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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6
    총연맹의 봉하마을 노무현 집단조문 결정을 보며(3)
    먼동

총연맹의 봉하마을 노무현 집단조문 결정을 보며

당신들은 마치 당연한 일이란 듯이 '조직'차원의 '조문'을 결정하였습니다. 그의 사망일에는 누구신지는 모르나 '애도'와 '평화적 투쟁' 또한 설득하려 한 바가 있지요. 아무리 '노동조합'일 지언정 계급 대중조직에 몸을 담고 있는 당신들입니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대중에게 자본가계급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와 소부르조아적 낭만의 노예가 되기를 주문하고 있습니까. 자본가계급의 하수인에 대한 조직적(!) 조문을 결의,결정할 만큼 지금의 정세를 한가히 보고 계십니까?

 

굳이 '역사성에 기초한 평가'를 들먹이려 한다면 아직도 이땅에는 아주 예전의 노무현을 기억하는 매우 많은 노동자가 있고, 이미 자유로운 평가들을 하고 있을 것임을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이유로 상대를 비난하고 무시하거나, 혹은 특정의 감정이나 행위를 강제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계급적 시각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림사건때의 노무현, 87년 이후 노무현으로부터 성과와 한계, 긍정과 부정을 같이 보며 엄밀히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저 또한 87년 전두환 군사파쇼의 발악을, 6월 민중항쟁의 거리를, 노동자대투쟁의 감동을 기억합니다. 이후 노태우와의 지긋지긋한 싸움을 기억합니다.  일년 내내 단 몇 미터를 더 확보하기 위한 전투대오내의 긴장감과 적의 무자비한 폭력들을 아직은 몸으로 기억합니다.

 

그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인간 노무현의 야망과 정치적 포부가 아니라 이름없이 죽어간 광주노동민중열사들의 얼굴들, 문송면, 김세진, 이재호열사의 죽음, 89년 피떡이 되어 물에 떠오른 이철규열사의 시신, 영안실벽을 깨고 들어온 백골단에게 빼앗긴 박창수열사의 시신, 강경대, 김귀정, 김기설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전쟁이후 30여년만에 대명천지로 뚫고 나온 남한노동자계급의 투쟁과 전노협의 깃발을 보는 감동과 희망입니다.

 

89년 비록 지배계급의 쇼 일지언정 5공청문회로 투영된 민중들의 관심과 열망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속의 노무현을...기억합니다. 90년 그렇게도 증오스러웠던 민자당, 그 야합에 반기를 든 정치행위를 그가 했음을 기억합니다.'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던 그도 말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회상'이란 이름의 관념은 계급별로, 현재의 사회적 존재에 따라 적나라하게 다른 것입니다.

 

웬만한 전쟁의 몇갑절이 넘게 죽어가는 산재사망자들에게...

삶의 발자욱들, 사랑하는 이들을 회상할 단 몇 초의 찰나조차 빼앗긴 채 불길속에 살해당한 철거민들에게...

노무현표 고용허가제 덕택에 죄인처럼 포복하며 맞아가며 살아남아야 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세계최장의 시간과 초고강도의 노동을 자본가에게 갖다바치며 IMF후 3년간만 갑절 이상, 지난 10여년간 몇 갑절의 착취율 상승 속에 고통을 강요당해온 남한 노동자계급에게...

그리고 비정규악법 아래 고통스런 하루하루의 노동일을 견디어가는 남한 일천만 비정규노동자에게...

 

그 '회상'...이란 놈은 이제 아예 기억하려 해도 잘 떠올려지지 않는, 그런 것이 이미 되어 있습니다.

 

새삼스레 소부르조아적 낭만의 창으로 87년을 회상하고, 부르조아 정치안에서 '지역주의에 도전한 호기'를 상대적으로 평가해주고 싶다면 제발 개인별로 알아서 하십시오. 거기까지만 할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조직이 결의한 집단조문'의 정치적 의미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당신들이 내린 이 결정은,  그러나 당신들이 지각하기조차 힘들지 모를 무거운 사회적, 역사적 책임이 따르는 정치적 행위입니다.

 

5말6초 투쟁일정의 조정에 전술적 고민이 있었을 수 있음을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 '전술적인 숙고'속에 기어이 '집단조문'조차 그만 포함시켜 버렸습니까!

 

적대적 계급사회가 양산하는 모든 죽음들은 비극입니다. 축적의 광기와 경쟁의 압박속에 목매달아 자살한 자본가의 죽음인들 비극이 아닙니까. 역사 속에 무수히 있었던 지배계급 내 정적에 대한 숙청도 비극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도, 삶도 노동자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피로 써온 역사가 평가하는 것이리란 믿음을 아직도 갖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굳이 당신들이 평가하려, 또 그 평가를 강제하려 합니까. 부디 누구든 그 앞에 그저 겸손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종태열사 영정의 눈빛이 너무도 외롭고 고되보이는 밤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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