적 혁명세력 간에 양립할 수 없는 적대적 싸움이었다"(241쪽). 이 유인물은 70년대의 운동과 80년대의 운동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70년대와는 다른 혁명적 운동으로의 발전을 광주항쟁을 요구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 전남도민 5월 시국선언은 "5월 의거 기념일에 태극기를 게양합시다. 5월 의거 기간에는 검은 상장(깃)을 차고 오락을 삼갑시다. 5월 18일 정오 일제히 묵념하고 추모기념집회를 가집시다"
)"전남도민 5월 시국 선언문", 1981.5,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앞의 책, 220쪽.
라고 주장하고 있다. 81년 8.15 특사에 즈음한 윤공희 대주교는 강론에서 "국민적 화해와 화합을 추구하는 견지에서, 광주사태 관계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하는 방향으로, 계속적인 과감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윤공희, "국민적 화해와 화합을 위한 제언: 1981.8.17 특사 조치에 즈음한 월요미사 강론", 광주광역시 5·18사료 편찬위원회, 1997, {51.8 광주 민주화운동 자료총서} 2권, 224-225쪽.
그러나 초기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 때문에 또한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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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계급 사이

계급과 계급 사이: 『제철공장에서의 삶』에 나타난 노동과 종교와 예술
양 석 원
레베카 하딩 데이비스(Rebecca Harding Davis)의 중편소설인 『제철공장에서의 삶』(Life in the Iron-Mills)은 19세기 미국문학사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남북전쟁이 발발할 무렵인 1861년 4월에 권위 있는 『애틀랜틱 먼쓸리』(Atlantic Monthly)에 발표된 이 소설은 미국역사에서 남북전쟁이 갖는 획기적인 이정표로서의 의미를 미국문학사에서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제철공장에서의 삶』은 주로 남북전쟁 이후 1870년과 세기말 사이에 발달했던 미국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을 10년이나 앞당겨 보여주었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 예를 들어 콜럼비아 대학에서 출판된 『미국소설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American Novel)에서 로버트 슐먼(Robert Shulman)은 데이비스를 "선구적 사실주의자"로 지목하면서, 『제철공장에서의 삶』이 미국의 삶을 한 세대 앞당겨 탐구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셰런 해리스(Sharon Harris)는 이 작품을 명백히 자연주의적인 작품이라고 선언한다. (Shulman 172-73, Harris, Rebecca 28, "Rebecca" 5) 슐먼의 발언은 국역본 『미국소설사』 191쪽에서 찾을 수 있음.
이 소설의 선구성이 평자들의 관심이 될 정도로 이 작품은 시대를 앞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결코 시대를 초월한 문학은 아니다. 데이비스의 작품은 그녀가 살았던 미국사회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집요한 관심의 산물이었다. 놀랍게도 데이비스의 유년시절에 그녀의 문학적 상상력을 가장 크게 자극했던 작가는 미국 로맨스 문학의 대표자인 호손(Nathaniel Hawthorne)이었고, 월터 헤스포드(Walter Hesford)는 호손이 데이비스의 "문학적 스승"이며 데이비스는 호손의 로맨스의 문학적 성과를 공유하고 확장시켰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Hesford 76, 70). 하지만 주목할 것은 "내가 매일 같이 보았던 일상적인 사람들과 사물들도 기사나 순례자들만큼 [책의] 마법적인 세계에 속한 신비로움과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데이비스가 회상하듯이 그녀가 호손에게서 받은 문학적 영감은 일상적인 사물의 매력이었다(Hesford 71, Olsen, 71). 사실과 상상의 중간지대라는 호손의 로맨스에 대한 정의를 상기한다면 호손이 데이비스에게 미쳤던 영향은 로맨스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데이비스의 회상은 그녀의 관심이 일상적인 것으로 향해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실제로 사실주의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과 사실에 대한 관심은 시기적으로 남북전쟁 후의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데이비드 쉬(David Shi)가 지적하듯이, 남북전쟁 이전의 가정소설에 나타나는 일상적 삶의 경험에 대한 세부묘사나 노예설화에서 노예들이 겪었던 실제 삶에 대한 묘사와 관심이 사실주의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185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 경제공황, 노예제와 영토확장에 따른 지역간의 갈등, 그리고 과학적 발전 등은 초절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세계관으로부터의 일탈을 가속화시키고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 남북전쟁이전의 사실주의의 발달에 관해서는 Shi, 3-41쪽을 참조할 것.
데이비스가 사실주의 문학을 시대를 앞당겨 실현시키고 있었지만, 그런 문학을 형성하게 했던 사회, 역사적인 조건은 이미 성숙해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데이비스 문학의 배경의 특수성은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이다. 특히 그녀가 살았던 버지니아주의 휠링(Wheeling)은 제철산업의 중심지로서 급속히 탈바꿈하고 있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 미국인구의 1/8이 외국인일 정도로, 급부상하는 산업자본주의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유럽으로부터의 이민노동자가 빠른 속도로 유입되고 있었다.
) 데이비스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는 티치(Cecelia Tichi)의 글을 참조할 것.
그 결과 노동계급의 존재는 가시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대두되게 되었으며 자연히 일상적 삶의 일부가 되었다. 데이비스가 주목한 일상적 현실이란 이런 노동자의 대두로 인해 빚어진 중산층과 노동자간의 계급적 차이였다. 그리고 데이비스 문학의 성과는 이 계급적 차이를 예리한 시각으로 포착하여 재현했으며, 동시에 이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탐구했다는 데 있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런 데이비스의 문학적 성과가 『제철공장에서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다.
부유한 사업가의 딸로 태어나 당시에 여성에게 허용된 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중산층 가정이라는 문화적 공간적 제약에 속박되어 있었던 데이비스에게 가정 밖의 현실은 쉽게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Olsen 83). 그러나 데이비스는 후에 회고담에서 "유랑여행"(vagabond tramps)이라고 불렀던, 휠링의 거리를 걷는 도보여행을 통해 중산층 가정 너머에 있는 이민노동자의 현실을 접할 수 있었다(Tichi 6). 이 도보여행을 통해 관찰된 이민 노동자의 모습이 데이비스의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제철공장에서의 삶』에 등장하는 휴 울프(Hugh Wolfe)의 모습으로 탈바꿈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데이비스에게 있어서 관찰된 사실의 문학적 변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과정을 무엇보다도 어렵게 한 것은 중산층과 노동계급 사이의 경제적, 문화적, 공간적 장벽이었다. 미국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문학에서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게 될 노동계급의 문학적 재현의 문제는 재현의 주체인 중산층과 재현의 대상인 노동계급 사이의 불가피한 거리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윌리엄 딘 하우엘즈(William Dean Howells)의 『새로운 재산의 모험』(A Hazard of New Forutnes)이나, 제이콥 리스(Jacob Riis)의 『다른 반쪽은 어떻게 사는가』(How the Other Half Lives) 그리고 많은 자연주의 소설들은 계급적 타자의 재현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거리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 자연주의 소설에서의 이런 인식론의 문제에 대한 뛰어난 연구는 하워드(June Howard)의 책, 특히 4장 "Slumming in Determinism: Naturalism and the Spectator"를 참고할 것.
데이비스가 이 재현의 문제에 천착했다는 점은 작품 초반 화자의 진술에서 드러난다. 노동계급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는 문제는 결국 계급과 계급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데이비스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작품 초반부터 역설한다. 이 작품의 시작은 계급과 계급 사이의 공간적 거리가 와해될 만큼 중산층의 삶 역시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철공장에서의 삶』은 화자가 창문을 열어 제철공장 노동자의 끈끈한 숨결과 그들이 뿜어대는 담배연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장의 굴뚝에서 방출되는 연기로 인해 불투명하리만치 자욱한 공기를 느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탁한 공기와 연무는 창밖의 세계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화자가 살고 있는 중산층 가정 안의 깨진 천사상의 날개도 검은 연무로 뒤덮여 있다. 필립 하퍼(Philip Harper)가 지적하듯이, 공장의 숨막히는 공기가 중산층 화자에게 가하는 이런 압박은 산업자본주의의 기계문명이 중산층 가정이라는 사적 공간을 침범하고 있음을 나타낸다(Harper 223).
) 국역본은 『미국소설사』 243쪽.
감상주의 가정소설의 무대였던 중산층 가정은 더 이상 산업자본주의의 노동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화자가 느끼는 현실의 중압감은 중산층 가정 밖의 영역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중산층 가정의 밖은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요소를 지닌다. 데이비스가 호손에게서 일상적인 것의 신비로움을 느낀 것처럼 화자의 창문 밖의 세계는 알 수 없고 파악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을 담고 있다. 화자는 비 사이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술 취한 아일랜드 이민 노동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건너편 상점의 모습을 "거의 보기 어렵다"고 진술한다(39). 이런 시각적 장애에 대한 화자의 토로는 창문의 안과 밖의 경계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산층 화자와 이민 노동자들 사이에 남아 있는 거리를 나타낸다. 화자는 방 뒤편의 창밖으로 강물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 "노예같이 매일 짐을 나르는 검둥이 같은 강물 표면위의 지치고 무감각한 표정"을 상상했었음을 술회하고, 다시 거리쪽의 창밖을 내다보며 제철공장으로 몰려가는 이민 노동자들의 "느린 흐름"을 목격한다(40). 흑인 노예 같은 강물과 이민 노동자들의 물결 사이의 비유는 남부의 노예제와 북부의 공장 노동제 사이의 비유이지만, 놀랍게도 이 비유는 노예제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산업노동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 귀결된다. 강물은 "저 너머에 향기로운 햇볕과, 부드럽고 푸른 사과나무 잎새로 우거진 그리고 장미의 붉은 빛으로 빛나는 오래된 정원, 공기, 들판, 산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거리를 지나가는 웨일즈계 이민 노동자의 미래에는 "공기도, 푸른 들판도, 진기한 장미도 없다"(40). 노예제의 미래가 푸른 들판에 도달할 것을 기다리는 강물처럼 낙관적인 반면, 이민 노동자의 미래에는 전원적인 자연에 대한 전망이 부재하다는 점은 북부의 공장 노동제가 남부의 노예제보다 더욱 가혹하다는 비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실제로 남부 노예제와 북부 자유주의 경계지역에 살았던 데이비스는 북부의 산업노예제를 비판했던 남부의 노예제 옹호가들의 수사학에 많이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데이비스를 노예제 옹호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그녀는 북부의 임금노동자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남부의 노예문제만을 공격한 과격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비판한 것으로 알려진다. 친노예제적 수사학과 데이비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헨우드(Henwood)의 글을 참고할 것. 노예같은 강물과 노동자의 물결의 비유가 친노예적 수사학과 갖는 유사성에 대해서는 Schoket 50, Pfaelzer Parlor 50쪽도 참고할 것, 이와는 달리 애이미 랭(Amy Lang)은 흑인 같은 강물이 낙관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것은 흑인노예들이 궁극적으로 해방될 것이라는 북부 백인들의 전망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134).
흑인노예보다도 못한 이민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화자의 이야기가 사실적이 되려면 매우 큰 인식론적 장벽의 극복이 필요하다. 따라서 안개 낀 날 "한가로이 창틀을 두드리며 비속으로 밖을 내다보는" 중산층 화자가 과연 어떻게 이민 노동자의 삶을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당연히 제기된다(40). 화자는 자신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내용을 과연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어떤 근거로 독자를 "나태하고 딜레탕트적인 방식으로 심리학을 연구하는" 자로, 혹은 "이기주의자 혹은 범신론자, 혹은 아르미니우스파교도"로 칭하며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뚜렷이 보지 못한다"고 질타하는 것일까?
) 화자의 성별과 정체성에 대해서는 많은 비평가들의 논평이 있어왔다. 데이비스가 여성임을 감안해서 인지 다수의 평자들이 화자를 여성으로 여기고 있다. 특히 팰져(Pfaelzer)는 화자가 가정에 구속된 중산층 여성으로서 자신이 이야기하는 노동자들의 삶에 공감하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이 질타하는 독자와 같이 그들의 삶을 올바르게 해석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Parlor 26). 반면에 샤이버(Scheiber)는 화자를 여성으로 여기면서 화자의 여성적 입장이 그녀가 비판하는 중산층 남성독자와 달리 억압당한 여성을 포함한 사회의 주변화된 영역에 대한 지식을 갖고 공감하고 있음을 지적한다(116). 샤이버에 의하면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의 비밀에 대해 권위 있게 말하는 것도 이런 지식에 기초한다. 이와 달리 제인 로즈(Jane Rose)는 작품 속에 화자의 성별이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노동계층의 주거지에 우연히 발을 들여 놓은 것으로 묘사되고 작품의 마지막에서 알 수 있듯이 밤에 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이런 행위들을 부가적인 설명 없이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화자는 남성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191). 윌리엄 셔(William Shurr)는 화자의 예술가적 특성과 그가 휴가 살던 집에 거주하며 휴의 조각상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 성경인용의 공통성 등을 토대로 화자가 등장 인물 중 한 사람인 미첼(Mitchell)이라고 주장한다. 미첼이 이민 노동자의 삶에 공감하여 기독교 유토피아주의로 개종하고 휴가 살았던 집으로 이주한 화자라는 셔의 주장은 화자가 어렸을 때의 삶을 회상한다는 점을 간과한 오류임을 지적하며, 리처드 후드(Richard Hood)는 유년시절부터 노동자의 삶을 경험하고 이 경험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자는 데보라(Deborah)라고 주장한다(78-80). 필자는 화자를 작중 인물로 보기는 어려우며, 성별이 명시되지 않은 중산층 예술가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화자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화자가 자신이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의 진실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이 진실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화자는 독자에게 "당신의 역겨움을 감추고" 자신과 함께 내려와 연무가 가득한 노동현실을 직접 경험하라고 촉구한다. 이런 공간적 이동을 통해 화자는 자신이 들려줄 노동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갖는 "비밀"을 독자에게 "사실적인 것"으로 제시할 것을 약속한다(41). 그러나 화자가 알고 있는 비밀은 "말 못하는" 것이며 따라서 화자는 그 "비밀을 감히 말로 옮기지 못한다"(41). 화자는 그 비밀을 노동자들이 대답하려 애쓰다 죽어간 "끔찍한 질문"이라고도 하며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이 이 질문을 던지지만 이 "끔찍하고 말 못하는 질문은 스스로의 답변"일 뿐 화자는 그 질문의 내용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한다. 화자가 겪는 이런 표현의 어려움은 "나는 감히 내 의미를 더 이상 명확히 하지 못하며 단지 내 이야기를 말할뿐"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41). 그리고 화자는 자신의 이야기가 연무처럼 검고 불투명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독자의 눈이 화자의 눈과 같이 "깊게 볼 수 있을 만큼 자유롭다"면 독자에게 그 이야기는 "반드시 도래할 낮의 약속"을 지닌 새벽과 같이 밝은 것이라고 말한다(41).
