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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과 존중의 연대의식으로 뭉친 G8 반대투쟁

참세상 기고글입니다. ------------------ 애정과 존중의 연대의식으로 뭉친 G8 반대투쟁 약 2주일 간 일본에 다녀왔다. 지난 7월 7일부터 9일까지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렸던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활동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정상회담이 열린 장소는 홋카이도에서도 아주 구석에 있는 토야코라는 호수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윈저호텔이었다. 사진이나 지도로 볼 때는 몰랐지만, 그 호텔은 마치 중세 시대의 천혜의 요새를 연상시키듯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있었다. 멀리서도 잘 보이지만, 사방이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높은 봉우리 정상을 완전히 깎아 만든 곳에 모셔져 있는지라 차량이 없는 일반인들의 접근은 험한 산길을 수풀을 헤치며 올라가지 않는 한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외진 곳에 호텔을 지은 이유는 일본에서도 돈이 매우 많은 자들이 여름 휴양지로 즐겨 찾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예쁜 토야코 호수와 아기자기한 토요우라 마을 그리고 저 멀리 태평양이 바라다보이는 드넓은 원시림의 높은 봉우리 한가운데에 휴양을 온 자본가들과 권력자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자못 궁금해졌다. 바로 그곳에 이 세상에 전쟁과 빈곤 그리고 환경파괴와 차별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확산시켜온 주범들이 모인다고 들었다. 한번 가서 따져묻고 싶었다. 왜 쥐새끼처럼 그렇게 숨어서 작당모의를 하냐고 말이다. 도둑질을 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그런 고립된 곳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이 만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세계로 뻗어가면서 세상의 자원을 어떻게 훔칠 것인가 모의하기 위해 권력자들이 모임을 개최할 때마다 성난 시위대가 항상 따라붙었다는 것은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모임은 이제 토야코 호수 한 켠에 산을 깎아만든 윈저호텔 같은 곳에서 막강한 경찰력을 동원해 보호받지 않으면 열리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2009년 G8 정상회담이 열리기로 예정된 이탈리아 역시 일반인들의 접근이 무척 어려운 어느 아름다운 섬에 회담 장소를 마련했다고 한다. 권력자들이 세계의 민중이 연대해 펼치는 저항운동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이런 사실 자체가 운동의 성과라고 볼 수는 있지만, 그래도 어쩌랴, 저들은 여전히 고립무원의 고도를 마다하지 않고 모임을 개최하고 있으니. 애초 나는 그런 곳까지 쫓아가 밥맛 떨어지는 지도자의 얼굴들 면면까지 봐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G8 반대투쟁을 조직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본 활동가들은 정말 헌신적으로 준비를 했고, 나는 그들의 성의에 감동을 받아 급기야 일본 입국 시 강제로 지문과 얼굴사진 등의 생체정보를 국가에 바쳐야 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본행을 결심하게 됐다. 내 삶에 무지막지한 영향을 끼칠 중요한 사항을 왜 쥐새끼들 몇몇이 모여서 죄다 결정해버리느냐고 따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것은 무한경쟁의 체제에서 힘든 삶을 강요받고 있는 전 세계 민중들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일본 입국은 쉽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2005년 홍콩 WTO 반대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이나 이와 관련 블랙리스트에 등록된 사람들, 즉 반세계화 운동가들, 또는 저들의 말을 빌면 요인의 신변에 위험을 끼칠 수도 있는 잠재적 위협을 가진 테러리스트들의 정보를 이미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아예 입국을 불허하고 본국으로 추방하는 바람에 민주노총 조합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대항국제포럼’에 참여해 학술활동을 하기로 한 학자들까지도 일본 공항에서 열 시간 이상씩 억류되었고, G8 반대활동을 독립적으로 기록하고 보도하기 위해 온 미디어 활동가들도 공항에 붙들려 한참을 심문을 받아야 했다. 