II
주인공 휴 울프(Hugh Wolfe)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화자가 전개하는 이런 복잡한 진술은 중산층 화자가 노동자의 삶을 이야기해야할 필요성과 그에 수반되는 재현의 어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앞서 지적했던, 창밖의 노동자들의 모습을 명확히 바라보지 못하는 화자의 시각적 장애에 대한 언급은 궁극적으로 화자가 들려주고자 하는 휴의 삶의 재현이 쉽지 않다는 점을 나타낸다.
) 스토우 부인(Harriet Beecher Stowe)이 『탐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탐을 투명하고 쉽게 묘사하는 것과 데이비스가 『제철공장에서의 삶』에서 휴를 재현하는 데에서 겪는 어려움에 관한 비교에 대해서는 Lang 131-32쪽을 참조할 것.
말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비밀과 질문은 화자가 들려주는 휴의 이야기로 대치된다. 즉 논리적 설명이 아닌 문학적 재현이 화자가 비밀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수단이다. 그리고 화자가 중산층 가정에서 독자와 함께 내려와 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려는 이 이야기는 곧 계급과 계급 사이의 인식론적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화자가 들려주는 휴와 데보라에 관한 이야기는 우선 계급간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주디스 페털리(Judith Fetterl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작품이 던지는 일차적 질문은 계급적 차이의 문제이며, 화자는 이 차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제시한다(Fetterley 311).
우선 이 계급적 차이는 노동자를 동물에 비유하는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휴의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노동에 지치고 술에 취한 웨일즈 이민 노동자들은 "매맞은 사냥개"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휴의 저녁도시락을 갖고 제철공장에 찾아간 데보라의 모습은 공장 노동자들에게 "물에 빠진 고양이"처럼 보이며, 공장을 방문한 공장소유주 일행의 대화를 경청하는 휴는 "말 못하고 가망 없는 동물"에 비유된다(42, 46, 52). 후에 자연주의 문학에서 절정에 달할 인간의 동물적 모습에 대한 인유는 궁극적으로 중산층의 시야에 나타난 산업노동자의 모습이다.
) 이 점에 관해서는 Howard의 책 특히 3장 "Casting Out the Outcast: Naturalism and the Brute"을 참고할 것.
주인공 휴 울프의 이름 자체도 동물적 상태로 전락한 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민 노동자들의 삶에는 중산층에게 허락된 가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요 등장인물인 휴 울프와 그의 아버지, 휴의 사촌인 데보라, 그리고 휴가 사랑하는 젊은 소녀 제이니(Janey)는 무려 6가구가 세들어 사는 두 칸짜리 방에 기거하며, 그나마 이 방들은 노동에 지친 이민 노동자가 노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잠을 취하는 공간에 불과하다. 이민 노동자들의 삶은 19세기 중반에 감상주의 문화에 의해 사랑과 안식의 사적인 공간으로 예찬되었던 중산층 가정을 철저히 탈신비화한다. 휴와 그의 가족의 삶을 소개하면서 화자는 "그들의 삶은 그들 계급의 삶과 같이 개집같은 방에서 잠자고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리는 삶이라고 묘사한다(42).
노동자에게 가정생활이 허락되지 않고 주거공간이 개집의 역할에 불과한 이유는 끊임없는 노동 때문이다. 화자는 "공업도시의 거주자들조차도 노동자의 신체를 지배하고 매년 끊임없이 진행되는 체제의 거대한 기구"를 알지 못하며 "각 공장의 일꾼들은 군대의 보초처럼 규칙적으로 서로 교대하는 교대근무로 나누어져있다"고 말한다(45). 끊임없이 가동되는 공장의 톱니바퀴같이 거대한 산업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한 노동자의 삶에 가정생활은 존재할 수 없다. 데보라가 노동에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휴에게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제철공장으로 가는 모습은 중산층 가정뿐 아니라 여성을 가정의 천사로 찬양하던 "참된 여성의 숭배"에 대한 탈신비화요 비판이기도 하다(Pfaelzer, "Rebecca" 235).
) 가정성, 경건함, 순결, 순종성 등으로 정의된 참된 여성의 숭배에 대한 논의는 Welter의 글을 참조할 것.
노동자에게 가정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처가 아니라 노동력의 재생을 위한 공간으로서 공장과 같이 산업자본주의의 한 부분일 뿐이다. 또한 데보라 역시 직물공장의 노동자라는 점은 노동계급에게 남성/노동 여성/가정이라는 역할 구분도 적용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중산층과 달리 노동자의 삶의 무대는 가정이 아니라 공장이다. 천사와 같은 여성의 공간으로서의 중산층 가정이 천국에 비유될 수 있다면, 노동력 착취의 현장인 공장은 지옥과 같다. 데보라가 휴에게 저녁식사를 전달하기 위해 방문하는 제철공장의 모습은 불타오르는 지옥으로 묘사된다.
무시무시한 여러 형태의 불과 바람에 날리는 불길의 구덩이가 있었고, 모래사이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액체상태의 금속의 불길이 몸부림쳤으며 끓어오르는 불로 가득 찬 넓은 용광로 위로 유령 같은 사람들이 몸을 굽혀 이상하게 끓는 물체를 휘젓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로 붉은 빛 속에서 복수심에 찬 유령같이 보이는, 옷을 반쯤만 걸친 무리들이 번쩍이는 불덩이를 던지며 서두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옥의 거리 같았다. (45)
지옥의 유령으로 나타나는 노동자의 모습은 동물에 대한 비유만큼이나 계급간의 차이를 부각시킨다. 가정과 공장이라는 공간적 거리만큼, 노동자의 외모는 중산층의 시각에서 낯선 타자로 보일 뿐이다.
공간과 외모의 차이뿐 아니라 언어의 사용도 계급간의 차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데보라와 동료 여성 노동자, 제이니, 그리고 휴 및 다른 남성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사투리는 화자나 공장방문객들이 사용하는 표준영어와 확연히 구분되며 이는 계급간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나타낸다.
) 계급간의 언어적 차이에 대해서는 Doriani 197-98, Harris Rebecca 44쪽을 참조할 것.
계급간의 언어적 차이는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루는 공장 방문객의 등장에서 더욱 부각된다. 데보라가 제철공장으로 휴를 찾아간 토요일 밤 공장소유주인 커비(Kirby)와 그 동료들이 공장을 방문하고 이들이 공장을 떠나기까지 이들의 대화가 작품을 지배한다. 화자는 이에 앞서 어떻게 공장의 기계가 일요일 하루동안 잠시 베일로 가려졌다가 일요일 자정이 되자마자 "'고통 중에 있는 신'처럼 비명을 지르며 울어대는가"를 묘사하며 노동자의 절규가 기계의 소음에 의해서 은폐되고 동시에 표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45). 기계의 일부가 되어버린 노동자는 자신을 표현할 언어를 상실하고 이들의 고통은 기계의 소음으로 전치되어 나타난다.
) 후에 커비는 자신의 노동자들을 기계로 만들어야한다고 말하는데 (54), 이는 자본가에게 있어서 노동자가 기계의 일부로 인식됨을 보여준다. 신체의 기계로의 환원에 대해서는 Seltzer 132쪽을 참조할 것.
공장방문객들이 도착하자마자 기계의 소음사이로 목소리를 높여 고함치던 노동자들 사이에 갑작스런 침묵이 흐른다. 토요일 밤 노동자들이 기계가동을 멈추고 기계를 베일로 가리듯이 방문객들의 존재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베일로 덮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Harris, Rebecca 41).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자본가에 의해 억압되는 현실은 커비의 아버지가 과거에 유권자인 자신의 노동자 700명을 몇 마디 말로 설득해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게 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언어에 있어서의 계급적 차이는 이들간의 의사소통의 단절로 나타난다. 공장노동자들은 방문객들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며 이는 방문객들이 간혹 불어나 라틴어를 사용하는 등의 언어적 용례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노동자와 중산층 방문객들 사이에는 언어적 용례를 떠난 의사소통의 단절이 존재한다. "용광로 일꾼들에게 그리스어도 [방문객들의 대화만큼]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 만큼 이들 사이에는 언어적 문화적 장벽이 놓여있는 것이다(52).
커비 일행의 공장 방문은 두 계급 사이의 만남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들의 방문은 따라서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계급 사이의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이들의 방문의 결과는 두 계급 사이의 단절을 확인시킬 뿐이다. 방문객들은 자신들이 목격하는 노동현실의 진실을 직시하지 못하며 따라서 노동자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다. 이들 중 신문기자는 노동자들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독관인 클락(Clarke)이 들려주는 공장의 사업계획에 대한 일정을 받아적기에 바쁘고, 나머지는 "단지 재미로" 공장을 견학한다(50). 그중 커비는 자신이 토요일에 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노동자에 대한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낼 수 있다"고 말하며, 미국사회는 사다리와 같은 계층적 구조로서 누구든 이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고 믿고 이 계층적 구조를 모든 사람이 동등한 평면적 구조보다 선호한다(56). 메이 박사(Dr. May)는 휴에게서 조각가로서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 재능을 살리라고 권고하지만, 휴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자신은 돈이 없다고 대답한다. 노동자들에게 구원의 손길이 닿기를 기도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믿고 이런 스스로의 모습에 자족하는 메이 박사의 종교적 허위는 휴가 미첼의 지갑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19년 징역형이라는 과도한 처벌을 받게 된 것을 알았을 때 휴를 배은망덕한 치한으로 비난하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방문객들 가운데 노동자에게 가장 공감할 능력이 있는 인물은 커비의 인척인 미첼이다. 실제로 미첼과 휴 사이에는 일종의 본능적인 공감이 오간다. 그는 공장에서 발견한 여성 조각상의 작가가 휴인 것을 알아차리며, 휴 역시 미첼을 바라보며 그의 세련됨을 흠모한다. 그러나 미첼은 노동자의 현실을 인식하지만 노동자와의 거리를 유지하며 즐기는 냉소주의자이다. 예컨대 그는 작업하는 노동자들을 보면서 불빛이 밝을 때보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노동자들의 모습을 더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노동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은 그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런 미첼에게 휴가 제련과정에서 나온 쇠찌꺼기로 조각한 여성 조각상은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얗고 거대한 규모의, 어떤 과격한 경고의 손짓으로 팔을 내뻗고 땅에 웅크리고 있는" 이 조각상은 미첼을 깜짝 놀라게 하며, "굶주린 늑대의 얼굴과 같은" 표정을 지닌 근육질의 벌거벗은 이 조각상을 보며 미첼은 멀리 떨어져 침묵한다. "그 형상은 그를 이상하게도 감동시켰다"는 화자의 진술이 암시하듯이, 미첼은 이 조각상이 담고 있는 노동자의 고통과 절규를 인식하는 듯이 보인다(52-53). 메이 박사는 이 조각상이 여성노동자이며 노동계급을 대변해주고 있다고 말하고 휴에게 이 조각상으로 무엇을 의미했는가라고 묻자 휴는 그 조각상이 배고프다고 말한다. 메이 박사가 그 조각상이 배고프다고 보이기에는 너무 강하다고 말하자 휴는 조각상의 배고픔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당신과 같이 살수 있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대한 배고픔이라고 대답한다(54). 당신과 같은 삶에 대한 욕망이라는 휴의 발언은 분명 계급의 차이를 극복하고 노동자의 삶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 대화에서 미첼은 "역겨움의 표정"을 하며 메이 박사에게 못참겠다는 듯이 "당신은 눈이 멀었소? 저 여자의 얼굴을 보시오! 저 얼굴은 신에게 질문하며 '나도 알 권리가 있다'라고 말하고 있소. 저런! 얼마나 배고픈 표정이오!"라고 외친다(54). 이런 발언에서 명확히 드러나듯이 미첼은 조각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순간적 인식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후의 미첼의 행동은 여전히 그가 노동자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연극을 구경하는 흥이난 관객의 태도"를 지니고 말하고, "아침에 보기 드문 모자이크 그림을 바라보듯" 휴를 바라보는데, 이는 그에게 휴가 단지 미적 대상에 불과함을 의미한다(55). 실제로 미첼의 성격은 "북극 공기만큼 차다"고 묘사되고 그의 자아는 "얼음"에 비유될 만큼 그는 따뜻한 동정심을 결여한 인물이다(55, 51).
) 이 얼음과 차가움에 대한 은유가 데이비스의 후기 작품에서 산업사회에서의 인간관계를 나타낸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Harris, Rebecca 46쪽을 참고할 것.
휴가 후에 도둑질의 죄목으로 재판받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는 휴를 법정에 서게 했을 만큼 휴에 대한 개인적인 연민보다는 자신의 사유재산에 대한 권리에 더 집착하는 인물이다. "언젠가 그들의 쓰라린 필요로부터 그들 자신의 빛을 가져오는 자가 생겨날 것"이라는 그의 전망에서 알 수 있듯이, 미첼은 노동자의 문제를 계급적 차이를 만들어낸 사회전체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계급 사회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인물인 것이다.
III
커비와 그 동료들의 공장방문은 자본과 노동, 중산층과 노동계급 간의 단절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요성은 계급분열의 현실을 그려내었다는 점뿐 아니라 이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탐구했다는 데에 있다. 이런 탐구는 우선 휴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휴가 계급분열의 극복을 시도할 주인공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은 그가 공장 노동자의 신체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에서 암시된다. 그는 폐병을 앓아 나약해져서 남성의 원기를 상실하고 여성화된 인물이다.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동료 노동자들이 "몰리 울프"라고 부를 만큼 여성적인 그의 모습은 작가 데이비스의 투영된 모습일지도 모른다(Rose 195-96, Pfaelzer Parlor 36, "Rebecca" 237, Fetterley 313).
) 이와 반대로 휴가 좌절된 예술가로서의 작가의 모습의 투영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Harris, Rebecca 36쪽을 참고할 것.
여성적이고 나약하다는 점 이외에도 휴는 잠시나마 학교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른 남성 노동자와 구별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쇠찌꺼기를 재료로 조각상을 만드는 예술가라는 점은 그가 노동을 넘어선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을 명료히 보여준다. 화자는 휴를 소개하면서 휴의 영혼 속에 "미에 대한 강렬한 갈증"이 있으며 "현재의 자신과 다른 . . . 무엇인가가 되고자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48). 배고픔을 표현하는 휴의 조각상은 따라서 자신의 계급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휴의 욕망이 예술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냉소주의자인 미첼마저도 감동시켰던 휴의 조각상은 분명 노동자의 현실과 욕망을 전달할 수 있는 예술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 필자와는 달리 로즈(Rose)는 방문객들이 조각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조각상을 의사소통의 실패로 보고 있다(196).
그러나 계급분열의 극복에 대한 휴의 욕망은 방문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크게 바뀌게 된다. 우선 휴는 미첼에게서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미와 진실에 정통한 이상적인 인간형을 발견한다(59). 그러나 앞서 지적했듯이 미첼의 실제 모습이 얼음과 같이 차가운 냉소주의자라는 점에서 휴는 미첼에게 환상을 갖는 과오를 범한다. 더구나 해리스가 지적하듯이 휴의 비극은 미첼의 이기주의적인 미학적 가치관을 받아들인다는 데에 있다(46). 휴는 미첼의 이상화된 모습을 동경하게 되면서 "자신을 갑작스런 혐오감으로 바라보게" 되며 자신의 혐오스러움을 떨쳐버리려는 듯이 자신이 입고 있던 검댕이 묻은 붉은 셔츠를 찢어버린다(59). 이는 곧 미첼이 휴를 대상화했듯이 휴 스스로도 자신을 혐오스런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조각상을 통해 노동자의 현실을 표현할 수 있었던 휴는 더 이상 노동 계급의 대변자가 되지 못한다. 그는 미첼과의 만남 이후 자신의 신분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광적인 고뇌 속에서"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을 "일으켜 세우고자하는" 희망을 망각하게 된다(59).
미첼은 휴가 방문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계급분열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돈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휴가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메이 박사가 자신은 돈이 없다고 대답하자 휴는 "수수께끼에 대한 추측된 대답을 반복하듯이" "돈인가요? 바로 그거죠, 돈인거죠?"라고 묻고, 미첼은 "그래 바로 돈일세. 자네는 세상의 모든 질병에 대한 치유책을 찾은 거야"라고 말한다(56-57). 물론 이 대화에서 돈의 중요성을 깨닫고 미첼의 지갑을 훔쳐 휴에게 건네는 것은 데보라이며, 휴는 처음에 훔친 돈을 돌려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데보라가 그것이 휴의 권리라고 권유하자 휴는 메이 박사가 권리라는 말을 사용했음을 상기하고 결국 그 돈을 자신의 권리로 받아들인다. 그는 "신은 . . .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 이 돈을 만들었어. 신은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를 만들지 않았어"라고 말하며 훔친 돈을 자신의 것이라고 합리화한다(63). 휴의 발언에서도 나타나듯이 휴에게 돈은 부자와 가난한자의 차이 즉 계급분열을 없애는 수단의 의미를 지닌다. 그 돈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휴의 의식에 "이 세계와 다른 또 다른 세계"의 비젼이 떠오른다(63). 이 때 휴는 "이 미와 만족과 권리의 세계에서 사소한 법률, 공장주인과 공장일꾼의 내 것과 당신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63). 돈을 손에 쥐는 순간 휴의 "내면에서는 권력에 대한 의식이 꿈틀거렸다"고 묘사되듯이 휴의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환상은 애초에 노동계급을 만들어 내었던 금권, 즉 자본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집착에 의해 유발된 것이다(63).
이 "소유에 대한 의식"은 휴가 자본가적 가치관에 물들게 된 것을 의미한다(63).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 휴는 거리를 헤매다 자신이 살던 지역에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방문하고, 빈민촌의 열악한 환경을 "새로운 혐오감"과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새롭고 막연한 두려움"으로 바라본다(64). 이 새로운 혐오와 두려움은 휴가 공장 방문객이 자신을 포함한 노동자들에 대해 느꼈을 것과 같은 차이와 거리를 자신의 동료 노동자들에게 느낄 만큼 이제 자신의 계급에서 멀어졌음을 말해준다. 휴가 도둑질의 죄명으로 19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유배된 생활을 하다가 자살하기까지도 자신의 환상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 해리스는 휴가 죽기까지 자본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Rebecca 47, "Rebecca" 15.
휴가 죽기 전 감옥의 창살 밖으로 지나가는 흑인 혼혈여성을 동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그녀를 조각의 소재로 삼을 것을 상상하는 것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노예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라는 점에서, 쇠찌꺼기로 만든 여성조각상을 만들었을 때와 같은 순수한 예술적 동기를 회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동시에 그가 가로등을 점등하는 조 힐(Joe Hill)과 마지막 말을 나누기 위해 목청껏 그를 부르는 행위도 역시 자신의 계급의 일원과 최후의 공감을 나누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점에 대한 간단한 논평으로는 Curnutt 156쪽을 참고할 것. 휴즈(Sheila Hughes)는 이 대목에서 휴가 자신의 과오를 깨닫는다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130.
그러나 휴의 이런 시도는 그가 상실했던 노동계급과의 유대감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하며, 휴가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동료들과의 유대를 추구했다하더라도 이는 적극적 실천이라 보기 어렵다. 더구나 그의 자살은 노동계급의 연대감에 대한 궁극적인 회의와 신분상승에 대한 절망을 입증한다. 또한 그의 죽음에서 어떤 구원의 표시도 발견하기 어렵다.
) 휴의 죽음을 일종의 "자기선언"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후드(Hood)의 견해는 크게 설득력이 없다(82). 반대로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휴의 죽음에는 구원의 자취를 찾기 어렵다. 예를 들어 Pfaelzer Parlor 50, Doriani 207쪽을 참고할 것.
그리스도와 같이 양팔을 뻗은 휴의 시신에 빛이 비칠 때 이 빛이 "안식과 평화를 함께 가져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화자는 자문한다(71). 죽음의 순간 휴의 뇌리에는 동료 노동자, 제이니, 데보라 등의 모습이 스쳐가지만, 그는 이들과의 일말의 접촉도 없이 최후에 철저한 적요와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
IV
공장 방문객들이 보여준 노동계급에 대한 무책임과 무관심 그리고 휴의 절망과 자살은 계급분열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회의를 입증하는 듯이 보인다. 이런 결론은 "이것이 끝이란 말인가? 아 인생은 연약하고 헛되도다! 어떤 대답이나 보상의 희망이 있단 말인가?"라고 작품의 첫머리에 화자가 인용한 테니슨(Tennyson)의 시의 절망감을 완성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휴의 죽음 뒤에 데보라가 3년형을 마친 뒤 퀘이커교도로 개종해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뿐 아니라 열악하고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대한 묘사로 점철된 작품의 곳곳에 역설적이게도 희망에 대한 암시가 깔려 있다. 예컨대 화자는 작품 초반에 독자에게 노동계급의 현실이 지니는 "비밀"과 "끔찍한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독자가 자신과 같이 깊은 안목을 지닌다면 자신이 들려줄 이야기에서 "확실히 도래할 날의 약속"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작품의 결말에서도 휴의 조각상이 "신이 새벽의 약속을 심어놓은" 동쪽을 가리키는 희망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다(41,74). 암울한 노동현실을 사실적이고 생경하게 묘사한 작품이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결론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모순적인 것으로 비판받기도 했고, 이를 유의미하게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 이 작품의 종교적 결말과 낭만주의적 경향에 대한 기존비판의 예는 Harris Rebecca 27-28쪽에 잘 요약되어 있다. 해리스는 퀘이커교도에 의한 데보라의 구원은 데이비스가 비판한 낭만적인 결론이며, 데이비스는 이런 낭만적 결론을 아이러니컬하게 제시하여 독자가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수용하기를 기대했다고 주장한다(Rebecca 29, "Rebecca" 19).
그러나 이 작품에 드러나는 희망적인 요소는 작품의 통일성을 훼손하는 것도, 아이러니컬하게 제시된 것도 아니다. 윌리엄 셔는 앞서 언급한 "확실히 도래할 날의 약속"에 대한 구절을 분석하면서 작품 초반에 화자가 언급한 "비밀"이 사실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는 명백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Shurr 247).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낙관적 미래에 대한 약속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만약 밝은 미래에 대한 약속의 근거가 작품 속에 주어져 있지 않다면 이런 약속은 추상적인 논리의 비약일 것이며 일부 평자들의 지적대로 작품의 결함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데이비스가 미래에 대한 확신의 근거를 논리적인 진술로서가 아니라 노동과 종교와 예술의 세 가지 차원에서 상상적 언어로 구체화시킨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노동의 차원을 살펴보자. 이 작품에서 노동은 산업자본주의가 노동계급에게 강요한 것으로서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착취하고 고갈시키며 궁극적으로 노동자로 하여금 자신이 만들어낸 상품뿐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부터도 소외시키는 소외된 노동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휴와 데보라가 겪는 노동은 그들에게 인간적인 삶의 향유를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들을 산업자본주의의 도구로 전락시킨다. 휴가 일하는 제철공장이 "지난 겨울 남부 버지니아 철도회사"를 위해 큰 주문을 맡았다는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휴와 동료 노동자의 노동은 바로 이런 거대한 산업자본주의의 경제논리에 종속된 것이며 자본가의 부를 축적시켜주는 데 공헌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41). 실제로 데이비스가 그리는 노동현실은 마르크스가 지적했던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한 실례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낮과 밤의 교대근무는 자본주의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이며, 자본주의 생산제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데이비스가 그리는 제철공장 노동자의 삶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이나 다름없다.
) 마르크스의 지적에 대해서는 Tucker 372-73, 409쪽을 참고할 것.
그러나 노동은 동시에 노동자의 결속을 가져온다. 자본주의적 공장제 생산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공간적으로 집약되게 되고, 서로 단결하여 노동조합을 만들며 이는 곧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으로 이어져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도래한다는 마르크스의 익히 알려진 주장은 노동현장이 곧 노동자들의 소외뿐 아니라 그들의 결속을 가져오는 변증법적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 Tucker 481-82쪽을 참고할 것.
데이비스는 물론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화된 노동운동이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철공장에서의 삶』은 적어도 노동자 사이의 감정적 유대 혹은 공동체 의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데보라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녀와 함께 공장일을 끝낸 여성 노동자들의 대화에서 우리는 그들이 작업속도가 늦은 동료의 일을 도와주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또한 비에 젖은 채 휴의 도시락을 갖고 제철공장을 찾아간 데보라의 모습을 보고 노동자 중 한 명이 가까이 와서 불을 쬐라고 권유한다. 이런 말과 행위는 노동자들 사이의 유대감의 표시로서 공장 방문객들이 보여주는 개인주의적 행동 양식과 다르다.
이런 노동계급의 감정적 유대를 가장 잘 구현하는 인물은 데보라이다. 해리스는 데보라가 독자를 휴와 같은 노동계급의 세계로 인도하는 중개자적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Rebecca" 8, Rebecca 32-33). 그러나 휴즈가 지적하듯이 데보라는 중간적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휴보다 더 노동계급을 잘 대변한다(Hughes 124-27).
) 휴즈는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데보라의 불구의 신체를 억압받은 자의 고통을 나타내는 따라서 신성을 드러내는 표식으로 읽고 있다.
데보라가 휴와 다른 점은 휴의 내면을 치밀하게 이해할 만큼 그와 감정적으로 동일시한다는 점이다. 휴가 데보라에게 보여주는 친절함은 "지하실에 가득찬 쥐들"에게나 보여줄 만한 것으로서 이는 데보라가 휴에게 비천한 동물적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46). 반대로 데보라는 휴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를 위해서 희생적으로 행동한다. 그녀는 공장 일을 끝내고 집에 오자마자 휴에게 저녁식사를 주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제철공장에 가며, 공장 방문객들의 대화를 듣고 돈이 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미첼에게서 지갑을 훔쳐 휴에게 건넨다. 데보라는 휴에게 돈을 건네며 자신을 제이니와 함께 데려가 준다면 제이니와 휴의 관계를 방해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겠다고 말한다. 데보라가 미첼의 지갑을 훔치는 행위가 이 소설에서 "가장 저항적인 행위"라는 팰쳐의 주장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런 행위는, 휴가 환상의 세계를 꿈꾸며 자신의 동료들을 혐오와 두려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동료 노동자에 대한 애정에 기인한 것임은 분명하다(Pfaelzer "Rebecca" 238). 데보라는 휴가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에도 그의 내면을 읽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외치며, 휴가 죽은 후에도 퀘어커 교도에게 휴의 시신을 신선한 공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데보라의 이런 일련의 행위들은 휴의 개인적 야망 혹은 환상과 대조를 이루고, 그녀가 동료 노동자와 감정적 유대를 이루며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 휴가 개인적 야망에 눈멀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상실하고 결국 고독 속에서 죽어간다면 데보라는 동료 노동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계급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연대감을 깨닫고 실천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명목상의 주인공은 휴이지만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중심은 데보라이다.
) 이 점에 대해서는 Curnutt 157, Pfaelzer Parlor 51쪽을 참고할 것.