집회에서 발언을 하기로 예정된 연사나 포럼 발표자들까지 입국을 불허하는 일본 정부의 강경대응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일본 출입국관리소는 외국에서 온 활동가들에게 회담 개최일인 7월 7일 이전에 일본을 떠나도록 하는 3~5일짜리 임시 체류허가증을 발급하는 등의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회담 시작 전부터 과도한 공권력의 사용으로 비판을 받은 일본은 그야말로 경찰국가의 진면목을 유감 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G8을 반대하는 집회와 행사를 조직하는 일본인 활동가들을 사찰하고 은근히 협박하는가 하면, 모든 집회와 행사에 카메라와 캠코더를 들고 불법채증을 버젓이 자행했다. 3인이 모여 촛불을 들고 간단한 집회라고 할라치면 어느새 알고 달려온 정보과 형사들이 외국인 활동가들의 신상을 모조리 파악해 향후 입국금지 자료로 활용할 터였다. 모든 집회는 3일전에 경찰의 허락을 반드시 받아야 하며, 시작 시간에서부터 끝나는 시간, 장소와 참가인원 그리고 허가되는 행동과 불허되는 행동의 목록이 자세히 적힌 경찰의 방침에 집회참가자들은 따라야 했다. 예를 들어 행진할 때는 4열을 맞춰 행진해야 하며(군대의 사열이라고 받고 싶은 건가?), 대열 중간에 공백이 생길 경우 얼른 앞으로 달려가 메꿔야 했는데, 경찰은 보통 집회참가자의 수만큼 배치되어 바로 옆에서 같이 행진하면서 쉴 새 없이 이래라 저래라 간섭을 하였다. 길바닥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구호를 적는다든가, 건물 옥상에 올라가 전단지를 뿌린다든가, 1차선 이상을 차지한다든가, 경찰과 신체적 접촉을 한다든가 등등 미리 경찰의 받지 않은 어떤 행동도 불허되었는데, 이를 어길 경우 현장에서 연행을 하기도 하지만 집회가 끝난 후 다음날 조직에 책임을 맡은 활동가들을 찾아내 연행하여 구속을 시키는 등의 파렴치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또한 일본은 연행될 경우 구속영장을 청구하지 않고도 경찰에 의해 23일까지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될 수 있으며, 이 기간 동안 변호사를 제외하고는 일절 면회도 금지된다고 한다. 즉 한 번 연행되면 거의 한 달에 가까운 기간 동안 판사의 개입 없이 완전 고립된 상태에서 경찰의 심문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일본에서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없으며, 경찰의 감시와 탄압이 일상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저항의 상상력이 메말라버렸다고 보면 된다. 국가에 순응하는 얌전한 시민사회의 활동은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뿌리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원인을 제거하며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저항적 사회운동이 기를 펴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체제가 만들어지는지 곁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곳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자들은 법을 통과시키고, 새로운 방침을 마련하면서 시민의 자유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기 때문에 반체제의 자유와 권리는 투쟁하면서 지켜내지 않으면 어느새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 신자유주의 국가체제다. 6월 말부터 교토, 오사카, 도쿄 등지에서 크고작은 집회와 행동 그리고 대항포럼 등이 마련되었고, 7월 5일에는 어떤 식으로든 G8 정상회담을 반대하거나 문제제기 하는 모든 사람들이 홋카이도의 중심 도시 삿포로에 총집결해 시위를 벌였다. 여기에 모인 사람이 약 오천 명 정도였다. 오천 명이라면 한국에서 매일 촛불집회에 나오는 사람들 숫자 아닌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몇 달간 일본의 시민사회와 운동권이 발벗고 나선 성과가 겨우 오천 명이라니. 그런데 그렇게 볼 일이 아니었다. 사실 저항적 사회운동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한국도 1-2년 전 자유무역협정 반대투쟁이나 비정규직 투쟁에 만 명을 모으기가 쉬운 형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촛불을 끄기 위해 모든 권력을 총동원해 만든 공안정국이 이대로 이어진다면 앞으로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길거리로 쏟아져나온 만 명의 시민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 오천 명이 모였는데,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집회와 행진을 했다. 빨간색, 검은색, 분홍색, 흰색 등 색깔도 다양했고,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두드리며 행진하는 이, 얌전히 깃발을 따라가는 이, 음악에 맞춰 춤추며 가는 이, 피켓이나 허수아비를 들고 걷는 이, 경찰에 도발을 하는 이,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치는 이 등 제각각으로 보이던 사람들도 ‘G8 반대’라는 구심점에 하나가 된 아름다운 투쟁이었다. 