데보라가 보여주는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 의식은 퀘이커교도의 등장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영역을 넘어선다. 퀘이커교도의 등장은 노동뿐 아니라 종교도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소설에서 기독교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작품 시작부터 화자의 방에 놓인, 날개가 연기로 뒤덮인 깨진 천사상의 모습은 산업자본주의의 병폐에 찌든 기독교의 무력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하다. 동시에 기독교는 노동계급과 거리가 먼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로 나타나며 따라서 노동계급의 구원을 가져올 수 없다고 암시된다. 작품 초반에 노동으로 탈진한 이민 노동자의 처참한 삶을 묘사하면서 화자는 "이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인가?"라고 물으며 많은 개혁가들이 "그리스도의 자비가 깃든 마음"을 지니고 노동자들에게 갔다가 "분노하고 마음이 굳어져 돌아왔다"고 말한다(42). 토요일 자정이 되어 일요일을 알리는 종소리가 제철공장에 울려 퍼질 때 이 종소리에 담긴 "숨겨진 메시지"는 노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치며, "부활한 구세주를 알리는 엄숙한 음악"에 담긴 "잘못된 세상의 검은 비밀을 해결할 바탕음"도 "베일에 가려져" 있다(52).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기독교의 모습은 또한 공장 방문객들이 사용하는 많은 기독교적 언어와 인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공장소유주인 커비는 주님을 들먹거리며 주님이 노동자의 문제를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고 말한다. 미첼도 커비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한다고 말할 때 이런 행위를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아무런 죄가 없소"라고 말하는 빌라도의 무책임한 행동에 비유하는데, 미첼의 이런 성경인용도 냉소적인 발언으로서 진지성을 결여하고 있다(55). 메이 박사 역시 휴에게 신이 예술적 재능을 주었다고 말하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는 노동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에 자족하는 자기기만에 빠져있다. 기독교의 이런 허위성은 휴가 데보라에게서 건네 받은 돈을 갖고 고민하다가 어느 교회에 들어가서 설교를 듣는 장면에서 절정에 이른다. 교회 앞에서 서성거리는 휴는 "신과 천국에 대해서 들은 바가 너무 없어서" 마치 어린 아이가 "요정의 나라"에 대해 느끼는 것 같이 기독교의 세계를 낯선 것으로 느낀다(62). 그리고 기독교로부터의 소외감은 휴가 교회 안에서 설교를 들을 때 현실로 나타난다. "울프와 아주 다른 계급의 요구와 연민의 정에 부응하기 위해 세워진" 교회 건물 속에서 휴는 알지 못할 감동에 젖지만, "생명과 사랑과 보편적 인간"에 대한 기독교 개혁가의 설교는 "다른 문화의 계급에 맞춰져 있어 용광로 일꾼의 이해를 넘어서 지나치고, 그의 귀에 알지 못하는 언어로 된 즐거운 노래처럼" 들린다(64). 이는 공장 방문객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개혁가의 언어도 노동계급의 이해를 넘어선 타자의 언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예들은 기독교가 계급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실천적 행동을 결여한 중산층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퀘이커교도의 등장은 이런 기독교에 대한 정형을 역전시킨다. 휴의 시신을 보러온 커비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가지만" 이들과 달리 한 퀘이커 여성은 끝까지 남아 시신을 지킨다(72). 데보라도 이 퀘이커 여성과 함께 끝까지 남아있다가 이 여성에게 휴의 시신을 신선한 공기가 부는 곳에 안치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리고 데보라는 자신의 형기를 마치고 퀘이커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그들과 함께 내세에서 "이곳에서 그녀가 거부당한 사랑을 만날 어떤 잠재적인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73). 그러나 퀘이커 공동체는 단지 내세적 기독교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데보라가 내세에서 어떤 사랑을 기대하건 간에 그녀는 이미 퀘이커 공동체 내에서 "이 조용하고 평온한 사람들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다(73). 이는 곧 퀘이커 교도의 신앙이 공허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당시의 퀘이커 교도가 노예제철폐운동 및 교도소 개혁을 주도한 행동주의자였다는 점은 그들의 종교가 실천에 기초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 퀘이커 교도들의 행동주의적 면모에 대해서는 Pfaelzer Parlor 52, Doriani 208쪽을 참고할 것.
더구나 퀘이커 공동체가 데보라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그들의 공동체 의식이 계급차이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며, 데보라가 퀘이커 교도가 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개종일 뿐 아니라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계급 사이의 거리를 가로지르는 사건이기도 하다.
) 필자의 입장과 달리 휴즈는 퀘이커 여성은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해방신학적 관점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오로지 억압받은 자의 고통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구원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은 데보라와 다른 노동자의 고난의 삶이라고 말한다. Hughes 130-33.
퀘이커 교도가 휴와 데보라에게 행사하는 사랑의 행위는 기독교 언어를 사용하던 중산층 인물들의 무책임한 수동적 자세와 대조를 이루며 종교도 노동계급의 구원을 위한 사회적 실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제철공장에서의 삶』에서 노동과 종교와 더불어 계급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근원으로 제시되는 것은 예술이다. 여기서 우리는 휴가 조각한 여성 노동자의 조각상을 다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샤이버는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휴가 자신의 미적 감수성 때문에 데보라와 동일시하지 못하고, 쇠찌꺼기를 소재로 여성의 신체를 예술작품으로 변모시키는 휴의 예술적 행위는 근본적으로 미학적인 행위로서 도덕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더구나 휴의 조각상은 남성에 의한 여성신체의 식민지화라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와 다를 바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샤이버에 따르면 휴의 조각상은 데보라의 신체를 모델로 한 것으로서 휴는 여성의 신체를 식민화시켜 자신의 내적 동경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고, 이런 의미에서 휴의 조각상은 남성적 감수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Scheiber 106-09). 그러나 휴의 조각상은 남성에 의한 여성신체의 식민화의 산물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환원될 수 없으며, 샤이버가 주장하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주요 갈등의 축이 계급이 아니라 성별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휴의 여성조각상은 휴가 유일하게 데보라를 비롯한 여성노동자와의 동일시를 이루어냈기 때문에 가능하다. 휴가 사랑하는 여성의 이미지는 제이니와 같이 가냘프고 연약한 여성의 모습이지만 조각상은 강하면서도 굶주림에 지친, 정의될 수 없는 욕망을 표현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반영한다. 조각상의 모습이 당대의 감상주의 문학에서 예찬되던 여성의 이미지와 결별한 것은 물론이다.
) 데이비스의 감상주의 전통과의 결별에 대해서는 Curnutt 157, Pfaelzer "Rebecca" 237, Parlor 43쪽, 그리고 Lang의 논문 전체를 참조할 것.
휴의 조각상이 노동으로 인해 강인해진 근육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데보라의 모습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조각상이 표현하는 굶주림과 갈망은 휴에게서 사랑받지 못하는 데보라의 정신적 갈망과 일치한다. 휴의 비극은 자신이 창조한 여성 조각상과 조각상의 실제모델인 데보라의 관계를, 그리고 자신의 조각상이 담고 있는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 데보라와 조각상의 유사성에 대해서는 Scheiber 107쪽을, 조각상에 대한 휴의 무지에 대해서는 Harris Rebecca 37쪽을 참고할 것.
휴의 조각상은 물론 데보라 개인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고통받는 노동계급 전체의 애환과 욕망을 표현한다.
이런 점에서 조각상의 재료가 쇠찌꺼기라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쇠찌꺼기(korl)는 철이 광맥으로부터 분리되는 제련과정에서 생성되는 것으로서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완전히 소화해내지 못하는 잉여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휴가 노동시간이 아닌 여가에 이런 제련과정의 잉여물을 가지고 조각한다는 것은 산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잉여로서의 노동자의 굶주림과 욕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사회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공장의 기계와 마찬가지로 자본제 생산양식의 일부로 작동하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에 완전히 편입될 수 없는 잉여로서의 욕망을 지니게 된다.
) 이 잉여로서의 욕망을 라캉의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또 다른 연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상징계에서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잉여로서의 실재계에 속하는 욕망에 대해서는 졸고 「욕망의 주체와 윤리적 행위-라깡과 지젝의 주체이론」을 참조할 것.
휴의 조각상은 이 잉여로서의 노동계급의 욕망에 대한 가장 극적인 예술적 표현이다.
이 작품의 최종적인 결론이 휴의 죽음이나 퀘이커교도로 개종한 데보라의 모습이 아니라 화자의 서재에서 팔을 뻗고 호소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휴의 조각상의 모습으로 맺어진다는 점은 자본주의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생산되는 잉여로서의 노동계급의 욕망에 대한 예술적 표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 조각상은 화자가 작품 처음에 인용했던 "끔직한 질문"을 반복한다. "이것이 끝인가?"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는가(nothing beyond)?" 화자는 앞서 이 질문은 그 자체가 답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화자의 이런 발언은 어떤 의미에서 옳은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이 보이는, 팔을 내뻗은 휴의 조각상 자체가 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beyond"라는 말 자체가 불가피하게 생성되는 잉여로서의 욕망을 나타낸다. 그리고 『애틀랜틱 먼쓸리』의 편집장인 제임스 필즈(James Fields)가 이 소설의 제목을 바꿀 것을 제안했을 때 데이비스가 『제철공장에서의 삶』대신 제시한 제목이 "Korl Woman"과 "Beyond"였다는 점은 데이비스가 노동계급이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잉여욕망으로서의 조각상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 제목과 관련한 필즈와의 서신교환에 대해서는 Olsen 86쪽을 참조할 것.
휴의 조각상은 바로 노동계급의 잉여욕망을 표현한다는 데에 그 예술적 호소력이 있다. 이 작품의 결론이 조각상의 모습인 것도 데이비스가 휴의 죽음과 데보라의 개종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는 노동계급의 욕망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조각상이 신이 "새벽의 약속"을 심어 놓은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는 낙관적인 결말은 이 해소되지 않은 노동자의 욕망이 언젠가는 해소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이런 희망이 가능한 것은 노동계급의 연대감과 종교의 실천성과 더불어 예술이 노동계급의 현실과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휴의 조각상처럼 데이비스의 소설은 해소되지 않은 계급의 문제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휴가 쇠찌꺼기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데이비스도 산업사회의 찌꺼기인 노동계급을 예술의 소재로 삼았다. 그리고 휴의 조각상이 팔을 뻗고 호소하듯이 데이비스의 작품도 당시의 중산층 독자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독자에게 해소되지 않은 계급의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점에서 데이비스의 작품은 계급과 계급 사이를 메우려는 예술적 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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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Two Classes: Labor, Religion, and Art in Life in the Iron-Mills
Abstract Seokwon Yang
Admittedly the first novelistic expression of American realism, Rebecca Harding Davis's Life in the Iron-Mills portrays the life of American working class in realistic terms. Davis's novella examines the gulf between the laborer and the middle class and explores the possible ways to bridge it.
The tragic story of Hugh Wolfe, a puddler in an iron mill and a sculptor, exemplifies the failed attempt of a worker to become a middle class artist. He accepts the money his cousin Deborah steals from a friend of the mill-owner and is prosecuted for the theft, and finally commits suicide in prison. Not only does he fail to cross the distance between classes, but he is also alienated from his own class since he idealizes a middle class gentleman and is coopted to his bourgeois values. Nor does he realize the true meaning of his statue which he makes out of korl, a leftover in the process of melting ores. The middle class characters who visit the factory lack the sympathy for the workers and the sincerity to understand them. Hugh's failure and the visitors' indifference to the other class throw the rift between classes in bold relief.
Davis, however, outlines three possible ways to overcome the social reality of the working class. First of all, Deborah's life serves as an alternative to Hugh's escapism and individualism. Unlike Hugh who espouses the bourgeois standard of beauty and shuns her deformity, she extends emotional and physical help to him, illustrating the solidarity between laborers. Secondly, a Quaker woman who saves Deborah by accommodating her into her community shows the potentiality of religion as a social practice. In contrast to Christian reformers and bourgeois visitors who advocate (but hypocritically fail to carry out) Christian charity, the Quaker community puts its religious faith into active practice. Finally, art shows the power of articulating the frustration and desire of the working class. Hugh's korl woman, the product of industrial waste, fleshes out the surplus desire of laborers with artistic appeal that reaches beyond the class boundary.
주제어: 사실주의(realism), 중산 계급(middle class), 노동 계급(working class), 노동(labor), 종교(religion), 예술(art), 자본주의(capitalism), 산업 사회(industrial society), 잉여욕망(surplus des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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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석의 서평

『영국 노동계급형성』 번역본을 보며
    <국민일보> 2000년 1월 24일자


                                                          이영석(광주대교수, 서양사)
 

에드워드 톰슨의 명저『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2차대전 이후 영국 역사학계에서 이룩한 가장 뛰어난 역사서술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동양권에서는 지금껏 완역된 적이 없다. 이 책은 그 동시대적 어법과 표현 때문에 번역의 사각지대에 계속 남아 있었다. 

이번에 나종일 교수와 그의 제자들이 번역본을 내놓은 것은 우리 서양사학계에서도 '기념'할 만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 기억으로는 이들이 번역 작업에 착수한 것이 1980년대 말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자그만치 십 여년 이상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역자들의 인내와 끈기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톰슨은 단지 대학이라는 제도권 안에 머물렀던 역사학자가 아니었다. 노동자 교육운동에 헌신한 교사로서, 그리고 좌파 계열 잡지의 편집인이자 반핵운동가로서 잘 알려진 톰슨의 생애는 실천적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가 잠시 워리크대학의 역사학 교수로 재직했던 일은 그의 이력에서 보면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톰슨이 1960년대 이래 젊은 세대의 역사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노동계급의 형성』때문이었다. 그는 이 한 권의 책으로 현대 역사학에 '아래로부터의 역사'라고 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 책은 다음 세대의 역사가들에게 끊임 없는 영감을 불어 넣어준 지적 원천이었다.

톰슨은 우리 서양사학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유신시대 이래 서양사 연구에 뛰어든 내 나이 또래의 연구자들은 대부분 톰슨의 지적 세례를 받으며 자신의 학문세계를 넓혔다. 우리는 톰슨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노동계급의 형성』에 나타난 톰슨의 기본 시각은 이제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그는 노동계급의 역사에서 경제적 요인을 중시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요인들의 규정을 받으면서도 스스로를 변모시켜 나아간 하층민중의 경험과 문화, 그리고 그들의 주체적인 역량과 의지를 중시하였다. 톰슨은 계급을 생산관계의 맥락에서 구조나 범주로 취급하는 경향을 비판한다. 계급은 다수의 사건들을 사람의 경험과 의식을 통해 하나로 수렴하는 현상이다. 그것은 사회학적 구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 스스로를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역사적 현상인 것이다. 또한 계급은 상호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자신들의 이해의 동질성과 다른 세력에 대한 적대감을 인식하고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계급의 형성에 결정적인 것은 '경험'이다. 그러나 그 경험은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겪는 사람들의 전통과 문화와 주체적 행동을 통해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톰슨은 이러한 시각에서 산업혁명 초기 영국 노동자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산업화에 따른 구조적 변화 이전에 근로민중이 가졌던 여러 전통과 문화를 밝히고, 이러한 전통 아래서 그들이 어떤 착취의 경험을 축적했으며, 또 그것에 주체적으로 저항해 나갔는가를 살핀다. 그는 이러한 테마를 장대한 서사로 형상화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톰슨의 책은 많은 사람들이 노동의 전진과 역사의 진보를 굳게 믿었던 저 1960년대의 낙관적인 시대 분위기를 반영함과 동시에 그 같은 분위기를 심화시킨 촉매제였다. 한 세대가 지난 후 이제 시대의 패러다임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계급의 전진을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계급의 해체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톰슨의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불가사의한 매력을 던져준다. 노동계급의 승리를 전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톰슨이 '후대인들의 멸시'에서 구하려고 한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아직도 지금보다는 나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전시대 사람들의 분노와 고뇌와 호흡을 느낄 필요가 있는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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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산업화와 노동계급 서평들