문제는 삿포로에 모인 그 사람들이 모두 토야코 호수까지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정상회담이 열리는 곳까지 따라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려는 골수(!)들은 소수였다. 대부분은 삿포로 시내에 머물면서 포럼이나 토론회를 열거나 집회를 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등의 일정을 짰고, 윈저호텔 주변에 가려는 마음을 먹은 사람들은 대부분 어떤 대가 등을 바라지 않고 낮은 곳에서 묵묵히 운동을 해온 이름 없는 활동가들이었다. 체제의 일부가 되어버린 일본 공산당은 삿포로 집회에 많은 당원들을 출석시켰지만 그들은 토야코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 행진에서는 큰 깃발을 들고 많은 수가 참여해 조직력을 과시했던 어떤 노동조합도 회담장 근처에 가서 활동을 벌일 계획은 없었다. 큰 단체 소속이 아닌 사람들, 또는 느슨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 활동가들, 국제연대라는 이름의 상호부조 이외에는 별다른 자원을 갖고 있지도 않은 풀뿌리 지역 활동가들만이 삿포로에서도 차로 3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토야코 호수 주변에 모여들 고민을 하고 있었다. 회담장 주변은 온통 산지여서 그곳에 반세계화 활동가들이 머물 장소를 마련하는 것은 애초부터 일본 활동가들의 최대 고민거리였던 듯 싶다. ‘천 명’ 정도가 함께 머물면서 낮에는 집회를 하고 밤에는 토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아무리 뒤져봐도 토야코 호수 주변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회담장에서 가깝게는 10km 이상, 멀게는 30km 이상 떨어진 산 속의 몇몇 캠프장에 저항의 근거지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토요우라 캠프와 소벳츠 캠프 그리고 다떼 캠프 등 세 곳이 선정되었다. 이 중 토요우라 캠프는 회담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고, 규모도 가장 큰 캠프장으로 최대 2천 명까지 수용이 가능한 삼림캠핑장이었다. 기본 시설도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시위 전력을 가진 국제 활동가들은 대부분 토요우라 캠프로 가게 되었고, 일본 활동가들은 주로 소벳츠 캠프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리고 목초지에 임시로 마련한 다떼 캠프에도 활동가들이 들어가 총 세 곳에서 회담장을 포위, 압박한다는 집회 전략이 짜여지게 되었다. 이 전략은 토야코 호수까지 내려간 사람들이 많을 경우 유효한 방법이었다. 일본 전역의 모든 경찰이 홋카이도로 총집결한 상황에서 회담장 근처에 어떤 압박이라도 가하기 위해서는 반대행동에 참여한 사람이 최소한 몇 천 명은 되어야 했다. 특히 천혜의 요새처럼 버티고 있는 윈저호텔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산정상으로 뻗어 있는 유일한 도로를 통과해야 하는데, 이곳은 이미 대테러 특공대가 원천봉쇄하고 있지 않은가. 집회와 시위의 자유가 없는 일본의 상황도 문제가 됐다. 회담장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어 물리적 압력을 가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소벳츠 캠프와 다떼 캠프는 경찰이 행진 허가를 내주었지만, 토요우라 캠프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에 대한 행진 허가는 마지막까지 경찰이 내주지 않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G8 정상회담을 막으러 텐트며 코펠이며 25kg 이상 짐을 싸들고 그 멀고먼 토야코 호수까지 무진 애를 쓰고 갔다가 경찰의 봉쇄로 캠핑장 정문을 나서지도 못한 채 산 속에 갇힐 뻔한 상황이었다. 결국 토요우라 캠프에서도 행진 허가가 나긴 했지만, 경찰의 그 허가사항이란 것이 참 웃긴 것이었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로는 행진을 할 수 없고, 산길을 돌고돌아 20km를 걸어가면 도착하는, 회담장에서 5km 떨어진 한적한 마을까지만 행진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토요우라 캠프에 간 사람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허가된 것 같았다. 토요우라 캠프에 도착한 첫날, 이 문제로 주로 국제 활동가들과 일본 활동가들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었다. 즉 일본 경찰이 허가된 경로로 20km를 넘게 걸어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6시간을 걸어봤자 회담장 근처에는 가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그렇게 해야 하나, 차라리 다른 방법을 동원하면 안되나. 이런 주제를 놓고 새벽까지 이어진 전체모임에서 결국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다. 직접행동을 하자는 의견과 일본의 정치적 상황에서 경찰이 허가한 행동 이외에 다른 행동을 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되었다. 