안병직 외,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 까치 1997
 
 
<책 소개>

이 책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러시아 등 유럽 5개국의 산업화 과정을 비교하고,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을 고찰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19세기 노동운동이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종래의 전통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산업화의 전진적 과정, 수공업 부문의 중요성, 수공업 노동자들의 헤게모니와 문화 등을 강조한다. 이것은 1970년대 노동사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책 차례>

서론

1장 영국 산업사회의 성립과 노동계급 (이영석)
2장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김현일)
3장 19세기 독일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 (안병직)
4장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 (안재흥)
5장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산업화와 혁명적 노동계급의 형성 (이채욱)
 


서평: 노동운동사에 대한 절충주의적 접근
 

                             김경일 (정신문화원, 사회학)
 
이 책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5개 나라에서 산업화와 노동계급이 형성되는 과정을 2년 여에 걸쳐서 연구한 공동 작업의 성과이다. 번역서를 제외한다면, 이 주제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5백쪽이 넘는 방대한 연구서를 발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책이 지니는 더 큰 의미는 공동 연구로서의 전범을 제시했다는 사실에 있다. 일관된 문제의식과 사례 연구들의 정합성, 그리고 개별 사례들 사이의 유기적 관련성 등에 대해 이 책은 매우 진지하고 통찰력 있는 시각들을 제시하고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노동운동은 19세기 서구의 산업혁명 과정에서 출현한 근대적 공장노동자들 핵심으로 하는 단일 계급의 주도하에 전개되었다. 이에 따르면 노동운동의 역사는 부르주아 계급의 착취와 국가의 억압에 맞서 노동계급이 승리를 쟁취해 나가는 끊임없는 진보로 가득찬 이야기이다. 이러한 거대 서사가 서구 계몽주의의 q보편적이고 목적론적 역사 해석을 반영한다는 최근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서 보듯이, 1960년대 이래 이러한 전통적 견해는 서구에서 발전된 새로운 노동사 연구들에 의해 반박되고 재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 책은 전통적 견해들에 도전한다. 이에 따라 유럽 산업화 과정은 급격한 생산의 혁신과정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었으며, 근대적 부문에 못지 않게 전통적 부문이 함께 공생하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된다. 노동계급 또한 내부적으로 단일한 동질의 사회집단을 이루었다기보다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노동운동의 성립과 발전 역시 경제적 요인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와 사회라는 변수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통적 해석들에 대한 일종의 신화파괴적인 이러한 주장들은 나아가서 노동사 연구에서 새로운 영역들로 확장된다.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전통적 부문이나 장인노동, 수공업 노동과 같은 전통적 요소들이 중시되고, 가족 관계나 생애 주기 또는 주거 환경 등과 관련하여 가족적 요소들이 강조되며, 새로운 소비생활과 놀이문화, 여가 및 노동자들의 집단적 자의식과 정체성(identity)이 부각되며 노동운동의 이념적 뿌리를 노동의 자율성이나 직업적 긍지와 자부심과 같은 전통적 도덕경제의 가치들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정주의 해석과 아울러 이 책은 아래에부터 위로의(from the bottom up) 시각을 제시한다.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관습을 일종의 범죄로 보거나 노동자 가정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인식, 또는 노동자들의 음주 습관의 폐해에 대한 지적이나 주점이 공공의 풍속을 해치는 퇴페적 장소라는 인식 등은 이러한 시각에서 반박된다. 즉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르주아의 도덕관념과 규범을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절충주의적 접근은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현실에 보다 다가갈 수 있는 유연한 시각을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보다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맥락 안에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생활수준 논쟁을 들어보자. 유럽의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에 관한 문제는 특히 '산업혁명'이 전형적으로 진했되었던 영국을 중심으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어온 주제이다. 그런데 이 책의 연구자들은 공통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낙관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전반적으로 파악해서-임금과 물가의 평균치에 입각한 판단이 개별 노동자 가계의 현실을 간과하거나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생활수준은 개선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자들(또는 대중)의 삶의 질에 대한 평가가 각각의 기준이나 입장에 따라 다룰 수 있듯이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진리 여부를 넘어선 해석과 의미 부여의 과정이 수반된다.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후 부흥기의 긍정적 평가가 냉전 체제가 붕괴된 이후 비관적 전망으로 바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연구자들의 일치된 의견에는 지구화와 정보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잠재해 있지는 않는 것일까.

덧붙이자면, 불가능한 요구일지도 모르겠지만, 비교사적 분석이 국가별 사례가 아닌 연구 영역 차원-예컨대 산업화 과정, 노동계급의 형성, 노동 문화, 노동조직 등과 같은-에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이를 통하여 19세기 이래 서구 노동운동은 전통적 수공업자, 장인(영국, 프랑스, 독일), 또는 공장노동자(스웨덴, 러시아)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상반된 평가가 실은 노동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시기의 문제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할 수도 있을 것이며, 또는 노동의 도전에 국가와 지배세력이 전향적으로 대처했던 영국과 노동자들의 불만을 체제 나에서 흡수할 통로를 봉쇄함으로써 그것의 혁명적 폭발을 조장했던 러시아의 상반된 사례를 통해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대한 유용한 시사를 끌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교수신문 114호, 1997.6.9)


서평: 유럽 노동사의 비교사적 연구-<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 서평, <<서양사론>> 54호 (1997)
 

                                         정현백 (성균관대, 서양사)
 

1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그리고 스웨덴 5개국의 산업화과정, 노동계급의 등장과 존재양태 그리고 노동계급의 조직화과정을 520쪽에 걸쳐 포괄적이면서도 밀도있게 서술한 책이다. 요즈음 해외에서 잘 알려진 서양사관련 서적들이 국내에 많이 번역되고 있어, 역사학도나 일반독자들이 서양사에 접할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늘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적들이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국가나 시대에 국한되기가 일쑤여서, 중등교육과정의 세계사교육이 부실한 우리 현실에서는 몇몇 나라들의 상황을 비교하여 서술하는 서양사서적의 필요성을 통감하던 차였다.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바로 이런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서론에서 밝힌 대로 약 2년 가까이 진행된 공동작업의 결과로 나온 만큼, 서술 자체가 대체로 일관성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다듬어서, 책 전체의 서술이 견실하게 잘 다져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오랜만에 서양사학계에서 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좋은 연구서가 나온 것 같다.

또한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는 지난 20여년동안 유럽사회에서 진행된 경제사 및 사회사연구의 성과를 폭넓게 소화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의 노동사서술이 조직사나 이념사위주로 서술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노동조합이나 사회주의 정당의 발전사보다는 19세기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세계 전반에 대한 분석, 즉 임금, 노동시간, 작업환경과 노동방식, 주거상태, 가족생활과 가족관계, 여가-와 문화활동 등에 더 많은 비중이 두어지고 있다.
 

2

이 책이 지닌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평자의 입장에서는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책의 서문에서 편자 안병직교수는 "이 책은 이 개별국가들을 하나의 독립된 연구대상으로만 파악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 각각의 발전을 서로 비교한다는 비교사적 관점을 취한다. 비교사적 분석을 통해서 이 책이 의도하는 바는 국가별 발전의 유형화에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서론에서 이렇게 큰 의미를 부여한 것과는 달리 본문에서 비교사적인 분석은 소략하다. 각각의 저자들은 자신이 취급하는 국가의 특성을 잘 정리하고 있으나, 본문의 어느 대목에서도 비교는 시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론에서 비교사적 고찰은 좀 더 심도있게 취급되었어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비교는 가볍게 자나치는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책은 유사한 문제의식에서 각국의 노동계급 형성을 대비시켜 고찰하였다는 지적이 더 정확할 듯하다.(주1)

    이 책은 카츠넬슨의 '노동계급의 형성'의 서술방식과 상당히 유사하고, 이영석교수 자신도 본문에서 직접 카츠넬슨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카츠넬슨의 책보다도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의 비교는 더 소략하다. I. Katznelson and A.R. Solberg eds., Working Class Formation: Nineteenth-Century Patterns in Western Europe and the United State,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을 참조.
특히 유럽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지니지 않은 독자들을 고려한다면, 이영석교수의 글에서는 '최초의 산업국가'인 영국이 지니는 특수성이 조금 자세히 설명되어야 했고, 또한 안병직교수의 글에서도 영국의 노동사에서 다룬 국가간섭의 성격과는 다른 독일 사회국가의 역할에 대한 좀 더 친절한 언급이 필요하였던 것 같다. 마찬가지로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과 노동운동'에서는 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인 노동자문화보다는 특별히 '탈기독교화'가 길게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도 추가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책의 내용과 관련하여 제기될 수 있는 쟁점은 노동사에 대한 접근방식이나 관점이 다섯 편의 논문에서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느냐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60년대말에서 80년대초까지 활발하였던 '신 노동사연구'는 공장노동자에 대한 이전의 강조에서 탈피하여, 그 촛점을 수련공에게로 옮겨갔다. 보다 많은 관심들이 前産業的인 생활방식과 집단심성 그리고 이것의 자본주의적 근대화와의 충돌에 두어졌다. 여기에서는 계급형성( Working Class Formation)의 모델이 노동사연구의 방향타였다. 그리고 여전히 생산관계와 생산수단 등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가족생활, 여가시간 그리고 지역적 단결과 의사소통구조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되었다. 그러나 80년대말, 90년대에 들어와 이러한 '신노동사연구'의 패러다임도 방어적인 국면에 진입하였다. 경제적 토대의 우선성이라는 관점은 서서히 문화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으로 교체되고 있고, 톰슨이 내세우던 인간경험에 대한 강조에도 의문이 제기되면서, 담론이나 언어를 통한 접근이 부상하고 있다. 이제 신노동사연구는 다시 '구노동사연구'가 되어가고 있다.(주2)

    Jurgen Kocka, Suggestions and Debates. New Trends in Labour Movement Historiography: A German Perspektive, International Review of Social History, 1997 (No.42), p.68 참조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에서는 상기한 논쟁들의 수용에 있어 저자에 따라 편차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영석교수는 이미 서두에서 수정론적 해석이나 언어적 접근경향에 대해 언급하고, 이런 문제의식을 일정정도 고려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글의 전체적인 무게중심은 과거의 '신노동사연구'쪽에 가깝다. 안재홍교수의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에서는 노동운동지도부가 선택한 상징적 용어와 함께 담론적 분석이 노동계급의 형성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39면) 이에 비해 프랑스, 독일, 러시아를 다루는 글에서는 오히려 60년대말 이래 신노동사연구의 성과들을 차분히 정리하는 것에 치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서론에서도 책임편자인 안병직교수는 "어떤 구조적 요인에 의해서 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는가"라는 점에 이 책이 치중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결과적으로 깔끔히 정리된 문장들 이면에는 바로 이런 노동사연구의 방향전환과 관련된 기왕의 혼란들이 정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 같다.

이런 문제의식하에서 이 책의 비교사적인 분석이 거둔 성과로 서론에서 지적되는 일곱가지 테제를 검토하는 것은 흥미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첫째로, 산업화의 시점이나 진행속도와 관련하여 여기에서 다루는 5개국은 상이한 발전과정을 보여주지만, "19세기말까지는 산업화를 통하여 이륙의 단계에 진입하거나 이를 완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산업화는 산업혁명, 즉 산업생산의 혁신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을 밟았다는 '점진론'의 입장을 채택하면서, 또한 본문 곳곳에서는 생산기술의 혁신보다는 생산조직상의 변화가 강조되고 있다. 둘째로 19세기의 산업노동력은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요소, 매뉴팩쳐나 광산, 수공업 그리고 선대제하의 분산된 가내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나뉘어 있었고, 영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서는 이 노동자들은 농촌과의 연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로, 노동자내부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19세기를 통해서 이들의 계급형성은 크게 진전되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내부적으로 집단적 동질성을 획득하여 갔다는 것이다. 넷째로, 19세기 동안 노동운동은 대중운동으로 성장해갔고, 이는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대체로 숙련노동자층에 토대를 둔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 지금까지의 여러 공통점과는 달리 노동운동의 정치적 혹은 이념적 성향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고, 국가별 노동운동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경제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혹은 사회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책은 혁명 혹은 개혁등으로 표현되는 노동운동의 이념이나 성향은 노동자들의 의식발전의 정도에 달려 있다기 보다는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에 따른 전략상의 차이로 이해할 것을 권고한다. 따라서 "노동운동의 이념과 실제활동, 노동운동의 지도부와 일반노동자의 의식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 부가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여섯째, 19세기 유럽 노동자 정당이나 노조에서 드러나는 사회민주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의 분열이 지적되고 있다. 나아가서 노동자 정당과 노조와의 관계도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는 독일형, 그 반대유형인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와 독일을 절충하여 양자가 상호대등한 동반자로 서로를 인정하는 세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상기한 '유럽산업화와 노동계급'의 저자들이 자평하는 자신들의 성과에서 암시되듯이, 이책에서는 과거에 주로 진보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제시되었던 노동운동에 대한 일반적 해석들을 누그려뜨리면서, 각 국가에 따른 노동자상태나 노동운동의 다양성이 강조되거나 저간의 논쟁성과들이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동시에 전통적인 노동사가들사이에 합의를 보아왔던 노동계급의 진보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 책의 저자들은 노동계급의 형성과정에서 노동자들은 계급적 동질성을 표출하기는 하였으나, 그 의식은 혁명적이지 않았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52면) 또한 노동운동의 이념은 노동운동이 처한 상황에 따른 전략상의 차이로 이해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혼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평자가 생각하기에 독일, 프랑스, 러시아 노동운동 등에서 나타난 과격한 언어들과 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것이 지도자의 전유물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넓은 대중적인 기반을 지니고 있다. 또한 노동운동이 비교적 실용주의적인 성향을 보였던 영국에서도 노동자들의 의식이나 상징을 분석해보면 거의 종교적이라할 정도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그리 혁명적이지 않았고, 그럼에도 그들은 지도자들의 혁명적인 사상을 '자기 것으로 하기(appropriation)'를 시도하였다는 점사이를 연결하는 어떤 설명틀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이런 분석들은 정태적인 것이 되고 말기가 쉽다. 즉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문화 그리고 의식과 가치체계를 서술할려는 시도가 이 책에서 돋보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런 문화나 의식이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였는가가 좀 더 세심하게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담론분석이나 언어적 접근을 시도하였다면, 이런 연결고리에 대한 해명은 쉽게 달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3

프랑스, 독일 그리고 러시아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을 다룬 글들이 기존의 연구성과를 비교적 평이하게 서술하였다면, 흥미있으면서도 논란의 소지가 많은 것이 영국과 스웨덴의 경우이다. 영국의 경우에는 이미 앞에서 밝힌대로 글의 초두에서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한 개념이 아니며 계급간의 타협과 협조가 오히려 노동사의 지배적인 경향"이라는 수정론의 대두를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어준다. 뿐 만 아니라 산업혁명, 생활수준, 챠티즘, 노동귀족 등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들을 소개하는 것을 통해 영국 노동사 연구의 성과를 풍성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쟁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택하는 입장에 대한 전거제시가 군데군데에서 미흡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뿐 만 아니라 수정론적 해석에 대한 이영석교수의 입장도 모호하고, 또한 이와 관련하여 글의 초두에서 제기한 문제의식이 글의 말미에서는 실종되어버렸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100여 페이지의 지면에 저간의 영국노동사 연구성과를 조리있게 정리해준 좋은 글이라 생각된다.

안재홍교수의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과 노동운동의 선택'은 한국의 독자에게는 흥미를 끌 만한 글이다. 한국과 같은 규모가 작은 국가의 국민들에게는 어떻게 스웨덴과 같은 유럽의 주변부에 위치한 국가가 성공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걸으면서, 동시에 탁월한 사회복지제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는 큰 관심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노동운동이 수행하였던 역할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안재홍교수의 글이 스웨덴노동계급과 노동운동의 역사를 잘 정리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 대한 우리의 (내지는 평자의) 정보부족으로 인하여 많은 의문이 남는다. 왜 스웨덴은 산업화이전에 저개발국가이기보다는 '개발의 가능성이 잠재된 국가'였는가? (364) 왜 기업복지제도가 일찍부터 정착하였고, 왜 가부장적 온정주의가 노사간의 공동체문화로 발전했는가?(370) 왜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수정주의 논쟁에 휩쓸린 여타 유럽국가와는 달리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389) 이런 많은 물음들에 대한 대답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간헐적으로 글 곳곳에서 제시되지만, 평자에게는 전체적인 상이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산업화이전의 역사적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1870년대에 시작된 지각한 산업화는 이미 앞서간 국가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스웨덴 민족국가 형성과정은 어떠하였는자, 부르주아지의 역할은 있었는지 그리고 주변강대국들과의 관계는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어떻게 봉건세력과 부르주아지에 대처할 수 있었는지 등등이 해명되지 않는다면, 스웨덴 노동계급의 형성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은 실현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또한 안재홍교수의 글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담론분석을 노동운동사에 도입하는 문제이다. 이 글은 계급형성이 바로 노동운동의 향방을 결정짓는다고 보지 않는다.

"일련의 역사적 사건이 몰고오는 불확실성속에서(...)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현실을 진단하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떠한 상징적 용어, 또는 노선을 선택하였는가에 따라 노동운동의 성격은 크게 달라진다. 하나의 용어가 상징하는 의미는 포괄적이다.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언술들이 이 용어를 중심으로 일관된 전체, 즉 담론을 형성하게 되며, 이에 따라서 권력의 연계가 구성된다. 물론 이러한 선택은 계급형성이라는 틀내에서 취하게 된다. 그러나 계급형성은 근본적적으로 노동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 내부의 변화라는 매개변수를 통해서 이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339면)

바로 이런 이론적 배경에서 안교수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노동조합과의 대등한 제휴와 '발전'이라는 담론을 스웨덴 노동운동의 성격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한다. 특히 '발전'이라는 담론은 스웨덴과 같은 경제적 후진국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가 분열될 만한 소지를 제거해버렸다는 것이다. (403) 여기에서 의문이 남는 것은 과연 담론형성이 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선택권내에 있는가이다.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행동공간은 이미 주어진 제 조건에 의해 애초부터 제한되었던 것은 아닌가. 물론 안교수도 계급형성이라는 단어를 통해 객관적 조건의 규정성을 인정하는 듯 하지만, 그에게 담론은 훨씬 더 결정력있는 요소인 것 같다. 뿐 만 아니라 이런 주장이 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왜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런 담론을 구성하게 되었는가를 해명해야 하는데, 그에게서 담론구성은 당시의 복잡한 상황들이 초래한 '우연적인 整合'처럼 보인다. 담론분석을 역사연구에 도입하는 것을 배척할 필요는 없으나, 이런 접근의 설명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안병직교수의 '19세기 독일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의 형성'에서는 음주문화에 대한 분석은 장황한 반면, 여타 노동자문화나 여가문화에 대한 분석이 소략하다. 또한 여가문화에서 바로 파업, 노동조합운동 그리고 사회민주당과 같은 노동운동 양상의 서술에 진입하기 때문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노동자의 삶의 존재조건에서 집단행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한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그외에도 또 한 가지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은 사회보험제도가 노동자들의 사회적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레타리아트계급의 일원이라는 노동자들의 연대의식을 확대시켰다는 주장(314면)이다. 물론 독일제국은 사회보험제도에서 봉급생활자와 육체노동자를 차별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연대의식을 어느 정도 강화시켰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의 사회보험제도는 독일 노동운동이 혁명성을 상실하고, 체제내에 부정적으로 통합하는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안교수의 주장은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

평자의 의무에 충실하려다보니 여러 세세한 논평을 곁들였지만, '유럽의 산업화와 노동계급'은 동일한 문제의식하에서 5개국의 노동계급형성을 잘 대비시켜 분석한 좋은 책이다. 공동작업이 성공하기 어려운 풍토인 우리 학계에서 이런 시도는 여러모로 좋은 전범이 되리라 생각한다. 또한 여러 어려움을 노정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을 시작으로 하여 앞으로 보다 본격적인 비교사적인 분석이 진척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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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은 귀족적?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 책,영화 2004/09/10 08:15
http://blog.naver.com/adisabaa/140005693743
노동운동은 귀족적? 언론 왜곡 탓?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을 통해 본 노동운동의 이해
오마이뉴스 윤여동(yazine) 기자   
지난 여름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화시킨 건 자본가도 공권력도 아닌 여론이었다. 파업이 있자 인터넷 게시판엔 '귀족노동자들'을 질타하는 글들로 가득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고, 파리 시민들의 성숙한 태도를 예로 들곤 하지만, 배부른 노동자들의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비난은 오히려 거세지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보수언론의 왜곡과 노동교육에 대한 부재 탓으로 치부하지만 최근엔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프레시안> 관련기사 바로 가기)라는 비판마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면 노동운동은 정말 귀족적이고 왕자병에 빠진 것일까, 아니면 보수언론의 왜곡이 보다 큰 문제일까?

이런 혼란스런 의문에 조금이나마 길잡이 역할을 해주는 책이 있다. 구해근의 <한국노동계급의 형성>(창작과비평사 펴냄)이다. 매우 탁월하고 또 그만큼 흥미로운 이 책은 한국의 노동운동을 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노동계급의 형성에 극히 불리했던 사회문화적 환경

먼저 '노동계급의 형성'이라는 제목에 주목해보자.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E.P. 톰슨의 고전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영향이란 역사주의적 혹은 구성주의적 계급관점이다.

이는 계급의식을 분명히 지닌 실체로서 노동계급의 형성은 생산체제 내의 구조적 위치를 통해 결정된다는 구조적 혹은 결정론적 계급 개념과 대비되는 것이다. 계급이란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나 제도의 영향아래 행위자의 역할을 통해 구성이 촉진될 수도 저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노동계급 형성에 매우 불리했다고 한다. 서구사회의 경우 노동기술을 중시하는 장인문화의 전통, 프랑스 혁명을 통한 변혁적 정치담론의 영향, 정당의 노동계급 지원 등이 노동계급 형성에 도움을 주었는데, 한국사회에는 이러한 요소들이 전무했다.

노동을 천시하는 유교문화적 환경에, 냉전환경의 반공주의는 노동계급 형성에 매우 비우호적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환경을 형성하였다. 또한 한국의 어느 정당도 용공의 낙인 때문에, 친노동적인 태도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쉬기 위해 싸웠던 노동운동

그러면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한국의 노동계급은 스스로를 어떻게 형성해왔을까. 역설적으로 이러한 억압적 환경이 노동계급의 형성을 촉진하는 요소였다.

극도로 열악했던 작업 환경이 노동자들이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투쟁하게 만든 요소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통해 70년대 초반 노동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했는지 알 수 있었다.

1976년에 해태제과 여공들이 정부에 제출한 탄원서는 이를 실제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들은 "하루 12시간만 일하도록 해 주십시오. 일주일에 하루씩만 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탄원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공돌이, 공순이'라는 사회적 멸시의 분위기 속에서 관리자들이 행하는 전제적이고 모욕적인 통제방식이었다. 70년대 한 봉제공장에서 관리자는 "편지는 내 앞에서 뜯어보고 내용을 읽은 다음 가지고 가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은 80년대에 들어서도 차이가 없었다. 현대그룹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최우선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가 생산직 노동자에 대한 회사의 머리길이 규제 철폐였다.