몇 백명이 머리를 맞대고 몇 개 언어로 통역을 거듭하며 합의를 내려고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일부는 아침에 예정된 행진 코스로 행진을 시작하고, 다른 일부는 좀 시간이 지난 뒤 다른 행동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나 경찰은 다른 행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경찰과 마찰을 일으켰다가는 경찰과의 (강요된) 합의를 어겼다는 이유로 애꿎은 일본 활동가들만 모조리 구속될 판이었다. 토요우라 캠프에서는 일부가 행진을 하고 일부는 경찰과 대치하다가 첫날이 마무리되었다. 소벳츠 캠프와 다떼 캠프에는 예정된 코스에 따라 행진을 했다. 회담장 가까이 다가가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행진의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또한 온갖 언론사의 기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G8 정상회담의 문제점을 행진을 통해 압축적으로 알리는 것도 행진 이유가 되었다. 7월 5일 삿포로 집회에서 사운드 데모를 하다가 부당하게 연행된 DJ들과 트럭 운전사의 석방을 요구한 것도 토야코 호수를 둘러싸고 진행된 행진에서 주요한 이슈였다. 캠프장에서의 첫날이 지나자 문제는 더욱 명확해졌다. 저들이 교묘하게 마련해놓은 윈저호텔 근처로 바짝 다가가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회담장에서 최대한 가까운 곳에 접근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경찰국가가 된 일본이 어떤 식으로 시민의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안보라는 이름으로 어떤 식으로 인권침해를 자행하고 있는지 알리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하게 되었다. 애초에 경찰의 저지선을 넘어 회담장으로 접근해 펼침막을 펼쳐보이거나 ‘호텔 인간띠 잇기’ 등의 꿈을 꾸었던 활동가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좌절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세상을 열망하며 1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 백명의 사람들이 3일간 캠핑장에 모여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그곳에 모였던 이유일 수 있으니 말이다. 윈저호텔에 다가가 이명박이나 부시, 후쿠다 총리 같은 자들의 역겨운 얼굴을 보는 것보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나와 같은 꿈을 꾸며 비슷한 모습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포옹하며 며칠을 같이 보내는 것이 훨씬 즐겁고 행복한 일임에는 틀림 없어 보였다. 쟤네들은 지들끼리 스스로 고립시키라고 하지 뭐. 우리는 이번에 이곳에 모여 다시 한번 부자들만의 세계화를 멈추라고 경고를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아가고 있었다. 찐 감자와 주먹밥으로 점심을 같이 먹고 20km 등산을 하며 새까맣게 탄 얼굴로 서로 활짝 웃어주는 사람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우정이랄까 아니면 정감어린 무엇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연대라는 두 단어로는 세밀하게 표현하기 힘든, 수평적이고도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집단의 일부이자 뚜렷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그런 느낌이었다. 2001년 외환위기로 국가경제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아르헨티나의 민중들이 스스로 자치운동을 벌이며 삶을 복원하는 과정도 그런 느낌을 민중들이 공유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마리나 싯트린Marina Sitrin이라는 사람은 ‘Horizontalism’이라는 책에서 현지 풀뿌리 주민들의 생생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지난 몇 달간 진행되고 있는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처음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즉 나에게 중요한 어떤 문제를 남이 결정해버리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어 해결해가려는 참으로 지난한 과정에 온몸을 내맡긴 사람들만이 서로 느낄 수 있는 애정과 존중의 연대의식 말이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낯선 이방인이 아니라 따뜻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반가울 수 있는 힘 말이다. 일본에서 만난 많은 활동가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그런 느낌, 그리고 그런 느낌이 가능해진 배경이 되었던 촛불집회와 길거리 행진에 대해 설명을 하기 위해 애를 썼고,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나의 이야기에 공감을 하는 사람들이 스페인에, 프랑스에, 홍콩에, 미국에 그리고 일본에도 있었다. 