강제적인 아침집합체조로부터 시작하는 공장생활은 군대의 연장 그 자체였다. 따라서, 당시의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구호는 말 그대로 인간답게 대접받고 싶다는 한 맺힌 표현이었지 상징적인 수사가 아니었다.

이렇게 극도로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조건하에서 한국의 노동자들은 교회나 노학연대의 도움에 힘입어 정부의 가혹한 탄압에 목숨을 건 저항을 이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켜켜이 쌓인 분노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폭발하였다. 물질적 목표보다는 인간적 존엄을 목표로 한 폭발이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자신들의 긍지와 인간적 존엄을 보장해줄 수 있다고 믿고 노조 건설을 위한 투쟁에 나섰다. 이러한 정서에 회사와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은 단체교섭을 자주 계급전쟁의 형태로 만들었고 어떠한 양보도 완전한 굴복으로 해석되는 격렬함을 보였다. 이는 분명히 극단적으로 억압적이고 배제적이었던 노동체제의 산물이었다.

노동운동을 둘러싼 90년대의 변화

한국의 노동계급이 하나의 진정한 계급으로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87년 대투쟁 이후부터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경공업 여성중심의 산발적인 모습에서 대공장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조직화된 형태로 전진을 해나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이런 발전을 중단 혹은 후퇴시키려는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현재의 노동운동 상황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변화이다.

먼저 국가와 자본의 대응이 변했다. 노동운동의 전진에 놀란 자본은 강압적인 '전제적 공장체제'에서 동의를 중시하는 '헤게모니체제'로 정의되는 정교한 전략을 구사한다.

노조의 인정을 통한 길들이기, 노동 유연화를 포함한 신경영전략, 기업문화운동, 다물 민족주의와 같은 새로운 이데올로기 캠페인, 보수언론을 통한 경제 악화의 '노동자 책임론' 여론 조성 등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한 노동간부는 "지난 10년 동안, 자본은 완벽하게 준비했고,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우리를 상대했지만, 활동가들이 한 것은 자본과 국가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똑같이 단순한 논리를 가지고 조합원들에게 파고드는 것밖에 없다(298쪽)"고 말한다.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의 분화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IMF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의 분화라는 변화였다. 대기업, 중소기업, 정규직, 비정규직 등의 구조적 균열은 한국의 노동계급을 형성해온 기초적인 동력을 허무는 것이었다.

한국의 노동계급이 급격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구조적 요소는 노동계급의 동질성이었다.(291쪽) 똑같이 시골에서 올라와 기숙사에서 한솥밥을 먹던 여공들에서부터 지리적으로 집중된 공단지역에서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은 모진 탄압에도 똘똘 뭉쳐 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위기 이후 노동계급은 구조적으로 분화되었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파고 속에서 소규모 사업장의 힘없는 노조들은 해체되었고, 힘있는 노조들은 소속 조합원들의 문제에만 매달려도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노동쟁의는 대체로 강력한 노조가 있는 대규모 사업장에서만 발생했다. 다르게 말하면 연봉 몇 천 이상의 노동자들만이 파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기로에 선 노동운동

여기서 저자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비슷한 상황의 브라질이나 남아공과 달리 '사회운동노조주의'를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1987년 전후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노동계급 일반의 광범위한 이해를 드러내고 대변하고자 하지 않았고 도시의 빈민지역운동을 지원하려 하지도 않았다."(287쪽) 즉, 한국의 노동운동은 사회운동노조주의 대신에 사업장 내 문제에만 치중하는 경제노조주의로 국한되었다.

그 이유로 먼저 유신 이후 '제3자 개입 금지' 등 노동운동이 공장문 밖을 넘지 못하도록 강제된 기업별 노동체제가 꼽힌다. 다음으로 브라질과 남아공과 달리 실업률이 매우 낮았다는 점이다. 높은 실업률은 노동자와 비노동자의 경계선을 흐리고 작업장과 지역사회를 연계하는 기제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비인간적 대우라는 작업장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지역의 문제에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노동운동이 이처럼 지역사회문제를 다루지 못한 사실은 역으로 시민운동이 번창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이는 노동계급운동과 중간계급 주도의 사회운동간의 분리를 낳았고 노동운동의 범위를 더 좁게 만들었다.(288쪽)

9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의 변화를 다룬 이 책의 마지막장은 '기로에 선 노동운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성숙한 노동계급으로 성장할지, 협소한 노동조합주의에 머물러 고립된 모습으로 남을지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든지 간에, 한국의 노동계급은 한국 사회를 민주적인 사회로 만드는 데 기여한 그들의 역할로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보수언론 탓만 할 수는 없는 노동현실

사실 파업은 노동자들의 기본권이다. 그런데 노동조합 조직률이 12%대에 머물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에서 파업은 힘센 노조의 특권이 되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파업이 모든 노동자의 기본권이 되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하기보다는 특권을 행사하는 노조에 분노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제는 이를 단순히 보수 언론의 왜곡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천만 노동자'니 '하나되어 싸우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노동계급은 분화되어 있다.

파업에 성숙한 유럽 시민들의 예를 자주 들지만 유럽국가들의 경우 노동조합 조직률이 낮다고 하더라도 단체 협약 적용률이 80~90%가 되는 경우가 많다. 즉, 내가 조합원이 아니어도 노동조합이 싸워 따낸 단체협약의 적용을, 다시 말하면 파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교해서 그동안 한국 사회의 파업은 시민들이 불편하면 할수록 위력적인 것이 되었지만 그 혜택은 파업 노동자들만의 것이었다. 보수언론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입맛에 맞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언론의 공세가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이러한 현실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터넷의 여론을 전부 보수언론의 영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노동운동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는 있다. 그래서 지하철노조는 시민들을 위한 안전운행을 위해 인력 충원을 주된 요구사항으로 제시했고, 다른 노조들도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과 사회공헌기금을 주된 요구사항으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아직 여론에 영향을 줄 만큼의 성과는 없는 형편이다.

'뒤늦은 성장에 때 이른 침체'를 겪고 있다는 한국의 노동계급 앞에는 두 겹의 장애물이 놓여 있는 셈이다. 보다 보편적인 노동자의 이해에 중심을 둔 과제의 설정과 노동운동에 적대적인 보수언론에 대항한 싸움.

그리고 이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한국 사회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처럼 노동운동은 한 사회가 인간다운 모습을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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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헬스의 정당사회학

미헬스의 [정당사회학] | 독서노트 2005/02/14 02:06
http://blog.naver.com/ganndalf/140010254326

어제 먹은 술때문에 오늘 하루를 통채로 잡아먹는 가 싶었는데 겨우 저녁때 눈을 뜨고 그동안 잡고 있던 미헬스의 [정당사회학]을 읽어내려갔다. 설연휴 기간에 읽겠다고 다짐하던 차였는데 그런대로 목표는 이룬 셈이다. 책을 덮고 나서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들을 짧은 글로 옮겨보려고 하는데 머리속만 복잡하고 잘 잡히지는 않는다. 어제먹은 술 탓이기도 할터이다.

 

1.

 

독일사민당이라는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민주정당안에서 어떻게 비민주주의적 경향성과 과두제가 등장하는 가에 대하여 미헬스는 매우 구체적인 자료들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주제일지도 모르겠지만, 민주적 정당이 어떻게 비민주적인 정당으로 바뀌어가는가에 대한 미헬스의 질문은 책이 쓰여진지 백여년 가까지 지났지만 여전히 빛을 발한다. 질문은 낡은 것일지 몰라도 답은 여전히 매혹적이다. 미헬스는 자신의 발견과 이론을 하나의 법칙으로 정립했다. 정당을 포함한 노동조합 혹은 그 이외의 모든 조직형태에서 과두제의 등장과 성립은 하나의 철칙이다. 베버에게 있어 관료제가 근대가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철창(iron cage)였다면 미헬스에게 있어 과두제가 바로 그것이다. 관료제는 과두제의 원인이기도 하다.

 

2.

 

미헬스의 지적에서 흥미를 더하는 것은 과두제를 단순히 지도자와 지도부의 권력욕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과두제를 근대적 질서의 하나로 바라보는 것에서 나온다. 동시에 이것은 대중의 무관심과 방관이 만들어낸 것이기도 하지만 상당부분은 대중의 선택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즉, 대중은 과두제를 지탱하고 선택한다.

 

3.

 

운동과 조직의 전문화는 필연적으로 운동에 엘리트적 요소를 강하게 요구한다. 지식인의 비중이 중요하게 제기되고 '지식'이 '운동'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내 생각엔 운동의 대안이 중요하게 자리매김되면 될수록 운동의 엘리트성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보여진다. 나는 사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운동문화와 운동사회는 다분히 <엘리트적 요소>가 강하게 자라온 사회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중과의 결합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운동에 있어서 대중의 몫과 비중이 점점 상실되어왔다고 보여지는 측면이 존재한다. 대중을 위한 운동일수는 있지만 대중을 경유하지 않는 운동이 존재한다.

 

4.

 

조직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조직에 대한 필요가 조직을 정당화 합리화시키지는 않는다. 미헬스가 말하는 법칙이라는 것을 우리가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조직내에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의 과두제적 요구가 아닌 다른 요구들로부터 오는 다른 법칙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법칙들이 결합되면서 정당의 조직질서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일게다. 무엇이 과두제를 막을 수 있을까. 무엇이 실제적인 대중의 지배를 이룩할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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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읽고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일 읽고 | 다시읽기 2005/05/01 03:18
http://blog.naver.com/rnstkddl/60012384351

한국 노동 계급 형성 연구에서 답해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공장 노동자들이 공순이, 공돌이 처럼

노동자를 경멸하는 문화적인 이미지와

국가가 강제한 산업전사하는

타의적 정체성을 극복하고

노동자로서

자신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핵심적인 질문

 

1. 한국의 노동자들이 어떻게

   문화적 , 정치적 장애를 극복하고

   강력한 노동자 정체성을 만들어 냈는가?

 

2. 어떤 구조적 , 인구학적 조건들이 이러한 과정을 촉진했는가?

 

3.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처럼 놀라운 용기와 열정으로

    가부장제적 권위에 도전하게 만든 공장내의 실존적 경험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가?

 

4. 노동자들은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과 정치의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어디서 문화적, 조직적 자원을 이끌어 냈는가?

 

 

 

 

톰슨의 계급 개념은

구조적 조건에 의해서 계급이 수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보다

인간 행위자의 역활,

즉 계급을 "만들어 내는 " 자아활동을 더 우선시한다.

그가 웅변하듯이

 

" 계급은 자신들의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이것이 계급의 유일한 정의이다."

 

톰슨의 역사주의적, 행위자 지향적 계급 개념은

생산과정과 생산과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와 사회제도의 역활을 강조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물질적 조건을

인식하고 해석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이런 조건에 반응하는지는

" 전통, 가치체계, 관념 그리고 여러 제도적 형태 등으로 구체화되는"

문화적 요소들에 의해 영행을 받는다고 톰슨은 주장한다.

 

 

 

계급은 사회적 문화적 형성(자주 제도적 형태를 갖게되는)으로서,

추상적으로 혹은 고립되어 정의될 수 없고,

다른 계급과의 관계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정의는 시간을 매개로 해서

즉- 행위와 반응, 변화와 갈등속에서- 이루어진다.

 

계급을 말할때

우리는 동일한 일련의 이해와 사회적 경험, 전통,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계급으로 행동할 성향을 가지고 있고,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자신들의 행동과 의식속에서

자신들을 계급적인 방식으로 정의하는,

대단히 느슨하게 정의된 일단의 사람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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