애초 일본 활동가들은 세 개의 캠프를 조직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캠프에 모든 사람이 몰려 있을 경우 쉽게 말하면 ‘몰살’되기 십상이고, 또한 캠프를 두 군데, 세 군데로 나눔으로써 탈집중화된 투쟁을 할 수 있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었다.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모이는데 이것을 잘만 하면 커다란 힘으로 승화시켜 G8 정상회담에 직접적인 압박을 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토야코 호수에 모였고, 그런 가운데 다시 캠프를 세 군데로 나눔으로써 우리의 힘은 더욱 분산된 역효과도 있었다. 회담장 가까이 간 사람들은 대부분 아나키즘과 자율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탈집중적 기획을 한 것은 당연했지만 어떻게 보면 ‘탈집중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이런 우려를 나만 느꼈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둘째날의 행동이 끝나고 모인 사람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세 캠프가 결합해 마지막 행동을 하자는데 동의했다. G8 정상회담은 우리가 가서 막지 않아도 이미 각국 자본가들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 때문에 합의를 내지 못하고 폐막되고 있었다. 홋카이도는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환경이 아름답고 생태계가 잘 보존되고 있는 곳이어서, 이곳을 회담장소로 잡으면서 일본 정부는 ‘에코’라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등 아름다운 생태계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대해 각국의 합의를 이끌어내기에 ‘에코’는 가장 효과적인 선전구호였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 자본가들은 ‘에코 마케팅’을 하지 않고는 제품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모든 제품에 에코를 내세우는 형편이 되었다. ‘이 제품을 사면 환경이 보호된다’는 문구가 광고에 한 두 줄 포함되는 것은 당연해서, 이제 일본에서는 에코라는 것이 운동권의 구호가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가치로 변질되고 말았다. 몇 년 전 한국에서 유행하던 ‘웰빙’이 일본에서 지금 에코가 된 셈이다. 그래서 어떤 활동가는 집회에 나가 큼지막하게 ‘에코 반대’라고 써붓인 피켓을 들고 내내 행진을 하기도 했다. 일본 정부가 그렇게 에코를 내세워 2012년으로 마감이 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해 2050년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환경정책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고갈되는 석유와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개발만이 답이라고 여기는 자본가 정부들이 에코의 가치를 위해 산업에 제한을 가하자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런 성과를 이루지 못하고 각국의 정상들이 샴페인과 산해진미를 즐기던 7월 9일 세 군데 캠프로 나뉘어 있던 모든 사람들이 마침내 토야코 호수 저 너머로 윈저호텔이 바라다보이는 곳에 모여 신나는 행진을 벌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같이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삿포로에 모두 모여 행진하던 사람들이 며칠 간 다른 캠프로 헤어져있다 다시 상봉하는 순간은 박수와 환호성이 가득했다. 경찰은 여전히 귀찮게 굴면서 연행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 골칫거리는 되지 못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로 다시 돌아왔지만, 여전히 싸움은 진행형이다. 7월 5일에 사운드 트럭을 몰다가 연행된 운전사와 그 트럭 위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춤을 추며 행진을 할 수 있게 음악을 틀던 DJ 두 명이 아직도 일본 삿포로 중앙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다. 이 친구들의 석방과 집회 시위의 자유를 위해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에서 같이 촛불을 들고 행진을 했다. 앞으로도 우리는 어디에 있건 다시 만날 것이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억압을 가하기 마련일테고, 나에 대한 억압은 나와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억압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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